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01-21장 전편 강해 [1장]
  • 조회 수: 1677, 2017.01.04 22:55:44

  •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 . . .
    본문은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던 것 같고(애 4:21), 욥은 아브라함 시대 사람이거나 그의 몇 대 안의 자손이었던 것 같다.
    본문은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말한다. ‘순전하다’는 원어(탐 ם)는 비교적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을 가리킨다. 성경이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증거할 때(창 6:9), ‘완전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또 성경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도(딤전 3:2) 같은 뜻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또 자기 양심에 비추어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간증하였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욥은 정직하였다. ‘정직함’은 올바름, 기준에 맞음이라는 뜻이며 의롭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본질이요(잠 1:7) 그럴 때 사람이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노아나 다니엘도 그러했다.
    욥은 우리 모든 성도에게 본이 된다.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고 흠 없이, 올바르게, 정직하게, 악을 버리며 살아가자.
    [2절]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본문은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라고 말한다. 욥은 많은 자녀들을 둔 성도이었다.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물론, 자녀를 안 주시는 경우도 있었다. 노아는 500세 이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창 5:32). 아브라함도 100세에 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뜻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자녀 출산과 양육은 힘든 일이지만, 복되고 보람 있는 일이다.
    욥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수고롭고 복잡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에녹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5:21-22,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독신(獨身)은 신앙생활하기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적인 생활이 아니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수고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가정을 이끌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성도의 일차적 경건 훈련의 장소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경건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가정에서 믿음과 사랑, 겸손과 인내, 순종과 용서 등을 실습한다. 가정에서 잘 생활하는 자가 바르고 좋은 인격일 것이다. 디모데전서 3:4-5,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녀 출산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자. 우리는 삶의 현실 속에서, 특히 가정에서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하나님을 섬기자.
    [3절]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본문은,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천 마리)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한다. 동방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손들이나(창 25:1-6),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나(창 25:12-18), 에서의 자손들을 가리킬 것이다(창 36장).
    욥은 물질적 부요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재물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도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巨富)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었다(창 26:12-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순종하는 자에게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가축들의 새끼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큰 방해물이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왜냐하면 부자는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하나님 대신 재물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교훈하였다(딤전 6:9-10).
    그러나 부자인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였다.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고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았다. 그는 욥기 31:24에서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물질적 부요의 위험성을 깨닫고, 물질적 부요의 복을 구하지 말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쓸 줄 아는 믿음과 덕을 구하자.
    [4-5절]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 . . .
    본문은,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욥의 자녀들은, 아마 다 성장한 후에도,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까지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서로 간에 형제애가 좋았다. 욥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간에 또 형제들 간에 사랑과 순종과 우애가 있는 좋은 가정이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칫날이 지나면 자기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집으로 불러 성결케 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님게 번제를 드렸다. 욥은 죄의 심각성과 성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뿐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육신적 차원에서 자녀를 위할 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자녀를 위하였다. 그는 자녀들의 구원과 신앙 인격을 위해,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해, 혹 지은 죄를 씻음받게 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부모로서 열 명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러하였다.
    본문은 “욥의 행사는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는 한두 번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사가 항상 그러하였다. 그것은 참된 자녀 사랑이다. 부모에게 주는 성경의 교훈의 핵심은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6:4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이 되도록 지도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하자. 그것이 부로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6-7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 . .
    본문은,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욥기 38: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고 말한다.
    사탄은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는 타락한 천사이다. 그의 타락의 죄는 교만이었다(딤전 3:6). 사탄은 실재(實在)한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범죄케 했던 뱀은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 활동한 짐승이었다고 본다. 요한계시록 12:9는 ‘큰 용, 옛 뱀’이 바로 사탄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며 활동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죄 짓게 하고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고 어지럽히며 파괴시킨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며(요 8:44)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고(대상 21:1)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였다(슥 3:1). 그는 예수님을 시험한 자요(마 4장)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며(고후 4:4)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를 조장한다(엡 2:2).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계 12:9).
    사탄의 권세는 크다. 그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우며 요한일서 5:19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마침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은,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운다”고 예언하였다.
    성도는 이 죄악된 세상의 주관자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운다.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들의 활동들을 분별하고 대적하며 싸우자.
    [8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 . . .
    본문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건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완전치 못하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그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비난하고 욕하고 악평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이다. 잠언 16:25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이었는지, 악한 자이었는지를 기록하였다. 솔로몬은 늙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다(왕상 11:4).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왕상 15:11),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16:25), 아하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22:52). 열왕기상하에는 29번, 역대하에는 11번, 총 40번 ‘하나님 보시기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치 말고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또 그는 남을 볼 때도 외모만 보지 말고 그의 중심을 살펴보려 하고 그의 신앙인격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선악간에 보응하심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자.
    [9-11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 . . .
    본문은,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한다.
    사탄의 비난은, 욥이 까닭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복 때문에 섬긴다는 것이다. 즉 욥의 신앙은 기복(祈福)신앙이라는 것이다. 욥의 신앙이 기복신앙인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 복 때문인가? 그러면 물질적 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중단될 것이다. 그가 물질적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버릴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기복신앙은 고난을 견디기 어렵고 순교는 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씨 뿌리는 비유 중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환난과 시험에 넘어지는 경우를 가리켰다(마 13:20-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증거했다(롬 14:7).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감동에 근거하여 기복신앙이 아니고 순수한 신앙을 가지자.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섬기자.
    [12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 . . .
    본문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주셨다. 손은 힘을 상징한다. 사탄은 세상의 것을 상당히 주장한다. 그는 욥의 모든 재산을 없애고 모든 자녀를 죽이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4:6에 보면, 사탄은 예수께 말하기를,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나의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준다고 하였다. 사탄은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그러나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또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그 권세를 가지며 그것을 사용하고 활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유일한 주권자이시다. 그는 사탄과 악령들도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은 심지어 돼지 속에 보내시기를 그에게 간구하였었다(마 8:31). 세상 끝에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계 20:10).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유익케 하시는 깊은 뜻이 있다. 사람은 평안할 때 교만해지고 해이해지고 범죄하거나 탈선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세상의 헛됨을 알고 죄를 멀리하고 더 거룩해지며 더 하나님만 사모하고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또 무엇보다 겸손해진다(시 119:67, 71; 고후 1:8-9; 12:7).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또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주시는 평안을 사모하자.
    [13-22절]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 . . .
    욥은 하루 아침에 큰 재앙을 당하였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말했다.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大風)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가 주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과는 너무 대조가 된다. 욥의 신앙과 의로운 인격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났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바른 생각을 하고 하나님을 원망치 말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함을 인정하자.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1-6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 . . .
    본문은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고 말한다. 욥에게 닥친 재앙은 사탄이 준 것이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된 것이며 욥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본문은,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말한다. 사람의 생명이 귀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희생해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면 만족하지만, 그러나 이제 몸이 병들어 죽음의 위협이 생기면,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욕하는 죄를 범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탄은 끝없이 변론하고 반론하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송사쟁이이다.
    본문은 또,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깊으신 뜻 가운데서 사탄의 활동을 범위를 지어 어느 정도 허용하신다.
    우리는 사탄의 끝없는 비난과 말장난을 경계하고, 또 그의 어떤 시험도 잘 대처하자. 우리는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고 섬기자.
    [7-10절]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 . . .
    본문은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악한 피부병으로 욥을 쳤다. 심각한 악창이 온 몸에 났다. 욥은 너무 가려워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본문은 또,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다고 말한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동정하고 위로하기는 커녕 그를 몹시 구박하였다. 그러나 욥은 믿음 없는 아내의 구박에도 낙망치 않고 더욱 믿음으로 나아갔다. 돛단배는 바람이 있어야 앞으로 잘 나아간다. 신자는 돛단배와 같다. 신자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
    본문은, “[욥이]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1:21)보다 더 진전된 고백이다. 욥은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전제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거저 받았으면 재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복받는 것을 좋아하면서 재앙받을 때 원망한다면 이기적인 태도이며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욥의 고백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 처분에 겸손히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신 지혜와 선으로 사람의 모든 일을 섭리하심을 믿어야 하고, 고난 중에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오직 그의 절대주권과 그의 지혜와 선을 믿고 그를 의지하고 말로라도 그에게 범죄치 말자.
    [11-13절]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 . . .
    본문은,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相約)하고 왔다”고 말한다. 욥의 친구 세 사람은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러 서로 약속하고 왔다. 데만 사람은 에서의 자손이며(대상 1:45), 수아 사람은 아마 아브라함의 첩(필레게쉬 שׁי)[=후처] 그두라의 자손일 것이다(대상 1:32; 창 25:2).
    그들은 경건하고 존귀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이 심각함을 알았다. 본문은,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7일 7야(夜)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기록한다. 욥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하였다. 또 그들은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었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사람이 괴로움이 심하면 겉옷을 찢는다. 르우벤은 구덩이에 요셉이 없음을 보았을 때 겉옷을 찢었었다(창 37:29). 또 욥의 친구들은 7주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한 말도 못하였다. 욥의 큰 고통은 이렇게 묘사되고 증거되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의 기간이 긴 것 같지는 않다. 1차 재앙은 하루에 되었고(13절) 2차 재앙은 1차 재앙 후, 몇 일 안되어서이었고, 친구들의 방문도 2차 재앙 후, 몇 일 안되어서이었던 것 같다. 욥기 3장부터 42장까지의 내용은 방문하여 7일 후, 하룻동안의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욥의 고난은 1-2달간(욥 7:3) 이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욥의 극심한 고난을 기억하자. 그 기간이 제한적일지라도, 그 정도는 극심하였다. 우리는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1-10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 . .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지 7일 후에, 욥은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사람은 평안할 때 자기의 생일을 중히 여기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한 고통 중에서는 생일이 결코 기쁜 날이 아니다. 욥이 그러했다. 그는 말을 내어 말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男兒)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자들]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8절의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은 마술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욥이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11-19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 . .
    욥은 계속 말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counselors)[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사림 םי ‘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20-26절]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 . . .
    욥은 또 말한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이는]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같음이로다]. [이는]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미쳤음이로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로게즈 ז ‘격동, 소동’)만 임하였구나.” 욥은 고통 중에서 죽음과 무덤을 심히 사모한다. 사람은 극심한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하게 된다. 엘리야도 그러했다(왕상 19:4). 그러나 실상 천국은 모든 성도가 이 세상보다 더욱 사모할 만하다(고후 5:8; 빌 1:23).
