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삶(사51:1-7)
  • 2013.04.04 21:19:05
  • 이사야 51장 1∼7절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아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도움을 받으려고 나 주를 찾는 사람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바위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떨어져 나왔다. 저 구덩이를 보아라. 너희가 거기에서 나왔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고, 너희를 낳아준 사라를 생각하여 보아라. "내가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은혜를 내려서, 그 자손을 수없이 많게 하였다." 주께서 시온을 위로하신다.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신다. 주께서 그 광야를 에덴처럼 만드시고 그 사막을 주의 동산처럼 만드실떼에, 그 안에 기쁨과 즐거움이 깃들며, 감사의 찬송과 기쁜 노랫소리가 깃들 것이다. 나의 백성아, 나에게 귀를 기울여라. 나의 백성아. 내 말을 귀담아 들어라. 법은 나에게로부터 비롯될 것이며, 나의 공의는 만백성의 빛이 될것이다. 나의 공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고, 나의 구원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능력으로 뭇 백성을 재판하겠다. 섬들이 나를 우러러 바라보며, 나의 능력을 의지할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라.그리고 땅을 내려다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땅은 옷처럼 헤어지며,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하루살이 같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구원은 영원하며, 내 공의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공의를 아는 사람들아, 마음속에 내 율법을 간직한 백성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빌립보 3장 18∼4장 1절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흐리면서 말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는 그곳으로 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잇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
     

     

    오늘은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이 사순절이라는 것은 부활절에서 부터 거슬러 올라서 46일간 광야에서 40일동안 악마의 유혹에 싸우던 예수님과 함께 이 시기를 보내는 것이 교회의 사순절 입니다. 이 사순절의 참뜻에 대해서는 오늘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한 이야기가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아주 철두철미한 유대인이었으며 철두철미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에 달려죽고 부활한 그분을 만나고 난 뒤에 그의 모든 신앙은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여태까지 지켜온 율법, 유대인으로 살아온 옛생활을 똥과 같이 버렸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초점이 그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 구약에서 말하는 모든 것,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죽음 예수의 고난속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신도들은 바울이 버린 유대교, 율법주의 종교를 못버리고 있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순절을 똑바로 지킬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바울은 아주 합리적이고 냉철한 이성주의자입니다만 오늘 빌립보서에 보게되면 내가 여 러차례 여러분에게 말했지만 지금 이시간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서 사는 그 삶을 내가 개탄해서 눈물을 흘렸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삶은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맙니 다. 여기에 그는 그리스도 신앙의 초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보시다시피 우리 교회에는 22피트짜리 십자가가 하나있고, 나갈때 여 러개의 각사람이 가지고 나갈 십자가가 있는 것 밖에 없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십 자가를 향해서 예배를 드리고 십자가를 향해서 세상을 나가는 근본정신이라고 해서 교회를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과연 이렇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고 그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무어냐, 어떻게 사는 것이냐 이 것에 관해서 대단히 많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정 종국에 '나도 예수처 럼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것이 그를 믿는 길이다.' 그런 생각들을 박해받는 시대 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같은 사람이 십자가에 열번 꺼꾸로 매달려 봐야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 십자가 만이 우리들이 바라보는 십자가일뿐 다른 사람이 죽은 십자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아마 지난 두주간 동안에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고 3월5일날 에 로마교황청에서 지난 이천년동안 교회가 지은 큰 죄들을 발표를 했습니다. 그 리고 교황 폴2세가 바실리카 성당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초상화 앞에서 무 릎을 꿇고 교회가 지은 죄를 고해를 했습니다. 그 고해한 죄들 중에서 십자군 전 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 그 가운데 들어가 있습니다. 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십자가 전쟁처럼 비참한 전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었습니 까?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진다는 것은 바로 이 묶인 자들이 살 고 이교도들이 지배하는 나라를 정복해서 그것을 전부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 그걸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군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30년, 100년전쟁을 했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이것만이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내가 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 니 없는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 교황청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개 신교는 어떤가하면 아직도 옛날 사고방식을 못버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결점은 사순절 잘 안지키는 것입니다. 