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적인 자녀교육(엡 6 : 1 - 3)
  • 조회 수: 24, 2013.07.20 21:11:43
  • 서구 교육을 말할 때 보통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미국식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식 교육입니다. 유럽식 교육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영국식 교육을 듭니다. 미국식 교육과 영국식 교육에 있어 가장 큰 차이를 말한다면 매를 드느냐 안 드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국식 교육은 매를 드는 교육이었고 미국식 교육은 매를 들지 않는 교육이었습니다. 영국의 교육도 많이 변하여 지금은 학교에서 선생이 매를 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는 체벌이 가능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과거 엄했던 영국 교육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국식 교육은 교복을 입히고 매를 드는 엄한 쪽을 갔습니다. 이 교육 방식을 일본이 그대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36년 동안 지배하였을 때 그 방식을 우리나라에 도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 교복을 입었고, 선생님한테 종종 매를 맞으며 공부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는 교복을 안 입었지만 다시 교복을 입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금지되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생이 매를 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교육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영국식 교육의 모습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식 교육에 반하여 미국식 교육은 자유롭게 풀어 놓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미국식 교육이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지금 미국의 공립 학교는 아이들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해져 있습니다. 권위와 질서는 없어지고 폭력과 죄악이 난무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학교에 더 이상 맡길 수 없다고 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약 25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공립 학교의 큰 문제는 학생들이 공부 시간에 껌을 씹는 것, 옆에 있는 학생과 소곤, 소곤거리는 것, 복도에서 뛰어 노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학교 내에서 성폭행, 마약 복용, 총기 휴대, 강도, 살인과 같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마약을 거래하고 복용하는 문제는 공립 학교에서 최대의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약을 복용하거나 복용한 경험이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영국은 아직 미국처럼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물론 영국의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약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영국에서 교육을 시키고 있지만 우리가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미국처럼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교육이 아직은 믿을 만하다고 여겨졌는지 마돈나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가수이면서 배우인 여자는 자기의 아이를 미국이 아닌 영국 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교육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이 자유로운 교육 방식을 선택한데는 영국 교육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이 작용을 했습니다. 이민 초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대부분 유럽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간 유럽 사람들은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교육 풍토에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교육은 매우 엄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이조 시대와 같았습니다. 교육에 굉장한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매를 때리는 것이나 벌을 주는 것은 선생이 학생에게 당연히 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영화나 책들을 보면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시대 교육이 얼마나 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소공녀라는 소설을 보면 당시 기숙사 생활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실감을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교육은 냉혹함, 권위 주의, 융통성이 없는 경직성 등이 지배했습니다. 이런 억압된 분위기에서 배우고 자란 사람들이 각계 각층에 들어가 일을 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엄격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의 건국 시조가 누구입니까?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 사람들이 아닙니까? 미국에 건너간 이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자유를 얻기 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 방식에도 자유로워지기를 바랬습니다. 옷 입는 것, 식사하는 것, 말하는 것, 예의 범절 등 딱딱하고 억제된 영국 방식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괜찮아”로 통했고,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놔 두자”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약 2백년이 흐르다 보니 미국은 자유 분방한 나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미국에 사는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형편없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종 텔레비젼을 통해 미국 영화를 보면 그곳의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의 행동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건 학교가 아니고 무슨 깡패 집단들의 소굴인 것처럼 착각할 때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난 해 4월 제자 훈련 세미나에 참석차 미국 LA에 갔을 때 등교하는 청소년들의 외모를 유심히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에 나오는 것이나 별로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영화에 나오는 것들이 사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제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녀 교육을 잘 못 시켰기 때문에 거두어 드린 열매입니다.

     

