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우리를 성전 삼으셨으니(요19:25-27)
  • 조회 수: 624, 2013.06.20 10:57:17
  • 이 해도 이제 11월이 마지막 가고 12월 한 달만 남았습니다. 우리 각기 충성하던 각 기관의 모든 회원들께서는 98년도의 임무들을 끝내고 총회를 하고 새 임원들을 뽑고 이렇게 됐습니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보면서 오늘 말씀을 함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따라 저는 설교할 목사로서 부담이 되는 복음송 또 사회하는 목사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오늘따라 좋은 일이 있으리라 라는 내용으로 또 복음송을 부르다가 거기에다 없는 가사까지 넣어 가지고서 좋은 말씀 있으리라 좋은 말씀 있으리라 했는데, 설교할 사람으로서는 과연 좋은 말씀이 성도님께 돌아가야 할텐데 생각되고, 또 기도도 사회하시는 기원기도도 오늘 좋은 말씀이 있을 거라고 기도를 하는데 또 우리 장로님께서도 대표로 기도하면서 아름다운 말씀이 있을 것이라 이렇게 기도하셨는데, 오늘 과연 이 본문을 통해서 일년 동안 수고하신 여러분께 또 금년에는 우리 성도들의 그 성숙된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많이 부담되는 주의 말씀도 우리가 생각해보고, 말씀 앞에서 책망 받고 우리 자신을 쳐부수고 또 쳐 복종하고 이런 일로다가 힘들었는데, 오늘 좋은 말씀 아름다운 말씀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아름답든지 안 아릅답든지 목사가 어떻게 그것을 조정할 수 있겠습니까만 주의 말씀으로 위로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예수님 우리를 성전 삼으셨으니」라는 앞부분의 내용만 제시했습니다. 예수님 우리를 성전 삼으셨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세상 오실 때 예수님을 둘러쌓던 태를 제공한 그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오실 때 하고많은 사람가운데 그 마리아를 당신의 성전 삼으셔서 뱃속에 있을 때에는 태로서 예수님을 부르시고 또 탄생하신 후에는 그 어머니의 젖을 먹었으며 또 그 어머니의 품에서 그 집에서 다 성장했던 것을 보게 되는데 우리 주님을 육신적으로든지 영적으로든지 모신 사람이라면 그를 성전이라 하였고 주님이 계신 곳은 성전이라 하였으니 과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마리아 그녀는 얼마나 믿음이 좋았길래 또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깨끗했길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품을 수 있는 감쌀 수 있는 태를 제공한 성전의 역할을 하였던 여성이 되었겠는가? 
    물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모친이시니 이삭을 낳은 사라보다야 나아야 되겠지요. 또 사무엘 선지자를 낳았던 그런 한나보다야 어디가 달라도 다른 데가 있고 또 믿음도 훨씬 좋았겠지요. 세례 요한을 낳은 그 엘리사벳 그 부인보다는 훨씬 무엇인가 훌륭한 데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때 그 여자를 택하셔서 마리아를 예수의 성전 되도록 하셨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무엘보다 낫고 또 세례 요한보다 더 크신 이시며 이삭보다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어머니 역시 그렇지 낳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이 성전 삼으셨던 그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되면 가히 실망이 되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예수님을 수태할 때의 마리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조금 앞으로 가셔서 누가복음 1장에서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누가복음 제 1장 26절 이하에서 잘 나타나는데 우선 먼저 제가 설명을 드려본다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독생자가 태어날 씨앗을 가지고 씨앗의 말씀을 가지고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가 좀 묘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인사를 하게 됩니다. 
    천사가 와서 마리아에게 인사를 하게 되면 적어도 천사가 온 줄쯤은 알아야 되고 그 인사가 매우 축복스러운 인사이니 아멘 감사합니다 하고 찬양을 돌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텐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이 마리아의 첫 반응은 무엇이냐? "이런 말이 어쩜인고? 이게 무슨 뜻인고? 이런 일이 어찌 있을꼬…." 그렇게 말하게 됩니다. 
    또 천사가 그러나 그 여자를 그렇게 한다하여 떠나가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성령이 네 위에 임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면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축복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도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뭐라고 대답을 했는고 하면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럽니다. 지금 사내가 문제입니까? 동침이 문제입니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그 여인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지금 잉태시키겠다는데 거기에 무슨 사내가 필요합니까?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엉뚱한 소리를 했지만 가브리엘은 떠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명을 했던지 다른 여자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격없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네 친족 엘리사벳을 아느냐? 늙었지 않느냐. 자식을 못 낳는 여인으로 이미 다 알려져 있지만 벌써 아이를 가졌느니라. 잉태한지 6개월이나 되었느니라."라고 까지 얘기를 합니다. 그때 그랬더니 어쩔 수 없이 "주여 그렇다면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그 뒤로 이제 천사가 떠나갑니다. 
