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나은 본향(히 11:13-16)
  • 조회 수: 117, 2013.08.04 16:06:58
  • 우리 나라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고 합니다. 통계청이 지난 95년말을 기준으로 실태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나라 인구의 44. 3%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고향을 떠난 사람의 비율은 전남이 60%로 가장 높다고도 합니다. 이제 며칠 후면 추석입니다. 그리고 금년에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을 맞이해서 고향을 찾을 것입니다. 자동차 소유자가 늘어나면서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사상 최대의 민족 대이동이 될 것이라고 예측을 하는데, 그렇다면 금년 추석은 연휴 기간도 길고 해서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민족 대이동이 있을 것 같습니다. 
    추석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명절이 아닌 것을, 지난 주 대만을 방문하면서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지난 주 대만을 방문한 것은 대만에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는 김현철 선교사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갈 때나 올 때 모두 비행기 좌석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금번에 대만을 방문하게 된 것은, 소속 선교사의 선교지와 선교 사역을 살펴보는데도 있었지만, 지난 금요일 갖게 될 約明(언약-Covenant)교회의 福音 餐會(gospel dinner-설명)에서 말씀을 증거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스펠 디너를 금요일 밤에 마치고 토요일에 돌아오려고 하니까 비행기 좌석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만 사람들은 우리 보다 추석 명절을 더 길게 보내기 때문에, 벌써 토요일부터 움직일 수가 없어서 부득불 가스펠 디너는 참석하지 못하고 금요일 오후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고향을 찾는 귀소 본능은 모든 나라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 외국인과 나그네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크세노이'라고 하는데 이는 낯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본국 사람들에게 좀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 언어, 풍속, 생활 양식이 달라서 이방시되고 이질적으로 취급되고 멸시받는 사람을 통틀어 외국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손문 기념관에서 일본인으로 오인 받은 이야기)
    또한 나그네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데 이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말합니다. 나그네는 고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타향에 얼마 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고로 그 생활은 항상 임시적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모두가 나그네와 같습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브라질로 이민을 가야만 나그네인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살고, 고향에 살아도 나그네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사도 신경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하는 신앙 고백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진술은 우리의 행복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우리가 나그네처럼 이 낯선 땅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 진술이 사도 신경에 있는 것은 우리가 이 지상의 것을 무시하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도록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의 귀성 행렬을 바라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음의 몇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믿음의 족장들은 모두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 생각했습니다. 성군 다윗 또한 자신을 나그네로 여겼습니다. 대상 29:16에 '주 앞에서는 우리나 우리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인생은 나그네요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그래서 나이 많은 노인들이 자신을 가리켜 70객 80객이라고 하는 것은, 나그네로 70년, 80년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삶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신령한 나그네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순례자 인생임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하려고 애씁니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늘의 신령한 나그네임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을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 길을 힘들게 할뿐입니다. 사람이 날 때와 죽을 때를 보면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에는 두 주먹을 꽉 쥡니다. 의욕과 야심의 표시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사는 동안 열심히 일하며 힘써 돈을 벌고, 지식을 얻고, 권세를 얻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날에는 모두 두 손을 쭉 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공수래 공수거인 것입니다. 땅 위에 쌓아 놓는 것을 결코 하늘로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은 출애굽 했으나 그 마음이 출애굽 되지 못하여, 항상 애굽을 뒤돌아보고 이 세상 것만을 추구하다가 대부분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북경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었는데, 그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고향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노인은 캐나다 국적을 가진 한국 교포였습니다. 고향에는 4형제 자식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 평양에서 다시 북경으로 돌아올 때에 목사님은 공교롭게도 같은 비행기 안에서 그 노인을 또 만났습니다. 먼저 목사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고향에 갔었습니까?' '갔더랬습니다' '자녀들은 만났습니까?' '다 만났습니다' '모두 평안히들 있습디까?' '그저 그렇게 있습디다' 그리고는 잠시 그 노인은 아무 말이 없다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으렵니다' '왜요?' '산천은 같으나 사람들이 다 변했습니다. 인심이 변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주르륵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토록 그립던 고향도 가보면 별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향에 찾아와도 그립던 고향은 아니로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온바 본향을 사모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육신의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갈대아 우르를 고향으로 삼지 않고, 오직 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 아브라함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준비한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최후의 목표인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듯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전도서 3:11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에서 왔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에서 하나님께로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고향, 영원한 고향은 하늘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품을 떠난 탕자 같은 인생들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찾아갈 고향이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키엘 케에골은 인간을 가리켜 말하기를 '고향 잃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넉넉하게 사는 어떤 집을 찾아가서 집주인에게 생명보험에 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꼭 생명보험에 들어야 될 이유를 이것저것 설명하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생명보험에 들지요. 그 대신에 당신은 내가 말하는 참보험에 들어주시오' 참보험이라는 말에 보험회사 직원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보험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입니다 마는, 생명보험은 그 보험에 든 사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주인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세상에 생명보험이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 들면 안 죽는다는 것입니까?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돈인데 그것이 어떻게 생명보험입니까? 참보험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험회사 직원에게 전도했다는 이야깁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참고향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믿어야 참 생명 보험에 든 것이고, 그러한 성도에게라야 하늘 나라가 참고향이 되는 것입니다. 
