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메시야가 아니냐?"(눅 23:39-43) [고난주간]
  • 2013.09.02 09:01:16
  • 저는 외국에 집회를 나가게 되면 얼마나 고생이 되는지 모릅니다. 비행기를 타면서 잠이 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외국에 도착해서 집회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잠을 못자기 때문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외국에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생각합니다. "이렇게 힘이 드니 이제 다시는 오지 않아야겠다"고 작정합니다. 지난번 샌프란시스코 알라메다 장로교회에서 집회하는 때도 아침 4시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도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비록 잠을 거의 자지 못해 몸은 극도로 지쳐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흘간의 알라메다 장로교회의 집회를 잘 마치고 그 다음날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목회자들을 위해 세미나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다 전하고서 식사를 하는데 그곳 목사님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민 목회가 얼마나 어려운지 목회에 힘을 잃었었는데 전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큰 용기를 받아서 이제 외로운 이민자들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신명을 다해 목회해야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도전을 받아 주의 종으로서 생명을 불사르겠다는 결의들이 대단했습니다. 목사님들의 은혜받은 모습이 제게도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교민들의 구원과 영적 부흥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몸이 아무리 고생되더라도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리라고 결심했습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제가 주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사도 바울을 연상했습니다. 바울이 학문과 지위와 권세를 다 포기하고서 이방인 전도자로 소아시아와 구라파를 횡단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그의 형편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동족들의 미움과 질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편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을 제공받지 못했지만 항상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교통은 또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것을 사명으로 알았기 때문에 복음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후 저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부르시는 곳은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목회를 위해서 언제나 밖에 나갈 수가 없어서 꼭 제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요청하는 곳에만 나가려고 합니다. 아무튼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는 내 마음대로, 우리 마음대로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도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온 인류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고생스러운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어찌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두 행악자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많은 백성들은 구경거리처럼 쳐다보았고 관원들도 비웃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당하신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한 일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폭도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고 기도를 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구경거리가 났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관원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라고 비웃었습니다. 군인들도 마취제의 일종인 신포도주를 예수께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하였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한 행악자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네가 만약 메시야거든 네 스스로 구원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내려가지 못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비웃는 것은 사실 그럴 만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자기도 잘 되지 못하고서 남을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예수는 정말로 허무맹랑한 미치광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때때로 사람의 상식과 판단을 뛰어 넘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내 척도대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전에도 예수께서는 비슷한 시험을 받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께서는 40일을 금식기도 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귀는 40일이나 금식하신 예수께 다가가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여 자신과 민중의 굶주림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라고 하였고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다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를 위하는 이 모든 일을 거부했습니다. 마귀는 예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접근하면서 십자가의 가시밭길을 접어두고 당당하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움켜쥐고 메시야 왕국을 시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유혹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의 험한 길로 가셨습니다.

    그후 우리 주님의 공생애는 참으로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십자가상에서 피눈물나는 고난을 받고 계시는 예수께 다가가 관원들과 백성들과 행악자를 통하여 최후의 유혹을 합니다. 고난받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는 십자가를 포기하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것마저도 거절하시고 비참한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그가 가야할 사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자기를 위해서는 결코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대부로 불리는 리빙스턴 선교사는 고국 영국의 그라스고우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줄곧 사양하다가 더 이상 간청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결국 고국으로 잠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한쪽 팔이 빠져 덜렁거리는 모습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영혼들을 위해 복음전도를 하다가 자기 몸을 돌보지 못한 것입니다. 영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라스고우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이 위대한 복음전도자를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하면서 이제 나이도 많으니까 고국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요청을 단호히 뿌리치고 아프리카로 다시 떠나 복음을 증거하다가 어느 산중에서 기도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람은 결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다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
    가의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
    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결코 자기의 뜻을 내세우
    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
    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죽기까
    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가는 길이었습니다. 주
    님은 하나님께 절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천황을 위해서 바치는 헌신도는 세계적인 연구의 대상
    이라고 합니다. 만주사변 당시 일본 군대가 철조망을 자르지 않으면 진군할 
    수가 없었습니다. 약 400명의 대대원들 앞에서 대대장이 "제군들 가운데 10
    명이 희생되어야 하겠다. 저 철조망을 잘라야 되겠는데 한 사람이 가서 자르
    면 총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 사람이 이어서 자르고 또 자르
    고 해서 열 명이 자르다 죽으면 나머지 우리 대대원 모두가 진격할 구멍이 
    뚫릴 것이다. 누가 천황폐하를 위해 나서겠는가?" 하니까 400명 전체가 나섰
    다고 합니다. 그때 대대장은 10명만을 골라서 희생시키고 철조망을 돌파했다
    고 합니다.

    만일 여기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이렇게 충성하여 주님의 복음
    전파 사업에 나선다면 우리 나라는 민족복음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120명의 무리가 전 로마제국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자신들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
    로 여기지 않는 헌신된 일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여 그렇게 
    쉽게 변하고 주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립니까? 우리는 주님의 제자
    들입니다.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복음
    선교사업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
    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나도 그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내가 새 생명을 얻었으니 
    이제 나도 오직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 심권사님은 지난날에 그의 평생에 번 돈으로 
    땅을 사서 교회를 일곱 개씩이나 건축하여 바쳤다고 합니다. 그녀는 돈을 번 
    것을 주님의 교회 세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들도 의미 있는 일, 하나
    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야이십니다.

    예수의 달리신 십자가의 좌우에는 행악자들이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죽으면서도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만 다른 행악자는 그 사람을 꾸짖기를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
    하실 때 나를 생각하옵소서"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으면서라도 
    자신의 삶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죽음의 의미를 깨닫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을 자기의 메시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이는 실로 놀라
    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자신은 지나온 삶이 너무나 부끄러워 십자가의 처형
    도 마땅하게 느껴졌지만 저 예수라는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죽어가는가 생각
    하다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의 모습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는 겸손하게 주님께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고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간구한 것
    입니다. 이것은 그의 통회하는 마음이 가져온 놀라운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배반할 때 오히려 그의 십자가를 보고 그 큰 위력
    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위력을 보고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했
    습니다. 그는 군중심리에 이끌리지 않고 그 누가 무어라고 해도 예수님은 죄
    가 없으시고 메시야이신 것을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구원의 약속
    을 받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한 가운
    데에 우리 주님이 인류를 위해 피흘려 죽으신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편에는 주님을 믿지 않고 조롱하다가 영원한 멸망의 
    길로 떨어지는 죽음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주님을 믿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구원함을 받는 영생의 십자가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참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멸
    망의 길과 구원의 길이 갈려진 것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는 언제나 주님의 
    십자가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하고 부인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멸망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이 멸망과 구원의 기준이며 분기점인 것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여기 회개한 강도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예수가 우리의 메시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죄 때문
    에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을 인정하고 우리의 죄를 통회자복해야 합
    니다. 그리고 주님께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맡겨야 합니다. 그 누가 예수를 
    무엇이라고 한다고 현혹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우리의 일생을 주를 위해서 바쳐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길, 그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이었지만 분명 승리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었
    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님과 함께 승리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겠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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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2013.09.02
사순절 특새 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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