    우리는 이 세상의 환난과 고통과 허무를 미리 깨닫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자(요일 2:15-17).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자.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1-11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 . . .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대답하여 말하였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라아 האָ ‘싫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다시 번역하면, “너의 경외함이 네 확신이 아니냐? 네 행위를 완전히 함이 네 소망이 아니냐?”(NASB, NIV).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장래를 확신케 되고 행위를 완전히 할 때 장래를 소망케 된다. 의인과 정직한 자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들은 재앙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받을 것이다. 사자 같은 자들이라도 그 이가 부러지고 먹이가 없어 죽고 흩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신약성경도 여전히 증거하는 성경 진리이다(갈 6:7).
    우리는 죄와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를 행하자. 그러나 의인에게도 신앙훈련의 고난이 있음을 알자.
    [12-21절]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하여서니라. . . .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계속 말하였다.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異像)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조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나방(moth) 앞에서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이스람 ם)[‘그들의 줄’(NASB, NIV) 혹은 ‘그들의 탁월함’(KJV)]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인생이 아무리 의롭고 거룩하다 해도 창조자 하나님보다 더하겠는가?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내놓을 것이 없는 죄인이다. 더욱이,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존재요 그의 삶은 덧없이 짧고 허무하다. 성경은 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말한다(벧전 1:24). 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인생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세상을 사랑치 않고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만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와 부족, 또 비천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며 그의 명령만 순종하자.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2절]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 . .
    엘리바스는 계속 말한다.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이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화]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시기’라는 원어(키느아 האָ)는 ‘화’라는 뜻도 있다(BDB).
    사람이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가? 하나님께 다 맡기지 않고 교만하고 욕심을 부리고 불만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화가 어리석은 자를 멸한다”고 말한다. 분노와 화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며, 그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를 죽인다. 그것은 심령에 해가 되게 하며 사람으로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기 쉽게 만든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26-27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분노와 화는 오늘날 의학 상식처럼 알려진 바와 같이 몸의 질병들의 원인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그 마음에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이웃 사랑이 있으면, 분노와 화를 많이 줄일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여기에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방법도 있다. 즉 사람이 건강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잠 3:7-8), 마음을 평안케 하며 과로하지 말고 적당히 노동 혹은 운동을 하고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되 가급적 소식(小食)해야 한다.
    우리는 아주 정당한 일 외에는, 분노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온유와 겸손, 의와 선, 사랑과 자족함으로 살자.
    [3-7절]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미련한 자는 그 자녀들도, 그 재산도 다 복되지 못하다. 사람은 다 미련한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자신도, 그의 자녀도, 그의 재산도 복되지 못할 것이다.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이는]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아니지만],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같음이라].” 모든 인생의 고난과 불행은 타고난 것과 같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첫사람 아담의 범죄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여자에게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선언하셨고, 아담에게는 땀흘리는 수고의 삶을 선언하셨다(창 3장).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며 고난으로 충만하다. 욥은 인간의 삶을 전쟁이나 품꾼의 날에 비교하였고, 또 인생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하였다(욥 7:1; 14:1). 야곱은 자신이 지나온 130년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고(창 47:9), 하나님의 종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90:10).
    인생의 평안과 영생은 죄인의 구주이신 예수님 안에만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인생은 고난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우리는 오직 인생의 참 평안과 영생이 되신 구주 예수 안에 거하자.
    [8-11절]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들, 기이한 일들을 셀 수 없이 많이 행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가 행하신 기이한 일들로 가득하다. 시편 104:24는,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말한다. 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가 다 그러하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 사역이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우주를 운행하시고 천지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을 기르시고 먹이신다. 시편 104:27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말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다. 그는 요셉의 생애를 섭리하셨고, 모세의 생애를 섭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기이한 일들을 주셨다.
    그는 마침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의 기적, 죽음, 부활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고 신약교회를 세우셨고 자기 백성에게 천국의 산 소망을 주셨다. 그는 오늘 우리 개인의 영육의 삶도 섭리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 8:28).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나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오직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12-16절]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자들, 세상적으로 지혜로우나 심령이 비뚤어져 있고 패역한 자들의 계획과 계교를 다 파하신다. 그것들을 다 헛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9:15-16은,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말하였다. 또 고린도전서 3:19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궤계에 빠지게 하신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다 팔아버린 일을 결국 헛되게 하셨다. 그는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죽이려던 하만의 계획도 헛되게 하셨고 도리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죽임을 당케 하셨다. 또 그는 은 30에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계획을 헛되게 하셨다. 유다는 그가 받은 돈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도로 갖다준 후에 목매어 죽었다. 예수께서는 저 악한 유대 지도자들과 또 주님을 배신한 제자에 의해 십자가에 내어준 바 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본문은 또, “하나님은 곤비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며 또한 긍휼의 처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은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악한 자들의 입과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 인간적 지혜로 행치 말고 악한 자들의 계교도 두려워 말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대로만 행하자.
    [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본문은,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것은 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기 때문이다. 잠언 3:12는,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징계는 유익이 많다. 우선,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힘쓰게 만든다. 시편 119:67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하고, 시편 119:71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12:10-11은,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하게 만든다. 다윗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 땅의 것들이 그림자같이 헛됨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39:6-7). 사도 바울도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죽을 고생을 했을 때 이를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깨달았다(고후 1:8-9).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가 복인 줄 알고 징계당할 때 그것을 업신여기지 말고 달게 받고, 그것을 통해 더욱 거룩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자.
    [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 . . .
    본문은 앞절에 대한 이유의 구절이다. 원문에는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하심이라].”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유익을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부모는 자녀를 훈계하고 책망하고 벌을 주고 또 필요한 경우 매를 들지만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려 함이며 매를 때린 후에도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를 때리시고 고통을 내리시지만, 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그 고통을 물리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징계는 우리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최종 심판이 무서운 것이지, 현실의 징계는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여섯 번이나 일곱 번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해주시고 재앙을 막아 주신다는 뜻이다. 사람은 부족해서 실수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고쳐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주께서는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통회자복했을 때 그의 큰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에게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다시 주셨다. 주께서는 그의 부활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믿음 없는 도마에게까지도 찾아와 그의 믿음을 새롭게 하셨다.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이것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우리는, 징계하시지만 회복시키기도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연약을 긍휼히 여기시고 거듭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20-21절]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 . . .
    본문은,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근으로부터 지키시고 건지신다. 시편 33:18, 19도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모든 생물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란다(시 104:27). 하나님은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이시다(마 6:26).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욥 38:41).
    또 하나님께서는 전쟁 때에도 우리를 칼 권세에서,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총알이 빗발치며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상황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건지신다. 사무엘상 23:14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매일 찾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본문은 또,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들의 비난의 말들로부터도 피하여 숨게 하신다. 시편 31:20은,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멸망이 올 때도 피할 길을 주신다. 시편 91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새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므로 성도는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한다고 고백한다(시 91:1-8).
    우리는 경제 문제도, 전쟁도, 사람들의 비난도, 그 어떤 멸망도 염려치 말고, 오직 섭리자, 보호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기만을 힘쓰자.
    [22-23]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본문은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멸망과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멸망이든지, 어떤 정도의 굶주림이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로 고난을 주시지만, 우리가 진실히 회개할 때 그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또 성도는 들짐승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리와 늑대, 또는 멧돼지 등의 들짐승들은 농작물을 해치고 사람도 해친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24에서 죄에 대한 징벌로서 들짐승의 이를 보내실 것을 경고하셨다. 에스겔 선지자도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징벌의 방법으로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보내실 것을 예언하였다(겔 5:17; 14:21; 33:27). 에스겔 14: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重)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회개하며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들짐승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본문은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고 말한다. 밭의 돌들은 땅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게 만든다. 또 날카롭고 뽀족한 돌들은 밭갈 때 손과 발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밭에 돌이 우리와 언약을 맺게 하실 것이다. 또 들짐승도 우리와 화목케 하실 것이다. 들짐승이 우리에게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 34:25에는 하나님께서 회복의 시대에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은 있으나, 기근도, 들짐승도, 밭의 돌돌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자.
    [24-27절]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 . . .
    본문은,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장막의 평안함이란 가정과 가족들의 평안함, 즉 가족들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과 거처의 평안과 화목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시면, 가족들에게 질병과 궁핍과 불화가 찾아올 것이다.
    또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은, 양들이 병에 걸려 죽거나 짐승에게 찢겨 죽는 것들이 없이 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늘 말로 우리의 재산과 기업과 공장과 가정의 물질생활에 어려움이 없이 평안한 것을 말한다. 땀흘려 일하는 것은 모든 인생의 의무이지만, 그 수고의 대가를 누리고 물질적 유여함을 유지하는 것은 복이다. 신명기 28:4-5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長壽)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자손들의 수적 번식은 하나님의 복이다. 다산(多産)은 하나님의 복이다(시 127: 4-5).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시 127:3). 또 흰머리와 장수(長壽)도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에 대해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출 20:12). 또 잠언은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며 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했다(잠 20:29; 16:31). 사람이 일생을 살며 원숙한 인격자로서 임종을 맞는 것은 복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있으나 성도에게는 결국 가정의 평안, 물질적 여유, 건강과 장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 . . .
    욥의 대답이다. “나의 분한(카아스 שׂ)[고통]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좋겠도다. 이는 그것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것임이로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성급]하였구나. [이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
    욥의 고난은 재산의 상실, 자녀들의 죽음, 몸의 병이었다. 이것은 전능자의 화살이며 하나님이 주신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였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고백하였고(1:21),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재앙도 주신다고 고백하였다(2:10).
    그러면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편을 회복시키실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는 복을 다시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든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현실로 알자. 평안을 내가 획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고난을 남의 탓으로 돌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말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순종하자.
    [8-13절]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 . . .
    욥은,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끊으시고 데려가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그러할지라도[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무자비한,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카카드 ד)[부인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구원](NASB)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욥은 혹독한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받고 기뻐한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요 기쁨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지 않은 까닭에 얻은 위로와 기쁨이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19:50, 92). 성도에게는 위로와 기쁨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신비한 위로와 기쁨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였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2).
    우리는 현실의 고난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누리자.
    [14-23절]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 . . .
    욥은 말한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거짓되이 행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욥은 지금 피곤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포기할 지경에 있다. 그러나 그를 위로하러 온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우기(雨期) 외에는 말라 있는 시내(와디 wadi라고 부름)와 같다.
    욥은 또 말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그 길들은 굽어지고 없어지는도다.]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바라던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救贖)하라 하더냐?”
    욥의 친구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고난당하는 친구를 동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과 그의 고통스런 처지를 이해하고 같은 마음과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4는,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라”고 말하고, 베드로전서 3:8은,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우리는 계산적, 이해타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지 말고, 변함 없는 참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이웃을 위로하고 구제하고 선을 베풀자.
