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가지 고향 히브리서(11:13~16)
  • 조회 수: 146, 2021.12.22 11:15:09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명절은 고향이 생각이 나는 날입니다. 고향을 찾아가지는 않아도 고향이 그리운 날이 이 명절입니다. 이처럼 고향을 생각하고 찾기도 하는 것은 고향이라는 곳이 단순히 지명이 아닙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광주라고 하는 지명이 아닙니다. 고향이라는 곳은 역사고 숨결이 있습니다. 꿈이 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의 고향은 어떠해야 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찾아가는 고향입니다. 




    오늘 같이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는 ‘귀성전쟁’ ‘민족대이동’이 있는데... 올해도 1,400만 명이 고향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향을 가고 싶어도 못가는 북한실향민들도 있고 개발 때문에 고향이 없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용철시인의 ‘고향’이라는 시에 보면 

    ...고향은 찾아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데 

    ...마을 앞 시내도 예 자리 바뀌었을라 

    ...고향은 이제 찾아 무엇 하리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 생각 

    ...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찾아감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이 고향을 찾는 이유는 3가지가 있습니다. 




    1. 귀소본능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들에게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소본능은 연어나 진돗개, 비둘기 같은 짐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 그리워지고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다 귀소본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향수병(home-sick)이 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향수병이 있는 가하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적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2. 나그네 본능입니다. 

    어디론가 가고 싶은 욕망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설과 같은 명절같이 쉬는 때에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3. 안식본능입니다. 

    쉬고 싶은 욕망입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4. 영접본능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것을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4가지 본능, 귀소본능, 나그네본능, 안식본능, 영접본능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찾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자란 고향은 나의 본능을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구원사역을 시작하면서 고향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에 대한 본능도 있으셨겠지만 내 고향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전하고 병도 고쳐 주려고 가셨다가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네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오늘의 모습을 보지 않고 과거의 것, 나쁜 것을 기억해서 쫒아 내지 않습니까? 우리 삶속에서도 악습이 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모르는 곳에는 진정한 의미의 고향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모하는 고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고향으로 죽어야만 갈 수 있는 고향입니다. 16절을 큰 목소리로 같이 보겠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유치원에 있는 아이가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어요?” 

    “그럼. 있지” 

    “그럼 하늘나라가 좋은 곳이에요? 나쁜 곳이에요?” 

    “좋은 곳이란다” 

    “그럼 목사님이 하늘나라에 가보셨어요?” 

    “아니 안 가봤는데“ 

    “그럼 어떻게 아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어요? 이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간 사람 중에 한사람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단다.”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고향, 죽어서 가는 고향 하늘나라임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아프리카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은퇴를 하여 배를 타고 뉴욕 항구에 도착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을 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감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환영 인파는 미국의 유명한 비행사 린드버그가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을 성공을 축하하는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것은 옳은 것입니까? 선교사는 하나님께 섭섭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목숨을 걸고 한 평생을 복음을 전하는 일이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한 일보다 못합니까? 

    이때 하나님은 이 선교사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충성된 종아! 너무 속상해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돌아 갈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린드버그가 환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 환영을 할 것이다. 그때는 너희를 환영하기 위하여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고 먼 저 천국에 온 사람들이 마중을 나갈 것이며 내가 직접 너희들의 손을 잡고 환영할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고 있으라.???? 




    주를 위해 사는 것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가 힘듭니다. 대우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를 위해 충성한 성도들에게 상을 주시고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고 주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주의 종들이 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어렸을때 저희 아버지께서 오늘 불러 주셨던 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가정예배 때마다 이 찬송을 부르면 그렇게 좋더라구요. 여러분도 가정예배 드리시면서 이 찬송으로 은혜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기쁨이 생깁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넘치시기를 다시 한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인데요, 만들어 가는 고향입니다. 




    김상진의 노래가운데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다”라는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을 주고 고향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도 이 땅에 진짜 고향을 만들어 가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갔던 것도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금의환향은 없습니다. 

