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우 인간다운 하나님 아들을 보며 (마가복음 14:32-42)
  • 2013.02.07 22:13:57
  • 고난 주간은 다음 주일 4월 5일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한주간이 고난 주간이 되겠습니다마는 오늘은, 이 주간은 사순절 역시 고난이 시작된 사순절 가운데 중간에 들어있는 주일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여러분께서 생활하시면서 또 기도하시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대한 깊은 생각을 마음에 기리시고, 담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실 큰 위로에 대하여 또 주신 위로에 대해서 생각하는 그런 주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요즘 나라가 좀 어렵고 또 앞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그저 모이면 경제 걱정,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걱정 때문에 교회에도 그저 부르짖음이, 소원이 '빨리 이 어려움을 면케 해 달라' 그런 내용으로 차 있습니다만 좀 그렇다하더라도 이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고난받으신 주님,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에 비하면 행복하다' 그런 생각을 하시고 우리 지금 어렵다 어렵다 하기는 하는데, 옛날에 어렵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잘 살았기 때문에 잠시 잘 살던 때보다 분위기 상 좀 어두워진 것이지 수십년 전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그러면서도 그저 좀 어떻게 될까봐, 영혼을 위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위해서 너무나 염려하는 소리, 기도로, 찬송으로, 설교로 우리가 이렇게 많이 다룹니다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로 말미암아 행복하고, 여전히 주께서 고난받으시고 우리를 이 위기에서 또 건져주시리라고, 잘 살던 이 행복을 다시금 계속해서 잘살게 해 주시려 주께서 고난 받으신다 생각하시고, 우리보다 더 고난받으신 주님 인하여 조금은 이제 '우리 문제는 부활절이나 지나고 좀 주께 알려드렸으면…'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이제 우리 고난주간에 들어가면서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하는 가스펠송(Gospel Song)을 함께 부르면서 이제 고난 주간과 부활절을 맞는 그 중에 우리들의 마음을 갖다 놓을까 생각합니다. 모니터를 통해서 가사를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밖았네" 한번 같이 불러봅시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밖았네…"(찬송)

    고난 주간 시리즈 멧세지로 오늘은 「매우 인간다운 하나님 아들을 보며」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 또 다음 주일에는「매우 하나님다운 사람 아들을 보며」이런 주제로 고난 주간 멧세지를 드릴까 합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41절에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예수님의 이날,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신께선 언젠가 이렇게 죽게 되실 줄은 이미 아셨지만은 그러나 그 죽으실 때가 바로 이 본문이 말하던 그 때였는지는 여태 모르시고 계시다가, 오늘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번 그날 크게 기도하신 후에 땀이 핏방울 되도록까지 기도를 하셨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아니하셨으므로 '나의 죽을 날이 바로 오늘이구나' 그때 그 유월절 밤에 비로소 알게 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41절에 "이제는 자고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 때가 왔다." 하면서 매우 낙담하는 아주 실망하시는,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답지 못하고, 우리중 연약한 자 하나처럼 하는 이런 표현을 성경에서 읽어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로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처음부터 지혜가 자라난 때부터 당신께서는 세상 죄인의 죄를 짊어지실, 대신하여 죽을 그런 제물인 것은 잘 아시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시면서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14장 조금 앞 21절에도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대로 가신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에 대하여 기록된 것은 세상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제물로 죽으시는 제물 된 어린양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은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다른말로 하면 '죽거니와…' 그런 말씀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실 것은 아셨지만, 그 기록을 잘 알았고, 그대로 될줄도 믿었지만, 그러나 앞장에 있는 마가복음 13장 32절에 표현한 것처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언젠가는 희생 제물이 될 것인 줄은 아셨지만 그러나 그 죽으시는 날이, 그 제물 되시는 고난의 날이 이해인지? 다음해인지? 언제인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스케줄,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심, 승천하심과 그리고 다시 오심, 이러한 큰 계획들은 하나님만이 계획하시고, 하나님만이 행하시고 아시는 것일 뿐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도 모른다 라고 말씀들을 평소에 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그대로 과연 그가 언제 죽게 될지를 모르다가 바로 이 본문에 나타난 그 마지막이 된 유월절 지내고 곧 겟세마네 동산에서 크게 기도하셨지만 아무 응답이 없는 줄 알고 낙담을 합니다. 아주 크게 실망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기도할 것도 없다. 자라. 쉬라. 이제는 그만이다. 때가 왔다." 그런데 그때 주께서 왜? 그 마지막 하나님 앞에 땀이 피되도록 하면서까지 드렸던 기도, 그 기도가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가 있사오니 가능하시오니 할 수만 있으면 나를 죽지 않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 때를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주께서 그런 기도를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앞에 올릴 때에 그것도 대강스럽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예수 일생 제일 큰 기도로 그렇게 기도하셨으니 참, 살펴보면 조금 아쉽기도 하지요.

