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떡먹는 행복(눅 14 : 15 - 24)
  • 조회 수: 21, 2013.08.27 12:47:25
  •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예로부터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표현할 때는 <춥고 배고프다>고 했습니다. 추운 것보다 따뜻한 것이 복됩니다. 배고픈 것보다 배부른 것이 복됩니다. 본문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 한 마디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떡을 먹는 자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식사자리입니다.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서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던 사람이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떡을 먹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떡을 먹는 사람이 복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것은 이 세상의 만찬에서 떡을 먹는 것에 비할 수 없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하는 나라입니다. 이사야 25장 6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서는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행복>을 소유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는 하나님의 섭섭한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섭섭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여러 해 전에 어느 구역을 심방할 때였습니다. 한 가정에서 심방하는 분들을 위하여 점심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 저 가정 심방하는 도중에 연락이 왔는데, 다른 한 가정에서도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가정에서 점심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집집마다 음료수 마시고, 간식먹고, 배가 점점 불러서 한 가정 점심도 먹지 못할 판인데, 두 가정 모두 점심 준비를 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그날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날 점심을 두어 시간 차이로 두 번 먹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선배 목사님들이 가르치기를 <심방 대원들의 첫 번째 사명은 주는 대로 먹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 심방대원은 주는 대로 먹어야 할까요?  그것은 준비한 사람이 섭섭할까봐 그렇습니다. 차려 놓았는데, 잘 먹지 않으면 참 섭섭합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말씀합니다. <목사님, 그 때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많이 안드셨지요? 솜씨가 없어서 그랬겠지만, 섭섭합니다. 우리 식구가 그걸 다 먹느라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 분은 몇 년 전의 일도 잊지 않고 기억하다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건 좀 빨리빨리 잊는 은사도 받으십시요.
            어쨌든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섭섭함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잔치를 여셨습니다. 그런데 와서 먹어야 할 사람들이 와서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섭섭해하신다는 것입니다. <떡을 먹는 복>을 베풀었는데도, 그 복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첫째로, 우리부터 하나님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유대인의 잔치 예법은 잔치가 열리기 오래 전에 초청장을 보내서 초대를 합니다. 그리고 잔치 날이 되면 존경의 표시로 사람을 보내서 모셔 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정중하게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잔치날이 되어서 종들을 보내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핑계를 대면서 거절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 산 밭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장가들었으므로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장가를 들면 일년 동안 군복무도 면제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초대받은 그 날 결혼한 사람은 아닙니다. 벌써 결혼하여 이제는 충분히 잔치에 올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종들이 돌아와서 결과를 보고하자 주인이 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분노>는 섭섭함이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처음에 초대했을 때는 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는데, 정작 잔치가 열리는 날이 되자 아무도 오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 풍습에서 잔치 초대를 거절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극도로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주인은 분노했습니다.
            이 비유는 바로 오늘날 사람들의 영적 문제를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잔치에 오기에는 자기 일에 너무 바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대를 사람의 초대보다 못하게 여깁니다. 윗사람이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당장이라도 달려갑니다. 달려가서는 <왜 부르셨습니까?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저 와서 먹고 즐기라>고 하시는데도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의 영적 패역함입니다.
            오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은 그들이 다 부요하기 때문임을 말씀합니다. 소를 사고, 밭을 사고, 장가들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부릅니다. 하나님의 상에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하나님이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을 그저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차려놓은 세상의 잔치자리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에 차려진 음식은 사람이 차리는 상에 있는 음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공한 사람의 상 위에 음식은 많아도 행복은 차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부자의 잔치상에 비싼 음식은 많아도 식욕은 올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에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식욕이 있습니다.
            권력가의 잔치상에는 많은 또 다른 권력자들이 앉아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차별이 있어서 못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에는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 차별 없는 환대가 있습니다.
