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집에 있는 아이(눅 2:41-52)
  • 조회 수: 59, 2013.08.23 22:06:02
  •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아버지는 탄광의 광부였는데 대단히 무서운 아버지였습니다. 대부분의 독일 아버지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한평생 자식을 보고 귀엽다고 안아주거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특별히 칭찬에 인색했습니다. 뭔가 잘해오면 당연한 것으로 받았고 못하면 여지없이 매를 댔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아버지란 소리만 들으면 영~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 아버지 소리만 나오면 일단 가슴이 뛰고 무섭고 답답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그가 성경 속에서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재발견하기까지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공포에 빠져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육신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에서는 "파더" 이미지는 즉 "육신의 아버지 상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를 좋아하십니다. 그 첫번째 것이 가정이올시다.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은 어렴풋이나마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잡게 하고 부부간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가정의 사랑을 통하여 내가 어떤 존재인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이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가정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소중한 일이요, 더 나아가서 건전한 신앙생활과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녀를 길러가야 하는 문제는 부모된 우리 모두의 제1 관심사인줄 압니다. "사랑하면서 길러야지..."그것은 다 압니다만은 문제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냐? 이 문제는 우리가 성격 속에서 배워야 할 줄로 압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딸보다 아들 키우기가 어렵다고 말을 합니다. 아들이 힘있고 장난이 심해서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들은 성장하면서 딸들보다 더 많은 갈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 남자아이가 자라는 환경을 보면 전부 다 어머니와 함께 혹은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은 전부 다 여자들입니다만은 그러나 남자아이들은 여자 속에 살면서도 자기는 남자고 여자를 닮아서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는 "탈 동일시"라고 부릅니다. 여자들을 보고 여자 속에서 생활하고 그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는 속에서도 동일시할 수 없는 갈등. 이것이 탈동일시의 갈등의 본질입니다. 이건 사내아이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딸아이들에게는 이러한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들들을 다룰 때에 말도 더 잘 안 듣고 더 쉽게 반발하고 다루기가 어려움은 이 탈동일시 때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아들들은 그러므로 동성인 아버지를 닮아가려고 노력을 합니다.  모성적 사랑으로만은 안되거든요. 건전한 인격이 형성되려면 모성적 사랑 위에 또 다른 의미의 친밀한 연합이 필요한 것이요, 이것을 가리켜서 부성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부성적 사랑을 얻기 위해서 아이들은 아버지에게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것도 또 하나의 모험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받아줄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아버지가 줄 수 있는 사랑의 내용. 즉, 부성적 사랑의 본질은 뭐냐? 인생의 원칙과 질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 공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느냐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르쳐 주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은 율법으로 정의됩니다.

     

       어머니의 모성적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고 하니 수용과 보호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랑이라고 말하지요. 나는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가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확인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어머니의 역할은 은혜가 됩니다. 은혜와 율법이 같이 있어야만 온전하듯이 한 사람의 인격을 위해서도 아버지의 율법성과 어머니의 은혜성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올시다.

     

      그런데 아버지의 성격, 기본성격이 율법이요 그 율법자체 속에는 차가운 부분이 반드시 들어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율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왜 너는 이런 행동을 해야하는지 자세히 가르치고 해설해주고 따라오도록 기다려주고 해야하는데 아버지들의 정서가 그렇지를 못해서 무조건 명령하고 윽박지르고 쉽게 화를 내고 급하게 아이를 대하게 된단 말이죠. 또한, 쳐다보거나 만져주거나 대화하는 일에 대하여 시간을 내지를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까이는 가고 싶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사람.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와 하루종일 놀아주고 그날 저녁에 하루 공쳤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이로 말하자면 아버지 앞에 가기도 벅찬 일인데 그 아빠가 너무 강해요. 아빠 욕구를 따라가기가 참 어려워요. 그래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아빠는 실망하여 꾸짖습니다. 이놈아! 이러면 돼! 그런단 말이요. 그럴 때마다 아빠에 대한 친밀감이 죽어지고 무서워하게 되고 창의성이 상실됩니다. 그러나 너무 강한 아버지 앞에 대들지도 못하는 거에요. 그러므로 마음속에 쓴 뿌리가 생기면서 삐뚤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사랑은 주지는 않고 가르치고 요구만 합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시원찮은 녀석! 한단 말이죠. 그러므로 아이는 아버지 앞에 나는 아들로 혹은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아이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질되는고 하니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변질됩니다.