    이제 되었겠지 싶어서 떠나가는데, 떠나가자 말자 바로 산으로 자기 아주머니 있는 엘리사벳 있는 데에로 달려갔습니다. 엘리사벳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사벳은 자기 뱃속에 들어있는 6개월 먼저 벤 세례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가 오는 것을 보고서 조금 전에 가브리엘이 말하여주면서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수태되어 예수님의 씨앗이 이제 자라기 시작하는 시점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6개월 된 아이가 이리 쥐어박고 저리 쥐어박으면서 막 뜁니다. "주의 모친이 오셨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복 받았습니다." 하면서 이제 성령에 감동되어서 얘기를 하니까 비로소 그때 마리아는 그런가보다 해 가지고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이런 형편을 보게 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 이하에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도무지 믿지 못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26-35) 하면서 계속해서 그 뒤에 이제 설명을 하게 됩니다.
    하게 되었더니 그 설명이 끝난 후에 이제 천사는 떠나가고 마리아는 이제 혼자 남게 되었는데 마리아는 천사가 떠나가자마자 그 뒤끝을 바로 잡아서 39절에 보십시다.
    "이 때에(바로 그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1:39-46) 
    그러니까 이것은 마리아가 끝내 주님을 찬양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의심이 많아서야 되겠는가? 예수님을 모실 만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천사의 말을 못 믿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 마리아에 비하면, 한나는 어떠한 여성이었는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훨씬 마리아보다는 더 잘 믿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17절에 천사도 아닌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들은 한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늘로부터 천사가 직접 왔습니다만 한나에게 나타난 이는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이 불량자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가 아이 문제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서 대낮에 간절한 마음으로 입술을 떨며 기도를 하고 있었더니 이 엘리 제사장이 와 가지고서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하는 소리가 "여자가 독주에 취하여 대낮부터 미쳤도다. 여기가 어디인데 이런식으로 미쳐서 떠드느냐?" 라고서 말했습니다. 그는 영감이 충만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목사쯤 되려면 제사장쯤 되려면 기도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 정도는 알아야지요. 
    그것도 모를 정도의 제사장이라면 참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믿을 수도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천사도 아닌 엘리, 자식 둘을 불량자로 두었던 엘리, 열심히 기도하는 줄도 모르고 독주에 취한 줄로밖에 몰랐던 영감도 없는 엘리, 그 엘리 제사장이 한나를 향하여 "평안히 가라. 너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으니 하나님께서 너를 돌아보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한마디 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사무엘상 1장 18절 하반절에 보면 뭐라고 표현되어 있는고 하면 "여인이 그때 이후로 얼굴에 평생에 수색이 없으니라." 그랬어요. 이 한나 라는 여인은 천사를 만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별로 영감 있는 제사장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이 한마디 해준 것으로써 그 말을 듣자부터 그 이후로 한번도 의심한 일이 없었다 그것입니다.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이런 일이 어찌 있으리요?" 이런 정도의 무슨 불안이라든지 이유를 따지는 것 전혀 없고 "여인의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사무엘상 1장 18절 하반절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아이가 날 때까지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는 말은 그때로부터 엘리 제사장의 말을 축복으로 들은 이후부터 이 여인의 마음속에는 불신이 없었다 그겁니다. 이런 한나에 비한다면 마리아의 신앙은 형편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한나는 자기가 서원하여 아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고 난 다음에 그 사무엘을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습니다. 사무엘이 자라가면서 그 키에 따라서 옷을 지어다가 늘 성전으로 가지고 가서 입혔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나님의 종 되도록 자기가 서원하여 바친 이상에는 그 아이를 성전 뜰 밖으로 자기 집으로 오도록 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갔으면 갔지 성전 뜰 안에 있는 아이를 나오도록 한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철저했는지, 사무엘상 1장 26절로 28절에 보면 그는 그 아이가 점점 자라가는데 단 한번도 자기 집으로 불러내지 아니하고 자기가 가서 그 키에 따라서 옷을 지어 입혔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한나에 비한다면 마리아 그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보낸, 그것도 천사들 중에 수많은 천사 중에 저 끄트머리에서 일하는 천사가 아니라 가브리엘이 직접 왔다 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직접 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네가 이제 밸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처음에는 믿었거나 못 믿었거나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느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뱃속에 들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이미 그것을 보고서 "너는 주님의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이 여자는 동침한 적이 없습니다. 사내를 아직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배었고 아이를 낳았다면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 여자로서는 도무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마리아에게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내를 알기 전에 아이를 잉태했고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직접 말씀했고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열두 살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어머니가 예수를 데리고 하나님의 전에 절기를 지키려 함께 갔는데 절기를 지킨 후에 마리아는 후에 동침하게된 자기 남편 요셉과 함께 다시 갈릴리로 내려옵니다. 하루를 내려오고 이틀쯤 내려오다가 가만히 보니 아이가 없습니다.
