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자녀를 바칩니다 (삼상 1:21-28)
  • 조회 수: 107, 2013.02.01 16:27:42
  • I. 자녀: 과제인가 상급인가?

    젊은이들이 하는 우스개소리 가운데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69번 버스가 질주하다가 사고를 당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때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누구 냐? 첫째 96번 버스를 타려다가 69번을 96번으로 잘못보고 탄 사람, 둘째 내일 장가 가 려고 목욕탕 가다가 죽은 총각, 그리고 버스가 출발하는데 뒤에서 달려와 버스 꽁무니를 두둘겨 세워서 간신히 탄 사람, 졸다가 내릴 정류장을 깜빡 잊어버리고 한 정류장 더 가 다가 죽은 사람.

    물론 웃으라고 하는 얘기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말도 안되는 일들이 우리 곁에 서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에 인생 살아가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어느 아파트에 행복한 가정에서 티 없이 맑게 살아가던 중학교 1학년 송 아무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사업 에 실패하고 매일같이 술에 취하여 살고 술만 먹으면 가족들에게 행패와 욕설 을 퍼붓던 아버지 밑에서 불행한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중학교 3학년 최 아무 개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버지로부터 꾸중과 욕설을 들은 최 아무개 - 왜, 이 세상에서 나 만 불행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버리고 싶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도 아버지로부터 행패와 욕설을 들은 이 아이는 집에 있는 과도를 품에 지니고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때마침 아파트 정문에 서 친구와 함께 해맑게 웃으며 헤어지는 송 아무개 여학생을 보는 순간 '저 여 학생을 죽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따라 탔 습니다. 날카로운 과도로 여학생의 목을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심리학자 들은 그를 증오범죄(Hate Crime)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아이들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관리해야 합니까? 행복하게 티없이 맑게 키운 것이 죄입니까? 아니면, 증오의 대상이 될까봐 아무렇게나 키워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소중한 내 자녀들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축복해야 하며 저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 에 물어보는 시간입니다. 시편127편 3절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 그랬습니다.

    ① 여기 기업이라 그러니까 사업체를 연상하기 쉽습니다만 쉬운말로 번역해 보면 "과 제"라는 말입니다. 자식을 교육하고 양육한다는 말은 밀린 숙제더미처럼 때로 무겁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 반면 자식은 상급입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얻는 부모의 기쁨과 특권과 축복이 있 더란 말이지요.

    분명 자식은 한편 무거운 과제요 또 한편 훌륭한 축복이요 상급입니다. 여러분의 자 녀들은 숙제더미처럼 과제가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축복이요 상급이 되고 있습니까?

    자녀를 교육한다는 것은 화초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화초에 물을 너무 안주면 말라 죽고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어서 죽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도 관심도 너무 적어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안됩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주 는 것어 옳은 교육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인생살아가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II. 여인 한나

    오늘 성경 본문에 몹시도 아이를 갖고 싶었던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며 통곡하 며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던 한 여인이 나옵니다. 내게 아이를 주시면 이 아이를 훌륭하 게 키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영광을 가지고 싶습니다.

    아이가 없던 한나는 몸종 브닌나를 남편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했습니다. 몸종은 아 이를 낳자마자 기고만장해 졌습니다. 주인 한나를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한나는 하나 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하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나는 어쩌다 남들 다 낳는 아이 하나 를 낳지 못하여 이런 천덕 꾸러기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내게도 아이를 주면 훌륭하게 키워서 드릴 것 없는 여인이 아이 하나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주시면 아니된 단 말입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있는 아내에게 8절에 보면 남편이 찾아와 위로합니다. "여보 울 긴 왜 울어요. 왜 먹지도 않고 그렇게 슬퍼하고 있는 거요. 내게 당신이 열아들 보다 귀하지 않소." 참 신사적이고 착한 남편이지요. 아마 좀 못된 남편 같으면 아내의 이런 고통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불러오는 첩의 배를 바라보며 희희덕거리고 있었을 겝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남자를 가지고 여자아이를 가지고 남매를 두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집안에는 여자아이가 셋씩 넷씩 되고, 또 어떤 집안에는 남자아이만 몇 씩 됩니다. 또 아이를 갖지 못하는 집안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있습니다. 모두 그대로 우리가 아멘으로 받아야 그게 신 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게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집안의 남자들이 착해요. 그 리고 여자아이 셋씩 넷씩 낳고도 행복하게 기쁘게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게 여자 아이를 많이 낳더라구요.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 남자만 셋 데리고 사는 남편이 못된 남 편이다! 그렇게까지 비약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능히 어려움을 감당하고 남음 이 있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아픔을 하나님께서 때로는 허락하시더라는 얘기이지요. 이렇게 몸부림하여 얻은 아들이 사무엘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를 살펴보면 자신에 대한 자학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를 구박하는 브닌 나에 대한 원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습니 다. 왜 내가 자식을 가지고 싶은가?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는 뚜렷한 분명한 목적이 있 었습니다.