    죽으시면 곧 부활할 것이요, 부활하시면 승천하실 것이요, 승천하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이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휘어잡게 되는 그런 영광을 얻을 것이 뻔한데, 죽게된 날이 참 좋은 날일텐데, 영광을 향하여 출발하는 날이 될텐데, 그저 그 죽음의 날 그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이 어려운 잔을 내가 마시지 않을수는 없겠습니까?" 하면서 기도하다가 잘 안되니까 "이제는 그만이다." 이렇게 낙담하실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 하나님의 아들 나의 행복의 길, 영광의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렇게 해서야 오히려 하나님 아들답지 않느냐? 우리는 이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을 계속해가면서 우리 성도님들게 양해를 구하고 싶은 것은 오늘은 예수님의 매우 인간다운 면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의 종으로서 여러분도 예수님을 주라 부르시는 백성으로서 예수님, 하나님다운 면을 소개하고 소개받을 때에는 신이 나지만 매우 약한 부분, 덮어두었으면 좋을만한 부분을 전하거나 듣게되면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평소에 톤을 높여서 설교 했습니다만 오늘 지극히 인간다운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하면서는 어쩌면 이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저희들끼리만 조용히 귓속말로 말하듯 말하고, 바깥에 나가서 오늘 소식을 불신자들에게 전하면 전도가 되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오늘같은 얘기는 우리 집안 얘기니까 한 번 살펴보기는 하지만 바깥으로 갖고 나갈 말은 못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면서,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가 알 때에 하나님이신 부분만 알아서는 되지 않습니다.

    신학에서 예수를 한마디로 신인양성을 가지신 분이시라 그럽니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참 인간이셨는지를 앎으로써 우리에게 오히려 복음이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 그분은 꼭 우리들처럼 이 땅에 살아 계신 동안에 어쩌면 하루라도 더 살아보시려고, 한 번은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계신데, 많은 무리가 모여서 큰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성전으로 모여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을 중심한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이런 중한 직분과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성전으로 나왔던 모양인데,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하다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다가 들어오니까 어떻게 하셨느냐? 요한복음 8장 59절에 보면 말씀을 전하다가 성전에서 숨었습니다. 그리고서 당당히 그들 앞으로 권세있게 나아간 것이 아니라 "뒤로 도망을 갔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는 자주 하고 싶지 않아서 안했고, 여러분도 그런 구절이 있는가 싶으시겠지만, 성전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다가 죽일 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숨었고, 그리고 뒤로 피해 가버렸습니다. 그냥 대강 읽어보면 쉽지만 체면 좀 있는 사람 같으면 숨기도 어렵고, 도망가기도 참 어렵습니다. 혼자 있을 때 같으면 도망가기 쉽지만 그렇게 존경하던 무리가 자기의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자기 죽이려는 사람이 돌로 치려하는 사람이 온다고 해서 거기서 숨는다는 것 그리고 도망간다는 것 상당히 약한 사람이나 그렇게 하지요.

    전에 우리 나라 대통령이 한 번 연설을 하다가 815때인가 총소리가 나니까 단상 밑에 숨었습니다. 숨어서 도망을 간줄 알았더니 충소리가 계속 나서 영부인이 쓰러져 들려나가는데도 잠시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연설하지 않습니까? 참 대통령다웠지요. 거기서 숨었다가 저 뒷구멍으로 도망을. 얼른 뛰어갔으면 겁 많다 라고 했을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말씀을 증거하다가 자기를 치러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숨었을 뿐 아니라 도망까지 가버렸으니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 인간 가운데 좀 강한 사람 같지도 못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습 가운데서도 매우 나약한 사람중에 하나 모습입니다.

