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의 매력(마18:1-6)
  • 조회 수: 181, 2013.05.24 07:27:36
  • 유태인의 속담 가운데는 [오른 손으로 아이를 벌주면 왼손으로는 안아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유태인들이 자녀를 교육시키는 중요한 원칙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매를 댈 일이 없을 만큼 말을 잘 듣고 얌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어머니들은 매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칩니다.   매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바로 [침묵]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린이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벌은 엄마 아빠의 침묵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일단 부모는 그 아이를 불러서 주의를 주게 됩니다.  주의를 주어도 되지 않으면 야단을 치지 않고 일단 그 아이를 품에 아주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꽉 껴안아서 엄마의 힘이 아이에게 전달되도록 끌어안습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이번에는 아이의 손목을 꽉 움켜쥐어서 엄마의 힘이 아이에게 전달되도록 한다고 합니다.  엄마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 힘으로 너를 강제적으로 다룰 수가 있다는 경고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부모가 힘이 아니라 [침묵]을 가장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힘을 사용하는 방법보다 [침묵]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하도록 교육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못을 반성하거나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그 아이를 일정한 공간에 격리시켜 놓고 일체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대 때리는 것은 잠시의 아픔이기 때문에 잠깐 견디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종일 침묵 속에서 생활한다고 하는 것은 부모나 아이 모두에게 힘들고 두려운 시간이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부터 심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침묵은 엄마와 아이가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침묵을 통해서 엄마도 일시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부모의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고 자라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투정하지 않으며 또 부모가 야단을 치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야단치고 나면 반드시 해가 떨어져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꼭 그 아이를 품에 안아준다고 합니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는 최고의 표현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반드시 벌에는 애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표현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제대로 올바르게 교육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의 고민은 내 자녀가 바로 교육받아서 잘 성장할 때는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고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고슴도치는 볼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고슴도치 새끼는 꼭 밤송이 같아서 정말 볼 것이 없는데 그래도 어미는 제 새끼가 예쁘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 미워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예뻐 죽겠는데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 조그만 관심을 보이면 부모는 그 자식들을 보면서 얼마나 대견하고 예쁘게 생각합니까?   부모는 그저 감동에 사는 사람들이라 제 자식들이 조금만 잘하면 그냥 감동을 합니다.  
      아직 학교를 가지 않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 같으면 자기 자녀들은 혹시 천재가 아닌가? 하고 기뻐합니다.  한 3-6살 때까지는 보통 아이들은 외우는 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 우리 아이는요, 머리가 좋은가 봐요!  한번 읽으면 동화책을 줄줄 외워버립니다] 하고 자랑합니다.  어릴 때 그 모습 그대로 성장하면 이 땅 위에는 수재들로 가득차 있을 터인데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면 어릴 때 그 많은 수재들이 커서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릴 때 부모에게 사탕 하나를 입에 물어주어도 그 아이가 커서 모두 효자가 될 것처럼 자랑을 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효자가 될 것 같은 자식들은 다 어디 가고 이 시대는 점점 어른들을 공경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는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가 그 자식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 만큼 부모는 자녀들을 기쁨으로 보고 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을 키우는데 1년 365일 매일 그런 기쁨 속에서 기르면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그 아이들에게서 인간의 죄성이 드러나게 될 때 부모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를 놓고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아이들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의 모습을 나타낼 때 그 아이를 어떻게 지도하고 교육하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주 어릴때에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부모는 별로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조금씩 성장을 하게되면 그때에는 인간의 본능과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고집 피우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황소고집이예요.  체면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누워버리는 아이들도 있잖아요.  또 욕심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물건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를 않습니다.  어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아주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아이들은 다른 친구들을 왕따시키는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죄성의 모습들입니다.  

