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도전(마26:36-46)
  • 2013.06.03 21:08:39
  •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까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나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어쩌다가 "나는 쓸모 없다.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면 그때부터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열두 제자의 "쓸모"는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지 결코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내게 배우라. 나 있는 곳에 있으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하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제자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라고 당부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일 따름이었습니다. 절대적 충성입니다. 믿고 의지하고 위탁하고 따르라 하심입니다. 충성 하나를 요구하십니다. 다르게는 믿음이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위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난, 슬픔과 고통, 패배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의 삶과 사역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의 수난과 죽음은 하나님만큼 예수 자신이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치러진 희생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삶과 선교의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수난과 죽음 역시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과 영생을 안겨 주기 위한 실천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당신의 수난에로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제자이기에 선생이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명하심에 순종하고 그를 따름이 마땅합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동산에는 올리브나무가 가득하였고 한편에서 올리브 기름을 짰던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토로하셨습니다. "내 마음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마음에만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컸으며, 그리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함께 깨어 있어서 자신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극심하여 생명의 진액을 짜버리는 것과 같은 겟세마네 동산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건강문제,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가족간에 얽혀져 있는 복잡한 문제,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처한 현실과 미래에 관한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잠을 못 이루게 하며 급기야 고민과 번민으로 생명을 고갈시키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우리들의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시며 그 극한 고난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으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생명의 진액을 짜내는 겟세마네 동산은 이렇게 홀로 오를 수밖에 없는 산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셨습니다. 또한 신앙의 맹장 엘리야도 고난 가운데서 시내산에 홀로 올라 로뎀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람을 홀로 소외시켜 그 생명을 고갈시키는 고난, 이 고난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주제는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며 어떻게 이길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소외현상, 사람을 소외시키는 현상이 가장 두려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 처한 사람은 고난의 파괴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무력해 집니다. 그 결과 스스로 소외되고 그 가진 귀중한 생명을 고갈시켜 버립니다. 극단적으로 다가오는 고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공동체가 고난에 처했을 때 그 구성원들은 그 고난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작아지며 그 고난 앞에서 스스로 분열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소외현상에 대한 바른 대처를 고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폴 틸리히는 홀로 있는 것을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외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외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면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은 홀로 있음에 부정적이고 파괴되는 표현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여서 아무도 도움을 줄 사람이 없으며 이 큰 문제를 홀로 풀어야 할 것 같아 두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두려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죽을 정도로 외로와 하셨습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제자들이나마 한데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엘리야 또한 갈멜산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칼 아래 두려워 떨며 광야로 도망칠 때에 시종을 대동하였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 외에 소외현상의 또 다른 표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고독입니다. 이 고독은 홀로 있음의 창조적인 표현입니다. 고독은 사람을 정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고독가운데 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독을 섭리하시기 위하여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한 후에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 고독이 그리스도를 강화시키고 정화시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입니다. 광야 가운데에 홀로 서서 자신을 정화시키며 강화시켰고 만약에 이러한 과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메시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파괴시키는 외로움에서 벗어나 생명을 창조하는 고독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이것은 바로 고난을 대처하는 첫 번째 선택입니다. 



    도르테 죌레는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대화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소외 가운데 홀로 남아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 홀로 대면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홀로 두어서 단독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거기에 짓눌려 신음하는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전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그 동안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부와 권력과 사치가 무너진 그 폐허 위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면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영혼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역할은 미래를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화가의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운 눈을 밝게 하는 안과의사의 역할입니다. 우리 안에 어두움과 파괴력에 눈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밝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가 새롭게 하나님을 만났던 욥은 "내가 전에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를 향하여서 고개를 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두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그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밝은 빛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자신의 뜻을 물리치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 내 의지가 가득한 마음을 평정하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내용의 기도를 세 차례에 걸쳐서 기도하셨고 그때마다 땀이 피처럼 흘러내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원망과 분노와 후회로 들끓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모든 것을 주께 의탁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내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며 우리 눈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새로운 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할 때, 우리 한사람 한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명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련해 놓으신 칠천 명의 동지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고난 가운데 엘리야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완전히 복종시키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뜻을 복종시켜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 후에 그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엘리야도 고난을 뚫고 당당히 걸어갔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홀로 믿는 고난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제 주님의 손을 잡읍시다. 

