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교육의 원리(엡6:1-4)
  • 조회 수: 219, 2013.07.21 16:24:48
  •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시127:3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업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는 우리의 자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선물들을 우리가 어떻게 길러야 하겠습니까? 미국식으로 자유롭게 기르는 것이 더 좋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전통적인 한국식으로 엄하게 키우는 것이 더 바람직할까요? 미국식으로도 말고, 한국식으로도 말고, 오직 성경적으로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자녀를 성경적으로 키우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녀교육의 성경적인 원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원리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선물들을 잘 길러서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복되고, 또 매일매일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맘마"와 "지지"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 때는 "맘마"라고 합니다. 입을 벌리고 먹으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아이들이 더러운 것을 손으로 집거나, 입에 넣으려고 할 때는 "지지"라고 하면서 못하도록 막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맘마"라는 말속에서 은연중에 부모의 사랑과 애정을 느끼면서 자라가게 됩니다. 반대로 "지지"라는 말속에서 아이들은 가장 기초적인 도덕과 규범을 익히면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는 "맘마"와 "지지"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의 인격이 건전하게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중에 하나만 너무 강조하면 안됩니다. 예컨대 아이들에게 "맘마"만 강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마마보이가 되어버립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버릇없는 아이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지지"만 너무 강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티없이 맑게 자라야 할 아이는 애정결핍증에 걸려서 위축이 되고,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그러니까 "맘마"와 "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서 우리의 자녀들이 균형있게 성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맘마"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으로는 안됩니다. 또 무엇이 필요합니까? 4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키워야 하니까요.
    거기다 내 방식대로 키우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자녀교육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으로 키워야 합니다. 둘째로, 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셋째로, 신앙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원리를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도 엄연한 인격체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18:6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그만큼 우리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어리다는 것과 우리가 그를 낳아주고 길러주었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기분, 감정, 인격을 무시해 버리고 짓밟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 자녀의 마음 속에 상처가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자녀들이 언제 부모 때문에 상처를 가장 많이 받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제 생각에는 부모가 자녀 앞에서 화목하지 못하고, 싸우고 다툴 때 가장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깊을 것 같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느 부부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방에 들어가서 숨을 죽인 채 거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마음 졸이며 듣고 있습니다. 부부사이에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급기야 화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옆에 있는 가스밸브를 틀었습니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습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안에 불길이 크게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방안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면서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아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거센 불길이 아파트 안에 가득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엉겁결에 창문을 열고서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아무개야!"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따라 창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버지는 홧김에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세 사람이 다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다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첫째로, 아버지는 제비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비처럼 날아서 땅에 사뿐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머니는 날라리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잘 날았겠습니까? 훨훨 날아서 땅에 사뿐히 떨어졌습니다. 셋째로, 아들은 비행청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세요? 세상일에 대해서는 미련한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날에 가정이 얼마나 병들었는지 우리들에게 풍자적으로 꼬집어주는 이야기인 줄 압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부부지간에 의견이 갈리고, 싸울 때가 왜 없겠습니까?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이따금씩 제 아내하고 싸울 때가 있습니다. 제 아내가 참을성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감히 담임목사인 저에게도 대드는데, 왜 여러분인들 싸우지 않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부부지간에 다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는 잠시 참자는 것입니다. 적어도 아이들 눈앞에서만큼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또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평안이 유지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부모는 자녀들이 어떠한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나 부족한 것을 꼬집어내어 나무라지 말고, 잘 하는 것이나 장점을 부각시켜서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감 있게 인생을 도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9세기초 미국에 벤쟈민 웨스트(Benjamin West)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하고 난 사이에 그가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벤쟈민은 심심한 나머지 그림 물감을 다 풀어서 자기의 누이동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지저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보니까 방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 벤쟈민에게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벤쟈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야! 우리 벤쟈민이 그림을 엄청 잘 그렸네. 딱 보니까 누이동생인걸 알겠네!"
