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22-42장 전편 강해 [1장]
  • 조회 수: 1863, 2017.01.04 22:58:55
  • 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 . . .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대답하기를,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충족하시다. 그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는 영원자존(永遠自存)하신다. 그는 영광이 충만하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도 충만하시다. 그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을 드릴 것이 없다. 사람의 의나 행위의 온전함은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완전충족하시다. 욥기 35: 7-8도,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고 말한다.
    물론 사람의 죄는, 비록 하나님께 손해되는 것은 없으나,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죄는 하나님의 권위와 속성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따른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의도 자기에게 유익할 뿐이다. 신명기 10:13은,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계명의 순종은 자신에게 행복이 되고 불순종은 자신에게 불행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전충족하심을 깨닫고 오직 두려움과 단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또 우리는 순종과 의가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고 죄 또한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됨을 알자.
    [4-11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 . .
    엘리바스는 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고 말한다. 그는 욥의 죄악이 크다고 그릇되게 단정한다. 비록 그가 욥의 악행을 잘못 추측하지만, 그가 말하는 악은 분명히 악이다.
    엘리바스는 “[욥이]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담보로 취하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갈한 자[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라고 말한다.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담보로 취하거나 헐벗은 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성경은 이웃의 옷을 담보물로 취했으면 해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고 가르쳤고(출 22:26) 또 맷돌을 담보물로 취하지 말라고 했다(신 24:6). 그것은 옷 없이 추운 밤을 지내거나 맷돌 없이 식사를 준비하는 어려움을 고려한 것이다. 또 피곤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않고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것도 악한 일이다. 성경은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말했다(잠 25:21). 구제하지 않는 것은 악한 일이다.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네가 과부를 공수로[빈손으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권세자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존귀한 자에게 거기에 살게 배려하면서도, 과부는 돕지 않고 빈손으로 돌려보내고 고아의 팔을 붙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꺾고 학대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엘리바스는 또,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악한 자가 되지 말자. 오직 의롭고 정정당당하고 선하게만 살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구제하기를 힘쓰자.
    [12-14절]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 . . .
    엘리바스는 또,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별의 높음이 얼마나 높은가?”라고 말한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가? 그것은 끝없이 높다. 별들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별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계신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그분은 땅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다 아시고 공의로 판단하신다.
    엘리바스는 또 말한다.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엘리바스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너무 높이 멀리 계셔서 모든 악인의 행위를 다 알지 못하시며, 빽빽한 구름과 흑암 때문에, 그것을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추측이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해 그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묘사한 그런 사람은 분명히 악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멀리 떨어져 계셔도 모든 사람의 행동을 다 아시고 빽빽한 구름과 흑암 가운데서도 다 아신다. 오늘날 사람이 만든 인공위성도 고성능, 초정밀 카메라가 있어 하늘에서 지구 위의 일들을 상당히 자세히 알아낸다. 또 적외선 카메라는 밤에도 물체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식별할 수 있다. 시편 139:1-4, 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자. 우리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자.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15-20절]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 . . .
    엘리바스는 또,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고 말한다. 그는 욥이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 한다고 그릇되이 비난한다.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은 죄악된 길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길인데 욥은 그런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다. 엘리바스는 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어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로 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고 말한다. ‘그 터는 하수로 인해 함몰되었다’는 원문은 ‘그 터는 강물에 흘러 내려가는도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는 뜻이다.
    엘리바스는 또,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라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기를 원한다. 아니, 실상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한다. 또 그들은 그의 능력을 무시하고 부정한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셨다. 그들이 땅에서 누렸던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다윗은 말하기를,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고 하였다(대상 29:14). 야고보서 1:17도,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말했다.
    엘리바스는 또,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들이 참으로 끊어졌고(원문) 그 남은 것(이스람 ם)[그들의 풍성함](BDB, NASB)이 불사른 바 되었다 하느니라”고 말한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멸망을 본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
    우리는 악인의 길을 걷지 말자. 이것은 우리와 상관 없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 배교와 탈선과 하나님의 징벌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신 9:7), 그것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전 10:6).
    [21-22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엘리바스는 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다시 번역하면, “너는 하나님과 친근히 하고 화목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친근히 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이다. 그래서 그는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고 말했다.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 . . 그에게 친근히 하고.”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였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 또 성도는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계속 누린다.
    엘리바스는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평안의 복이다. 그 평안은 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과 가정적 행복과 사회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물론 그 마지막 복은 영생이다. 시편 1편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고 그의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119:165는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는 복된 말씀을 증거한다. 디모데전서 4:8은,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그 약속은 건강과 경제 안정과 가정적, 사회적 평안, 및 영생을 포함한다.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예수님만 믿고 항상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성경 교훈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고 또 복을 받자.
    [23-26절]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 . . .
    엘리바스는 또,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고 말한다.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만일 네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간다면, 너는 다시 세워지리라(혹은 회복되리라). 너는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할지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곧 참된 회개이다.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교훈을 받으며 그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요 경건이다. 그러면 병들었던 인격이 새로워지고 불행했던 환경이라도 회복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장막 곧 집에서 불의를 멀리해야 한다. 자신이 죄와 불의를 멀리해야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집 곧 자기의 아내와 자녀들도 죄를 멀리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회개요 회개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엘리바스는 또, “네 보배(베체르 ר)[금]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세상의 보화를 마음에 큰 가치로 품고 살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주께서는 누가복음 14:33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상의 보화를 버려야 하나님을 참 보화로 깨닫고 모실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롭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였다(빌 3:7-8).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제 회개의 열매를 맺자. 또 세상의 금은보화를 버리자. 오직 하나님을 우리의 보화로 삼고 사랑하자.
    [27절]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엘리바스는 또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그가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버리고 물질 사랑을 끊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기도의 응답을 얻을 것이다. 또 그러면 감사해서 서원을 갚게 될 것이다.
    죄는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는다.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나 의는 기도의 응답을 가져온다.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7).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했다(요일 3:21-22).
    그러므로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는 기도의 교훈을 하시면서 그 결론으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다(마 7:12).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좋은 것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를 대접하자. 즉 그를 가장 귀한 보화로 여기며 그를 가장 높이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자. 또 모든 불의를 버리고 거룩과 의와 선에 거하자.
    [28절]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엘리바스는 또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21절부터 말씀한 전제(前提)가 있는 말씀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의 입의 교훈을 받고 불의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보화로 삼으면, 그는 무엇을 경영하든지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형통케 하심을 경험할 것이다.
    잠언 3:5-6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한다. 잠언 16:1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6:3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였다. 또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는 자는 그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과도 연관된다. 주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4). 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했다(빌 2:12-13).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고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한 선한 일들의 성취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즉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며 그의 영광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성경의 교훈대로 행하자.
    [29절]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엘리바스는 또,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성도에게 낮춤 곧 고난이 있다. 성도에게 때때로 질병, 가난, 원수들, 핍박 등이 있다. 고린도전서 4:11-13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그 고난에서 건지시고 높이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한다. 잠언 24:16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한다. 또 고린도후서 1:8-10에서 사도 바울은 증거하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예수께서는 그 본이 되신다. 그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활 승천케 하셔서 그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빌 2:5-11).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할 때 낙심치 말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죄를 회개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과 계명만 행하자.
    [30절]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엘리바스는 또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돌아온 자, 그 장막에서 불의를 버린 자, 세상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보배로 삼은 자는 기도 응답을 받고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지고 고난 중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가 아닌 자라도 건지실 것이며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의인은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 모세는 그들을 멸하시려는 하나님 앞에 서서 그들의 용서를 간청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였고 그의 진노를 막았다(출 32:9-14).
    야고보서 5:15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성도의 믿음의 기도는 병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다.
    요한일서 5:16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한다. 또 유다서 23절은,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말한다. 성도는 형제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를 건져낼 수 있다.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자가 되고 손이 깨끗한 자가 되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도 살리는 자가 될 것이다.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1-5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그의 손]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 . . .
    욥은 대답하여 말한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그의 손](NASB, NIV)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변론]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욥은 극심한 재앙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하기를 원하며 또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하나님과 멀어지지 말고 하나님께로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환난 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시편 50:15에 약속하셨다. 야고보서 5:13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교훈한다. 고난당할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말한다(약 4:8).
    주께서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서 우리가 고난 중에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셨다(눅 18장). 그러나 기도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있어야 고난 중에 낙망치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굳게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자.
    [6-7절]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 . . .
    욥은 말하기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고 한다. “내 말을 들으시리라”는 원문(야심 비 י ם)은 “내게 [힘을(KJV) 혹은 관심을(NASB)] 주시리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많으시지만 무조건 피조물들과 그 권능으로 다투며 위협하지 않으신다. 그는 겸손히 그에게 나오는 자를 용납하신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감히 전능자 하나님과 변론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아뢰었다(창 18:23, 27).
    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다(사 1: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과 변론하기를 원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7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셔서 그에게 나오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정직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시편 34:8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올 때, 그의 인자하심, 곧 그가 자기에게 나아와 기도하는 자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좋은 것을 주심을 믿고 기도하자.
    [8-9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 . . .
    욥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섬길 때 믿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영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6에서 하나님을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라고 표현하며 증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무한하신 영이시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다(렘 23:24).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고린도후서 5:7에서 말했고, 히브리서 11:27은 모세가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증거했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지금 보이지 않는 내세의 영광의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로마서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하고 그를 따르며 섬기자.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은 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는 원어(베카나니 י)는 단순히, ‘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라는 뜻이다(BDB).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신다”고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이란 그가 이제까지 생각하고 소원하고 뜻한 것, 그가 이제까지 걸어온 길, 그가 지금도 걷고 있는 길을 가리킨다. 욥의 친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오해하고 그릇되이 비방하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과 그의 길을 정확히 아신다.
    또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한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이라고 번역하면 그가 그 시련을 통해 그의 인격이 단련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환난과 시험이 성도의 인격을 단련시키며 온전케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3-4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그가 나를 시험하셨으니(혹은 시험하셨다면)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것은, 그가 앞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그의 당한 환난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공정한 판단을 받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구들의 비난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시기를 원한 내용에 이어진다고 보인다(Matthew Poole, Matthew Henry, 재미슨-포셋-브라운 주석). 욥은, 그의 마음과 그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으니, 그가 정금 같은 자로 인정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고, 평소에 정금 같은 신앙 인격으로 살기를 힘쓰자.
    [11-12절]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은 자신의 발이 그의 걸음 곧 하나님의 명하신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그의 길 곧 하나님의 명하신 교훈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걸음’ ‘그의 길’은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가리킨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아야 한다. 잠언 6:23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했고, 시편 119:105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욥은 또 그의 입술의 명령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였고 일정한 음식 곧 날마다 그에게 필요한 양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고백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양식에 비교하였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일정한 음식을 먹듯이, 우리는 영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4:4).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힘써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고(마 28:20), 사도 바울은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교훈하였다(살후 2:15).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길을 굳게 붙들자. 또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고 그것을 묵상하며 힘써 지키자.
    [13-17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 . . .
    욥은 또 말한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뜻이 일정하다’는 원어(베에카드 ד)는 ‘한 마음을 가지신다’(in one mind)(KJV) 혹은 ‘유일하시다’(unique)(NASB)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 변치 않는 마음, 일정한 뜻을 가진 유일하신 자이시다. 그와 비교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의 뜻을 돌이킬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을 다 행하시는 자이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는 욥을 향해 작정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0-11).
    욥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 17절은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내가 어두움 앞에서 끊어지지[죽지] 아니하였고 그가 어두움을 내 얼굴에서 가리지 아니하셨음이라.” 지금 욥은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며 또 낙심한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고 그 대신 이 혹독한 고난을 경험케 하셨다.
    우리는 고난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인내하면서 의롭고 바르게만 살자.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1-4절]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 . .
    욥은 또,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라고 말한다. ‘정한다’는 원어(차판 ן)는 ‘저장하다’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면, “어찌하여 날들이 전능자 앞에 저장되지 않았으며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였는고.”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심판을 지연하심을 말한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 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욥은 악인에 대해 묘사한다. 땅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악한 일이다. 신명기 19:14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先人)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고 말했다. 또 양떼를 빼앗아 기르는 것이나,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는 것이나, 또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는 것도 악한 일이다. 시편 68:5는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표현하였고, 신명기 10:18은, “[그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억울함을 갚아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또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낙심치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경건하게 살고 또 그의 뜻을 따라 선하게만 살자.
    [5-12절]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 . .
