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까?(신6:4-9, 눅1:57-66)
  • 조회 수: 53, 2013.08.22 21:48:05
  •  오늘의 설교 제목은 세례 요한의 탄생에 얽힌 신기한 말을 듣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까?" 이런 관심은 부모된 사람들 모두의 관심이요 질문이어야 합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에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장차 어찌될것인가? 라고 물으면서 부모된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어린이 주일은 큰 의미를 줄 것입니다.

     
        옛날에 쏘크라테스가 외친 말을 들어보세요. "내가 만약 아덴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 갈 수 있다면 이렇게 외치리라: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어째서 당신들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면서 당신들의 자녀들에게는 관심을 쏟지 않습니까?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때가 오기전에 어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과 물질을 드리십시오" 위대한 철학자 쓰크라테스가 말한 것중에 우선은 자녀들에게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오기전에"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어느 시기가 지나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관심을 크게 가지고 사랑을 쏟고 물질을 다 쏟으면서 자녀들을 변화시켜 볼려고 하더라고 아니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인성과 심성의 연구가 매우 과학적으로 진행되어 쏘크라테스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때"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는 유명한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세계적인 한 미국의 잡지에 나온 글에 인간의 성장이나 성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들, 때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첫 5년이 한 인생의 전부를 형성한다." 다른분도 이에 동의하여 "한 인생의 행동양식은 다섯 살 까지에서 규정된다." 또 어떤 학자는 "아기의 처음 일년이 제일 많이 자라는 시기다"라고 말하면서 성숙한 좋은 시민을 원한다면 "요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학교종이 땡땡 울릴 때 까지 기다렸다가는 늦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5살은 심리적으로 늙었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청소년 범죄와 어른들의 범죄들은 이미 애기 때 싹이 시작이 된 것인데 그 시초에서 잘라내지 않고 방치하여 그것이 커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범죄자를 감옥에 가둬서 혼을 내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 중 극히 소수만이 변화하여 새 사람으로 변신하지만, 대다수는 또 다시 똑같은 범죄를 저질른다고 합니다. 재범 삼범 사범 이렇게 일생을 못된 짓을 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라고 합니다. 범죄를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길은 애기때 부터 시작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머리가 큰 다음에는 인성이나 심성을 바꾸기가 쉽지않다는 말입니다. 특히 시카고대학의 교육학 교수인 벤자민 불룸 교수는 "4살까지는 그의 성숙때까지의 지능의 절반이 형성된다" 고 했는데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3살 때 버릇이 여든살 까지 간다" 는 우리 어르신네들의 말씀이 매우 과학적입니다.

     
        어린이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말들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루터 등의 종교개혁 이후 정신을 차려서 어릴 때 부터 교육을 시켜야 하겠다고 마음 먹고 12살 까지의 어린이들에게 종교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카톨릭이 숫적으로는 열세인지는 몰라도 어렸을 때 부터의 교육을 통하여 성숙한 신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애기때 부터의 훈련을 통하여 처녀와 총각의 신부나 수녀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12살이 넘어서 가르친 교리 가지고는 그런 제도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절제와 인내의 정신을 애기때 부터 가르쳐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본능 마져도 극기시키는 훈련을 쌓게하여 성직자로 지망하게 합니다. 물론 개중에는 타락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이고 전체적으로 카톨릭의 경건수준은 신교 보다 훨씬 높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된 배경이 "12살 이내의 어린 자녀들을 잡아라"라는 저들의 표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한 인간의 품성, 인격 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인간의 문화 즉 그의 가치관, 아이디어, 태도 등등이 각기 다른데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베어버린 자기적인 삶의 태도가 굳어진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와 진 것일까요? 자기적인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배후의 힘은 무엇인가요? 어디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기에 자기적인 독특한 삶의 스타일과 세계관이 형성되었을까요? 첫째가 가정, 둘째가 교회 혹은 종교, 셋째가 학교입니다.

     
        먼저 가정을 보면 가정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 전달자요 및 결정자입니다. 가정의 어른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등이 그 후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은 더 큽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경우 전부는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가정에서 믿음을 전수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훌륭한 믿음의 조상들의 가문에서 좋은 믿음의 식구들이 배출됩니다.

