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안에서 부모와 자녀(엡 5:22∼6:4)
  • 조회 수: 47, 2013.07.19 21:46:43
  • 우리나라에서 몇 년전에 상영되었던 밴디트 퀸이라는 인도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인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인도 국내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풀란 데비라는 여성이 감옥에서 쓴 그의 일기를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풀란 데비는 현재 인도에서 천민들을 위해 사회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실제 인물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인도의 한 천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풀란 데비라는 여성이 힌두교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성학대와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잘못된 사회구조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내용입니다.

    풀란 데비는 인도의 어느 가난한 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열 한살에 나이 많은 남자에게 강제로 팔려가다시피하여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온갖 수모와 학대에 견디지 못해 도망해 나옵니다. 도망해 나온 풀란은 역시 그 사회 지주들에게 온갖 폭행을 당하다 산적들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산적 두목이 되어 천민을 옹호하고, 그들을 학대하는 지주들을 공격하고, 그를 배신하고 괴롭혔던 남자들을 찾아내어 복수를 합니다. 그렇게해서 그가 죽인 남자만도 여러 명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인도 전역에 알려지게 되고, 인도 정부에서는 그에게 투항을 권고하게 됩니다.

    그는 정부에 대해 여성학대와 천민을 멸시하는 관습, 여자들을 마음대로 폭행하는 사회법 철폐, 8년 후에 석방 조건을 제시해서 투항하게 됩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가 투쟁을 벌였던 힌두교 지역에서 천민과 여성을 억압하는 55개의 악법이 철폐되고, 그 지역에 천민의 주 정부가 수립됩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풀란은 석방되어 현재까지 천민을 위한 사회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의 아침이 밝아오는 오늘의 시대에서 아직도 지구 곳곳에서는 암흑기의 시대에 인류가 행해오던 여성학대, 아동학대와 같은 어둠의 행위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어두운 문명의 관습은 사도바울 시대 그래도 문명국이라고 부르던 희랍, 로마, 유대 사회에서도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쓰여진 말씀입니다.

    사도바울 시대 어느 사회나 공통적인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남성들의 지나친 권위주의입니다. 그것이 사회구조적으로 정당화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남성중심의 이혼법과 가정에서 아버지 중심의 절대권위 행사로 나타났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 시대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습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유대 남성들이 드리는 감사 기도에서 감사의 조건이 자신이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의 조건으로 내세울 정도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완전히 남성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남성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혼 문제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여자에게는 이혼할 수 있는 권한이 없고 남성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희랍의 문명권 안에 있는 사회에서나, 로마의 문명권 안에 있는 사회에서 다같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 역시 매우 비인격적이었습니다. 희랍 사회에서 매춘은 일상 생활의 일부였고, 남성들이 원하는 때에는 언제나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집을 지키며 아이를 돌보는 가정부에 불과했고, 남성은 마음대로 밖에서 쾌락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로마 문명권에 있던 사회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나빴습니다. 이 시대 사회에서 유행하던 말이 "여성은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고 할 정도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특별히 로마사회에서 아버지의 권한이 너무 절대적인 것이어서, 아버지가 자녀를 노예로 팔 수도 있었고, 쇠사슬로 묶어 가두어 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이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었는지, 어머니가 아이를 낳자마자 아버지의 발 앞에 놓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어린 아이를 집어올리면 그 아이를 양육하겠다는 의사가 있는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리면 그 아이를 자기 아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그 아이는 버려야 했습니다. 이 시대에 아버지는 가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자녀를 다스렸습니다.

    사도바울 시대 희랍이나 로마의 사회에서 가정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가정 생활은 거의 몰락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밤의 문명권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 여성과 어린아이들, 몰락되어 가고 있는 가정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사회에서도 밝아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서 결혼과 가정의 존엄성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것은 무엇을 잘 지키면 물질적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의 빛 가운데서 가정의 존엄성을 새롭게 보게 합니다. 바울이 복음의 빛 가운데서 보여주고 있는 가정은 같은 동성끼리로 이루어지는 변칙적인 성의 질서가 아닙니다. 남녀가 장성하여 부모를 떠나 서로 연합해야 한다는 본래의 창조의 질서를 확인합니다.