    "이 아이가 어디 갔지? 예수가 어디 갔어? 예수가 어디 갔어?" 한참 하다가 되찾아서 올라가고 올라가는데 삼일만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다시 가서 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안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과 둘러앉아서 말씀을 하시기도 하시고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고 대답하시기도 하는데, 둘러앉은 많은 성경 많이 아는 학자들이 박사들이 이 열두 살 어린 아이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말말이 아주 기이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마리아가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예수야, 아이야, 어찌하여 네가 이런 일을 하였는고? 나와 네 아버지가 내려가다가 사흘동안이나 얼마나 근심하고 찾았는지 줄 아는가?" 이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특색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나이까?" 그럽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겠나이까?" 과연, 될 줄을 모르겠나이까 라고 했는지 한번 찾아봅니다. 누가복음 2장으로 가셔서 또 살펴보도록 합니다. 누가복음 제 2장 41절 이하를 살펴봅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2:41-49)
    있어야 한다 라는 말과 있어야 된다 라고 하는 말은 다릅니다. 있어야 된다는 말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왔으니 나를 누가 손잡고 데려가기 전에는 내 아버지 집에 당연히 있어야 아버지의 자식이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나이까?"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집은 내 아버지의 집이요 내 아버지를 모신 곳이니 아들이 아버지 집에 와서 있지 어디 갔을 것이라고 혼자 가셨습니까? 꼭 데려가려면 나를 여기서 데려가지 어떻게 그냥 내려갔더이까? 그리고 찾으면서 고민을 하였다니 나를 왜 어디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까?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나의 아버지는 요셉이 아니요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아버지의 집에서 있을 수밖에 더 있습니까. 어머니 어디 가셨었습니까? 나를 데리고 가야지 아버지 집에 있는 나를 두고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나를 두고 그냥 갔더이까?"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드리고 있지만 50절을 보십시다.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랬어요. 처음 수태될 때에도 "이런 인사가 어찜이뇨?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이런 일이 있겠느뇨?" 또 나중에 그러고 보니 또 아, 아이는 그렇게 이미 배었고 자기 친족 엘리사벳의 아이가 뛰면서 말하는 것을 보고서 맞기는 맞구나 해서 사내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태가 되었고 그 아이를 낳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면서 낳기까지 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 오기도 하고 별이 그 장소로 옮겨오기도 하고 하니 아들을 낳을 때 얼마나 이것은 참 특수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는 그 순간에 또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이 열두 살 되는 동안에 또 잊어 버렸습니다. 어느새 자기 자식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따라오지 않았느냐?" "어머니,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더이까?" 이렇게 그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어도 그 어머니를 포함한 그의 아버지, 낳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요셉도 그 양친으로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 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은 또 특색이 있습니다. 5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1-52) 이렇게 이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낚아채듯이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졸졸 예수님이 잘 따라옵니다. 따라와서 예수님은 또 그때로부터 10년 20년 이렇게 지내면서 순종만 합니다. 그리고 받들기를 합니다. 아주 효자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참 또 자기 자식처럼 이제 아무 부담 없이 키워 가는데 그러나 이 여인은 "이상하네. 교회에 가서 성전에 가서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모르셨나이까 한 말이 무슨 말인고 하는 말들을 이제 마음에 두고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나이 삼십이 되셔서 다 성장하신 후에 이제 그 집에서부터 잠시 잠시 낮에는 나와서 그 위대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능력을 행하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기 시작하는데 그 처음 이적이 가나 잔칫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2장엔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가나 잔치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어머니가 집안에 결혼식이 있으니 어머니가 갔습니다. 아들로서 안갈 수가 없어서 예수님은 그때 이미 제자도 몇 명 데리고 다녔는데 제자들과 함께 어머니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가나 혼인 잔치 집에 갔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예수야, 이제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랬어요.