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용 있는 사람(마21:1-5)
  • 2013.05.27 22:04:43
  •  대개 세상에는 세가지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 첫째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고, 둘째는 남에게 해도 유익도 주지 않는 사람이고 그 셋째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을 찾으나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주님도 필요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한 우리를 불러 내셨다. 자신이 주께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를 살피면서 은혜를 받아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종이 되어야 하겠다.  본문에서 새끼 나귀를 쓰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보내시는 장면을 살피면서 나 자신은 어느 부류에 속하였는가를 진단해 보자.

    1. 소용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
       A. 사명을 잃은 사람(마2:13)
         소금이 맛을 잃으면 모래 많치도 가치가 없고 거치장 스러울 뿐 아니라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짜게할 質料를 찾지 못하니 안타꿀 따름이요 결국 버리워지고 사람의 발에 밟히게 되는 것이요 등불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나 말아래 두었다면 빛이 차단되므로 등불의 사명을 감당 할수가 없고 꺼진 등이라면 밤길에 거치장 스럽기만 할것이다.   사명을 받은 사실은 귀하지만 그 사명을 잃은 사람은 맛잃은 소금과 같고 말아래 등불이나 꺼진 등과 다름이 없다. 사명을 잃은 사람은 소용이없다. 그러므로 나의 사명이 무었이냐고 항상 自問自答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B. 표리 부동한자(마21:19)
         열매 없는 무화과 일수록 잎은 더욱 무성한게 십상인것 같다. 아까운 진액을 흡수하여 열매를 이루는데 사용하지 않고 잎만 무성하게 살찌우니 농부의 탄식이 끊어질 리가 없다.  
    사람도 그러하다. 말로서 始終을 遊說하고 행위로는 거리가 먼 사람이있다. 그래서 羊頭狗肉이란 말이 있고 表裏不同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즉 겉과 실속이 다르면 소용이 없는 자가 된다.   빛좋은 개살구 처럼 버젓이 성직을 맡았으면서도 직분에 걸맛는 생활보다 낯부
    끄러운 일을 찾아가면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밤을 새워 기도한 사람이 돌아가는 대문 앞에서 마을을 찟는듯 싸움질을 하더라니 기가 막힌다.   外皮보다 內實이 있는 삶이 되지 못하더라도 표리가 부동한 삶이 되어서는 않된다. 그런 사람은 소용이 없는 사람이다.
       C. 자신 만을 위하는자(롬16:17-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자신 만을 위하는 자는 분쟁을 좋아하고 복음에 거칠 뿐만 아니라 아첨하고 남을 미혹하며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며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가며 고라의 패역을 쫓으며 성도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
    며 물없는 구름이요 죽어 뿌리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거품만 뿜는 바다의 물결이요 영원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다(유1:11-13).
        주의 일은 자신을 바쳐 남을 위해 제공하는 곳이므로 자신만을 위하는 자는 주의 앞에 소용이 없는 것이다.

