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은 당신의 선한 목자이다(요10:1-42)
  • 조회 수: 94, 2013.06.16 21:26:14
  •  오는 9월 12일은 추석입니다. 우리 민족은 두 가지 큰 명절을 지킵니다. 정월 초하루인 설날과 팔월 한가위 추석입니다. 김성원의「한국세시풍속」란 글에 의하면 추석의 기원은 신라 3대 유리왕(儒理王)부터 라고 합니다.「동국세시기」에서는 당시 경주 시내의 여섯 개의 행정 구획에서 선발된 여인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7월 16일부터 시작하여 한 달간 베짜기 대회를 가집니다. 그래서 8월 15일 추석날 종합성적을 발표하여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음식을 제공해 줍니다. 이때 가무(歌舞-노래와 춤)로 한마당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 날을 가배일(嘉俳日) 혹은 가윗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성대하게 치르다 보니 한(큰) 가위(갚이⇒ 갚음⇒ 가위)로 변천되어 부르게 된 것입니다.「갚이」란 풍성한 수확을 주신 자연에 감사하여 자연숭배를 하고, 조상에게도 은공을 기리면서 차례(茶禮)를 올리는 것입니다. 이날은 우리나라에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인 일본에서는 십오야(十五夜)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중추절(仲秋節)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풍성한 수확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숭배할 대상이 아니라 다스리고 관리하고 보호할 대상입니다. 조상이신 부모는 공경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효를 행할 것이지 예배의 대상은 조상을 주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오히려 조상을 욕되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잘못된 사회적인 풍습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에 형성된 잘못된 종교 행위가 문화의 가면을 쓰고 민족적으로 우상숭배 행위를 하는 어리석고 무지함을 깨우쳐야 합니다. 천주교는 스스로 영적 순결을 포기하고 세속과 짝하여 하나의 무속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명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온 가족과 가문이 복음으로 하나된 집안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먼저 명절 아침에 온 가족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모처럼 만난 이웃과 친족들에게 인사도 올리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로 우의를 다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족이나 친족 중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 불신자이거나 철저한 우상숭배자일 경우에는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 합니다. 첫째, 사전에 철저히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는 영적인 대립이므로 악한 마귀의 역사를 이기는 비결은 기도로 무장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둘째, 할 수만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모처럼 모인 가족과 친족들인데 서로 싸우고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함이 좋습니다. 셋째, 그래도 억지로 우상숭배 행위를 강요할 때입니다. 이때 꼭 기억해야 할 한가지 사실은「한번 무릎을 꿇으면 일평생 구속받아야 하나 한번 거절하고 고통의 대가를 치르면 평생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 안에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은「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할 때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많은 비유들 가운데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두 가지만 소개하면 식물의 비유 중에는 포도나무 비유이며, 동물의 비유에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목민으로서 양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양과 목자라면 너무도 익숙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마 아직도 양을 한번도 보지 못한 자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목자에 있어서 양은 선택적인 조건이지만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주님

     유대인들은 양을 치는 유목민입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이 그러했습니다(창37:12-13). 이들은 양을 치러 나가면 수개월 동안 초지를 따라 이동하면서 양무리를 칩니다. 그러므로 목장에 양 우리를 만들어 낮이면 초장에서 풀을 먹고 놀던 양들이 밤이면 양 우리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여러 이웃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양을 먹이기도 합니다(창13:7). 그래서 밤이 되면 한우리에 여러 양들을 넣어 두고 문지기를 두어 지키게 합니다. 날이 새어 목자가 오면 각자 자기 양들을 불러 초장으로 나아갑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9)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내가 문이니」라고 했으니 주님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주님을 통하여 양 우리로 들어갑니다. 문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양은 이 우리 안에서 안전한 보호를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하여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했습니다. 둘째, 주님을 통하여 초장으로 나가게 됩니다. 밤 동안에 보호를 받은 양들이 날이 새면 문을 통과하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요(요7:38), 진리의 생명 떡입니다(요6:48). 그러므로 주안에서만이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사55:1-3). 셋째, 문은 도적을 막아줍니다. 문이 하는 역할은 열고 닫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동문입니다. 목자가 들어갈 때는 문이 열리지만 이리나 절도나 강도가 오면 자동적으로 문이 닫히게 됩니다. 그래서 양 무리를 보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우리」라는 것을 단순한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밖에 있는 양 이방인에 대하여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우리」란 공간의 개념을 포함한 언약관계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

