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목된 가정 (창25:37-34)
  • 조회 수: 121, 2013.01.10 21:41:50
  • 내일부터 추석연휴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추석에는 2800만이 움직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모든 도로가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추석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묘요, 제사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추석을 앞두고 묘지에 가서 벌초도 하고 추석에는 온 식구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와서 음식을 차려 놓고 성묘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명절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제일 중요시 여길 것은 성묘도, 제사도 아니요, 가정 식구들입니다.

     

     유교는 죽은 자를 얼마나 끔찍이 위하는지, 죽은 자의 종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산 자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좋은 명당(明堂)에 수백, 수천 만원을 들여서 묘지를 꾸미고 부모님을 모시고 최고로 비싼 음식으로 제사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살아 생전에 몇 천 원 짜리 따끈한 국밥 한 그릇을 사드리거나 몇 만원 용돈을 드린 것만 못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살아 생전에는 늙으신 부모님을 제대로 돌보지 않던 자녀라도 돌아가신 후에는 빚을 내서라도 장례식을 화려하게 치르고 비싼 돈을 드려서 묘지를 꾸미면 효자라고 불러주는 데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산 자의 종교입니다. 식구들이 살아 있을 때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추석은 식구들끼리 더 화목 되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 식구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지난번 남북이산 가족들이 상봉하는 장면에서 뼈저리게 느꼈을 줄 압니다. 이제는 다 늙어 꼬부라진 어머니와 헤어지는 것인 너무 안타까워서 통곡하는 70대 아들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동안 우리 가까이 살고 있는 식구들에 대해서 너무 등한히 하고 있었음을 깊이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식구들과 화목하게 사는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브라우닝이라는 시인은 '즐거운 가정은 일찍 맛보는 천국이다.'고 했고, G.엘리어트라는 분은 '가정은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며 궁극적 목표라.'고까지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에 굶주린 4종류의 사람들을 말한다면 환(鰥), 과(寡). 독(獨), 고(孤)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환은 아내가 없는 홀아비, 과는 남편이 없는 과부, 독은 늙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 고는 어려서 부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식구들이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거미는 홀로 집에 독처하고, 귀뚜라미는 만나면 혼자 남을 때까지 서로 싸운다고 하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사랑을 나눌 때 참으로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정의 화목을 어떻게 이룰 수가 있을까? 오늘 이삭의 가정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가정의 화목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줄 믿는 데 있습니다.

     가정을 최초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시오, 자녀들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부모, 남편이나 아내, 자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함께 살도록 맺어주신 줄 알고 서로 사랑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따라 아담과 이브를 짝지어 주시어 가정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느 신자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데 가정에 너무 매여서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탄식합니다. 물론 너무 가정에 매여서 교회의 일은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허구헌날 교회에 와서 충성한다고 하면서 가정의 일을 등한히 하는 것도 아주 잘못된 태도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에게 맡기셨다면 가정도 하나님이 만드시고 우리에게 잘 다스리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 보면 가장 모범적인 부부가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바로 그러한 부부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성군(聖君) 다윗도 다 여자관계가 복잡합니다. 그 당시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시기였기에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삭만은 오직 자기 부인 리브가 외에는 어느 여자와도 관계를 맺지 않을 정도로 깨끗함으로 부부의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어떻게 해서 이런 귀한 자세를 지킬 수가 있었을까? 자기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결혼시킬 때에 자기의 신실한 종을 멀리 하란 땅에 보내서 신부 감을 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그 종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주인의 며느릿감을 찾은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했습니다. 또한 창 24:63에 보면 이삭은 자기의 종이 자기의 아내 감을 찾을 때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자기 부인 리브가는 하나님이 짝지어 준 줄 믿었고, 또한 그 여인과 귀한 부부 관계를 지키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인 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이 주신 줄 믿어야 하며 여러분의 부부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줄 믿고 주안에서 화목하여야 합니다. 입으로라도 범죄 하므로 짝지어 주신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부인은 기독교인이면서도 너무 쉽게 하나님께 입으로 범죄 합니다. 지금 내 남편, 내 아내가 내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짝지어 준 줄 믿고 어찌든지 귀한 부부가 되려고 애쓸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남자는 격려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고 여자는 사랑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부부 하나·사랑 하나」라는 책에서 보면 '아내의 칭찬이 남편에게는 보약'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자녀가 부족한 것이 많을지라도 눈 여겨 찾아보면 좋은 장점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 장점을 자주 칭찬하거나 격려하면 새로운 용기가 솟구침으로 제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꾸 비판만 하면 점점 의기소침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른 이와 비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한번은 텔레비죤에서 보니까, 이면우라는 교수님이 나와서 말하는데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내들은 다른 남편을 칭찬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고동창회에 다녀와서 한다는 소리가 '아무 개는 고등학교 때 공부도 못하고 별 볼일이 없는 아이였는데 남편을 잘 만나서인지 좋은 옷에 좋은 보석에 얼마나 뻐기는지 눈꼴이 시어서 혼났어요?'라고 하면 남편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제라도 마음 고쳐먹고 그런 놈 만나 잘 살아 보라. 그러나 네 나이에는 힘들 것이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집에 부부가 초대받아 갔을 때, 우리 남편들은 그 집 요리가 대단히 맛이 있다고 너무 칭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아내는 속으로 화가 나서 말하기를 '이 빌어먹은 놈아, 이 집의 남편의 수입이 얼마인 줄 아는가, 나도 그렇게 돈만 불어다 주어 보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의 좋은 면을 존경하여 진정으로 격려한다면 마침내 성숙한 부부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은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이었습니다. 아내인 리브가가 거의 20년간 아이를 못 낳음으로 독자인 이삭을 몹시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아내를 비난하거나 다른 여인을 받아 들여서 아이를 낳을 만도 한데 이삭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창 25:21에 보면 이삭은 아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기도 응답으로 자녀를 허락했던 것입니다.

