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찬의 복(마26:26-28)
  • 조회 수: 65, 2013.06.03 20:42:21
  •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은 대단히 정확한 것 같아도 때로는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한가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입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노 부부가 생의 말년에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헌납할 생각으로 명문대인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총장실에 들어가 총장을 만나려 했지만 총장실 비서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 부부를 아주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노 부부가 물었습니다. "이런 대학 하나를 설립하려면 얼마나 듭니까?" 그 질문에 비서는 더 업신여기면서 들은 척도 않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두 노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전 재산을 다 털어 대학재단을 세웠습니다. 이 부부가 세운 대학이 그 유명한 스텐포드대학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우 아쉬워 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하버드 대학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여러분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 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를 외몰 취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주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보십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 여러분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에 참여하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의미없는 행사로만 끝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성찬의 예식이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똑 같은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여 아무런 은혜도 주지 못하지만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기념비를 세우라고 지는 않으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날이라고 기념식을 해본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하나 주님과 함께 같이 나누었던 성만찬 예식을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이 일을 지금까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도 설명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이 의미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1.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나누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2.그 행위에 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눅22:19) 그리고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막14:24)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성찬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이 왜 복입니까?

    1.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15년 전 저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희 가정은 지금까지도 그 날이 되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하곤 합니다. 이렇게 추도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날 먹는 음식이 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예배시간의 길이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일생동안 사실 때 전해주신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생명을 전달해 주신 분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 예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뿐 아니라 목사가 되게하기 까지 늘 배후에서 기도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할 때,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늘 잘되기를 바라면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저는 그 날에는 아버지가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감사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노르웨이 어느 시골마을 교회 종탑에 어린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수 많은 조각 가운데 왜 어린양의 조각을 세웠을까요? 
    그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돈이 많이 없어서 건축회사에 의뢰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직접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거의 다 지어져 갈 즈음 한 교인에 교회 종탑을 세우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때마침 그 아래에로 지나던 양떼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죽고 대신 그 사람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상 다 죄인이었고 마땅히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자랑할 이유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가문과 학문 그리고 행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러한 일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살게 한, 새 생명을 얻게 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고,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아난 인생,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와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그 자체로만 봐도 우리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서 끝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이 일에 감사해서 늘 성도들에게 인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평강은 주님이 함께 하심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선물이 가지고 있는 그 액수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분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이란 은혜를 선물로, 공짜로 주셨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까 고민합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이에게 무엇을 먹여야 튼튼할까를 고민하면서 음식을 가리기까지 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어떤 우유를 먹일까를 생각하면서 이 회사, 저 회사를 알아보면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크면 어느 학교를 보내야 잘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의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하실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시겠습니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당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만 있으면 이 자리에서 더 높은 자리까지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비록 고난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계획이 있기에 여기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나를,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볼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보시고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다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내게 어떤 것이 복된 것인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까지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두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성찬은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까지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시내산에 내려오셔서 20장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너희를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난 이후에 말씀하신 것은 십계명, 제사의 방법, 종의 규례, 사형의 죄, 손해배상법, 성 도덕법, 사회 정의 복지의 법 등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백성들은 산에 오르지 못하고 평지에 있었고 장로와 제사장들은 산 위에 까지 올라왔고, 그리고 모세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12지파를 상징하는 돌 기둥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표시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계 속에 살려고 하는 결단의 의미로 드렸습니다. 이때 모세는 짐승의 피 절반을 하나님의 단 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짐승의 피에 나머지 반을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출28: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들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제사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약속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행했던 것처럼 자신의 피 흘림으로 제자들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 언약을 세울 것을 렘31:3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

    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바로 그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제사를 드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새 언약을 세우시는 제사로 보았고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신앙으로 받아 드리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하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늘 동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시기 위함인데 우리는 과거에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과 죽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그 죄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대속, 곧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들어갈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 사함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실재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했는데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비록 성례예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포된 의미를 모른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만 바른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된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이루리라"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놀라운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의미를 바로 알고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복이 되고 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말에 짐승의 머리에 달린 뿔과 나무의 뿌리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로 솟아난 뿔과 아래로 뻗어 있는 뿌리가 같은 어원이라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소 싸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 들이 싸울 때 뿔이 부러지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뿔이 뽑히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뿔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너무나 보이는 것, 겉으로 나타난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누가 높은가, 공부 잘했는가,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뭔가, 누가 나를 알아주느냐, 교인이 몇 명이고 얼마의 예산을 가지고 운영하느냐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목회의 성공의 기준인 것처럼, 성공한 교회의 기준처럼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나무는 높이 자란 만큼 아래로 뿌리는 내린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뿔 만큼이나 뿌리도 중요합니다. 성찬의 참여는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조그마한 빵조각 하나를 먹고, 포도즙을 마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바르게 이루어 질 때 우리의 신앙은 든든히 서가고 그 신앙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과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성찬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9 admin 98 2013.06.15
28 admin 34 2013.06.15
27 admin 74 2013.06.09
26 admin 138 2013.06.06
25 admin 132 2013.06.03
24 admin 99 2013.06.03
23 admin 94 2013.06.03
admin 65 2013.06.03
21 admin 82 2013.06.03
20 admin 91 2013.04.11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