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02:13-18/ 슬픔을 이기는 기쁨
  • 조회 수: 672, 2013.10.23 22:10:10
  • 1975년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온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이 크리스마스를 즐거운 가운데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크리스마스를 맞는 기분이 오늘로써 그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를 비롯해서 어른들까지 가정이나 직장이나 할 것 없이 이 날을 국가 공휴일로 정하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 새벽에 이 날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인 사람들도 이 땅 위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조국을 원수에게 빼앗기고 다른 나라에 가서 서러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기뻐하는 크리스마스가 오히려 더욱 눈물을 흘리게 하는 계절이 될지도 모릅니다.

    어린이에게는 이렇게 즐거운 명절이지만 생활고로 인하여 아이들에게 선물 하나 사줄 돈이 없고 남들이 열고 있는 파티 준비를 할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카드 한 장 보낼 물질적인 여유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이런 계절이 오면 항상 그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슬픔 가운데 잠기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슬픈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이런 성탄이라는 명절이 오는 때 벙글벙글 웃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얼굴도, 찬란하게 꾸며진 크리스마스 트리도,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는 성탄송도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 행복스러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의 명절이요, 불행한 이들에게는 하루빨리 어서 지나가 버렸으면 하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크리스마스 새벽에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정말 행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 슬픔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명절이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사람, 불행한 사람들에는 명절이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첫 번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이들은 결코 우리들이 생각한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마리아를 보세요.!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정혼한 남편 요셉과 함께 머나먼 길을 여행하면서 극도로 피곤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삭이 된 여인이 먼 여행을 한 것만도 피곤하겠는데 로마의 학정 아래서 식민지 백성이 당해야만 하는 쓰라림까지 겹쳐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고도 눕힐만한 장소가 없어서 말구유에 아기를 눕히고 강보로 아기를 가리웠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아기 예수를 제일 처음으로 맞이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 못되는 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밤에 누워 잘만한 따듯한 방도 없었고 빈들에서 양을 지키며 이리떼와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셨다는 소식은 큰 권세를 가진 헤롯 왕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소식이었지만 이 가난하고 헐벗은 목자에게는 정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더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가 나셨을 때 베들레헴과 그 근방은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이라는 폭군이 새 왕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살 아래의 모든 어린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벙글벙글 웃는 아이를 빼앗아 둘러 메치고 창끝으로 찔러 죽이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하는 그 어머니들의 심정이 어떠했을 까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 기자는 이처럼 비통한 사실을 기록하여 나가다가 갑자기 붓을 멈추고 “이는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고 썼습니다.
    이 슬픔에 잠긴 어머니들은 옛날 라헬이 상징이 되었습니다. 라헬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여자 야곱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기어 죽었다는 비참한 소식을 들었던 어머니였습니다.

    또 이 글은 누구의 글이라고요? 예레미야의 글입니다. 이 글은 예수님이 나시기 580년 전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오랫동안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 당하였다가 함락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승리한 바벨론 군대의 횡포로 말미암은 그 비참한 정경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참하게 전사당한 아이들의 부모와 오랫동안 포위되어 굶어죽은 자식들의 부모와 살아있기는 하지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부모들이 통곡하는 슬픈 울음소리가 하늘을 진동케 하던 기막힌 역사입니다.

    먼 이방나라로 끌려가는 슬픈 동포들이 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라헬의 무덤 앞을 지나가던 광경을 그려놓은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비참한 역사는 오늘 세계 도처에서(모양은 다르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슬픔의 주인공들, 눈물로 엮어진 역사의 주인공들을 낳은 어머니들의 슬픔을 단 한 마디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다”고.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도 이 세상에는 이렇게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슬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무슨 위로의 말씀이 소용 있겠습니까?

    그러면 성경은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신 첫 번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런 비참한 이야기를 그 사이에다가 기록하였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야말로 이 땅위에 가득 차 있는 모든 슬픔을 무색케 하는 비통한 슬픈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희생의 제물을 삼으려고 이 세상에 보내신 바로 그날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에 가득 차 있는 역사 안에 사는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슬픔의 주인공으로 오신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이런 가난과 고독과 슬픔 속에 죽으러 태어났습니까? 이것은 오로지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슬픈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안한 자리에서 슬픔을 바라보며 위로한 것이 아니고, 슬픈 이들이 당하는 고난 속에 주님 자신이 뛰어들어와서 함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슬픔 속에 잠겨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게 새 샘터를 하나씩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즉 슬픔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머물게 해주는 새로운 샘줄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위로받기를 거절하던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의 당하신 슬픔 안에서 무색해지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힘이 임하여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참으로 성탄을 결코 세상에서 행복하게만 보이는 사람들의 절기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과 가난과 슬픔과 질병과 소외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 슬픔을 디디고 일어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축하해야 할 절기이며 이 슬픔을 이길 수 있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날인 것입니다.
    이 땅위에 퍼져 나가는 크리스마스의 캐롤 속에 비통한 슬픔에 잠겨 많은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진정한 기쁜 성탄을 맞이할 수 있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아니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찾는 길은 오직 슬픔을 안은 채 슬픔 속에 빠지지 말고 저 말구유에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길입니다.

    이 크리스마스 새벽에 슬픔을 이기는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참 기쁨이 넘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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