    한나는 기도할 때 서원했던 대로 아들을 나실인으로 바치고 맙니다. 나실인이라고 하 는 말은 하나님께 완전히 바쳤다는 얘기입니다.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음 식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겁니다. 술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머리에 삭도 를 대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부 모가 죽어도 가서 울어줄 수도 없는 사람,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여 바쳐진 사람이 나실 인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서원한대로 깨끗이 바치고 맙니다.

    사무엘이 네 살이 되었을 때에 제사를 지내러 올라가 엘리 제사장에게 아들을 맡기고 돌아옵니다. 이제부터는 멀리서만 바라봐야만 합니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내 아이지만 품에 안을 수도 없습니다. 일년에 한차례씩 옷을 만들어 올라갑니다만 내 손으로 아이 의 옷을 벗기고 입힐 수도 없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옷을 맡기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 니다. 그 슬픔을 알았던 이 여인에게 엘리 제사장이 축복합니다. "당신이 서원대로 하 나님 앞에 바쳤으니 하나님이 당신에게 풍성한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요." 한나는 한 아들만이라도 족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영광을 내게 주십시오.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넉넉하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III. 바칩니다

    그래서 오늘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은 어머니 한나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아들을 하나 님께 드리는 헌아식의 한 장면입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 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1:27-28)

    소중한 자녀를 가문을 일으키는데 바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사업가로 만들 어서 많은 사람들을 그로하여금 먹고 살게 만드는 사회를 일으키는데 바치는 훌륭한 부 모들이 있습니다. 나라와 국가와 민족과 역사를 위하여 바치는 위대한 부모들이 있습니 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고 하면 우리의 소중한 자녀를 만군의 여호와, 창 조주 앞에 드릴 수 있는 기쁨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IV.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이 아들을 쓰시옵소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그토록 소중한 내 자식들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것입니까?

    첫째는, 이 아들이 내 아들이 아닌 것임을 알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이기 때 문에 하나님 앞에 무한히 감사는 마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 놓 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한나의 가족은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매년제는 너 무나도 가정에 감사한 일이 넘치고 있을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서원제는 하나님 앞 에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약속을 이행하는 제사가 서원제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구할 때 소중한 아들을 주셨어요. 이것은 우리가 얻을만 해서 얻는 아 들이 아니예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었어요. 하나님 감사해요. 이 아들을 주시면 하 나님 앞에 바친다고 우리가 약속했잖아요. 우리가 반드시 바치고 말거예요. 이것이 바 로 매년제와 서원제였습니다.