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무례한 요구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여자여, 이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했나이다. 내가 어머니의 집안 결혼식에 포도주나 만들어주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까? 내가 능력을 행할 때가 아닙니다." 하고서 일단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는 말합니다. "하인들아, 이 예수가 시키는 대로 다 해라."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냥은 못 갈 것이다 그것이지요. 그냥은 못 갈 것이다. "특수한 아이이니 성령이 함께 하시니 능력이 있으면 내 집안을 위해서 해야지, 나를 위해서 해야지, 그냥 못 갈 것이다. 이 예수가 뭐라고 하시든지 시키는대로 하라."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의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자기에게서 능력을 얻어내려고 하는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을 그 집안 결혼식을 위해서 쓰려고 하는 어머니를 거절하지 못하고 포도주를 만들어내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은 하고 싶어서 했던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체면을 위해서 만들었던 그런 이적인 것을 성경은 그대로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면서부터 주님께서는 이제 바깥으로 다니시면서 이 고을 저 고을 다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칩니다. 그리고 또 귀신을 쫓아냅니다. 많은 능력을 행하시며 천국복음을 전하시니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제 서기관들이 내려왔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온 백성이 예수께 기운다 하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내려와 가지고서 예수를 향하여 뭐라고 평했는고 하니 "하는 짓을 보니 바알세불 집혔구나." 그랬어요. 
    아주 점잖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귀신집혔구나. 귀신들렸구나. 신들렸구나' 이런식으로 말했습니다. "바알세불 집혔구나." 이쯤 되었으면 마리아를 포함한 예수의 이모라든지 또 마리아의 남편이라든지 예수 뒤에 요셉과 동침하여 낳은 자식들이라든지, 이런 모든 친속들이 예수님을 방어하고 예수님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거해야 될텐데 마리아만은 예수님이 탄생하는 과정부터 모든 것을 알았으니 바알세불에 집혀서 이런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능력을 행한다고 자기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어야 될텐데 방어를 하기는커녕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를 바알세불 집혀서 귀신을 쫓는다 라고 이렇게 공격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한 수 더 떠가지고서 마리아를 포함한 예수님의 친속들은 뭐라고 말했는고 하면 바로 미쳤다 라고 그랬어요. "저 예수는 확실히 미쳤다."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붙들러 돌아다녔어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니 여러분께서 새삼스럽다는 듯이 쳐다봅니다. 그런 성경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듯이 봅니다. 예수님을 배었던 어머니, 예수님을 낳으셨던 어머니 마리아니까 그런 일이 어디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으로 여러분께서 성경을 보실 때 그 내용은 구약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약에 있는 것이니 여러 차례 보셨을텐데도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래서는 안되지 싶어서 그냥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슬쩍 넘어갔던 모양이지요. 
    예수님의 친속들이 그 어머니를 비롯한 예수님의 이모라든지 그 예수님의 동생들 예수님의 누이들이 모여들어 가지고서 서기관보다 한 수 더 떠가지고서 예수 미쳤다 하면서 붙들러 다녔다는 사실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니 의아스럽게 여러분이 보고 계신데 성경을 찾겠습니다. 
    마가복음 3장을 열어보십시다. 마가복음 제 3장 20절부터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의 친속들이 예수를 붙들려고 왔습니다. 묶어 가지고 끌고 나가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뭐냐? 그가 미쳤다 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22절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집혔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배워서 그랬는지 미쳤다 라는 표현은 안 했습니다. 바알세불 집혔다 그런 정도로 표현했습니다. 그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귀신의 왕의 힘을 얻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정도로 빗대어 말하는데 그의 친속들은 붙들러 나왔습니다. 이는 그가 미쳤다. 예수는 미쳤다 해서 붙들려고 나왔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된 사항 속에서 23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고서야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는가? 그들이 스스로 분쟁하면 분쟁하고서야 그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악한 자가 들어왔으면 그를 결박한 후에야 다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겠느냐?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29절까지 이제 주님께서 해명을 다 합니다. 