    또 한 번은 저 여리고 쪽에서던가요? 저 사마리아 쪽에 가서던가요? 예수님을 이렇게 죽일까. 저렇게 죽일까.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던 사람들이 그러나 예수님을 함부로 죽이게 되면 살인죄를 받게 될테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아마 실족사한 것처럼 그렇게 죽이시려고, 자기들이 무슨 공사를 한다고 낭떠러지를 만들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산 낭떠러지, 아주 가파른 낭떠러지, 그곳으로 예수님 함께 가자고 유혹을 했습니다. 같이 가자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아마 이 사람들이 가면서 아주 가파른 낭떠러지에 가 가지고서 예수님을 가에다 세우며 가다가 어쩌다가 약간 받쳐 가지고서 예수님 미끌어져서 떨어져 죽으면 예수님이 실족사 한 것처럼 그렇게 꾸미려고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 29-30절에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분위기를 미리 파악하고, 함께 가자는데 안갈 수는 없고, 같이 가다가.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갓 쪽으로 붙어가지 아니하고 가운데 서서 예수님이 자꾸 가운데 서겠다는데 '갓 쪽으로가, 갓 쪽으로 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될 것 같으니까 예수님이 가운데로 지나서 이렇게 지나갔다는 그런 얘기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꼭 우리들처럼 이 세상에 오셔서 하루라도 더 안 당하고, 오래 살아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큰 능력을 열심히 행하는 동네에서 많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런 능력을 행하시다가 가까이 유대인들이 온다하면, 가까이 예수를 죽이려 하는, 예수에게 어려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라고 하면 큰 병을 고쳐주고 나서도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내가 고쳐주었단 말 절대하지 마라.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마태복음 16장 20절 가운데를 보면 엄히 경계해서 아주 혼을 내어가면서 "내가 그리스도이라는 것 절대 말하지 마라. 그리스도가 고쳐주었다는 말 절대 말하지 말아라." 그뿐입니까?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이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만난 그 엄청난 영광스러운 빛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 영광스러운 회합을 하고 나서, 나와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 모세 엘리야와 내가 함께 만났다는 말 절대하지 말라 했습니다. 엄히 경계해서 하지 말라 했습니다. 주로 언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했느냐? 거의 자기의 주변에 자기를 공격하러 오는 이런 무리가 있을 때에는 그리스도인 것을 나타내지 말도록 주께서 당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 것이 전파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전파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알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 매우 중요한 일이요, 그의 할 일이었습니다만 전파되다가 그날로 잡혀서 돌에 맞게 되거나,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거나 그리고 그날로 잡혀서 감옥에 가게 될 이런 형편이 될 때에는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어서 자기의 병 나았던 것을 선전하고, 선전하고 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알려짐으로서 피하여 가기도 하고 그리고 갈릴리 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때 사람들 보는대로 제자들만 태워보내시고, 주님은 오병이어를 먹게 한 후에 산으로 들어가 계시다가 밤에 물위로 걸어가시기도 하고, 이렇게 하신 모습을 보게될 때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러나 예수께서 당장 죽게될 위험이 오게 될 때에는 마치 우리들처럼 두렵고 걱정이 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러신 예수님, 꼭 우리와 같아서 우리 나라 어느 대통령 만큼만도 못해서, 상당히 박력 있는 남자들만큼만 못해서, 우리들 중에서도 약한 자 같아서 이것을 이대로 증거하기 싫어한 그의 종들은 때로 그러한 예수님이라도 그러한 일을 하나님의 아들다운 일처럼 묘사하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전에서 숨어서 도망간 그 사건을 말할 때에는 '예수님이 뭐 비굴하게 무서워서 우리들 같아서 숨거나 도망간 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또 죽으실 곳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죽으실 곳도 아니었고, 죽으실 날도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 그날 미리 죽으시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주께서 그날 피하여 도망을 간 것이지, 결코 우리 같아서 그런 것 아닙니다.