    이 아들이 내가 얻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아 들을 얻기 위해서 소원을 했습니까? 이 아들을 얻고 싶어서 얼마나 긴 시간동안 통곡하 며 울며 기도했습니까? 눈물섞인 기도와 끈질긴 기도와 씨름 끝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던 놀랍고 영광스러운 아들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무엘의 뜻은 삼 - 들으셨다, 엘 - 하나님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 기도로 얹은 아들이니 만큼 기도를 쉬지 않도록 이 아들을 기도의 축 복을 더해 주시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세요. 이 간절한 소원을 담아서 소 중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사무엘이란 이름이 보여 주 듯이 한나의 가족은 얼마나 절실하게 이 아들을 하 나님의 선물을 보았던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이 아들을 내어놓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은혜라는 말과 감사라는 말이 한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 은 자가 감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소중한 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임 을 알게될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 수 있더란 얘기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소중한 자녀들은 진정 은혜의 선물이었습니까?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참으로 감사하고 있습니까? 소중한 내 아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의 꺼리들, 원망 의 도구들이 되고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보기 전까지는 내가 꽤 괜찮은 아버지인줄 알았습니다. 밥 먹여 주지요, 옷 입혀 주지요, 잠 재워 주지요, 남들처럼 용돈줘서 학교에 보내지요. 보라, 나는 얼마나 훌륭한 아버 지인가? 그러나 어느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내가 아이들에게 해 주 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 은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기 위해 나에게 주신 하늘의 천사였습니다. 축복의 도구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들 때문에 얻었던 인생의 행복이 얼마였습니까? 그 아이가 나로 하 여금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까? 그 아이 때문에 멈추었 던 기도의 제목이 펼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아이 때문에 아 무렇게나 말하고 싶을 때 내 입술에 경건의 문을 달게되었고 아무렇게나 행동 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위하여 나는 경건의 옷깃을 여미고 인생을 새롭게 출발 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순간에서 아이들을 기 억하고 새로 주먹을 쥐고 분연히 일어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 들이 축복의 도구였고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아이처럼 위대한 상급이 어디에 있더란 말입니까?

    훌륭한 맥아더 장군은 얼마나 많은 훈장을 받았습니까? 미국 버지니아 해 안에 가다 보면 맥아더 기념관이 있다고 합니다. 평생 그가 평생받았던 많은 훈장들이 진열되어있는데 그의 자서전에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수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내 생애 가장 영광스런 훈장은 하나님께서 내게 자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영광스러운 훈장은 자녀다."

    당신의 자녀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선물로 보고 그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 까? 그래서 이 선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하나님 뜻대로 길러야지, 하나님께 바 치고 살아야지 하는 경건한 마음이 있습니까?

    V. 청지기 의식이 있기에

    두 번째로, 어떻게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습니까? 청지기 의식이 있을 때 만이 하나님 앞에 바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청지기 - 내 것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이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 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분, 분명한 뜻을 가지고 이 아이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분, 이 아이의 미래를 영원히 알고 계시는 분, 그분이 계시 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맡아서 기를 뿐입니다. 내 소유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키워서 되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비젼을 깨닫고 그 비젼을 잘 이루어 가도록 도와주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소유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기를 수가 없습니다. 아이의 개성을 무시합니다. 아 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가치를 무시합니다. 부모의 뜻과 부모의 생각과 부모의 욕 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얘야 내가 이루지 못한 큰 뜻을 네가 이루 어야 한다. 우리 집안에 가문의 위대한 뜻을 네가 이루어야 한다." 한걸음 더 발전하면 "아버지가 억울해서 살 수 없다 원수를 네가 꼭 갚아다오." 아이를 향한 욕심이 여기까 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소유의식을 가진 사람은 아이를 절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 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 에 드리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 자녀에게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 헌신이, 이 기도가, 이 지혜로운 마음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엘가나는 한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여러분의 자녀를 가장 잘 양육하는 길이라는 사 실을 아십니까? 나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최선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 가를 여러분 아십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서 먹이고 최선을 다해서 입히고 최선을 다해서 교육을 했 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최선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잘 것 없다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하지 않고서는 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어버이가 열살된 아들을 두고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 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애 가운데 이 아이를 축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있어야지 기도하는 가운데에 여러편의 비디오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이럴 때에 아이에게 이 비디오을 주십시오. 아이가 몇살이 되었을 때 에 이 비디오를 아이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이 아이가 장가를 갈 때에 이 비 디오를 그에게 주십시오. 정확하게 일년에 몇차례식 아이에게 비디오가 배달 되도록 준비해 두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에 세상의 무 슨 유혹으로 빨려들려고 할 때에 유혹과 욕정이 그를 잘못인도하려고 할 때마 다 비뚤어진 마음이 그에게 일어날 때마다 비디오가 배달되도록 준비해 두었 다고 합니다.

    아이가 장가를 갈 전날이면 이 비디오를 아이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그 속 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얘야 내가 너를 지켜주 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를 지켜 줄 거야. 나는 네 곁에서 너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사랑 많으신 아버지보다 더욱 더 능력 많고 풍성하신 그분의 손길이 너와 함께 동행해 주실 거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너를 깨끗이 맡긴 다.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우리가 알길이 없지만 분명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을 인도하는 한, 사랑 많으신 그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길이 이 아이를 붙들 고 있는 한,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는 그분이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인도하시는 한, 인생을 풍성하게 아름답게 바르게 진지하게 살아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 습니까?