    욥은 또 말한다.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티플라 ה)[보기 흉함](BDB)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욥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묘사한다. 세상에는 악한 자들로 인하여 신음하며 부르짖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다. 입을 옷이 없고 겨울에 따뜻한 방이 없고 먹을 음식이 충분히 없고 마실 물이 충분히 없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의 불의한 일과 그 가난한 자들의 신음을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형제들 중 하나가 주릴 때에 그에게 먹을것을 주고 그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하는 것이다(마 25:35-40). 그런 행동이 이웃 사랑, 형제 사랑의 실천이다. 성경은 우리의 원수라도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교훈한다(롬 12:20). 또 이 세상에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시행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은 죽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남에게 악을 행치 말고 선을 행하면서 살자. 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최종적, 공의의 심판이 있음을 굳게 믿자.
    [13-17절]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사람을 죽이는 자는 . . . .
    욥은 또,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빛은 참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빛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빛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빛의 길을 알지 못하고 그 길에 머물지 않는 자들, 곧 십계명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욥은 또 말한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은 살인하는 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이들은 다 어두움의 사람들, 곧 어두운 시간에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고 빛을 두려워한다. 예수께서도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3:20).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빛된 생활을 해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4). 로마서 13:13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5:8-9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했다.
    우리는 어두움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며 악하게 살지 말고, 오직 빛의 자녀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자.
    [18-25절]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 . .
    욥은 악인들에 대해 또,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악인들은 빨리 쇠잔할 것이고 그 산업은 저주를 받고 그들은 다시 포도원의 소산을 즐기지 못할 것이다.
    욥은 또,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고 말한다. 버모지자는 곧 죽어 무덤에 묻힐 것이다. 그를 낳은 태, 곧 그의 모친도 그를 잊어버리고 벌레가 그 시체를 먹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기억지 못하고 나무처럼 꺾일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그는 잉태치 못하므로 해산치 못한 여인을 학대하며 과부를 선대치 아니하는 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보존시키시니 살기를 바라지 못할 자도 일어나는구나.” 악인은 슬픈 여인들을 동정치 않고 도리어 학대한다. 22절은 아마, “또 그는 그 권능으로 강한 자들을 이끌도다. 그가 일어나니 아무도 생명을 확신하지 못하도다”라는 뜻 같다(KJV). 악인들은 다른 동료들을 끌어들이고 사람들은 그 악한 자들을 두려워한다.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하나님은 얼마간 그들을 평안케 하시나 주목하시고 잠시 후에 멸망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악인이 결국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받아 멸망할 것을 알고 악을 행치 말고, 또 악인의 일시적 형통으로 인해 낙심하지도 말자.


    25장: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


    [1-6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은 권능과 . . . .
    수아 사람 빌닷이 말한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권능’이라는 원어(하메쉘 ל)는 ‘다스림, 통치권’을 가리키고, ‘위엄’이라는 원어(파카드 ד)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통치권과 두려움을 가지신 주권자로서 땅에 평안을 주신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
    빌닷은 또 말한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하다.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로 비천해졌다. 인생은 벌레와 같다. 인간은 허무하고 죄악되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고 사실이고 현실이다. 자신이 피조물임과 죄인임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진다.
    인간의 존귀함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회복하였으므로 이제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야 한다(창 6:9; 욥 1:1; 단 1:8; 겔 14:14).
    우리는 벌레 같은 인생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도록 힘쓰자.
    26장: 욥--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1-14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 . .
    욥이 대답하여 말한다. “네가 힘없는 자를 참 잘 도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 구원하였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 가르쳤구나. 큰 지식을 참 잘 나타내었구나.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을 내었느냐? 뉘 신[누구의 호흡 혹은 영]이 네게서 나왔느냐? 음령들(레파임 םיאּ)[죽은 자들]이 큰 물[바다]과 수족(水族)[거기 거하는 것들] 밑에서 떠나니 하나님 앞에는 음부[지옥]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하나님께서 영감하신 놀라운 과학적 발언!]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는 자기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자기 구름으로 그 위에 펴시며 수면에 경계를 그으셨으되[구름과 비를 주장하심], 빛과 어두움의 지경까지 한정을 세우셨느니라. 그가 꾸짖으신즉 하늘기둥이 떨며 놀라느니라[천둥].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큰 바다 짐승]을 쳐서 파하시며 그 신[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뢰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홀로 섭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고난의 현실도 그의 손 안에 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자. 또 고난 중에서도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오직 하나님께 맡기자.


    27장: 욥--악인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1-6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 . . .
    욥은 또 비사를 들어 말한다[변론한다].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욥은 하나님께 맹세하면서 바른 말, 진실한 말을 하겠다고 말한다. 의와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덕이지만, 불의와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요 마귀 왕국의 악이다. 사람은 교만과 무지와 욕심 때문에 악하고 거짓된 말을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모든 악하고 거짓된 말을 버리고 의와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엡 4:25).
    욥은 죄 때문에 재앙을 당했다는 친구들의 비난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았고 그 마음이 그를 책망할 일이 없다고 증거하며 자신의 순전함을 말한다. 욥은 앞에서도 자신의 순전함을 여러 번 말했었다(욥 6:10; 10:7; 13:18).
    물론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양심적으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고전 4: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그 의만 믿고 의지하지만, 또 평소에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거리끼는 모든 죄를 버리자.
    [7-12절]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 . . .
    욥은 악인의 허망함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나의 대적은 악인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라고 말한다. ‘사곡한 자’라는 원어(카네프 ף)는 ‘불경건한 자’(BDB)라는 뜻이다. 불경건한 자가 불의하게 이익을 얻었을지라도 그가 죽을 때 그것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주께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마 16:26). 또 그는 풍년 만난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그 부자 농부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셨다(눅 12:20). 잠언 14:32는, 의인은 죽음에도 소망이 있지만, 악인은 환난에 엎드러진다고 말하였다.
    욥은 또,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의 뜻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주 허탄한 사람이 되었는고”라고 말한다.
    악인은 평소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교훈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불러도 그가 응답지 않으실 것이다(잠 1:28). 실상, 악인들은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지도 않는다. 오직 성도만 하나님을 사모하며(시 73:25) 그에게 쉬지 않고 기도하며(살전 5:17) 또 환난 날에 응답을 받는다(시 50:15).
    우리는 평소에 불경건하고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지 않다가 환난 때에 엎드러지지 말고, 오직 경건하고 의롭게만 살자.
    [13-23절]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 . . .
    욥은 악인의 받는 보응에 대해 말하기를,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그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악인의 많은 자녀들은 전쟁에서 죽을 것이며 그 후손은 양식에 배부르지 못하고 기근을 당할 것이다. 또 남은 자들은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며 그의 과부들은 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울지 못하는 까닭은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이거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뻐하기 때문이거나 그들 자신도 그의 학대 때문에 신음했기 때문일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그가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상직군[포도원 지키는 자]의 초막 같을 것이며.” 악인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 은을 많이 저축하고 의복도 많이 예비할지라도, 그의 돈과 의복, 곧 그의 재산은 다른 이들에게 돌려질 것이며 그의 집도 허물어질 것이다.
    욥은 또 말한다.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두려움이 물같이 그를 따라 미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빼앗아갈 것이며 동풍이 그를 날려보내며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나니[던지시니] 그가 그 손에서 피하려 하여도 못할 것이라. 사람들이 박장(拍掌)하며[박수치며] 비소(誹笑)하고[비웃고] 그 처소에서 몰아내리라.” 악인의 죽음은 복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사정없이 치시고 취하여 가실 것이며 사람들도 그를 비웃을 것이다.
    악인이 받을 보응은 참으로 두렵다. 악인은 참으로 가련한 자들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의롭게만 살자.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1-14절]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銅)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 . . .
    욥은 또 말한다. “은은 나는 광이 있고 연단하는 금은 나는 곳이 있으며 철은 흙에서 취하고 동(銅)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사람이 흑암을 파하고 끝까지 궁구하여 음예와 유암 중의 광석을 구하되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구멍을 깊이 뚫고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달려 내리니 멀리 사람과 격절되고 흔들흔들 하느니라.” 사람은 캄캄함을 무릅쓰고 매우 깊은 갱도를 파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내려가서 흑암 속에서 금은동철의 광석을 찾고 그런 것들을 캐낸다. 귀중한 것들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한다.
    욥은 또 말한다. “지면은 식물을 내나 지하는 불로 뒤집는 것 같고[영감된 과학적 발언이다!] 그 돌 가운데에는 남보석이 있고 사금(砂金)도 있으며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위엄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무너뜨리며 돌 가운데로 도랑을 파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시냇물을 막아 스미지 않게 하고 감취었던 것을 밝은 데로 내느니라.”
    욥은 또 말한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그 값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 찾을 수 없구나.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사람은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을 노력하면 얻는다.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세상 것들은 사람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다.
    [15-22절]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 . . .
    욥은 또 말한다. “[지혜는]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오빌의 금이나 귀한 수마노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치 못하겠고 황금이나 유리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산호나 수정으로도 말할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홍보석보다 귀하구나.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측량하지 못하리니.”
    욥은 지혜의 가치가 참으로 크다고 말한다. 그것은 돈 몇 천만원이나 몇 억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 있다. 잠언 3:14-15도,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다.
    욥은 또,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리워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고 말한다.
    멸망과 사망에 들어간 자들은 지혜에 대해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혜가 없어서 거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지혜보다 심히 가치 없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헛된 세상 것에 큰 가치, 모든 가치, 아니 절대가치를 두고 살고 있다. 그러나 전도서는 해 아래의 모든 것이 헛되다고 증거하였다. 예수께서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사람이 참 지혜의 가치성을 깨닫는다면, 그는 세상의 허무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며 살 것이다.
    우리는 금은보화를 포함하여 이 세상 것들의 무가치성을 알자. 우리는 참 지혜가 금은보화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음을 알자.
    [23-28절]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 . . .
    욥은 또 말한다.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이는 그가 땅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을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 그 때에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궁구하셨고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지혜는 세상의 금은보석보다 가치 있으나 사람이 참 지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온 세상을, 땅끝까지 감찰하시고 온 천하를 두루 보시며 바람의 무게를 다시고 바닷물의 분량을 재실 수 있고 비와 우뢰와 번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곧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의 길을 아시고 그 있는 곳을 아신다. 그는 지혜를 보시고 선포하셨고 굳게 세우시고 찾아내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씀하셨다. 욥의 이 말은 잠언에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했고,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혜와 지식을 말할 수 없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를 아는 데로부터 나온다.
    또 하나님의 뜻이 그가 주신 십계명에 대표적으로 나타나 있으므로, 십계명을 알고 지키며 악을 떠나는 것이 지혜요 명철이다.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그러므로 잠언 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악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다 지혜자가 되자.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1-3절] 욥이 또 비사를 들어 가로되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 같이 되었으면―그 때는 그의 등불이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그 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내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느니라.”
    욥은 지난 날들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신다. 신명기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욥은 또 지난 날들에 하나님의 등불이 그의 머리에 비취었고 그가 그 광명을 힘입어 흑암에 행하였었다고 말한다. ‘그의 등불’이나 ‘그 광명’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빛, 곧 그를 기쁘게 하시고 행복케 하시는 빛이다. 민수기 6:24-26에 기록되어 있는 대제사장의 축도는 다음과 같았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욥의 과거는 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었다. 그는 지금 고난 가운데서 그 복된 시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그의 등불, 곧 그의 은혜와 평강, 기쁨과 행복을 믿고 감사하며 또 고난 중에도 그것을 바라며 사모하자.
    [4-6절]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 그 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 . . .
    욥은 또, “나의 강장하던 날과 같이 지내었으면―그 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라고 말한다. 욥은 과거에 그가 누렸던 가정적, 영적 복을 회상한다. ‘강장하던’이라는 원어(코레프 ף)는 ‘추수의 때’라는 뜻이다(BDB). 그것은 인생의 전성기와 결실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그때 하나님의 우정이 그의 장막 위에 있었다고 말한다. ‘우정’이라는 원어(소드 דוֹס)는 ‘회의, 의논, 친밀함’이라는 뜻이다(BDB). 욥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시편 25:14는,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라고 말한다.
    욥은 또, “그 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으며 나의 자녀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은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욥은 가정적인 행복을 누렸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는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았고 그 자녀들이 잘 자랐다.