    3. 더 나은 본향을 찾는 사람은 소망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나그네는 편안함이 없습니다. 늘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제나 저제나 고향 가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고향에 찾아가 안식을 누릴 때까지, 고난의 떡과 눈물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 땅에서의 온갖 시련과 어려움들을 기쁨으로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비록 땅에서 때로는 환난을 당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찾아오고, 육체의 질병으로 곤고함을 당할지라도, 그들의 삶이 위축되거나 비겁해 지거나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믿음의 길을 걸어 나아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길이 막혀도 고향 가는 길이 즐거운 것처럼, 천국을 향해 가는 인생 길은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가면 영원한 복락이 안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성도에게는 이미 마음의 천국이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마치 고향으로 가는 귀성 차표를 사 놓고 기뻐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민자의 望鄕歌를 들어보십시오. <이민자들은 고향이 있어 행복하다. 이민 생활의 승리를 노래하며 설음을 참을 수 있는 것도, 승리의 보고를 해야 할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울컥 치미는 울화를 누르고 남의 땅에서의 시름을 달랠 수 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가슴 저 밑에 흥건히 고여 있는 고향의 정이 저력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사람은 어머니의 냄새를 모르듯, 고국을 떠나 보지 않은 사람은 애국을 모른다. 자고 새면 어린애 마냥 손가락을 펴 하나, 둘, 셋 한국과 미국의 시차 계산하며 하루에도 천만번 고향을 넘나드는 이민자들은 참 애국자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김장김치, 무시루떡, 남대문, 동대문…. 눈만 감으면 어느새 그리운 고향은 코앞에 있다>
    비에 젖어 춥고 허기진 날에 어딘가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대했던 일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사람들에게 철저히 실망한 날에도, 반가이 맞아 줄 그리운 분이 있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배부르고 따뜻하여도 돌아가 쉴 만한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나그네입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명성이 높아져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진실된 사랑만으로 반가이 맞을 그리운 분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향이 이북에 있거나 이런 저런 까닭으로 고향을 못 가는 사람들은 가슴이 시릴 것입니다.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있습니다.그러나 인생의 본향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뜬구름만 잡으려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늘 나라를 본향 삼고 이 땅위에서의 삶을 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동네에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딱지치기 땅 따먹기를 합니다. 옛날에는 모두 그런 놀이를 하고 자랐습니다. 많이 딴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잃은 아이는 시큰둥해 있습니다. 딱지도 구슬도 다 잃어버린 아이는 아예 울고 앉아 있습니다. 많이 딴 아이에게 딴것 중에 조금만 달라고 통사정해도, 다 딴 아이는 욕심 많게 하나도 주지를 않습니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뉘엇뉘엇 넘어갑니다. 땅거미가 깔리면서 점점 어두워집니다.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머니들이 나와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데려 갑니다. 울던 아이들도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환해지면서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서 안깁니다. 모두들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향해 돌아갑니다. 그런데 딱지와 구슬을 다 따고 땅도 다 따먹은 아이는, 날이 어두워 졌는데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연연합니다. 손에는 구슬과 딱지가 한아름입니다만 그에게는 조금도 기쁨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집도 없었습니다. 누가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낮에는 딱지를 많이 따 모으고 구슬을 다 따서 모아도 땅따먹기에서 모든 땅을 다 땄어도, 해가 지자 그는 갈곳이 없는 비참한 아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리 땅을 많이 가지려고 아우성을 치고, 돈을 많이 벌려고 발버둥을 치며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옵니다. 인생의 밤이 찾아옵니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때 갈곳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의 황혼이 되어 주님 부르실 때에, 다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행복한 표정으로 주님의 품으로 가는데, 아무도 불러 주는 이 없고 갈곳 없어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늦기 전에 갈곳 없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고해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참으로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고향은 영혼의 안식처와도 같습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에 바다로 흘러갑니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에 하늘로 올라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란 자기의 본향이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품이란 사실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성도라면,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달려갈 길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본향을 찾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서순석 목사 칼럼-1980년 봄 프랑스의 부르세 병원에서 사르트르가 입원했습니다. 병명은 폐수종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성인이었습니다. 사르트르처럼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글로, 특히 그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글을 발표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런 사르트르였습니다만 병원에 한달 가까이 있는 동안,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쳐 댔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물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세계를 풍미하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사르트르는 그렇게 소리지르고 발악을 하다가 1980년 4월 16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프랑스 언론들이 떠들어댑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자유를 그렇게도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참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사르트르를 자랑했다면 독일에는 '본훼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앞서서 세계 대전중 독일 수용소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감방을 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뒤덮고 있는 기쁨과 평안을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본훼퍼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돌아갈 고향을 준비한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들은 선한 일에 힘씁니다. 이웃을 위하여 가장 좋은 일, 곧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과 시간을 바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합니다. (약명 교회 성도들 -칭하이더! 라고 인사하는데-부부끼리만 사용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라고. 끌어안고 기도. 뜨겁게 사랑하더라)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곳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 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예수 날 사랑하사 날 지켜 주시리' 이 세상에 머물 동안 주의 일을 힘쓰며 주의 구원함과 은총 전하고, 나의 생명 마치는 날 저 본향에 올라가 주의 얼굴 그 곳에서 뵈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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