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눅 14 : 15 - 24)
  • 조회 수: 27, 2013.08.28 16:40:36
  •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들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정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중요한 약속을 별다른 이유 없이 거절당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온 초청계획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불참선언으로 하루아침에 무산되어버린 경험이 있습니까? 나름대로 최고의 잔치를 열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과시하고 싶었는데 정작 초대했던 사람들이 오지 않아 낭패를 본 적은 없습니까?

    만약 거절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절했다면야 그런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요. 초청한 입장에서는 "아! 그랬었구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며 상대의 거절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 거예요. 마음도 덜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하는 이유가 불분명하고 설득력이 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시시한 변명들만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해보세요. 초정한 사람의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제 보니 이 사람이  나를 처음부터 무시하고 있었군. 철저히 우습게 보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 것입니다. 거절당했다는 사실 자체도 불쾌한 일이지만 거절한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모멸감, 배신감, 수치심, 분노 등은 참기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사전 모의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이 주인을 보십시오.

    그는 오랫동안 큰 잔치를 준비합니다. 미리미리 초대장을 보내어 개별적으로 기별하여 잔치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잠정적으로 받아냅니다. 그리고 잔치를 배설한 후에, 참석을 약속한 그들에게 일일이 종들을 다시 보내어 초청을 재확인시킵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들은 처음 약속과 달리 행동합니다. 하나같이 참석할 수 없다는 대답들입니다.

    본문 18절에서 20절까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 사람들이 나름대로 둘러대는 변명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이들의 변명은 가지각색입니다. 거절하는 이유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변명을 종합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잔치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보다 내 일이 더 급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관심은 잔치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초청 받은 사실 자체를 별로 귀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어기는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입니다. 더구나 이 잔치의 성격이 무엇이며 주인이 무슨 의도로 이 잔치를 준비하는지 조차도 알려하지 않습니다. 아예 잔치는 뒷전이고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된 관심은 오직 개인적인 일들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내세우고 있는 핑계들을 보십시오. '밭을 샀으니 밭의 상태가 어떤지 나가보아야 하겠다. 소들을 샀으니 제대로 샀는가 한 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때마침 장가들었으니 이제는 아내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이들이 거절하고 있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매매 전인가? 후인가?

    이들의 변명이 과연 합당한 것입니까? 과연 거절해도 좋을 만큼의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들의 변명을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으매 밭을 보러 나가야 되겠다고 말합니다. 밭을 살펴보는 일은 밭을 사기전에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 매매가 끝나고 난 다음에 하는 것입니까?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밭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밭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이 한 번도 나가보지 않고 사는 사람 봤습니까? 사려는 밭의 위치가 어떤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한번도 살피지 않고 사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비상식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밭을 사기전에 미리 다 끝내 놓았어야 할 일을 밭을 산 다음에서야 부득불 하려는 심사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하필 잔치시간에 맞추어서 그 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일쯤은 잔치가 다 끝난 다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사람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보면 무언가 수상쩍은 데가 있습니다. 잔치에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아주 급한 일이 생겨서 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해해 달라는 태도가 아니라 당신의 잔치야 뭐 별 것 있겠는가? 가 봐야 밥이나 더 먹겠느냐? 시간만 아까울 따름 아닌가? 그 시간에 나는 내 일이나 해야겠다는 의사를 다분히 담고있는 것입니다.

     

    계획적인 거절

    소를 사는 일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소를 샀으매 소를 검사하러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를 검사하는 일은 소를 사기전에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산후에 해야 하는 것입니까? 물건을 사기전에 물건을 살펴보고 검사하고 조사하고 분석해 보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사고 난 후에 조사하는 것이 옳습니까? 원하는 물건을 제대로 사려면 사기전에 살펴야 할 것을 다 살펴야 합니다. 값비싼 물건일수록 이것저것 철저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일단 사놓고 보자는 식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산 다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계산해보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처사를 보세요. 이미 소를 사놓고 나서 그 소를 검사해야겠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당시의 생활정도로 미루어 볼 때 소 한 마리 소유하려해도 심사숙고에 숙고를 거듭해서 할 일인데 소 10마리를 사면서 이렇게 소흘히 할 수 있는 겁니까? 일단 사놓고 나중에 가서 검사해보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일입니다.

    만약 자기 나름대로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사놨다고 칩시다. 그 일을 꼭 귀중한 약속시간에 맞추어 해야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그것도 꼭 잔치시간이 임박해서 해야 마땅한 것입니까? 잔치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은 소를 사기전에 이미 해놓은 것인데 그 정도의 일로 선약을 무시해버린다는 것은 평소 잔치의 초청자를 우습게 알고 있었거나 그 주인의 잔치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소들을 사논 상태라면 소를 검사하는 일이야 얼마든지 잔치에 참석하고 난 후에 해도 할 수 있는 일 아닌가요?