    그러면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벤쟈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격려의 입맞춤까지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벤쟈민은 그때 일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부모님의 격려와 입맞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족하다고 자꾸 구박주고 나무라지 말고, 잘 하는 점을 칭찬해 주면서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잘 활용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본명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말하자면 "반석아, 반석아"하시면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삶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가 반석처럼 듬직했습니까? 믿음직했습니까? 정반대입니다.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성질이 얼마나 급했던지 생각 없이 불쑥불쑥 말도 하고, 행동도 했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니까, 자기도 물위로 한 번 걸어보겠다고 바다위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서 빠져버렸습니다. 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으시고 피땀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해서 죽게 되었으니 깨어서 기도해라."
    예수님이 그렇게 일러주셨건만 베드로는 쿨쿨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깨어서 보니까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오는 것입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기의 칼을 빼내어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나는 죽어도 주와 함께 죽고 결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던 베드로가 결국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한 번은 어린 계집종 앞에서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이처럼 실수투성이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를 향해서 반석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 기대감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베드로가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지만, 언젠가는 반석처럼 정말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예수님에게 있으셨던 것입니다. 과연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대 그대로 주를 위해서 살다가 끝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합니다. 부족해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축복해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많은 사랑을 쏟아주십시다. 아이들은 어른의 사랑을 먹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둘째로, 우리는 자녀를 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교양과 훈계는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 행하는 교육적인 행위입니다. 굳이 이 두 가지를 우리가 구분한다면, 교양은 주로 예방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훈계는 주로 치료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선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아니하도록 미리 예방적인 차원에서 교양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활용한 예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한석봉의 어머니입니다. 석봉이는 어린 시절 글공부를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석봉이는 어머니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글공부를 중간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인들 왜 사랑하는 아들이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엄하게 대합니다.
    "석봉아! 내가 불을 끌 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나는 떡을 쓸겠다. 그리해서 네가 이기면 오늘밤 여기서 머물고,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이 길로 돌아가거라!"
    어머니는 불을 껐습니다. 캄캄한 가운데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이는 글을 썼습니다. 뒤에 불을 켜보니까 어머니가 썬 떡은 가지런하게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석봉이가 쓴 글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결국 석봉이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금 글공부를 위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왜 어머니의 마음인들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밤새도록 울며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엄격함이 있었기에 한석봉은 뒤에 명필로써 이름을 떨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계속해서 어리광을 받아주면 아이는 바르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예방적인 차원에서 교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또 치료적인 차원에서 훈계도 필요합니다. 아이들의 잘못된 것을 미리 잡아주어야 합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양에 어느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면회를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작별의 입맞춤을 하는 순간에 아들이 어머니의 혀를 세게 깨물어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몹쓸 놈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때 아들은 이렇게 항변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사형수가 된 것은 우리 어머니의 책임이 큽니다. 내가 어릴 때 옆집에 가서 탐나는 물건을 슬쩍 훔쳐올 때 어머니는 뻔히 아시면서도 나를 타일러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내가 원하는 물건은 사람을 해쳐서라도 가져야 직성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에게는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바르게 키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잘 사는 것보다도 바르게 살도록 키웁시다. 몇 일 전에 총리 되시는 분이 얼마 재직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빌딩이 몇 채 있었다고 합니다. 잘 사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보고서 바르게 살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은 엄연히 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바르게 살도록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얘야,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살도록 애써라. 그러다 보면 때로는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없을 때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네가 결국은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 있단다!"
