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한 인생 가룟유다(마27: 3∼10)
  • 2013.06.03 21:25:47
  •  사순절기간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일생을 한번 간단하게 묵상해 봅니다.  태어나심 
    부터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는 장면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그렇 
    게 구차할 수가 없는 상황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서 만민의 구주로 오시는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참으로 구차하게 생각하는 마구 
    간에서 아주 초라하게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생이라야 33년 밖에 안되는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은 짧고 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생 
    은 아주 짧기는 했으나 굵기는커녕 얼마나 초라했는지 모릅니다. 
       참새도 제 집이 있고 제비도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건만 나는 오늘밤 머리 둘 곳조 
    차 없구나  이 말씀 한마디는 예수님의 일생이 얼마나 볼품없었는가를 보여주는 모습 
    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죽으실 때의 모습 또한 얼마나 수치스럽게 일생을 마치셨는지 
    모릅니다.  강도들 틈에서 죽으셨고, 죽은 다음에도 묻힐 곳이 없어 남의 무덤에 묻히 
    셔야 하셨던 분이십니다.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우리 구주 예수께서 이 땅의 사람들로 받은 대접이었 
    습니다. 
      하지만 더 비참하고 더 큰 수모는 뭐니 뭐니해도 제자로부터 배신당하는 일인 
    것입니다.  배신 가운데 가장 큰 배신은 제자가 스승을 팔아먹는 일이며 스승으로서 
    는 가장 큰 수모일 것입니다. 
      보세요! 
      부하로부터 당하는 배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신생로마제국 당시 케사르는 그의 
    가장 신임하는 신복 브루트스에게 B.C 44년 3월 15일 암살 당합니다.  그때에 케사 
    르는 (브루트스여!  너마저!)라고 외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3공화국과 5공화국의 역사도 별2개의 장군이 쿠데타로 상관들을 잡아 
    놓고 정권을 잡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로부터 배신당하신 예수님.  그것도 배신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이 사실로 보아 예수님의 짧은 일생은 참으로 기구하다는 느낌 
    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이 성경에 짧게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가룟유다의 일 
    생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인생 이었 
    습니다. 
      무슨 기막힌 일생을 살려고 그래 스승을 팔아먹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스승을 팔 
    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흔히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는 일, 그리고 남편과 아내를 잘 만나는 일과 스승 
    잘 만나는 일이 기본적인 인생의 성공의 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룟유다는 실로 스승을 잘 만남으로 해서 그의 인생이 능히 변할 수 있 
    는 상황이었고 잘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길래 선생을 다 팔아먹을까?  그리고 그 결과로 주어 
    진 것이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원래 당시에 신분상으로는 형편으로는 최고의 엘리트에 속한 사람이었 
    습니다.  욕망도 있고 야심도 있었으며 꿈도 있던 청년으로서 다른 예수님의 제자 
    들에 비하면 여러 가지 인간적인 면에서 월등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스스로 예수를 찾아와 제자가 된 사랑이었습니다.  당시 예수께서 행하신 모 
    습은 분명 유다가 생각하기에 희망 없는 이스라엘나라에 혁명적인 분으로 그리고 나 
    라의 새로운 지도자가 능히 될 수 있는 분으로 믿고 한자리 차지할 줄로 생각하였습 
    니다.  그래서 고향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용기 있는 젊은 사람입니다. 
      젊은이에게는 이 같은 꿈과 야심이 있어야하고 희망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그만 그 야심이 잘못 사용되고 그 꿈이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꿈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스승을 파고 배신함으로 그에게는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유다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되 
    었고, 그 불명예는 당대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종말의 날까지 없어지지 않는 치욕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뭐가 되겠습니까?  사람은 무엇보다도 명예가 있어야 합니다.   
    명예를 잃어버리고 잘 살고 잘 먹으면 무엇합니까? 