    어떻게 내 자녀를 주님 앞에 드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청지기적 시각을 가질 때에 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 주의 은혜와 말씀 앞에 이 아이를 맡기나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 아이를 만들어 주시고 형성시켜 주시옵소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계획할 무렵, 저의 찬란했던 꿈이 부셔지 는 커다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여러가지 계획과 갈등으로 번민하고 있었습 니다. 주의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법과대학은 제가 싫었고, 제가 원했던 사관 학교는 하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주 어릴 때 하나님앞에 서원했던 한 사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던 일을 기억하 게 되었고 신학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가기 위해 입던 옷가지를 챙겨 낯선 서울로 떠나기 위해 어머님께 인사를 드렸지요. 바로 그때 어머님이 제게 하셨던 말씀은 저 의 평생을 인도하는 놀라운 말씀이 되었습니다. "얘야, 이제부터 나는 너를 내 아들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교회에 바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 고 살란다. 너는 우리 가정에 메여 살아야 하는 모든 무거운 짐을 벗고 훌륭 한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아다오." 저의 어머님은 많이 배우신 분이 아니기 때 문에 제게 하신 말씀은 퍽 단순하고 간결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숨은 어머 님의 마음은 어떤 위인전보다 위대했고, 어떤 신학서적보다 경건하게 느껴졌습 니다. "하나님 앞에 이 아들을 바칩니다." 어머님의 이 한마디 고백은 저에 게 무한한 자유를 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내게 북돋워 주 었는지 모릅니다. 한편 무거운 책임과 사명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오늘 나를 만들어 주었고 오늘의 류목사가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고백이요 간증입니다.

    VI. 쓰임받기 위하여

    셋째로, "이 아들을 바칩니다. 이 아들을 받으소서"하는 한나의 기도는 "사랑하는 자 녀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원합니다"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이 아들이 쓰임받기를 원하 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훌륭한 아들을 훌륭한 일에 바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귀한 아들을 귀한 일에 바칠 수 있음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장한 아들을 장한 일에 바칠 수 있음이 얼마나 장한 일이었습니까? 영광스러운 내 자식을 영광스러운 일에 바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요즘 한국교회에서 목사들이 많은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가 된 것 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서 자다가도 잠속에서 벌떡 벌떡 일어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 다. 그러나 가끔 사회에 비난의 대상이 되는 목사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목사가 된 것 이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나 우리사회속에서 목사 의 위신이 많이 땅에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 책임이 여러분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 십니까?

    제가 신학교에 입학 할 무렵에는 목사는 예비고사 떨어진 사람이나 신학교 가는 줄 알 았습니다. 저만하더라도 줄만 서면 신학교에는 입학을 했습니다. 아마 공부잘하는 사람 들만 다 갔으면 신학교에도 못갔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이 좋은 장로님이나 목사님까 지도 똑똑한 아들이 목사 되겠다고 하면 "하필이면 네가 왜 목사가 되어야 하니. 얼마 든지 목사 될 어중이 떠중이 많은데."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위해서 바쳐지는 것을 얼마나 기뻐해 보 셨습니까? 그래서 누가 신학교에 갔습니까? 가문을 일으킬 훌륭한 아들을 신학교에 보 냈습니까? 훌륭한 사업가가 될만한 놀라운 자질을 가지고 있는 아들을 신학교에 보낸 적 있으십니까? 법과대학에 가서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될 수 있는 훌륭한 자녀를 신학 대학에 보내보셨습니까? 대게보면 좀 모자란 듯하여 죽으려다가 하나님 살려주면 신학 교 갈께요. 그래서 겨우 살아남은 목숨만 붙어있는 것, 어디 보낼 때 없으니까 신학교 보내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 중에 한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욕을 하시겠 습니까? 누가 이땅의 목회자를 향하여 돌을 던지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하신 일입니 다. 한국교회가 뿌린 씨앗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장 귀한 자녀를, 장래가 총망되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세 계를 바꾸는 인간 변화의 위대한 사역을 위하여 내어놓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누구를 비난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한국교회 지금처럼 못난 목사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인정하십니까? 여러분 중에 보다 위대하고 고상한 뜻을 위해서 자녀들을 하나님과 역사 앞에 내놓은 부모들이 얼마나 되십니까? 가장 잘난 자식을 내 가문을 빛내고 돈을 벌어 부모를 호강시키는 그런 일 말고 역사를 위해서 희생하고 자기 를 죽이는 그런 사역을 위해 자식을 바칠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역사가 바뀌어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업가로 내어놓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말고 참으로 멋진 재물을 통하여 멋진 역사를 감당하기 위하여 여러분 자녀를 훌륭한 일들에 위대한 정치 가로 내어놓는 것 아름다운 일입니다. 왜 그 정치가가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까? 참 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이 사회에 고귀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여러분의 욕심 잘못 된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 한국교회가 성숙해 질 것이고 그래야 사회가 바뀌어야 될 것이고 이 역사가 바뀌어지 게 될 줄로 믿습니다.