그대신에 유럽교회, 남미교회들은 특별 히 사순절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것을 그대로 본받을 필요는 없 다고 생각합니다. 이 40일동안 예수님처럼 가급적 금식을 하고 금욕을 하고 절제 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그렇게 보내는 사순절입니다. 잘못될것이 없습니다. 그 러나 십자가를 믿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기념한다고 하는 것는 그런 것이 라고 볼수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내가 제발 십자 가의 원수로 살지말아라" 하는 말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서 다시 예수님 께로 돌아가봅시다. 예수님은 어려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았습니다. 어린시절에 그가 늘 본것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에서 사형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세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불에 태워서 죽이는 방법이 있 고 하나는 짐승이 와서 찢어 물어 죽이는 방법이 있고, 마지막은 십자가에 죽이 는 방법이 있는데 이 가운데 제일 잔인한 사형이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도 지금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오후 3시에 6시간 동안 못박힌채 있었습니다. 가장 잔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는 어려서 부터 쭈욱 봐왔습니다. 그것을 보 고 자기가 이 세상에 온것은 참 하나님의 메시아의 길을 걷기 위해서 왔다는 것 을 깨닫게 되는데 그 길은 조국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보기에도 처참한 십자가 를 지는 길이 아닌가 생각을 한것 같습니다. 구약성경을 너무 잘알았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53장 오늘 읽은 성경가운데에도 그는 우리의 메시아로 가르칠려는 모양입니다.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했다. 그는 죄인들과 함께 사 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제물로 내어 놓았 다. 그 끔직한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바로 그것은 바로 이길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을 분명히 했을 겁니다. 그는 정말 그 처참한 십자가의 길만은 피하고 하나님 의 주신 사명을 다할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 평생동안 뇌리에 떠나지 않는 문제 였던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에 보면 바로 헤롯이 예수를 죽이기로 했다 는 알면서도 '나는 그 길을 피할수가 없다. 나는 그길을 향해서 가야한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이제는 십자가에 못박혀죽을 바 로 그 전날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때 그 기도가 하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좀 피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는 길은 없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뜻은 이 십자가만은 좀 피하고 무슨일이든지 하겠습니 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그 기도할때 이마에서 피땀 이 흘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이외에 이 하나님 의 뜻을 이룰수 있는 길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온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상 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악마의 유혹에 걸려가지고 욕 심이 생겼을때 바로 이 하나님의 참사랑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사이 에 맥혀버렸습니다. 이 사랑이 들어오는 길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바로 이 아담을 유혹을 한 악마의 지배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세 상에 오신것은 이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내몰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 습니다. 그러면 그길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차단되었버린 세상에서 그 차단된 것을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헐어버리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참사랑이 이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참사랑은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랑, 그것이 나타난것이 바 로 십자가에서 예수의 죽음인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의 요한1서 3장 16절이 바 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뭔지를 몰랐다. 하나님 사랑이 거기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다."는 말뜻 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한 베아르 샤르뎅은 벌써 지금으로 50여 년 전에 그가 남긴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 죽음은 예수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안에 사랑의 인력권을 만들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하면 이 사랑의 인력권안 들어와서 사는 사람이다." 