      사람은 명예가 땅에 떨어지면 그 때부터 숨어 지내게 됩니다.  마음껏 거리를 활보 
    할 수 있는 용기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죽은목숨과 다를 게 없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가룟유다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가룟유다가 잃어버린 명예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유다의 이름은 가룟유다라고 하는데 가룟이라는 말은 유다의 고향입니다.  남쪽지방 
    사람입니다.  당시에 유다라는 이름이 예수님 주변에 많았기에 반드시 이 유다를 말 
    할 때는  가룟유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가룟유다 라는 이름하면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스승을 팔아버린  배 
    신자 입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이름의 명예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가룟유다도 그 부모들에게는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겠습니까?  부모가 아들 낳고 그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그를 
    찬미하라 는 이름의 뜻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부모의 기대와 희망 속에 성장합니다.  부모들에게는 꿈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유 
    다가 성장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부모와 고향을 떠나려 했을 때 그 부모들이 
    얼마나 기대를 했겠습니까?  크게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부모들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성경에서 보면 참 불명예스러운 세 사람이 있는데  가룟유다, 본 
    디오 빌라도, 헤롯  가운데 한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이름이 깨끗하고 명예가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세 사람은 한결같이 
    욕된 인생 그래서 천추에 나쁜 기억으로 이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 
    을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 
    이 나가서 전도할 때 병자가 낫고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집니다.  제자들이 신이 나 
    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전도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께 전도 보고를 합니다.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고 그리고 전도하고 돌아왔다 고 말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이름은 하늘에 기록된 소중한 이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영 
    광입니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불행하게도 그 이름을 들을 때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얼마 
    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서울시내 교회 여집사님 직업은 인기소설가, 작가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려서부터 
    했고 그저 폼나게 하는 것으로 여겼던 집사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제법 명 
    성과 물질을 모으게 되자 그만 더 기고만장해졌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봉사를 
    하세요 하면 바쁘다고 핑계 댑니다. 
      여전도회장님께서 협조를 부탁하면 역시 몹시 바쁘신 몸으로 협조가 안됩니다.  그 
    저 주일 낮 예배 한번 참석해 주는 것이 전부요, 그것도 자기의 명성 때문에 교회가 
    더 빛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는 줄도 모르시던 이 집사님 어 
    느 날 몸에 이상이 생겨서 진찰을 합니다. 
      놀랍게 암으로 진단을 받고 시한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천벽력입니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명성과 물질이 그만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됩니다.  정신을 차리 
    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다시 건강을 주 
    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충성하겠노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남은 생애 제가 무엇을 해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시 
    옵소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집사님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마음으로 오는 성령의 응답이 있는데 그것은 자꾸 마 
    음으로  사랑하라    사랑하라 는 응답이 옵니다.  무슨 뜻일까?  기도하면서 생각 
    하시다가 깨달음이 옵니다.  그래 그 동안 나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 
    해 보자 하고는 이름을 적어봅니다. 
      목사님으로 시작해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적어 가는데 얼마나 많은지 A4용지 2 
    장 분량의 이름이 적혀집니다.  교회 식구들, 집안식구, 일가친척, 세상친구들, 동네 
    이웃들, 이제는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정말 마 
    음에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렇게 교만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던 집사님의 이 놀라운 변화에 그 
    만 교회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온통 이 집사님의 사죄의 눈물을 대하는 교인들마 
    다 함께 손을 붙들고 웁니다.  함께 회개합니다.  교회가 그만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사람의 바른 신앙의 고백과 회개의 눈물이 교회를 변화시킨 놀라운 
    역사를 전해들었습니다. 
      옥합을 깨어 주님께 부었던 성경의 여인을 향해서 예수께서 칭찬하시길 복음이 전 
    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신 말씀처럼 사랑하는 
    그 여집사님의 이름도 주님 오시는 날까지 교회에 길이남아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으로 가룟유다는 죽음조차도 명예롭지 못했습니다.  가룟유다의 출발은 산뜻 
    하고 참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용기와 꿈이 있는 젊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버림으로 십자가에서 죽도록 하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다는 굉장히 후회합니다.  부끄럽고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변했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민망하고 송구합니다.  결국 목을 매서 죽고 맙니다.   
     그 사람 자살했다   그것도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먹고는 자살했다  도대체 불명 
    예스러운 죽음입니다. 
      기독교 윤리로 보면 자살은 타살과 맞먹는 범죄입니다.  즉 자살자는 살인자와 똑같은 
    죄목에 속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나라 전 
    통 유교에서는 머리카락 하나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람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자살을 합니다.  조금 살기가 힘들고 
    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쉽게 자살합니다.  실연을 당해 죽어버리고, 시어 
    머니가 보기 싫어서 자살하고, 아이 못 낳아서 죽어버리고, 남편과 싸우다 약 먹고 죽 
    어버리고, 어머니에게 꾸중듣고, 성적이 나쁘고, 입시에 낙방하고 그러면 옥상으로 올 
    라가서 뛰어내려 죽습니다. 