    "나는 미친 것도 아니요 나는 바알세불 집힌 것도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때에 "때에…" 31절 보십시다. "때에…"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아니라고 그렇게 지금 해명을 하고 계신데도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뭡니까? 지금 주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주님을 에워쌓습니다. 서기관들은 와 가지고서 예수님을 바알세불 집혔다 라고 말합니다. 그의 친속들은 미쳤다 라고 하면서 이제 붙들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이제 스크럼을 짜듯이 둘러싸고 앉아 있습니다. 들어가지 못하고 그의 어머니와 그의 동생들 그의 누이들이 와 가지고서 좀 불러내어 달라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러내어 주는 대신에 "주여, 당신의 모친과 당신의 동생들과 누이가 왔나이다." 보니 남도 아닙니다. 친속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왔습니다. 후에 낳은 동생들이 왔습니다. 누이가 왔습니다. 그러니 보통스럽게 여겨지지 않지요. 예수님의 가족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둘러 서있으면서 예수님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가 밖에서 찾나이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그 어머니가 어떤 뜻으로 왔는지 그 동생들이 무엇 하러 왔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33절에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내 자매요 모친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친은 뭐 하러 온 사람입니까? 내 뜻대로 하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지금 뭐 하러 왔습니까? 왜 예수님을 불러내어서 끌고 가려고 합니까? 왜 붙들고 나가려고 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표현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 예수님을 미쳤으니 끌어내어야 되겠다 라고 했으니 참으로 마리아나 마리아의 친속들 또 예수님의 이모라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그 믿음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하신 대답을 보니 마리아의 신앙수준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알만합니다. 
    하기야 우리도 성령 충만하여 환상을 보고 큰 경험을 하고 우리 육체적으로 느낄만한 경험을 하고서도 처음에는 아주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몇 달은 잘 갑니다. 몇 년은 잘 갑니다. 이삼 년이 지나면 내가 언제 그런 충만을 받았던고, 언제 내가 그런 성령의 체험이 있었던고, 언제 그리 열심히 했던고, 어느새 식어지고 맙니다. 
    이 마리아도 믿다가 못 믿다가, 한 삼 년 지나면 또 잊어버렸다가 또 믿을 일 생기면 믿었다가 한 십이년 되면 잊었다가 또 믿었다가, 삼십 년 되니 또 믿었다가, 못 믿었다가…. 

    오늘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성전 삼고 계신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그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육체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삼십여 년 동안 계실 때에 그 예수님이 육신과 함께 그의 영혼을 거하실 곳으로 마리아의 태를 선정하였습니다. 마리아를 육신이 성전 삼으셨습니다. 물론 그의 영혼도 마리아의 육신을 성전 삼으셨습니다. 
    젖을 먹고 자라는 동안에 마리아의 젖을 먹었습니다. 마리아의 품에서 자라났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려 떠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때까지 마리아와 그의 가족을 자기의 성전 삼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 그가 육신으로는 하늘에 올라가시고 이제는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계시니 예수님이 이천 년 전 그때에 마리아를 성전 삼으셨던 것이나 우리를 지금 성전 삼으셨던 것이나 같은 예수이신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해가 거의 다 간다 라고 하면서 목사는 오늘따라 말씀을 증거하면서 예수의 모친, 예수께서 성전을 삼으셨던 모친 마리아의 믿다가 못 믿다가한 것만 골라 빼어 가지고서 얘기하는가? 예수님의 모친이 그래 가지고서야 되겠는가? 