    낭떠러지에 떨어 질까봐 갓 쪽으로 걸어가지 아니하고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던 이러한 일도,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 한 것도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고민하거나,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딜까 하는 이런 염려 때문에 이리했던 것이 아니라, 죽기 싫으셔서 그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당당히 죽으실 때가 있고 장소가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그리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죽으셔야 되겠기 때문에 주께서는 낭떠러지에서도 피하고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 하셨을 뿐, 우리들처럼 두려워서, 싫어서, 고민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라고 주의 종들은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제 자신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을 하나님답다고 선전할 때에는 신나는데, 오늘 같이 한 모습을 알려드리려고 하니까 부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들과는 달리 그 죽으실 때와 그 죽으실 장소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에 가서 당당하게 죽으시려고, 성전에서도 숨어 도망을 가고, 낭떠러지에서도 안길로 가고, 그리고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의 그때 그 현장, 그때는 하나님이 제물로 삼으시던 그때 그해, 그때였고, 그리고 바로 정하신 예루살렘 고난받으실 그곳이었는데, 그러면 그때 그곳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 예수 일생 가운데 가장 큰 기도라면 큰 기도였는데, 그때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그 기도의 내용은 "죽을 것을 심히 놀라시고, 심히 슬퍼하셨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고민이 되었던지 아직 죽이지도 않는데 죽이기도 전에 지레 죽게 되었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제자들의 말이요, 예수님 자신의 말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난처하게 합니다. "아버지에게 못할 일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오늘 바로 본문 속에 있었던 내용이지요. 다시 한번 더 봅니다. 33절 이하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3-36) 그는 마치 사형선고를 받고 언제 집행이 될까 두려워하는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같은 모습임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가까이에서는 못 봤습니다만 사형언도를 받고 '언제 집행될까' 기다리는 사람들, 한 달 두 달 하루 하루 가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같습니다. 교도관이 마루를 뚜벅 뚜벅 걸어가면 내 창살 문 앞에 서게 될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되는데 "죄수 몇번!" 자기 번호를 부를 때 뭐 그냥 힘이 다 빠진다 지요.

    문을 열고 "나와." "면회입니까?" "면회요. 면회." "건강진단이요." 건강진단 하러가기도 하고, 면회 온 사람 면회 가기도 하지만 또 목사님이 와서 '구원받으라' 하는 전도 받으러 나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갈 때 과연 면회 오고, 과연 검진 받으려 간다고 믿고 가는 사람 거의 없다는 겁니다. '가다가 나를 죽이겠지…'

    그래서 가다보면 길이 두 갈래가 있다는데, 들어온 목사님에게 복음을 듣기 위해서 가는 방향이 있고, 면회 온 사람 면회하는 같은 방향이 있고, 검진 받으려 가는 길 그러한 통로가 있는데 다른 한길은 집행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옆에 팔을 끼고 걸어가다가 집행장으로 확 돌리는 순간에 그때는 뭐 순간에 다리 힘이 빠져서 질질 끌려간다는데….

    그래서 자기를 메달 줄이 위에 앉혀져 있고, 이제 마지막 집행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소에 유언할 것 있으면 면회 왔을 때 다 했을텐데 "마지막으로 유언할 것이 있는가?" 하면 거의 모두가 다 "예, 있습니다." "빨리 말하라." 평소에 말을 따발총처럼 빨리 하던 사람도 그날 유언하라 하면 떠듬 떠듬 한마디가 아마 1분쯤 가도록 천천히 한다는 것이지요.

    왜 천천히 합니까? 아무래도 끝나야 죽일 것 같으니까. 다만 몇초라도 더 늘려보려고, 그리고 거기 갇혀있는 동안에 담배를 못 피웠으니까 담배는 이미 끊어졌을텐데, "마지막으로 담배한대 피우게 해 주세요." 하면 그래서 담배한대를 피우게 해주면 그동안에 그렇게 피우던 담배, 안에 들어와서 강제로 못 피우게 했으니까 얼마나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한 대주면 '뻑굼 뻑굼' 그냥 한 몇초만에 다 빨아들여야 될텐데, 담배를 문 사형수가 벅벅 피우는 사람 없답니다. 입에 대면서 바람을 거의 빨아들이지 않아서 저절로 저절로 담배가 타 들어가도록…. 그것은 뭡니까? 단 일초라도 더 살아보려고 하는 그래서 유언을 천천히 말하고, 담배를 구하여 시간을 끄는 그런 인간들과 똑같은 모습이 주님의 오늘 기도 아닙니까? 주님의 그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것입니다. 예수 평생 제일 큰 기도를 드렸음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시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우리는 종종 주께서 기도하시면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합니다. 들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7장 어딘가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 아버지께서 항상 내 기도를 들으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랬어요. 들으신다했지 응답한단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나 우리 기도나 기도하면 다 들으시지요.