      작년 한해 IMF로 인한 기업 도산, 직장에서의 실직으로 인해서 파괴된 가정과 자살 
    한 가장들의 수효가 실로 엄청나게 많은 한해였습니다.  인명경시 풍조가 너무 많이 
    만연되어 있어 안타깝습니다. 
      사람은 마지막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어떻게 마지막을 마쳤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의 죽음이야 누군들 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기록된 사실이나 기독교 역 
    사를 보면 남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도 계시고 같은 죽음일지라도 순교의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죽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차피 죽는 인생입니다.  멋 
    진 이름을 남기시길 축원합니다. 
       
      스데반은 비록 돌에 맞아 순교했지만 그 죽어가던 모습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엄청난 용기와 강한 인상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핍 
    박자 사울이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평소에 실수를 많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그 모든 실 
    수를 한번에 만회라도 하듯 십자가에 거꾸로 지고 순교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지신 
    십자가를 자기 같은 죄인이 어떻게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자중 한사람인 가룟유다는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림으로 자살 
    이라는 불명예를 가지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나무에 목을 맺는데 그만 줄이 끊어져서 곤두박질해서  배가 터져서 창자가 다 
    흩어졌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 
    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잘 죽어야합니다.  모양새 있게 죽어야 하고 명분 있게 죽어 
    야 하고 고상하게 죽어야합니다.  사람은 죽음의 모습에 따라서 그 인생과 믿음이 
    새롭게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3월 2째주 지난 토요일에 주무시는 듯이 하나 
    님께서 생명 거두어 가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룟유다가 남긴 유산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지 모릅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은 삼십입니다.  은 30세겔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은 한 세겔은 4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다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오늘날 가치로 따지면 한 데나리온은 약 18센트(230원)입니다. 
      요즈음 노동자 하루 임금이 쉽게 5만원으로 계산하면 은 한세겔은 노동자 4일 품삯 
    에 해당하니까 약 600만원에 해당합니다. 
      이 금액은 당시 황소가 노예를 받아서 죽이면 배상해 주는 노예 한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스승 예수를 배반하고 팔아서 팔자를 좀 고치려고 했다면 600만 
    원에는 한 만배쯤 더해서 한 6천억쯤 받았다는 소리나 듣지 그래 고작 자기 스승의 
    값을 고작 600만원에 팔고 자살할게 뭡니까? 
       
      공무원들의 영원한 숙제 뇌물과 상납 비리문제를 보면 참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명예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어쩌자고 돈 몇 푼에 그 멋진 명예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는지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본인은 그랬다 하더라도 그 가족과 그 형제들은  또 무슨 꼴입니까? 
       
      가룟유다 그렇게 용기와 꿈과 야심의 청년이 참 한심하게 변했습니다.  고작 노예 
    한사람 몸값에 자기 스승을 팔았으니 말입니다.  얼마나 쩨쩨한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이요 쩨쩨하면 예수 믿는 모습도 쩨쩨할 수밖에 없습 
    니다.  믿음이 쩨쩨하면 그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한번 멋지게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더구나 어떻게 피를 흘려서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멋지게 믿음 
    의 부자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가룟유다는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스승을 팔아먹는 것이 후회가 되어 그 돈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그 돈을 반환합니다.   나는 이 돈을 못 받겠으니 다시 
    받으라  그러자 제사장들이 거절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그 돈을 집어던지고 돌아와 
    서 목을 매어 자살합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돈을 주워 다가 땅을 사서 가룟유다의 묘지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땅을  아켈다마  즉  피밭 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룟유다는 스승 
    을 팔아서 받은 은 30으로 산 묘지에 묻혔습니다.  이게 가룟유다의 일생입니다. 
      여러분!  스승을 팔아서 죽게 하고 그리고 받은 돈으로 잘 살수 있으리라 생각하십 
    니까? 
      사람은 그래서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합니다.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 좋다 
    고 나만을 위해서 살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오늘 하루가 좋고 신난다고 오늘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 또한 아닙 
    니다.  적어도 우리 인생과 신앙은 먼 훗날의 아름다운 평가를 위해서 오늘을 살 
    아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서 살다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스스 
    로 인생을 포기한 실패의 인생의 모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바른 삶을 살아야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지금까지 실패한 삶과 신앙의 
    시간들이 있었다면 다 십자가에 내려놓고 새롭게 거듭 마음을 바로잡고 말씀으로 승 
    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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