     목자도 두 종류의 목자가 있습니다. 삯을 받고 남의 양을 치는 삯군과 주인이 자기 양을 직접 치는 경우입니다. 삯군은 목자가 아닙니다.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니까? 양무리의 형편을 전혀 모릅니다. 그저 날만 떼우고 품삯만 받아 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양을 치는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 무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받칩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의 목자상은 이러합니다. 첫째, 자기양의 이름을 압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팔레스틴 목자들은 양에게 각기 이름을 지어줍니다. 주로 식물이나 아름다운 꽃 이름들을 따서 지어 줍니다. 양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양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항상 양 무리들을 앞서갑니다. 양들을 각각 이름을 불러 내어 놓은 후에는 그들 앞서 가면서 그들의 길을 인도합니다. 이것이 영적 지도자상입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뒤에서 매를 가지고 교정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훈련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함께 다리고 다니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모범교육입니다. 셋째,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주님은 양들을 우리 안으로 넣어서 이리나 절도나 강도로부터 구원을 얻게 하고, 초장으로 인도하여 풍성한 꼴을 먹여주시고 양들의 생명력을 왕성하게 합니다. 넷째,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1, 15)고 했습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사자가 양 새끼를 물어갈 때 목숨을 걸고 가서 사자의 입에서 양 새끼를 건져내었습니다(삼상17:35). 주님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사단의 손에서 건져서 천국으로 인도하고 자신은 갈보리에서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삯군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삯만 받아먹고 세월을 허송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게 맡겨준 영혼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잠27:23)고 했습니다. 양 무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양 무리들 앞서가면서 선한 본을 보이고, 신령한 꼴을 먹여 기름지게 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보다 먼저 온 절도와 강도

     여기 절도와 강도가 누구인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 주님은 우리를 지키는 영원한 문이요, 영원한 목자입니다. 주님을 문으로 하지 않고 만든 「우리」는 「참된 우리」가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를 가장해 그들이 즐기기 위해 만든 사교장이요, 혹은 그들의 정욕을 위한 양 무리를 도살할 도축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이들은 참 목장을 헐고 양 무리를 삼키고 목자를 해하려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첫째,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19). 같은 말씀을 듣고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악령의 지배 아래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가 귀신이 들려 미쳤다고 합니다(20). 그래서 예수를 따르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미혹합니다(24). 복음을 가로막는 세력들은 다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둘째,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30-31).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돌로 쳐죽이는 경우 몇가지를 소개하면 사회악의 뿌리인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을 때(요8:5), 모세의 율법의 금하는 이단을 선포할 경우(행7:58), 신성 불가침 영역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경우(31)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눈이 어두워 목전에 메시야를 두고도 영접하지를 못했습니다. 셋째,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했습니다.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39)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여 주님은 피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의 집을 지으려고 주님을 보내었으나 앞서 보냄을 받은 건축자들은 아무런 쓸모 없는 돌인 줄로 알고 갈보리 골고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버려진 그 돌을 주워서 구원의 집을 짓는데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행4:11).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삯군입니다. 당시 대제사장은 여호와의 이름을 팔아서 엄청난 부유함을 누렸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과 서기관들은 성전에서 안락한 생활을 즐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장로들은 산헤드린이란 이름 밑에 귀생하면서 많은 백성들 위에 군림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다 백성들의 지도자였으나 삯군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은 목자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지난 80년대 초 프랑스의 알핀 지방에서 1.050마리의 양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져 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양의 시력이란 겨우 5-7미터를 보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앞서가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따라갑니다. 목자가 없는 사이 앞서가는 양을 따르던 무리가 떼를 지어 가다가 절벽에 떨어져 몰사하고 만 것입니다. 양은 절대적으로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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