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13:04-08; 엡 6:1-3/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 조회 수: 234, 2013.11.08 20:31:57
  • 늘 우리는 신약 성경 가운데서 두 곳을 읽었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3장은 흔히 ‘사랑의 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분으로 참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절 이하에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실제적인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에서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오늘과 같이 효를 기반으로 한 대가족제도에서 부부간의 행복한 삶을 기본 이념으로 한 핵가족 제도로 변천하는 이 세대 속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일 년에 한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정하고 어버이의 사랑을 되새겨 보는 일은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도덕관은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효(孝)를 생활의 이념으로 해서 부모님을 생활의 중심으로 모시던 지난날의 미풍양속은 점점 자취를 감춰 가고 있습니다. 부모는 사실상 가정의 변두리로 밀려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기가 비록 가정의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자녀들은 변두리 쪽으로 밀어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머니는 자녀를 자기 삶의 중심에 품습니다. 자식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자식을 위해 대신 수모를 당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존경과 사랑은 변합니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 어머니는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어머니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사랑이 어떤 것인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언제나 참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환경이나 형편에 따라서 참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유명한 설교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해석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고 이를 보복하려면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참고 보복하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만 사용되는 낱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해도 하나님은 오래오래 참으십니다. 오래 참는 것이 약자의 표시는 아닙니다. 오히려 강자의 표시입니다. 패배주의가 아니라 승리에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새번역 성경에 보면 “사랑은 친절하다”고 번역했습니다. 제롬이란 사람은 “사랑은 인자하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선량하긴 해도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좋은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성경에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보세요. 우리는 “이 여인을 돌로 칠까요?” 하면서 여인이 행한 잘못만을 따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돌을 들어 이 여인을 치라”하신 것처럼 인자한 사람입니까?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피해야 할 혼동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를 같은 의미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시기는 내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생기는 좋지 않은 감정입니다. 물건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명성 그 자체를 욕심 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지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나만을 사랑해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질투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시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우리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 세상을 사랑하면 행음하는 여인 같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했습니다. 

    시기는 좋지 않은 감정입니다. 사람의 비열함이 여기까지 이르면 더 이상 타락할 수가 없습니다. 시기하면 자연히 그 사람을 헐뜯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시기하는 사람이 얻는 것도 없고, 높아지는 것도 없고,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왜 헐뜯습니까? 대개 시기하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촌이 밭을 사면 왜 배가 아픕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데 시기하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부모는 자식이 잘 될수록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언제나 자기가 행한 일의 가치보다 부족함을 강하게 느끼기에 자기 자랑을 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겸손합니다. 요즘을 흔히 “자기 PR시대”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선전하다 보니 자랑이 많아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랑하는 사람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헬라 말에 ‘은혜’라는 말과 ‘매력’이란 말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원래 매력이 있는 도(道)입니다. 매력이 있다는 것은 뭐라 말은 하지 않아도 끌리는 힘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꽃의 향기가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봉접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리 밖에서도 벌과 나비가 꽃을 찾아옵니다. 
    모든 일에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할수록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무례히 행하게 되면 매력이 없어집니다. 호기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 사이에도 예의가 있어야 오래 그 사랑이 지속됩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권리만을 생각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자기의 권리를 좀 덜 생각하고 자기의 의무를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권리를 좀 덜 생각하고 자기의 의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 주위에 산재한 여러 가지 문제가 보다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사로운 일 때문에 결코 분내지 않습니다. 언제나 분노는 패배의 표시입니다. 사람이 화를 내고 평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키플링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여도 자기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인격의 가치가 계산된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잠언에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남의 악행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본래 ‘기억한다’는 말은 회계학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항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장부에 기록한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좋지만 잘못을 기억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옛날부터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는 감사한 생각보다는 섭섭한 생각이 자리 잡기 쉽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사회에 불행을 초래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은 전쟁과 제사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그들의 습관은 과거의 미움을 기억나게 하는 물건들을 수집해 두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토굴에다 주렁주렁 걸어 놓고 그것을 보고 옛날의 원한을 되새기며 싸움을 계속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정이나 우리 마음에는 그런 원한, 섭섭한 생각, 미운 생각들을 걸어 놓고 그것 한 번 쳐다보고는 미운 생각을 다시 하며 노여움을 언제나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은 남의 잘못을 오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성품이 타락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되고 성공했다는 말을 하면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건들건들 졸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이야기하면 자던 사람도 깹니다. 그런데 이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품격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이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진리가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진리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에 대해서 용감하고 진리가 승리할 때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입니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당신의 원수는 미워하고 저주하고 욕하며 당신의 친구는 배반하여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용서하시는 당신은 한결같이 사랑이십니다.”
    동네 사람들이 “저 애는 희망이 없어. 저런 망나니가 어디 있담” 하면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아이라도 그 애 어머니는 그 아이를 망나니로 보지 않습니다. 왜요? 사랑이 있기 때문에 모든 허물이 안보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그대로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용하지 않고 그를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면 결국 그 사람은 신임 받지 못할 사람으로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반면에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절대로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그 사람은 명예심을 잃지 않고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은 비천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장점을 믿어 주는 것으로 그를 존귀한 인간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이 세상에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신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에는 기대가 있습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시고 소원을 가지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여기에 쓰여진 ‘견딘다’는 동사는 보통으로 ‘참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소극적으로 그저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견디어 나아가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극적으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승리에 넘치는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하게 산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11절을 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랑을 닮은 사랑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언제나 바라봐도 늘 보고 싶은 분
    기쁠 때 슬플 때 늘 보고 싶은 분
    모든 것 주시고도 더 주시려는 분
    어머님 한 분 이외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Give and Take”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너를 사랑합니다. 한쪽에서만 사랑하면 그것을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랑하다가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 기대에 어긋나면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사랑은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자녀가 사랑 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의 사랑입니다. 

