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의 자녀교육(창세기 22:1-19)
  • 조회 수: 142, 2013.01.09 22:13:43
  •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 가정과 관련된 행사가 많은 달입니다. 교회에서는 5월 첫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성경에는 가정의 귀중함에 대하여 많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가정이라는 제도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행하신 것도 가정에 대한 관심이라고 합니다.
     자녀교육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어렵고 힘듭니다. 기도 없이는 하지 못하는 것이 자녀교육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된 성경적 자녀교육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자녀교육을 통하여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우상시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후에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 하나가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녀에 대하여 관심을 너무나 많이 가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자녀가 우상이 되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자녀 교육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린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75세에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시고는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고(창16:15), 다메섹에서 데려온 양자 엘리에셀(창15:2)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며,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입히고, 먹이고, 교육을 시켜도 아깝지 않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1:8에는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을 배설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다면 실천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산으로 간 것은, 아무리 귀한 아들이지만 하나님보다는 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옛날에는 자녀를 너무 천하게 여기므로 어린이주일과 어린이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이를 우상시하여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자녀를 우상시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카악!' 기질 고(氣質 考)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앉고자 의자를 뒤로 뺀다. 뺀 의자가 그 뒤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젊은이의 팔꿈치에 닿았던지 국물이 좀 튀겼던 것 같다. 이 젊은이 카악! 하고 일어나 공격자세를 취하고 '꼰대가!'하는 원색적 언사를 발사한다.
     줄서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한 젊은이가 새치기해서 앞자리에 앉길래 줄서 기다리는 사람이 보이지 않느냐고 나무랐던 일이 있다. 이 젊은이 카악! 하며 뒤돌아보더니 '당신 자리 내가 앉았소? 잘난 체하지 마시지'한다. 대꾸했다가는 육체적 반격이 나올 것이 분명한 기세였다. 이만한 젊은이들의 카악! 반동(反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줄 안다. 스승이 학생에게 곧잘 얻어맞는 것도 바로 카악! 기질이 상식적인 발로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살인사건의 경우 상대방과 사소한 시비 끝에 카악! 하는 성질을 못 참고 저지른 경우가 53 퍼센트나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88 퍼센트가 카악! 때문에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프린츠홀른은 남을 배려하는 '가슴'이 퇴화해 없어지고, 이기적 머리만 커진데다 본능적 생식기만이 그 머리에 달려 있는 기구한 몰골의 인간을 '프린츠홀른 인간'이라 이름했다. 카악! 하는 기질로 살인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히 프린츠홀른 인간이요, 그런 기형인간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이 된다.

    2.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짐을 지고 산을 오르게 하였습니다.
      창 22:6.에 보면"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우리들 같았으면 가벼운 짐인 불과 칼은 아들에게 맡기고, 무거운, 번제에 쓸 나무는 아버지가 힘이 들어도 지고 갔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아들은 편하게 해주려는 마음으로 짐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거운 짐을 이삭에게 지우고 갔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편하게 하려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는 자녀들이 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그 짐조차 아버지가 지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마음 편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들을 대신하여 아프고 싶고, 자녀들을 대신하여 시험도 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의 짐은 자녀들이 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려운 시험을 치르는 것을 보지 못해서 돈으로 합격을 산다면 그것은 자녀들의 짐을 자녀들 자신에게 지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자녀가 사랑스러워도 그들의 짐을 스스로가 지고 가도록 교육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귀한 자녀들이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길러야 하겠습니다.

    ⊙ 각국의 자녀교육
       일본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라!"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은 공중도덕 지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고 사는 얘기가 있다.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이라고 한다. 확실히 미국 사람은 어디 고아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장 입양하고 남에게 나눠주는 일을 한다.
     우리 나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남에게 기죽지 말아라!" 바로 이 말을 들으며 우리 아이들은 자란다.
     그래서 학생들은 스승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덤벼들고, 부모에게 덤벼들고, 사장 앞에서도 큰소리를 친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나와서 불문곡직하고 고함부터 지른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논리다. 어디에서든 기죽지 않으려고 해외에 나가면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들을 싹쓸이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기가 살았다고 좋아한다.
     기가 죽어도 안되겠지만 남을 사랑하는 법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한마디 충고가 겁이 난다. 기죽지 않고 커왔기 때문에 당장 눈을 부라리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기죽지 말고 살아라!"하는 말은 우리의 자녀들을 정말 죽이는 말이다.