    이 질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이 사랑에 기초한 인격적인 관계로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결혼의 질서의 토대인 사랑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준 것과 같이, 결혼의 기초가 되는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25절)

    (2)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케 하신 것과 같은 순결한 사랑이어야 합니다.(26절)

    (3)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서로 돌보는 사랑이어야 합니다.(28절)

    (4) 두 사람이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었으므로, 다른 그 어떤 외적 요인에 의해서도 파괴되어 서는 안됩니다.

    (5)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분은 남편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32절)

    사도 바울은 결혼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단순한 쾌락과 인간의 변덕에 의해 손상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남녀의 결합으로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가정이라는 공동체에는 사랑의 열매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형성되는 가정 공동체의 질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가정 공동체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주 안에서 라는 전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시대 이방인들의 관점에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연 다른 새로운 질서의 빛 가운데서 가정의 질서를 말합니다.

    주 안에서 라는 뜻은 복음의 빛 가운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관점에서라는 전제가 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부모는 순종, 공경의 대상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순종,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이유에서입니다.

    먼저 부모는 새로운 생명을 위탁받은 하나님의 대리인입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잉태된 새 생명은 단순한 쾌락의 결과가 아닙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새 생명의 형성과 잉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가진 한 인격적인 존재를 부르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러한 신비스러운 생명의 형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렘 1:4∼5)

    하나님께서 이러한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한 인격으로 형성시켜 가는 그 전 과정의 책임을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서 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한 생명체를 탄생시키고, 얼굴을 가진 한 인간으로 형성되는 중대한 책임을 어머니를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 과정에서 남편의 위로와 돌봄으로 그 수고의 과정을 극복해 가게 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부모는 그 어린 생명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부르심으로 자랄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하는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대리인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부모의 책임이 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어린 생명을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로 건전한 한 인격으로 형성시켜가야 합니다. 그러한 대리인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할 때 그 자녀는 부모의 무거운 짐이 됩니다.

    다음으로 부모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한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경험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지혜의 교사로 존경할 것을 말씀합니다. 전문 분야에서 뿐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해서 삶이 무엇인가를 경험해가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에 있는 나이 많은 분들은 여러 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육아법을 학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학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것은 이러한 부모의 지위와 권위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의 순종과 공경과 관련해서 부모의 책임은 이러한 책임과 권위를 상실해가지 않아야 합니다.

    한편 부모들에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입니다. 이 권면의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먼저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셋째, 그들은 완성되어 가야할 미완성된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는 상처는 평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좌절시키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시켜가기 위해 언제나 기억해야할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부모의 시대에 익혀 두었던 관습이 자녀들 시대에도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2) 부모는 자기들 시대에 교육받았던 방식대로 자녀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3) 자녀들을 좌절시켜서는 안되고, 언제나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합니다.

    어떤 가정에서 어머님이 외출하면서 두서너살 위인 철없는 형에게 동생을 맡기고 잠시 외출했습니다. 어머님이 안계신 동안 어린 사내 아이 형은 물감을 가지고 집안 벽 여기저기 동생의 초상화를 그려놓았습니다. 밖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그 광경을 보고 그 아이를 꾸짖지 않고 그 아이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후에 그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나를 이렇게 이름 있는 화가로 만든 것은 어머님의 입맞춤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반려자를 만나게 하시고 신성한 가정을 이루어 거기서 하나님의 대리인인 부모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만들어 가시고, 한편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지혜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신성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늘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고, 한편 자녀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인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늘 귀를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순종과 존경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쌍방이 서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성실하게 그 책임을 수행해 갈 때 그러한 인격적인 관계가 성립됩니다.

    부모가 된 것은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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