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마27:15-26)
  • 2013.06.03 21:16:44
  •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간이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고난 주간을 당하여 유월절 만찬으로부터 골고다 언덕까지의 주님의 발자취를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유월절 축제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류살렘 입성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그분은 나귀를 타시고 들어 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분에 평소에도 나귀를 타시고 전도하러 다니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베레아로, 가버나움으로 전도하러 가실 때에 나귀를 타시고 가셨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몇 차례 예루살렘에 방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물론 걸어 가셨습니다. 전혀 성경에 그런 근거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이미 스가랴 선지자는 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 타시고 입성하실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입성을 축하하며 기쁨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고 길에다 깔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의 잔등에 덮고 예수님을 타시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겉옷을 벗어서 길에다 깔고 예수님이 밟고 지나가시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개선 장군의 환영식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마카비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도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면서 영접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고 옷을 벗어서 깔고 편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예식인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에 바리새인 중에 어떤 이는 분개해서 제자들을 책망해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40)라고 하셨습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자들이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돌들이 우리 대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최후의 만찬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유월절 무교병을 가운데 놓고 제자들이 둘러앉았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 분위기는 거의 말이 없었습니다. 그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일어서십니다. 그리고 자기의 겉옷을 벗어 옆에 놓고 수건과 띠를 두르십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다 허리를 숙인 채 그들의 발을 닦아  주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거룩한 분이 이 같은 행동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제자들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만도 누가 더 높으냐 라는 문제를 가지고 다투던 것이 부끄러웠을까?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발을 씻겨 나가시던 중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사양하는 바람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 씻기시는 일이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발을 움츠렸을 것입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시지 못하십니다."라고 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누가 스스로 씻음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씻겨 주시지 않으면 영영히 그는 죄인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을 씻어 주셔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특유의 몸짓으로 하는 말이 "주여 나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라고 놀란 토끼 모양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미 이때에도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예측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3:14,15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당하심
    그리고 곧장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하신 후에 가롯 유다를 앞세운 병정들에게 체포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체포당하심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죄수가 경찰에게 어쩔 수 없이 체포당하시는 것을 연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준비하고 기다리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예수님은 그 밤으로 체포되셔서 안나스에게! 빌라도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다시 빌라도에게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신문을 받으셨습니다. 이 날이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빌라도의 아내 클라우디아 프로쿨라(Claudia Procla)의 간곡한 만류로 십자가형만은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악화 될 때로 악화되었고, 그는 심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심
    빌라도는 나름대로 묘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만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그 전례를 이용하면 되겠다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완악해도 흉악한 강도보다는 예수를 택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지르기를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굶주린 이리 떼 같았습니다. 빌라도는 점점 미궁으로 자기가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이것은 마치 신음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일제히 사방에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해 주시오 십자가에 못 박게 해 주시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군중들의 모습은 빌라도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옥의 모든 유령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것 같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우유부단한 빌라도
     결국 빌라도는 그 사람 예수가 옳은 줄은 아나 자기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폭동이 일어 날 것 같은 위기 의식 때문에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는 실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몇 일전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겉옷을 땅에 펴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바로 얼마 전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대환영을 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바로 얼마 전에 그 입으로 당신이 최고요, 훌륭하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이시군 요,."하면서 예수님을 향하여 찬송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몇일 사이에 마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빌라도가 재판하여 보아도 악한 일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지옥의 악마처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못박으시오.!" 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요2:23에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예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랴라고 하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 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인생을 봅니다. 빌라도는 심문하여 보아도 그에게 죄를 찾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을 받을 만한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로마가 그에게 준 직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무죄 방면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 예수를 놓으면 가이사에게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무서워 죄없는 예수를 놓고 고민에 빠진 사람입니다. "내가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 라고 고민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총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흉악한 강도 바라바는 놓아주고 죄없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마땅히 의로운 편에 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두려워 불의의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성을 잃고 외치는 백성들의 소리만 들은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해답 앞에서 홀로 고민하는 빌라도! "내가 이 예수를 어떻게 하랴"라고 하면서 사람을 두려워했던 빌라도 같은 죄를 범하면 안되겠습니다. 갈1:18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한 바울과 같이 분명한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말고 우리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져 넣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내어 준 최종 결정자가 된 것입니다. 

    수치와 조롱을 당하신 예수
     이렇게 십자가형은 결정되고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이 희롱은 가혹한 장난(Cruel sport)이라고 합니다. 야만인들을 가지고 노는 문화인들의 장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장난으로 생각하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모욕이요, 수치요, 아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옷벗김을 당하셨습니다. 벌거벗음은 수치이며 모욕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의 수치를 가리워 주시려고 당신의 피묻은 옷자락으로 우리의 수치와 허물을 가리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의의 흰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벌거벗은 몸에 홍포를 입혔습니다. 이것은 자색 옷이라고 합니다. 홍포는 왕이나 황제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 납이나 뼈 조각을 달아 침으로 이 채찍에 맞다 죽는 죄수들도 있었답니다. 이사야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리고 그 지친 몸의 머리에 가시로 역은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홍포를 입히고 금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난받으신 그분이 인류의 영원한 구세주이십니다. 

    그 앞에 군병들이 경배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갈대를 툭툭 치면서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하면서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모욕이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을 뿐이었습니다.  온갖 곤난과 조롱과 멸시를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는가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려주면서 홀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홀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빌라도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장차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의 영원한 나라에 초청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
    예수님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셨습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말입니다. 가련하고 연약한 몸위에 통나무 십자가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려 열 네번씩이나 쓰러졌습니다. 오늘도 그 길을 수많은 순례객들이 올라가면서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배우고 있습니다. 그 길을 이름하여 비하돌로롯사(Via dolorossa), 즉 고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도 나중에는 견디시지 못하고 모처럼 예루살렘 구경을 올라 왔던 아프리카 동편 도시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져 주어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습니다. 비록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지만 그의 아들이 주의 종이 되어 복음의 일군으로 쓰임 받고 성경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좌우 편에 두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갈보리 산 위에 세 십자가가 섰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 때에 열두 시쯤부터 세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어두워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며 영혼이 떠나가실 때에 고가 18m나 되는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어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히10:19-20)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며,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지키던 백부장은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둔 시각은 오후 세시였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지내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사흘 낮밤을 계셨습니다. 나와 여러분의 죄를 짊어지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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