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들레헴이 받은 축복(미가서 5장 2절)
  • 조회 수: 846, 2012.12.22 17:21:02
  • 미가서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게 될 장소가 ‘유대 땅 베들레헴’이 될 것이라고 700여년 전에 미리 정확하게 예언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원래는 이름 없는 작은 촌락에 불과했던 베들레헴이 장차 구세주께서 탄생하실 곳으로 예정되면서부터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소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베들레헴은,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지상교회에 대하여 아주 귀중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하셨던 날을 성탄절로 보내고 있는 이때에, 이 성탄절을 지켜야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 ‘베들레헴 에브라다’를 향하여 선포되었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의미.....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떡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인데, 미가가 ‘베들레헴’의 옛 이름‘에브라다’를 첨가한 것은 본 절의 베들레헴이 다윗의 집이라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서입니다. 즉 장차 이스라엘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인데, 그것은 다윗의 집안에서 메시야가 나와 그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망해가는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메시야가 나온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정착한 ‘에브랏’ 집안이라는 데에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동네는 얼마나 작았던지, 수15:21-63절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100여 개의 성읍들 이름 가운데조차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베들레헴은 당시의 행정 구역 단위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인구인 1000명도 채 못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라고 하고 있는데 이 에브라다는 스볼론에 있는 다른 베들레헴 지명과 구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삼상 17장 12절에서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라고 했는데, 사실 에브랏 집안은 이스라엘 내에서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바로 ‘에브랏인’이었는데, 그와 그 가족은 베들레헴에서 먹고 살 것이 없어 고향을 등지고 모압으로 이주하였던 보잘 것 없는 집안이었습니다. 모압에서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다 죽게 되자 그나마 가문의 명맥 또한 끊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이방여인인 룻이 친족인 보아스와의 관계에서 아들을 얻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가문은 보잘 것 없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칭송을 받는 다윗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가문을 통해서 후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영광스런 가문은 없을 것입니다.

     

    2. 작다고 실망하지 말고 예수님 만나 베들레헴처럼 출세합시다. 사람들은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앞에다가 ‘대’자를 붙여서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강도 한강대교, 성산대교, 마포대교, 성수대교....낙동대교..‘대’자가 많이 들어갑니다. 아무래도 크면 좋지만 하나님이 쓰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작은 사람들이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말씀을 보면 미가 선지자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지극히 작을지라도...’ 베들레헴은 유다 성읍 중에서 지극히 작은 성읍 중에 하나였습니다. 누가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올 줄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거기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나올 것이며, 게다가 그 분이 바로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실 수가 있으며, 지극히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큰 나라, 큰 도시들을 다 제쳐놓으시고 지극히 작은 도시베들레헴을 들어서 주님이 탄생할 장소로 정하셨습니다. 작아도 얼마든지 큰일을 감당하며 크게 쓰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단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문제는 작은데다가 허구한 날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져 있기에 큰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 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린 다윗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노래하자 그는 열등감에 빠져 돌아버리고야 말았습니다. 열등감이 빠지면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작아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합니다. 3절 말씀에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약속되었습니다. 비록 베들레헴이 장차 메시아가 탄생하실 곳으로 확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현재의 고통이 당장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선 여기서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고’ 혹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 맡겨 두시겠고’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 제국으로부터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이 당분간은 계속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앞에 있는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데, 하나는 ‘메시아를 잉태한 여인이 그 아기를 낳기까지’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해석은 그 ‘임산한 여인’을 메시아를 탄생시키게 할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로 보는 것입니다. 즉 여인이 해산하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긴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메시아가 올 때까지 아직은 좀 더 참고 인내해야 할 기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전자나 후자나 그 어떤 해석을 취하더라도 ‘메시아가 탄생하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아직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전체적인 문맥에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그처럼 베들레헴은,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지금 당장은 앗수르 제국의 침략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미래는 실로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 하반절에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본토에 남아 있는 형제들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반복되는 침략과 약탈에 견디다 못해 약 20년 간에 걸쳐서 북조 이스라엘에서는 자기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갔습니다. 그리고 남조 유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마저 포위를 당하기 시작할 즈음에 가서는 그 성 안에 남아 있던 자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던 소수의 형제들밖에 없었습니다. 외적의 침략은 육체적인 고난을 가져다주었지만, 같이 생사와 고락을 함께 하던 형제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은 유다에 남아 있던 백성들에게 더 큰 심리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형제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끝내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나중에 바벨론에서 포로 해방을 받고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 된 성도’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됨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결국 전체 문장의 뜻은 그리스도의 탄생 후에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구원받은 이방인들과 ‘함께’ 새 이스라엘, 즉 신약교회를 이루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한 노인이 시골 길가에 앉아서 뭔가를 먹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마을의 경찰서장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영감님, 무엇을 드시는 겁니까’, ‘곰배빵 이랍니다’, ‘그래요? 그 빵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손에 들어있는 빵을 반으로 잘라 보였습니다. 그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서장이 의아스러운 얼굴을 하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꿈이 들어있다오’ 이는 2차대전이 끝나고 얼마 후에 제작된 이탈리아의 영화 ‘빵과 사랑과 꿈’속의 한 장면입니다. 그것은 전쟁과 가난과 불행에도 굽히지 않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밝은 모습을 그린 영화였습니다. 원래 곰배빵 속에는 고기며 치즈, 그리고 야채를 두툼하게 넣고 먹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들은 속이 빈 빵만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과 꿈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에 대한 희망과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과 실라가 지진으로 쇠사슬이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망하려 하지 않자, 이에 감명을 받은 간수가 ‘선생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어려움에 처한 우리 가정도 예수를 영접해야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도, 그리고 이 나라와 이 민족도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에 새롭게 거듭나며,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남들 앞에 내세울 것도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이 시대의 ‘남은 자’로 삼아 주셔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여진다면 우리는 세상 그 어떤 명문가문보다 영광스러운 믿음의 가문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서 위대한 가문을 이루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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