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들의 올바른 자세와 태도에 대해, 그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집중해서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너무 중요하기에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씨로 비유되었다면 그 씨를 받는 밭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농사짓는데 밭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냥 씨만 뿌린다고 거저 먹는 것이 아니지요. 딱딱하게 굳은 땅을 부드럽게 매 줘야하고 거름사다가 양분을 집어넣어야 하고 잡초가 자라면 호미로 잡아 뽑아주어야 하고 물이 적으면 물을 뿌려서 촉촉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밭이 좋아야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옥토가 되어야 좋은 과실이 주렁주렁 열립니다. 우리 마음이 옥토와 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받은 말씀들이 우리 안에서 풍성한 결실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밭이 나옵니까?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4부류로 나누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어떤 땅에다 씨를 뿌렸다 말씀합니까?
첫째, 길가 밭입니다. 씨를 뿌렸더니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이 길가라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 마음에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지나갑니다. 늘 분주합니다. 세상 여러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졌지만 땅속까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말씀보다 분주한 세상에 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등안시할 때 어느새 새가 와 말씀의 씨를 물고 날아가 버립니다. 새가 무엇입니까? 15절에서 사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은 늘 호시탐탐 우리 마음을 노리고 점거하여 온갖 세상 것들로 가득 차게 한 뒤 말씀을 낚아채 갑니다. 분주하게 합니다. 말씀에 관심 못하도록 온갖 잡념을 집어 넣어줍니다. 지금 예배드리기 위해 몸은 여기와 앉았지만 마음은 겁잡을 수 없는 곳으로 한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아이들 생각, 돈 걱정, 마음 상했던 일, 가고 싶은 여행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네마 코프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귀가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필름을 돌려줍니다. 말씀에 촛점을 맞추지 못하면 마음을 사단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소중히 담아 고운 흙으로 덮어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그 씨앗의 생명이 발아되고 자라나게 되는데 우리 관심이 헛된 세상 걱정 염려 내지는 쾌락에 빠져 있습니다.
C. S. 루이스의 유명한 "악마의 편지"라는 책에 어떤 영국의 노 신사가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늘 자주 습관적으로 도서실을 찾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 곳에서 신앙서적을 보게 되었고 문득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 몰두할 즈음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마음을 접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때 악마는 그 마음속에 다시 말을 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하니? 식사부터 끝내라"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 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빨리 집에 가서 일이나 하자"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아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아무 생각없이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짖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해 싸워야 할 적이 있습니다. 사단입니다. 우리로 말씀에 집중 못하게 집요한 공격을 가합니다. 졸음 마귀가 달려와 눈을 무겁게 합니다. 불안마귀가 다가와 “집에 가스불 안 껏잖아” 속삭이고 갑니다. 음란마귀가 옵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자신을 황홀하게 이끌어 갑니다. 혈기마귀도 있습니다. 태연한척 앉아있지만 속으로는 언젠가 당했던 복수의 칼을 갈아 원수찾아 삼만리를 더 뛰어다닙니다. 우리 마음이 말씀의 씨를 받는 옥토가 되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방해하는 사단 세력을 다 무찔러야 합니다. 마음에 평온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길가 밭으로는 말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결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옥토의 마음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둘째, 돌밭이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떨어졌는데 흙이 얇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곧 말라 죽어 버립니다. 우리 마음이 돌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핍박이 왔을 때 곧 넘어지는 자라고 17절에서 일러 주십니다. 세상을 사노라면 누구에게나 원치않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찾아오는 핍박이 있습니다.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에는 세상과 구별된 고유의 트레이드 마크가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 고난의 흔적입니다. 애매히 받는 고난이 있고요,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당하는 핍박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견디고 이겨야 성숙한 크리스쳔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까? 말씀을 붙잡고 의지함으로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돌밭인 사람은 의지할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자기 의지가 너무 강해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을 받기는 잘 받는데 자기 마음에 심지를 못합니다.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말씀, 자기에게 유익한 말씀, 더 편하고 더 쾌락적인 육신의 것을 추구합니다. 자기 안에 세상으로 굳어진 자아, 자갈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심령이 굳은 사람입니다. 말씀에 은혜받고 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은혜 받고 좀 시원하게 울어야 굳어진 마음이 부드럽게 기경이 되는데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여전히 지극히 현실주의자요, 매사 철저히 계산하는 실용주의 자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바늘로 찔러야 피 한방울 나지 않는 냉소주의 자가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은 일에 완전 무관심한 사람이 돌밭입니다. 