    [24-30절]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 . . .
    욥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의 책망이 잘못된 책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남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이 없는 막연한 책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말한다. 또 그는 남의 말꼬리나 잡는 책망도 잘못이라고 말한다. 절망하는 자의 말은 바람 같은데 그 말꼬리나 잡고 책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들의 책망이 동정심이 없는 책망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너희는 고아를 제비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남을 책망하려면 그의 허물을 정확히 알고 지적하는 책망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말꼬리나 잡는 자가 되지 말고 그의 말의 중심내용에 대해 논하며 잘못된 점을 책망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의 책망은 동정심을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확신한다. 그는 말한다.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에서 자신이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4). 우리는 자책할 것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을 것이다(요일 3:21).
    우리는 남을 권면하거나 책망할 때 잘못된 권면이나 책망을 하지 말고 바르고 적절한 권면과 책망을 하자. 또 자책할 것이 없는 삶을 살자.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 . .
    욥은 계속 말한다.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 א)[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야르케 솨웨 א־יי)[헛된 달들에](욥의 고난의 기간이라고 봄)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인생의 7, 80년 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주께서는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그런 고난을 혹독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노아의 부친은 아들의 이름을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로이 일하는 자들을 안위할 자라는 뜻으로 지었다(창 5:2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마 11:28; 요 14:27).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히 4:9-11).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우리는 영원하고 충만한 안식의 세계인 천국만 사모하자.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 . . .
    욥은 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새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해가 빨리 지나가며 어느덧 황혼이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루아크 וּר)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약 4:14).
    욥은 본문에서 또,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인생의 지상의 삶은 끝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오직 믿는 일과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엡 5:15-17).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 . .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바다 짐승, 바다 괴물, 고래]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다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그는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에쳄 ם)[아마 ‘뼈의 쑤심’] (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하였었다(욥 6: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우리는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자. 그러나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자.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 . . .
    욥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파카드 ד)[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전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무익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심을 감사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 또 선하게만 살자.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 . . .
    욥은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후반부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MT, KJV).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의 죄인임을 인정하자. 또 죄씻음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음을 알고 그의 긍휼만 구하자.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1-7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 . . .
    본장은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이다. 빌닷은 말하였다.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만일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그 죄(죄책 혹은 죄의 형벌)에 붙이셨다면],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가]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여 데려가신 것이라고 말한다. 빌닷의 말은, 욥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나, 옳은 말이다. 그것은 율법에 밝히 계시된 일반적 진리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인간의 죄에 대해 공의로 벌하신다. 사람이 범죄할 때, 그는 그 자신이나 그의 자녀를 죽이기도 하신다(계 2:23).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받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또 회개하는 자는 현재 미약할지라도 장차 심히 창대케 되는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알고 죄를 심각히 여기며 죄를 회개하기를 힘쓰자. 또 그것을 날마다 우리의 첫 번째 기도 제목으로 삼자.
    [8-10절]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 . . .
    욥의 친구 빌닷은 또 말한다.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이는]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없으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같음이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옛시대 사람의 말과, 열조의 터득한 일은 옛길, 검증된 길이며 선한 길이다. 신명기 32:7에서, 모세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는 에녹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다윗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들었던 경건한 선조들의 증언과 지혜는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말씀하기를,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하셨다(렘 6:16).
    그것은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지향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으며 어느 시대에나 가감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변질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들을 통해 선포되고 전수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8). 보수신앙은 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는,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진 내용]을 지키라”고 말했다. 성경은 옛부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소이다. 그것은 영적 보화의 창고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의 제한성과 부족을 인정하고 옛길을 주목하고 참조하고 연구하자. 우리는 힘써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자.
    [11-19절]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 . . .
    “왕골(고메 א)[파피루스 나무]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카네프 ף)[불경건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라.”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를 파피루스 나무나 갈대에 비교한다. 그것들은 진펄이나 물에서 왕성히 자라지만 아직 푸르를 때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린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 데, 사람은 변하고 연약하고 악하기까지 하며 돈은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또 세상 권력도 허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그런 것을 의지하는 자는 어리석다. 그의 소망은 사라져버릴 소망이다.
    빌닷은 또 말한다.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감기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악인들의 믿는 것은 거미줄 같다. 또 그들은 한때 왕성한 것 같아도 곧 자취를 찾을 수 없이 뽑히는 식물 같다.
    그러므로 전도서 12:1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교훈했고, 시편 16:8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것을 의지하는 불경건한 자가 되지 말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살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자.
    [20-22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 . . .
    빌닷은 또,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순전한 자’라는 원어(탐 ם)는 ‘완전한 자, 온전한 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가 ‘의인’이다. 성경은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을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창 6:9; 욥 1:1; 겔 14:14, 20).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도우시고 건지시고 그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 또 시편 37:25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 그는 악한 자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고 재앙에서 건져주지 않으신다.
    빌닷은 또,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풍성히 주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4:7).
    빌닷은 또,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그런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 그는 그런 악인의 장막을 없어지게 하시고 그런 자로 패망케 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고 정직하게, 즉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살자.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자.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4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 . . .
    욥은 친구들이 옳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다 진리이지만, 단지 그 적용이 적절치 않았다. 욥은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표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0-22).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0). 그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뿐 아니라, 성도의 성심의 율법 준행도 내포한다고 본다.
    욥은 또,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유한한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말로라도 다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실천하고 또 기도에 힘써야 할 뿐이며, 하나님과 다투려 해서는 안 된다.
    욥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고 한다. 사람이 그의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형통한 자가 될 수 없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결코 아무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의만 의지하며 의의 길을 걷자. 하나님과 다투지 말고 그의 말씀을 듣고 힘써 순종하자.
    [5-11절]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 . . .
    욥은, “그가[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 노하시면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며 땅을 움직이실 것이다. 그는 지진을 주실 것이다. 성경은 세상 종말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 지진을 말한다(마 24:7; 계 16:17-2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다.
    욥은 또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도, 밤에도 어두움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신다. 출애굽기 10:23에 보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아홉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마 27:45).
    욥은 또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홀로 창조하셨고 바다도 주장하신다. 욥은 또 “[그가] 북두성(곰 자리)과 삼성(오리온 자리)과 묘성(황소 자리)과 남방의 밀실(별 자리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주관하는 자이시다. 또 그는 기적의 하나님,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욥은 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이시므로 그의 지나가심과 활동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능력을 깨닫고 그 앞에서 잠잠하자. 또 오직 그를 높이며 의지하고 섬기며 그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자.
    [12절]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욥은,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가족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건강을, 우리의 재물을,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환경여건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빼앗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므로 하나님은 그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로 사람의 죄에 대한 징벌로, 주신 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나 간혹 성도의 훈련을 위해 그것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는 생명을 빼앗아 죽게도 하시고, 가족을 빼앗아 고아와 과부가 되게도 하시고, 건강을 빼앗아 아프게도 하시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신다. 그는 국가를 빼앗아 나라 없는 설움을 당케도 하시고, 좋은 환경을 빼앗아 고난을 당케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곧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피하거나 막아낼 힘이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가족을 취하시면 고아와 과부가 될 수밖에 없고 건강을 취하시면 아플 수밖에 없고 재물을 취하시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나라를 취하시면 방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즉,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곧 주권자로 바로 알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기를 기도하자.
    [13-15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혹은 ‘아니하시면’[KJV]) 라합[바다 괴물]을 돕는 자들[라합의 동료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라.”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바다 괴물과 그 동료들도 그 앞에 굴복할 정도로 두렵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어떻게 서서 감히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대답하며 변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 대답할 수 없고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엄위하신 그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능력, 특히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의(義)가 내세울 것이 없는 의(義)임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없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지 못한다.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빌립보서 3:9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 10:19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다. 물론 여실한 순종은 더욱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지만(요일 3:21-22).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자. 그러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의를 감사하며 오직 겸손히 예수님만 믿고 순종하자.
    [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은 또 말하기를,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한다. 욥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교훈하셨다(눅 18:1).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고(살전 5:17)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빌 4:6-7).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과 같다.
    또 욥은 기도의 응답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기도는 응답을 받는 데 가치가 있다.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7:7-8),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다(요 14:14).
    본문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교만치 말아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과장하여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천한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누추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을 받았어도,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하면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겸손과 두려움으로 감사해야 할 뿐이다. 기도의 응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영적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자. 또 기도의 응답을 믿자. 그러나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 때에, 우리는 자랑치 말고 겸손히 처신하자.
    [17-20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 . .
    욥은 또,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욥은 또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고 말한다. ‘그를 호출한다’는 원어(요이데니 ייוֹי)는 ‘나를 호출한다’는 뜻이다(MT, BDB, KJV). 본문은, 내가 호출을 당하여 엄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욥은 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고 말한다.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낀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죄인이며 내 속에는 사악함과 부패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실상 항변할 자격도, 항변할 담력도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고, 또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베드로전서 4:12-13은,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위로자와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의 부족과 죄악됨을 깨닫고 겸손히 그 고난을 달게 받고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구원을 구하자.
    [21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욥은,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라고 말한다. “나는 순전하다마는”이라는 말은 문맥상 “나는 순전할지라도”라는 뜻 같다(KJV, NIV). ‘순전함’이라는 원어(탐 ם)는 ‘완전함, 흠 없음’이라는 뜻이다. 욥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는 순전한 삶을 살았다. 욥기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기 6:29,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욥기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원문은 “나는 나의 영혼을 알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왜 이런 처지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결말이 어떨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든지, 혹은 앞절과 더불어 그가 자신의 온전함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든지, 혹은 뒤따르는 구절과 함께, 고난 속에서 심히 피곤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존중할 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는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멸시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가망성이 없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도 버리고 있었다. 욥은 욥기 6:8-9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7:15-16에서는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뼈의 쑤심]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자. 그러나 때때로 까닭 모를 고난이 닥쳐도 참고 의지하자.
    [22-24절]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이 내려 . . . .
    욥은 또 말한다.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쇼트 טוֹשׁ)[매, 채찍]이 내려 도륙될[사람들을 죽일]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맛사 ה)[절망(BDB, KB, NASB, NIV) 혹은 시련(KJV)]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그가 그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때때로 고난과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악인에게 주시는 것과 비슷하게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 의인도 자연적 재해나 교통사고 등을 당한다. 또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 보통 그 재난이 욥의 경우처럼 일시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순교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성도에게 닥친 이런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큰 일이나 큰 불행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참 믿음, 순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시편 58:11은,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라고 말한다.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음을 알고 낙심치 말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없으면 인내하자.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자.