    '예수님은 대단해야 될텐데 왜 오늘은 목사가 예수님의 모친의 그 신앙 없었던 것 예수님께 대하여 잘못했던 것만 골라 빼어 가지고서 전부 창피를 주는가? 마리아가 들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여러분께서도 아마 그런 생각을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성전 삼으셨던 마리아라면, 예수님의 성전이 될만한 마리아라면 완벽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완벽하지 못한 것을 오늘 들추어내어 얘기를 하니까 기분이 좀 덜 좋기도 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오늘 목사가 말한 것은 목사 개인으로서 말한 것은 없었습니다. 전부 성경에 있는 사실만을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왜 성경은 예수님께서 성전 삼으셨던 마리아의 이렇게 부끄러운 얘기들을 기록했단 말인가? 그런 말 속속 빼어버리면 되지 않았는가? 듣고 보니 목사의 말이 아니라 성경의 말인데 성경은 왜 한마디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우리에게 전해줄 말씀만을 기록했다 라고 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성전 삼으셨던 마리아의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을 다 담아 두었단 말인가? 참 이상하구나.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신앙이 이렇게 왔다갔다하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놓고서도 자기 아들로 알았다가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다가 또 얼마 지나면 또 자기 아들로 알았다가 이렇게 왔다갔다한 사건을 왜 기록했는가? 그것은 오늘 본문으로 채택된 요한복음 19장 25절부터 27절까지의 내용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아까 읽었습니다만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제 19장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친속들입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5-2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리아 비록 신앙이 그리하였어도 하나님께서는 신앙이 그것 밖에 안 되는 마리아를 택하여 예수를 품으실 예수의 성전이 되도록 그 마리아를 하나님께서 택하셨다 하는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와서 처음부터 여자를 보고 하는 말이 좀 이상합니다. '아, 당신은 훌륭하도다. 신앙이 좋습니다. 한나보다도 좋고 사라보다도 좋고 엘리사벳보다도 좋아서 당신은 뽑였소. 당신은 선택되었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입은 여인이여, 평안할지어다." 은혜는 뭡니까? 값없이 그냥 복 받은 자요, 조건 없이 그냥 복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 선물로 보내셨도다. 당신이 뭐가 잘난 것이 있겠소? 당신이 한나보다 낫겠소? 엘리사벳보다 낫겠소? 사라보다 낫겠소? 내가 볼 때 당신은 형편없소. 그런데 당신에게 뭔가 왔소.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의 태에 들 것이요. 당신은 은혜를 입은 것이요." 그랬습니다. 
    '당신은 보상을 받는 것이요'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보상을 받는다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입은 여인이여!" 그랬어요. 가브리엘이 잘 알았습니다.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 가브리엘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 가브리엘은 잘 압니다. 여자가 그런 줄 잘 알고 왔습니다. 
    "못 믿을 것이야. 사내를 알지 못하니 이런 일이 어찌 있으리요 할 것이야. 내가 말하고 오더라도 저 산으로 가서 친족에게 가서 물어볼 것이야. 그러나 그에게 예수를 심고 와."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아서 왔던 가브리엘은 처음 수태할 때부터 마리아가 그렇게 믿음이 없었어도 떠나가지 않고 기어이 그 믿음 없는 사람 속에 예수를 심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심겨진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내 속에 들었구나. 그때 비로소 깨달을 만큼 되었던 마리아, 이처럼 하였어도 예수 마지막 십자가 위해서 피를 흘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옆에 그 어머니를 있게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예수를 밸 때에도 긴가 아닌가 했습니다. 
    열두 살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인줄 알고 설쳐대었습니다. 예수가 삼십이 되어 능력을 행하기 시작할 때에도 나와 내 집을 위해서 살 내 자식의 어떤 능력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 마리아, 예수님의 성전 되었던 이 마리아, 마지막 순간에 붙들어야 될 것은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데 그 곁을 이 친속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 친족이 얼마 전에는 예수님의 행하시는 능력을 보고 미쳤다 하면서 예수님을 끌어내어 빼어나가려고 하던 이 사람 들인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의 이모가 그 곁에 서 있습니다. 죽은 곁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 죽으실 때에 죄목이 무엇입니까? 죽이는 사람들이 왜 죽였습니까? "참람하도다. 사람의 아들인 것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느뇨." 그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인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고?"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로서 이말 저말 해야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모릅니다. 이 아이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사내를 상관하기 전에 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여차 여차히 이 아이는 났습니다. 내가 예수에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했기 때문에 저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도 알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한 번쯤 말해야지 않겠습니까. 
    또 아니라면 거짓말을 해도 아들을 살리려고 해야지 않겠습니까. "이 예수가 나의 말만 듣고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러분에게 했을 것이요. 내가 이 예수에게 미안해서 나이도 틀리고 시기도 틀리고 열 달 이전에 낳았기 때문에 내가 그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요셉 아닌 다른 남자와 내가 상관이 있었소. 그래서 낳은 아이요. 그러나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소." 이런 거짓말을 해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라가 있는 것을 내리도록 해야될텐데 마지막에 예수 성전 되었던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 말 하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는 것을 끝가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마리아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수태될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열두 살 될 때에는 내 아들인 것처럼 알았다가 삼십 되어 능력을 행할 때에 포도주를 만들 때에 내 아들인 것처럼 알았다가 이제 그는 누구의 아들로 알았습니까?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한 대로 전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지 나의 아들이 아니로다 하고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러한 여인을 보고서 십자가 위해서 운명하시기 전에 내려다봅니다. "여인이여 아들이니이다. 당신은 내 어머니입니다. 나는 당신의 태를 사용하였고 당신의 젖을 먹었고 당신의 품에서 자라났고 내가 이 세상을 지금 여기를 떠나서 아버지께로 갑니다마는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 주님의 표현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자기를 성전 삼았던 마리아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믿다가 못 믿다가 했다고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번 성전 삼았던 그 어머니는 끝까지 그의 성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한번 그의 태 속으로 들어갔더니 끝까지 예수님은 그 여인을 십자가에 피까지 흘려주시면서 그를 붙드셨던 것을 보게됩니다. 