    욥은 또 말하기를, “뻐터가 내 발자취를 씻기며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으며”라고 한다. 욥은 물질적으로도 유여한 복을 받았다. 그의 양들과 소들은 수가 많아서 우유를 많이 만들어 내었고 뻐터도 많이 만들어 내었고 그것을 먹고 남을 정도이었다. 또 “반석이 나를 위하여 기름시내를 흘려 내었다”는 말은 돌밭 같은 곳에서도 감람나무가 번성하여 감람유를 풍성하게 산출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물질적 풍성함을 누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욥은 가정적, 물질적 복을 누렸다.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이었다. 인간의 영육의 복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만복의 근원이시다. 그것은 신명기 28장에 밝히 증거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우정, 친밀한 교제를 사모하며, 복된 가정생활, 물질생활을 누리자. 고난의 날들에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믿고 바라자.
    [7-17절] 그 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 . . .
    욥은 과거의 삶을 회상한다. “그 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나를 보고 소년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방백들은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천장에 붙었었느니라. 귀가 들은즉 나를 위하여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위하여 증거하였었나니.” 과거에는 소년들뿐 아니라, 노인들과 방백들과 귀인들까지도 욥을 존경하며 욥 앞에서 말을 조심하였다.
    욥은 또 말한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이웃 사람들이 욥을 존중했던 까닭은 그가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르짖는 가난한 자나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져내었고 망하게 된 자나 과부도 도와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하게 된 자가 그를 위해 축복하고 과부도 그로 인해 기뻐 노래하였다. 선한 삶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세의 율법과 잠언과 구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된 바이다.
    욥은 또,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査實)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고 말한다. 욥의 삶은 선한 삶이었다. 그는 약자들을 위해 공의를 세웠었다. 이렇게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그 앞에서 말도 조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하게 살고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미가 6:8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공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며 경건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18-20절]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善終)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 . . .
    욥은 이전에 가졌던 기대를 말한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善終)하리라. 나의 날은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내 가지는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이슬에 젖으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와지고[새로워지고] 내 활은 내 손에서 날로 강하여지느니라 하였었노라.”
    ‘내 보금자리’는 그의 가정을 가리킨다. 날이 모래같이 많다는 것은 장수(長壽)한다는 뜻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적 행복 속에서 평안히 오래 살다가 생을 잘 마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의 끝이나 내일의 행복과 불행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안에 있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을 나무에 비유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뿌리가 물로 뻗어나가고 그 가지가 밤새도록 이슬에 젖어 충분한 수분을 취하는 푸른 나무처럼 복되었다고 표현한다. 시편 1:1-3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악을 멀리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의 나무와 같다고 말했다. 또 욥은 자기의 영광과 형통이 영속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의 영광이 더욱 새로워지고 그의 세력과 힘이 날로 강하여지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 교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평안과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높고 깊으신 뜻은 아무도 모르며 그의 섭리하시는 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사람은 자신의 내일의 일이나 행복과 불행을 알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할 것도 아니지만, 내일 일을 장담하거나 자랑하지도 말자. 야고보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고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라고 교훈하였다(약 4:15).
    [21-25절]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 . . .
    욥은 전날에 자신이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말한다. “무리는 내 말을 들으며 나의 가르치기를 잠잠히 기다리다가 내가 말한 후에 그들이 말을 내지 못하였었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이슬같이 됨이니라. 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욥의 말을 이슬같이, 단비같이 여기며 사모하였다. 악인의 말은 악하고 파괴적이지만, 의인의 말은 가치가 있고 남에게 유익을 준다. 잠언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다”고 말하며(잠 10:20), 또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하였다(잠 12:18). 사무엘상 3:19는,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다.
    욥은 또,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함소하여 동정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었느니라”고 말한다. 본절의 원문은, “내가 그들을 보고 웃을지라도 그들이 그것을 믿지 않으며 나의 얼굴빛을 무색케 아니하리라”는 뜻 같다(KJV). 사람들은 욥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웃는 인격이 아님을 인정하고 믿었다는 뜻 같다. 그들은 욥의 얼굴빛이 무색하게, 즉 그가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욥은 또한,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고 으뜸으로 앉았었나니 왕이 군중(軍中)에[군대 가운데] 거함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도 같았었느니라”고 말한다. 욥은 사람들의 길을 택해주었다. 또 그는 왕이 군대 가운데 거함같이 그들 중에 으뜸으로 앉았고, 또 애곡하는 자들 중에 위로하는 사람 같았다. 욥은 참으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경건하고 선하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자는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된다. 그는 유익하고 덕이 될 만한 말을 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만한 인물이며,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를 것이다. 우리도 그런 목표로 살자.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1-8절]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 . .
    욥은 또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기롱하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나의 보기에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개들과 함께] 둘 만하지 못한 자니라. 그들은 장년의 기력이 쇠한 자니 그 손의 힘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BDB, NASB) 떨기나무 가운데서 짠 나물도 꺾으며 대싸리[댑싸리] 뿌리로 식물을 삼느니라. 무리는 도적을 외침같이 그들에게 소리지름으로 그들은 사람 가운데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구멍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비천한 자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고토로부터 채찍질을 받은](BDB, NASB) 자니라.”
    세상에는 존귀한 자도 있고 천한 자도 있다. 인격 훈련이 잘 되고 재산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인격 훈련을 잘 받지 못하고 가난하고 사회적 신분이 없는 자들이 있다. 욥은 예전에는 존경을 받는 존귀한 자이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였다. 그는 많은 재산도 있었고 사회적 신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병들고 재앙으로 가난해졌을 때, 그는 여지없이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그는 지금 비천한 젊은이들의 조롱을 받고 있다. 사람의 존귀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람의 의미와 가치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욥은 외적으로 비천해 보이지만, 결코 비천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완전한 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자.
    [9-15절]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이제는 내가 그들의 노래가 되며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내 얼굴에 침 뱉기를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내 줄[활줄](NASB)을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케 하시매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그 낮은 무리가 내 우편에서 일어나 내 발을 밀뜨리고 나를 대적하여 멸망시킬 길을 쌓으며 도울 자 없는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구나. 성을 크게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 들어오는 것같이 그들이 내게로 달려드니 놀람이 내게 임하는구나. 그들이 내 영광을 바람같이 모니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이전에 존귀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병들고 가난해진 욥은 지금 비천한 자들의 핍박을 받고 있다. 그들은 욥을 조롱하고 미워하며 침뱉고 있다. 욥은 이 고난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욥의 발을 밀뜨리고 멸망시킬 길을 쌓고 그의 길을 헐고 재앙을 재촉하며 그에게 달려든다.
    세상에는 때때로 의인들에게 이런 핍박이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핍박은 그러한 유의 핍박이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고 희롱하며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 머리를 쳤다(마 27:29-30).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그를 손바닥으로 때렸다(막 14:65). 시편 22:6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메시야의 고난을 말했다. 사도들도 주리고 목말랐고 헐벗고 매맞았고 정처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고전 4:9-13).
    우리는 욥의 고난을 통해 의인의 고난을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사도들의 고난을 생각한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도 때때로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의롭고 바르게만 살자.
    [16-23절]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 . .
    욥은 또 말한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직역하면, ‘내 영혼이 내 위에 부어지며’]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의[혹은 ‘나의 병의’(KJV)] 큰 능력으로 하여 옷이 추하여져서 옷깃처럼 내 몸에 붙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히 하시고 완력으로[강한 손으로] 나를 핍박하시오며 나를 바람 위에 들어 얹어 불려가게 하시며 대풍 중에[폭풍의 소란함 속에](BDB) 소멸케 하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시리이다[이는 주께서 나를 죽게 하시며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가실 것을 내가 앎이니이다].”
    욥은 지금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다. 그의 마음은 물같이 녹았고, 그의 몸은 뼈가 쑤시고 아픔이 쉬지 않으며, 그의 옷은 추하여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진흙에 던지셨고 티끌과 재 같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잔혹히 하셨고 강한 손으로 핍박하셨다고 말하며 또 그로 바람에 불려가게 하시고 폭풍의 소란함 속에 소멸하게 하시며 그를 죽이려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욥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시편 22편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라고 예언하였다(14-16절).
    우리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인 줄 알고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욥의 고난과 주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참고 견디자.
    [24-31절]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 . . .
    욥은 또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베이 י)[폐허더미에서]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불행한 일]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겠는가?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어지러워서[내 창자가 끓어오르고] 쉬지 못하는구나. 환난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혹은 ‘슬퍼하며’]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내 가죽은 검어져서 떨어졌고[벗겨졌고] 내 뼈는 열기(熱氣)로하여 탔구나. 내 수금은 애곡성(哀哭聲)이 되고 내 피리는 애통성(哀痛聲)이 되었구나.”
    본문은 욥이 고난 중에 가진 슬픔을 묘사한다. 그는 과거에 고생하는 자를 위해 울고 빈궁한 자를 위해 근심했었다. 그러나 그에게 큰 슬픔이 왔다. 그는 복을 바랐으나 화가 왔고, 광명 즉 기쁨과 행복을 기다렸으나, 흑암 즉 슬픔과 불행이 왔다. 그의 창자는 지금 끓어오르고 있다. 그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았으나 살이 검어졌다. 그것은 그의 슬픔의 표시이었다. 그는 이리의 형제처럼, 타조의 벗처럼 살고 있다. 그의 살갖은 검어져서 벗겨졌고 그의 뼈는 열기로 인해 탔다. 그의 수금과 비파는 슬픔의 노래, 애통과 애곡의 노래의 악기가 되었다.
    성도는 때때로 욥처럼 고난 중에 슬퍼할 때가 있다. 다윗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라고 말했고(시 55:17), 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말했다(시 56:8).
    그러나 성도는 고난과 슬픔 중에 참고 하나님께 아뢰고 그에게 의탁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실 것이다.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1-4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처녀에게 주목치 않았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28). 성도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죄는 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은 범죄하면 이미 가진 복도 잃어버린다. 죄는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고 빼앗아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원한다면 모든 죄를 버려야 한다.
    욥은 불의한 자와 행악하는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 욥은 악인이 재앙을 당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은 단지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욥기의 주요 진리는 성도의 고난 중에는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이요 주의 제자들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악인의 징벌은 욥도 인정하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감찰하시고 그의 걸음을 다 세신다. 그는 사람의 품은 마음, 생각과 뜻, 의도와 의향을 아신다. 그는 그것들이 의롭고 선한지 아니면 불의하고 악한지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거룩하게만 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걸음을 감찰하심을 기억하고 특히 보는 것을 조심하자.
    [5-8절]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을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거짓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순전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은 악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그 발걸음이 거짓에 빠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 덕은 진실함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자신의 정직함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순종한 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담대함이다. 성도의 담대함은 성실한 순종의 삶에서 나온다.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길’은 정로(正路) 즉 의의 길을 가리킨다. 욥은 인생의 정로를 지켰고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눈을 따라가지 않았다. 사람의 눈은 육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이끌려 살아서는 안 된다. 또, 욥은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 즉 죄 되는 것이 묻지 않았다고 말한다.
    욥은 만일 자신이 정로에서 떠났든지, 그의 마음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헛되고 죄악된 것에 빠졌든지, 그의 손에 더럽고 죄악된 것이 묻었다면, 그의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고 그의 거두는 것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며 징벌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비록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의 정로를 떠나지 않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좇지 않았다. 그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악하게, 거짓되게 행치 말고, 정직하고 흠 없게 인생의 정로로만 걷자. 특히, 더러운 육신의 감정과 욕심대로 행치 말자.
    [9-12절]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욥은 간음과 음란을 조심하였다.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리는 것은 이미 유혹을 받아 은밀한 만남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은밀한 만남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성도가 음란죄에 떨어지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경제적 파탄을 당하고 그의 처는 남의 종이 되어 남의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될 것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와 동침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 보응하시는 자이시다. 죄를 지으면 죄의 보응을 하시고 남을 해치면 남의 해를 받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며 그의 도덕질서이다.
    간음의 죄는 중죄(重罪)이다. ‘중죄’라는 원어(ה 짐마)는 ‘악한 일’이라는 뜻이다. 간음의 죄는 매우 악한 일이다. 그것은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다. 성경은 간음의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姦夫)와 음부(淫婦)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모든 죄, 특히 간음과 음란의 죄는 불과 같다. 불이 나무나 집이나 물건들을 모두 다 사르듯이, 모든 죄, 특히 간음은 복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없앤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다. 의는 평강과 형통을 가져오지만,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온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죄를 멀리하자. 우리는 특히 정욕의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잠언 6:25는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라”고 말했다. 거룩한 삶은 의로운 삶이요 평안하고 복된 삶이다.
