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기쁨(눅10:21-24)
  • 조회 수: 31, 2013.08.26 07:53:39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믿음의 식구가 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설교자로서 저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 모두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교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언제나 고민을 합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한 주간 내내 생각하다 보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힙니다만 그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잘 전달될 것인지는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고 앉아 계신 분들은 어쩔 수 없지만 들으려고 하는 분들은 알아듣도록 말씀드릴 의무가 저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주간 내내 본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다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분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제가 해야 할 일이 막막합니다. 여기 나와서 본문을 함께 읽는 순간 재빨리 본문의 정황이 마음속에 자리잡힐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처럼 계속되는 본문에서 설교하는 경우는 미리 읽어 오는 것도 유익하겠습니다만 그것을 누구에게나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결국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마음을 모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기억하시는 분은 있습니까? 물론 주보를 보시면 알 수가 있죠? 본문이 정해지면 다음에 살필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배경입니다. 배경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읽은 앞뒤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뒷부분보다는 앞부분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어떤 이야기였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거기서 우리는 기뻐하며 돌아온 칠십 인을 만나 보았습니다. 

    거기 등장한 칠십 인은 무엇 때문에 기뻐했습니까?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항복으로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참으로 기뻐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일러주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제자들에게 참으로 기뻐해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나서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 자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오늘 본문에는 성령으로 기뻐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뵙게 됩니다. 

    지금 주님은 "성령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제자들의 기쁨과 견줄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서 받는 느낌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기쁨이 더 커 보입니다. 그러나, 원문에 사용된 단어를 보면 예수님 편의 기쁨이 더 격렬한 기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 불평하듯이 우리 번역은 너무 색깔이 없이 번역되고 있습니다. 모팻이란 분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의 기쁨으로 떨면서 가라사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그들의 사역에 근거한 기쁨입니다만 주님의 기쁨은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 기쁨입니다. 넘쳐 나는 기쁨이요 소리치게 되는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초두에서 기뻐하던 성도들을 기억하십니까?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바라볼 때 그들의 마음속에 감격을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넘쳐 나는 기쁨은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입술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의 경우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성령의 기쁨으로 먼저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서는 제자들을 향해 축복을 선언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주는 핵심 메시지에 접하기 전에 먼저 본문에 대한 예비적 고찰을 하려고 합니다. 우선 주님의 기쁨은 결코 칠십 인의 기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파송받은 제자들이 나가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은 그들을 파송하신 주님의 기쁨임에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을 주지시킬 때에 그 사실로 인해 주님 자신이 먼저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식으로 인해 그 부모가 기뻐하듯이 주님은 지금 기뻐하고 계십니다. 자식의 성공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자식의 복된 미래를 생각할 때 가슴 벅차 하는 부모의 기쁨을 본문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 때에 라고 하는 말씀은 시간에 대한 언급뿐 아니라 동일한 청중으로서 칠십인 제자들을 향해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의 기쁨과 무관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거기는 깊은 내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앞 사건에는 하나님 나라가 능력으로 확장되는 것을 기뻐하고 있었고 또 하늘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그 놀라운 사실로 인해서 기뻐했는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의 계시를 통해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온전하지는 못했으나 제자들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의 도화선 역할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같은 영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동일한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제자들의 기쁨에 뒤따라 나오는 주님의 크신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기쁨은 더 큰 기쁨을 낳습니다. 기쁨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여러분의 교제에는 그와 같은 영향을 상호간에 주고 있습니까? 만나면 기쁨을 함께 나누는 교제, 더 온전한 기쁨으로 인도하는 사귐 그것이 주일날 우리가 갖는 성도의 거룩한 사귐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라는 구절에서 또 하나 더 예비적 고찰을 하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기쁨은 그냥 기뻐하는 정도의 기쁨이 아니고 넘치는 기쁨으로 소리치는 기쁨입니다. 여기 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큰 소리의 감사와 찬양의 기도입니다. 성령의 기쁨은 찬양과 감사의 소리가 터져 나오게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성령의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찬양과 감사의 소리가 입술에서 터져 나오게 하십시오. 찬송을 불러도 입술만 달삭달삭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서부터 벅찬 찬양이 터져 나와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큰 소리가 찬양과 감사의 소리가 아니라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입술에서 뭔가 터져나오는 소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찬양과 감사의 소리가 아니라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넘치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라는 구절은 마지막으로 또 하나 더 예비적 고찰을 하게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는 감사와 찬양을 유발하지만 주위 사람들을 향해서는 축복을 하게 합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복을 선포합니다. 다시 한번 탄생기사를 기억나게 합니다. 마리아의 문안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의 입에서 터져 나온 큰 소리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 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여러분 여자들이 다른 여자를 보고 여자 중에서 네가 가장 복이 있으며 이런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성령의 기쁨의 사로잡힌 증거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삶을 돌아보십시오. 본래 천성이 조용해서 큰 소리라고는 한번도 쳐 본적이 없는 사람도 물론 있겠죠. 그러나 조용한 소리라도 남을 향해 무슨 종류의 말을 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성령의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요 축복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와 축복을 합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 오는 한 주간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을 축복하는 기회를 가져 보십시오. 