    나이 들면 고향에 돌아가 집짓고 편히 살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꿈은 하나님의 약속.....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다 3장 20절을 보게 되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다면, 아니 하늘의 본향을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나라, 내 가정이 하나님 나라, 그리고 우리교회가, 이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진짜 고향입니다. 진짜 우리의 이상을 충동시켜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그 고향에 있어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만들어 가야 하는 고향은 어떤 것입니까?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1)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창 나이에 실직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의논하여 시장에 조그만 야채가게를 내고 장사를 하는데 그런대로 장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직장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상처가 남아 있었습니다. ‘나는 실직자다! 나는 밀려난 실패자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초등학교 4학년짜리 딸아이가 가게에 찾아와 아빠에게 예쁜 봉투를 하나 건넸습니다. 

    “이게 뭐니?” 

    “아빠 나중에 보세요.” 

    궁금해진 아빠는 딸이 나간 후 그는 쪽지를 꺼내어 천천히 읽었습니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좋은 선물은 못해 드리지만 언제든지 쿠폰을 사용하시면 정성을 다해 드릴께요. 힘내세요. 정말 사랑해요. 아빠의 사랑하는 딸 올림” 

    그리고는 그 밑에 네모난 칸이 여러 개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각각 이렇게 쓰여 져 있었습니다. 

    “10분짜리 안마쿠폰” 

    “구두 닦는 쿠폰” 

    “심부름하는 쿠폰” 

    “노래해드리는 쿠폰” 

    “뽀뽀해드리는 쿠폰...” 그리고 밑에 한 줄 더 붙여 놓았습니다. 

    “이 쿠폰들은 딱 한번만 사용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기분 좋으면 두 번도 해 드릴께요” 

    그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여보. 난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부자였구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세상은 나를 실직자로 보고.. 나 역시 실패자라고 느끼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래도 내 딸들은 나를 아버지로.. 가장으로..... 본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한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정이 고향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빨리 가보고 싶은 곳은 진짜 고향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사람이 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돈 떨어지고 친구들 다 떨어지고 흉년에 몸에 병까지 들자.. 아버지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사랑으로 맞이합니다. 

    “아버지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나를 품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그때 이 아버지는 이 아들을 일으켜 세워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신발을 주고 새 가락지를 끼우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면서 동네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이 아들은 잃어 버렸다고 다시 찾은 내 아들입니다.” 라고 이렇게 하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은 차별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항상 얼마나 가졌는지, 못 가졌는지에 대해서 우리를 평가를 합니다. 성공이냐? 실패냐에 따라서 우리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따라서 대우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성공한 교회, 실패한 교회에 대해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르신 분이십니다. 세상이 다 나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지 않으시고 내 사랑하는 내 딸아, 내 아들아라고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간음하다 걸린 여인을 향해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하셨지만 예수님만은 비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나도 사랑해서 만드신 그 하나님의 창조된, 피조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 가정 속에서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말을 하다가도 말이 안되면 “옛날에 네가 그랬잖아, 이랬잖아” 이래서 상처에 또 상처를 주는 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가정입니다. 과거의 상처만 들춰내는..... 여러분 그 상처를 들춰내지 않아도 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아픈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의 입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뀌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사랑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딸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난하고 못먹고 살면서 찬밥, 더운밥을 가리냐”는 말을 가장 싫어합니다. 거지들도 더운밥이 맛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곳이 천국이고 그런 고향을 만들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힘을 얻는 것입니다. 




    거지를 볼 때에도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 한센시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것도 사랑이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런 환자에게는 손을 안대지만..... 사랑으로 보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병자로 보지 않으십니다. 눈먼자의 눈을 만지시며, 귀먼자의 귀를 만지시면서... 쫓겨나는 아이들을 품에 안으시면서....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동냥이 아니라 꽃을 주니까... 나를 여인으로 여겨 주셔서 감사! 거지의 손을 잡으며 돈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하니까... 나를 사람으로 대해 주셔서 감사! 했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이 회복이 되는 곳이..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은 뭐라 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아내를 아내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고 효도하라 