    [25-26절]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욥은 또, “나의 날이 체부(루츠 ץוּר)[달리는 자]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라고 말한다.
    욥은 고난 중에 자기의 날들이 빨리 지나감을 고백하였다. 그는 그의 날들이 달리는 자보다 빠르며 빠른 배와 같고 먹이를 낚아채려고 날아 내려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시편 90:5는 사람의 일생이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말하고, 시편 90:10은 사람의 날들이 신속히 가니 날아간다고 말한다. 옛 사람들은 세월이 화살 같다고 표현하였고 흐르는 물과 같다고도 하였다.
    욥은 그 고난의 날들의 빠른 흐름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다. 우리의 세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인간의 정로(正路)요 복된 삶인가? 에베소서 5:15-17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선한 일들에 힘쓰는 것이다. 전도와 구제 등을 포함한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선한 봉사의 일들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이시다(딛 2:14).
    우리는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살자. 경건하게 살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한 일들에 힘쓰자.
    [27-28절]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 . . .
    욥은 또 말한다.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혹은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해결책으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하나는 그의 원통함 혹은 불평을 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얼굴빛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 즉 마음을 기쁘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법은 잠시 도움이 되거나 많이 수련하면 약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참된 해답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해답일 뿐이다.
    계속 그의 몸이 아프고 계속 그의 환경이 심히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이 참 해결책이 되겠는가? 그는 그의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無罪)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나 심리적 노력이 해답은 못된다.
    그러면 참된 해답, 완전한 해답은 어디에 있는가? 참되고 완전한 해답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에 건강을 주시고 그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셔야 참 해답이 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 해답, 완전한 해답이 되신다. 주께서는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였다(살후 3:16).
    망각이나 심리적 노력은 고난에 대한 참된, 완전한 해결책이 못된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 참 해답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자.
    [29-31절]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 . . .
    욥은 또,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책(罪責)의 문제를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하심 같다고 표현한다. 죄인에게 고난의 징벌을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수고, 예컨대 망각하는 것이나 마음과 얼굴을 기쁘고 즐겁게 가지는 것 등이 헛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 즉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을지라도 주께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가지는 죄악된 생각, 죄악된 감정, 죄악된 말, 죄악된 행위들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옷을 더러운 몸에 입지 않듯이, 그의 옷이라도 그의 죄악된 몸을 싫어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 인간의 죄책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 속에 있지 않고 인간의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위로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증거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롬 8:33-34).
    우리는 인간의 고난의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성령의 위로에 있음을 알자.
    [32-35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며 크신 위엄을 지니신 영이시므로 단지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엄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다’는 말은 ‘함께 법정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시고 욥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욥이 원고가 되고 하나님께서 피고가 되시든지 간에, 그가 법정에 가서 자신의 고난의 정당성을 따져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 둘 사이에 판결할 자도 없다고 말한다.
    욥은 또,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고 말한다.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다’는 원문(웨로켄 아노키 임마디 י יאָ ן־א)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도다’라는 뜻이다(MT, KJV, NASB, NIV).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막대기로 그를 치셨고 그를 누르시며 그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에게 감히 무슨 말씀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면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그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욥의 심적 고통과 방황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거두시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데 있다.
    성도는 고난 중에 참으며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시편 66: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빌 4:6-7).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7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난 중에 두신 이유를 질문하며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또 그는,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호의의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악한 꾀를 품는 악한 자들을 징벌치 않으시고 호의를 베푸시는 것 같음에 대해 묻는다. 또 그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외모로 보고 악한 자를 선한 자로 잘못 판단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공의로 판단하지 않으시는가라고 반문한다(삼상 16:7).
    욥은 또,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査實)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러나]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자가]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달리 사람의 모든 것을 단숨에,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판단하시며, 또 자신이 악하지 않음도 아실 것이지만, 자신이 현실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시적 고난을 잘 참고 악인의 일시적 형통에 대해 당황치 말자. 우리는 평소에 양심에 거리낌 없이, 바르고 성실하게만 살아가자.
    [8-12절]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 . . .
    욥은 또,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흙으로 인간의 몸을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게 하시면, 그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욥은 또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한다. 인간의 몸과 신체기관의 시작은 참으로 신비롭다. 엉긴 젖 같은 작은 수정란이 어떻게 정교한 인간의 몸과 각 기관이 되는지 참으로 신비롭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셨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은 9,000억개 이상 아마 수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또 인간의 몸에는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이 있다고 한다. 또 눈, 귀, 코, 입 외에 약 130개의 많은 기관들이 여러 계통들을 구성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위와 식도와 내장과 간 등으로 구성된 소화기 계통, 코와 폐 등으로 구성된 호흡기 계통, 피와 심장 등으로 구성된 순환기 계통, 임파와 호르몬 등으로 구성된 내분비 계통, 뇌, 척추, 신경 등으로 구성된 신경계통, 그리고 비뇨기 계통 등이 그러하다고 한다. 몸의 구조는 참 정교하다.
    욥은 또,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몸뿐 아니라 생명을 주셔서 살아 움직이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 몸 속에 영을 주셨기 때문이다. 영 혹은 영혼은 인간의 생명 원리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알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자.
    [13-17절]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 . . .
    욥은 또,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고난의 일들, 현재의 재앙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또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범죄한 적이 있으나 하나님의 사죄를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 중에서 그것에 의문을 가진다.
    욥은 또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악하면 화를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데도 머리를 들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많은 환난과 수치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욥은 또,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번갈아 가며]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 치는 것 같으니이다”라고 말한다.
    욥의 경우와 같이, 의인에게도 때때로 고난이 있고 그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때도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또 우리를 향해 선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또 우리는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사 50:10).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심을 믿고 참고 기다리자. 로마서 12:12는, “환난 중에 참으라”고 말한다.
    [18-22절]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 . . .
    욥은,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라고 말한다.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차라리 태어날 때 죽어서 태어났더라면 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옮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또,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 평안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한다. ‘저으기’라는 말은 ‘조금이라도’라는 뜻이다.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일생이 짧음을 더욱 느낀다. 시편 39:5에서 다윗도 죽음 앞에서 인생이 손넓이만큼 되고 없는 것같이 짧다고 고백하였다. 욥은 이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고난을 그치시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눈길과 손길을 거두시기를 소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려두셔서 조금이라도 평안을 얻게 해 달라고 구한다. 참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 . .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욥은 또,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세데르 ר)[질서]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죽음의 그늘진 땅, 곧 무덤에 들어가기 전, 지금 이 짧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평안 얻기를 간구한다.
    우리도 우리의 이 세상의 삶의 짧음을 인식하고 또 참 평안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식하고, 고난 중에도 오직 인내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6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 . . .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소발은 욥이 자기의 말이 정결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한다고 증거한다. 그렇다. 욥은 자신이 악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소발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다”는 원문은 “하나님께서 너의 악을 네게 다 돌리지 아니하신다”는 뜻이다(BDB).
    소발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단지 그것이 욥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욥의 고난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벌은 죽음, 곧 지옥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며, 비록 징벌하셔도 엄격히 하지는 않으신다. 시편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에스라 9:13,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우리의 구원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을 달게 받고 불평치 말자. 그것은 우리의 죄보다 가볍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구하자.
    [7-9절]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 . . .
    소발은 계속 말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지옥]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도량’이라는 원어(밋다 ה)는 ‘연장, 외연(extension)’이라는 뜻으로, 크기나 길이를 가리킨다.
    사람은 하나님의 본체와 그의 지혜와 지식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일들, 그 목적과 그 방법도 알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또 하나님의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욥기 5: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시편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great]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신명기 29:29,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전도서 3:1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사람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조금 알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그를 섬기며 믿고 순종하자.
    [10-12절]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 . . .
    소발은 또,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開廷)하시면[모이게 하시면, 법정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 되심을 고백한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고 말한다.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 특히 사람의 모든 악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소발은 그러나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고 말한다. 원문은, “허망한 사람이 지각이 있다면,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나리라”(NASB)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은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듯이, 허망한 사람이 지각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시편 10편에 보면, 악인들은 잘못 생각한다. 4절,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11절,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3절,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물론 악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큰 잘못이며 큰 착각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모든 일을 감찰하신다.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15절,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히브리서 4:12- 13,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는 허망한 사람이 되지 말고, 주권자 하나님과 그의 감찰하심을 아는 지혜를 구하며 얻자. 특히, 악을 버리고 힘써 선을 행하자.
    [13-14절]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소발은 또,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가다듬고, 준비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옳은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때 우리 손에 죄악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멀리 버려야 하고 회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죄와 불의가 우리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손에 죄악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손은 우리 몸의 매우 중요한 지체이다. 우리는 손으로 사물을 만지고 붙잡고 물건을 집고 또 옮긴다. 우리의 손은 우리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사야 1:15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인간은 손으로 우상을 섬기며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손이 깨끗한지 항상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죄악을 멀리해야 한다. 죄는 무서운 질병이나 더러운 오물과 같다. 우리는 밖에 나갔다 오면 건강 위생을 위해 손을 비누로 한두 번 깨끗이 씻는다. 이와 같이, 죄성의 잔재를 가진 우리는 이 죄와 마귀의 시험이 많은 세상에 살 때 우리의 손이 죄로 더러워지기 쉬우므로 늘 손을 씻듯이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 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불의로 우리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장막’은 집 곧 가정을 말한다. 사람은 자기 집에서부터 잘 해야 한다. 사람은 가족이 함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아간은 멸망할 물건을 장막 땅 속에 묻었다가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하였다(수 7장). 아나니아 부부는 함께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다가 즉사하였다(행 5장).
    우리는 우리의 손을 살펴보자. 혹 죄가 있으면, 즉시 그것을 회개하고 멀리 버리자. 또 불의가 우리 집에, 우리 가정에 거하지 못하게 하자.
    [15절]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소발은 또 말한다.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라.” ‘그리하면’은 앞절에 말한 대로 “그가 손에 죄악이 있으면 그것을 멀리 버리고 불의로 그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담대함의 비결을 말한다.
    ‘네가 정녕’이라는 말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다는 뜻이다. 소발의 말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일반적인 진리와 일치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굴을 못 든다. 죄를 짓고도 얼굴을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뻔뻔한 자이거나 위선적인 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면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성경은 담대함의 비결이 의를 행하는 데 있음을 증거한다. 레위기 26:36, “내가 그들[계명을 어기는 자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여호수아 1:7- 8,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시편 119:6,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요한일서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죄는 양심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의는 양심의 평안과 담대함을 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 거하고, 또 실제로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자. 그러면 우리는 담대히 기도할 수 있고 또 살 수 있다.