    [13-15절]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 . . .
    욥은 또,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종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종이 무엇을 잘못했을 때 엄하게 꾸짖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종이 무엇을 불평하거나 호소할 때 그것을 듣는 것은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9, “[상전들아, 너희도] 공갈을 그치라.”
    욥은 만일 그가 종을 멸시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러 일어나 심문하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 하늘에 계신 크신 재판장 앞에서 서게 될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멸시하는 잘못도 행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멸시할 만큼 그렇게 흠이 없는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남을 존중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욥은 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나 종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말한다. 잠언 22: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한 부모가 낳아 기른 자녀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야 하듯이, 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류는 넓은 의미에서 한 형제들로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알고 서로를 귀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대하고 외모로 판단하여 차별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자. 다시 말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의와 공평을 행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하자.
    [16-23절]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그는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일을 들어주신다(신 10:18; 시 68:5). 그는 율법에서 가난한 자를 해롭게 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친히 명하셨다(출 22:22; 신 15:7-8).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사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힘썼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본래 힘써 행했다고 말했다(갈 2:10). 야고보는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약 1:27).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삶은 결코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삶이 아니다. 잠언 11:24-25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고 가난한 자들과 어려움당한 형제들을 돌아보고 배려하고 구제하는 선한 삶, 복된 삶을 살자.
    [24-28절]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해와 달을 보고 ‘손에 입맞추는 것’은 그것을 사모하고 섬기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욥은 재물을 의지하거나 소망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재물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아무 소용이 없다(잠 11:4; 겔 7:19).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거리가 된다. 주께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3:22). 또 그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딤전 6:9-10).
    욥은 또 해와 달을 섬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해와 달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연관해 말했다. 해와 달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듯이, 재물을 사랑하는 것도 우상숭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골로새서 3:5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재물의 헛됨과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또 물질적 부요가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거리가 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께만 즐거움과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자.
    [29-30절]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욥은 그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가 재앙당함을 인해 뽐내지 않았다. 그는 원수의 영혼을 저주하는 죄를 범치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의 뜻을 실행한 착한 성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레 19:18). 또 잠언 17:5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하며, 잠언 24:17-18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한다. 오바댜 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그것을 방관하고 기뻐했던 에서의 자손들은,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는 책망을 들었다.
    누가복음 6: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9-21).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재앙당함이나 멸망당함을 기뻐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에게 끝까지 선을 베풀자.
    [31-32절]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내 장막의 사람들’은 그의 집에 있는 종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욥의 삶을 가까이서 본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고기로 배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그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았고 그의 집 문을 열어주었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은 그의 뜻을 실천하는 구제와 나그네 대접 등의 선행으로 표현된다.
    아브라함도 평소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기쁘게 영접하며 고운 가루로 만든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의 고기와 뻐터와 우유로 대접하였다(창 18:1-8). 소돔에 살았던 롯도 날이 저물 때 소돔성에 온 나그네를 간청하여 집으로 들이고 그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고 급히 누룩 없이 떡을 구웠다(창 19:1-3). 사사기 19장에 보면, 기브아에 살았던 한 노인도 해가 저물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가 성읍 거리에서 한 나그네를 보고 집에 영접하여 먹을것을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즐거이 대접하였다.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께서 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영생에 들어갈 자들은 주의 형제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자들이었다. 로마서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고, 히브리서 13:2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명과 성경의 교훈대로 욥처럼, 아브라함처럼, 롯처럼, 기브아의 노인처럼 나그네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자가 되자.
    [33-37절]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타인처럼’이라는 원어(케아담 םאָ)는 ‘아담처럼’(KJV, NASB)이라는 말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여 자기 죄악과 허물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윗도 그러하였다. 그는 선지자 나단 앞에서 자신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였다(삼하 12:13). 또 그는 인구조사를 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다(삼하 24:10,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숨기면 우리의 마음의 고통은 클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 고통 중에 그냥 버려두실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시 32:3-5; 요일 1:8-10).
    욥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나의 변백(辨白)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하나님께]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걸음의 수효’라는 표현은 자신의 모든 삶의 여정을 의미한다. ‘왕족처럼’이라는 말은 ‘존귀한 자처럼’이라는 뜻으로 그가 당당하게 재판관에게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담대히 말하며 자기를 송사하는 대적자들과 변론하기를 원한다. 또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원한다. 의인의 마음은 담대하다. 잠언 28:1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죄와 부족을 감추려 하지 말고 사실대로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행해야 한다.
    [38-40절]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서나 그 소산에 대해 불법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의 토지가 부르짖어 그를 책망하거나 그의 밭이랑들이 함께 우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당하게 땅을 샀고 또 그 땅에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그는 그 경작을 누구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거나 그가 부당하게 남의 토지를 빼앗으므로 그로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그는 자기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징벌을 각오하는 것이다.
    경건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 매장할 무덤을 얻기 위해 헷 족속에게 요청하였고 그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는 이가 있었으나 그에게 은 400을 지불하고 아내의 무덤으로 막벨라 굴을 샀다(창 23:9, 16). 의로운 다윗은 인구 조사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온역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번제를 드리고자 했을 때 제사드릴 땅과 소와 나무 등의 제사 재료를 상당한 값을 주고 샀다(삼하 24:24). 옛 시대에 경건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에게 본이 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도적질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고(엡 4:28), 우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고(살전 4:11),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고(살후 3:12),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한다(살후 3:10).
    우리는 남의 수고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주고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하며, 범사에 정당하게 살고, 또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써야 한다.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1-5절]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 . . .
    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 긴 부분은 엘리후의 말이다. 본문은,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고 말한다.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인 엘리후는 분명히 욥의 친구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자이었고, 욥의 친구들과 달리, 그의 판단은 매우 건전하였다고 보인다. 욥의 세 친구들의 말이 끝나자, 엘리후는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다.
    엘리후가 욥에게 노한 것은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 하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욥은 자신이 양심에 크게 가책되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을 고난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에 항의하였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역경에서도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실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엘리후가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한 것은 그들이 욥에게 대답하지 못하면서 욥을 정죄하기 때문이었다. 남을 부당하게 정죄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잠언 17:15는,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끝까지 겸손히 복종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선과 악을 바르게, 신중하게 판단하고, 부당하게 사람을 정죄하지 말자.
    [6-10절]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발언하여 가로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 . .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는 또 말하였다.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 내가 말하기를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직역하면, ‘날들이 말할 것이요 많은 해들이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으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대인(大人)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엘리후는 욥이나 그 친구들과 달리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동안 잠잠히 참고 있었고 감히 그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은 노인들이 일반적으로 인생 경험이 많아 젊은이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건과 도덕성을 구비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날이 많은 자가 말을 낼 것이요 해가 오랜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고 말한다. 디도서 2:3-4도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교훈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 혹은 영감(KJV)이 그에게 총명을 주시기 때문에, 세상에서 높은 자라고 반드시 지혜로운 것이 아니고 노인이라고 반드시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러므로 잠언 1:7은 참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다고 말했고, 잠언 2:6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말했다. 또 시편 119:97-100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는 자는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더 지혜롭게 된다고 말하였다.
    보통 노인이 젊은 자보다 지혜롭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꼭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친히 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자.
    [11-14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내가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고 당신들이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 그 변론에 내 귀를 기울였더니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 말을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당신들이 혹시라도 말하기를 우리가 지혜를 깨달았었구나. 그를 이길 자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 그가 내게 말을 내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말처럼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리라.”
    “할 말을 합당하도록 하여 보는 동안에”라는 원어는 “할 말을 찾는 동안에”라고 번역할 수 있다. 12절의 ‘꺾는다’는 원어(야카크 ח)는 ‘깨우친다, 잘못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긴다’는 원어(나다프 ף)는 ‘찌르다, 패배시키다, 치다’는 뜻이다. 14절의 ‘그’는 욥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욥의 친구들이 욥을 깨우치거나 욥의 잘못을 증명하지 못했고 욥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마치 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로 욥을 책망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잠언 10:20-21은,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고”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하고,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한다. 우리는, 물론, 잘못을 행한 자에게는 충고와 책망의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바르게 행하는 자에게는 위로의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사야 50:4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지혜의 책인 성경을 읽고 지혜의 성령의 충만을 받아 남을 바르게 권면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자.
    [15-22절]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내게 말이 가득하고 내 심령이 나를 강박함이니라. 보라 내 가슴은 봉한 포도주 같고 새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됨 같구나. 내가 말을 발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
    엘리후는 나이 많은 다른 이들의 말을 인내하며 들었고 이제 자신이 대답할 몫을 말하고자 한다. 그는 마치 봉한 포도주같이, 새 가죽부대가 터지게 됨같이 할 말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성도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 좋다. 의인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잠 15:28).
    엘리후는 또 자신이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첨의 말은 일종의 거짓말이다. 아첨은 악한 일이다. 잠언 26:28,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 잠언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고 말했다(살전 2:5). 그러나 유다는, 이단자들이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며 그 정욕대로 행하고 그 입으로 자랑하고 이익을 위해 아첨한다고 말했다(유 16).
    우리는 먼저 남의 말을 잘 듣고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하며 말하는 자가 되고, 또 남에게 아첨하지 말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자.
    33장: 엘리후--하나님은 자신을 다 알리지 않으신다
    [1-7절]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나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 내 말이 내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내 입술이 아는 바를 진실히 말하리라. 하나님의 신[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살게 하시느니라]. 네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는 욥에게 자기 마음의 정직함을 나타내고 자기가 아는 바를 진실하게 말하겠다고 말한다. 죄인의 마음은 거짓되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거짓됨을 증거했고(렘 9:4-6), 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다(렘 17:9). 그러나 성도는 거짓을 버리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하였다(엡 4:25).
    엘리후는 자신이 욥보다 나은 것처럼 높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자기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자기를 살게 하셨고 자기나 욥이나 다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라고 말하였다. 그는 허풍이나 허세를 품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말하기를 원한다. 엘리후의 이런 마음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바르고 선한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피조물들이요 부족한 자들임을 인식하며 허풍과 외식을 버리고 오직 정직하고 진실한 것을 말하는 자들이 되자.
    [8-12절]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네가 실로 나의 듣는데 말하였고 나는 네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늘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욥은 자신이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허물과 불의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성도가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삶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공회 앞에서,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고(행 23:1), 고린도전서 4:4에서는,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낌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을 비난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고 말했다고 말한다. 욥기 13:24, 27에 기록된 대로,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대적하시고 그의 발을 차꼬에 채우신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내가 네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네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과 능력에 있어서 또 의와 선에 있어서 사람보다 크시다.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부족한 죄인이다. 또 고난은 우리에게 믿음과 겸손과 거룩을 위해 유익하다. 고난은 인생의 허무함과 천국의 가치를 더욱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거리낌 없이 살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비난하지 말고 참고 복종하자.
    [13-18절]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과 변쟁(辯爭)함은 어찜이뇨?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엘리후의 말은 옳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바에 대하여 스스로 진술하지 않으신다. 그는 진술하실 의무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의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그와 변론하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제한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이 아니고 평안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30: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 8:28).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침묵하지는 않으신다. 그는 옛 시대에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지금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단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감각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이 확실히 교훈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목적은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그로 파멸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그와 변론하려 하지 말고 오직 겸손히 그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19-26절]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혹시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늘 쑤심의 징계를 받나니 그의 마음은 식물을 싫어하고 그의 혼은 별미를 싫어하며 그의 살은 파리하여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던 뼈가 드러나서 그의 혼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워지느니라.” 엘리후는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뼈가 늘 쑤시며 입맛이 떨어져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살이 빠져 수척하며 보이지 않던 뼈가 튀어 나와서 그의 영혼은 죽음의 구덩이에 가까워진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럴 때에 만일 일천 천사[혹은 ‘사자(使者)’] 가운데 하나가 그 사람의 해석자로 함께 있어서 그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일진대[보인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그로 그를 긍휼히 여겨 말하게 하기를](NASB)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하게 하라]. 그런즉 그 살이 어린아이보다 연하여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만일 그에게 단 한 명의 사자라도 해석자로 있다면 그는 그를 긍휼히 여기며 옳은 것 곧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것이다. 그것은,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살은 어린아이보다 연해져서 소년 때를 회복할 것이며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로 자기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의 의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는 회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극심한 징계의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살리고 회복시키시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자.
