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는 누구인가?(눅15:11-32)
  • 조회 수: 305, 2013.08.28 18:52:03
  • 상명대학교 중문학교 교수로 있는 김경일씨가 쓴 책 가운데「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책을 쓸 때 매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썼다고 합니다.

    1995년도 한중일 세 나라의 학자들이 모여 동양의 문명을 진단하는 모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모임에서“유교문명이 근대세계에 보편적인 사상이 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한국의 학자는 90%가“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의 학자는 22%만“그렇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학자들은 63%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김 교수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에서, 또 세계 문명을 앞서 간다고 하는 일본이 유교문명이 근대세계의 보편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두손들어 환영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교 문명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념을 바꾸어 공자의 유교를 다시 연구했더니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은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한 것인가 했더니 유교는 정치를 위한 것, 남성을 위한 것, 어른을 위한 것, 주검을 위한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두되는 신분사회 - 즉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는 하나 그래도 신분의 상승을 꾀하고 명예를 가지는 것이 잘사는 것 처럼 생각하는 것이 유교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토론이 없는 가부장제 - 정치를 보면 그 정당의 대표자가 나이가 아무리 많고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말 한마디면 배운 사람이건 배우지 않은 사람이건 다른 이견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유교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끼리끼리 이익을 나누는 혈연적 폐쇄성 - 특히 조상의 제사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가문을 중요시 하고 그것 때문에 오늘날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 유교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스승의 권위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 비합리적 효도로 사람을 잡는 경우가 유교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책의 결론은 진취적이고 바람직한 것은 없고 늘 퇴보하고 있기 때문에 21세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자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부모의 능력과 힘, 권세들이 우리가 죽어야 자식들이 살아나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부모는 자녀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네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째는 공급자 - 가정의 책임자, 가족에 대한 부양의 책임자입니다. 둘째는 보호자 - 자녀와 가정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보호할 책임자입니다. 셋째는 인도자 - 자녀들로 하여금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할 책임자입니다. 넷째는 교육과 훈계자의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어머니의 역할은

    첫째는 인격 형성의 주도자 - 생명이 태어나서 최초로 접촉하는 대상이 어머니이므로 그 어머니의 품에서 사랑을 느끼고 안정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최초의 교사 이고 셋째는 감성적인 역할자이며 넷째는 자녀의 건강과 위생을 담당하는 자이며 다섯번째는 교량적 역할자이며 마지막으로는 종교 교육자라고 얘기합니다.

    이처럼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참으로 다양하고 크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1.부모는 자식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물들 중 어떤 조개는 어머니의 살을 다 파먹고 나서야 새 생명으로 태어 난다고 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어떤 부모입니까?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시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가리켜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기업은 일반 회사의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의 말로‘나할렛’이라는 말인데 이 뜻은‘한시적으로 위탁된 소유물 또는 소유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식은 하나님이 부모된 나에게 맡겨주신 재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상급이라는 말은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 주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은 창 33:5에서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자식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보내신 귀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손님은 나와 함께 영원히 살수 없습니다.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자가 손님입니다. 이런 귀한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갚으라고 요구할 수 없는 손님입니다. 부모의 꿈을 성취시켜줄 대리 만족의 대상도 아닌 것입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우리나라를 다녀갔습니다.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모든 방송들이 취재를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둔 자식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은 필립공인데 그는 아내의 그늘에 가린 희미한 존재입니다만 아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찰스 왕세자입니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또 잃어버리는 등 아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된 이유를 많은 학자들이 얘기하기를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자신이 군인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도 군인처럼 강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 식으로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 결과 아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영웅이었습니다.

    아들이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하면 아버지는 겁장이라고 다그치고 씩씩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생각만을 주입했고 그 기대대로 살라고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할 때에도 하인을 시켜서 전했을 정도로 언제나 권위적인 방법으로 교육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이 남성적으로 강인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아들은 천성적으로 남성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친구들에게“나는 내 갈 길을 가고 싶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곁을 떠나기 원했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도 돌볼 수 없는 여왕이었습니다.