    이것은 비단 미국 문제만이 아닙니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불은 이제 우리나라에도 번졌습니다. 미국의 자유 분방한 생활 방식은 불과 일, 이 십년 만에 우리나라를 물들게 하였습니다. 과거 우리도 일본을 통해 전통적이고 억압되고 경직된 권위 아래서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선생이 학생에게,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선생이나 부모의 말을 권위 있게 받아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학생이 선생을, 자녀가 부모를, 청소년들이 어른을 존경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부터 이런 좋은 전통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학생이 선생을, 자녀가 부모를, 그리고 청소년들이 어른을 그렇게 존경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과거와 같이 두렵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이제 성장하여 사회에서 각층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된 것의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외국, 특히 미국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호가 개방되자 자유 분방한 미국의 문물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로 인해 영화, 의상, 음악 등의 분야에는 물론 청소년들의 사고 방식, 가치관, 인생관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이라 교육, 정치, 사회, 경제 등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청소년들은 물론 많은 부모님들까지도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소위 “민주주의적”이라는 이름 하에 자녀에게 지나친 권리와 자유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민주주의”라고 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장려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의견이 무조건 수용되고 부모의 올바른 권위가 행사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성경적인 개념과 모순이 됩니다. 성경을 보면 민주주의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부분이 일방적이고 독재적입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독선적입니다. 타협과 양보가 없는 순종만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저가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교육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문제가 바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사 주는 것으로 나타냅니까? 용돈을 충분히 주는 것으로 나타냅니까?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으로 나타냅니까? 물론 이렇게 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무엇보다 올바르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르게 교육시키는 것입니까? 세상의 좋은 교육을 많이 시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좋은 교육도 시켜야 하지만 이보다 앞서 성경 말씀에 입각해서 올바른 인격을 갖추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에 우선 순위가 바뀌면 안됩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것이 있고 다음에 하여야 할 일이 있듯이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교육을 우선적으로 시키고 다음에 세상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고 잘되게 하는 길입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우리가 종종 암송하고 있는 잠언 13장 24절 말씀입니다. 초달은 징계하고 훈련시킨다는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교육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징계하고 훈련시키지 않는 부모는 결국 그 자식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고 하면 자식이 잘못을 했을 때 징계하고 훈련시켜야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자녀를 교육시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4절을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합니다. 첫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둘째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자녀 교육에 대한 대강령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육 방법이요, 하나님의 교육 방법입니다. 이렇게 교육할 때 자녀들이 올바르게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바르게 자라게 될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 되겠습니까?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말은 자녀의 마음 속에 반감을 갖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녀의 마음 속에 원한이나 복수심을 갖게 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이것은 자녀를 나무라지도, 때리지도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녀를 책망하고 때로는 매를 들어 때리더라도 자녀의 마음 속에 반감이나 원한이나 복수심 같은 것을 갖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책망이나 징계를 할 때 자녀가 노여움을 갖게 됩니까? 그것은 자녀가 왜 책망이나 징계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을 모르고 있는데 때리거나 야단을 쳐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반항을 합니다. 이유없이 때린다고 대듭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책망하거나 징계할 때는 반드시 책망이나 징계를 받아야 할 이유나 잘못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기분이 언찮다거나 감정이 상했다고 야단치거나 매를 드는 것은 자녀를 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또는 부모의 변덕스럽거나 신경질적인 성격 때문에 그러는 것도 노하게 만듭니다.

     

    돕슨이라는 교육 상담가가 쓴 글에 이런 재미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어떤 부부가 자녀 둘을 데리고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다섯 살 난 아들이 고함을 지르고 물 컵을 쏟으며 장난을 쳤습니다. 아이들과 식당에 가면 흔히 겪는 일입니다. 아빠가 이것을 보고 조용히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듭 엄하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장난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연속 세 번을 주의를 주었지만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세우고 다리 종아리를 걷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너 지금 아빠가 왜 너를 때리는지 알지?” “예, 알아요.” “내가 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지?” “세 번요.” “너 지금 아빠가 때려도 할 말이 없지?” “예, 아빠” 아빠는 아들의 종아리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아는 아파서 울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옆을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소리를 질리며 달려왔습니다. “아니, 애를 이렇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당장 멈추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어요”하면서 흥분해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울고 있던 아이가 여인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저 아줌마가 왜 저러는 거야.” 아이는 자기가 당연히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뭐라고 하는 아주머니를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자녀를 노하게 만드는 또 한가지 원인은 부모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인격적으로 형편 없이 살면서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자녀를 노엽게 만듭니다. 자신은 주일에 교회를 안 가면서 아이들에게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야단을 친다거나, 자신은 거짓말을 수시로 하면서 어쩌다 자녀가 부모를 속였다고 책망한다거나, 자신은 별별 욕을 다 하면서 자녀가 한 번 욕을 했다고 꾸중을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은 자녀를 충분히 화나게 합니다. 자녀의 눈에 부모가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부모로 비쳤다면 자녀를 엄하게 다룰수록 자녀의 마음 속에는 더욱 분노가 치솟는 것입니다.