    2. 소용 있을 사람은 누군가?
       A. 순결한 마음의 소유자
         하나님은 때 묻은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릴것은 흠이나 점이 없어야하고 무리 중에 제일 좋은 것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사람이 이것을 모르고 눈 빠지고 저는 것만 골라서 드리려고 할때 서글프고 가장 끝물만을 골라서 하나님의몫으로 삼으려니 
    답답하다.   주께 쓰일 사람은 순결해야 한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처럼 믿음과 동정으로 지켜온 마리아를 택하셔서 그 아들을 잉태케 하였듯이 순결, 그것은 주의 사람의 생명이며 보증이다.   그러므로 베는 섞어 짜서는 안되었고 이방인과 통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였기에 애급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멀리함을 당하였고 상비군을 의지하려던 다윗은 혼줄이 나게 되었다.   쓸모있는 사람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 감히 누구의 앞이길래 영혼의 창남이나 창녀가 아첨을 한다는 말인가.   순결을 지키자. 먹는것 마시는 것이나 즐기는 것이나 삶의 그 어느것이라도 영혼의 순결을 때묻히는 것은 과감히 배제해야 한다. 자신의 정조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주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 아닌가?
       B.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
         나귀 새끼는 사람을 태워 보지 못하였으므로 귀하신 몸을 태우기에는 미숙하기 보다는 위험 천만일수도 있다.   하나님이 쓰시는데는 언제나 미숙한자, 즉 겸손한자를 들어 쓰셨다. 이스라엘의 첫왕 사울을 택할 때에도 그는 행구 사이에 숨어 왕이 될수 없는 자라고 
    사양하였으므로 하나님이 택하였으나 저가 전국에 자기의 기념비를 세우며 교만하여 할때에 그를 버리셨던 것이다.   내로라고 하는 이가 너무 많은 시대는 사실 혜성같은 자가 없는 때이다. 샛별이 나오기 전에는 이름모를 무수한 별들이 돋아 밤하늘을 자랑하게 마련이
    듯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아할게 아니라 오히려 특출한 인물이 없음을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참으로 적격자는 겸손한 자라야 한다.  인물은 고상할수록 겸손하면 타인이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치겨 들면 대적자가 생기는 법이다.  선전이 많을수록 그 물건의 
    내용이 별로이듯 내로라고 외치는 자치고 쓸만한 인물이 없다.
       겸손하자.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주께서 지나치게 겸손하여도 쓸모 있는 재목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C. 하나님의 예정된자
         새끼 나귀는 오래전 선지자 스가랴로 인해 이미 예언되었던(슥9:9) 사실이 이루워진 것이다.   새끼 나귀가 태어난것이나, 그 마을에 매여져 있었던 것이나, 그 주인의 나귀였던 것이나, 예루살렘 입성에 사용되었던 것, 이 모두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닌것이 없었다.   바울도 부름을 받고 난후 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었다고 술회하였다. 어머니 태중에서, 아니 만세전부터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고백하였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모든 고난도 탄식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그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임자가 자기로 미리 아시고 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자는 현실을 탓하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존귀케 하는 일념이기에 오직 영광이 들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어깨나 허리라도 주를 위하여 드리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나의 맘대로 되고저 하여도 하나님은 예정대로 돌리실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도 없는 행위가 온전할 리가 없다. 예정을 믿고 순종하며 영광을 돌리자.

    3. 소용된 자의 축복이 무엇인가?
       A. 주와 함께 걸어감
          섀끼 나귀는 주님을 등에 태웠으니 주와 함께 걷게 되었고 주님이 가시는 곳을 가게 된것이다. 소용된 자의 축복은 그립던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주 함께 하는 것은 성도의 소망이다.좋은 길동무는 먼길이 피곤하지 않게 한다. 그러기에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라고 찬송하게 된다.  함께 가는 길은 목적이 같다는 말이다. 정작 나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목적이요 목표인 것이다. 나귀의 소망은 어미 곁에 조는 것이리라. 주님을 태운다는 것은 주님이 서라면 서고 가자면 가야하는 진정 내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자세이다. 하지만 역대 성현이 그리던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미물의 동물로서는 퍽 영광스럽고 귀한 일이 아닐수 없다.
       나 주님과 같이 하니 보람이 넘치고 주님 나를 운전하니 주께 맡길수 밖에 없다.
       B. 주와 함께 영광 받음
         사람들은 길에 겉옷을 폇다. 주님을 위하여 폇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것은 나귀였다.  소용있는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함께 받는다. 그러므로 주께 맡긴 생애는 후회 할것이 없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들으며 그영광을 주가 받을 때에 함께 존귀케 되
    는 것이다.   주를 위하여 바쳐진 주의 종들은 한결같이 영광을 받았다. 행여 그영광을 자기의 것인양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의 나된 것은 철저히 주님의 은혜로 돌려야 한다.   발바닥에 겉옷의 촉감이 전달 될때에 으시대는 자세를 버리고 등에 앉으신 주님을 기억해
    야 하고 종려가지가 나붓기며 호산나가 커질 때면 나로라는 자세를 버리고 평화로운 주님을 상기해야 한다.
       C. 주를 증거함
         사람들은 나귀를 보고 주님을 알았다. 나귀는 메시아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표적이 되었다. 벳새다의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메시아로 알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였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사람들은 좀더 확실히 알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길에 섰을 때는 모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소용있는 사람은 주를 나타내기를 평생 소원으로 삼는다. 주는 흥하여야 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기 때문이다.
       나로 인하여 주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 되어진다면 이 얼마나 귀한 일이냐? 수다한 사람들이 주님께 망신을 보내는 이때에 주를 증거함에 표적이 되는 인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학자는 학문에 능하여야 하고 의사는 의술에 능하여야 하듯 주의 증인은 주를 
    알게하는 표적 됨이 무한한  광이기 때문이다.

댓글 0 ...

분류  제목  등록일 
분류 없음 2012.12.27
분류 없음 2013.01.08
분류 없음 2013.01.09
분류 없음 2013.01.24
분류 없음 2013.01.26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