    우리 한국말이 좀 묘해 가지고 '귀로 듣는다'는 말이나 '말 잘 순종한다'는 말도 '말 잘 듣는다'고 그럽니다. 우리나라 말이 좀 복합적인 뜻을 갖고 있어요. 말 잘 듣는다는 뜻도 순종 잘한다는 뜻도 '말 잘 듣는다'고 그러지요. 말 안 듣는다는 하는 아이, 순종 잘 안 하는 것 보고 '말 안 듣는다' 합니다. 말 안듣기는 왜 안 들어요? 다 들었지. 귀로는 다 들었지요.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 평소에 기도하신 대로 "아버지여,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항상 주께서 들으심을 감사합니다." 들으시기는 하셨지만 응답은 기도하는 자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대로였습니다. 주께서 예수 평생 가장 큰 기도를 이 형편에 와서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셨으되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 잔이 그때 지나가게 하지 않습니다. 그해의 죽을 일을 죽지 않게 하지 않습니다.

    그쯤 되었으면 '내가 죽고 나면 영광이겠지' 생각하고 주님께서 지금 당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제자들에게 와 가지고서 크게 실망한 것처럼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다. 별수 없다." 그러기에 성경은 오늘 우리처럼 구원받은 우리를 향하여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 3장 16절에 가장 중요한 말씀, 요한복음 3장 6절에

    '예수님이 세상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예수 합니다만 성경은 우리의 구원한 그 사건을 두고 '예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오히려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여 날 버렸으니…." 그것이 맞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에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받은 구원을 놓고, 앞으로 가서 영광스럽게 살아야 될 이 큰 행복을 두고서 '오직 예수! Only Jesus!' '오직 예수! 예수님!' 합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줄 압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 이처럼 복되게 한 줄을 압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이제는 율법은 끝이 났습니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이제 안 지켜도 됩니까? 예수로만 됩니까? '예수, 예수' 하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주께서 천국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 14장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을지언정 예수, 예수 하지 말아라." 그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예수를 알 수는 있지만, 예수를 믿으니 하나님을 겨우 아는 정도는 되지 말아라 그겁니다. "너희가 이처럼 구원을 받은 것은 내가 원해서 너희에게 해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너희를 사랑하여 내가 그처럼 기도했는데도 나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그 해에 나를 버렸느니라." 하나님의 참 사랑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어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예수답지 않고 매우 우리 같은 모습을 또 나타낸 것을 보게 되는데, 그렇게 고민을 해서 남이 죽이기 전에 지레 죽게 되었다던 주님께서 부활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지, 신이 났던지, 좀 쉬시든지 않고 엠마오로 내려가는데 한 번 가 봤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두 사람이 실망해 가지고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내려갈 때 같이 함께 걸어갑니다. 내려가는 제자들이 '뭐라 뭐라 예수님이 죽었느니 어쩌느니, 슬픈 일을 당했느니' 하면서 고민하면서 내려갈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만만하게 나타나서, 누가복음24장 25-26절에 보면 뭐라고 말했는고 하면 "이 미련하고 무식한 자들이,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는 자들이 이렇게 슬퍼하고 있도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이러한 영광에 들어가야 될 것을 너희는 듣지도 못했느냐, 보지도 못했느냐? 당연히 내가 이처럼 당당해져야 될 것이 아니냐."

    죽기 전에는 겁이 나서 웬만하면 더 살려고 하던 주님께서 죽고 나서 걱정을 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부활을 시켜 워낙 영광스럽게 하니까 뭐 벽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고, 이제는 뭐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되니까 그때는 당당해졌습니다.