    이미 소를 사기전에 끝냈어야 할 일을 하필 잔치시간에 맞추어 검사하러 나가야겠다는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매우 불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는데 불과합니다. 말인즉슨 당신의 잔치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지 않겠다는 거 아닙니까?

     

    변명거리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또 어떻습니까? 앞의 두 사람은 내가 가지 못하겠으니 부디 용서해 달라는 인사말이라도 덧붙입니다. 그러나 장가든 것을 이유로 거절하는 이 사람은 못 가서 미안하게 됐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장가들었으니 마땅히 안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제는 내가 거두어야할 식구가 생겼으니 가정에 충실해야 되지 않느냐? 물론 당신과 잔치에 참여하기로 미리 약속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 아닌가? 그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지 않느냐? 내가 거절하는 이유는 잔치에 가고 싶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가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장가만 안 갔어도 잔치에 참석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인데.

    여러분, 이 사람의 변명이 과연 온당한 것입니까? 무엇이 잘못되어 있습니까? 장가들었다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이유입니까? 장가갔으면 밥은 안먹습니까? 화장실은 안 간답디까? 쉬는 시간도 없답니까? 이 사람의 말마따나 24시간 가정에 붙어있으면 만사가 다 오케이입니까? 가정에 충실하는 거야 잔치에 갔다온 후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장가갔기 때문에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초청에 응한다는 약속은 해놓았지만 잔치에 가고 싶지 않아 때마침 장가든 것을 이유로 거절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주인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태도가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이런 식으로 거절하려 들 때 기분이 좋겠습니까?

    본문 21절입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집주인이 분노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좋지 않은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거절해도 속이 상할 판인데 어떤 명분이나 마땅한 이유도 없으면서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거절할 때 격노가 치솟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주인이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거절하는 사람들의 이유를 들어보면 잔치에 대한 관심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잔치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별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결정은 잔치를 배설하는 주인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잔치인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상일에 집착하여 거기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잔치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쾌락을 즐기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사업을 더 크게 확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녀들을 더 훌륭하게 출세시킬 수 있을까? 온통 이런데 관심이 모아져 있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잔치입니다. 그러나 일단 잔치에 와야 다른 여타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선 순위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먼저입니까? 주님의 잔치가 먼저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부귀영달이 먼저입니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내가 더 높아지고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까?

    만약 여러분의 관심이 천국 잔치에 맞추어져 있지 않고 구원과 거리가 멀다면 여러분은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과 똑같은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주님을 섬기는 바로 그 일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삶의 우선순위

    금번 우리교회의 조명공사를 담당하신 분은 어느 교회의 안수 집사님입니다. 그 분은 전국적으로 굵직한 공사들을 많이 맡아서 이루어 온 가히 우리 나라 조명계의 일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실력가들이 와서 우리교회의 조명을 설치해 주었습니다. 한번은 이 분이 밤새 서울에서 승용차를 타고 내려와서는 몇 시간 눈을 붙이지도 못한 채 아침 일찍 저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제가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하니까 급히 다시 올라가야 된다는 겁니다. 새벽에 오셔서 쉬지도 못했을 텐데 그리 급하게 올라갈 이유가 뭐있느냐고 하니까 하시는 대답이 성가대 연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귀한 믿음을 가진 집사님의 찬양을 하나님은 또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분명하지 못하면 항상 잔치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성대하게 천국잔치를 준비하고 계시다할지라도 우리의 관심사가 영적인 잔치에 있지 아니하고 세상일에 있거나 사고 파는 일, 집안 일에만 얽매여 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 잔치에 참여할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것이 불행이 아닙니다. 다른 것이 비극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았어도 마지막에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70년, 80년을 누리며 살았다 할지라도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 일생을 살았다면 그 인생은 지극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주인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초청을 거절함으로 가장 가치있고 복된 것들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순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습니다. 순간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나머지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순간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영원을 포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소를 살펴야 하고 내가 소유한 밭에 나가봐야 되고 내가 장가들었으니 내 가족을 거느려야 한다는 일들 때문에 보다 영속적인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불행

    물론 그런 일들이 다 쓸데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데 다 필요한 일들입니다. 모두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어느 것이 더 영원한 것인가 하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순간적인 일에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이들은 순간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영원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일은 언젠가는 다 끝나게 됩니다. 관에 들어가면 여러분이 쌓아놓았던 것, 어질러 놓았던 것은 다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곧 사라져버릴 것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여겨서 그것을 붙들기 위해 아둥바둥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짧은 인생을 살더라도 영원을 소유하고 살아가시는 축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들은 순간에만 너무 관심을 가지다가 영원한 잔치자리를 놓쳐 버리고 있습니다. 잔치는 한 번 끝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 잔치는 좋은 일이 생기면 잔치를 또 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천국 잔치는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밭을 사고 돌아보는 일은 생명이 붙어있으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루 늦었다고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거기에 있고 이미 자기 소유가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는 것입니까?

