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결혼제도를 통하여 유지 발전되어 왔으며, 따라서 이혼은 반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혼은 더 이상 정죄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개인의 존엄성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 주장되기에 이르렀으며,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편승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70년도에 4퍼센트였던 이혼율이 지금은 50퍼센트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추세가 복음화보다 현대화와 서구화에 기인하고 있지만, 복음화가 이혼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승하고 있다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이혼 증가는 교회의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권징의 시행이 유보됨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교회가 이혼에 대하여 분명하고 통일된 가르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국가의 이혼결정에 종속하는 저자세를 취한 데도 그 원인이 있다. 칼빈이 지적한 대로, "국가의 법률은 시대에 따라 인간 윤리에 의해 좌우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규범을 주실 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회는 시대적 풍조에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행동규범인 성경으로부터 이혼에 대한 원칙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르치면서 교인들을 지도해야 한다. 왜 이혼은 죄가 되는가?
1. 신적 권위가 입혀진 분리 불가능한 결혼..... 이혼이 어떤 이유로도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은 오늘 본문 마 19장 4-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결혼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의도에 근거한 명령으로서, 부모를 떠나는 행위와 부부가 합하는 행위로 구성된다. 결혼은 새로운 독립적 공동체, 즉 결코 나눌 수 없는 부부의 하나됨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단순히 부부의 상호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결혼의 진정한 기초는 그들 상호간의 사랑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 있다. 이러한 신적 간섭과 주도성 때문에 이혼은 인간의 자의적 결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재가와 그에 따른 하늘나라의 호적에서 말소되어야 한다. 심지어, 국가법적으로도 법정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일방적 파기만으로 이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혼한 자가 재혼할 경우 간음을 범하며 그와 동침한 자도 간음죄를 범한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바로 하나님이 이혼을 승인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비록 지상에서 자의적으로 이혼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하늘의 호적에는 결혼상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모든 성적 관계는 간음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실로, 결혼으로 인한 부부의 일체화는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그 분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남녀의 성적 결합은 거룩한 것이어서 이를 더럽히게 되면 본질상 깨끗한 원상을 회복할 수 없다. 부부는 성적 결합을 통하여 심원한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 사회적 일체화에 도달한다. 물론, 이혼을 강행하고 재혼한 경우, 새로운 배우자와 겉보기는 잘 살아갈 수 있으나 죽을 때까지 마음의 괴로움과 죽지 않는 회상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혼을 결정하는 순간에는 지옥 같은 상황의 탈출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곧 바로 감정적, 경제적, 법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며, 공동체의 상실, 자녀문제, 심리적 번민으로 불행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데, 이는 결혼의 일체화가 얼마나 강력하고 전체적이며 분리가 사실상 불가능한지를 반증해 준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스트레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 가지가 배우자의 사별, 이혼, 별거라는 사실도 부부의 결합이 얼마나 우리에게 절대적인가를 보여준다. 칼빈은 이미 한 몸이 된 상태에서 분리를 시도하는 것은 자기 몸을 찢어내려는 행위와 같아서 본성에 위배된다고 지적하였다.
2. 이혼의 사유인 간음의 문제..... 배우자가 간음한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는 입장은 마 5장 32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이혼을 금지하는 것과 동일한 명령의 성격을 가지지 않고 단순한 묵인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 19장에서는 그가 이러한 예외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 이는 모세시대에 이혼을 정당화하려는 요구가 너무 거세고 폭증함에 따라 이혼증서를 써주는 조건으로 일부 허용하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조치가 남성의 일방적인 괴롭힘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정해진 것이라고까지 해석했다. 예를 들자면 선생님이 결석이 잦은 문제 학생을 상담하는 자리에서 학교에서 마지노선으로 정한 결석의 횟수를 마치 정당하게 써 먹을 수 있는 직장인들의 월차휴가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겠지요. 주님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쓰라고 한 것은 인간의 악함에 의하여 발생하는 이혼을 억제하는 장치로 마련한 것이지 그것을 허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복음서에서 간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간음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구절이 나온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전통적 간음조항을 사실상 폐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 8장의 간음한 여인 사건은 그 정의가 얼마나 현장에서 적용력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자기들은 간음하지 않았으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심판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죄는 어떤 죄를 의미할까?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라는 구절과 전체적 맥락은 죄 일반이라기보다 간음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실로, 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인데,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 당연히 이혼해야 된다고 상대방을 비난하며 분노하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아마도 동일한 질문을 할 것이며, 그들은 자기의 문제점도 적지 않음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이다. 이혼하려는 부부들이 서로 자기의 들보는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눈에 있는 티만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아닐까?
3. 다른 이유들
간음 외에도 결혼을 유지하기 어려운 사유가 발생하면 이혼할 수 있다는 입장이 아마도 현대에 가장 지배적인 사상이다. 이혼을 금하는 주님의 뜻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서 주님께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모세가 간음의 경우 이혼을 허용하였다는 말씀은 신 24장 1절에 근거하고 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란 무엇일까? 예수님 당시 율법해석의 두 권위였던 샴마이와 힐렐은 이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제시함으로서 이혼문제에 혼란을 가져왔다. 샴마이는 협의적으로 해석하여 성적 부정으로 제한하였으나, 힐렐은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남편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밥을 태우는 것도 이혼사유가 된다고 극도로 확대 해석하여 사실상 모든 이혼을 정당화하였다.
물론 인간의 허물과 약함을 인하여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맺어진 결혼이 있을 수 있겠지만 비록 그렇게 시작된 결혼이라고 하더라도 이혼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이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유들이 있고 주변의 상황이 그것을 부추겨도 이혼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완악한 자에게 내려진 처방이며 얼굴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혼하는 자를 미워하시며(말2:16) 모세는 너희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인하여 허락은 하였지만 이혼은 하나님의 본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마음이 완악한 사람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그러나 우리 인생은 더러움, 오염을 지우는 지우개가 없는 하나뿐인 인생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이름에 때 묻히고 더럽히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결혼을 한 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라도 살아야 합니다. 몇 억 만분의 하나가 엄마를 만나 이 땅에 왔고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만나 신성한 결혼을 했는데 세상을 탓하고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