    [27-33절]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가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 이르기를 내가 전에 범죄하여 시비(야솨르 ר)[옳은 것]를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었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건지사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 내 생명이 빛을 보겠구나 하리라.” ‘사람 앞에서 노래하여’라는 원문(야쇼르 알 아나쉼 םי־ל ר)은 ‘사람들을 보며’(KJV)라는 뜻이다. 죄의 징계로 극심한 병의 고통을 받은 그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전에 범죄하여 옳은 것을 바꾸었으나 내게 무익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영혼을 죽음의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건지셨고 내 생명이 빛 곧 기쁨과 행복을 누리리라’고 간증할 것이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일을 재삼 행하심은 그 영혼을 구덩이에서 끌어 돌이키고 생명의 빛으로 그에게 비취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여러 번 이런 징계의 고난을 주시는 목적은 그로 하여금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빛 즉 영생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엘리후는 ‘구덩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18, 22, 24, 28, 30절), 그것은 죽음의 구덩이이며 결국 멸망의 구덩이인 지옥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망의 구덩이로부터의 구원이며 결국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욥이여, 귀를 기울여 내게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말하리라.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대답하라. 내가 너를 의롭게 하려[의롭다 하려] 하노니 말하라. 만일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 잠잠하라. 내가 지혜로 너를 가르치리라.” 엘리후는 모든 일을 정당히 판단하고 말하려 한다. 그는 욥이 옳으면 옳은 것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는 욥이 할 말이 없으면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기는 하시지만 긍휼로 구원하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았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자.
    34장: 엘리후--하나님은 의로우시다
    [1-4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지혜 있는 자들아,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엘리후는 사람의 입이 식물의 맛을 분별하듯이 사람의 귀가 말을 분별하므로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을 택하고 선한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선과 악, 의와 불의가 섞여 있다. 어리석은 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말하고(잠 12:18), 또 아무 말이나 다 믿지만(잠 14:15), 지혜로운 자는 듣는 것을 분별하고 말하는 것도 조심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말씀하셨다(사 55:8-9). 주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마 16:23).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의롭고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교훈하였고(롬 12:2), 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21-22).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의롭고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하며 또 그것을 택하고 그것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5-9절]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내가 정직하나 거짓말쟁이가 되었다’는 원문은 ‘내가 나의 의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랴?’라고 번역할 수 있다(KJV, NASB).
    욥은 전에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거짓]을 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욥 27:2, 4). 욥은 또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어떤 죄를 짓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했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하기[조롱하기]를 물마시듯 하며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
    욥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조롱했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고난 중에 한 말이라도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욥이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사귀며 악인과 함께 다니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고 말했다면 그것도 잘못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악한 자들과 더불어 살면서 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러 가지 점에서 유익이 많다. 고난은 우리에게 교정의 유익뿐 아니라, 예방의 유익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평소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되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범죄치 말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조롱하거나 비방하지 말고, 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10-15절]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치 않으시고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 그는 각 사람을 그 행위대로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보응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전 12:14; 롬 2:6). 엘리후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것은, 아마, 욥도 하나님의 엄격한 잣대로 보면 흠과 점이 없지 않으므로 그가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흙]로 돌아가리라.”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라는 원문은 ‘그가 만일 자기의 결심대로(NASB) 혹은 자기의 의도하신 대로(NIV) 하시면’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대로 자기 영과 자기 호흡을 거두신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모든 사람들은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세상 만물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가진 주권자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 권한을 다 사용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와 선을 베푸셨고, 우리는 그의 선하신 섭리 속에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고 오직 인내하며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응하여 의와 선을 행하자. 그것이 마땅한 길이며 영생과 평강의 길이다.
    [16-20절] 만일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만일 총명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자를 네가 정죄하겠느냐?”
    하나님은 공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시고 의롭고 전능하신 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그의 섭리를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말고 겸손히 또 잠잠히 순응해야 한다. 실상 우리는 죄악된 세상 속에 살면서 부족들과 실수들이 없지 않고 우리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음을 안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그들은 밤중 순식간에 죽나니 백성은 떨며 없어지고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하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 그는 왕족이나 부자를 평민이나 가난한 사람보다 더 생각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손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외적 영광과 아름다움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실상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밤중에 순식간에 죽어가며 심지어 세력 있는 자도 사람이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한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공격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나가서 하룻밤에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명을 쳤다(사 37:36). 유다 왕 헤롯이 백성의 칭찬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을 때 주의 사자는 곧 그를 쳤고 그는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1-23).
    우리는 하나님께서 엄위하고 공의로운 통치자이시며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않는 자이심을 알고 오직 그를 신뢰하며 그의 섭리에 순응하자.
    [21-22절]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
    엘리후는 또,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길, 즉 그들의 모든 행위를 주목하시고 감찰하신다. 또 그는 공의로 모든 일을 보응하신다. 특히 악을 행한 사람은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가인의 악행을 보셨고(창 4:9-10), 동생을 팔아넘긴 요셉의 형들의 악행을 보셨다(창 45:4-8).
    시편 139편 저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하였다(1-4, 7-8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다(암 9:1-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길, 우리의 모든 행위와 특히 생각까지 주목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고 악을 행치 말자.
    [23-25절]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 . . .
    엘리후는 또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세력 있는 자를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하게 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그들의 행위를 아시고 그들을 밤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라고 한다.
    세상의 재판은 확실한 증거들을 수집하고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 때로는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심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때로 무엇을 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부족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제시하고 변론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으로 즉시 바른 판단을 하신다.
    또 그는 그 바른 판단에 의거하여 그의 능력으로 권세자를 꺾으시고 그를 폐하시고 다른 사람을 세우기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행위를 다 아시고 밤 사이에 그들을 엎으시고 멸망시키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시고 참으로 엄위하시다. 그러므로 다니엘 4장은 하나님을,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자라고 증거하였다(단 4:17, 25, 3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행하시는 일들의 완전함과 엄위함을 잊지 말고 그 앞에 잠잠하고 그의 섭리에 겸손히 순응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 우리는 그의 섭리를 조롱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불평하거나 원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혹시 생각나는 죄가 있으면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그런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잠잠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즉각적 지식과 공의의 판단과 엄위한 보응을 깨닫고 그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할 때라도 그의 지혜와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믿고 의심치 말자. 또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자.
    [26-28절]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목전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김이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들을 악한 자로 여겨 사람의 목전에서 치심은 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無關)히 여김이라. 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케[이르게] 하며 환난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벌하시는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無關)히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그를 경외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 의무를 저버렸다.
    또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길을 무관히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일에 대해 관심 없다는 뜻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악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고 말했다(사 5:12). 악인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도, 하나님의 계명도 알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과 해를 당하고 호소할 곳이 없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다. 야고보는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말했다(약 5:4).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잘 들으시고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동정하시고 악인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과 계명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묵상하며 힘써 실천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남을 핍박하거나 남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오직 서로 사랑하며 평생에 선을 행하는 자가 되자.
    [29-30절]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수 있으랴. . . .
    엘리후는 또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환난과 고통을 거두시고 평안을 주실 수 있다. ‘잘못하신다고 하다’는 원어(야르쉬아 )는 ‘(악하다고) 정죄하다’는 뜻이다(BDB, NASB).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때 아무도 그것을 정죄하지 못한다.
    엘리후는 또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이시니”라고 말한다. ‘얼굴을 가리우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호의를 거두시고 환난에 버려두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로 뜻하시면 그의 은혜와 도우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이것은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일반이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었던 평양시는 많은 신자들과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린 공산 독재사회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도시는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가결한 장로교 총회가 열렸던 도시이었다. 그 도시의 현재는 공의의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인다.
    엘리후는 또 “이는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백성을 함해(陷害)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카네프 ף)는 ‘불경건한 자’(BDB, NASB, NIV)라는 뜻이다. 불경건한 통치자는 자신이 백성 앞에서 의와 사랑을 실행하는 것처럼 처신하지만, 실상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므로 불법을 행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악한 자이다. ‘함해한다’는 원어는 ‘올무에 걸린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그런 악한 자가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자기 백성들로 그들의 압제의 올무에 걸리지 않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공의를 깨닫고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힘써 행하자.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도 깨닫고 환난과 고통 중에서 낙심치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31-37절]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치[패역하게 행치] 아니하겠나이다.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가 있느냐?”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패역함을 깨닫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혹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그에게 아뢰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고 말한다. 본문은 번역하기 어렵고 영어번역들도 다양하다. ‘싫어하다’는 원어(마아스 סאַ)는 ‘거절하다, 멸시하다’는 뜻이다. 본절 전반부는 아마, “네가 멸시하였기 때문에, 그가 네 판단대로 보응하시겠느냐?”일 것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판단대로 보응하지 않으심을 말하는 것 같다. 사람의 판단은 심히 불완전하고 부족하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총명한 자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 있는 자가 필연 내게 이르기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 없다 하리라.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그가 그 죄 위에 패역을 더하며 우리 중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욥이 지혜와 지식이 없이 자신의 죄 위에 하나님께 패역한 말을 더한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고난 중에서라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욥의 부족이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우리는 스스로 의롭지 못한 부족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내 뜻을 앞세우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35장: 엘리후--사람의 의의 무익함
    [1-8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 . . .
    엘리후는 또 말을 잇는다. “네가 이것을 합리[합당]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2-3절을 다시 번역하면, “네가 이것을 합당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느냐? 이는 네가 이르기를, 주께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함이니라.” ‘궁창’이라는 원어(솨카크 ק)는 ‘구름’을 가리킨다(BDB, KJV, NASB).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해(害)]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사람은 하나님보다 의롭지 않다. 자기는 의로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정죄하신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공의로우시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 유익을 드리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남에게 유익을 주거나 자신에게 유익할 뿐이다. 사람의 죄도 하나님께 해를 끼치지 못하고 자신에게와 타인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실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또 그의 섭리를 어리석게 비난하지 말자.
    [9-16절]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 . . .
    엘리후는 계속 말한다. “사람은 학대가 많으므로 부르짖으며 세력 있는 자의 팔에 눌리므로 도움을 부르짖으나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참으로 찾지 않는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 믿음 없는 자들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지 못하는 헛된 부르짖음일 뿐이다.
    엘리후는 또, “하물며 말하기를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시비는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 하는 너랴”라고 말한다. 본절은 아마, “참으로 네가 말하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한다고 하나, 판단이 그 앞에 있으니 너는 그를 간절히 기다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BDB, KJV). 성도는 고난 가운데 비록 하나님을 뵈올 수 없으나 그가 모든 일을 공의롭게 판단하실 것을 믿고 오직 그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엘리후는 또,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고 횡포(파쉬 שׁ)[어리석음](BDB)를 심히 살피지 아니하셨으므로 이제 너 욥이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진노하여 보응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한 공의의 심판 앞에 설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 헛된 말, 지식 없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 참으로 하나님을 찾자. 우리는 환난 중에라도 모든 일을 판단하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하나님만 간절히 기다리자.
    36장: 엘리후--하나님은 선하시다
    [1-7절]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 . .
    엘리후는 말을 이어 말했다.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소유하였고 하나님께 정당성을 돌리겠고 자신의 말은 올바르고 진실하다고 말한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카비르 רי)[능력이 많으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코아크 레브 ב )[마음(지혜)의 힘]이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시며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시며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창 18:14; 욥 42:2; 렘 32:17) 아무도 멸시치 않으신다. 그는 사람과 대화하시고 언약을 맺으신다. 심지어 그는 아브라함과 변론하셨고 모세와도 변론하셨다(창 18:22-33; 출 32:30-34; 민 14:11-23). 그는 고아를 돌아보시며 도우시는 자이시다(시 10:14). 또 그는 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시다(욥 12:13). 또 그는 악인을 살려두지 않으시고 죽이시며 고난받는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 그는 공의의 심판자이시다. 특히 그는 의인에게서 눈을 돌이키지 않으시고(시 34:15)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시고 존귀케 하신다(시 113:6-8; 시 75:10). 하나님은 공의와 긍휼의 통치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자. 그의 능력과 지혜, 공의의 보응, 또 그의 긍휼을 알자.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8-12절]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누설(縷絏)’이라는 우리말은 ‘포승줄’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원어(직킴 םי)는 ‘(죄수를 묶는) 차꼬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죄수들이나 포로들처럼 포승줄이나 차꼬들에 묶이거나 환난의 줄에 매였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셔서 그들의 교만한 행위, 즉 그들이 교만하고 높은 마음으로 처신한 것을 알게 하신다. 사람들의 교만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악을 행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의 귀를 여셔서 교훈을 듣게 하시고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시편 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며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신다(히 12:10).