    VII. 바치라

    구약 시대의 나실인 제도는 신약시대에 와서 폐지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나실인 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어떤 특정한 사람만 주님 앞에 바쳐질 것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 바쳐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 신약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신약시대는 목사만 성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직업이 성직입니다. 주부들이 빨래하고 밥하는 자체가 고상한 성직입니다. 그 거룩한 성직을 나실인으로 받아들이는 거룩하고 경건된 의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버십니까? 하나님 그 돈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었습니까? 이 건강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질병의 자리에서 살아나셨습니까? 빗발치는 6.25의 총탄 속에서 수많 은 내 친구들이 먼저 죽어갔는데 하나님 오늘까지 여러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 까? 거기에 숨어있는 사실인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 분 가정에 주셨던 온갖 것들을 청지기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얻었던 자녀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거룩한 결단을 해 보셨습니까?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28절) 아이를 그곳에 두고 돌아서는 부모의 발걸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지방이나 또 훈련소에 들어가는 자식을 또 외국에 아이를 떨어뜨려 놓고 돌아서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이 아이가 부모 를 그리워하지나 않을는지, 때가 되어 밥이나 먹을는지, 몸은 건강하게 잘 견뎌내 줄는 지, 이 세상에 어두운 구석으로 인생의 수렁텅이에 빠져들지나 않을는지.

    외국에 독자아들을 떼어놓고 돌아온 부모의 얘기입니다. 아침마다 아이에게 전화를 하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맑으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답니다. 그러나 아이의 목소리가 어 두우면 그날에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 날이 기쁜 날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 다. 이게 부모의 심정입니다.

    더더구나 한나가 사무엘을 맡기고 지금 돌아오는데 엘리 제사장 그 학교의 교장이요 담임선생님 엘리제사장은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잘못된 선생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게 될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아들들이었 습니다. 얼마든지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 아이를 엘리 집에 맡기고 돌아서는 한나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이 땅에 아이를 내어놓고 살아가야 될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어머니 된 마음이 어떻습니까? 유혹많은 이 세상을 한 가운데 집어넣고 살아가야 되는 청소년을 둔 어버 이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무서운 유혹에 빠져들지는 않을는지, 잘못된 영향을 받지는 않을는지, 마약에 오염되지나 않을는지 친구는 제대로 사귀어 줄는지, 공부는 제대로 해 줄는지, 주는 용돈은 정확한 자리에 써줄는지, 이제 부모의 마음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맡기지 않고서는 사랑많은 아버지의 손에 이 아이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고서는 이 아이의 미래를 알고 계시는 그분께서 이 아이를 소중히 여겨주지 아니 하고서는 내가 어떤 노력도 어떤 축복도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를 축복하며 키울 수 밖에 없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이가 수술대에 올라설 때에 어머니된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었습니까? 아이가 입시장에 들어갈 때 아버지된 여러분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도대체 무 엇이었습니까? 아이가 훈련소 문으로 들어설 때에 엄마 가라고 손을 젓는 아이에게 그 아이를 위하여 여러분들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그토록 소중하지만 이 아 이들을 언젠가는 이 땅에 남겨두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그때 여러분이 아이 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 아이를 맡기는 것, 말씀 앞에 이 아이를 맡기는 것, 하나님의 품에 돌 려 드리는 것, 이 길외에 도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더란 말입니까?