      윌리엄 골딩이라는 작가는 그의 소설 [파리대왕]에서 바로 이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남태평양의 외딴 무인도를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한 무인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여행을 가던 한 떼의 소년들이 불시착을 하게 됩니다.  이 어린이들은 이제 문명의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무인도에서 고립된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영국의 국회를 모방하여 가장 민주적인 결정 방법을 통해서 그 어린이들 중에서 지도자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규율을 정하여서 그 규율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나 전체의 어린이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두 패로 나뉘어 지게 되고 두 패의 지도자들은 권력싸움을 하게 됩니다.  힘이 커진 그룹이 힘이 없는 그룹을 위협하게 됩니다.  힘이 있는 그룹은 동물을 잡아서 창으로 찌르면서 마치 식인종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잔인한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순수해야할 어린생명에게 있는 인간의 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물을 찌르고 위협하던 어린이들은 이제 무인도의 공포를 잊기 위해서 속죄양을 만들게 됩니다.   자신들의 공포를 잊기 위해서 소년의 무리들 중에서 가장 힘이 없는 뚱뚱이 소년 하나를 잔인하게 돌로 쳐서 죽이고 맙니다.  그 뚱뚱이 소년은 여러 소년들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판단력이 뛰어난 아이였는데 결국 다수의 힘을 갖고 있는 소년의 무리들이 뚱뚱이 소년을 죽이게 됨으로써 과연 인간의 구원이란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더욱 거칠어진 다수의 집단들은 상대방의 지도자를 따라가서 창을 들어서 막 죽이려고 하는 순간에 그 섬에 온 구조대에 의해서 무인도로부터 구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무서운 원죄적 본능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린이들에게도 인간의 본능적인 죄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인도에 유배된 아이들에게 누가 살인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두 집단으로 패를 갈라서 권력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 권력싸움에서 결국은 그 집단 중에서 가장 똑똑한 자신의 동료를 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지도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인간에게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원죄적 본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어린아이에게서도 인간의 죄성을 보고 지적을 한 것처럼 인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여러분 원죄를 인정하십니까?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분 긍정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부정적인 죄인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죄성으로 부터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어릴 때부터 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은 영영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죄성과 부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요?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죄성으로 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골딩이 폭로한 인간의 죄성과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인간이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이 주어질 때 인간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원죄와 부정적인 인간의 모습으로부터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모습을 빌립보서 2: 7-8절에서는 [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부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어린아이와 동일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서 어린아이와 동일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어린이와 같이 동일하게 생각함으로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스스로 낮아지셔서 세상 가운데 오셨고 자신의 모습을 바로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에게 있는 부정적인 죄의 모습을 강조하시지 않고 어린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위선 속에서 살고 있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어린이들과 같이 낮아지고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교만한 위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있는 가운데 세워두고 말씀하시기를 이 어린아이와 같은 낮아지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매력은 낮아진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처럼 과장하거나, 부풀리거나, 포장할 줄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상대하려면 그들의 눈높이로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져야 어린이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또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습니다.  
     어제 잠깐 시간을 내어서 저희 집 뒤에 있는 산을 산책했습니다.  산을 막 올라가니까 산 위에 있는 평지 공간에서 어린이 두 명이 자기 어머니와 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그대로 따라서 흉내를 내는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앞에서 재미있는 모양의 몸짓을 하면 아이들이 어머니가 하는 대로 흉내를 내면서 재미있게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 어머니는 분명히 어린이였습니다.  어른이었지만 자기 자녀들을 위해서 기꺼이 어린이가 되어준 것이었습니다.   어린이와 같아지지 않고는 그 어린이들을 상대로 놀아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스스로 어린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들의 기쁨을 위해서 그 어머니는 스스로 낮아져서 어린이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어린이와 동일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인간 수준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스로 겸손하게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낮아지심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부터 파생하는 고통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 고통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그 죄의 현장을 체험하기 위해서 하늘의 거룩한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아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에게서 낮아짐과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죄성을 지니고 있는 어린이들이지만 예수님은 그 죄성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어린이의 매력을 강조하셨습니다.  조금 있다고 교만하고, 조금 배웠다고 우쭐거리고, 조금 권력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우습게 보고,  남보다 조금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잘난 체 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하시고 오직 겸손하고 낮아진 매력을 지니고 있는 어린이들을 내세우시면서 바로 이 어린이와 같이 낮아지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높임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이의 매력은 바로 낮아짐에 있습니다.  겸손함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천국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좋은 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 가운데에는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낮아지고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이와 같은 매력을 갖고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좋은 신앙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서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씀하심으로 겸손함과 낮아지심을 손수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겸손함과 낮아지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시고 겸손해져서 이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고 칭찬 받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배부름 
    주님!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비우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낮아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옵소서. 
    이 예배를 드림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하고 낮아지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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