    여왕인 어머니는 금욕주의자였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즐기는 일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안고 키스해 주기보다는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하루에 30분 정도 밖에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유모 밑에서 컸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사랑스러운 포옹과 키스를 갈망했었다고 자신의 전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인 여왕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어머니 앞에서 아

    들은 칭얼거리지도 못했습니다. 한번은 부모가 6개월 동안 공식 여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 악수한 것 외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때 어머니가 안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986년도 9월의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나는 요즘 새장에 갇혀있다. 자유를 갈망하면서 그 곳을 천천히 오갈 뿐이다”

    어린 시절의 애정의 결핍과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갈등 그리고 어머니의 냉정한 태도와 신분에 대한 부담감으로 비행청소년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신분이 높고 환경이 좋아도 어머니의 사랑, 부모의 사랑이 없었을 때 그는 잘 못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책 가운데「오체불만족」이란 책이 있습니다. 일본의 와세다 대학 정치학과 4학년인“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쓴 책입니다.

    이 사람은 현재 23세로 선천성 사지 절단증을 가지고 있는 장애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10㎝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에도 뺨을 의지해야만 쓸 수 있습니다. 종이를 자를 때에도 가위 한쪽을 입으로 물고 자를 수 밖에 없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10㎝밖에 안되는 팔로 농구를 하고, 야구를 하고 또 10㎝ 밖에 안되는 다리로 축구도 합니다. 또 겨드랑이로 턱걸이도 하는 등 그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언제나 밝게 다닙니다.

    그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행복과 장애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애인이 어떻게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밝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그를 특수하게 대해주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이라고 어떻게 살까를 걱정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보고“귀여운 아가”라고 하면서 늘 끌어안아 주고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산으로 소풍을 간다고 했는데 이 소년은 10㎝밖에 안되는 다리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아이들도 산을 올라가야 하니 못 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생님은 꼭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소년도 가고싶지 않았으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산으로 소풍을 가서 친구들의 힘을 빌어 산에도 올라갔습니다. 또 친구들과 함께 축구를 할 때 오토다케가 한 골을 넣으면 3점을 주었고, 마라톤을 할 때면 오토다케가 1㎞를 가면 5㎞를 뛴 것과 같이 하여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친구들은 그를 위해「오토다케 룰」을 만들어서 그를 언제나 끼어 주었습니다. 또 혹 놀리는 친구들과 싸울 때도 오토다케는 지지 않고 친구를 꽉 물어 버리기도 하면서 다른 아이들과 똑 같은 생활을 하게 하도록 그의 어머니도,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토다케는 오체-머리, 두 팔, 두 다리-가 불만족 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어떻게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자녀들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시 127:3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는 말씀에 '기업’이라는 말 대신 '숙제’라는 말을 했습니다. 숙제라는 말은 부담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선생님에게 혼나듯이 자녀는 어떤 의미에서 부모에게는 숙제이고 부모에게는 인생에 가장 커다란 부담입니다. 그러나 태의 열매는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상급은 축복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수고와 헌신이 있지만 자녀들이 주는 기쁨과 누리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더 큽니다.

    그래서 잠 17: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부모를 세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완벽한 부모입니다.

    자녀의 시중을 다 들어주는 부모입니다. 자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다 해주는 부모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충고하고 간섭합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연약하고 부족하니 도와주어야 한다고 해서 과잉보호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인생은 내 인생이라고 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자녀들로 인해 깎여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완벽하기를 원합니다.

    반면 부모가 열등감에 빠져 있거나 부부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는 자녀에게 몰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완벽한 부모아래서 인생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거목’이 될 수 있는가 입니다. 소위‘마마보이’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따라가서 일을 봐 주었는데 지금은 직장에 면접시험을 보러 가는 그 때에도 엄마들이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허술한 부모입니다.

