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시고(마27:11-26)
  • 2013.06.03 21:12:41
  • 예수님은 밤새도록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이 될 정도로 진액을 쏟으시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쓴잔을 마시는 일에 대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기도 없이는 마실 수 없는 잔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권하는 장면을 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미 주님은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이미 생각하셨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미 당신의 때가 이른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마치 올리브 열매를 기름 짜는 틀에 넣어 으스러뜨려서 기름을 짜듯이 주님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이미 예수님의 생애 그 자체가 고난이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고난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빌2:5이하에서 그리스도의 비하(Exinanitio, Humiliation)되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데, 하나님이 사람되시는 그 자체가 고난이시며, 사람으로 또 종이 된다는 것 그 자체가 고난이셨습니다. 서양 격언에 "생이 시작하는 곳에 위기도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한말 같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헤롯의 칼날을 피하여 어린 아기 예수는 애굽으로 피난 가셔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아주 강원도 산골 같은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공중에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대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고난의 시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는 자체가 고난이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님의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1. 십자가는 고난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검과 몽치를 가진 자들에게 체포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전에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으시고, 다시 그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가 문책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가야바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이유를 유대인들에게 설명 할 때에 "한사람이 백성들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말했던 자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너만 없어지면 다 편하게 될 것"이라는 음흉스러운 궤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불법 재판하는 그들에 대해서 묵비권을 행사하시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이미 예수님은 수많은 폭행을 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마26:66,67)

    결국 사형 집행권이 없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어다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법에 의한 처형을 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죄명은 반란주모 죄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 죄를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를 위협까지 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요구하였습니다.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인 예수를 처형하지 않으면 가이사에 대한 충신이 아니라고 윽박질렀습니다.(요19:12)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여러 각도에서 심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도무지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놓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위협에 무릎을 꿇고 만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에 충신이 아니라"는 말 때문입니다.(요19:12) 더욱이 이 사건에 자기가 연루되어 자기의 정적들이 황제 앞에서 자기를 모함할까봐 염려한 나머지 빌라도는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형하기로 결정한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빌라도의 이름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수록됨으로써 수세기에  걸쳐 악명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Ⅱ. 우리의 죄값으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사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갈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형 법이란 로마를 위시해서 고대 사회 속에서 흔히 있었습니다만 노예를 처형 할 때나, 국가에 대한 반역자들에게 시행되며 로마인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잔인한 사형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하하셔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악의 고난인 죽음까지 받으시고, 죽음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고통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만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고 한 후에 곧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예수님의 고난의 역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탄생하시자 말자 바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태어나신 후에 하루도 안 사신 것처럼 곧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넘어 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생애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네브 신앙 문답에서는 "구속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만 언급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꼭 그 잔인한 십자가의 무서운 고난이어야 했는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절대 주권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 같은 무서운 고난의 과정 없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같은 극한 고난을 통해서 범죄 하여 멸망하게 된 인생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라고 하는 고난의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평화를 원하고 안정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난스럽게 태어났고, 그것도 남을 고통스럽게 한 후에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세상에 태어  날 때에 우리의 어머니들이 해산의 고통을 겪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와 인간의 법칙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만민을 대속하셨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범죄한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창2:17, 롬6:23) 이와 같이 죽어야 할 사람을 위해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야 했고, 사람이 되셔야만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만 그런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 "엘리 엘리를 찾으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사람들은 예수님이 너무나 아프시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쇠못이 양손과 발에 사정없이 뚫고 들어 올 때도 잠잠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옷을 벗기고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릴 때도 참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미 십자가에 세시간이나 달려 계신 분이 갑자기 아프셨겠습니까?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소리를 지르시겠습니까?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지옥의 저주를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고난 중에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와 실망과 고통의 십자가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와 소망과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지옥의 고통이 두렵고 괴로워 아바 아버지를 찾으나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만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이루신 이 놀라운 역사는 영원 불멸의 능력이요, 가치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다 구속하시고도 남는 보혈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보혈의 강물은 예루살렘을 적셨고, 온 유다를 적시었으며, 사마리아와 유럽과 아메리카를 적시었습니다. 그리고도 흘러 넘쳐 아시아를 적셨으며, 그 보혈이 강물이 되어 아프리카를 향하여 구원의 강물 되어 지금 도 멈출 줄 모르고, 모자람 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를 한바퀴 돌고 온 세상에 복음이 증거 될 때에, 우리가 꿈에도 그리던 주님이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이미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Ⅲ.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빌라도입니다.