    3.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도록 교육했습니다.

    ⊙ 유대인의 교육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꼬마는 평생 처음 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 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 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린다.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땅 송두리째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나님 방불한 실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까닭 없는 배신의 아픔은 어린이가 재대로 소화하기에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이럴 때 아빠는 자기 아들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교훈 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한눈에 매정해 보이는 유대인의 아비들은 이 진리를 아이들에게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없이 온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2천 수 백년 동안 자기들의 민족성을 굳게 지키고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의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육아법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는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 시집가는 딸에게 엄청난 혼수를 장만해 주는 것 등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만이겠는가? 엄마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까지 책임질 작정으로 맹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지 않는가? 이런 식의 육아법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남을 의지하는 졸장부로 만들고 또 지극히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 파탄의 인생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를 귀하게 여기고, 잘 키우고자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학교 교육도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좋은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해서 결혼을 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런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교육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에 대하여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번제 할 어린양이 어디에 있느냐는 이삭의 물음에, 창 22:8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교육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로써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계속해서 보면,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산 신앙교육인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죄악의 길로 가거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참된 교육을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에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교육을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귀한 자녀를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참 신자들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 결론(決論)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교육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우상시하지 않았습니다.
     2.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짐을 지고 산을 오르게 하였습니다.
     3.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도록 교육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어린이교육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집시다. 그러나 잘못된 관심은 오히려 자녀의 앞길을 막고, 죄악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참된 자녀교육을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자손이 잘 되고, 참 신앙의 대를 바로 이어가는 축복의 가문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 가정과 관련된 행사가 많은 달입니다. 교회에서는 5월 첫째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성경에는 가정의 귀중함에 대하여 많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가정이라는 제도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행하신 것도 가정에 대한 관심이라고 합니다.
     자녀교육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어렵고 힘듭니다. 기도 없이는 하지 못하는 것이 자녀교육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참된 성경적 자녀교육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자녀교육을 통하여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우상시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후에 사회에 끼친 영향 중에 하나가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녀에 대하여 관심을 너무나 많이 가지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자녀가 우상이 되는 가정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자녀 교육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린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75세에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시고는 100세에 아들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고(창16:15), 다메섹에서 데려온 양자 엘리에셀(창15:2)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과 다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며,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입히고, 먹이고, 교육을 시켜도 아깝지 않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1:8에는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大宴)을 배설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다면 실천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산으로 간 것은, 아무리 귀한 아들이지만 하나님보다는 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귀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옛날에는 자녀를 너무 천하게 여기므로 어린이주일과 어린이날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이를 우상시하여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자녀를 우상시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카악!' 기질 고(氣質 考)
       중국음식점에 들어가 앉고자 의자를 뒤로 뺀다. 뺀 의자가 그 뒤에서 국수를 먹고 있는 젊은이의 팔꿈치에 닿았던지 국물이 좀 튀겼던 것 같다. 이 젊은이 카악! 하고 일어나 공격자세를 취하고 '꼰대가!'하는 원색적 언사를 발사한다.
     줄서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한 젊은이가 새치기해서 앞자리에 앉길래 줄서 기다리는 사람이 보이지 않느냐고 나무랐던 일이 있다. 이 젊은이 카악! 하며 뒤돌아보더니 '당신 자리 내가 앉았소? 잘난 체하지 마시지'한다. 대꾸했다가는 육체적 반격이 나올 것이 분명한 기세였다. 이만한 젊은이들의 카악! 반동(反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줄 안다. 스승이 학생에게 곧잘 얻어맞는 것도 바로 카악! 기질이 상식적인 발로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살인사건의 경우 상대방과 사소한 시비 끝에 카악! 하는 성질을 못 참고 저지른 경우가 53 퍼센트나 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88 퍼센트가 카악! 때문에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정신의학자 프린츠홀른은 남을 배려하는 '가슴'이 퇴화해 없어지고, 이기적 머리만 커진데다 본능적 생식기만이 그 머리에 달려 있는 기구한 몰골의 인간을 '프린츠홀른 인간'이라 이름했다. 카악! 하는 기질로 살인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히 프린츠홀른 인간이요, 그런 기형인간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이 된다.

