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니라(요 20:1∼18)
  • 조회 수: 166, 2013.06.20 11:38:07
  • 모래 속에서 꽃이 필수 없는 것은 모래는 생명인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 주어도 이내 흘러 내려 버리거나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은 언제 어디서나 황폐함과 죽음의 대명사일 뿐입니다. 만약 그 심령이 생명을 머금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호칭과 직책과 경력과 지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의 인생은 황폐함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생명을 품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란 황량한 사막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코 끝의 호흡으로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그 심령이 참된 생명인 진리를,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 여부에 따라 인간의 삶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황량하게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참 생명을 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의 문이 열린 채 마땅히 그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가 제자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누가복음 24장 1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사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의 말을 허탄케 여기며 믿지 않았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 虛' 즉 아무것도 없다는 `허'와 `거짓 誕' 혹은 `속일 誕'으로 이루어진 `허탄'이란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생시에 그토록 강조하셨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심령이 모래밭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수없이 듣긴 들었으되, 그 말씀을 머금치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다 흘려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황량한 사막과 같은 심령을 지니고 있던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허탄한 거짓말쟁이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진실을 담을 수 없는 밑빠진 독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 만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즉시 일어나 주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과연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잘 정리되어 개켜져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대로 였습니다. 두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허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그 현장에서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뛰어 너머,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던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할 차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바로 부활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여기에서 `알지 못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다음으로 부활의 현장에 들어간 두 번째 증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현장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지도, 깨닫지도, 생각하려 하지도, 없어진 주님을 찾아 볼 엄두를 내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안타깝게도 본문 10절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 가니라."

     

    그들은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때의 상황을 더욱 상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24:12)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일이라 여기면서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 역시 이때가지만 해도 그 심령이 다른 제자들처럼 모래밭 같은 자들이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심령이 주님의 말씀을 머금지 못하는 사막이었을 때,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져 주지 못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허탄한 거짓말로 여기어 아예 무덤에 가보지 조차 않았던 다른 제자들처럼,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황량한 심령밖에 지니지 못한 자가 거하는 집이란 어떤 곳입니까? 단지 생 노 병 사만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거하는 집이란 오직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있을 뿐이기에, 그 심령 속에 생명을 머금지 못한 인간들이 사는 집이란 실은 미래의 무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소멸해 버렸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있어야 할 부활의 현장을 버린 채, 마땅히 떠나야 할 생노병사의 소굴, 내일의 무덤을 향해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지상최대의 행복이 있는 양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반면에 베드로와 요한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되돌아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한 자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뛰어가 그 사실을 알린 자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녀가 허탄한 말을 한다며 그녀의 말 자체를 믿지 않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며 집으로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기 집으로 되돌아감이 마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판에, 그녀에게 그 순간 달리 찾아 갈 만한 곳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 11절은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갔습니까? 본문 11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더니"(11a)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곳은 막달라 마리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꺼려하는 묘지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이 사라져 버렸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무덤이라도 하루에 연거퍼 두 번을 찾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는 비어 있는 주님의 무덤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줄 알지 못했음에도 그 빈 무덤을 다시 찾아갔습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집으로 되돌아 가버린 제자들과는 달리 홀로 주님의 무덤 앞에서 서럽게 울어야만 했습니까?

     

    그녀의 심령만은 생명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심령은 황량한 사막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생시에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생명의 말씀들이 고스란히 그녀의 심령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생명이, 그 생명의 능력이, 그 생명의 힘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주님의 무덤을 찾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현장입니다. 사망의 확인장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다함없는 생명을 머금은 심령을 지니고 다시 주님의 무덤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 곳은 죽음이 묻힌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진원지 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이 모래알처럼 생명을 잃었을 때에, 그들은 주님의 무덤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래 막달라의 창녀였습니다. 그녀의 심령이 사막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창녀가 참생명을 머금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심령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집이 아니라 주님 무덤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집으로 돌아갈 제자들은 바른 곳으로 갔고, 다시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못 갈 곳으로 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미래의 무덤으로 돌아 간 것이요, 막달라 마리아는 참생명의 샘으로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란 실은 모두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란 거창한 호칭은 지니고 있으되, 그 심령이 황폐한 사막이어서 보금자리 같이 보이는 무덤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창녀라는 오명과 전력을 쓰고 있으되, 생명을 머금은 심령으로 무덤 같아 보이나 실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본문 10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두 제자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주님을 따라 다니긴 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심령이 생명을 머금치 못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면 할 수록 자신의 늙어짐과 병듦과 죽어 감을 확인할 뿐인데, 제아무리 아방궁으로 돌아 간다한들 어찌 그 결국이 무덤으로 끝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반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자기를 이미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 심령이 생명을 머금고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집착함이 없이 영원한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할 때 어찌 무덤인들 영원한 생명의 호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 입니까? 아니면 주님에게 입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나 자신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진리입니까? 우리는 이 아침에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수십년 전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자살이 열병처럼 유행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자살자들은 후지산을 자살지로 선택했습니다. 후지산 정상에 있는 분화구 속으로 뛰어 내려 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당국에서는 자살을 막기 위하여 분화구 곁에 경비원을 두기도 해 보았지만, 관광객들 사이에서 갑자기 뛰어 내리는 사람을 제지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당국에서는 어느 날 분화구 입구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설치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라."

    죽음의 노예된 너 자신을 벗어나 생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표어였습니다. 죽음에 사로잡혀 후지산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그 팻말을 보고 되돌아가는 자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한 청년이 자살을 결행키로 하고 후지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워낙 죽음에 몰두해 있느라 그 팻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후지산 정상에 서서 분화구 속으로 뛰어 내리려 하니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생각 끝에 비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살을 포기하고 뒤돌아 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눈에 팻말이 보였습니다. 무슨 팻말인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라."

    그 팻말을 본 청년은 죽음의 노예 된 자신에 사로잡혀 다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머뭇거림 없이 자살을 감행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아침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되 바르게 생각해야 하고, 그 기준은 언제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그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어디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죽음의 분화구를 향해서 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근원을 향하여 입니까? 우리의 심령은 지금 무엇을 머금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본문 속의 막달라 마리아를 본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억만금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간다 한들, 온 나라의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고 귀가한다 한들, 그 곳에 참생명과 평안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의 결국은 죽음이요, 무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케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가 되게 하옵소서. 생명을 머금은 막달라 마리아가 되게 하옵소서. 자신을 버릴 줄 알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닮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을 끝까지 좇았던 막달라 마리아를 본받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우리의 이 작은 삶을 통하여 무덤 같은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일터가, 우리의 사회가 영원한 생명의 진원지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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