    약할 때는 굉장히 약하더니, 이제 강할 때는 자신 만만 해 가지고서 부활후에 당당한 모습을 보게되는데, 그런 당당한 모습 이전에 그런 부활의 영광을 얻기 이전에 그리되시기 이전에 예수님 죽으실 때 하나님을 향하여 마지막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참, 마음 아팠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이 말을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답게 좀 만들어 드리려고 좀 미화를 해보려고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아,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믿음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날 버렸습니까 이렇게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오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랑이 인류를 위하여 나를 버리기까지 하셨나이까'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탄사를 했다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차라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감탄사였으면, 그 원어에도 감탄 부호가 하나 붙었으면 참 좋을 뻔 했습니다만 그러나 그 뜻은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그의 하신 말씀을 감탄사쯤으로 미화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의 그 소리를 들었던 현장 사람들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못 박혀서 피와 물을 그의 쏟아가니까 혓바닥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던 모양이지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이렇게 막 잘 알아 들을듯 모를듯 소리를 치니까 "엘리야를 부른다." 했어요. '엘리야, 엘리야' 하지 못하고 '엘리…' 이렇게 된 것처럼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엘리야에게 감탄사를 보낸다고 했습니까? 감탄사를 보낼 만큼 감탄했으면 모습이 다르지요. 쫓기는 사람 같지 않지요. 여유 있지요. 눈을 지긋이 감고 감탄표현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현장 사람들은 엘리야를 불렀다고 엘리야가 와서 살려달라 한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엘리야에게 구원을 부탁한다' 오히려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마지막 숨 떨어지시기 전에 주께서 얼마나 불안하시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불안이 없는 경우에 하는 기도입니까? 불안이 있어 하는 겁니까? 불안이 있어 하는 것이지요.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매우 인간다운 모습을 보면서 그는 분명히 내세는 금세보다 좋은 줄도 아셨고, 그렇게 가르쳤고, 죽어야 부활하고, 부활하여 승천하고, 승천하면 영광을 받으실 것도 아셨고 그렇게 선전하기도 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정한 때인 줄도 아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죽게 하시는 그 예루살렘 장소인 것도 하셨는데, 그렇게 다 아시던 분이 믿는 분이 어쩌면 그렇게 죽기 싫어하시고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하시고, 막상 죽는 죽음 앞에서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처럼 "주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우리다워서 실망이 되십니까? 여러분 집안에 예수 믿다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들 마지막 죽으실 때 '이제 나는 부활할 것이다. 천국길 갈 것이다' 하면서 만면에 기쁨을 담지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도 조금 더 살아보려고 "호흡기, 호흡기 떼지 마라."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주사, 주사 더 가져오라." "아이구, 죽으시면 천국 아닙니까?" 해도 "아이구, 나 죽으면 어떡해. 내죽으면 어떡해? 천당 가겠는가, 못 가겠는가? 찬송 불러줘. 기도해 줘."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워서 얼굴에 걱정이 가득 차고 벌벌 떨다가 그냥 운명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주여, 우리 어머니 주 앞에 간 겁니까, 우리 아버지 간 겁니까?'

    성도님들이 부모님 세상 떠났다는 말 듣고 이제 몰려오면, '아이구, 어떻게 죽음을 평안히 잘 하셨습니까?' 하면, '예, 평안히 잘 자는 잠처럼 조용히 가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닌데, 아닌데, 그런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인, 우리들 어느 부모처럼 그렇게 주께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될 것 확신하지 못한 사람처럼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고, 그 형편에서 그렇게 외쳐대는 것 보면서 여러분 실망을 하시렵니까?

    아니요.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사항입니다. 우리에게 안심이 되게하는 아주 복음입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천국 가는 길, 예수 길을 초월한다고 믿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가신 길을 우리는 초월하여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내어놓으신 그 길 따라 가게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같지 못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마지막 순간을 예수님 같지 못하면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높이기를 좋아해서 참으로 예수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아들답기만 하였다면 우리들의 어머니와 우리들의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우리의 죽을 때와 다를 겁니다. 다르다면 그가 천국 간 것 따라 우리가 어떻게 천국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은 인간 가운데 저 박정희 대통령처럼 강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인간 중에, 강한 자 누구중의 하나처럼이 아니라 약한 자중에 하나처럼 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하셨어도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 어찌될까하여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한다고 기도하고 떠났는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영광의 보좌에 앉게 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합시다.

    우리와 똑같았던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살리시고, 하늘로 올리우시며 영광에 영광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에 예수님보다 혹시 더 강해서, 인간 가운데 믿음 강한 사람자 중에 한 사람 같아서 자신 만만하게 만면에 미소를 짓고 떠난 것, 내가 한시라도 주님 앞에 빨리 가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하면 더욱 좋겠지만….

