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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고린도전서 2:1-5/ 그리스도인의 힘의 신비 [수요]
  • 조회 수: 1117, 2013.04.10 16:50:57
  •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성공하는 힘의 원리’ 라는 책에서 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힘은 일직선일 때에 위력이 있습니다. 구불구불 갈 지(之)자 걸음을 하면 승리하지 못합니다. 기둥으로 말하면 곧은 기둥이라야 합니다. 굽은 기둥은 쓸모가 없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직선적으로 사는 사람이 성공에 가깝습니다.

     

    둘째, 힘은 단순한 가운데 있습니다. 너무 복잡하면 힘이 흩어지고 맙니다. 셋째로 힘은 결정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이럴까, 저럴까 하는 동안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다시는 선택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는 결정적인 상태에서 힘이 있습니다. 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으면 전혀 힘이 없습니다. 뒤돌아보지 말고 결정적으로 나가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진리와 정의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기에 선한 일에 강할 수는 있어도 불의한 일엔 강할 수가 없습니다. 선해야 하고 의로워야 하고 이타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나름대로 인류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라는 명분을 세워놓고 나가면 힘이 있습니다. 늘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양심이 그를 성원해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역시 자기를 성원해 주지 않음을 그는 압니다. 하나님도 자기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틀 전에 영국에서 메기가 별이 되다.... 라는 뉴스가 대서특필이 되었습니다. 메기는 한 때 영국의 수상이었던 대처의 애칭이며, 별명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역사에 있어서 처칠 다음으로 영국을 구원한 위대한 정치가라는 찬사가 따라 다닙니다. 영국 노동당이 권력을 장악하여 복지만능주의로 영국을 중병환자로 만들고 IMF에 구제금융의 손을 내미는 수치를 당한 대영제국을 다시 회복시켜 강한 영국을 만들고, 서구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번 소득만큼만 써야 한다며 자녀들의 무상급식...등과 같은 복지정책들을 거두어들이고, 이를 대항하는 노동조합과 싸웠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처는 일반서민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심지어는 자신과 동갑내기인 여왕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을 살려내야 한다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그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겼고 모든 정치인과 국민들이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었습니다. 여러분... 정의감, 이타심이 있으면 결국은 이기게 되어 있고, 이기적인 목표들은 결국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힘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결단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며, 3년 동안 아라비아 사막에서 기도하고 수양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사도된 지 약 10년이 넘었습니다. 10년 동안 복음을 전했기에 그에게는 지식의 힘이 있고, 믿음의 힘이 있고, 전적으로 위탁하는 헌심의 힘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다 경험의 힘까지 있었습니다. 사람이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면 주저하게 되는데 그는 10년의 경험의 힘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소위 바울에게는 힘의 요소가 다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처절하고 나약한 그의 인간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왜 바울이 나약해졌습니까? 본문에서 암시한 대로 자기 의지, 자기 지혜, 자기 경험, 즉 자기의 어떤 것에 의지하려고 했을 때 약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다 끊어버린 줄 알았는데 끊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완전히 죽지 못했고, 다 부정해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답니다. 그래서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 나은 부스럼도 긁으면 피가 납니다.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래서 약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 갔습니다. 아테네는 헬라의 수도로서 철학의 본산지였습니다. 바울은 원래 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생 처음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살았던 철학의 본산지에 도착해 많은 학자들과 변론하니 옛날 솜씨가 나왔습니다. "너희가 모르고 섬기는 하나님을 내가 알게 하노라" 하며 한바탕 연설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는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지만 아테네에서는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별로 핍박도 없었는데 그는 실패하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전도할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져 천막이나 치면서 지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성령이 바울에게 책망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잠잠하느냐? 이 성에 구원받을 자가 많다. 담대히 말하라." 그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옛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바울은 권력이나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약해졌습니까? 여러분, 병이 났다고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신이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해질 수도 있습니다. 환난이 사람을 더 강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환난에 무서워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더 담대해지고 강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약해졌습니까? 문제는 자기 신뢰입니다. 자기 교만, 자기 지혜, 즉 자기라고 하는 문제가 나를 이렇게 괴롭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깊은 고백을 깨달아야 합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혈기가 다시 나오고 다 없어진 줄 알았던 자가 교만, 자기애가 그대로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남아 있는 한 절대로 강할 수도 없고 지혜로울 수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에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일에, 자기를 부정하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부정 없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 언젠가는 내가 나를 믿는 것인지 예수를 믿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27에 "내 몸을 쳐서 나를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쳐서 자기를 다스리는 일에 패하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멀리 바라보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십자가를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에 박혔다는 얘기입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례 지낸 것입니다. 아직도 무엇인가 남아 있습니까? 그러면 근심 속에 있어야 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제3의 결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1의 결단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고, 제2의 결단은 전 생을 다 복음을 위해 바치는 결단이고, 세 번째 결단은 오늘 본문대로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만 알고 십자가만 높이고 십자가만 믿고 나갈 때 여기에 바울의 힘의 신비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속에서 힘의 신비를 깨달았습니다. 최고, 최강, 최대의 능력을 십자가 안에서 찾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4에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했고 생각지도 않기로 하고 십자가만 의지하는 제3의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 길이야말로 의롭다 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로서는 자기를 부정할 길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만이 내가 나를 이길 수 있고, 의의 보증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최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로 보증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강하게 되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미움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시기심과 탐욕은 사람을 미련하게 하지만 사랑은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힘의 신비를 체험한 바울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십자가의 신비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를 이길 수 있고, 나를 죽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에 죄인이면서 의인으로 사는 영광의 신비를 발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할 때 오직 십자가만을 전해야 구원의 역사가 나타남을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의와 진리의 승리, 영원한 승리는 십자가에 감추어진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이기는 것이고, 그가 나로 하여금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실패한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이 실패를 완전히 시인하고 오직 십자가로 다시 무장하여 승리를 향한 도전이 이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을 계속 사랑해 주시고 오늘도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실패의 연속으로 살면서도 또 무슨 성공이 있을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혹은 세상 것에 대하여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고 십자가가 주시는 신비로운 능력에 의하여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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