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에베소서 5:15-17)
  • 조회 수: 175, 2013.10.13 10:26:35
  • 흑인들의 자존심과 희망을 지키고, 온갖 억압과 차별에 저항했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기회의 앞에는 머리털이 있으나 뒤에는 머리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미국의 흑인들을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 유명한 말입니다. 그 당시 미국사회에서 사는 흑인들은 온갖 차별과 학대, 억압에 신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흑인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분노하며 비폭력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많은 회유와 협박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인사회 내부적으로도 온갖 음해와 오해들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의 참모들조차도 걱정하여 적당한 선에서 백인들과 타협하자고 그를 부추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흑인들을 위한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루터는 기회에 대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한 것입니다. ‘기회의 앞에는 머리털이 있으나 뒤에는 머리털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기회가 왔을 때 그 머리카락을 확 낚아채야지, 주저하게 되면 그 기회를 잡을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볼테르라는 분도 기회를 잃어버리고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당신이 나의 생명을 6개월만, 아니 6일만이라도 연장시킨다고 하면 나의 가진 보화의 반을 드리겠소. 나는 그 두려운 지옥으로 갑니다.' 무신론자 볼테에르의 죽음 앞에서의 마지막 탄식이었습니다. 기회를 잡은 자와 기회를 잡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오늘 저는 에베소서 5장 15-17절 말씀을 가지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물론 여기서 기회라고 하는 것은 내 가족, 내 친족, 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가 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합니다. 규범을 싫어합니다. 질서를 싫어합니다. 묻지마 폭력이 성행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더더욱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를 보건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여도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점차적으로 많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욱 더 두드리지는 현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전도를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멸망의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구원할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6절서부터 이 세상 마지막 때의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성경의 사건을 예화로 쓰셨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때와 롯의 때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 두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으나 이 두 가지 사건을 잘 연구해 보면 왜 예수님이 이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예화로 쓰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약적 사건은 이 세상 멸망의 때에 일어날 공통적 특징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처럼 때가 악하고 그로 말미암아 위험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데 정작 그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위험에 대해서 둔감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망하는 거죠. 망하는 사람들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눈치를 챕니다. ‘저 사람, 저렇게 하다가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 그렇다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망하는 사람보다 해안이 깊은 것도 아닙니다. 보통 사람이고, 어떤 경우는 망하는 사람이 훨씬 더 똑똑하고 지혜로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망하려고 하니까 눈에 뭐가 씌인 거죠.


    자 노아의 홍수를 다루는 창세기 6장으로 가 보면 노아 당시에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였습니다. 그것은 수명이 길었기 때문에 생겨났던 현상입니다. 수명이 길면 얼마나 많은 자녀들을 낳겠어요? 수명이 장난이 아닙니다. 노아의 경우도 960세 이상을 살았습니다. 므두셀라의 경우는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900세 이상은 산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 오래 살기 때문에 죽음, 멸망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악한 사람들은 완전 자기들 세상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몇 년을 같이 살아도 지옥인데 몇 백 년을 같이 산다고 하니까 생지옥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이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너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비상이 걸리지, 뭐 10년, 100년 이후의 일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아 시대에 마음 놓고 악을 저지르며 앞으로도 몇 백 년을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멸망과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롯의 때는 어땠습니까? 노아의 경우는 120년이라는 기간이 주어졌었지만 롯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경우는 너무나도 긴박한 순간입니다. 바로 그날 자정이면 유황불이 쏟아지도록 되어 있는데 보통 사람도 아닌 천사들이 롯을 찾아갔습니다. 사람이 아닌 천사가 찾아갔으면 깨달아야 하는데 롯 외에는 정신 차린 사람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롯이 두 딸의 사위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들려주었을 때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장인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장인께서 헛소리를 하신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비와 함께 그 인생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9.11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에 테러가 발생했을 때 한 타임지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썼습니다. 갑자기 교회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혈액은행에는 수혈하겠다고 오는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고 적당히 살던 사람들은 갑자기 부부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변화는 잠깐 계속되다가 그치고 말았습니다. 