    인기 있는 사람과 존경받는 인물은 다릅니다. 탕자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돈이 많을 때는 친구가 많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니까 인기도 물거품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돈 많은 사람과 권력있는 사람은 늘 조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인기가 다가 아닙니다. "정말 내가 존경받을 인물인가? 존경있는 인물처럼 행동하는가?"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잘 살기보다는 바르게 살도록 가르쳐주고, 또 인기있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존경받는 인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자녀를 신앙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모는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얘야, 너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말씀을 앞세우고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공부, 공부, 공부," "대학, 대학, 대학"만을 외칩니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들은 잘합니다. 그러면서도 그저 대학만 들어가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산에 가면 산삼이 있고, 바다에 가면 해삼이 있고, 집에 가면 고삼(高三)이 있다." 집에 고3학생이 한 명만 있어도 전 가족이 비상이 걸립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는 고3이 둘이나 됩니다. 10년 전에 제가 승동 교회에 왔을 때, 저희 집 쌍둥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이제 자라서 고3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죽하겠습니까?
    "있잖아, 목사님 아들들이 이번 대학입시에서 둘 다 떨어졌다면서?"
    내년에 그런 소문이 날까봐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여러분, 기도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초저녁 잠이 많아서 밤늦게까지 깨어있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고3이 되니까 학교에서 밤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시킵니다. 제 아내는 10시가 되면 차를 타고 데리러 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기도회에 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제 아내는 체질적으로 낮잠을 잘 못잡니다. 제가 없을 때 잠을 자는지 안자는지 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하여튼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겠습니까? 아내는 정성을 다해서 아이들을 뒷바라지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학입시에서 떨어지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자녀가 대학입시에서 떨어지면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며칠이고 금식을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해서 가슴 아파하고 금식하면서, 내 사랑하는 자녀의 영혼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금식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내 자식이 대학에는 붙고, 지옥에는 떨어져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합니다. 아이들의 감수성이 한참 예민할 때 "야, 교회가 뭐냐? 공부해라. 공부"라며 교회 문 다 닫아놓아 자식농사 망쳐버리고 난 뒤에, 가슴을 치면서 후회한들 멍든 가슴이 풀리겠습니까? 멍만 더 들뿐이지요.
    우리가 우리의 자녀에게 제대로 신앙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부모된 우리가 바른 신앙 위에 굳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으니까요. 내가 제대로 신앙 생활을 못하면서 어떻게 내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을 주입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리아 산을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삭의 등에는 나뭇짐을 지었습니다. 나뭇짐을 지고서 산을 올라갈 정도였으니까 이미 이삭의 나이는 15∼20세 정도로 청소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까, 지금은 115∼120세로 늙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에는 횃불과 칼이 들려져 있습니다. 이삭은 올라가는 도중에 아무래도 마음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번제에 쓸 불과 칼은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에 못질을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차분하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예비하시리라."
    드디어 산에 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아들 이삭에게 진실을 밝혔을 것입니다.
    "아들아, 용서해라. 사실은 사흘 전에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너를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 너는 죽어줘야 되겠다!"
    요즘 아이들 같으면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버지, 웃기는 소리 그만 하세요. 날 잡아서 제사를 드려요? 정말 주책이시네요."
    "이놈아, 너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거역할 것이냐?"
    "아이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일랑 아버지나 잘 들으세요."
    그러면서 스무 살 난 청년이 120세된 노인을 밀어뜨리면 그냥 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달아나면 무슨 재간으로 그를 붙들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결박을 당했습니다. 이삭은 단위에 그대로 누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겠습니까? 평소에 아버지 아브라함과 또 어머니 사라가 아들 이삭 앞에서 바른 신앙의 본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더라. 하나님이 죽으라고 말씀하셨으니까 내가 죽어야지."
    이삭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보고서 바른 신앙을 배워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부모된 우리들이 늘 신앙의 바른 본을 보여줄 때, 우리의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잘 클 수가 있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의 말씀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된 우리들은 주 안에서 부모님을 순종하고 잘 공경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4절 말씀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귀한 선물인 우리의 자녀를 사랑으로 키웁시다.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줍시다. 그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때로는 교양으로 때로는 훈계로 양육합시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키우려고 하지 말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신앙적으로 키웁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의 가정이 주님 안에서 날마다 복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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