     
        최근에 와서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제도가 생기고 있는데, 이런 변화는 가치의 전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살고 계시다면 그 손자 손녀들이 학교에 다녀와서 그들에게서 가치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들 들을 수 있습니다. 가정의 전통에 대해서도 듣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노인들이 일생동안 그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얻은 산 교훈을 그들의 입을 통하여 생생하게 후손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 체험은 어린 나이의 손자 손녀들의 뇌리에 인상 깊게 새겨져서 영구한 영향을 그들에게 끼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은 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즈음에는 아버지는 거의 밖에 나가서 일하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접촉이 거의 없어서 그들에게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나, 집에서 살림만 하는 어머니의 영향은 대단히 큽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라는 우리 찬송가 234장의 가사가 가정의 영향의 중대함을 보여 줍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이 살지 않은 경우도 많고 또한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직장에 일하러 나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자녀들이 가정의 어른들과의 대화 조차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가정을 통하여 받을 수 있는 영향은 거의 상실되고 있습니다. 가정은 더 이상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삶의 가치와 세계관을 전수하는 장소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한 건실한 인간으로 키우려면 가정에서 부터 좋은 모범과 교육을 실시하여야 합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에 교훈하는 것 처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계속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에 영향을 주는 둘째번 요소인 종교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적 가치를 전수 받을 것이고, 불교 신자라면 그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이다. 무당 종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당 종교의 샤마니즘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워 가지게 됩니다. 종교의 영향이 대단합니다. 지금 서구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조상들이 오랫동안 믿어오던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믿음의 조상들이 가정에서 참 믿음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구 사회는 세속주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기독교국이라고 자랑하던 서양의 나라들이 온통 세속주의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저들의 이기주의, 성적문란 그리고 엄청난 범죄율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더 이상 저들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기독교인들이 1000만명이라고들 말하지만은 정말 예수의 문화를, 기독교의 문화를 체득하고 그 문화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중 몇 프로나 되는지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통계로 잡을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의 기독교가 한국인의 가치의식에 영향을 거의 못주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와서 신교도들이 1만명 가량일 때(당시 전인구 1200만명) 교회가 당시의 한국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예컨데 기독교인들이 사는 동네로 발령을 받을까 두려워한 감사(군수)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독교 신자들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의감이 강했고, 백성을 사랑하여 사회의 불의를 고발했으며, 억압하고 착취하는 고관들에게 항거했습니다. 1200명중 1명밖에 안되던 초대 교인들의 사회적 영향이 대단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인구의 4명중에 1명이 기독교 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계속 썩어가고 있고 어두워지고 있는 것을 보면 교인들의 대사회 영향이 거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상과 같은 분위기속에서 기독교적 문화가 자녀들과 후배들에게 전수되기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의 가치형성 과정에 아무러한 영향을 주고있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세속의 물결에 종교 전체가 밀려가고있는 형편입니다.

     
        세번쨰로 인간의 가치 형성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학교입니다. 가정이나 종교가 젊은이들의 삶의 태도, 세계관에 영향을 거의 못주고 있는 반면에 학교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어른들의 살아있는 체험적 이야기를 가정에서 듣지못하고 있고, 또한 종교적인 감화도 받지 못하는 오늘의 세대들은 오로지 학교에서 삶의 태도, 가치관, 세계관 등에 크게 영향을 주는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학교 교육이 매우 세속적입니다.

     
        인간의 인격의 기초를 놓는 시기인 초등학교 시절의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 대부분이 세속적인 지식 전달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어린이들의 사람됨의 교육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올라 갈 수록 이른바 대학 입학을 위한 시험 준비에만 열을 올리기 때문에 인격 교육은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로 학교는 좋은 인격을 길러내는 장소가 더 이상 아닙니다. 오히려 악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 학교도 예외는 아닌 듯 합니다. 실로 기독교인 교사들과 기독교 학교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결국 우리 성도들이 각기 자기의 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수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가 한 인간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교회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세속의 학교 교육이 하루에 8시간 이상을 할애하는데 반하여 교회 교육은 한 주일간 겨우 한 두 시간정도만이 사용되니 이러한 미미한 교회 교육으로서는 한 인간의 삶의 방향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인간의 품성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교회 교육을 활성화 시켜야 할 것이다. 시간을 늘리는 것과 동시에 공간을 많이 확보해 줘야 합니다. 어른들 중심의 공간과 시간 배정을 지양하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주하여 예배와 교육의 시간과 공간을 배당해야 합니다. 교사들의 질 또한 크게 향상 시켜야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새 교사대학도 개설해 놓고 있으나 교사들 절반도 참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새 천년에 들어와서 세상은 더욱 빠른 속도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경건의 내용 커녕은 그 모양 마져도 없어져가는 느낌입니다. 다원화사회와 정보화사회속에서 급속하게 퍼져가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 본능의 실현 욕망때문에 무서운 범죄들이 더욱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교회의 교육은 정말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습니다. 그렇기에 교회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며칠전 교회 사이버공동체에 한 청년의 글이 실렸습니다. 청년부실이 없어서 효과적인 청년신앙운동이 되지 않고 있다는 항의성 글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에 믿음의 가정의 어른들의 책임과 교회의 책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하고 자녀들을, 후배들을 애기때 부터 예수님의 인격으로 길러서 교회와 나라의 훌륭한 일꾼, 예수님의 품성을 가진 지도자로 길러가도록 관심을 하십시다. 장차 이 아이가 어쩨될까? 깊이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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