    어머님의 사랑은 주님이 우리 위해 기도하듯이 자녀 위해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언제나 기억하고 기도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언제나 그를 마음에 두고 기도하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자녀를 늘 마음에 간직하고 위하여 기도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그를 낳기 전에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겠지만 그를 낳은 후에도 항상 기도했을 것입니다. 젖을 뗄 때까지 집에서 키우면서 젖을 먹이면서 기도하고, 업고 다니면서 기도하고, 잠들 때도 기도하고, 언제나 기도했을 것입니다. 젖뗀 후에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성막에 데려다 두고 집에 돌아와서도 사무엘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서 늘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해서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성도들이 목사님을 위해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기도 부대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나 항상 거슬려도 다 용서하시고
    날 웃게 하시려고 어머님 우시네
    집 떠나 먼 곳에서 나 방황하여도
    어머님 기도 음성 귓가에 들리네

    디모데가 바울의 뒤를 이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 어머니 유니게의 간절한 기도와 신앙의 본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장 3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성령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식 된 우리를 위해서 언제나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어떤 종교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나온 사람들이 만일에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데 있어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기초로 해서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께서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연세가 높으시고 시중드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대소변 가려내는 것도 한두 달이지,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오랫동안 간병하려니 다른 일은 전혀 못하겠고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던 끝에 무서운 궁리를 했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산 속 깊은 곳에 버리고 돌아올 생각을 하고 어머니를 업고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우리 지금 어디 가니?”
    “어머니는 모르셔도 돼요.” 

    이렇게 대답하며 아들은 계속 산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니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나뭇가지가 손에 잡히는 대로 꺾습니다. 아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서 묻습니다.
    “어머니, 나뭇가지는 왜 꺾으세요?” 
    “네가 돌아갈 때 길을 잃을까봐 그런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죄인을 구속하려 독생자 보내신
    그 사랑 알게 하려 어머님 주셨네
    그 손을 마주잡고 드리는 예배는
    천년도 하루같이 즐거운 때일세

    우리가 이와 같은 놀라운 어머니 사랑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어머니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어머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도덕률의 제 1조입니다. 십계명의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다섯째부터 열째까지는 사람에게 대한 것인데 그 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사실 부모 공경 잘 하는 사람이라야 사회생활도 원만하게 합니다. 따라서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어머님 크신 사랑 뉘 감히 알리요
    안다고 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요
    갚는다 장담해도 못 갚을 것이니
    내 평생 기도 중에 어머니 부르리

    예수 믿는 부모님이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옛날 사도 요한도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형제 화목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다 잘해도 형제가 화목하지 못하면 부모의 가슴에는 아픔이 됩니다. 시편 133편에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습니다. 
    이 뜻깊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어머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 되어 이 땅에서도 잘되는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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