잠깐 정신 차리는 것 같더니, 그 다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의 성향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나 롯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대부분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거나 천천히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무서운 결과라 해도 긴장을 늦추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주일 씨가 폐암에 걸려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이 폐암에 걸려 정말 진지한 모습으로 광고에 나와 ‘담배는 독입니다. 담배를 피우면 저처럼 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담배로 인해 죽어가기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담배가 독이니 끊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 손에 담배를 든 사람마다 담배를 집어 던지고 다시는 안 피울 것 같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요즘은 갈수록 담배에 대한 경고도 높아지고 심지어는 공공장소에서는 금연지역이 확대되어 흡연자가 설 곳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데도 뭐 그리 담배에 대해 꺼려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서는 죽어가면서 담배가 독이라고 해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몇십년 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인데 왜 지금부터 신경을 곤두세우냐는 식입니다. 사람들의 근성이 그렇습니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은 수명이 길어졌습니다. 어느 정도 병을 통제할 수 있는 의료기술이나 경제적 여유도 있습니다. 지식도 있습니다. 가능한 한 위험한 일, 과로나 스트레스, 음주를 피하면 오래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이보다 젊게 삽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그래요. 돈이 많으면 젊게 살고, 돈이 없으면 늙게 산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 얼굴을 보고 나이를 생각하면 막 햇갈립니다. 그리고 과학과 문화가 발달하여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는 정말 시시해보입니다. 캐캐 묵은 이야기이며, 무식한 사람들만이 듣지 그걸 누가 듣느냐는 식으로 냉소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삶은 편하고 즐거워서 그리 천국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환경적 추이를 볼 때 복음을 전하려는 의욕이나 복음을 받아드리려는 마음도 갈수록 떨어져서 정말 전도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븍음 전도의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할 기회마저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하는 걱정과 염려가 있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지를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어쩌다가 훔친 단순한 절도죄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 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만이 그 사람이 멸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분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 믿기를 거부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단순한 죄가 아닙니다. 손에 무기를 들고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반역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무서운 죄를 범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받으라고 하면 우습게 생각하고, 지금 당장 예수 믿어야 된다고 하면 피식 웃으면서 하루, 이틀 미루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에 눈물을 담고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찰스 웨슬레가 믿지 않는 영국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은 유명한 찬송가가 있습니다. 바로 522장입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Why not believe my brother? 원문에는 왜 믿지 않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형벌 너도 받겠구나. 그 찬송가를 보면, 찰스의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절규하는 가슴이 있어야 합니다. 미루는 자들을 방치하다가 진짜 그들을 영원히 놓치게 되면 우리도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안 믿겠다고 자꾸 미루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느라 계속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완전히 기회를 잃어버리고 당신 곁을 떠나게 될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주변에 잘못하면 이렇게 기회를 완전히 놓칠 위험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까? 언제까지 그대로 둘 것입니까?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재림하신다면, 내일이라도 그 사람에게 죽음이 임한다면, 구원 받지 못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그 사람의 완악함이 문제라기보다 우리의 침묵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전도할 때는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자꾸 뒤로 미루면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내가 무슨 재주로 설득시킬 수 있습니까? 무슨 재주로 그들의 영혼에 문을 열 수 있습니까?  나 자신을 보면 입이 안 떨어집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늘도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오늘도 어두운 영혼을 꿰뚫고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것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능력을 믿읍시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언제 그에게 종말이 임할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겐 내일이 없습니다. 오늘만이 내 날입니다. 그러므로 가족 중 아직도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방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도록 가슴에 눈물을 안고 기도하면서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외친 것처럼 ‘보라, 지금은 은혜의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때라’고 외치면서 오늘이라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 항도교회에게 전도의 기회,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기회로 11.10일 총동원전도주일을 주신 줄 알고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전도에 매진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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