     

    돈 밖에 모르는 부모, 자나 깨나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 자녀에게 관심 없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부모, 자녀와 진정한 대화가 끝나버린 부모 등등 이런 부모를 보며 자식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그들이 부모로부터 인격적으로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런 판국에 자식이 돈에만 정신을 판다고 나무랄 수 있을까요? 놀러 만 다닌다고 야단칠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책망할 수 있을까요? 그런 자녀에게 부모는 매를 들 수 없습니다. 부모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말을 듣기를 바랍니까? 그러다가는 오히려 자녀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먼저 자녀를 훈계나 징계를 하기 전 인격과 삶을 통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부모를 신뢰할 수 있고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녀를 때려도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책망을 하더라도 부모를 이해합니다. 야단 맞는 것에 대해 수긍을 합니다. 징계를 달게 받습니다. 그리고 노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치는데 있어 훈계로 하라는 말을 쉽게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교양이라는 말은 좀 어렵습니다. 아마 우리 말로는 적당한 것이 없어서 교양이라는 말을 쓴 것 같습니다. 헬라어의 최고의 연구가 토헨치라는 사람은 교양을 징벌로 해석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자녀가 법과 규칙을 지킬 때는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그것을 범하고 부모의 권위에 도전을 할 때는 징계를 가하는 것, 이것이 교양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을 했을 때 징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즉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근신하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말로 엄하게 책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징벌의 근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에 입각해서 잘못을 지적하며 가르치는 것, 이것이 훈계입니다. 부모의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고집에서 나온 징벌은 자녀의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자녀를 훈계하면 듣지를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그리 어리석지 않습니다. 빤하게 부모의 속마음을 꽤뚤어 보고 있습니다. 내 부모가 지금 올바른 훈계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다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 되기 때문에 자녀를 깨닫게 합니다(딤후3:16). 그러므로 자녀를 훈계할 때는 항상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 교육에 대해 잘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귀여워하는 것을 잘 하시는데 인격적으로 올바르게 가르치는 데는 부족합니다. 어떤 외국 사람이 우리를 보고 가시 돋친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자식을 귀여워할 줄 알면서 왜 제대로 훈련시킬 줄은 모르느냐?” 이 사람의 지적이 옳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이 점이 약합니다. 이것은 아마 우리가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니고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이들이 하도 뛰어 놀며 교회 기물을 파손하고 해서 좀 주의를 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아이의 엄마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말을 못해 기가 죽어 있고 집안에서는 좁아서 잘 놀지도 못하는데 교회에 와서 좀 스트레스를 풀게 해 주는 것이 뭐 그리 나쁘냐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 저는 할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고 귀여워 하는 데는 강합니다. 참으로 좋은 점입니다. 그러나 한편 올바르게 훈련시키는 데는 좀 약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과 훈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사랑 속에 훈계가, 그리고 훈계 속에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훈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훈계를 하여야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 의하면 아이들은 한 살 내지는 두 살 때부터 벌써 부모에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아이들은 부모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해 보려고 합니다.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을 가보려고 합니다. 부모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선을 향해 가는 발걸음보다 악을 향해 가는 발걸음이 더 빠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것을 받아드리는 것과 부인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관에 따라 자녀를 훈계하여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본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모들에게 자녀를 바로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를 잘 다스리지 않고 귀여워만 하다가는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자녀를 징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매를 들 때는 매를 들고, 엄하게 책망할 때는 책망하십시오. 어려서부터, 철이 들기 전부터, 타협이나 양보가 없이 단호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올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장6절.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22장15절.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잠언22장17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을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3절13절로 14절.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으로 하게 보려 들면 그 자식은 그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29장15절. 마지막으로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잠언29장17절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선지자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 건국을 주도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부정 부패를 일삼는 부량아가 되어 아버지의 뒤를 잊지 못했습니다. 또 엘리 대제사장을 보십시오. 그 자신은 훌륭한 제사장이었지만 자녀를 잘 가르치지 못해 자신과 자녀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을 보십시오. 아버지 다윗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는 패륜아였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히스기야는 종교 개혁을 한 유대의 훌륭한 왕이었지만 느지막하게 난 아들 므낫세는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자녀 교육을 잘못 시킨 데서 나온 결과들입니다.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일지라고 자녀를 잘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자식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고 훈계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녀들도 이렇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 길러 달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잘되고 못되는 것에 대해서는 부모의 책임이 큽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이 책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친다면 그리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다음은 우리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런 교육을 시킴으로써 하나님께 칭찬 받는 부모님들이 되시며, 우리 자녀들은 모두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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