     

     또한 리브가는 남편의 실수를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남편인 이삭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다. 창26장에 보면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흉년이 들어서 그랄 지방으로 내려갔는데 리브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저 여인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삭은 자기 아내 때문에 살해당할까 염려하여 자기 누이라고 속였던 것입니다. 너무나 남자로서 비겁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내에 입장에서는 그런 남편을 향해 '내가 당신 같은 남자를 의지하고 살았다니, 한심하다.'라고 비웃으며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리브가가 남편을 비웃었다는 말이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이삭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내 리브가의 역할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769년 8월 30일 페스탈로치는 23세, 안나는 30세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희망에 따라 농토를 사서 대자연 속에서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밤낮 농사에 정력을 쏟았지만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습니다. 페스탈로치는 마침내 농원을 그만두고 빈곤한 아이들을 위해서 자기의 있는 비용을 다 들여서 일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안나도 같이 가사 일체를 정리하고 이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바짝 마른 거지같은 아이들, 병든 아이들, 도저히 손댈 수 없는 나쁜 아이들이 계속 모여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 불쌍한 고아들을 보며 울었습니다. 이 불쌍한 아이들을 꼭 행복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상실현에는 많은 고난이 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안나의 옷가지가 하나 둘 씩 아이들을 위한 식량으로 바뀌어져갔습니다. 어떤 때는 침착해졌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나쁜 길로 걸어가고 있었고 도망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안나는 실망하며 자포자기하는 남편 페스탈로치에게 '하나님을 믿어 주십시오.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우리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맙시다'하고 남편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러한 아내를 통해서 페스탈로치는 교육계의 성자라는 이름을 남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부는 가정의 두개의 기둥입니다. 이 두 기둥이 가정을 버티는 한까지 그 가정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부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가정, 짝지어 주신 부부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가정의 화목은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데 있습니다.