    엘리후는 또 말한다.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고난받는 자들 중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훈계를 듣고 그를 순종하고 섬기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고난에서 건짐을 받고 형통한 날과 즐거운 해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결국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다. 이사야 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평소에 바르게 살자. 또 고난당할 때 깨닫고 돌이키자.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훈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되자.
    [13-14절]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마음이 사곡한[불경건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 ‘사곡한’이라는 원어(카네프 ף)는 ‘불경건한’이라는 뜻이다(BDB, NASB). ‘남창(男娼)’이라는 원어(케데쉼 םי)는 ‘몸을 파는 남자들’을 가리킨다.
    불경건한 자들은 온갖 악을 행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미련한 자들은 경건한 부모의 훈계를 멸시한다(잠 1:7).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해 악에서 떠나게 되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면 악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잠 16:6). 또 악을 행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된다. 처음에는 평안할지 모르나 마침내 재앙을 당할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즉 하나님의 징벌로 어떤 환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며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9:20-21에 보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들의 우상숭배와 살인과 음행의 죄를 회개치 않는다고 말하였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회개할 만할 때에 회개해야 한다.
    또 그런 자는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게 망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장수(長壽)는 하나님의 복이며 단명(短命)은 그의 징벌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며 그의 규례와 명령을 지킬 때 장수의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4:39-40; 5:32-33; 11:8-9).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경건과 의 가운데 삶으로써 영생을 취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1-12). 그러나 불경건한 자는 젊어서 죽을 것이며 남창(男娼)들, 즉 음란한 자들과 함께 망할 것이다. 불경건은 모든 죄의 근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게 살자. 모든 악을 버리자. 또 환난 날에 회개하자. 이 땅에서도 복된 장수를 누리고 또 영생을 취하자.
    [15-16절]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 . . .
    엘리후는 또,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곤고한 자들, 즉 그를 경외하며 곤고할 때에 부르짖는 자들을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신다. 시편 34:6-7,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신다. 시편 119:67, 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욥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을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셔서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다. 또 욥의 밥상에 차린 모든 것은 살진 것이 되었을 것이다. 시편 34:8- 10,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믿자. 또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17-18절]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代贖)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18절은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징책’이라는 원어(세페크 ק)는 어떤 히브리어 사전(BDB)은 ‘조롱’ 혹은 ‘징책’이라는 뜻을 제시하고, 다른 사전(Langenscheidt)은 ‘침[때림],’ ‘징책,’ ‘조소,’ ‘풍부’ 등의 뜻을 제시하고, 또 다른 사전(KB)은 뜻을 제시하지 않았다.
    영어성경들은 ‘침(때림)’, ‘조소’, ‘부요’ 등 다양하게 번역한다. KJV, “분노가 있기 때문에 그가 너를 쳐서 데려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게 되면 큰 대속물도 너를 구할 수 없으리라.” ASV, “분노가 일어나 네가 징책을 대적하게 하지 않게 하고 대속물의 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 NASB, “분노가 너를 조소하는 데로 이끌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 대속물의 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 NIV, “아무도 부요로 너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하라. 큰 뇌물이 너로 곁길로 가지 못하게 하라”(NIV는 ‘분노’라는 단어를 빠뜨렸는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본문은 분노를 조심하라는 뜻만큼은 분명하다. 엘리후는 욥이 악인의 벌 같은 고난을 받는 중에 분노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분노를 조심해야 한다.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분노를 조심하자. 아주 불가피한 경우, 예수님처럼 의분을 가질 수 있겠으나, 우리는 평소에 분노를 자제하고 온유한 덕을 지키자.
    [19-23절]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 . . .
    엘리후는 “너의 부르짖음이나 너의 세력이 어찌 능히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고 말한다. ‘부르짖음’이라는 원어(슈아 וּשׁ)는 ‘부르짖음’ 혹은 ‘부요’라는 뜻이다. 영어성경들 이 말을 ‘부요’라고 번역한다. KJV, “그가 네 부요를 귀중히 여기겠는가? 아니라. 금도 모든 힘의 세력도 아니라.” NASB, “네 부요와 네 힘의 모든 세력이 너를 곤경으로부터 지키겠는가?” NIV, “네 재산이나 네 모든 힘있는 노력들이 네가 곤란에 처하지 않도록 너를 지탱하겠느냐?”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 것이니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이는]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는 ‘죽는 때’를 가리킨다. 그는 욥에게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밤 곧 죽음을 사모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는 또 욥에게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한다.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음이니라”는 구절에 ‘이것’은 앞에서 말한 ‘악’을 가리킨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 ‘큰 일을 행하신다’는 원어는 ‘높임을 받으신다’(NASB, NIV), ‘존귀하게 행하신다’(BDB)는 뜻이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고 인생에게 교훈을 베푸시고 행할 바를 다 작정하시고 항상 의롭게 행하신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를 향하여 모든 인생은 두려움을 가져야 하고 함부로 대항하는 말이나 조롱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큰 위엄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 비록 환난 중에서라도, 두려움으로 서고 그를 향해 대항하거나 조롱하는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24-33절]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나니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일들을 알고 그를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고 먼 곳에서도 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은 오늘날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찬송한다. 우리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이 지극히 크시다. 그의 연령은 계산할 수 없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구름의 펴임(spreading)과 그의 장막의 울리는 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그가 번개 빛으로 자기의 사면에 두르시며 바다 밑도 가리우시며 이런 것들로 만민을 징벌하시며 이런 것들로 식물을 풍비(豊備)히 주시느니라. 그는 번개 빛으로 그 두 손을 싸시고 그것을 명하사 푯대를 맞추게 하시나니 그 울리는 소리가 풍우를 표시하고 육축에게까지 그 올라오는 것을 표시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와 호수 등에서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셔서 구름을 만드시고 땅 위에 풍성한 비를 내리신다. 천둥과 번개는 그가 내리시는 것들이다. 그는 그것으로 사람을 징벌하시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패하게도 하신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라고 기도하였다(삼상 2:10).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신 하나님이시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자심을 깨닫고 그 앞에 두려운 마음과 겸손함을 가지며 그를 찬송해야 한다.
    37장: 엘리후--하나님은 능력이 크시다
    [1-13절]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이로 인하여 내 마음이 떨며 자기 처소에서 떠나느니라[뛰느니라].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천둥과 번개에 대한 묘사이다. 천둥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들을 행하신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비도 그 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이는 그 지으신 모든 사람으로 그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짐승들은 숨는 곳으로 들어가서 그 굴에 머물며 남방 밀실에서는 광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 기운이 이르며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그의]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온 세상의 지면에]에 이루려 함이라. 혹 징벌을 위하며 혹 토지를 위하며 혹 긍휼 베푸심을 위하여 구름으로 오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천둥과 번개, 적은 비와 큰비, 남방의 광풍과 북방의 찬 기운, 물의 얾, 습기와 빽빽한 구름 등을 다 주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을 주관하심을 알자. 그의 능력을 알자. 또 우리는 자연만물과 그 현상들까지도 하나님께 맡기자.
    [14-24절]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 . . .
    엘리후는 또 말한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 빛으로 번쩍 번쩍하게 하시는지 네가 아느냐?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데임 םי)[지식]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남풍으로 하여 땅이 고요할 때에 네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네가 아느냐? 네가 능히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너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어두워서 진술하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어찌 삼키우기를 바랄 자가 있으랴.”
    20절 후반절은 “만일 사람이 말한다면, 정녕 그는 삼키울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KJV).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한 일들, 예를 들어 구름과 번개와 따뜻한 바람, 그리고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 등에 대해 사람이 다 알 수 있겠는가고 묻는다.
    엘리후는 또 말한다.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어두운 비구름은 때때로 해를 가리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하늘이 맑아진다. 우리는 전능자 하나님을 다 측량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가 계시하신 작은 분량만큼이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이 지극히 크시고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참으로 전능하시고 엄위하시며, 그의 뜻대로 구름과 비를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히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1-7절]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 . . .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무지한 말로 이치(에차 ה)[의논, 조언]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은 부분적으로는 욥과 그 친구들에 대한 그의 불쾌하심을 나타내고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두려움과 겸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매튜 풀). 욥의 문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경건이나 사악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무지와 사려 깊지 못함에서 나온 거친 말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측량하였는지], 누가 그 준승[(목공일에 쓰는) 줄]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柱礎)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이 모든 일을 행한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홀로 이 일을 행하셨다(사 44:24).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드러난 창조 세계의 일들도 모른다면, 그의 감추인 섭리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처신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새벽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의어로 쓰였고, 그것은 천사들을 가리켰다(욥 1:6).
    하나님은 홀로 땅의 기초를 놓으셨다. 우리는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뜻을 가리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8-11절]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카술라 ה)[기저귀]를 만들고 계한[경계]을 정하여 문과 빗장을 베풀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바닷물은 때때로 물 무더기와 같다. 시편 33:7,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그러나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셨다. 그는 구름으로 그 의복을, 흑암으로 그 기저귀를 만드셨고 문을 만들고 빗장을 지르듯이 바닷물의 경계선을 정하시고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말며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치라”고 말씀하셨다. 바닷가의 모래 벌판은 바닷물이 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선이다(렘 5:22).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많은 양의 물이 수증기로 증발하여 비와 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땅을 삼킬 듯이 밀려오는 바다 물결과 거대한 파도는 심히 두렵다. 거대한 바다는 때때로 큰배들과 노련한 선원들도 삼킨다. 타이타닉 호 같은 거대한 배도 파선되었다. 넓은 바다와 거센 파도 때문에 실종된 사람들은 그 시신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다. 스나미 같은 해일은 그 주위의 마을들을 황폐케 만든다. 사람은 바다 물결을 제어하거나 제압할 수 없다. 기습적인 폭우와 홍수는 속수무책의 재앙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신다. 기상 이변을 조정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다. 바다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마 8:27).
    그러므로 우리는 바닷물을 주장하시는 섭리자 하나님만 경외하자. 그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하나님만 찬양하고 그 하나님만 순종하자.
    [12-15절]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새벽으로 그 처소를 알게 하여 그것으로 땅끝에 비취게 하고 악인을 그 가운데서 구축한[쫓아낸]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화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고 만물이 옷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금한 바 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며(요일 1:5) 빛을 주신다. 그는 밝은 아침을 오게 하신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침이 오지 않을 것이다. 새벽빛이 온 땅에, 땅끝까지 순식간에 비취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빛이 비치면 땅이 변한다. 어두울 때는 혼돈뿐이었으나, 빛이 비추면 땅은 진흙에 도장을 찍은 것같이, 예쁜 옷같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산들도, 들들도, 풀들도, 나무들도, 새들과 짐승들도 밝은 빛 아래서 각각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깔과 모양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가지 색깔의 빛, 즉 무지개에서 잘 드러나고 프리즘을 통해 관찰되는 그 빛을 만드셨고 천지만물과 인간들을 위해 친히 주셨다.
    그러나 새벽빛은 또한 악인을 쫓아낸다. 악인은 밝은 빛을 싫어하고 어두운 밤을 좋아한다. 욥기 24:15-17,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악인들에게는 빛이 없다. 악인들은 빛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그 대신 어두움을 좋아한다. 빛은 사람에게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빛을 거두신다. 악인에게는 참된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없다. 또 악인의 높이 든 팔은 껶여진다.
    하나님은 빛 자체이시고 세상의 빛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며 친히 만물과 사람들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만 섬기자.
    [16-18절]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바다 근원(네베크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고 하신다.
    바다 깊은 속에는 아마 많은 샘들이 있을 것이다. 노아 홍수 때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성경은 말한다(창 7:11). 전문 잠수부(다이버)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만(보통은 수중 30미터 정도 들어간다고 함), 그것은 깊은 바다(보통 5-6km, 최저 약 11km)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잠수함도 물의 압력 때문에 아주 깊은 바다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특별한 탐사선도 겨우 900미터 정도 내려간다고 한다. 사람은 바다 속에 대해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녀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그것을 아시며 그것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 ‘사망의 문,’ ‘사망의 그늘진 문’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것은 죽음과 무덤뿐 아니라, 악인들을 위해 예비된 지옥의 문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은 죽음너머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지옥의 문,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간 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세계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측량하다’는 원어(힛본네타 נ)는 ‘지각(知覺)하다, 이해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광활한 지구의 넓이를 느낄 수 없다. 오늘 우리도 땅의 크기를 수학적 어림 계산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심히 제한적이며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다 근원과 사망의 문과 땅의 넓이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섭리에 순복하자.
    [19-24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네가 능히 그 지경으로 인도할 수 있느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年數)가 많음이니라.”