      자 봅시다. 아버지는 저 앞에 있어서 따르기가 어렵고 세상에 대한 긴장이 커 갈수록 때로 지칠 때마다 아이는 자기 고향인 어머니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어머니의 품속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길과 그리고 나를 향한 사랑이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전진하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인데 어머니도 변한단 말이지요. 자고로 어머니의 진정한 매력은 받아주고 믿어주고 속아주고 울어주는 것이올시다. 이것이 한사람의 인생에 안정감을 심어주는 가장 좋은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이 모습 이대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것을 어머니에게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어머니는  자식이 뭐라고 하면 "오냐! 오냐! 나는 너를 믿는다"하고 받아 주어야 하는 것이에요. 근데 요즘 어머니는 그렇지 않거든요. "요놈아!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알고 환히 안다." 이렇게 나오면 어머니를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요즘 어머니들이 아이를 사랑한답시고 어머니의 부드러움을 다 잃어버립니다. 전부다 학원 선생이 돼버렸습니다. 지금... 영어 단어 하나 더 배우게 해서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여자 분들은 어머니가 되세요. 마음의 고향인 어머니를 잃어버리게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올시다.

     

      남자는 진정 언제 남자가 되는가? 중요한 질문이지요.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때 참 남자가 됩니다. 근데, 아버지가 나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면 다른 남자로부터 내가 남자됨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또래끼리 모이는 것이지요. 안 되면 깡패 집단에도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떠한 남자도 나를 남자로 인정해주지 않게 되면 그 남자는 이성을 통해서 자기의 남자됨을 확인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여자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자는 남자로부터 자기의 남성성을 인정받지 못한 자의 모습이올시다. 그래서 여자를 통하여 자기의 사내됨을 확인하고자하는 몸부림을 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적인 방종이란 결국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접촉과 친밀에 대한 욕구분출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속에 진정한 만족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이 이렇게 성적으로 자꾸만 방종해지는가 하면 그 뿌리가 뭐냐? 사랑없는 가정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길러 가는데 자식이 내 뜻대로 안 된단 말이지요. 그때 부모님들은 말합니다. "내가 겉을 낳았지 속을 낳았나?" 아니요. 속을 낳지 않은게 아니라 속을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지요. 부모님들 속에 정확한 아버지상과, 어머니상이 없어요. 내가 어떤 아버지가 되고 어떤 어머니가 되어야 된다는 모델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도 남녀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돈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식은 사랑으로 길러야 하되 어머니는 품어주는 은혜로 길러야하고, 아버지는 설명하고 가르치고 이해시키는 율법으로 이 사랑과 견책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의 성격임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생각할 것은 그렇다고 끝까지 사랑한다고 해서 자녀를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느냐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렇지 않아요. 자식은 떠나라. 자라게 되면 떠나야 하는 겁니다.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보여줍니다. 자녀가 성장하면 보내야 한다는 것이요. 어디로 보내며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설명을 해줍니다.

      예수님이 열두살 되었을 때에 부모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습니다. 해마다 갔다고 본문은 분명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너는 그의 아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부모님들 생각에는 아이가 잘 따라오겠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일에 분주해서 세상사는 얘기 이런 저런 바쁜 얘기들을 하고 오다 보니 아이가 없는 거라! 잘 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그곳에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그들이 한게 뭔가 봅시다. 44절입니다. 봉독을 하겠습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많은 가정에서 이러한 일을 만납니다. 우리 아이 잘 크고 있겠지 뭐! 아무 일도 없겠지 공부 잘하고 있겠지.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 옆에 있지 않아요. 그 아이가 나로부터 어느 샌가 떨어져 있어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단 말입니다. 자녀가 나와 같지 않다는 것, 잃어버린 것 같은 마음 말이지요. 오늘 본문은 가르칩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자녀와의 관계 속에 문제가 있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46절입니다. 봉독합시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자녀와의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집"임을 가르쳐줍니다.