     가정이 하나의 나무와 같다면 가정의 뿌리는 부모, 줄기는 부부와 같다면, 그 열매는 자녀인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가정은 뿌리가 튼튼한 가정이요, 부부애가 돈독한 가정은 어떠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가정이요, 자녀를 위해 열심히 교육하는 가정은 열매가 풍부한 가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의 가정은 부모를 잘 공경하고 부부애가 돈독한 가정이었으나 이 가정의 큰 결함은 자녀들 문제였습니다. 쌍둥이가 생겼는데 에서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끝없이 다툼과 분쟁이 있었는지 창 25:22 "아이들이 태 속에서 싸우는 지라."라고 할 정도였고 해산할 때도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자가 야곱일 정도였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어릴 때부터 얼마나 싸웠는지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철이 들면 날 줄 알았더니 청년이 되니까, 장자의 직분을 얻기 위해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배고픈 것을 악용하여 팥 죽 한 그릇에 그 직분을 받아 냈고, 늙으신 아버지를 속이어 축복기도까지 받음으로 에서와 야곱 사이에 살인적인 내분이 일어나 동생은 먼 나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고 에서는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는 자가 되어 점점 비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정은 비록 가난할지라도 부모와 자녀가 화목하고 부부가 화목하고 자녀와 자녀들끼리 서로 우애하며 화목할 때 가정은 천국의 향기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집에 좋은 음식에 모든 것을 갖춘 부자일지라도 식구끼리 불화 하면 지옥의 악취가 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평화롭고 온유하던 이삭의 가정이 이런 비극적인 가정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들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말씀과 훈계로 교육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자녀들을 인간적으로 편애(偏愛)한 탓이었습니다. 창 25:28에 보면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사냥을 잘하는 남자다운 에서를 좋아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거칠기 그지없는 에서는 싫어하고 다소 고분고분한 순종적인 야곱만 사랑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리브가가 야곱을 편애한 이유는 창 25:23에 보면 리브가가 아이들을 잉태했을 때 한번은 기도하는 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기를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리로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했던 탓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였다는 예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리브가는 야곱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아버지를 속이어 축복 받도록 술책을 부린 것은 형제 사이에 살인적인 증오를 심어 놓음으로 올무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그렇더라도 어머니의 입장에서 자기 몸에서 태어난 에서를 위해서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어 달라.'고 중보의 기도를 드리었어야 옳았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편애한다는 것은 다른 형제들에게나 자신에게나 다 독(毒)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자녀들에게 음식을 먹일 때 너무 과식을 시키어도 병이 나고 너무 못 먹여도 병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이런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큰아들만 사랑하거나 공부를 잘 하는 아이만 사랑하고 쩍하면 비교를 합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인가? 너의 형에 반만 따라가라.' 혹은 '너는 형으로써 창피하지도 않니? 네 동생은 전교에서 몇 등인데 너는 네 반에서 20등 안에도 못 들다니'라고 비교하여 야단을 칩니다. 심지어는 조상까지 들먹여 가며 욕질을 해댑니다. '저 큰애는 즈 애비 닮아서 게을러요, 공부는 지지리 못하는 주제에 먹는 데는 일등이에요.' 혹은 ' 저 눔의 새끼는 김가 놈의 자손이 아니랄까 봐 밤낮 일만 저지르고 다니니, 이 눔아, 이제는 네놈 때문에 창피해서 교회도 못 나겠다.'라고 합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편애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 26:34-35에 보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라고 했고 야곱은 엄마가 거짓말과 거짓 수단으로 과보호한 결과 일생 동안 거짓투성이의 삶을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됩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우리에게 맡기신 줄 알고 다소 부족하더라도 십자가 사랑으로 그 허물을 덮어주고 싸매 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에는 이런 재미난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 가정하면 어느 것을 기억하세요? 저는 가정하면 내게 가장 남는 이미지는 이불이라는 생각을 해요. 우리 가정은 한 이불 속에 우리는 열 식구가 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 내 동생들 다 한 이불에 잤어요. 한 이불에 자는 가정, 한 이불로 만족하는 가정,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얼마나 이가 많은지 산맥을 넘고 넘어서 아버지 이가 내게 오고 내 이는 동생에게 가고 어머니 이가 동생들한테 가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까 전부 이 사냥을 해서 다 잡고, 겨울에는 아예 추울 때 영하10도 될 때, 밖에 내 놓으면 업니다.'

     

     '얼어서 털면 눈 오듯이 그냥 떨어져요. 그런데 서까래는 안 떨어지니까 호롱불에 죽 태우면 집안에 꽁치 굽는 냄새 같은 것이 진동을 하는 거예요. 이불입니다. 이불 안에서 우리는 모두 자라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들 기를 때 계속 아이들과 한 이불에서 잤어요. 그렇게 길렀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가정이라는 이불에는 용서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불은 모든 것을 덮어 줍니다. 가정만큼은 죄가 죄가 안되고, 실수가 실수가 안됩니다. 허물이 허물이 안 됩니다. 공부를 못해도 핸디캡이 있어도 열등감이 있어도 부족함이 있어도 가정만큼은 그런 걸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몸이 건강하지 못해도 가정만큼은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가정은 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사랑의 이불로 어떠한 허물도 덮어주는 곳입니다. 부부도 서로 허물이 많지만 사랑의 이불을 덮고 삽니다. 그러므로 잘난 자녀나 못난 자녀나 건강한 자녀나 장애인 자녀나 착한 자녀나 탕자 같은 자녀나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이불로 덮어주어야 합니다. 그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 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거듭나게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자녀의 가정의 미래요, 열매이니 그 자녀들의 모든 허물과 부족을 십자가 사랑으로 덮어주면서 말씀과 훈계로 잘 양육하십시오. 그 때 하나님이 강하게 도우셔서 가정과 사회 앞에 귀한 인재가 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가정의 화목은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욕심으로 움켜쥐려고만 하는 가정은 마침내 욕심으로 가득찬 어두운 가정이 되지만 사랑으로 나누어주기를 기뻐하는 가정은 점점 사랑의 샘이 솟아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창26장을 보면 이삭은 속된 말로 나약하고 비굴한 자처럼 보입니다. 어느 해 흉년 때문에 이삭의 가족들이 그랄 지역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곳 주민들은 그 가뭄 속에서 대단히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이 강하게 축복해 주시니까, 창26:12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므로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랄 지역 사람들이 대단히 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기의 방법으로 이삭의 가정들이 쓰는 우물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고대 근동(近東) 지방에서는 우물은 큰 재산이었습니다. 아마, 우물을 파려면 수백 명의 인원들이 동원되어 여러 달 동안 수십 길을 파 들어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는 우물 하나를 파게 되면 마치 하나의 피라미드를 건설하거나 한 지방을 정복한 왕처럼 매우 유명해질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그 지역의 전쟁은 다른 국가를 점령하거나 아니면 우물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나고는 했습니다.

