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교회, 하나의 식탁(누가 22:14-20)
  • 조회 수: 167, 2012.12.21 17:35:59
  • 주일 예배 시에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매우 오래된 신앙고백문서입니다. “나는 성부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성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의 내용 중에 특이한 문구가 있습니다. “나는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라는 조항입니다. 여기서 ‘교통’이란 단어가 새삼스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교통이란 단어는 자동차의 왕래와 관계가 있는 용어입니다. 사도신경을 한글로 번역한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여기서 요즈음 흔히 사용하는 ‘교제’라는 용어대신에 ‘교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멋진 번역인지 모르겠습니다.

     

    고속도로를 운행할 때마다 교통방송에 귀를 기울입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 기흥진출로가 막히고 있습니다.” “오산에서 죽전까지 교통이 정체되고 있습니다.” 아니면 “평택 이남으로는 교통이 수월합니다.” 원래 ‘교통’이란 단어 속에는 일방통행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항상 양방향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성도들의 교통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고백의 뜻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입니다. 부부지간이나 부자지간에 통행이 양방향으로 교통이 수월해야만 가정의 진정한 행복이 있듯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 또한 성도와 성도들 간의 통행 역시 언제나 양방향이어야 합니다. 혈관에 지방이 많이 축적되면 동맥경화증에 걸릴 위험성이 높듯이, 자동차가 한쪽 방향으로만 몰리면 교통체중현상이 일어나듯이, 어느 종류의 사귐이든지 양방향으로 시원하게 뚫려야 합니다. 

     

    “성도의 교통”을 영어로 표현할 때 "the communion of saints"라고 합니다. 여기서 communion은 일반적으로 성만찬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입니다.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일종의 “교통”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종류의 교통입니까? 성도들과 성도들 사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대감의 교통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마시는 상징적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오고가는 것입니다.
     

       •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교회”(One Church)만 있을 뿐입니다.
       • 각 교회 각 교단마다 성만찬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식탁”(One Table)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한 식탁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멤버들이 모이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을 하면서 우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기억

     

    첫째, 기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기억)하라. 또 이 잔은 너희를 위해 쏟은 내 피니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하라.”

    예수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이 세상이 그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진짜 걱정하신 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를 잊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을 깊이 생각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다른 것들에 관심을 두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십니다. 단순히 크리스마스의 아기나, 산상설교를 하신 위대한 설교자로나, 아니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삶을 사신 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이 성(聖)금요일에 고난 받으신 여호와의 종(Yahweh's suffering servant)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참조, 사 53장).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또 포도주를 잔에 부어 그들에게 건네실 때, 예수는 이미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그분이 외치십니다. “자,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너희를 위한 내 생명이다! 받아먹어라! 받아 마시라!” 빵을 떼어 나누시고 포도주를 잔에 부으시는 일을 통해 예수님은 이미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분과 그의 제자들이 둘러앉고 있는 그 식탁은 그분의 “임종 침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그분의 생명을 먹고 마신다는 사실을.

     

    선포

    한 식탁에 둘러서서 우리는 다섯 가지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중 첫째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너희는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식탁 둘레에 모였습니다. 무엇인가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선포합니까? 예수께서 죽으신 이유를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가 사람들에게 제시하셨던 아이디어들이 제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죽으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종교적 권력자들과 얽힌 문제 때문에 죽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자기희생이라는 고상한 도덕적 모범을 만천하에 보여주시기 위해 죽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대속(代贖)적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오래전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오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친히 짊어지기 위해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전수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전해준 것은 사실 나도 전해 받은 것입니다. 즉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3)

     

    참여

    주님의 식탁에 둘러서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섯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기억합니다. 둘째, 선포합니다. 셋째, 참여(參與)합니다.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크리스천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떼고 나누는 빵,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송축하는 송축의 잔,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은 “맞습니다!”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즉 지금 여러분이 이미 지나간 것이나 끝난 것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지난 주 예배에 지금 참가할 수 있습니까? 혹은 6.25 한국 전쟁에 지금 참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지나갔거나 끝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언제 어떤 일에 참가할 수 있습니까? 대답은 분명합니다. 지금 여기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만 참가할 수 있습니다! 현재진행적인 것에만 참가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기 때문에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지금 현재적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진행형입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그 구원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식탁을 통하여 이 구원의 능력 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빵을 떼어 나누고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동시간대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죽음에 우리가 참여하여 우리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뿜어내는 능력 속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연합

    주님의 식탁에 둘러서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다섯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기억합니다. 둘째, 선포합니다. 셋째, 참여합니다. 넷째, 연합합니다.

    - 여기, 주님의 식탁 주위에 전 세계의 교회가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 여기,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one holy catholic church)가   하나로서 모이는 것입니다.
    - 여기,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매 주일마다, 매 달마다, 신실하게,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크리스천들은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 그들 사이에 가로 놓여있는 신조(信條)상의 차이들 너머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 그들의 교파간의 차이, 교단간의 차이점들 너머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 전서 10:1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한 떡이 있기 때문에, 여럿인 우리는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떡에 참가하기 때문입니다.”

    빵 하나를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그 표면 아래 있는 통일성을 가리키고 상징합니다. 저 깊은 곳에서,

       • 우리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풀어 뻥 튀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교회를 위한 한 분의 그리스도만 계실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의 빵이 있는 것입니다.

    잠시 후, 한 빵에서 떼어낸 빵 조각을 삼킬 때 여러분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동료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제가 먹고 있는 이 빵 조각은 한 덩어리의 빵에서 나온  조각입니다. 이처럼 저는 하나의 교회의 한 조각입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동일한 빵을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같이 저도 동일한 그리스도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기대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우리는 기억합니다. 둘째, 우리는 선포합니다. 셋째, 우리는 참가합니다. 넷째, 우리는 연합합니다. 다섯째, 우리는 기대합니다. 무엇을 기대합니까? 영원한 삶에 대한 기대입니다.

     

    장차 우리 주님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을 기대하면서 작은 빵 조각과 작은 포도주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져다가 나누어 마시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나는 지금부터 포도 열매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누가 22:17-18)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그분은 이사야 25장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이사야 25장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장차 일어날 일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백성들”을 위해 풍성한 잔치를 여신다는 환상이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다.”(6절)

    그렇습니다. 주님의 만찬을 시행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장차올 전 세계적인 연회를 기대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 날에, 전 세계적인 메시아의 대 연회가 실제로 현실이 되는 날에, 산지사방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나님 왕국의 위대한 식탁에 앉아 우리 모두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보시오! 여기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를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렸으니
       이제 함께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9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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