      얼마 전에 저에게 유학가는 아이들이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유학 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을 했어요. "얘들아 너희들이 이제 부모님 집을 떠나는구나! 성장을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거다. 그런데 떠남에는 아픔이 있다. 좋은 아빠와 엄마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지만은 인생은 그런거다. 내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을 떠나야하고  그분들의 영향력으로부터도 너희들은 이제 점점 멀어지게 될 거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성장하기 위해서... 다만 부모로부터 멀어지는 동시에 너희들은 너희들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나가야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의 앞길을 인도해주시도록 너희들은 더 간절히 기도하며 앞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나가야 된다.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멀어지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야 된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알아듣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부모에게도 얘기를 했습니다. 부모님들 이 아이들에 대한 부모님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의 품속에 이 아이들을 믿고 보내세요. 예수님의 부모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러나 때로 부모들은 인정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내 옆에 있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대로 이 아이들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48절입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느냐는 말이이요. 여기에 대하여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49절 봉독합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 위대한 말. 이 고백 앞에 부모의 반응을 봅시다. 50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무엇을 깨닫지 못했단 말입니까? 내 아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이 아이의 소질과 재능과 은사와 기질. 그리고 이 아이의 운명도 하나님의 것임을 몰랐어요. 자식은 하나님의 것이올시다. 때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이 진학하고 직장을 잡고 전공을 선택할 때 부모의 뜻대로 안 한다고 말이죠 어릴 때는 말 잘 들었는데 커가니깐 말 안듣고 배신감을 느낀다고 또 버림받은 느낌을 받는다고 그럴 것 없어요. 사실은 아이가 그만큼 성장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능력대로 가도록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자식을 움켜쥐고 놓지를 않아요. 자식에게 너무 집착해요.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할 만큼 움켜쥐고 안 놔주는 부모가 많습니다.

     고백을 새로 해야 합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기르시고 키우시는 것을 고백해야 됩니다. 이것을 바로 고백할 때에 자식으로부터 부모는 자유로울 수 있고 나도 하나님 앞에서 내 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식 일로 너무 끙끙거리지 말 것이요, 하나님이 자식을 고생시키면 하게 둘 것이요. 군대를 보내게 되면 보내는 것이에요. 군대 안 가게 돈 쓰고... 그게 무슨 놈의 사랑입니까?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을 망치게 하는 것이지요. 50이 넘은 자식을 먹여 살릴려고 말이지요 늙은 부모가 신앙생활도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왜 못 놓는거에요 도대체?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이제는 자식을 하나님께 맡기고 떠나야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별 연습이 필요한 것이에요.

     오늘 52절에 예수님의 부모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1절 끝에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자식은 떠나 보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처음엔 몰랐으나 이제는 마음에 두었다. 자 내게 내 자식을 하나님께 의탁한다고 해서 그 자식이 나와 영 이별하는 겁니까? 완전히 자식을 버리는 거냐면 아니요! 하나님께 맡기고 떠나 보낼 때에 그리고 그 아이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아이가 될 때에 그는 더 좋고 진실한 참 자녀가 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51절 전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의 영향력으로부터 점점 벗어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갑니다.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가 깨닫고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께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입니다. 함께  봉독합시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 말씀은 하늘 아버지가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들려준 최고의 말입니다. 아버지들 어머니들 여러분의 자녀가 가장 듣기를 사모하는 말이 이 구절 속에 들어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아들이요. 소속감을 확인시켜 줍니다. 내 기뻐하는 자니. 가치를 확인해 줍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능력을 인정해 줍니다. 이것보다 자식을 더 행복하게 하는 부모의 말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들. 자녀들에게 원칙없는 아버지가 되지 마세요. 여러분의 사명이 원칙을 주는 겁니다. 질서와 규율을 가르쳐 주세요. 그러나 동시에 쳐다봐 줘야 하고 설명해 줘야 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좋은 인정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자기의 친구들에게 자식을 소개해 주는 것입니다.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너희들 다 들어가라!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소외감을 느끼니까요. 인사시키고 소개해 주세요.  

     

      또한, 어머니들은 기억하세요. 포근한 어머니가 되세요. 언제나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어야 합니다. 날 이 모습 이대로 영접하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서는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알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내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들. 아이들로부터 아버지를 빼앗아가지 마세요. 남편이 비록 나에게 서운하게 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남편을 자식 앞에서 헐뜯지 마세요. 그것은 아이로부터 아버지를 박탈해 가는 너무나도 잘못된 행위이올시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은 말하기를 인생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성장하면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만나고 닮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말이죠. 여러분의 자녀들이 균형 잡힌 부모 속에서 성장하고 여러분에게서 떠나서 하나님께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2절 말씀처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럽게 성장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자녀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어머니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길러야 하는데 아버지가 원칙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고 무자비한 율법이 될 때도 많았으며 어머니의 긍휼이 날카로움으로 변질되서 우리 자녀들에게 아비없는 자식. 어미없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한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다운 어머니가 되어서 아버지를 통해서는 세상사는 방법을 배우고 어머니를 통해서는 자기가치를 확인하는 균형잡힌 인격으로 우리 자녀들이 자라게 하옵시고 성장할수록 우리의 영향력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진정한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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