    [16-17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 . . .
    소발은 또 말하기를,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명기 28장은 범죄하는 사람이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였고, 이사야 48:22는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손을 깨끗이 하고 악을 철저히 회개하면 그 환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에서 그를 건져주실 것이다. 그는 곧 환난을 잊을 것이며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다. 와디(wadi)라는 강은 비가 온 직후에는 요란스런 물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비가 그치고 얼마 지나면 흐르던 물은 다 없어져버리고 다 말라버리고 조용해진다. 회개한 자에게도 그렇다. 지금 아무리 환난이 요란한 강처럼 흐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소발은 또,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두움은 환난을 가리키고 대낮이나 아침은 평안과 행복을 가리킨다. 회개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2-6은,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또 이사야 48:18은,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의는 평강을 가져온다.
    죄는 환난의 원인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면 환난을 극복할 수 있고 평강을 누릴 수 있다.
    [18-20절]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 . . .
    소발은,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라”고 말한다. 성도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반석이시며 요새시며 방패시요 산성이시라고 고백하였다(시 18:2). 성도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또 하나님을 소망하는 성도에게는 안전함과 편안히 쉼이 있다. 그러므로 시편 3:5-6은,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소발은 또,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고 말한다. ‘첨을 드린다’는 원어(킬라 ה, 피엘형)는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사람도, 원수 마귀까지도 성도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에게 호의를 구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소발은 또,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고 말한다. 악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 회개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 재앙을 피하여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잠언 10:25는,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24:16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하였다.
    소발은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고 말한다. ‘기운이 끊친다’는 말은 영혼의 호흡이 끊어진다는 뜻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악인은 소망이 없다. 악인의 소망은 절망이다. 그의 소망은 죽음뿐이다.
    평안의 길은 죄를 회개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다. 악은 불행을 가져오고 의는 평안을 가져온다. 우리는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12장: 욥--나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안다
    [1-6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 . .
    욥은 대답해 말했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과 순전함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친구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실족하는 자같이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원문 5절은 영어성경들처럼 “발이 미끄러지는 자는 평안한 자의 생각에 멸시받는 등불 같구나”(KJV), 또는 “평안한 자는 발이 미끄러지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재앙을 멸시하는구나”(NASB, NIV)라고 번역된다.
    욥은 또, “[그러나]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한다. 소발은 앞장에서 욥의 재앙이 그의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회개하라고 욥에게 말했는데, 욥은 이제 그의 논리를 반박한다. 재앙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왜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한가라고 반문한다. 과연, 세상에는 그런 일이 있다. 시편 73편 같은 성경도 악인의 평안과 형통에 대해 말한다(4-5, 12, 14절).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을 수 있으므로 고난만 보고 속단하지 말자. 그러나 의인은 결국 승리할 것이므로 우리는 의만 행하고 범죄치 말자.
    [7-12절]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 . .
    욥은 또,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고 말한다.
    욥은 악한 자들이 형통하다는 것은 자연계도 아는 진리라고 말한다. 자연계는 강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사자와 호랑이는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고, 독수리나 매는 약한 새들을 잡아먹고, 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욥은 또,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생물들의 혼(네페쉬 שׁ)[생명]과 인생들의 영(루아크 חוּר)[호흡]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이 모든 자연계의 현상은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것들이다.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인간 세계에서 악한 자들이 활개치고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들이다.
    이런 도덕적 무질서는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세상은 본래의 도덕성과 질서와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악화되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고 천국에서는 완전한 의의 회복이 있을 것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악인이 형통한 일들이 있다. 이 사실은 단순히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 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이러한 현실을 알고 그것 때문에 당황하지 말고 불평하지도,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을 믿고 항상 의와 선만 행하자. 하나님의 형상답게, 천국시민답게 살아가자.
    [13-25절]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즉 곧 마르고 물을 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속하도다.] 모사(謀士)[고문들]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열왕의 맨 것을 풀어[푸시며]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확창]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만민의 두목들[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개인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다 지혜와 권능, 모략과 명철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신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자연만물을 주관하시고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신다.
    또 세상에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통당하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다. 또 세상에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일들, 즉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다 주권자 하나님의 손 안에서 되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명령을 가장 귀히 여기고 절대순종하며 살아가자.
    13장: 욥--너희는 다 쓸데없는 의원들이다
    [1-12절]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 . . .
    욥은 계속 말한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거짓말로] 지어내는 자(토펠 ל)[바르는 자, 더럽히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그를 위해 편벽됨을 보이려느냐?](NASB, NIV)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편벽됨을 보일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土城)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진리를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바른 말, 좋은 말이라도 잘못 적용하면, 그것도 계속 잘못 적용하면, 그는 거짓말로 더럽히는 자가 되고 쓸데없는 의원과 같이 될 것이다. 또 그의 말은 불의하고 거짓된 말이 되고,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재 같은 속담”이며 “토성(土城)”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에게와 이웃에게 적절하게 잘 적용하자.
    [13-19절]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 . . .
    욥은 또 말한다.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죽이실지라도] 내가 소망이 없노라[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변호]하리라. 사곡한[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그는](KJV)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은 친구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하여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18절). 그는 앞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었다. 욥기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또 12:4에서, 그는 자신을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겠다고 말한다. 15절,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호하리라”(원문 재번역).
    또 욥은 자신의 구원을 기대한다. 16절, “사곡한[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는 자신이 불경건한 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이 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욥처럼 자책할 거리가 없는 자가 되자. 사도 바울도 그렇게 간증하였고(고전 4:3-4) 사도 요한도 그런 교훈을 하였다(요일 3:20-21).
    [20-28절]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 . . .
    욥은 또 말한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웨후 אוּה)[그는](KJV)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알고 그가 그의 손을 자기에게 대어 죽게 하지 마시고 그의 위엄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21절) 자기에게 주신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욥은 자신의 죄 문제를 생각한다. 그는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며(23절), 또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라고 말한다(26절).
    욥은 또한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날리는 낙엽’과 ‘마른 검불’이라고 표현하고(25절), 자신이 ‘썩는 물건의 후패함’과 같고 ‘좀 먹은 의복’ 같다고 말한다(28절). 사람은 병으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바른 가치 평가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을 살피고 우리의 비천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가자.
    14장: 욥--인생은 그림자같이 신속하다
    [1-2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 . . .
    욥은 또,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생의 삶에 대해 말한다.
    욥은 우선, 인생의 삶이 짧다고 말한다. 1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야고보서 4:14도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하였다. 인생은 짧다.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한다(1절). 야곱도 바로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나이가 130세요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말했다(창 47:9). 모세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꽃과 같이 쇠한다고 말한다. 2절,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시편 103:15도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고 말하며, 이사야 40장도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말했다(사 40:6, 8). 꽃은 아름다우나 오래가지 못하고 얼마 후에 시들고 만다. 인생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그와 같다.
    욥은 또 인생의 삶이 그림자같이 신속하다고 말한다. 2절,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성경은 다른 곳에서도 인생이 그림자와 같이 머무름이 없다고 말한다(대상 29:15; 시 39:6; 144:4). 시편 90:10은 인생의 삶이 날아가듯 신속히 간다고 표현하였다.
    우리는 이 짧고 괴로움 많고 쇠해지고 신속히 가는 삶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영생과 영원한 천국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3-4절]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 . . .
    욥은 또 말한다.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은 앞에서 인간의 삶을 풀 같은 인생, 꽃 같은 인생, 그림자 같은 인생, 한마디로 허무한 인생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무한 존재인 인생을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이런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라고 반문한다.
    또 그는 인생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져 있는 존재이며 이런 인생에게서 어떻게 깨끗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엄격히 심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가 다 깨끗지 못하며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며 우리가 인정하는 진리이다.
    창세기 8:21,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레위기 12장에 의하면, 여인은 출산 후 속죄제물로 자신을 속죄해야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출생하는 죄인임을 나타낸다. 욥기 15:14,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생이 필요하다.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은 더러운 죄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의 보혈로만 죄씻음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보혈 공로만 감사하자.
    [5-6절]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 . . .
    욥은 또 말하기를.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꾼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생을 다 정하셨다. 그는 우리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을 지를 다 정하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된 날들 동안 우리는 세상에 살고 그 날이 끝나면 죽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을 아무도 넘어가지 못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고 주장하신다고 말했다(단 5:2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도 작정하시고 주장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밤 한 부자 농부의 영혼을 불러가실 수 있듯이(눅 12:16-20), 그는 우리의 영혼도 언제든지 그의 정한 때에 불러가실 수 있다.
    이제 욥은 하나님께서 품꾼 같은 삶을 사는 자신에게 생이 마칠 때까지 평안 주시기를 소원한다. 평안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 아닌가?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다고 고백하였다(시 4:8). 또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영혼은 평안히 거할 것이라고 증거하였다(시 25:13).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들은 서신들에서 반복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였다(롬 1:7; 고전 1:3 등).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6에,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라고 썼다.
    인간의 일생이 하나님의 정하신 길임을 알고 죽음을 염려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일하고, 또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자.
    [7-22절]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 . . .
    욥은 또 말한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강]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무덤]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고난의]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변화가 오기까지](KJV, NASB) 기다렸[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였[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사모하시리이다]. 그러하온데[이는]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살피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욥은 자신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소망하는 것 같다. 성경은 우리의 몸의 변화의 날 곧 부활의 날을 밝히 증거한다(고전 15:42-44, 51-52).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부활의 첫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증거이시다(고전 15:12-22).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 . . .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대답하며 말했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어찌 유조(有助)치 아니한[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黙禱)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여러 말로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는 욥의 말이 ‘헛된 지식,’ ‘무익한 말,’ ‘불경건한 말,’ ‘간사한 자의 혀’라고 비난하였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고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고 변호했던 것인데,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정당하지 않게, 그릇되이 비난한 것이다.
    참된 성도도 친구들에게 이런 오해를 당할 수 있다. 욥의 고통은 경제적, 가정적,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친구들의 비난까지 겹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욥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요 욥기의 중심적 교훈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바른 조언을 주어야지 잘못된 조언을 주거나 그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잠 25:11). 또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주관적 판단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전 4:5).
    우리는 친구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자. 우리는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말자.
    [7-10절]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謀議)[은밀한 회의](NASB)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확고한 지식과 신념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 친구들 가운데는 나이 많은 자도 있고 심지어 욥의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며 나이 많은 자들은 젊은 자보다 지혜와 지식이 더 많은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율법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했다(레 19:32). 욥기 12:12도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의 조언하는 바를 버리고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조언을 따라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하며 행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초래했다(왕상 12:6-20).