    무엇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것이 사람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잃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로서 인생은 불행입니다. 때문에 잃은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렇게 절절하고 애끓는 사연이 됩니다. 



    잃어버림은 상처요 단절이며 암흑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삶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이 "잃어버림"의 원죄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그 "잃음"(상실)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찾는 사람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초월적인 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두려워해야 하고 경외해야 할 그 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비뚤어지게 살아갑니다. 인생은 모두 불안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피곤하여 지친 인생은 고통스럽고 불행합니다. 때문에 무엇인가 위안을 받고 싶어 돼지 머리를 두고 절하지만 거기엔 참 기쁨이 없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아 위안을 얻으려고 하지만 잘못 찾아 헛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참 기쁨은 하나님을 찾을 때 얻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시작됩니다. 



    창세기 2장은 인간의 고통과 불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서입니다. 언제나 고통과 위험과 불안이 뒤쫓아 왔습니다. 그 이후 인간의 역사는, 구약성서가 말해주는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을 되찾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살 수 있었고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고난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쏟아버리고 하나님을 찾을 기력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찾으시기 바랍니다. 찾는 사람은 찾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기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2. 사람을 찾는 하나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추방된 사건은 인간의 불행이 시작 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픔이 시작된 사건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리면 평생을 마음에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참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눅15:11-31 에 나오는 탕자와 아버지 비유가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집을 떠난 아들을 돌아오기만을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는 심정은, 아들을 잃어버린 어버이는 단 하루도 참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에덴 동산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픔의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 하나님은 잃은 자식으로 기쁨을 잃고 지냈습니다. 그 고통이 십자가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자녀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복된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어 살아온 당신의 자녀를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배신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기쁨을 되찾는 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녀를 키워 보신 분은 아십니다. 자녀가 부모의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돌아와 기쁨으로 만나자 



    잃어버린 일은 고통이지만 되찾음은 큰 기쁨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기쁨, 사람의 기쁨은 한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라고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5:18-20). 



    막혔던 담이 헐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친교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를 묻지 않으시고, 진노를 거두시며 한 가족이 되게 하십니다. 십자가 은총 아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제 기쁨의 잔치가 계속 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 죄인 중에 괴수였지만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돌아오게 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 아담 이후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을 걷어내고 생명의 빛이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와야 할까요?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까지 걸어가던 길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회개라 합니다. 이제까지 살던 습관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 따라 살면 됩니다. 이를 우리는 회개라 말합니다. 하나님의 참 기쁨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한 발걸음을 날마다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향한 마음을 날마다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관점을 주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는 기쁨을 잃고 살아갑니다. 그 기쁨이 어디 숨어 있는 걸까요? 