            세상의 잔치상에는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는 공허함이 있으나, 하나님의 상에는 충만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잔치는 끝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의 잔치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잔치떡은 먹어도 죽지만, 하나님의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잔치상으로 달려갑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스스로 잔치를 열려고 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주님은 자신의 부요함으로 스스로 상을 차려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잔치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누가복음 6장 2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에서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먹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떡을 먹어서 좋고,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표시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상의 상징은 교회의 예배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열심히 예배하십시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떡을 잡수십시오. 말씀으로 배부른 행복을 누리십시오. 에배를 통해서 은혜의 떡먹기를 사모하십시오. 은혜의 떡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누가복음 22장 30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음식도 먹는 곳에 따라서 기분도 다르고, 맛도 다릅니다. 아구찜으로 유명한 집에 가서 먹어 보면 정말 맛있는 것 같습니다. 감자탕으로 유명한 집에 가면 정말 맛있다고 느껴집니다. 이름 난 집에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물론 맛도 있겠지만, 그 이름도 한 몫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잔치 잘하기로 소문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 교회가 소문난 교회가 되면 수많은 사람이 영적 음식을 먹기 위해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 음식은 초대받은 사람만 먹는 게 아닙니다. 잔치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면서 하나씩 맛을 보면서 먹어봅니다. 자신들이 먼저 먹습니다.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이 먼저 맛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금번 사랑의 복음 잔치를 통하여 잔치를 준비하는 우리들이 먼저 배부름을 얻게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송재호 장로님의 간증에 많은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틀 동안의 복음 제시를 통하여 더욱 신앙의 근본을 굳게 붙들게 되길 원합니다. 우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교우들이 이 잔치를 우리 자신을 위한 잔치로 알고 매일 저녁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자리를 채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도 신령한 떡을 먹고, 장차 영원한 나라의 생명의 떡도 먹게 되길 기원합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도 떡을 먹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떡을 먹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 떡을 먹게 해야 합니다. 혼자만 먹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눠 먹어야 합니다. 함께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떡은 나누면 나눌수록 내게 돌아오는 양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떡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아집니다. 이게 신비입니다. 은혜는 나눌수록 풍성해집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떼어 나누어 줄 때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아져서 오천명 이상이 먹었습니다. 이번 사랑의 복음 잔치가 디베랴 바닷가의 잔치가 되길 기원합니다.
            함께 떡을 먹으려면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초대를 하면 좋을까요?

            우선 정중한 초대를 해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잔치가 열리기 여러 날 전에 초대장을 보내고, 잔치 당일에 모시러 가는 초대는 정중한 초대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의 복음 잔치를 위해 기울인 노력이 정중한 초대입니다. 미리 이름을 확인하여 하나님께 적어서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초대장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모시고 올 차례입니다. 이 정중한 초대를 잘하게 되길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갑작스런 초대입니다.
    예고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가서 데려오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정중하게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오지 않았으므로 잔치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 때 주인은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젠 미리 초대된 사람들만 모셔 오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길거리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과 내일, 모레, 그 다음 날 우리가 할 일입니다. 미리 연락되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빨리 나가서 지금이라도 만나는 분들을 모셔 와야 합니다. 빨리 해야 합니다.
            게다가 빨리 모셔올 사람들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도 데려오고, 장애를 가진 이들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런 사람은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데려와야 합니다. 저런 사람은 아마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미리 제쳐 놓았던 사람들도 데려와야 합니다. 누구든지 초대해서 하나님의 떡을 먹는 행복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세 번째 초대는 억지 초대입니다.
    비유를 보면 길거리에 나가서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이들을 데려왔으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다시 내보냅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을 강권하여 자리를 채우라고 했습니다. 강권한다는 것은 억지로라도 데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잔치에 우리도 이런 초대를 해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과 친척들, 이웃과 친지들을 강권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초청해야 합니다. 

            한 우편배달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두 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기 낡은 가방 속에 들어있는 보잘 것 없는 엽서 한 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엽서 한 장에도 정성을 쏟았습니다. 두 번째는 이 엽서를 전달할 때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은 한 우편배달부에 불과하지만, 자기 배후에는 국가가 있어서 자신의 체신업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자신의 업무를 방해하면 국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믿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앉아 있다가 강력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는 대한민국 우편배달부 일은 잘 하면서 왜 천국 복음은 배달하지 않느냐?>  그는 그때까지 복음을 배달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두 가지 확신을 적용했습니다. 내가 가진 복음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소중한 것이므로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나는 비록 보잘 것 없지만, 결코 마귀가 방해하지 못할 것을 믿었습니다. 내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그 누구도 복음 증거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부잣집에도 가난한 집에도 편지와 함께 천국의 편지도 전했습니다.
            우리 모두 천국의 복음 우편배달부가 되어 금번 복음의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고, 참여하는 모두가 생명의 떡으로 배부름을 얻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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