    그러나 영적 진리는 반드시 연령에 비례하지 않는다. 시편 119:100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는 자가 노인보다 더 명철하다고 말했다. 주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마 11:25).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나이와 세상 경험이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 심령이 무지하고 완고하였고 영광의 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우리는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조언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지키자.
    [11-13절]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 . . .
    엘리바스는 또,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말씀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고 말한다. 그가 말한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들, 즉 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자기들의 충고들을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라고 말하며 욥이 왜 그것들을 무시하느냐고 꾸짖는다. 그러나 실상 욥의 친구들의 충고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 아니었다.
    엘리바스는 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고 말한다. ‘네 눈을 번쩍여’라는 표현은 불쾌하고 적대적인 마음을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욥이 그런 눈빛을 하면서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입으로 말들을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욥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친구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던 것뿐이다. 욥의 말은 친구들을 반대한 것이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바스가 욥의 말들을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불경건한 말로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잘못 평가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다윗은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다고 말했었다(시 56:5).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6:2).
    우리는 성경의 바른 지식을 가지고,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사람과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자.
    [14-16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 하시나니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엘리바스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수아 사람 빌닷도 그와 비슷하게 욥기 25:4-6에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하였다. 사람의 죄성과 그 결과로 인한 심한 비천함과 불행은 가히 벌레와 구더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절대적 의미에서 사람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자신의 죄악됨에 대해 욥기 14:4에서,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을 만한 어떤 특정한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하였다. 평소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엘리바스가 증거한 사람의 전적 부패성은 진리이지만, 그가 그것을 욥에게 적용하려 한 것은 무리하였고 적절치 않았다.
    인간의 전적 부패성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실패에서, 또 사사시대의 반복된 범죄에서, 또 구약의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였고 선을 행하기에 무능함을 증거하였다(렘 17:9; 13:23).
    우리는 인간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을 깨닫고 또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충성하자.
    [17-19절]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엘리바스는 지혜자들이 그 열조로부터 받아 숨기지 않고 전해준 것, 곧 인간의 전통적 지혜의 말을 욥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는 말은 그 열조들의 지혜가 외부의 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고 전달되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전통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좋은 것도 있으나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심지어 교회적 전통도 그러하다. 교회 역사는 교회의 부패를 증거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켰으나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주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 때 주께서는 책망하시듯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이와 같이, 사람의 전통, 심지어 교회의 전통도 완전치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너무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완전하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만 굳게 지켜야 한다(살후 2:15).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은 오직 신구약 성경뿐이다.
    [20-24절]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 소리가 들리고 . . . .
    엘리바스는 계속 말한다.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미스콜렐 לוֹח)[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니츠페누 וּנ)[혹은 ‘저장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페카딤 םי)[두려움의, 두려운 일들의](KJV, NASB, NIV)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자신이 어두운 데서 나오리라고 믿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양식을 위해 방황하며]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엘리바스가 전하는 열조들의 지혜의 말은 악인이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악인은 일평생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는 그 죽음의 날이 언제 찾아올 지 모르나 다 작정되어 있다. 악인의 귀에는 두려운 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할 것이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악인은 자신이 그 환난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며 칼날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을 것이다. 또 그는 양식이 부족하여 그것을 얻으려 방황하며 재앙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환난과 고통은 그를 두렵게 하고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이길 것이다. 악인에게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는 것은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 57:21). 단지, 이 진리가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알고 악인에게 고통과 두려운 일이 따름을 알고, 모든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구하며 행하자.
    [25-27절]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 . . .
    엘리바스는 또,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라고 말한다. 본문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해 그 손을 들며 전능자를 향해 거만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교만하여 배반한다’는 원문(이스갑바르 ר)은 ‘거만하게 행한다’는 뜻이다(BDB, NASB). 고의적 불경건은 대단히 큰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선의 근거이시며 이유이시다.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난다(잠 16:6). 그러나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의지하며 거기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인간이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본문은 또 악인이 목을 굳게 하며 자기 방어물로 무장하며 하나님을 향해 달려들듯이 대적한다고 표현한다. 27절은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을 말한다. “[이는](원문)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음이니라.”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가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유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물질적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히 하나님을 찾지만,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 자기 만족에 빠지고 영적으로 둔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우리는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교만과 거만을 버리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늘 부족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과 계명을 힘써 배우며 실천하자.
    [28-30절]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 . . .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거하는도다].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민람 ם)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흑암한 데’는 환난과 재앙을 가리키며,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가리키며, ‘가지’는 사람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엘리바스는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할 것이다. 그가 사는 도시와 성읍이 황폐할 것을 말한다. 또 악인은 비록 지금 부요함을 누리고 상당한 재산과 소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부요함은 끝나고 그의 재산은 항상 있지 못하며 그의 소득도 땅에서 쇠하여질 것이다. 즉 그의 경제적 유여함이 끝나고 궁핍이 찾아올 것이다.
    악인은 환난과 재앙을 떠나지 못하며 그것이 항상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은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쇠잔케 할 것이다. 그리고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입김, 곧 그의 진노의 입김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악인의 보응은 확실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양심으로 느끼는 바이며 또 삶 속에서 경험하는 바이다.
    우리는 악인이 심판받음을 인식하고, 그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자. 우리는 오직 모든 악을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 하나님의 평안과 형통을 누리자.
    [31-35절]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 . . .
    엘리바스는 계속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사곡한(카네프 ף)[불경건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아웬 ןאָ)[헛된 것]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거짓]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본문은 악인이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취했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다 공허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그것의 헛됨을 깨달았다면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크게 여기며 사모하였을 것이다.
    악인은 ‘그의 날’ 곧 그의 번창하고 성공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 곧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은 잘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고 감람나무에서 감람 꽃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악인은 잘되는 것 같다가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은 불경건하고 뇌물을 받는 자들인데 결실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그들의 장막, 그들의 집과 가정은 불탈 것이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헛된 것을 행하며 또 거짓된 것을 마음에 준비할 뿐이다. 의인과 악인의 삶은 판연히 다르고, 악인은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악인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응을 받아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산업이 쇠잔해지고 멸망하게 됨을 알고,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고, 세상의 것들에 큰 가치를 두지 말고, 오직 경건하고 선하게만 살자.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5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 . .
    욥은 대답하여 말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아말 ל)[고통을 주는] 안위자로구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카사크 .)[덜었으리라](KJV, NASB, NIV).”
    욥은 친구들을, ‘번뇌케 하는 혹은 고통을 주는 안위자’라고 표현한다. 그의 친구들은 고난이 죄의 형벌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그 생각을 욥에게 줄곧 적용하였다. 그들의 충고는 욥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과 슬픔을 더하였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진리이지만, 욥의 고난은 단순히 신앙 인격의 성숙을 위한 것이었다.
    욥은 만일 친구들이 자기 같은 처지에 있다면, 자기도 그들을 비난하며 책망하며 그들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그들을 멸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욥의 이러한 말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행위에 빗대어 가상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런 때에도 자신은 입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요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원하신다. 에베소서 4:32는 우리에게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친구에게 고통을 주는 위로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바른 말로 충고하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가 되자.
    [6-8절]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 . . .
    욥은 또,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고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말하지 않고 잠잠히 있는 것보다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것이 그의 마음의 근심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근본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그의 근심을 완전한 해소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욥은 심각한 고난 중에서 말해도 잠잠해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욥은 또,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나의 무리’라는 원어(아다시 י)는 욥에게 딸린 식솔들, 즉 욥의 가족들과 종들을 가리킬 것이다(BDB, NIV). ‘패괴케’라는 말은 ‘황폐케’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셨고 자기 가족들을 황폐케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심신으로 곤고하고 자기 자녀들이 다 죽고 자기 아내도 낙심하여 자기를 위로하는 대신 욕하고 자신의 재산을 다 잃어버린 것 등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들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욥은 또,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원문에는 ‘나의 죄’라는 말은 없다(KJV, NASB, NIV). 욥은 자신이 심신으로 쇠잔케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그의 파리한 모습이 그를 대적하여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 말 번역처럼 그가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성도는 비록 욥처럼 어떤 특정한 죄가 없을지라도 고난 중에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 진리는 성경 진리이다(창 45:8; 룻 1:21). 욥은 이 믿음을 가졌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그것을 거두실 이도 하나님이신 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자.
    [9-14절]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 . . .
    욥은 또,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窘迫)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신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진노로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그를 찢으시며 대적하신다고 말한다. ‘군박하다’는 원어(사탐 ם)는 ‘대적하다’는 뜻이다. 또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이를 가시고 뾰족한 눈으로 보신다고 표현한다. 뾰족한 눈은 사랑과 동정의 마음이 아니고 미움과 진노의 마음을 나타낸다.
    욥은 또,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라고 말한다. ‘입을 벌린다’는 말은 남을 해치거나 비난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문하기 위해 와서는 그를 혹독하게 비난하였다. 그들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 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그를 대적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라고 말한다. 경건치 않은 자와 악인은 아마 욥의 가축들을 탈취해간 이웃 나라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다.
    욥은 또,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라브 ב)[궁수]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시는도다”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그 무섭고 혹독한 고난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 말고 까닭 없이,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주시는 고난이 있다. 우리는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하나님께 감당할 힘을 구하며 인내로써 달게 받아야 한다.
    [15-17절]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 . . .
    욥은 또,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꿰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라고 말한다. 굵은 베는 꺼칠하여 감촉이 좋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금식할 때나 심히 슬플 때 보통 굵은 베옷을 입는다. 욥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그의 슬픔과 고통과 탄식을 나타낸다. 또 그는 자신의 뿔, 곧 힘과 영광이 티끌에 더럽혔다고 말한다. 욥은 힘도 없었고 영광도 잃어버렸고 더러워졌다.
    욥은 또,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라고 말한다. 사람이 마음의 고통이 심하여 많이 울 때 그 얼굴도 붉게 상기된다. 또 욥은 자기의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많이 울어 그 눈이 쇠해졌고 그의 기력도 쇠하여 곧 죽을 사람처럼 눈꺼풀이 감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또,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고 말한다. ‘포학’이라는 원어(카마스 ס)는 ‘강포, 악행’이라는 뜻이다(BDB).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라는 원문은 “내 손에 악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다(Gesenius).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자신이 악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욥은 또,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말한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다. 그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한다. 또 욥은 거짓과 위선의 말로가 아니고 진실과 진심의 말로 기도하였다. 그것이 정결한 기도이다. 욥은 믿음으로 기도하였고 진실과 진심으로 기도하였다.