    예수님 그는 과연 한번 인연을 맺었으면 한번 관계를 맺었으면 그가 도중에 믿든지 못 믿든지 믿음이 왔다가 갔다가 하든지 말든지 그것을 상관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주시며 "어머니 보시옵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젊은 제자 여기에 나타난 제자는 요한이 되겠습니다만 이 젊은 제자가 그 어머니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여, 옆에 서 있는 그는 네 어머니이니라." "예수님 알았습니다. 이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까지 나더러 예수님처럼 해 드려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서 운명하시고 난 후에 이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라는 내용이 오늘 이 본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께서 예수님의 성전 되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다시 한번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성전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성전 삼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실 때 한나처럼 기도를 하여 사무엘을 주십시요 예수를 주십시요 해서 받았습니까? 엘리사벳처럼 그렇게 해서 받았습니까? 예언의 자식 세례 요한을 밴 것처럼 그렇게 받았습니까? 마리아처럼 하고 있던 때에 우리는 예수를 모셔들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한나처럼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처럼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라처럼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꿈에 부풀려있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하고 이제 결혼식을 올리고 곧 동침하고 한가족을 이룰 꿈에 부풀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마리아에게 일방적으로 보내셨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너는 예수님을 벨 것이다. 예수님이 너를 성전 삼으실 것이다." 할 때 "아하, 그런 인사가 어찜이뇨?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왜 그런일이 있어요?" 하면서 거부하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드셔서 우리를 성전 삼고 계신다는데 다시 한번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우리가 예언을 받아서 된 것인가요? 우리가 한나처럼 기도해서 된 것인가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그 아들을 우리 가운데 들게 하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처음 믿을 때에 우리는 마리아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처럼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동안은 잘 믿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믿다가 못 믿다가 지나온 나날을 우리가 돌이켜 본다면 성령 충만하다가 우리는 또 의심하다가 이렇게 해서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마리아 그리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한번 성전 삼으셨더니 끝까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던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면서 그 육체마저도 세상 떠날 때까지 제자에게까지 부탁을 하면서 예수님이 그 마리아를 위했던 것을 봅니다.

    특히 이 지역에 해병대가 많아서 그런 말이 있지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를 그 아들 보내셨고 그 아들이 우리 속에 들게 하셨다면 한번 정하셨으면 중간에 좀 불신앙한다 하여 중간에 좀 충성 못한다 하여 중간에 좀 바친 물건을 갖고 있다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절대 끊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붙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는 생각해봅니다. 마리아가 한나보다도 더 훌륭했더라면 마리아가 엘리사벳보다 더 훌륭했더라면 마리아가 사라보다 더 훌륭했더라면 사라는 이삭을 낳고 엘리사벳은 세례 요한을 낳고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속에 품기 위하여 예수님을 우리가 품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성전 되어 드리는 것이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이것이 사무엘 낳기보다 힘든 일이라면, 이삭 낳기보다 힘든 일이라면, 세례 요한 낳기보다 힘든 일이라면 여기 누가 예수를 믿을 수가 있었겠느냐 그것입니다. 
    우리는 한나만 못합니다. 사라만 못합니다 엘라사벳만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사무엘은 낳을 수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정하여 예수를 우리 속에 모시게 되게 한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한나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라고 엘리사벳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라고 어떤 종파에서는 예수님을 모셨던 예수님이 성전 삼으셨던 이 마리아를 대단히 높여 가지고서 대단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말고는 그 후에 동생들이 났다는 것도 덮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오늘 이렇게 믿다가 못 믿다가 한 것, 예수님을 미쳤다고 불러내려고 한 이런 사실은 아주 입 닫아 버리고 덮어버리고 가르쳐주지도 않고 예수님의 모친은 대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최고로 대단한 예수의 모친을 선택하여 예수를 배게 한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도 훌륭해지고 마리아도 훌륭합니다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의 성전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를 어떻게 우리 속에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오늘 이 마리아의 사건은 이처럼 신앙이 왔다갔다 했어도 한 번 성전을 삼으시더니 그 주님이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십자가 위해서 "내 어머니이니이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 보니 복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오늘 주님 앞에 나오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복음송을 여러분이 불렀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있으리라 하고 불렀습니다. 

