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02:01-14/ 하나님께 영광, 사람에게 평화
  • 조회 수: 922, 2013.11.08 21:01:31
  • 이 기쁜 성탄 계절에 우리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 위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봉독하신 말씀 중에서 13~14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팔레스틴의 밤은 깊었습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도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피곤하고 지쳐서 졸고 있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치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깊은 밤, 어두운 밤에 주의 영광이 두루 비치었습니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리라” 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어두움이 땅을 덮고 있습니다. 캄캄한 세상입니다. 무지의 흑암이 아직도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되어 달세계를 내왕하지만 아직도 인생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이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생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 하러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두움이 만민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악의 검은 구름이 온 땅을 덮고 있습니다. 음란과 방탕, 사기와 횡령, 절도와 강도, 살인과 방화 등 죄악의 검은 구름은 아직도 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이렇게 흑암으로 덮인 깊은 밤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하셨습니다. 진리의 빛이 임하셨습니다. 사랑의 빛이 임하셨습니다. 성결의 빛이 임하셨습니다. 그 빛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흑암의 세계는 또한 슬픔의 세계입니다. 눈물과 탄식과 슬픔의 깊은 밤입니다. 무지는 슬픔을 가져오고 죄악은 애통을 가져옵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 했었다고 일본 사람들에게 많은 수모를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이면서 학교에 가면 한국말 하지 못하고 일본말을 해야 하는 슬픔을 당했습니다. 말을 빼앗겼습니다. 성을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아주 심각한 약속을 할 때 “내가 만일 그렇게 안하면 성을 갈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서 우리는 성을 갈아야 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가 의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한국 사람에게 소극적인 사고를 심어 주어서 한국인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의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의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뜻밖에 해방을 맞이했으나 여기에 또한 슬픔이 있었습니다. 38선의 슬픔이 있었습니다. 민족이 둘로 갈리게 되었고, 서로 다른 사상의 영향을 받아 한 민족이면서도 서로 원수로 지내는 가슴아픈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6.25 한국전쟁의 슬픔을 겪어야 했고 동족 상잔의 비극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분산의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4.19 민주혁명, 12.12와 5.18 군사 반란의 슬픔, 그 때문에 이 땅의 얼마나 많은 민주 시민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얼마나 고통을 당했습니까? 수십 년의 군정 하에 국민은 슬픔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처럼 슬픔 많은 세상에서 제가 만일 주님을 몰랐다면 아직까지 살고 있었을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이 슬픔의 세계에 위로의 메시지가 들립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과 같이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고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기 위하여 주께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어두움과 슬픔의 세계는 또한 절망의 깊은 밤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20세기의 상징은 ‘버섯구름’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핵무기가 폭발되면 공중에 그 불과 연기가 버섯 모양으로 퍼졌다가 땅위에 쏟아져 내려옵니다. 핵무기는 과학 문명의 자랑도 되지만 또한 현대문명의 절망의 상징도 됩니다. 
    이 버섯 같은 검은 구름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이 버섯구름을 줄여 보려고 온 세계가 들러붙어서 애쓰고 있지만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인류는 그렇게 평화를 갈망하고 있는데 그 평화가 없습니다. 지구촌 한구석에서는 계속 포성이 그치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전세계 인류가 그렇게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데 이 세계에는 아직도 도처에서 억압과 폭력, 독재와 구속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절망의 깊은 밤입니다. 
    이 절망의 밤하늘에 소망의 크리스마스별이 빛납니다. 이 절망의 세계에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와 사랑과 용서의 길만이 인류에게 소망을 밝게 비치어 줍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인류가 갈망하는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집니다. 

