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치 않은 자의 변명 (눅17:11-19)
  • 조회 수: 102, 2013.07.14 17:28:28
  •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10명이 모두 돌아와 감사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한 명만 감사하러 온 것에 대하여 실망하셨고 놀라셨습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하지 않으면 주님은 실망하십니다. 주님께서 실망하신 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모두가 감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감사의 기대가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니 1명처럼 돌아와 감사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놀라고 실망하십니다. 그것도 당연히 감사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알았던 이들은 안하고, 감사치 않을 줄 알았던 사마리아인은 와 감사하니 놀라실 수밖에요. 오늘날도 직분에 걸맞지 않고, 믿음에 걸맞지 않은 감사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성도들의 감사생활을 보며 기대치 않은 사람에게 놀라고, 기대한 사람에게 놀랍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아주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한 달 후 추수감사절을 저는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분보다 많은 추수감사헌금을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액수 5만원이 그의 추수감사헌금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감사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같은 본문을 통하여 감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눴습니다. 감사는 어려운 것이어서 그 스코어가 9대1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9대1이란 감사치 않은 사람과 감사한 사람의 비율입니다. 오늘 9라는 스코어를 가지고 있는 다수, 감사치 않은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감사치 않은 9명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것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한 명은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이기보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소외되고 천대받던 문둥병에서 놓임 받은 것을 자랑하고 떳떳한 시민이 되었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아홉은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우선순위를 잘못 설정함으로 실패하기 쉽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실패한 이유를 아십니까? [삼상2:29]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와 그 두 아들은 자신들의 배 채우는 것에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중히 여긴 것이요, 우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신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모자식간에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씀하심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다윗성에 언약궤를 무사히 옮기고 나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감사드립니다. [대상16:7,8]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우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아홉이 실패한 것은 감사를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를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아홉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제 가슴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답니다.” 10명 모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죠.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마음으로만 담고 있는 사람과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에서 나지만 행동화할 때 인정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10 사람 모두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그
    마음을 행동화하였습니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
    마리아인의 감사의 행동화는 “큰 소리”와 “돌아와”, “엎드려”라는 세 단어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두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아홉과 이 한 사람이
    다르다면 감사한 마음이 다른 게 아니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의 차이입
    니다.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관념론이 아닙니다. 주
    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씀도 그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성경에
    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19절]의 선언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정말 감사를 행동화하였을 때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의 아홉과 하나는 그 믿음이 다릅니다. 아홉은 병 고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고, 하나는
    구원 받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고 환상을 보는 종교적 엑스타시에 만
    족하는 성도들이기 보다, 하늘나라 시민이 되길 바랍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
    의 구원을 받음이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다 나와 같은데요

    아마 아홉은 다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간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자신
    의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다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친구에게
    로 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집으로 가네요.” 그들이 외쳤을 법한 말입니다. 잘못
    된 비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홉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율법을 너무도 잘 알고 지키고 있는 유대인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감사를 방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서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따
    라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야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니까요. 여러분, 오늘
    날에도 이런 사태는 너무 잘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이제 시작하는 사람
    보다 낫겠지 뭐.’, ‘권사님이니까 따라해야지.’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믿음 없고 인색
    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따라하지 마세요.

    실은 신앙도 일종의 배움입니다. 감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따라하려면 제대로 된 사
    람을 따라해야 합니다. 제 아들은 늘 자신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에서 2등하고
    학년에서 15-20등정도 합니다. 그는 늘 말합니다. “이만하면 잘하잖아요!” 그런데 제 엄마
    는 늘 못한답니다. “그렇게 해선 안 돼. 내신 등급 1등급은 받아야 돼.” 왜 이 말을 할까
    요? 아들은 자신 보다 못하는 아이들과 비교하고 엄마는 잘하는 아이와 비교하기 때문입니
    다.

    어디다 비교하느냐는 중요합니다. 아홉 명은 서로에 비교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병
    은 고쳤지만, 구원하고는 거리가 먼 걸 어찌합니까? [마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바로 이
    런 내용입니다. 오후 1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사람들이 많이 받을 줄
    알았다가 한 데나리온을 주자 불평합니다. 자신에게 약속된 게 한 데나리온이면 비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잘못된 비교는 불평을 낳고 감사를 잃게 만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
    들의 불평도 비교에 기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에 실패하고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감사에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과는
    엄청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감사를 먼저 하십시오. 마음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감사를 행
    동화하십시오. 잘못된 비교는 금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옥 간다고 우리가 지옥 갈 수는 없
    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자는 변명이 있겠지만, 그 변명은 하나님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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