    기도의 실패는 하루의 실패요, 기도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가장 큰 일을 눈앞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 일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으로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훈련을 끝마치고 전쟁터에 나가려는 군인들이 마지막 밤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마음껏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것과는 달리 우리 주님은 그 마지막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으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려면 육적인 힘을 축적해 두어야 하고 그 힘의 축적을 위해서는 하룻밤쯤 푹 쉬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중요한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이 같은 기도의 밤을 지새우신 것은 습관을 좇아서 행하신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평소에도 늘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면 일 하시는 중에도 기도하셨겠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 이것은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주님은 그 마지막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무나 쉽게 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십자가를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기에 쉽게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사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은 사람을 시험하기에 앞서 그 사람이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도록 방해합니다. 사단은 주님의 기도도 방해하였습니다. 그 방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주님께서는 땀을 핏방울 같이 쏟으시며 기도하셨고 심지어 천사까지도 도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의 시험에 빠질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질 결심이 되어있는 것처럼 대답하였습니다(눅 22:34).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하루밤새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마음은 원해도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기도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기도는 시험의 시작이며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이 같은 기도에 실패한 베드로를 봅시다. 그는 기도 대신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시험에 든 것입니다. 시험에 빠진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우러 오는 자들과 검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용감한 것 같으나 사실은 십자가를 거부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으로 대항하여 십자가를 모면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지게 되면 주님은 작게 보이고 세상은 크게 보입니다.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육신의 것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허탄한 욕심과 이름 모를 공포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시험에 든 베드로. 그는 살기 위하여 양심을 속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겠다던 그가 조그만 계집아이 앞에서조차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주님을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치졸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므로 사단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기도에 실패한 베드로. 그의 그 이후의 삶이란 강 건너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 동안 주님과 함께 했던 많은 경험들도 먼 옛날의 추억으로 간직된 채, 베드로는 다시 어부생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영생의 말씀들, 장래의 소망,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 주님과 함께 가졌던 비젼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마치 꿈속의 이야기들처럼 이제 베드로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생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전에 그가 토했던 것에 되돌아 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의 원인이 됩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기도는 그것들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새롭게 된 베드로가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지 사도행전에서 그같은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에 힘쓰십시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인생 여정에서 특히 신앙인의 삶의 행로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겪는 것을 어느 누구도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을 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얼굴"을 매우 가까운데서 뵙는 뜻 아닌 복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시험"받는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누구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아무에게도 시험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시험하기에는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중심을 이미 항상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에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생여정에서는 "사람이 영적으로 시험받는다"는 체험과 그럼 느낌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의미 있는 시험, 축복으로 변할 수 있는 시험은 위대한 정신에게만 옵니다. 큰 뜻을 품고 사람다운 도리를 이루고 뭇 생명들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연단의 시련"으로서 시험을 더 자주, 더 강하게 맛보도록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아무렇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욕심이 잉태하여 죄의 가시열매를 낳는"고통이 따를 뿐입니다. 



    유혹을 받고 시험을 당하는 존재는 우리가 아는 한 "인간존재"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혀 시험을 받는 일도 없고 유혹 받는 일도 없다면 우리들은 동물처럼 본능대로 살아가게 될 것일 뿐입니다. 인격적이고 자유의지를 가진 자기 초월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 곧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만이 유혹을 받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흙더미를 뚫고 씨에서 돋아난 새싹 그 자체는 이제 이미 생명현실체로 전환되었기에 고난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시련을 이기고 생명을 위로 끌어 올려야만 합니다. 무거운 흙더미를 밀쳐내고 빛을 향하여 어떻게 하든지 빛을 모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을 이기고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비바람을 이기고 병해충을 이기고 기어이 열매를 맺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알껍질을 깨고 한번 부화되어 나온 참새새끼는 그 털의 물기가 마르기도 전에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야 합니다. 자기를 한입에 삼키려는 맹수나 들짐승에게서 자기스스로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생명에게 있어서는 다른 시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남겨놓고 가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전과 고난 면제를 보장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줍니다. 생명의 길을 걷고자 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르게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꼭 맘에 기억해둬야 할 사실은 시련을 당하겠지만 그 시련을 두려워하거나 근심걱정에 너무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지닌 죽음의 독, 죽음의 가시가 이미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화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개인과 가정에도,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시련이 올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는 재난사고, 원하지 않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 경제적 사회적 질곡, 특히 진실과 의를 추구하느라고 받는 고통과 손해 등등이 떠나가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하신 주님 말씀대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개인과 가정 위에 시험이나 시련이 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만, 그런 시련과 시험이 전혀 오지 않도록 보장한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허락을 하셨지, "보장하라"고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 있는 가정은 그렇지 않은 가정보다 더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든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은 고난의 극한점에서 그 고난이 주는 통증이 한 풀 지나갈 무렵쯤에 홀연히 "브니엘 체험"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브니엘 체험, 곧 하나님 얼굴을 뵙는 체험이라는 것을 특별한 신비체험이나 비몽사몽간에 체험하는 별난 종교체험이라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체험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브니엘 체험이란 하나님 얼굴을 뵙는 체험이란 말이요, 그 말은 진리 체험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구원이란게 무엇인지, 속량 받고 죄 사함 받는다는 말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진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내일 모래면 달려서 형장의 이슬로 비참하게 죽으실 분이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뜻이 무엇인지 홀연히 깨닫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사망, 생명, 권세 높음, 현재, 장래일 어떤 것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줄에 자신이 굳게 매여 있음을 바울처럼 그 자신도 보게 된다는 그 말입니다. 