    우리는 욥의 경건을 본받기를 원한다. 우리는 평소에 정직하고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또 고난 중에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한다. 욥과 같이, 믿음과 진실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한다.
    [18-22절]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 . . .
    욥은 또,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내 피’는 욥이 잘못 행하여 남의 피를 흘린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자신이 남의 피를 흘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를 원한다. 또 그는 그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한다. 즉 그의 부르짖는 기도의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올려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욥은 또,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保人)이 높은 데 계시니라”고 말한다. ‘보인’이라는 원어(사헤드 ד)는 ‘증인’(에드 ד)과 동의어이다(BDB). 영어성경들은 ‘옹호자’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욥은 하늘에 그의 증인이 계시다고 말한다. 그는 욥의 중심을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시고 증거하실 것이다.
    욥은 또,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욥의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고 있으나 욥은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하나님, 저의 중심을 살피시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고 바르고 선하게 살고자 애쓴 것을 증거하여 주옵소서.” 욥은 자신이 수년이 지나면 돌아오지 못할 길, 곧 죽음의 길로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죽기 전에 그가 옳은지 아니면 친구들이 옳은지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 하나님의 증거를 보기를 원한다. 그래야 그가 평안히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증인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오해를 받을 때 오직 그에게 의탁하며 호소하자.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5절]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 . . .
    욥은 또,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 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몸의 병으로 인해 기운이 쇠하였고 살날이 다 하였고 이제 죽어 무덤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병자들이 겪는 심적 과정이기도 하다.
    욥은 또,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그를 조롱하는 친구들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고 있다. 이것은 그를 더욱 피곤하게 하고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욥은 또,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나를 보증할 자]가 누구리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심신의 피곤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보증자가 되셔서 보증물을 주실 것을 요청한다. 자신이 죄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그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욥은 또,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는 5절은, “친구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는 자의 자식들은 눈이 쇠할지어다”라는 뜻일 것이다(KJV). 그것은 그가 친구에게 아첨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 같다.
    욥은 고난 중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고난받는 성도에게 필요한 덕은 믿음과 인내이다. 마지막 대환난 시대에 성도에게 요청되는 덕도 믿음과 인내이다.
    [6-9절]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 . . .
    욥은 또,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극심한 고난 가운데 던지셔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셨고 그들이 심지어 그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표현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건강하고 부요할 때는 그 앞에 친근히 하고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하던 사람들도 그가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으니 그를 떠나가고 그를 비웃고 그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욥은 또,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눈이 근심으로 인하여 어두워졌다고 말한다. 또 그의 온 지체가 그림자 같다는 말은 그의 사지백체도 쇠하여져서 그의 눈으로 보기에 그림자같이 희미하다는 뜻이거나 그의 몸이 쇠해서 그림자같이 죽어 없어질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또,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한[불경건한 자] 자를 인하여 분을 낸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을 정직자와 무죄자로 표현했고, 그의 친구들을 포함해 그를 비방하는 이웃들을 불경건한 자로 표현하며, 자신이 그들로 인해 놀라고 분을 낸다고 말한다.
    욥은 또, “그러므로[그러나](NASB, NIV)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굳게 붙들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현실을 인해 놀라고 친구들의 공박에 대해 화와 분이 나지만, 자신을 ‘의인’과 ‘손이 깨끗한 자’라고 표현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며 점점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참된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참된 성도는 때때로 이유 없는 고난에 떨어지고 그러한 현실 때문에 놀랄 수 있고, 또 그를 곡해하고 비방하는 자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때에도 자기 길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10-16절]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 . . . .
    욥은 또 말한다.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사모하는 바’라는 원어(모라쉐 יוֹמ)는 ‘품은 생각’이라는 뜻이다(BDB).
    욥은, 친구들이 다 무지하며 또 자신의 날이 지나갔고 그의 계획 곧 그의 마음에 품은 생각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가 계획하고 그 마음에 생각했던 바는 그의 건강과 행복 등을 포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오직 죽음 앞에 직면해 있다고 느낀다.
    욥은 또,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 가깝다 하는구나”라고 말한다. 본절의 ‘그들’은 악인들을 가리키든지(NIV), 아니면 그가 마음에 생각했던 것들을 가리킬 것이다(Amplified Bible). 전자의 뜻으로 읽는 것이 나아 보인다. 악인들은 빛과 어두움을 바꾸며 산다. 그들은 밤에 쉬지 못하고 낮처럼 보낸다. 또 그들은 빛이 어두움과 가깝다고 말함으로 그 둘을 혼동한다. 빛은 의와 진실과 선과 행복의 상징이다. 실상 그들에게는 의도, 행복도 없다.
    욥은 또,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고 말한다. 그는 이제 죽음을 생각할 뿐이다. 인간적으로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의 심정과 심리이다.
    죽음의 문 앞에 선 인생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 그런 자를 위로할 말이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의 복된 소망을 주셨다.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4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 . .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빌닷이 욥에 대해 ‘너희’라고 말한 것은 욥에게 그를 지지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빌닷이 말하는 주된 대상은 욥이다. “말을 찾는다”는 원어는 “말에 올무를 놓는다”는 뜻이다(BDB, NASB). 빌닷은 욥이 친구들의 말에 올무나 놓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욥에게 심지어 “깨달으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욥을 무지한 자로 몰아댄다.
    빌닷은 또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고 말한다. ‘부정하게 본다’는 원어(타마 ה)는 (1) 어리석게 여기다(게세니우스, BDB, NASB, NIV), (2) 부정하게 여기다(KJV)는 뜻을 가지는데, 전자가 더 적절한 것 같다. 욥은 친구들에 대해 17:4에서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했었다.
    빌닷은 또 욥을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라고 부른다. 원문은 “그는 자신의 분노 중에 자신을 찢는도다”라는 뜻이다(KJV).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에 불평하고 대항하여 분노를 품으며 자신을 찢고 상하게 만든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선조들은 광야에서 항상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멸망을 자초하였다(민 11:1; 14:1-3; 20:4; 21:5). 물론 그것은 욥의 경우에는 적절치 않다.
    빌닷은 또,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변적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믿음 없고 무지한 자처럼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에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항상 긍정하고 순응하자.
    [5-10절]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그 강한 걸음이 . . . .
    빌닷은 또,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라고 말한다. 빛과 불꽃은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그의 가정의 기쁨과 행복도 사라질 것이다. 잠언 13:9는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4:20은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했다.
    빌닷은 또,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일시적으로는 그 걸음이 강한 것 같고 그의 베푸는 꾀가 형통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강한 걸음은 곧 곤하여지고 그는 자기가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
    빌닷은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 얽는 줄을 밟음이며 그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음이라”고 말한다.악인이 스스로 망하는 까닭은 그의 발이 스스로 자기가 만든 그물에 들어가고 올무의 줄을 밟기 때문이다. 그의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다. 빌닷은 그를 동여맬 줄이 땅에 숨겨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자기의 올무에 자기가 걸린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은 그 생생한 예이다. 악한 하만은 착한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집뜰에 높이 25미터의 장대를 만들었으나 그 자신이 거기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에 7장). 다니엘을 모함하여 사자굴에 던져 죽게 하려 했던 악한 동료들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웠다(단 6장).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강하고 형통한 것 같으나, 그들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11-15절]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며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 . . .
    빌닷은 또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악인을] 놀래고 그 뒤를 쫓아올 것이라.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에게는 도적이나 강도나 무서운 짐승이나 무서운 질병과 큰 사고 같은 무서운 것이 임하여 사방에서 그를 놀래며 그 뒤를 쫓아올 것이다. 잠언 10:24는,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라고 말한다. 또 악인의 힘은 기근으로 쇠해질 것이며 그의 곁에는 무서운 재앙이 기다릴 것이다.
    빌닷은 또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라는 원문은 “그것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먹으리니”라는 뜻이다(NIV). ‘그것’은 그에게 임한 재앙을 말할 것이다. 재앙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해할 것이며 마침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빌닷은 또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간다”고 말한다. 그는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힐 것이다. 그는 가정의 안정을 잃어버릴 것이다. 또 그는 ‘무서움의 왕’에게 잡혀갈 것이다. 즉 그는 평안을 잃고 극한 두려움에 떨어질 것이다.
    빌닷은 또,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한다”는 원문은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그의 장막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든지(BDB, NASB), 혹은 “그것[무서움의 왕]이 그 장막에 거하므로 그것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리라”는 뜻일 것이다(게세니우스). 또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다. 그 집은 완전히 불태워지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고(사 48:22) 질병, 사고 등의 무서운 것이 임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주 안에서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16-21절]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그의 기념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 . . .
    빌닷은 또,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와 그 가정이 일시적으로 번창하는 것 같아도 결국 자신도, 그의 자녀들도 다 멸망할 것이다.
    빌닷은 또, “그의 기념[기억]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의인들의 기억은 세상에 오래 남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악인들의 기억은 땅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그의 이름은 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함도 없을 것이다. 멸망의 예로서 외에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빌닷은 또, “그는 광명 중에서[광명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들도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만 곧 불행 속으로 몰려 들어가며 또 세상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까지는 세상을 적어도 양심 있는 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유지되게 하실 것이다.
    빌닷은 또,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자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대를 이을 자들이 없을 것이며 또 그가 부요하였을 때 그의 집에 머물었거나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도 다 그를 떠날 것이다.
    빌닷은 또, “그의 날을 인해 뒤에 오는 자가 앞선 자의 두려워하던 것같이 놀라리라.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하니라”고 말한다.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했던 자가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망할 수 있는지 이전 사람들도, 후대 사람들도 놀랄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인은 자기 자신만 망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집과 가정도, 가족들까지 멸망할 것이다.
    빌닷이 말한 하나님의 공의는 옳은 말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기억하고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자.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1-12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 . . .
    욥은 대답하여 말한다.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우리는 바른 충고라도 한두 번 한 후 그가 그것을 듣지 않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없겠으나 욥은 사람 앞에서는 지적받을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롭게 살려고 애쓴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고 욥은 친구들이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욥은 또 말한다. “내가 포학[해]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재판받음]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갔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하나님께서는 욥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고 그를 향해 진노하시고 그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리셨다. 욥은 이제 자신이 죽은 자와 같고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성도는 때때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낙심치 말고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참고 기다리며 바르게만 살자.
    [13-22절]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 . . .
    욥은 또 말한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내 형제들에게도 꺼림을 받는구나](BDB)(NASB, NIV). 하나님께서는 욥의 형제들과 친지들과 가까운 친구들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시고 심지어 그의 집에 우거한 자들이나 그의 여종들도 그를 무시하고 박대하며 그의 숨결을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들도 싫어하게 하셨다.