    개혁자 루터는 말하기를 우리 성도들이 매일 아침, 또는 매주일 주기도문을 생각 없이 하기 때문에 "주기도문은 최대의 순교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라도는 인간 역사상 최대의 저주받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사도신경은 전세계 모든 방언으로 번역되어서 전세계 모든 성도들이 주일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암송합니다. 빌라도는 주님을 죽이는 총 책임자로 죽어서도 저주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신경은 짧은 신앙고백 문입니다. 그런 신앙고백에 빌라도의 이름을 넣은 것은 "역사적 정확성을 기하기 위함이라고 칼빈은 해석했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부단히 노력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까지 하면서 형 집행을 피해 보려고 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가롯 유다요, 유대인이며,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이었으나 거기에 빌라도가 들어 간 것은 법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빌라도는 A. D 26-37년 사이에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아내를 데리고 살았는데 그는 까울 지방의 여자인데 그 이름은 프로쿨라(Claudia Procla)라고 하는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숨은 제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보고서에 보면 그녀는 장래의 운명을 내다보는 여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빌라도를 찾아와 발 앞에 엎드려 울면서 "저 사람, 예수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애원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무서운 꿈을 꾼 듯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세 번씩이나 선고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 간에는 빌라도에 대해서 어떤 이는 관대했습니다. 동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미움으로 증오했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빌라도는 악인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사도신경에까지 나타나 역사적인 저주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과잉된 충성심과 둘째는 식민지 유대인의 환심을 잃지 않으려고 한 것과 셋째는 어진 아내의 바른 충고를 거절한 실수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육신 적인 명예와 권세를 누리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 준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빌라도에게 국한 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시대에도 명예욕 때문에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환심을 위해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까?  나의 좋은 동역자이며, 돕는 베필의 충고를 일축하여 불행을 자초하는 남편들은 없습니까? 이런 증상들이 바로 빌라도 증후군들입니다. 우리는 이 경고를 소홀히 여기면 안되겠습니다. 정치 지도자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을 때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 경제가 위기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정치인이나 주지 않으면 찍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철없는 유권자들이 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정신을 차리고 깨끗하고 진실한 일군을 선출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사순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경건과 절제의 삶을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동안 대개 자신이 평소 즐기는 것들을 삼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평소에 죄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을 이 기간 동안에 삼가고, 끊으면서까지 사순절의 의미를 되새긴다고 합니다. 올해의 4.13 총선은 바로 사순절 기간동안 치러지게 됩니다.  시민단체들이 들고일어나 낙천운동,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정치인들은 마이동풍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정치인들만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 땅에 1200만을 헤아린다는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사순절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며 깨끗하고 진실한 일군을 선출해야 하겠습니다. 

    Ⅳ.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의 형벌입니다. 

    24절입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성난 이리 떼처럼 아우성을 치는 유대인들을 향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대야에 물을 가져다 손을 씻으며 자기는 이 무고하게 흘린 피에 대하여 상관없으니 너희가 당하라고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이구 동성으로 말합니다. 25절입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무서운 말을 무서운 줄 모르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죽음에 대하여 자기들이 책임을 지며 그 형벌을 자기와 후손이 받겠다는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통하여 그 형벌은 말한 대로 그 자손에게도 임하였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채 못되었을 때에 예루살렘에 로마의 티도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성전은 주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덧놓임 없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포위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근, 질병, 그리고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러 내렸습니다. 요세프스는 예루살렘 성을 태우는 불빛은 대낮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역시 십자가에 반역죄인의 누명을 쓰고 죽어 넘어졌습니다. 티도는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을 건축하기 위해 유다에서 십만 명을 노예로 잡아와서 8년간 건축하였고 그 과정에서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요세프스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십자가를 쌓아 둘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도 부족해서 유대인들은 근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유리 방황하며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고, 히틀러 정권 하에서 애꿎은 유대인 6백만이 가스실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들도 이것을 예수 죽인 조상의 죄값을 받는 것이라고 통곡하고 시인하였습니다. 그 누가 이것을 예수 죽인 피값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배반하면 안됩니다. 멸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면 안됩니다. 믿는 이들을 괴롭게 해서도 안됩니다. 주의 말씀을 농담으로 알아서도 안됩니다. 주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는  예수 팔은 것이 양심에 심한 가책이 되어 목을 메여 자살을 하였다가 떨어지면서 배가 터지고 창자가 흘러 나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전설에 의하면 그후에 사마리아인을 대량 학살한 실정으로 파면 당한 후에 정신 착란 증세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의 시체를 빌라도의 못이라는 연못에 던졌는데 마귀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였다는 전설까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으면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시고 저주의 나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저주 받으셨기에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참 평안과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찾아 응징하십니다. 가롯 유다라도, 빌라도 라도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절치 않고 주를 모시고 힘있게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댓글 0 ...

분류  제목  등록일 
분류 없음 2012.12.27
분류 없음 2013.01.08
분류 없음 2013.01.09
분류 없음 2013.01.24
분류 없음 2013.01.26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분류 없음 2013.02.07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