    VIII. 맺는 이야기

    얼마전 미국교회가 낳은 20세기 마지막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캐시 버널의 이야기가 책 으로 발간되어 전 세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책이 되었습니 다. She said yes. 우리말로 "마지막 예스"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1999년 4월 20일 작년이맘 때입니다.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사탄 추종자들에 의해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캐시 버널을 포함하여 13명이 그 총기에 맞아 죽었 고 범인 2명은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캐시 버널의 어머니는 소중한 아이를 얻 을 수 없던 처지에서 아이를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귀하고 아름답게 아이를 키 우고 싶었습니다. 큰 욕심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려고 하다보면 더 크게 비뚤어져 가는 캐시 버널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이었습니다. 큰 인물로 키우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다 보면 더 큰 어두움으 로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는 자식을 보아야 되는 아버지의 마음은 참으로 세상이 무너 지는 아픔이었습니다. 캐시가 사춘기가 되자 무서운 사탄 추종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 다. 몸에는 무거운 쇠사슬을 목에 걸고 매일저녁 섬짓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감상 하며 다녔습니다. 사탄을 좋아하는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날카로운 핀과 칼로 자해 해서 온 몸에 상처투성이였습니다.

    부모는 나쁜 친구들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기독교 학교로 전학을 시켰습니다. 그런 데 날이면 날마다 창문에 깡통이 날아 들어오고 친구들과 어울려주지 않는다고 계란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부모는 하나님께 맡기는 길 밖에 없다. 이제는 내 뜻대로 아이를 키우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포기합니다. 이 얘를 향한 나의 모든 계획과 내 욕망을 하나님 앞에 깨끗이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 아이를 키워 주시옵소서. 부모는 어릴 때 다녔던 교회에 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학생회에 맡겼습니다. 그해 여름수련회에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성령을 체험했습니 다. 울며 회개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착 실하게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런 후에 캐시는 기독교 학교에서 일반학교로 옮기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전해야될 많은 친구들이 예수를 필요로 하는 많은 나와 같은 친 구들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나는 증인된 삶을 살아갈 거예요. 나는 그 학교의 선교사 가 되길 원해요. 일반학교로 나로 전학시켜주세요. 그렇게 해서 입학한 학교가 콜럼바 인 고등학교였습니다.

    4월 20일 도서관에서 캐시 버널은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탄 숭배자들이 총 을 들고 뛰쳐들어왔습니다. 이미 학교 이곳 저곳에는 폭탄이 장치가 되어있어서 학교전 체를 날려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이미 여러명의 친구들이 총에 맞아 피를 흘 리고 있었습니다. 캐시 버널은 조용히 도서실 책상에 앉아 손을 모두고 기도를 하고 있 었습니다. 기도를 하는 캐시 버널을 보자마자 사탄추종자들은 눈에 불을 뿜으며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캐시 버널의 얼굴을 들게 하더니 "너는 하나님 을 믿느냐." 그때 캐시 버널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예스." 너 하나님을 믿느냐? 예 스. 그래서 이 아이의 마지막 말이 "She said yes." 사탄 추종자들은 Why? 이 한마 디 말을 남기고 머리에 사정없이 총을 난사했습니다. 미국 교회는 바로 이 장면을 미국 교회 20세기 마지막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장면이었다. 그가 말했던 예스라고 한 말은 위대한 신앙고백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날 아침 캐시가 친구에게 보낸 쪽지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어. 이건 진심이야. 물론 힘들고 두렵겠 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사탄 숭배자가 바뀌어져서 순교자의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는 영광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이 아이의 글을 담아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가진 모든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양육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 오로지 하나님을 위 해서 살고 싶어요. 이건 우리의 진심입니다. 물론 힘든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주께 서 선한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 러분의 자녀들이 잠시 잠깐동안 비틀거린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오늘 내 아이를 바칩니다. 전능하신 손에 하나님 앞에 이 아이를 맡겨 드립 니다. 이 아이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품안에 이 아이를 바칩니다. 주여 받아 주시옵소서. 내 아이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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