    자,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주된 메시지를 듣기 위해 우선 본문의 위치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10장21절-24절은 9장51절에서 시작한 큰 문단의 완성부분입니다. 이 큰 문단에서는 여기서는 예루살렘에서 다가올 예수님의 운명을 미리 보여주는 동시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분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철저한 헌신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초점을 상실하지 않고 오히려 선교에 대한 관심의 폭을 점점 넓혀 가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한데서 이제 나아가서 칠십 인을 따로 세우시고 각동 각처로 내어 보내십니다. 그들은 승리의 보고와 함께 돌아옵니다. 이제 그들의 보고를 들으신 주께서 성령의 기쁨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잘 보십시오. 21-22절은 형식상 주님의 감사 기도이고 23-24절은 제자들을 향해서 축복하시는 부분입니다. 21절에는 계시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활동이 부각된 반면 22절은 계시의 대리인인 아들 예수님의 독특한 위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23-24절은 계시의 수혜자된 제자들의 복된 신분을 축복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탁월한 계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제목을 "예수님의 기쁨"이라고 잡았습니다.

    주님은 왜 기뻐하십니까? 계시자 아버지로 인한 기쁨이 먼저 주님의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이제 한 부분씩 본문을 살펴봅시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가까이서 주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기도의 특색은 무엇보다 먼저 그 부름 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원문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아버지여" 조금 더 친금감있게 만약 번역한다고 하면 "아빠" 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한글 번역이 원문의 번역과정에서 상실되었습니다만 원문은 주님이 사용한 호칭의 친근감을 상상토록 합니다. 원문의 어순을 살려서 번역한다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장엄하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게 우리 유교 문화에는 적합하고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는 들어보면 장엄한 서두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것 다 빼어도 그냥 "아빠", "아버지여"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주님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부르고 나서 천지의 주재시어 라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신 분인 동시에 그분은 온 천지에 주재시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공개되는 것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의 뜻에 공개가 바로 천지의 주재이신 분의 뜻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성령의 기쁨 가운데서 찬사를 돌리고 있는 아버지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 행동은 이중으로 여기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숨기시고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계시에 주인이신 하나님의 활동은 숨기시고 나타내시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공개적으로 선포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오늘은 언제 끝날 것인가 그것 밖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죠. 눈이 감기게 되어서. 숨기시고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보게 되는 사람은 설교시간이 지속되면 될수록 그 눈에 반짝이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숨기신 자들은 보지 못하니까 눈꺼풀이 내려올 수밖에 더 없는 것입니다.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어린아이들을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것이 꼭 나쁜 말은 아닙니다만 자기 지혜와 자기 슬기만은 있고 자기 능력만을 믿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데도 듣지 않으려고 하면 그건 비극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손에 자기 것으로 가득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새로운 선물을 받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스스로의 궁핍함을 알고 하나님 이 예배시간에 그냥 지나가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사모하는 영혼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자기의 것으로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다. 빈손으로 나아 와서 주실 분 하나님만 사모하면 우리는 양손 가득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드립니다. 