    자식을 인정하고 노엽게 하지말라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어찌 아내뿐입니까? 강한 것 같은 남편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들도 친정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먹을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딸로 보니까... 아내라는 짐도, 어머니라는 짐도 다 벗어던지고.... 오직 딸로 보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딸로 사랑 받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서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교회와 가정을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울에 사는 아들의 집을 찾아온 아버지가 아들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한 귀퉁이 자투리땅에 동네사람들이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는 것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환경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경고문도 붙여 놓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음날 시장에 나가 호미를 사왔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를 버리고 돌을 골라내어 텃밭을 만들었습니다. 그 텃밭에 상추를 심고 고추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상추가 자라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이와 붓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상추가 필요하신 분은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고추가 필요하신 분은 양 것 가져가십시오」라고 크게 써놓았습니다. 상추가 파릇파릇하게 크기 무섭게 따가는 상추, 얼마나 동네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동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당신이 언제가 저희 곁에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나.”라고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산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함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의 사랑은 나누어 주는 사랑입니다.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입니다. 몸을 내 주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속에 이런 예수님의 사랑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말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이 우리가 만들어 갈 고향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3년 동안 배웠지만 그들은 항상 예수님이 십자기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 무엇했습니까? 네가 높으냐? 내가 높으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선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이 안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실천은 더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언제 가능했습니까? 

    성령을 받으니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성령을 달라고 기도를 한때 성령 하나님을 간구하게 되고 그 성령이 충만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교회는 빈부차를 문제 삼기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갔습니다. 우리 이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라구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양극화는 이조시대에 더 심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초대교회에는 더 했습니다. 지금은 신분에 자유가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양반과 천민, 상민이 있었습니다. 양극화가 문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도울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하면 영원히 문제는 안 풀립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세상적인 정치적인 논리로, 이념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되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다고 무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자기의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평준화하는 공산당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빈부격차를 인정을 합니다. 빈부차로 싸우지도 않고 투쟁도 하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단하나... 권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를 지고 너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예수의 피로 맺여진 형제, 자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것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서로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희생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기도를 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하셔서 내 눈이 하나님의 눈이 되게 하시고 내 삶이 주님의 삶이 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오늘 일가친척들을 만났고, 만나시기도 하실 것이잖아요? 여러분 좋은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세배하면 덕담 많이 하시잖아요. 칭찬들 많이 해주세요. “여태 넌 그러구 사냐?”이런 말하시지 마시구요. 

    만남이 있다는 말은 나눔이 있고 서로가 힘이 된다는 말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만나는 순간은 아이덴티티(Identity).. 동질성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으로.. ‘너와 나는 한 혈육이다!’ ‘하나의 뿌리다!’ ‘한 가족’ 이라는 동질성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생깁니다. 

    그렇죠? 같은 학교를 나오고 같은 고향사람이라면... 동지를 얻은 기분이 들잖아요! 하물며 형제자매는 더 하지요 

    만나면 힘이 될 수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고향입니다. 반대로 만나면 싸우고 원수지고.... 힘을 빼는 공동체는 문제가 있습니다. 




    칭찬 폭격 

    남아프리카 잠비아의 북부 고원지대에 바벰바족의 특징은 범죄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는 평화주의자들이예요. 배워서도 부자라서도 아닙니다. 




    바벰바족은 어쩌다 죄 짓는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이 기발합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정말 좋은 방법으로 해결을 한다는 말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마을 한복판에 있는 광장에 세웁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일을 중단하고 이곳에 모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죄인을 중심으로 둘러섭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일반적으로는 죄인들에게 정죄를 하고 비난을 하고 매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는 일... 사형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바벰바족은 전혀 다릅니다. 

    죄인을 둘러서서 마을 사람들이 외치는 말은 정죄나 비난하는 책망의 말이 아니라.... 칭찬입니다.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을 떠 올리며... 그의 장점, 선행, 미담들이 하나씩 말을 합니다. 




    이 때, 과장이나 농담은 일체하지 못하고 아주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를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 법정은 검사도 없고 판사도 없습니다. 오직 변호사만 수백 명이 모인 법정입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칭찬의 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한마디로 ‘칭찬 폭격’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 폭격은.. 죄를 짓고 위축되어 있는 사람을 회복시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이웃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눈물로 다짐하게 만듭니다. 




