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깜빡 잠든 베드로(마26:36-46)
  • 2013.06.03 21:02:21
  •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서로 사랑의 인사를 나누십시다. ... 성도님들께서 부족한 저를 항상 사랑해주심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성도님들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본문은 약2천여년 전 어느 목요일 밤에 일어났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수제자 베드로까지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여기 깜빡 잠든 베드로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깜빡 잠이 들었다는 말은 잠깐의 부주의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삽시간 유혹에 빠졌다.  잠깐동안 영적 잠이 들었다.  뜻밖의 실패를 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세 가지 내용을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코자 합니다.

     첫째, 베드로의 시험입니다.  
    행16:25을 보면 "밤중쯤 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밤중쯤 되어 라는 실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도덕적으로 밤중인 것 같습니다.  시험도 밤중에 찾아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백성들은 이리할지라도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밤중에 이적이 일어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시험을 받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간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시험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다.  이 시험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이길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시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시험은 통상적으로 찾아오는 통로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자만했고, 영적 교만에 빠졌고 지나치게 장담했던 것이 시험의 통로였습니다.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이 베드로의 거짓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때도 베드로가 어찌했습니까?  그냥 입다물고 있었다면 좋을 뻔했습니다.  35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장소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말은 '기름을 짠다'는 뜻인데 영적인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듯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은 십자가 고통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십니까?  마음이 아프십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하고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대는 고민하신 예수님을 아는가?  더러는 안다고 할 수도 있고 더러는 모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예수님의 고민을 조금 알듯하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38절을 보면 예수님의 고민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 예수님을 모른체 여전히 비밀리에 감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네 믿음이 무엇이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고민을 알아주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나아가 예수님의 고민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요?  나아가 "예수님 얼마나 마음이 아프십니까?"  함께 동참해서 기도하고 울고 가슴을 쥐어뜯는 이것이 아름다운 믿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39절에 보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했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인지라 이러한 기도를 했으나 그 다음을 보면 "그러나 아버지의 원하는 뜻대로 하옵소서" 괴로운 잔 내일 아침이면 마셔야 될 잔이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잔을 마시겠다는 의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잔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묻고 싶지 아니합니까.  분명히 이 잔 속에 내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내가 어쩔 수 없어 하는 내 죄를 담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 무슨 뜻입니까?  죄 없으신 분이 죄인처럼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눅22:42을 보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향해서 묻습니다.  그대는 겟세마네의 핏방울을 아는가?  십자가의 쓴잔을 아는가?  예수님의 피로 씻기어졌는가?  ♬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죄 회개하는 능력을 그대는 참 의지하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마음속의 여러 가지 죄악이 깨끗이 씻기어있는가 예수의 보혈로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  

     둘째, 베드로의 실패입니다.  
    인생을 실패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역시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문설주에 붙여놓고 나갈 때도 들어갈 때도 한 번 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다가 40절 "한시동안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여기 한시동안은 한 시간동안을 뜻하지 아니합니다.  짧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연약한지라 짧은 시간도 이겨내지를 못합니다.  학생들이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작심삼초라는 말로 바꿔졌습니다.  베드로는 장담했으나 깜빡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깜빡 잠이 들었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부인하지 않겠다던 그가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까지 물으시고 마침내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축복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이처럼 새 출발할 수 있었던가요?  34절을 보면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마리 닭을 등장시킨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새 출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닭도 울고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아마 가슴을 쳤을 것이고, 사나이에게 없었던 굵은 눈물줄기를 쏟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넘어졌던 인생이 새 출발할 수 있는 발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깜빡 잠이 들 수 있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잠깐 실수한 적이 없는가?  실패한 일이 없는가?" 모두에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입니다.  닭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새 출발하는 우리 모두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 베드로의 대책입니다.  
    대책 없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실패했다고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습니다.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25절을 보면 "살았을 때"라는 의미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 이 살았을 때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때는 만사가 끝장입니다.  그러니까 살았을 때가 너무도 소중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은 살았으나 조금 후에는 죽는다.  그런데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네가 어떻게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먼 훗날 내가 살았을 때에 도와줄걸, 기도, 사랑, 전도할걸... 죽은 다음에 백 번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살았을 때에 믿음생활 잘해야 훗날 열매를 딸 수가 있습니다.  상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촛대가 지나가기 전에 살았을 때를 내 삶의 주축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부하고 계십니다.  38절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렇습니다.  믿음생활 잘 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생활입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깨어있는 성도가 참 성도요 또 그러한 성도라야 믿음의 대장, 기도의 대장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가지가 과실을 많이 맺던가요?  발버둥치는 가지가 아닙니다.  힘쓰고 애쓰는 가지가 아닙니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가지라도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열매는커녕 그 가지 시들어 말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떠나가시던가요?  내가 예수님을 떠나가던가요?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안 버리십니다.  그런데 내가 못됐습니다.  자꾸만 예수님을 버릴려고만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누가 만나야합니까?  성경에 죄 많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삭개오가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먼저 내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내 인생은 실패작이요,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기쁨, 생명, 소망이신데 내가 어찌 주님을 떠나 바로 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에 우리 주님을 만나면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거듭나야 된다고 하셨습니까?  아마 니고데모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설마 날 보고 거듭나야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겠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찬송이 무엇입니까?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 예수님 앞에서 결단코 나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되면 오만, 낭패에 빠집니다.  주님 앞에 설 때에 내가 주인공 되어 '내가 먼저'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욥에 의하면 욥25:6인데 '구더기 같은 인생'이기 때문이고 이사야에 의하면 사41:14인데 '지렁이 같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뽐낼 수 없습니다.  지위, 재물이 있어도 어깨를 으시댈 수 없는 인생입니다.  여기에 바울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예수님을 떠나서는 인생은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불태울 수밖에 없습니다.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돌감은 떫고 맛이 없고 값어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돌감도 접붙임 받으면 홍시 감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모두는 선한 일 할 수 있습니다.  길가다 넘어진 노인을 일으켜드릴 수 있습니다.  문전에 선 거지 나사로를 접대할 수 있습니다.  달리던 자동차가 멎었을 때에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괴로움 당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가슴에 끌어안고 얼마나 괴로우냐고 동정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인생은 아예 없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정해질 수 있습니까.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믿은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믿고 왕자되고 공주됐네 우리가 찬송합니다.  황태자를 누가 때릴 수 있습니까?  큰일납니다.  또 때릴 수도 없습니다.  보이지 아니하게 황태자 곁에는 항상 그를 지키는 경호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게 나를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황태자를 지키는 경호원처럼 내 뒤에서 나를 돌보시는 주님이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밤 예배시간에 출애굽기 강해를 하고 있는데 저는 구름기둥 불기둥이 나오기만 하면 어쩐지 은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이 형통하기를 원합니까?  나의 갈 길이 평안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구름기둥을 의지하고 불기둥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인생 길을 내 힘으로 능히 개척할 수 있다고 뽐내는 성도가 있습니까?  이 시간 마음을 고쳐 잡아야합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다, 부요하다, 넉넉하다, 많이 안다, 의롭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마음을 고쳐 잡아야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헛되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날아가는 참새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모두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생활 해야 합니다.  믿음이라고 다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라야 믿음입니다.  생동감 있고 꿈틀거리는 생명력 있는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사랑받고 인정받는 우리모두이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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