    이 어두움과 슬픔과 절망의 세계는 또한 사망의 깊은 밤입니다. 성경에서는 “네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했습니다.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이렇게 한 해를 보내게 되는 때가 되면 어린애들을 빼놓고는 누구나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망의 깊은 밤이 오고 있습니다. 이 사망의 깊은 밤에 주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영생의 주님이 오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바른 자세를 가지게 하시고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10장 31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의 제일 되는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그를 지으신 분의 뜻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영혼을 지으시고 육신을 지으시고 지적인 생활, 의지적인 생활,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양심을 주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존재 의미는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인간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이 다 그렇습니다. 온 우주 삼라만상이 무엇 하려고 있습니까? 조물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시편 19편 1절에 보아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 행동의 최고 목적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대개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자아를 실현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내재적인 능력을 온전히 실행시키는 데 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쾌락에 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을 구하는 데 인간 행동의 최고 목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두 가지 대답이 다 일리가 있습니다. 

    가령 여기 꽃나무가 있는데 꽃이 피려면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이 맞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온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거기에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제일 좋은 요소를 구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이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사는 경건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편 92편에 보면 이런 사람을 “종려나무처럼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비결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행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것은 잘못 구한 탓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지혜가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경험을 통해 볼 때 이것도 바람을 잡은 것 같다고 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자로다.” 

    이 결론은 20세기말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원자의 비밀을 압니다. 우리가 전자의 비밀을 압니다. 우주의 비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 어느 시대 사람보다 지식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20세기 말 지식의 팽창 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과거 어느 시대에 살던 사람보다 더 번뇌가 많습니다. 두려움이 가장 많습니다. 제일 불안 중에 삽니다. 우리의 지식으로 만든 무기와 기구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이 우리에게 반드시 행복을 준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세상의 향락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줍니까? 솔로몬은 굉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노비를 거느렸습니다. 아름다운 처첩을 많이 두었습니다. 많은 술도 준비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향락을 통해서 행복을 얻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이것도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도 행복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권세만 잡으면 행복한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종애사」를 보세요. 수양대군이 권세를 얻기 위해서 자기의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충신인 사육신도 죽이고, 마지막에 왕이 되기는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왕위에 앉고 보니 여러 가지 번뇌가 머리에 들어와서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번뇌를 좀 이길까 해서 지금의 파고다 공원 자리에 큰 절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절을 지어도 번뇌는 없어지지 아니했습니다. 
    겨우 13년 동안 살고 쉰두 살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권세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당대에도 군사 반란을 일으켜서 권력을 잡았었지만 그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그 자리가 행복했었습니까?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가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다 물거품 같아서 겉으로 볼 때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손으로 잡아 보면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행복은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행복은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면 행복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론 지식도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질도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실 권세도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있거나 없거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힘써야 되겠습니다. 나 자신이,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내 교회에서,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하게 되면 사람에게 평화가 임합니다. 인간의 조상이 범죄한 이래로 이 땅에는 평화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개인의 심령도 범죄하면 그 마음에 평화가 없어지고 불안과 공포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죄 범한 사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불안해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술을 마셔 보기도 하고, 마약을 쓰기도 하고, 육신의 쾌락에 빠져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평화를 얻으려면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피조물이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할 때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해서 죄를 범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므로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평화도 기쁨도 만족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사회의 비극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마음의 평화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선수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건널 수 없는 강에 십자가로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의 제물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담이 가로막혀 있어서 미움과 싸움의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과거의 그 모든 적대 관계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의 관계가 성립된 것입니다. 

    평화는 두 인격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편이 원한다고 해서 평화가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여기에 응하지 아니하고 각기 제 길로 갔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인간 세상은 혼란과 불안의 세계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의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4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일을 보아서 하나님은 더 이상 진노하지 아니하시고,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오늘 주신 말씀대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아니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환경과 조건이 주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심령의 평화이기 때문에 변하지도 않고 빼앗기지도 않는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참 평화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을 때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임마누엘’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때 임마누엘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를 향해서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를 향해서도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게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다윗과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다니엘과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도 함께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어린애는 주변이 아무리 캄캄해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평화가 있습니다. 

    이 뜻 깊은 성탄 계절에 하나님께는 영광이, 우리에게는 행복과 평화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40 admin 645 2013.11.17
139 admin 531 2013.09.09
138 admin 144 2021.12.13
admin 922 2013.11.08
136 admin 618 2013.09.0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