    다 했다 싶으면 이 사람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엽니다. 죄인이 이제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바벰바족 마을에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닙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비난이나 정죄가 아니라 칭찬입니다. 이렇듯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고 좋은 점을 찾아 칭찬을 해 주는 것이야 말로 그 공동체와 구성원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프리카의 미개종족도 그렇게 사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사는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정말 가고 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나라, 그런 고향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1.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


    세 가지 고향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은 벌써 고향이다. 고향의 하늘, 들판, 냇가, 뒷동산, 소꼽친구들, 그리고 덩그렇게 고향을 지키는 정든 고향 집.... 이렇게 명절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소중함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고향은 늘 그리움이다. 고향은 따뜻한 어머니의 치마폭이다. 인자하신 아버지의 얼굴이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이 피는 사랑방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향 가는 길은 순탄하지 하지 않다. 어린시절 고향은 대체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버스터미널에 길게 늘어선 구불구불한 고향 행렬은 뱀 꼬리처럼 길었다.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은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있었다. 시외버스 안은 콩나물 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향이 가까워지면 고향집의 굴뚝에는 하얀 연기가 마중을 나왔다. 지금 기억으로 아버지는 명절만 되면 가마솥에 되지 고기를 푹 익혀서 따뜻한 국물과 함께 내 놓으셨다. 그 국물에 소금을 넣어 후룩 마시면 고향을 마시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런 맛을 찾을 수 없다.  아 그 맛의 그리움이여!   




    요즘은 개인 승용차가 있어서 과거의 그런 추억은 없다. 그 대신 고향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다. 밀려드는 차량들 때문에 고향 가는 길이 복잡하다. 문득 꽉 막혀 있는 고향 가는 길을 보노라면 회귀본능이 강한 연어 떼가 생각난다. 연어는 산란기가 되면 예민한 후각이 있어 태어났던 모천(母川)으로 돌아온다. 수천 수만리 바다에서 살다가 정확하게 고향을 찾아와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친다. 생명의 비밀이다.  




    고향은 찾아가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이 있어 더 즐겁다.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의 설레 임과 그리움, 그리고 고향을 지키며 긴 여행의 삶의 여정에서 맞이하는 사람의 기다림, 이렇게 고향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맞물려 기쁨을 빚어낸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고향이 있다.  첫째는 과거의 고향이다. 이것은 그리움의 고향이다. 추억을 찾아가는 고향이다. 가족과 친지의 품이 있고 어린 시절 추억이 있으며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보름달이 있는 육신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고향도 부모님이 안계시면 점점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서글픈 인생의 단면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오늘의 고향이 있다. 사람이 살다가 정들면 고향이다. 혹은 이웃사촌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더라도 이웃끼리 정들고 친해지면 곧 고향이다. 오늘의 고향은 현재의 고향이고 실존의 고향이다. 나와 네가 있고 이웃이 있고 우리들이 있으므로 살맛나는 세상이다.   




    유행가에도 타향에 대한 노래가 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든가 바보처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하는 말이야 님 생각 고향생각 술이 취해 하는 말’이라고 노래하지만 이 노래도 결국은 타향도 정이 들면 또 하나의 고향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미래의 고향이 있다. 이것은 죽어서 가는 고향이다. 영원히 안식 할 수 있는 고향이다. 미래의 고향은 세상에서의 수고와 고달픔을 쉴 수 있는 영원한 고향이다. 우리들이 언젠가 찾아갈 본향이다. 하나님의 품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영생이 있는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안식처다. 고향이라는 말만큼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어휘도 드물 것이다. 고향은 귀소본능이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또한 고향은 안식본능이다. 쉬고 싶은 욕망이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고향은 영접본능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그리움이 있다. 고향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열차다. 고향은 우리의 삭막한 감정을 부드럽게 한다. 그것은 숲 속에서 맞는 밤처럼 아늑하다. 봄날의 푸른 산처럼 푸르다. 빗속에서 걷는 것처럼 끈적끈적 한 그 무엇이 있다. 고향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다. 

    그러나 우리는 고향을 초월하면서 살아야한다. 고향이라는 말이 자칫 특정 지역의 이익을 챙기고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고향이란 지금 나와 자식들이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곳이 어디이든 그곳이 바로 고향이다. 사람들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 고향 내 고향 만 부르짖는 편협한 사고에 갖혀 있으면 통합이니, 상생이니 하는 화합의 시대에 역행하는 길이다. 고향과 고향은 서로 만나야한다. 

    우리는 오늘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고향의 연속선상에서 고향을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인생은 도상의 나그네다. 나그네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고향이 있다. 멀리 추억 속에서 고향이 보인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브리서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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