    2.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짐을 지고 산을 오르게 하였습니다.
      창 22:6.에 보면"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우리들 같았으면 가벼운 짐인 불과 칼은 아들에게 맡기고, 무거운, 번제에 쓸 나무는 아버지가 힘이 들어도 지고 갔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아들은 편하게 해주려는 마음으로 짐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거운 짐을 이삭에게 지우고 갔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편하게 하려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에게는 자녀들이 져야할 짐이 있습니다. 그 짐조차 아버지가 지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마음 편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들을 대신하여 아프고 싶고, 자녀들을 대신하여 시험도 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의 짐은 자녀들이 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려운 시험을 치르는 것을 보지 못해서 돈으로 합격을 산다면 그것은 자녀들의 짐을 자녀들 자신에게 지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자녀가 사랑스러워도 그들의 짐을 스스로가 지고 가도록 교육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귀한 자녀들이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길러야 하겠습니다.

    ⊙ 각국의 자녀교육
       일본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라!"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은 공중도덕 지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국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고 사는 얘기가 있다.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이라고 한다. 확실히 미국 사람은 어디 고아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장 입양하고 남에게 나눠주는 일을 한다.
     우리 나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남에게 기죽지 말아라!" 바로 이 말을 들으며 우리 아이들은 자란다.
     그래서 학생들은 스승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덤벼들고, 부모에게 덤벼들고, 사장 앞에서도 큰소리를 친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나와서 불문곡직하고 고함부터 지른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논리다. 어디에서든 기죽지 않으려고 해외에 나가면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들을 싹쓸이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기가 살았다고 좋아한다.
     기가 죽어도 안되겠지만 남을 사랑하는 법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한마디 충고가 겁이 난다. 기죽지 않고 커왔기 때문에 당장 눈을 부라리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기죽지 말고 살아라!"하는 말은 우리의 자녀들을 정말 죽이는 말이다.

    3.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도록 교육했습니다.

    ⊙ 유대인의 교육
       유대인들의 육아법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다. 어린 자녀가 차츰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면 아이들과 신나게 놀던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선다. 꼬마는 평생 처음 당하는 엄청난 쇼크에서 쉽게 헤어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하여 인간에게는 까닭 없는 배신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이렇게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어린 아들로서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절망과 배신을 딛고 또 다시 아빠 품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고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던 아빠가 다시 한번 호되게 밀쳐내 버린다.
     어린 아들에게 아빠는 사랑의 대상이요, 다정한 친구요, 자신의 삶은 몽땅 송두리째 책임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아이에게만은 하나님 방불한 실존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까닭 없는 배신의 아픔은 어린이가 재대로 소화하기에 힘겨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이럴 때 아빠는 자기 아들에게, "아들아!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이 아빠가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교훈 한다. 그리고 인간이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5)
     한눈에 매정해 보이는 유대인의 아비들은 이 진리를 아이들에게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참고 견디며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없이 온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면서도 2천 수 백년 동안 자기들의 민족성을 굳게 지키고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힘의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육아법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나만 굳게 믿어라! 나는 너를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단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편하게 살아라!"라는 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 않는지?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 시집가는 딸에게 엄청난 혼수를 장만해 주는 것 등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만이겠는가? 엄마는 아이들의 학교 성적까지 책임질 작정으로 맹렬한 치맛바람을 날리고 다니지 않는가? 이런 식의 육아법은 결국 자녀들로 하여금 남을 의지하는 졸장부로 만들고 또 지극히 무기력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은 하늘같이 믿었던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그 엄청난 충격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결과 적으로 파탄의 인생을 살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오직 하나님 외에는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자녀를 귀하게 여기고, 잘 키우고자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학교 교육도 중요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좋은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해서 결혼을 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런 것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교육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에 대하여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번제 할 어린양이 어디에 있느냐는 이삭의 물음에, 창 22:8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속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교육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고 칼로써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있었습니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창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리고 계속해서 보면,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산 신앙교육인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자녀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죄악의 길로 가거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참된 교육을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에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교육을 우리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귀한 자녀를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참 신자들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 결론(決論)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교육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우상시하지 않았습니다.
     2.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짐을 지고 산을 오르게 하였습니다.
     3.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도록 교육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어린이교육과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집시다. 그러나 잘못된 관심은 오히려 자녀의 앞길을 막고, 죄악의 길로 가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참된 자녀교육을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자손이 잘 되고, 참 신앙의 대를 바로 이어가는 축복의 가문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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