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아기-평화의 왕(사9:6-7)
  • 조회 수: 96, 2013.04.01 07:23:17
  • 우리는 십자가로 인해 구원이 우리에게 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의문을 갖는다. 한사람 예수의 구원이 어떻게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그 시대 그 역사 안에서 나타났던 예수의 행적이 어떻게 지금 우리시대에도 동일한 효력을 나타낼 수 있을까? 기독교인 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시다"라고 하거나 "예수님을 영접합니다"라고 하면 그것이 마치 신비한 주문이라도 되어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기독교를 마술적 차원으로 타락 시키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보혈이 이천년 지구 반바퀴의 공간을 넘어 오늘 내 머리 위에 떨어진다면 마치 그것이 무슨 사랑의 묘약 처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영혼의 세척제 처럼(사실 우리의 찬송가는 아주 노골적으로 이런 신앙을 전파하고 있긴 하지만) 단번에 우리의 영혼을 맑히는 묘약이 되는 것일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믿으면 구원이 내게 임하는 것일까? 이것이야 말로 순환논리 아닌가? 우리 크리스천들이 흔히 좋아하는 논리가 있다. 진리가 무엇인가? 생명이다. 생명이 무엇인가? 예수이시다. 예수는 누구신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참 진리이시다. 이렇게 말이 수십개 수백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무엇인지 모른다. 크리스천들은 항상 이런 순환논리를 쓰다가는 마지막에 무슨 어사 마패라도 내 보이듯이 "예수님", "하나님"하고 결론을 맺어버린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이 누구신가라는 더 이상의 질문을 허용치 않는다. 마치 약장수의 만병통치 약처럼 걸핏하면 예수를, 하나님을 내세우고 거기가 모든 것의 종착역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기독교의 힘과 진리는 이런 하늘 위에 허깨비가 되어버린 예수에게 있지 않다. 우리가 그를 허공에 띄우고 고백하고 추켜 올리는 동안 우리는 오히려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신 분, 영원을 버리고 유한한 역사 안에 오신 분, 보죄를 버리고 말구유로 오신 분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사상을, 노선을, 무슨 무슨 신학을, 무슨 무슨 신조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 아래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 안에 자신의 비겁함을 감춘다. 그리고 이런 것을 빙자해서 자신의 욕심을 꺼집어 낸다. 복잡한 이론의 회로를 만들고 그 미로를 헤메다 보면 진짜 예수는 실종시키고 우리가 소화하기에 적합하게 말랑말랑해진 예수의 허상을 보게 될 뿐이다.

    예수를 이해하는데 복잡한 논리가 필요없다. 한 아기로 오신 그분의 나타난 삶의 행적을 보면된다. 가감없이 성서의 단순한 말씀이, 그의 행적이 우리에게 갈 길을 제시한다. 그 분을 따라 살면 된다.

    교회 인터넷이 활성화 되고 있다. 자칭 사이버 교인이라고 하는 안재학 군이 생태동호회의 조 향씨의 글을 올렸는데 참 좋아서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해고 그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생각난 예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한다. 이 글에는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반 까라마조프가 "이 세계 전부도 무고한 어린아이의 눈물 한방울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한 어린이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의 무게를 이 세계 전부의 무게보다도 무검게 느낄 수 있는 마음-바로 그 마음이, 그 마음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영원이 역사가 되고, 보좌를 버리고 말구유로 오시게 되는 방향전환의 이유이다.

    우리는 나 하나의 실천이 나 하나의 행동이 이 역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 하나의 삶이 무슨 변화를 일으키겠는가고 생각한다. 조 향씨의 글은 '온생명'이란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이세상 모든 생명체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주의 생명은 낱개로 떨어진 낱 생명이 아니고 온생명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생명체 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슬이 되어 있다면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다" 모든 사물이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의 사물 안에 온 우주가 들어있는 것이다.

    각자의 삶의 어떤 계기들을 통해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하는 것은 그 사람 하나의 경험에 그쳐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잊혀지는 낱생명의 허무한 역사가 아니라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생명의 그물망을 다시 짜는 힘이다. 그것은 공진화(共進化)를 일으키며 생명의 눈부신 끝없는 생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곧 우주의 변화를 생명체의 진화를 인류라는 종의 진화를 가져오는 방향전환인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나 하나의 낱 생명으로 뭍혀 버리는 일이 아니다.

    얼마전 TV에서 카나다의 한 유전 공학자가 유전자 변이 작물을 연구하다가 전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지 않은 주변의 작물에도 동일하게 유전자 변이 현상이 나타난 것을 보도하는 것을 보았다. 수퍼 감자를 만들려다 수퍼 잡초를 만들고 이 지구는 그 잡초에게 운명을 맡길 지도 모른다. 아뭏든 한 종의 변화가 다른 종의 변화로 확산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보고된 것이다.

    요즈음 신과학에서 "형태발생장"이론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개체가 새로운 행동을 했을 때 그종과 관련된 기(氣)가 새로워져 그 종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먹는데 그 고구마에 붙은 흙을 씻어 먹을 줄 몰랐다. 그런데 한 고립된 섬에 사는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으면 매끄럽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같은 섬에 있는 원숭이들 뿐 만이 아니라 멀라 떨어진 다른 섬에 사는 원숭이들에게도 큰 시간차 없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같은 섬에 사는 원숭이들은 씻어먹는 원숭이를 보고 학습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른 섬에 살면서 전혀 접촉이 없는 지역에서 동일한 변화가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라고 설명하겠는가? 한 사람의 변화는 바로 하나의 우주가 변화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이며 동시에 전체의 변화이다.

    그러니 세상을 탓하고 세태를 비관할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변화이다. 이 세상이 문제가 아니고 그를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나 자신이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으심이 우리 모두의 죽음이 됨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부활이 우리 모두의 부활이 됨을 믿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십자가가 우리 모두의 구원이 됨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오심이 우리 모두의 평화가 되고 그 한 아기가 온세상을 밝힐 평화의 왕이 되심을 믿는 것이다. 이번 성탄절에도 이 믿음은 살아있고 한 아기의 오심을 기다리는 간절한 믿음은 여전히 이 한반도 마지막 천년대의 성탄절에 까지 강렬하게 살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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