    사람은 광명의 거하는 길을 알지 못하고 흑암의 처소도 알지 못한다. 21절은 반어법(反語法)이다. 그것은, 비록 욥이 나이가 많을지라도 빛과 어두움의 길과 처소를 알지 못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저축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두시고 죄인을 징벌하실 때 그것을 사용하신다(계 16:21). 그는 죄인들을 징벌하기 위해 폭풍과 폭우와 우박을 사용하셨다(사 30:30; 겔 13:11, 13).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위해 아모리 다섯 왕들의 연합군들과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큰 덩어리 우박들을 내려 여호수아를 도우셨고 아모리인들 중에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셨다(수 10:11).
    하나님께서는 또,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고 말씀하신다.
    다시 번역하면, “빛이 나뉘는 길은 어디이며 동풍이 땅에 흩어지는 길은 어디이냐?”이다. 사람은 빛이 나뉘는 길이나 동풍의 길을 알지 못한다.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 빠르기로 달리면서 뻗치어 나간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동풍에 대해서는 사람이 파악하기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아시고 동풍의 길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하자.
    [25-30절]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날 때 그 폭우를 주장하고 그 홍수를 주장하는 이가 누구인가? 누가 그 물길을 내었는가? 사람이 그것을 예측하였더라면 재난을 피했을 것이나 예측하지 못하므로 때때로 물에 쓸려 죽고 집도 떠내려간다. 또 누가 천둥과 번개의 길을 내었는가? 사람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없는 광야와 황무하고 거친 들판에 비를 내려 땅을 축축케 하시고 연한 풀이 나게 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조금 알 뿐이다. 사람은 자연 현상들의 신비한 이치를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비와 이슬방울이 어떻게 생기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은 수증기가 어떻게 공중의 서리가 되는지 혹은 물이 어떻게 얼음이 되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물이 섭씨 0도가 되면 언다는 것을 알지만, 왜 그것이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왜 온도가 내려가면 이슬이 생기고 얼음이 생기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창조 세계는 신비로 가득하다.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일을 많이 행하신다. 욥기 5:9,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그는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욥 9:10).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말 조금 알 뿐이다. 우리는 그의 지극히 크신 지혜와 능력에 대해 지극히 조금 알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기며 따르자.
    [31-33절]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옛날부터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며 별자리들의 이름을 붙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중 몇 가지를 말씀하셨다. 욥도 앞에서 이런 별자리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별들을 다 만드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욥 9:9). ‘묘성(昴星)’(키마 הי)은 플레아데스 별자리(Pleiades) 혹은 황소자리 별자리로서 일곱 개의 별들로 되어 있고, ‘삼성(參星)’(케실 לי)은 오리온 별자리(Orion)로서 세 개의 별들로 되어 있다. ‘열두 궁성(宮星)’(맛자로스 תוֹר)과 ‘북두성(北斗星)’(아이쉬 שׁ)은 아마 열두 궁성 별자리와 큰 곰 별자리를 각각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묘성 곧 황소자리 별자리의 일곱 별을 묶었느냐, 또 삼성 곧 오리온 별자리의 세 별을 풀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는 또 네가 열두 궁성 별자리를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고 말씀하시고 또 큰 곰 별자리의 별들을 인도하겠느냐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는 말은 “그 통치권을 땅에 둘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 공간인 저 하늘에 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모양들을 이루며 규칙적이게 제자리를 지키는 현상들은 참으로 신비하다. 이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조금도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이런 질문들에 대해 욥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늘의 별들을 홀로 창조하시고 홀로 운영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섬기자.
    [34-38절]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욥의 목소리가 구름에 도달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도달했다 할지라도 구름이 그의 말에 복종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하늘의 번개를 주관하고 그것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은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고 물으신다. 사람은 확실히 짐승들과 다르다. 물론 사람은 범죄한 이후 하나님을 아는 참 지혜를 잃어버렸고 심히 무지하고 허무한 것을 추구하고 사는 상태에 있지만, 확실히 짐승들과는 다르다. 사람에게는 짐승들에게 없는 높은 수준의 지혜와 이성과 도덕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지혜와 총명은 누가 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또, “[그러나]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티끌이 굳어질 때와 흙덩이가 서로 붙을 때, 누가 하늘의 병을 기울일 수 있느냐?”라는 뜻이다(NASB, NIV).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구름들의 수를 셀 수 없으며 하늘의 물병을 기울여서 단단하게 굳어지는 티끌을 물게 하거나 딱딱하게 붙어버리는 흙덩이를 부드럽게 할 능력이 없다. 욥이든지 누구든지 사람은 구름과 비를 명령할 힘이 없다.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구름과 번개와 비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자. 또 거기에 비해, 사람의 지혜와 능력이 심히 보잘것없음을 알자.
    [39-41절]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삼림에 누워서 기다리는 때에니라.” ‘암사자’라는 원어(라비 אי)는 ‘사자’라는 뜻이며, ‘젊은 사자’라는 원어(케피림 םיי)는 ‘젊은 사자들’이라는 복수명사이다. 사자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납고 날렵한 짐승이다. 그것은 100 내지 250킬로그램의 체중을 가지고도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달려가 얼룩말, 영양, 기린, 사슴, 물소, 멧돼지 등을 사냥한다. 낮에는 보통 나무 그늘에서 쉬고 밤에 활동하며 열 마리나 스무 마리씩 떼를 지어 산다. 사람이 사자를 위해 먹이를 사냥할 수 없고 젊은 사자들의 식욕을 채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신다. 까마귀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새다. 노아 홍수 때에 노아는 물이 걷힌 후 창문을 열고 맨 먼저 까마귀를 내어보냈다. 시편 147:9는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것을 주시는도다”고 말하며, 주께서도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하셨다(눅 12:24). 까마귀 새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것들에게 먹을것을 주신다.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은 다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하심 속에 살고 있다(시 104:27-29).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상 만물을 섭리하신다.
    사자와 까마귀 같은 모든 동물도 하나님의 선하신 배려 때문에 먹을것을 얻고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는 자연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잠잠히 순복해야 한다.
    39장: 동물 세계가 주의 손 안에 있음
    [1-4절]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산염소’라는 원어(야알레-살라 ע־י)는 ‘바위의 영양(羚羊)’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네가 산염소의 새끼 낳는 때를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아느냐, 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이 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신다. 산염소 같은 짐승은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험준한 바위와 바위 사이 또는 동굴에 두 마리 내지 다섯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산염소나 산양, 암사슴 같은 짐승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사람이 그런 짐승들에 대해 아는 것이란 지극히 조금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그 새끼는 강하여져서 빈들에서 길리우다가 나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라는 구절은 “그 고통(산고 産苦)을 던져버리며”라는 뜻이다.
    산염소나 사슴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고 그 출산의 고통을 던져버리며 그 새끼들은 강해지고 들판에서 자라다가 어미를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암사슴 같은 짐승은 새끼를 낳은 후 1년 정도 키우지만, 그 후 어린 사슴은 어미를 떠나 독립해 나간다고 한다.
    사람은 동물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의 구조와 생리를 잘 아신다. 온 세상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를 경배하고 섬겨야 한다.
    [5-12절]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내가 들로 그 집을, 짠 땅으로 그 사는 처소를 삼았느니라. 들나귀는 성읍의 지꺼리는 것[요란한 것]을 업신여기니 어거하는 자의 지르는 소리가 그것에게 들리지 아니하며 초장이 된 산으로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푸른 것을 찾느니라.” 들나귀는 집에서 기르는 나귀와 그 성질이 다르다. 들나귀는 들이나 척박한 벌판을 거처로 삼고 자유로이 산다. 그것은 성읍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제어하려고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또 그것은 초장을 찾아 산을 두루 다니며 여러 가지 먹을 만한 푸른 것을 찾아다닌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들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네가 능히 줄로 들소를 매어 이랑을 갈게 하겠느냐? 그것이 어찌 골짜기에서 너를 따라 쓰레[써레=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게 하는 도구]를 끌겠느냐? 그것의 힘이 많다고 네가 그것을 의지하겠느냐? 네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기겠느냐? 그것이 네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며 네 타작 마당에 곡식 모으기를 그것에게 의탁하겠느냐?” 집에서 키우는 소는 순하게 길들여져서 외양간에 매어두기도 하고 논이나 밭을 갈게도 하고 써레를 끌게도 하지만, 들소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에게 복종치 않기 때문에 외양간에 머물게 할 수도 없으며 밭이나 논의 일을 위해 사용할 수도 없다. 비록 그것이 힘이 많아도, 사람은 그것을 의지할 수 없고 자신의 수고하는 일을 그것에게 맡길 수 없다. 사람은 그것에게 곡식을 집으로 실어 오는 일이나 타작마당에 곡식을 모으는 일을 맡길 수 없다.
    들나귀와 들소를 만드셨고 그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자신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히 엎드리며 즐거이 순복하자.
    [13-18절]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고 말씀하신다. 영어성경들은 본절을 다양하게 번역했다. KJV, “네가 공작들에게 멋있는 날개를 주었느냐? 또는 타조들에게 날개와 깃털을 주었느냐?”(그러나 원문에는 ‘공작’이라는 말이 없음). NASB, “타조들의 날개들은 사랑스런 날개와 깃털을 가지고 즐거이 퍼드덕거리도다.” NIV, “타조의 날개들은 즐거이 퍼드덕거리나 황새의 날개와 깃털에 비교할 수 없도다”(‘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은 임의로 첨가됨). NASB 의 번역이 바른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劬勞)한 것이 헛되게 될지라도 괘념치[마음에 두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주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암타조는 6-8개의 알을 모래 위의 오목한 곳에 낳고 40일 가량 버려두어 부화시키는데, 발에 깨어지거나 다른 들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않고 마치 자기 새끼가 아닌 것처럼 그것에 대해 무정하고 그것이 깨어져도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조가 뛰어갈 때는 말 탄 자를 무시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태운 경주마는 시속 약 72킬로미터로 달리지만, 타조는 보통 시속 64킬로미터, 최고 145킬로미터로까지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을 만드셨고 타조를 지으셨고 그 성질과 생리를 잘 아신다. 그러나 우리는 타조를 잘 알지 못하고 통제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조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19-25절]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 . . .
    하나님께서는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그것이 골짜기에서 허위고 힘있음을 기뻐하며 앞으로 나아가서 군사들을 맞되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아니하며 칼을 당할지라도 물러나지 아니하니.” 19절의 ‘갈기’는 말의 목덜미에 난 긴 털을 가리키고, 21절에 ‘허위다’라고 번역된 원어(카파르 ר)는 ‘앞발로 친다’는 뜻이다.
    말은 힘이 좋은 짐승이다.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는 그 힘의 상징이다. 옛시대에 말은 전쟁의 필수적 도구이었다. 말은 또한 겁이 없는 짐승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협해도 움츠리지 않는다. 그의 위엄스러운 콧소리는 두렵다. 말은 골짜기에서 앞발로 치며 달리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앞으로 전진하며 적군들을 맞아 싸운다. 그것은 두려움을 비웃고 놀라지 않으며 칼을 만나도 물러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 위에서는 전동과 빛난 작은 창과 큰 창이 쟁쟁하며 땅을 삼킬듯이 맹렬히 성내며 나팔 소리를 들으면 머물러 서지 아니하고 나팔 소리 나는 대로 소소히[쓸쓸히]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느니라.” 23절의 ‘전동(箭筒)’(‘전통’이라고도 발음함)은 ‘화살통’을 가리킨다. 25절 전반절은 “나팔 소리 가운데 ‘힝힝’ 하고 울며”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말은 그 위에서 화살통과 빛난 큰 창과 작은 창들이 쟁쟁하는 소리를 내며 땅을 삼킬 듯 맹렬히 성내고 나팔 소리를 들어도 머물러 서지 않으며 나팔 소리 가운데 ‘힝힝’ 하고 울며 멀리서 싸움 냄새를 맡고 장관의 호령과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힘있고 겁없는 말을 만드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자이시다. 인생은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며 감히 그와 변론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26-30절]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매와 독수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는 욥에게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며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고 물으신다. 매는 작은 것은 25cm 정도이지만, 큰 것은 66cm 정도나 되며 날개를 펴면 날개폭이 119cm나 되는 것도 있으며, 독수리는 매보다 좀더 커서 크기가 보통 80-90cm가 되고 날개폭은 약 2m가 된다고 한다. 또 독수리는 부리가 약 5cm나 되고 끝이 2.5cm 정도 아래로 굽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이런 새들을 만드셨고 섭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 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 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독수리는 높은 나무 위나 높은 산 절벽이나 바위 끝에 둥지를 만든다고 한다. 독수리와 매는 동물들 중에서 시력이 가장 좋은데, 매의 시력은 사람보다 약 8배나 더 좋아 하늘에서도 쥐를 선명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그것들은 작은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짐승의 시체도 먹는다. 주께서도 이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는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24:28; 눅 17:37).