은혜 받는 것 같은데 돌아서면 돌밭입니다. 교회에서는 아멘 아멘 하는데 나가서는 노멘합니다. 우리가 옥토가 되기위해 극복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 자아입니다. 우리 자신을 내려놓아야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립니다. 예수님이 계산했으면 이 냄새나고 더러운 세상에 내려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마음이 잠깐 뜨거워졌습니다. 어찌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얼마면 영생을 살 수있나요? 주님 말씀이 너 가진 것 다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나를 따르라. 계산해 보니 아닌 거예요, 다 주면 거지되는데, 거지 보았잖아요. 비참해 보이거든요. 그 말씀을 깊이 뿌리 내리지 못했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인 것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산에 넣지 못했습니다. 우리 안에 굳어진 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다 녹아 내려야 옥토가 됩니다. 손해볼 줄 알고 참고 견딜 줄 알아야 옥토가 됩니다. 고난과 핍박을 이기는 힘, 그것은 세상 계산에 익숙한 우리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 사랑에 우리 전 생애를 맡기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환난과 핍박을 이기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가시 떨기 밭입니다. 말씀의 씨가 떨어졌습니다. 꽤 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시가 자라 그 기운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엇이 막았습니까? 이 가시가 무엇입니까? 19절에서 예수님이 일러 줍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그리고 기타 욕심이니라” 우리 안에 세상 염려가 있고 물질에 대한 유혹 탐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생활에 강한 걸림돌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없습니까? 가시떨기 밭입니다. 옥토가 되기위해 싸워야 할 적 무엇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염려는 누구에게 다 다 있습니다. 염려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뭔가 좀 모자란 사람이겠지요. 짐승이라면 모르지만 사람은 다 염려가 많습니다. 성경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묶여서 살지말고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살면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신앙인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염려 가운데 빠져서, 염려와 걱정으로 인생을 살며, 그것 때문에 기쁨도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지고, 그 걱정의 그늘과 구름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가시 떨기밭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염려를 네가 끌어안고 고민하지 말고 다 나에게 가져 오라는 것입니다. 내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내게 맡기고 너희는 기뻐하고 평안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또 한 가지 무서운 가시가 있습니다. 바로 재리의 유혹입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다가도 일단 물질 문제에 부딪히면 시험에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아직 안 바뀌었습니다. 주인이 맘몬인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시로 묻습니다. 너의 주인이 누구냐?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 바쳐 살려주고 부족함이 없도록 늘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냐? 그 사랑을 알고 있냐? 여러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충분히 부자가 될 만큼의 엄청난 물질의 복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잡으시겠습니까? 솔직히요. 헷갈리지요. 우리 믿음이 그렇습니다. 둘 다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둘 다 주시지는 않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만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물질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고 물질에 매여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가 되는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이 아까와서 헌금생활 못하는 분들! 물질 문제 때문에 주일 성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 주님을 위해서 물질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물질을 위해 하나님을 포기하는 가시떨기 밭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받는데 자랄만하면 세상 유혹에 넘어집니다. 이 유혹을 잘 넘겨야 더 좋은 말씀의 결실이 있는데 물질에 눈이 어두어지고 맙니다. 염려와 물질로 뒷걸음질 합니다. 한번 버리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안타깝게도 움켜잡고 버리지 못해 그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씀의 씨앗을 받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는 마지막 관문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 사역을 위해 파견된 근무지일 뿐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십니다.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썩어지고 안개처럼 곧 사라질 헛것을 위해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낭비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김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나온다고요. 말씀을 들음으로입니다. 어떻게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듣는 우리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말씀을 받는 우리 마음이 옥토, 좋은 땅입니까? 사모해야 합니다. 큰 믿음이 옥토에서 자랍니다. 어떻게 옥토가 됩니까? 세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단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물정에 굳어진 우리 육신 자아를 주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시므로 환난과 핍박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있지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님만 바라봄으로 승리하셔야 합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30배 60배 100배가 되었느니라” 이 놀라운 은총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