    이 말은 결코 하나님께서 교육을 많이 받은 자에게는 진리를 감추시고 별로 못 배운 사람에게는 나타내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식한 사람도 배운 사람 못지 않게 고집 셀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보통 때는 법 없이 살 사람이란 평가를 동네에서 받는 데도 신앙 문제에 대해서만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주장을 앞에 내세우는 사람들 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간혹 반대로 많이 배운 사람도 겸비하고 복음진리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바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런 이야기는 학식의 다소가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도 날 때부터 어린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다울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때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집니다. 복음의 능력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릎꿇고 구하게 만듭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왜 어떤 이에게는 숨기시고 다른 이에게는 나타내십니까? 그 궁극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옳소이다 아버지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전적 찬동을 표명합니다. 계시의 양면 행동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은 앞에서 가능했습니다. 궁극적인 설명은 아버지 자신께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상만 두고 생각을 하면 어떤 사람은 교만해서 안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겸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지만 궁극적인 것은 설명은 하나님 자신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우주의 맹목적인 절대 의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인격적인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의 근원은 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쁘신 뜻에 따라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셨음을 주님은 21절에서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시는 주님의 기쁨의 또 다른 측면을 22절은 공개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2절을 본래의 의미를 조금 더 살려서 번역을 한다면 이렇게 끊어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예수님의 기쁨" 그 두 번째 근거는 무엇입니까? 여기서는 예수께서 자신이 계시의 대리자가 되시므로 기뻐하십니다. 자신의 뜻대로 밝혀 주신 사람들만이 이걸 알게 된 사실로 인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아는 자는 당신밖에 없는데 아버지와 당신의 기쁜 뜻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혼자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빛을 주시고 이 세상을 구원해 나가시는 일을 할 때에 혼자서 하지 않습니다. 아들과 더불어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집을 구원하는 이 일을 할 때에 혼자서 하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에 동역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2절 첫 문장은 예수께서 계시의 대리자의 자격을 구비한 아버지의 상속자임을 밝힙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나는 상속자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합법적인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에 그 칭호가 이야기 해주고 싶어하는 바는 예수님은 합법적인 상속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특별한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예수께서 이런 위치에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분 가운데 성경구절 몇 개를 떠올리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맨 마지막 대 위임장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달리 말해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는…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최후 만찬 석상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13:3) 