    하나님께서 매와 독수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사람은 그런 새를 생각만해도 놀라운데, 그것을 만드신 자 앞에 감히 어떻게 서랴.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한다.
    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1-9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 . .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신다. “변박하는 자(잇소르 רוֹסּ)[비난하는 자](BDB, KB)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은 하나님께 몇 번 그런 유의 말을 하였다(욥 9:30-31; 13:24; 27:2).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서 욥을 책망하신다. 그 때 욥은 “나는 미천하오니(칼라 ה)[보잘것없사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한글 국한문의 ‘피하려느냐’는 잘못임.)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판단과 섭리가 정당함을 엄위하게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판단과 섭리는 가장 지혜롭고 의롭고 선하다. 욥은 자기 의를 변호하려고 하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성도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존재이며 많은 단련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정당하다. 또 성도의 고난은 언제나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우리의 성화를 이루실 것이다(롬 8:28).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지혜롭고 의롭다. 그러므로 성도가 비록 의롭게 산다 할지라도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항상 인정하며 겸손히 인내하며 순복해야 한다.
    [10-14절]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지니라”고 말씀하신다. 10-14절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 느끼고 그에게 복종케 하시려고 하신 반어적 표현이다. ‘화미(華美)’라는 원어(하다르 ר)는 ‘광채’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위엄과 존귀로 자신을 꾸미시고 영광과 광채를 스스로 입으셨지만(시 96:6), 욥은 위엄과 존귀로 자신을 꾸밀 수 없고 영광과 광채를 입지도 못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지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넘치는 노를 쏟으셔서 모든 교만한 자를 보시며 낱낱이 낮추시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다 무덤 속에, 어둑캄캄한 곳에 묻히게 하실 수 있다(사 2:11, 12, 17).
    그러나 사람인 욥은 교만한 자를 보고 낮출 힘이 없고 악인을 제압하거나 징벌하여 정당하게 그를 무덤에 들어가게 할 능력도 없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이 세상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 질서가 세워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고통과 탄식 속에 그런 상황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절실히 요청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결국 “네가 그렇게 하지 못하니 내 앞에 순복하고 내가 너를 향해 섭리하는 일에 대해 잠잠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잠잠히 하나님을 앙망하고 신뢰하고 의탁하고 복종해야 한다.
    [15-24절]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그 힘은 허리에 있고 . . . .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또 말씀하신다. “이제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하마’라고 번역된 원어(베헤모스 תוֹמ)(KJV, NASB, NIV)는 옛날 학자들은 ‘코끼리’로 보았고 근래 학자들은 ‘하마(河馬)’라고 본다(BDB, KB). 본문의 묘사는 그 두 동물에 어느 정도 다 해당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 힘은 허리에 있고 그 세력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연락되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가릿대는 철장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마는 꼬리가 보통 56cm이며 코끼리는 1m라고 한다. ‘가릿대[갈비대]’라는 원어(게렘 ם)도 ‘뼈’라는 뜻이다(BDB).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은 자가 칼[송곳니를 가리킨 듯함]을 주었고 모든 들짐승의 노는 산은 그것을 위하여 식물을 내느니라. 그것이 연 줄기 아래나 갈밭 가운데나 못 속에(비차 ה)[늪 속에] 엎드리니 연 그늘이 덮으며 시내 버들이 둘렀구나.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태연하니]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으며 갈고리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하마는 몸무게가 보통 1톤(1,000kg) 이상, 가장 큰 것은 2.6톤이 되며, 코끼리는 보통 5톤이고 가장 큰 것은 6.6톤이 된다. 그것들은 다 풀이나 땅의 식물을 먹고 강이나 늪에서 잘 지낸다. 하마는 요단강에 서식하지 않기 때문에 본문의 묘사는 코끼리에 더 적합해 보인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창조물은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증거한다. 이런 창조물 앞에서 사람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실감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잠잠히 순복해야 한다.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1-11절]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줄로 그 코를 꿸 수 있겠느냐?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꿸 수 있겠느냐?” 본문에 ‘악어’라는 원어(리브야산 ן)는 고래나 악어 같은 ‘큰 바다짐승’을 가리킨다. 영어성경들은 원어의 발음대로 리브야산(leviathan)이라고 번역했다(KJV, NASB, NIV). 사람이 낚시로 악어나 고래를 낚거나 끈으로 그 혀를 매거나 줄로 그 코를 꿰거나 갈고리로 그 아가미를 꿰는 것은 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어찌 네게 연속 간구하겠느냐? 유순한 말로 네게 이야기하겠느냐? 어찌 너와 계약하고 영영히 네 종이 되겠느냐? 네가 어찌 새를 놀리는 것같이 그것을 놀리겠으며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어 두겠느냐?” 이런 일은 다 불가능하다. 악어는 길이가 보통 3-4미터 정도이며 무게는 200 내지 250킬로그램 정도이다. 화석은 예전에 15미터 정도의 것도 있었음을 보인다. 청색 고래(blue whale)는 바다 짐승 중 가장 큰 짐승으로서 길이가 30미터 정도까지 자라고 무게는 200톤(2,000kg) 이상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어찌 어부의 떼가 그것으로 상품을 삼아 상고들[상인들] 가운데 나눌 수 있겠느냐? 네가 능히 창으로 그 가죽을 찌르거나(테말레 א)[채우거나](KJV, NASB, NIV) 작살로 그 머리를 찌를 수[채울 수] 있겠느냐? 손을 그것에게 좀 대어 보라. 싸울 일이 생각나서 다시는 아니하리라. 잡으려는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엎드러지리라.]”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듯이, 창이나 작살로 악어 혹은 고래를 잡아 어(魚)시장에 내어 팔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그 짐승을 잡으려 손을 대어도 그것이 대어들면 놀라 엎드러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아무도 그것을 격동시킬 용맹이 없거든 능히 나를 당할 자가 누구냐?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악어나 고래도 제어하고 이길 용맹이 있는 자가 없거든, 하물며 그런 짐승을 만드신 하나님을 당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홀로 온 천하만물을 만드셨고 그 모든 것의 소유자요 주관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겸손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그의 섭리에 대항하지 말고 언제든지 복종해야 한다.
    [12-34절]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 . . .
    하나님께서는 또 악어 혹은 고래의 구조와 움직임에 대해 말씀하신다. “내가 악어의 지체와 큰 힘과 훌륭한 구조에 대하여 잠잠치 아니하리라. 누가 그 가죽을 벗기겠으며 그 아가미 사이로 들어가겠는고. 누가 그 얼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 두루 있는 이가 두렵구나. 견고한 비늘은 그의 자랑이라. 서로 연함이 봉한 것 같구나. 이것, 저것이 한데 붙었으니 바람도 그 사이로 들어가지 못하겠고 서로 연하여 붙었으니 능히 나눌 수도 없구나.”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것이 재채기를 한즉 광채가 발하고 그 눈은 새벽 눈꺼풀이 열림 같으며 그 입에서는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뛰어나며 그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오니 마치 솥이 끓는 것과 갈대의 타는 것 같구나. 그 숨이 능히 숯불을 피우니 불꽃이 그 입에서 나오며 힘이 그 목에 뭉키었고 두려움이 그 앞에서 뛰는구나.”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그 살의 조각들이 서로 연하고 그 몸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니 그 단단함이 맷돌 아랫짝 같구나. 그것이 일어나면 용사라도 두려워하며 경겁하여 창황하며[당황하며] 칼로 칠지라도 쓸데없고 창이나 살이나 작살도 소용이 없구나.” 12-34절은 설명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신다. “그것이 철을 초개같이, 놋을 썩은 나무같이 여기니 살이라도 그것으로 도망하게 못하겠고 물맷돌도 그것에게는 겨같이 여기우는구나. 몽둥이도 검불같이 보고 창을 던짐을 우습게 여기며 그 배 아래는 날카로운 와륵[기와조각] 같으니 진흙 위에 타작 기계같이 자취를 내는구나.” 30절은, 옛날 영어성경(KJV)의 번역처럼, “날카로운 기와조각들이 그 아래 있어 날카로운 것을 진흙 위에 펼치도다”라는 뜻 같다.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깊은 물로 솥의 물이 끓음 같게 하며 바다로 젖는 향기름 같게 하고 자기 뒤에 광채나는 길을 내니 사람의 보기에 바닷물이 백발 같구나. 땅 위에는 그것 같은 것이 없나니 두려움 없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모든 높은 것을 낮게 보고 모든 교만한 것의 왕이 되느니라.” ‘낮게 본다’고 번역된 원어(라아 האָ)는 그냥 ‘본다’는 뜻이지만(KJV, NASB) 문맥적으로는 한글개역성경의 번역대로 ‘낮게 본다’는 뜻 같다(NIV).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심은 욥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잠잠히 그의 섭리에 순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욥기가 계시하는 대로, 성도에게 오는 고난은 두 종류가 있다. 우리의 부족 때문에 오는 고난의 경우는, 우리가 그 고난을 달게 받으면서 우리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욥처럼 어떤 특정한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은데도 당하는 고난의 경우는,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대항하는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의 지극히 지혜롭고 공의롭고 선하심을 인정하고 그 뜻과 섭리에 겸손히 복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항상 겸손과 두려움으로 순복하자.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1-6절]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 . . .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말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자이시며 무엇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주권자이시다. 2절의 ‘경영’이라는 원어(메짐마 ה)는 ‘생각, 목적, 계획’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사람은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3절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라는 말은 38:2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받아 말한 것 같다. ‘이치’라는 원어(에차 ה)는 ‘의논, 뜻’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고 본다. 욥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 도전적인 말들을 하였다. 이제 그는 그런 말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잘 모르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대해 무례한 말을 삼가야 한다.
    욥은 하나님께 또 말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과거에 선진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고백한다.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다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친 음성을 듣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한다. 그는 의로운 자이었지만 고난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순복하지 못하고 몇 번 도전적인 말을 하였다. 이제 그는 자신의 그 무례한 말까지 회개하는 것이다. 욥은 그가 당한 고난과 그의 부족을 통해 보다 더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고난 중에 무례하게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말고, 겸손히 믿고 참고 순종하자. 나의 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라면 즉시 회개해야 하지만,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고난이라면,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맡기며 참고 기다리고 묵묵히 충성해야 한다. 결코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불평스런 말을 하지 말자. 이것이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이며 욥기의 결론적 교훈이며 또 욥기의 중심적 진리이다.
    [7-9절]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 . . .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노하셨다. 그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말이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욥은 그 친구들보다 하나님에 대해 비교적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의롭게 사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를 고난 중에 두시는가 하고 불평스런 말을 했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그와 그의 자녀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줄곧 말했었다. 그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욥을 정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번제 같은 제사 형식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번제’는 속죄와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욥에게 잘못된 말을 했던 친구들은 욥에게 가서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야 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그 사람에게 가서 푸는 것이 옳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으나, 인간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벌 때문에 온다고만 알고 있었고 욥을 그릇되이 정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드린 번제를 받으셨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셨고 그 중심을 받으셨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의 잘못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함부로 정죄하지 말고 특히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에 조심하자.
    [10-17절]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 . . .
    욥이 그 벗들을 위해 빌매 여호와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이전의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44).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해 빌 때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다. 그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물질의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창 26:12-13).
    욥이 회복되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들과 또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해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다. 그것은 욥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의 노년에 복을 주셔서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 그는 양 14,000마리와 약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2,000마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다.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을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을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다.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없었다.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욥은 그들에게 그 오라비들에게처럼 기업을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욥에게 물질적 유여함과 가정적인 행복을 주셨다.
    그 후에 욥은 140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다. 욥은 장수하였다. 그는 200세 이상을 살았다고 추측된다. 그의 연령을 보면, 욥은 아브라함과 이삭 때의 인물이라고 보인다. 아브라함은 175세, 이삭은 180세를 살았다.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이 와서 사과하면 용서해야 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둘째,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야 애가 3:33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자. 우리는 욥처럼 경건하고 의롭게 온전하게 살고, 그러나 고난 중에 잠잠히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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