    욥은 또 말한다.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어린아이들도 그를 업신여겼고 그를 조롱하였고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미워하며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적이 되었다. 그는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셨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에게 하나님처럼 그를 핍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까닭 없이 고난받는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김과 위로의 말이다.
    욥의 친구들과 심지어 가족들도 그를 무시하고 멀리하였다. 우리는 사람에게 절대적 가치를 두지 말자. 우리는 절망적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절대 가치를 두고 의지하고 인내하며 따르자.
    [23-26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 . . .
    욥은,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고 말한다. 욥의 시대에 글자와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고 책이 있었고 돌에 새기는 일이 있었음을 보인다. 욥의 소원대로 그의 일들이 자세히 욥기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욥은 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놀라운 계시 지식이다. 이것은 욥의 구속자(救贖者)시요 우리의 구원자이신 메시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활하실 것을 증거한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식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이 귀한 사실을 약간 알게 하셨다.
    욥은 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한다. ‘육체 밖에서’라는 원어(밋베사리 י)는 ‘내 육체로’(in my flesh)(KJV, NIV), ‘내 육체로부터’(from my flesh) (NASB), 혹은 ‘내 육체 밖에서’(apart from flesh)(BDB, NIV 난외주)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내 육체로’ ‘내 육체로부터’는 아마 ‘부활하여’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그것은 부활 신앙과 부활 소망을 보인다. ‘내 육체 밖에서’는 ‘영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즉 이 구절은 욥이 죽어 그의 몸이 썩는다 할지라도, 영으로 하나님이신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뜻이든지, 아니면 장차 부활하여 그를 볼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욥의 구속자이시며 우리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 중에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며 바르게만 살자.
    [27-29절]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 . . .
    욥은 또,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말한다.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 눈이 보리라”는 뜻일 것이다(KJV, NASB, NIV).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구주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또 “내 마음이 초급하다(칼라 ה)”는 원문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쇠하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욥은 자기 눈이 메시야를 볼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금 마음의 쇠약함이 있음을 고백한다.
    욥은 또,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라고 말한다. 원문은 아마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우리가 왜 그를 핍박하는가?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도다 하는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KJV). 원문에는 ‘그에게’라는 말이 ‘나에게’(비 י)라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말하는 자의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하고 공박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비난의 근원이 욥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비난은 욥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욥은 이제,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는 친구들의 비난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잘못된 마음과 행동을 고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시며 우리를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자이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두려워하자. 우리는 범사에 조심하며 의와 선을 행하자.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1-11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 . . .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깨닫는] 마음이 내게 대답하는구나.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카네프 ף)[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소발은 악인의 결말에 대해 말한다. 악인의 형통과 자랑은, 또 불경건한 자의 기쁨과 즐거움은 잠깐이다.
    소발은 또,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겔 ל)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쫓겨가리니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한다. 악인은 지위가 심히 높아진다 할지라도 마침내 지극히 비천하게 되며 다시 그를 볼 수 없도록 영원히 망할 것이다.
    소발은 또,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고 말한다. 악인과 그의 자녀들은 물질적으로 극히 가난해질 것이며, 또 그들은 한때 육체적으로 강건하나 그 강건함과 그 기운도 소멸되고 말 것이다.
    악인은 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우리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자(살전 5:22). 또 우리는 세상의 일시적이고 헛된 육신적 영광을 크게 여기지 말고 그것을 구하지도 말고 부러워하지도 말자.
    [12-19절]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 . . .
    소발은 또 말한다.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악인의 악하게 모은 재물은 자기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가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않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와 같이 쓰게 되고 독이 될 것이다.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다시 토할 것이다. 악인의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어 그를 죽게 만들 것이다. 이웃을 미워함이나 속임이나 도적질하거나 탈취하는 것 등이 다 그러할 것이다.
    소발은 또 말한다.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삼키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워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악인은 물질적 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 즉 복된 환경(출 3:8; 신 32:13-14)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자신이 먹고 즐기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도 자기에게 즐거움과 행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이 망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이나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은 일 등의 악행 때문이다.
    우리는 악인처럼 헛된 재물을 위해 악을 행하거나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고 그의 계명대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잠 14:31; 17:5) 구제하는 일에 힘쓰자(잠 11:24-25; 21:26).
    [20-29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 . . .
    소발은 악인에 대해 계속 말한다.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편안함이 없으며] 그 기뻐하는 것[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혹은 [재앙으로부터] 건지지)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악인은 편안함이 없고 먹을것이 남지 않고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다.
    소발은 또, “[그가] 풍족할 때에도 곤액[재난]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같이 쏟으시리라”고 말한다. 악인은 풍족함을 누릴 때 갑자기 재난들이 닥치며 또 모든 고통하는 자들도 손을 펼쳐 그에게서 무엇을 취하려 할 것이다. 또 그가 배불리 무엇을 먹으려 할 때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비처럼 그에게 내릴 것이다.
    소발은 또,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 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그 재앙은 그에게 치명적이며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소발은 또 말한다.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 그에게는 절망적 어두움이 임하며 하나님의 불이 그를 멸하며 하늘과 땅이 그의 죄악을 드러내며 그와 그의 가산을 쳐서 없앨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오직 예수 믿는 믿음 안에서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행하자.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 . .
    욥은 대답하여 말한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초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나를 보아라. 놀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보면, 악인은 죽어야 하고 단명(短命)해야 하고 세력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즉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아니, 많은 경우에 악인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고 그 세력도 강하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마지막 심판 때에 불평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다(롬 2:4). 셋째로, 그것은 악인을 다른 사람의 심판과 징계의 도구나 최종심판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도구로 쓰셨다. 그러나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악인이 다 금방 멸망하는 것이 아님을 알자. 우리는 악인의 일시적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항상 경건하고 선하게만 살자.
    [8-12절]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 . . .
    욥은 악인의 외적 번창에 대해 계속 말한다. “[악인의]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악인의 자녀들이 번창하고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다.
    욥은 또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악인에게 가정적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징벌이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욥은 욥기 12:6에서도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욥은 또 “그 수소는 영락 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한다. 목축업은 옛날 근동 거주민들의 주업이었다. 가축의 출산은 기업 번창의 주된 요소이었다. 본문은 악인의 기업이 쇠하지 않고 번창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말로 하면, 악한 직장인의 매월 타는 봉급이 증가하고 악한 기업가가 경영하는 기업의 순이익이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욥은 또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 추는구나”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아 잘 기르며 그 자녀들에게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어 보인다.
    욥은 또 “그들이 소고(小鼓)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심지어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소고(小鼓)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즐긴다. 그들은 악기들을 연주하며 노래하고 유흥을 즐기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악인들도 때때로 외적으로 번창한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복은 외적 번창에 있지 않다. 외적 복은 결국 헛되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 인간의 참 가치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다.
    [13절]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욥은 또 말하기를, “[악인은]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고 한다. ‘경각간에’라는 원어(베레가 ע)는 ‘한 순간에, 갑자기, 평안히’라는 뜻이다(BDB). 본절은 악인의 빠르고 고통 없는 혹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묘사한다. 시편 73:4는,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라고 말한다.
    인생의 삶이 이 세상이 전부라면, 이 세상뿐이라면, 악인의 고통 없는 평안한 죽음은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9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주의 사도들과 초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순교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불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죽은 후의 세계가 있다. 또 하나님의 최종적인, 공의의 심판이 있다. 전도서 12:14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9:27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주께서 누가복음 16:19 이하에 기록케 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죽은 후의 세계가 있고 선악간의 보응이 있음을 잘 교훈한다. 또 주께서는 마태복음 5:10-12에서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리는 사람의 외적 상황만 보지 말자. 내세가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오직 경건하게 살자. 거기에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다.
    [14-16절]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 . .
    욥은 악인에 대해 계속 말한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그러할지라도’라는 원어(와 )는 ‘그러므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KJV). 악인은 건강하고 형통하고 평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배척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고 멀리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욥은 또 말한다. “[악인은]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악인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불경건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욥은 또,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고 말한다. 악인들이 평안과 형통을 누리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신 은혜이다. 그러나 악인의 생각과 욥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악인은 불경건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참 경건이 필요하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혹은 시작]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피조물이며 하나님 안에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공급하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햇빛을 쪼이고 비를 맞고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행 17:25-28). 그러므로 인간의 죄들 가운데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죄가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이론적인 혹은 실제적인 무신론은 인간의 죄 중에 가장 근본적인 죄이다.
    악인은 불경건하다. 그러나 우리는 참 경건을 가지자.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하심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섬기자.
    [17-26절]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 . . .
    욥은 또,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캄마 ה)[얼마나 자주] 있었느냐?”고 말한다. 악인의 행복이 그치고 재앙이 그에게 임하고 그가 하나님의 진노로 곤고케 되고 폭풍 앞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되는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욥은 또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손에게가 아니고 악인에게 직접 징벌하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또 “그의 달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만일 악인이 죽고 나면, 그 자손의 불행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고 말한다. 그는 또, 그러나 누가 감히 심판자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고 말한다.
    욥은 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 다 시행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고 말한다. 전도서 8:11도,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인의 평안을 보고 믿음 없는 생각이나 말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하고 의와 선을 행하자.
    [27-34절]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궤휼(메짐마 ה)[악한 생각]도 아노라. 너희의 말이 왕후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의 거하던 장막이 어디 있느뇨 하는구나.” ‘왕후’(王侯)라는 원어(나디브 בי)는 ‘존귀한 자’라는 뜻이다. 악한 군주를 생각케 된다. 친구들은 악한 군주나 악인의 집이 다 패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욥은 대답한다. “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악인은 남기워서 멸망의 날을 기다리움이 되고 멸망의 날을 맞으러 끌려나감이 된다 하느니라.” 욥은 길 가는 사람들도, 악인이 죽은 후 최종적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세상에서 평안히 죽는 일이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누가 능히 그의 행위를 면박하며 누가 능히 그의 소위를 보응하랴마는 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고 그 앞선 자가 무수함같이 모든 사람이 그 뒤를 좇으리라.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악인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앞에서 그의 행위를 면박하고 그의 행위에 대해 보응할 수 있는 자가 없겠지만, 악인은 평안히 무덤에 묻히며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그의 앞과 그의 뒤에 있을 것이며, 또 많은 사람이 그런 길을 밟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인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다가 평안히 죽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을 받으며 최종적으로도 그러할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반드시 그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평안과 불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믿음과 지식을 가지고 의와 선을 힘써 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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