    순간에 너무 집착하고 살다가 영원한 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자기 삶의 유익과 즐거움에 도취되어 있다가 구원의 길에서 이탈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인의 마음을 아는가?

     

    주인이 분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이들이 주인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이 한번쯤 주인의 심정이 어떠할까? 주인이 어떤 의미로 이 잔치를 배설했을까? 왜 우리를 초청했을까? 라는 생각을 한번쯤 진지하게 해보았다면 이들은 기꺼이 그 잔치에 응했을 것입니다. 잔치에 한 번도 가 본 경험이 없거나 도저히 초청을 받을 만한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잔치에 초청받은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알았을 거예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겁니다. 잔치에 거는 기대감으로 늘 가슴이 벅차 올랐을 거예요. 아무 자격도 없는 자기가 그 잔치에 초대되고 선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깊이 감사하면서 자기를 불러주신 주인의 은혜를 노래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성 들여 잔치를 여는 주인의 마음이나 그 잔치를 열기까지 주인이 지불한 희생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전도를 거절하는 많은 현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천국 잔치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기시며 예비하신 그 희생과 고통,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바로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이 손님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오래 전에 준비는 시작되었다

     

    주인은 이 사람들을 오래 전부터 초대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먼저 기별하여 약속을 받아놓고 그 다음에 잔치를 배설하여 다시 그들을 초청합니다. 한 번 불러본 다음 듣지 않는다 해서 그 즉시로 다른 사람에게로 초대장을 넘겨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미리 부르시고 나서 재차 확인 절차를 거치십니다.

    16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어떤 사람들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예비적인 초청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잔치할 시간에 그 정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처음에 한 번 초청하고난 다음 잔치시간이 임박하여 또 초청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미 약속들도 받아놨으니 따로 누구를 보내지 않더라도 약속 시간이 되면 알아서 오지 않겠어요.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오도록 최선의 배려를 다 합니다. 친히 종을 보내어서 한 사람 한 사람 약속을 확인하고 다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를 초청해 주신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갈바를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서 그 자리에 여러분을 찾아가셔서 초청해 주시고 여러분들을 불러내 주셨기에 이 시간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으로 앉아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초청을 거절했다고 물러서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은 포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 얻는 그 날까지 우리 주님은 초청하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하시고 또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습니다.

    혹시나 아직도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놓고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십시오. 거절하지 마십시오. 거부하지 마십시오. 시시한 변명이나 이유를 늘어놓으면서 그 중요한 잔치를 놓치지 마십시오. 사랑의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잔치 준비는 완벽하다

     

    주인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주인이 이들을 부르면서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Everything is ready now.'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모자라는 것이 없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차려져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와서 즐기기만 해라. 와서 이 잔치에 참여하고 축하하기만 하라. 하나님께 영광만 돌려라. 입장권은 없다. 무료다. 공짜다. 마음대로 와서 먹고 마시고 즐겨라.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의 잔치, 기쁨의 잔치, 감사의 잔치, 축복의 잔치를 지금도 배설해 놓고 계십니다. 그 잔치는 완벽합니다.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두루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요청하기만 하면 그 즉시 즉시 다 대령하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예람 축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는 5월 30일에 삼천 명을 우리 교회로 초청하는 대 역사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예람 축제>의 뜻은 '예수 사람 만들기 전도 축제'를 줄인 말입니다. 이 축제를 위해 원 플러스 투(One + Two) 운동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최소한 한 손에 한 영혼, 양손에 두 사람 이상은 이 잔치에 대리고 오자는 운동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여시는 이 천국 잔치에 동참하여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살리는 마음으로 <'99 예람 축제>에 동참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 잔치를 통하여 우리 교회가 '내 집을 채우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권고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혼을 살리는 교회로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사랑의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무가치하고 보잘 것 없는 저희들을 그 귀한 천국잔치에

    초청하여 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초청을 거절하고 방황하다가 행여나 잔치 구경도

    하지 못하고 멸망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계속해서 찾아와

    주시고 기회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제는 더 이상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적인 것들에 매여 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의 시선을 천국잔치에 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다가오는 5월 30일 <예람축제>에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동참하게 하시고 3000명 영혼을 주님

    께로 인도하여 영광돌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초청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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