그것이 샤르뎅이 한 말인데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바로 이 예수 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그 영토안에 들어와서 사는 것 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토안에 들어와서 산다는 그것이 우리 가 구원을 얻는 것이며 그곳은 사탄이 지배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지배하는 세상 인 것입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그 영토안에 살면 서 나도 그사랑을 본받아서 그 삶을 내삶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대로만 사는 삶이 바로 옛 사 탄이 지배하던 세계에 자기를 중심으로한 욕심대로만 사는 바울이 말한 옛 십자 가에 원수되어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트리히 본헤퍼는 하나님이 없이 사는 세계를 고난을 피해서 찾아가는 세계라고 정의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원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명백하게 말했습니 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율법을 안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첫짼는 자기들만이 배불리먹고 풍요하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부 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기위해서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 부끄러움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금의 정치판이 그렇지 않습니까? 온갖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 다 국회의원 금뱃지를 달기위해서 그러는거 아닙니까? 이 세상에 고통을 겪고 고생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자기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 이기 위해서 수천만원 수백만원짜리 패물을 온몸에다 두르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십자 가에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의 삶을 너무너무 심각하게 자꾸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 너무 잘못하다가는 다시 유대교인이 됩니다. 다시 바리새인이 됩니다. 다시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우리 예수믿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하 면 안된다. 여기에 매어가지고 삽니다. 그건 여전히 유대교인이요 율법주의자입 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가? 굉장히 어렵 게 비참하게 매맞고 피흘리고 죽어가는 사람을 볼때에 아 내가 저사람을 도와주 는 것이 하나님앞에 벌을 받는게 두려워서나 상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 라. 이러한 사람을 볼때에 마음속에 도와주지 않고는 견딜수 없는 마음이 생긴 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하면 참 마 이 기쁨이 생긴다. 바로 그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외국인 노동자 60명과 같이 예배드렸었습니다. 헌금 을 한것 가운데 천만원을 가지고 마을 교회에 가자고 해서 제가 가본적이 있습 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 이들이 사는 삶의 현장을 보고 너 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사람이 사는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맹수들이 사 는 밀림속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들의 문제가 내 머리속이나 마음속에서 떠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들을 위해서 제가 할수있는 일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함으로써 하나님게 상 받거나 세상에서 무슨 표창장을 받는다던지 그런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일이 있을수 있느냐 그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금욕적인 생활이 아니라 안하고는 못견뎌서 정말 이러한 이웃과 고난을 나누고 나면 내마음이 오히려 즐거우지는 그것이 나는 구체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바다보는 신도의 삶이 라고 생각합니 다.

    이태리영화 마태수난곡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탄이 나옵니다. 슈 퍼마켓을 자그마한 가게를 해서 돈을 벌고 생활을 좀 넉넉하게 하는 시의원같은 벼슬을 해서 밖에나가면 사람들에게 좀 존경도 받는 바로 그런 사람이 사탄입니 다. 이웃을 자기와 자기가족만 생각하는 것이 행복인줄알고 이세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의 사도바울이 말하는 원수로 사 는 삶인 것입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는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십작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서 하 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영토가 생겼습니다. 그 영토안에 들어가서 그 영토안에 서 사는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안에는 생명이 거기에서는 보장된 삶입니다. 그 러나 이런곳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에 잘다니느냐 못다니냐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밖에서 여러분이 요한일서 3장 14절을 되풀이해서 읽어보시기바 랍니다.

    우리가 이 사순절 기간동안에 우리가 많은 것을 합니다. 기도도 하고 명상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행사가 되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영토 안에 살고있느냐 그것을 명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면 참회하고 회개해야 합니 다. 사도바울은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의 원수로서 다가가는 내 제자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그는 마지막 4장에 1절에서 "너희들은 내가 사랑하고 내가 사모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내 기쁨이요, 그대들은 내 사랑하는 아들딸 이요. 그러니까 주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 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바로 이것 이 사순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씁니다. 이것이 바울의 가슴속 에서 그대로 명백하게 나타난 믿음으로 산다는 것 십자가를 향해 산다는 뜻이 무엇이고 십자가의 원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인지 너무나도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이번 사순절을 맞이해서 우리는 다 이 십자가의 원수로 사 는 삶을 집어던지고 사랑의 인력권안에서 남은 여생을 살아가며 이 다짐을 우리 개인과 교회와 이것을 하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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