    진실로 마리아의 이런 약점들이 오늘 우리를 위로합니다. 마리아의 이런 불신앙과 실패들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모실 자격이 없을 것으로 알아서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 있어도 아니라고 할 판인데, 주님이 마리아를 처음 한번 어머니로 모시더니 끝까지 어머니로 모셨던 것처럼 주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한번 드시더니 우리가 그동안 잘 믿든지 못 믿든지 굴곡이 많았으나 오늘 이 시간까지도 우리를 성전으로 여기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한나처럼 기도하여 예수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처럼 그 남편과 함께 훌륭한 제사장의 가족이어서 우리가 예수를 맞은 것도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온다고 하니까 오히려 부담스러운데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를 내가 영접하면 문제가 안 있겠는가? 집안에 어떤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에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런 형편이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브리엘을 자격 없다고 떠나보내지 아니하고 기어이 그 여인에게 예수 들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 같은 하나님이 마리아 같은 우리들을 자격 없다고 밀쳐버리지 아니하시고 한번 지정하신 후에 끝내 우리를 믿게 하신 것 믿으시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참으로 좋은 말씀, 마리아가 그랬기 때문에 우리도 살았도다.우리 주님은 영원한 우리의 주님입니다. 오늘까지도 그러하니 주 오시는 그날까지도 불안함이 없이 소망 중에 우리는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오늘 참으로 좋은 말씀 귀한 말씀 아름다운 소식이 우리를 위로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같았기 때문에 오늘 위로를 받습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떠나지를 못하십니다.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찬송합시다. 494장을 부르겠습니다. -찬송-

    마리아가 무리한 부탁을 했을지라도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예수님께서 열두 살 때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성전으로부터 나가서 마리아를 따라가서 순종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이 삼십이 될 때까지 순종하면서 받드시기까지 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드셨으니 우리의 주인노릇을 하려고 해야 할텐데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성전 삼으셨으나 그의 성전이었던 마리아가 하자는대로 했습니다. 능력을 행할 때가 아닌데도 그가 행하라 하면 했습니다. 성전을 떠나서 집으로 가자고 하면 갔습니다. 순종하라고 하니까 받들면서 순종했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말씀에서 무엇을 느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 우리 안에 드셨으나 그의 뜻대로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하자는 대로 해줍니다. 우리의 무리한 부탁도 그는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받들 듯이 돕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가지 배웁시다. 우리가 그의 주인인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주인 것을 압시다. 그가 우리의 뜻대로 순종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뜻대로 살아드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찬송합시다. -찬송-

    성경에 소개된 마리아에 관한 사건은 오늘 거의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소개된 마리아의 사건 모두 모두는 우리보다 월등한 대단함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흔들렸던지 성경에 나타난 사무엘의 어머니보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보다 자랑할 것 전혀 없는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그런 내용들만 성경에 담아 두었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이시간 다같이 머리숙여 하나님 앞에 기도합시다. 우리가 예수님이 싫어하는 일을 했을지라도 마음에 악을 품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악한 말을 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를 따라 내려가 순종하며 받들었다 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뜻대로 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뜻대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성전 삼았던 주님은 그가 나쁘게 일한다고 해서 주님의 뜻을 거역한다고 해서 '너 나 몰라라' 하고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순종하며 받든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주님을 괴롭게 해 왔습니다. 얼마나 우리때문에 주님이 놀랐을지 우리가 싸움하고 우리가 나쁜 것을 도모할 때에는 우리를 성전 삼으신 주님께서 얼마나 숨을 자리를 찾아았는지, 그러나 우리를 떠나가지 않고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한 것처럼 "보소서. 너는 나의 나의 형제요, 보소서 너는 나의 친구요, 나의 생명과 내 피가 너를 떠날수 없으니" 감사함으로 기도를 드립시다. 
    주여 감사합니다. 앞으로 왠만하시면 주님이 우리 하자는 대로 하시고 숨어계신다 할지라도 그리 하지 아니하고 우리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오니 가르쳐 주시옵소서. 어떻게 사는 것이 우리 속에 우리를 성전삼고 계신 주님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인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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