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를 영접하라(요 1:1-14)
  • 조회 수: 92, 2013.10.31 20:01:15
  •  1981년 이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온 세계는 여러 가지 큰 뉴스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인류 역사 이래 가장 크고 기쁜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0-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러분, 이보다 더 크고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를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까? 다른 사람 아닌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성경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마틴 루터의 말을 빌리면 “내가 만일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다면 벌써 멸망시켜 버렸을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인류에게 가장 크고 기쁜 날입니다. 이 소식은 가장 큰 소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를 영접해야만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지만 어두움이 그 빛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땅에 올 때 자기 백성이 참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여기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죄 때문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은 마치 동굴 속에 있는 소년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즉 “그는 앞에만 보고 그의 뒤에 피워 둔 불빛에 비취는 자신의 흔들거리는 그늘을 세상으로 알고 동굴 벽에서 울려서 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의 소리로 알았습니다. 나중에 그가 동굴밖에 나왔으나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믿지 않았고 참빛인 태양을 눈이 아파 보지 못하며 동굴 안의 세계가 참세계인 줄 안다”고 말했습니다.
      가엾은 인간의 무지와 거기서 오는 죄상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것은 육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결과로 되는 관계입니다. 중생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적인 수양이나 노력으로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면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심령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다 죽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영생얻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그 순간에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리에 나가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오고 갑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참된 인생의 길을 택하고 걸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일찍이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으며 사실은 어디로 가는지 알려 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이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의 정치나 경제, 문화나 도덕은 문자 그대로 혼돈을 이루고 있습니다. 곳곳에는 충돌과 전복으로 부상을 입은 심령, 죽는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사이 ‘교통지옥’이란 말을 씁니다마는 오늘의 세상은 ‘인간지옥’을 이루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과 혼돈 속에 사는 우리에게 예수는 참생명의 길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내가 곧 그 길이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실 뿐더러 더 풍성히 해주십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생의 무의미와 소외감입니다. 기계 문명과 물질 문명이 극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은 점점 생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왜 이 세상에 우리가 사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생존 경쟁이 심한 이 사회 현실에 부딪치며 얻어 보려고, 누려 보려고 하는 욕망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육신적인 생활은 날로 풍요해 가지만 영적인 생활은 점점 더 무의미와 소외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 문명한 현대인간의 생활 특징입니다. 왜 이런 결과를 가져옵니까? 생의 의미를 세상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생활이 풍요해지면 질수록 내적인 심령은 공허한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닐 수 있었습니다. 찬란한 궁궐,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옷과 여자들을 즐기는 것으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도서에 말한 생의 결론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로다. 이것이 나의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부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세상적인 것에서 얻으려는 것은 언제나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주님을 우리 마음 속에 영접할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잔이 차고 넘칩니다. 만족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기 위하여 육신으로 자랑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사는 삶의 내용은 의미가 있고, 풍성합니다. 그리스도는 영적으로 굶주린 우리에게 풍성함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를 영접하면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인간에게 귀한 것이 많이 있지만 가장 귀한 것은 자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권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우리의 자유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자유를 빼앗으려 할 때에는 생명을 내걸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어떤 세력도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먹을 것, 입을 것, 쓰고 살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북한의 공산당을 그처럼 싫어합니까? 거기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북에 두고 남한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패트릭 헨리의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자유는 이렇게도 소중합니다. 생명을 주고 바꾸리 만큼 소중합니다. 물론 정치적인 자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부자유가 인간의 양심의 자유까지 빼앗지는 못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심령의 자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 위에 사는 사람을 보면 몸은 비록 자유롭지만 그 심령이 포로가 되고 눌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범한 사람은 죄의 포로요, 죄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에 눌려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주관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도 죄 범하면 죄의 종이 됩니다. 지식 많은 사람도 죄 지으면 죄의 세력에 눌려 삽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죄 지으면 죄가 시키는대로 합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없습니다.
      이 무서운 죄의 사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케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그 사람은 죄와 사망에서 건짐받으며,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참자유를 누릴뿐더러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자유와 해방을 원하십니까? 마음의 평화를 소원하십니까? 이 크리스마스는 생명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날입니다.
      이 기쁜 크리스마스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고, 생명의 바른 길을 걸으시며, 풍성한 삶을 영위하십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자유와 해방을 받아 마음에 참평화를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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