    여러분, 주변에서 먼저 가신 가족이나 앞으로 저와 여러분이 죽음을 맞이할 때 내세가 있는 줄 알면서도, 죽으면 부활할 것도 믿으면서도 그리고 하늘나라 올라가서 영광스럽게 살 것을 알면서도 믿으면서도 그러나 이세상 하루라도 더 살고 싶고, 죽으면 두려워서 벌벌 떨게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여러분, 그것을 실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모습도 하나님이 받으셨으니 우리의 그런 모습도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을 믿으시고, 오늘 예수님께서 철저히 낮아지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인간 중에도 약한 인간처럼 나타나 우리에게 이 장면을 기록해주신 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안심해도 되게 한 줄로 믿습니다. 이런 주님을 높이신 하나님. 우리가 그 모양 그렇게 될지라도 높이 세우실 하나님이신 것을 믿게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 믿음을 믿는 것 같습니다. 자기 기도는 다 응답되는 줄로 확신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믿으면 날 믿지 못해 합니다. 하나님 믿으면 날 부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내가 교회에 잘 다니기 때문에, 나는 죽으면 틀림없이 부활하고, 그리고 하늘로 올리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상급 받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한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혹시 그런 사람 중에 어떤 이는 자기의 확신을 그렇게 믿는 것 아닌지 모르지요. 자기가 예수 믿었으니, 십일조 했으니, 교회 다녔으니 이것은 죽으면 부활, 부활이면 승천, 승천이면 영광,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되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할 뿐이요. 자기가 생각하는 생각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는 나를 믿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장하시고, 우리를 살리시기도 하고 천국에 올리시기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리신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자기 손에 달려있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웃으며 죽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믿은 것은 바로 믿은 것입니다. 왜입니까?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도 하나님은 듣고 싶으면 들으시고, 하나님 듣기 싫으면 들어주지 않더라 그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했으니 내가 확신을 가졌으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으니, 여차 여차 기록된대로 했으면 저절로 된다는 것은 기계입니다. 하나님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문서에 묶여 있는 그런 담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뜻대로 결정하시는 절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자기가 신앙생활을 했고, 찬송을 불렀고 기도를 했고, 헌금을 했다하더라도 내 영혼을 혹시 하나님께서 이처럼 잘 믿었는데도 버리시려면 버릴 수도 있는 하나님인 것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 믿는 믿음인줄 압니다.

    하나님은 내가 결정한 대로 안할 수 없다고, 내가 결정한 대로 다 되게 한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계로 여기실 것이 아니라 나의 생(生)과 사(死)와 화(禍)와 복(福)을 내 마음에 확신대로 다 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면 살려준다 하셨으니, 이처럼 하면 하나님 아들 삼으시고, 딸 삼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한다 하셨으니 '하나님만 믿고 갑니다. 내 영혼을 하나님 놓치지 마시옵소서' 내 죽고 나면 시체가 일어나서 '나요. 나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바쁘게 돌아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 두고 어딘가 갔다오시니 마귀가 이미 들어와 버린 것처럼 떨어지면 되지 않습니다. 내 죽는 순간부터 내 영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눈도 돌리지 마시고 천사를 미리 보내어 지키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처럼 염려하고 걱정하고, 하나님 안 봐주시면 나는 안된다는 것 알고 기도하는 그 연약한 기도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 믿음인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의 모든 행동은 우리와 같았습니다. 주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도 철저히 인간다웠던 모습을 보면서 '혹시, 잘못되지는 않았나'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인자는 기록된대로 가신다." 하였습니다. 인자의 가실일을 기록한 기록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고 털 깎는 자 앞에 붙들려 앉혀서 억지로 털 깎이는 양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죽고싶어서 '움매 움매 빨리 죽여, 죽여' 그럽니까? 빠져나갈 수도 없고, 안 죽을 수도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고, 안 죽을 수도 없는 그런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아니겠습니까? 소가 오늘 내가 죽는 날인줄 알고, '할렐루야. 내 죽는다' 그런 소 있습니까?

    그러나 빠져나가고 싶어도,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다 묶여 또 도망갈 수도 없는, 그 소와 같이 죽을 것이라 하였으니 예수님이 이 철저한 인간다운 죽음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기록을 그대로 이룬 줄 믿으시고, 그의 우리처럼 나약함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도 만들지만 이렇게 나약하셨던 주님이 그리하고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었으니 '내가 이리 하고도 주님처럼 그 길 따라 갈 것이라' 믿으시고 위로를 받으시며 소망 중에 안심이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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