    서신 서를 읽어보면 그가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로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합법적인 상속자임을 권한에 위임받은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문맥에서는 계시의 대권을 주님이 맡으셨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22절 둘째 문장과 셋째 문장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상호적 지식을 강조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이 친밀한 관계가 완벽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했습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압니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아십니다. 세상을 살면서 답답한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가끔 부딪히죠. 왜 이해가 안됩니까? 잘 살펴보면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안다는 것은 IQ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알려고 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친밀한 관계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와 아들만이 서로를 아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를 보니까, 모든 만물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두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그 마음에 다만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뿐입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서 감사의 계절이 되어도 하나님께로 가기를 기피할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의미로서 아버지만이 아들을 알고 아들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다른 모든 인생은 여기에서 배제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생각을 아십니다. 서로의 의지를 아십니다. 서로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아들만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께서 계시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는 계시하실 아버지를 아셔야만 했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실 뿐 아니라 아들만이 아버지를 다른 사람에게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아들만이 아버지와 꼭 같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요한복음 1장은 소개합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아들 예수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요한 복음의 진리를 접하게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분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사람에게 알리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22절의 핵심진리는 마지막 문장에 실려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 지식은 이야기의 목표가 아니고 마지막 문장에서 나타낼 진리의 기반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문장을 들어봅시다. 아버지를 아는 지식을 아들이 자기 뜻대로 수여하십니다. 하지만 22절의 아들의 소원은 21절의 아버지의 뜻과 일치합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소원이 합쳐져서 여러분과 제가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유일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리셨습니다. 그 분 안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리시기를 원하십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로 그렇습니다. 10년, 20년 오늘 어떤 분이 감사헌금을 한 것처럼 25년 세월과 함께 서로를 알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떤 부부들은 서로에 대해서 더 이상 알기를 끝낸 분들도 있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아주 완벽한 그림을 그려 놓고 "당신 이런 사람이야! 당신하고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도 없어" 그렇게 살면서 그렇게 규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죠.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지혜는 한이 없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과감히 끊어 보십시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드리고 하루를 보내지 마십시오. 주님 만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을 더 깊이 친밀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성령의 기쁨으로 기뻐하신 주님의 마지막 이유를 들어봅시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은 여기서 제자들을 돌아보셨다고 누가는 기술합니다. 기도하실 때는 모르긴 해도 하늘을 우러러서 감사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여! 천지의 주재시여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라고 감사기도를 하고 나서 이제는 그 시선을 제자들에게로 돌리시면서 기도에서 이제는 축복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그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시던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이 아니, 그 시선이 자기들을 향해서 와서 닿았을 때에 그게 감동적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돌아보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장에 느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종용히 이르셨다는 말씀은 거기 다른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이 축복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한정되 것임을 또 제자들처럼 볼 줄 아는 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종용히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칠십 인이 본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약속된 구원자에게서 직접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를 직접 보고 있습니다. 보는 것을 볼 수 있고 듣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결과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심판이라는 것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심판 날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이 누리는 복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축복이고 아들의 소원대로 누리는 축복이기 때문에 계시의 수혜자된 그들로 인해서 예수님은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제 24절은 23절의 보충설명입니다.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누리는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인류의 구원자의 권위로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아니, 주님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은 보고 듣고 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 위대한 사람들조차 다만 멀리서 바라만 보던 그것을 너희는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그들의 축복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 날이 이를 것을 멀리 보고 기뻐했다고 예수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멀리 보고 기뻐한 것을 가까이서 종용히 말해도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들이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계시의 축복을 받는 자들을 향한 기쁨을 주님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가까이서 전달받은 자들입니다.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왕들 아닙니까? 그러나 그 중요한 사람들 조차도 그 VIP조차도 경험하지 못하는 축복을 여러분이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간접적으로 중대한 발언을 하고 계십니다. 자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신적 자기증언을 하십니다. 자신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이 말씀으로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 영광을 보고 예언한 메시야가 지금 도래했습니다. 다윗 왕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언했던 그 메시야를 제자들이 지금 보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특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열 두 제자와 칠십인 전도자들의 조금도 못지 않는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열두 제자와 칠십 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그의 죽음과 부활이 성취된 자리에서 이 복된 소식을 듣고 계십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 주의하십시오. 

    축복을 누리는 수단은 무엇을 듣는지 무엇을 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눈과 귀가 복되기를 원하십니다. 눈을 통해서 봄으로써 복받기를 바라십니다. 귀를 통해 들음으로써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 완성된 구원의 복음을 여러분은 마음에 받아들이십시오. 구약의 왕들은 다만 약속을 받았을 뿐이지만, 여러분은 그 실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만 그림자를 보았지만 여러분은 그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구약의 왕들과 선지자들은 다만 모형만 보았지만 우리는 원형을 지금 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조차 누리지 못한 축복의 시대에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다. 홍해 가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여러분은 본적이 없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고 명하시는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를 여러분은 본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현장에 있었던 자들보다 더 큰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성육하신 구주를 볼뿐만 아니라, 못 박히시고 살아나신 구주 예수님을 우리는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을 듣는 시대에 부활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을 듣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대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입증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크신 축복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크고 무서운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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