    진실로 시험과 고난은 정금을 정련해 내려는 영혼의 풀무질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어보고 그 시련을 참아 내거나 극복한 사람은 욥처럼 고백하기를 "이제까지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말로서 설명하는 하나님론이 아니라 말 없이도 매우 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아니 내 의식이 나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직접적으로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브니엘 체험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험을 많이 체험하고 그것을 참아내고 이긴 사람은 아니 설혹 이기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타인을 이해해 주고, 관용하는 폭이 매우 깊어집니다. 매우 감수성 높게 타인의 고난을 동병상련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사람은 서로 연대하고 있으며, 고난의 짐은 어느 누구 혼자서 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하나님께 이유 없이 깊은 시험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나 가족 중에서 도저히 합리적으로 이해되지도 않고 용납되지도 않는 시련과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나는 그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위로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드릴 수 있는 말이란, 고난받으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과, 무정하고 무자비하고 무책임한 말로 들리겠지만 시험과 시련에 지지 말고, 담대하게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타조 알보다도 더 두껍고 단단했던 내 영혼의 껍질이 부드러워지는 은혜 체험, 브니엘 체험을 하시라고 기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체험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에 따라 고난을 겪으면서 더욱 강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난을 견디지 못해 이전보다 더욱 약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더욱 강해지면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분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눈앞에 두고서도 조금도 비굴해 하거나, 도피하려 하시지 않고 십자가에로 도전의 길을 힘있게 걸으셨습니다. 신앙의 길은 매일 십자가의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로 도전하는 마지막 준비의 밤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보냈습니다. 



    사순절 십자가에로 도전해 나가시는 여러분에게 다음의 귀한 글들을 소개합니다. 



    * 냇물에 돌들을 치우면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 

    * 예로부터 선인은 고통 중에 낙이 있고 악인은 낙 중에 고통이 있다. 

    *고통은 성장의 법칙이요 우리의 인격은 이 세계의 폭풍우와 긴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다.(마더 테레사) 

    *우리가 위험 없이 정복하는 것은 영광 없이 승리하는 것과 같다. 

    *고난으로 교육받지 않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린애와 같다(N. 토마제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의 고난을 대신 진다면 주님이 당신의 고난을 져 주시리라 

    *시련 없는 생활 그것이 최대의 시련이다 

    *고난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온 귀중한 선물인지 모른다.(삼포능자) 

    *박해는 영적 향상의 필요조건이다(톨스토이) 

    *안식은 모든 난관을 지나서 있다(괴테) 

    *나를 높은 예지로 이끌어 주는 것은 고난과 눈물이다. 

    *고난은 풍족을 가져온 것보다도 더 많은 가치를 가져온다. 만일 행복했더라면 나는 결코 성숙되지 않았을 것을 고난이 가져다주었다. 

    *어려움에 시달린 사람은 쉽사리 낙담하지 않는다(죤슨) 

    *고난은 기도의 선생이다(독일 격언) 

    *아름다운 육체를 위해서는 쾌락이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해서는 고난이 있다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고난 당하지 않는 다는 것은 연약함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내가 고난을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시기 때문에 나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 양이 양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게 되면, 목자는 개를 시켜 그 양을 찾게 한다. 그것은 그 양을 다시 양떼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지 그 양을 잡아먹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목자도 마찬가지다. 

    *바람은 배를 뒤엎는 무서운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배를 전진시키는 원동력도 된다. 어려운 사건과 고통은 바람과 같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파멸의 원인도 될 수 있고 도약의 에너지도 될 수 있다. 고통은 악이 아니다. 고통 중에 기도는 쉬우나 고통 중에 찬양하는 것은 더욱 위대한 신앙이다. 

댓글 0 ...

분류  제목  등록일 
분류 없음 2012.12.27
분류 없음 2013.01.08
분류 없음 2013.01.09
분류 없음 2013.01.24
분류 없음 2013.01.26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