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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시도를 하여 응답을 받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기도가 쉽다면 주님께서 이런 비유 자체를 쓰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배우게 되는 것은 기도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 기도를 할 수는 있겠으나 응답받을 때까지 끝까지 가는 기도는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이 기도가 어려울까요?
1.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불쌍한 과부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옛날 유대나라에서 대단히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 때는 여자가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기반... 말하자면 집, 농사짓는 땅... 이런 것들이 아들을 통하여 유산상속이 되지 여자에게는 유산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했는데 남편이 죽어버리니까 여자는 불쌍한 존재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아내와 중학교 나이의 딸을 필리핀에 두고 혼자 나오려니까 걱정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예요. 지금도 남편 없으면 힘든 일들이 많은데 그 때는 얼마나 그랬겠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우리의 처지가 이 불쌍한 과부와 같을 때가 많아요. 사실 과부처럼 불쌍한 처지가 아니면 기도하시는 분들도 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 우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시는 거 같아요. 하여튼 기도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우리의 모습이 불쌍한 과부와도 같아 보인단 말입니다. 누구도 도와줄 처지가 아니고, 가진 거 다 빼앗기던지, 아님 잃어버렸다던지..., 아님 심각한 병으로 무력해졌다던지.... 이런 처지에서 우리가 기도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무력감, 절망감, 자포자기심정....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되어 안정적으로 기도하기도 힘들어져요.
그리고 이런 연약한 상태가 되면 더 마귀가 극성을 부려요. 마귀는 항상 약한 틈을 뚫고 들어오거든요. 우리 몸도 그렇잖아요. 건강한 사람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병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정신상태가 허약해진다던지 육체의 어느 부분이 약해지면 그 부분을 통해 병이 우리 몸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설상가상, 업친대 덥친격... 이런 말들이 있는데 어려움이 한 번 찾아오면 계속해서 찾아오게 된다는 거죠. 이런 것들이 전부 영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틈이 생기면 마귀가 영육간에 쨉을 던지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정신적으로도 휘청거리기 시작하면서 기도에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밤이 되면 혼자서 강당에 올라가 2-3 시간씩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려움을 만나고 기도를 시작하긴 했는데 처음 한 두 달은 몸은 강대상에 엎드려 있었지만 기도를 그렇게 많이 하지를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으면 앞날에 대한 초조와 두려움, 또한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런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처음에는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를 시작하나 얼마 가지 못해서 그 사적인 감정과 생각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저 자신을 보면서 목사도 어려움에 빠지니까 자기가 했던 설교들이 다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것으로는 당당해 보이려고 웃고, 교인들을 격려하고 그러지만 실상은 제 자신이 그랬다는 것이죠.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이 불쌍한 과부의 처지와 같다 보니 기도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 과부와 같은 불쌍한 처지에 있기는 하나 기도를 통해 복을 받으려면 그렇게 불쌍한 처지로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과부는 보통의 과부하고 달랐습니다. 보통의 과부였다면 그 불쌍한 처지를 빠져나가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이 과부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그 환경에서 자기를 벗어나게 할 사람은 재판관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비록 그 재판관이 뇌물을 좋아하고 재판을 굽게 하는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그 재판관을 붙들고 늘어졌던 것입니다.
그와 마친가지로... 자 지금 우리가 절실한 문제를 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칩시다. 아마도 인간적으로 해 볼 것은 다 해봤겠죠. 해 보다가 안 되니까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도를 시작하죠. 그러나 기도라고 다 같은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냥 해 보는 겁니다. 몇 번... 길게는 한 달도 갈 수 있겠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으니까 기도하면서 조바심이 나고, 의심이 들고.... 이러면서 절망의 상태로 빠져들면서 마지막 희망의 끈인 기도까지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로 무엇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아니라.... 지푸라기 잡는 심정은 무엇입니까? 그 물속에 가라앉는데 아무 잡을 것도 없고... 그냥 물결에 흘러 내려오는 지푸라기가 보이는데 그거라도 잡아보는 겁니다. 그러나 지푸라기가 어떻게 그 무거운 인간의 몸을 지탱해 주겠습니까? 아무 희망이 없죠.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겠다 하는 심정이 아니라 이제는 기도만이 내가 살 길이다... 반드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려는 강한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부르짖는 겁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뇌물 없이는 절대로 바른 재판을 하지 않는 이 악한 재판관도 끊임없이 찾아와서 간청하는 이 과부의 끈질김에는 그만 지쳐버려 우선적으로 그 과부의 송사를 처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끈질김이 악한 재판관도 움직이는데 살아계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이 그 끈질김을 보고서도 모른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또 있죠.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끈질기고 집중적인 기도의 모습이 다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기도를 잘 안 해요. 제가 한 교회에서 섬길 때 어떤 젊은 여집사가 수요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는데 이런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저희 교회 노종들이 새벽마다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기에 제가 마음 속에 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럼 기도는 노종들만 하는 건가? 그래서 제가 몇 주 지나서 기도해 대해서 설교하면서 “기도는 노종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종들도 해야 합니다. 왜 기도할 때 노종만 있고 젊은 종은 없는 겁니까?” 이랬더니 그 집사님이 그때부터 저를 미워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이런 현상을 집작하고 우리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시니라"
주님이 오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의 믿음이 타락하고 편한 것만 좋아해서 이 과부와 같이 불퇴전의 기도를 할 사람이 있겠느냐고 예수님께서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밤낮 부르짖고 원한에 차도록 간절하고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을 갖고 기도할 때 불의한 재판관과 같은 마귀의 진을 파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승리가 봇물 터지듯이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는 이와 같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끈질지게 기도하는 사람 앞에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가족이 구원받고 귀신을 쫓겨나며 하늘나라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라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절대로 낙심하여 물러가지 않는 단호한 각오로 기도하십시오. 그냥 기도해서 안 되며 철야기도, 금식기도로 주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은 결국은 천국을 소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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