     

     그 만큼 우물은 큰 재산이요. 그 족속들의 생명 줄이었습니다. 자, 이런 엄청난 재산을 와서 막아 버렸으니 보통은 전쟁을 일으킬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삭을 보십시오. 싸우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곳 주민들이 와서 빼앗았습니다. 이삭이 겁쟁이라고 생각하고 번번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같습니다. 이삭은 다시 양보하고 다른 곳에 또 막대한 돈과 인원을 동원하여 새 우물을 팠습니다. 다시 와서 뺐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기를 네 번이나 했습니다.

     

     그 동안 이삭에 속한 젊은 장정들은 '주인님,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기만 합니까? 우리도 아브라함 할아버지처럼 전쟁을 일으켜서 다시는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혼쭐을 내주어야 합니다.'고 간곡히 건의했겠지만 이삭은 '가만 두어라. 빼앗으면 좋은 일을 하는 셈치고 양보하고 또 파자.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니까, 다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만 하니 젊은 사람들은 복장이 터질 지경입니다. 이삭인들 왜 화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엄청난 재산의 손해요, 마음의 상처요, 분노의 삭힘이요, 자기 족속들의 사기 저하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인내하고 인내하면서 또 양보하고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가정이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온유한 자가 땅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온유한 이삭을 축복하시는데 창26:28절을 보면 그랄왕 아비멜렉이 친히 찾아와서 맹약을 청하기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적 권위를 높이 세워 주시니까, 칼 한 번 쓰지 않고도 적들이 두려워하며 오히려 와서 우리를 해하지 말아 달라고 화친(和親)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웃 사랑 때문에 물질의 손해, 마음의 상처만 받는 것같더니 하나님은 손해 본 몇 배로 채워 주시며 영적인 권위를 세우 시사 원수 앞에서 상을 베푸시는 역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성도들이 이웃을 위해서 나누어주기를 기뻐 하는 자, 양보의 우물을 파는 자, 대적하는 자에게 온유하게 대하는 자를 기뻐 하사 몇 배로 갚아 주시며 또한 영적 권위까지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카네기의 가정은 그가 어렸을 때 스콧트랜드에서 너무 어려워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하는데 모든 가구나 재산을 다 팔아도 미국에 가는 여비만도 20파운드나 부족합니다. 모든 식구들이 큰 근심에 싸인 채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어린 카네기에 마음에도 얼마나 조바심을 쳤을까요? 그런데 어머니의 친구 에라파커슨이라는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도와주어서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43세, 어머니는 34세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도와준 가정에서 세계적인 부자, 강철계의 대재벌 카네기가 나온 것입니다. 그 카네기는 어렸을 때의 그 고난 중에 받은 사랑의 고마움을 깊이 깨달았기에 그가 부자가 된 후에도 엄청난 선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카네기는 재벌이 된 후에 많은 선한 사업을 했습니다. 미국 각 지역에 많은 도서관과 사회사업, 수많은 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하는 등 엄청난 일을 했는데 하물며 그러한 카네기가 자기 가정이 대단히 어려울 때 도와준 그 여인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여인이 도와준 것은 몇십 파운드에 불과해도 그 여인에게 갚을 것은 수백 배, 수천 배가 되었을 줄 압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뿌린 씨앗은 반드시 많은 열매를 뿌린 자에게 갚아 주시는 것이니,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도 이웃에게 사랑의 우물을 많이 파주는 삶을 살아 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그런 가정과 식구들에게 화목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넘치게 채워 줄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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