    아무런 간섭도 통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하는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학교를 다니는지, 선생님이 누구인지, 친구가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마치 자녀를 포기한 사람들 처럼 돈만 벌어다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칭찬도 하지 않고 책망도 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렇게 허술하게 큰 자녀가 허술하게 자녀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또 반면에 윤리나 도덕적으로, 생활능력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죄책감에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란 자녀들은 외로움과 소외된 삶을 경험하여 항상 불안하고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안절부절하면서 자신감을 잃고 일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폐증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공격적이 될수 있습니다. 물건을 쉽게 부순다든지, 감정을 절제 못한다든지, 부모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쉽게 유혹에 빠져 들고 폭력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세번째는 유능한 부모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유능한 부모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부모입니다. 나는 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입니다.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취급하는 부모입니다. 오늘 성경의 아버지와 같은 부모입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이 참 많습니다.

    특별히 용서해 줄 줄 알았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실패했습니다.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먼 나라에서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찾아왔습니다.

    죄에 빠졌던 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가정, 얼마나 좋은 가정입니까? 실패하여 돌아온 아들, 아버지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대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용서했습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한국교회,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중 한국교회는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교회가 나뉘어지고 교단이 나뉘어지는 등 서로 헤어지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일제 36년을 지나 해방된 이후에 한국교회가 둘로 나뉘어 지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사람들은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나오니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섭섭한 마음이 들어 교회를 나누어 시작한 것이 장로교의 분열이었습니다.

    물론 신사참배는 나쁩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그 이상의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나뉘어져 나간 사람들도 책망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용서 받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한 없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야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용서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내 자녀와 남의 자녀를 비교하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다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인정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박찬호에게 공부만을 강조했더라면 박찬호는 야구선수가 못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대학도 못 가고 엉뚱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자녀들을 노엽게 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욕할 때 자녀들은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이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내 부모가, 나를 낳아준 부모가 욕을 하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라가,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키우시다가 지옥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는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하면 안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을 천하게 부를 때가 있습니다. 못난이, 머저리, 돼지 등으로 부르는 이유는 귀신의 시샘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막상 자신들은 고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이들을 개똥이, 머저리 취급을 하는 것처럼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큰 나라를 가지지 못하고 늘 쫓겨 다니지만 그들은 이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이 없습니다. 이름만 있습니다. 아브라함 - 열국의 아비, 사라 - 열국의 어미, 바울 - 겸손한자. 사울 - 큰 자라고 하는 등 이름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얼마나 복된 이름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개똥이, 돼지라고 부를 때마다 아이들은 개똥, 돼지 밖에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세계 앞에 쓰임 받는 열국의 아비와 어미같은, 큰 자와 같은 꿈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그 아이의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녀를 복 주시는 것입니다.내가 내 자식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혹시 아침에 아이들을 깨울 때 그저 "일어나!”라고 소리치지 않으십니까? 이젠 이렇게 해보십시오.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 주는 의미로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머리에 손을 엊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떻게 귀하게 쓰시려고 귀하게 키워주십니까?

    오늘도 이 아이와 함께 해 주시고 복되게 해 주시고 가문을 빛내고, 교회를 빛내고 민족의 자랑이 되는 자녀가 되게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조금 후에 깨우십시오. 그러면 아이들은 잠귀로 다 듣고 짜증내며 일어날 수 도 있지만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뿌듯한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가슴에 품는 푸른 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부터 엄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에는 상처를 받고 학교에 가게되고 그 아이는 전투적이며 폐쇄적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생명들에게 많은 복을 빌어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부모는 자식을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과거는 실패했지만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돌아온 탕자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옛날 이태리의 한 예배당에 한 부인이 와서 울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은“부인 무슨 일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부인은 울면서“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 죄악에 빠졌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부인에게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이 어머니는 그 유명한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였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채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부모입니까?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우리 속에 새로운 소원과 목표를 가지고 살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아버지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될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조용히 불러보십시오.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이름을 부르며 그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

    오늘 그 아버지를 가슴속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닮아 우리도 이 세상에서 좋은 부모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부모는 찬송가 405장을 참 좋아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나같은 죄인을 살리셔서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면 좋은 부모가, 유능한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녀들의 부족함을 책망하지 말고 사랑을 위로로 인도해 주는 좋은 부모가 되어 여러분의 가문 속에, 우리의 교회 속에 21세기에 귀하게 쓰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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