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언01-17장 전편 강해 [1장]
  • 조회 수: 6767, 2017.01.04 23:07:38
  • 1장: 미련한 자는 지혜를 멸시함


    [1-6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 . . .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라고 증거한다. 우리는 이 증거가 진실한 증거인 줄 안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그러나 잠언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며(딤후 3:16) “다 한 목자의 주신 바”이다(전 12:11). 물론 우리는 신약성경도 동일한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라고 믿는다(살후 2:15; 계 22:19-20). 모든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잠언은 진리의 간결한 교훈들을 모은 책이다. 솔로몬은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메짐마 ה 사려 깊음, 분별력)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잠언의 지혜는 이 세상에서의 실제적 지혜, 즉 실생활의 지혜이다. 그 특징은 경건과 의, 즉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어서 이 세상에서도 평안과 건강과 물질적 윤택의 복을 받고 장차 영생에 이르지만,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는 어리석은 자이어서 이 세상에서도 불행하고 또 장차 영원한 멸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잠언에 증거된 지혜의 교훈을 잘 깨달아서 지혜로운 자, 즉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되고 현세에서의 모든 복과 또 영생을 누리자.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솔로몬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한다. ‘근본’이라는 원어(레쉬스 תיא)는 ‘시작, 첫 번째의 것, 가장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심장 박동소리를 느끼며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갓난아기는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익힌다. 조금 크면 동그라미나 네모나 세모 등의 모양을 구별하고 색깔을 구별하며 숫자와 글자를 배운다. 또 더 크면서 많은 지식을 배우며 습득한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 즉 사람이 첫 번째로 가져야 할 지식이며 가장 중요한 지식이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영원히 스스로 계신 참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심을 알고 그의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위엄 앞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엎드려 경배하는 태도를 말한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며 시작이며 가장 중요한 지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홀로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또 “[그러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말씀한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 지혜를 존중하고 그 지혜를 사모하지만,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훈계, 징계, 훈련’이라는 뜻이 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리가 없고 또 부도덕한 데에 떨어질 것이다. 지혜는 사람으로 의와 선을 행케 하고 세상에서의 복과 장차 영생에 이르게 하지만, 미련함은 사람으로 죄를 범하게 만들고 세상에서의 불행과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지혜의 교훈을 듣고 실천하자. 우리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8-9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본문은 바른 자녀 교육에 대해 말한다. 첫째로, 자녀 교육의 주체는 누구인가? 자녀 교육의 주체는 부모이다. ‘네 아비의 훈계’ ‘네 어미의 법’이라는 말씀은 가정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들을 바르게 교훈하고 교육해야 함을 보인다. 신명기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 . .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 교육은 국가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 맡겨진 일도 아니며,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맡겨진 일이다.
    둘째로, 자녀 교육의 내용은 무엇인가? ‘네 아비의 훈계’와 ‘네 어미의 법’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앞 절에 말한 ‘여호와를 경외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넓게는 잠언의 모든 내용과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 교육의 바른 내용이다.
    셋째로, 자녀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게 하는 것이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도록 교훈하고 훈계해야 한다. 물론 부모가 먼저 경건하고 의롭게 살면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그대로 믿고 그대로 행하기를 원하신다.
    넷째로, 자녀 교육의 가치는 무엇인가? 솔로몬은,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은 지킨 자의 머리에 아름다운 관과 같고 그의 목의 금사슬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다. 그것은 천천금은보다 더 낫다(시 119:72). 그러므로 그 말씀을 지키는 자는 가장 큰 복과 영광을 누릴 것이다. 경건 교육의 가치는 참으로 크다.
    모든 부모는 자녀 교육의 책임을 다하자.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고 그것을 다 지키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알자.
    [10-19절]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 . . .
    본문은 우리에게 악한 자들을 따르지 말라고 교훈한다. 10절, “내 아들아 악한 자(카타임 םיאּ 죄인들)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15절,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본문은 악한 자들의 특징을 묘사한다. 그들은 은밀히 남을 해치고 죽이며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해치는 자들이다. 11-12절,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음부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16절,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또 그들은 불의의 재물을 취하는 자들이다. 13-14절,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19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이(利)를 탐하는 자’라는 원어(보체아 바차 ע )는 ‘폭력으로 이익을 얻는 자, 불의의 이익을 취하는 자’라는 뜻이다. 악한 자들은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려 하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려 하고,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한다.
    본문은 악한 자들의 종말을 증거한다. 18-19절,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무릇 이(利)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이런 악한 자들은 결국 생명을 잃고 죽고 만다. 시편 1:6,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우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악한 자를 따르지도 말자. 고린도전서 13:5-6,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또 우리는 불의의 이익을 구하는 탐심을 버리자(약 1:14-15).
    [20-23절]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 . . .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공개적임을 말한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한다”고 한다. 악인들에게는 비밀이 많고 그들은 이웃을 속이고 거짓되고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말을 잘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되거나 이중적이지 않고 항상 솔직하고 진실하며 공개적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말씀하셨고(마 10:27), 또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다(요 18:20).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오늘날 성경에 공개되어 있다.
    본문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고 한다. ‘어리석다’는 원어(페시 י)는 ‘단순하다’는 뜻이다. 단순한 자는 악한 꾀임에 잘 빠지는 어리석은 자이다. 단순한 자들, 거만한 자들, 미련한 자들은 다 돌이켜야 한다. 모든 죄인들은 다 회개해야 한다. 이 말씀은 단지 솔로몬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성령과 말씀의 지식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닫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증거되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오늘날 성경책에 밝히 기록된 그 말씀을 사모하고 읽고 듣고 믿자. 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의 깨달음과 지식을 풍성히 얻도록 모든 죄를 다 회개하자.
    [24-28절]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 . . .
    본문은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평소에, 평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떠나라, 내게로 오라, 나를 의지하라, 의롭고 선하게 살라’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듣기 싫어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의 손에 대해 무관심했고 그것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멸시했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았다.
    본문은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라고 말하며, 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에게 재앙의 때가, 심각한 재앙의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병이나 경제적 파탄일 수 있고 화재나 폭발이나 대형사고일 수 있고 전쟁이나 지진이나 천재지변일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들, 즉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들의 행위에 대해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두려운 재앙을 내리시고 그들을 그 재앙에 버려두실 것이다.
    본문은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고 말하며 또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의 손을 거두실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 그를 찾아야 한다(사 55:6).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평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진지하게 듣고 그를 사모하며 그의 말씀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자.
    [29-33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 . . .
    본문은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증거한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받지 않았다. 또 본문은 ‘어리석은 자의 퇴보’ ‘미련한 자의 안일’이라는 표현을 한다. ‘퇴보’라는 원어(메슈바 הוּשׁ)는 ‘변절’이라는 뜻이며 ‘안일’이라는 원어(솰와 ה)는 ‘안이함’이라는 뜻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신앙의 변절자들이며 안이한 자들이다.
    본문은 어리석은 자의 결말에 대해 증거한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어리석은 자의 행위는 불경건이며 인본주의이고 자기 중심, 세상 중심, 물질 중심, 쾌락 중심이며 그 열매는 세상과 함께 다 불타고 멸망하며 허무하다. 그들은 결국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자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과 교훈을 듣는 자들이다. “오직 나를 듣는 자.” 지혜와 어리석음의 경계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다.
    지혜로운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본문은 말한다. ‘안연히’라는 원어는 ‘안전하게’라는 뜻이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안전함이 없지만, 지혜자에게는 안전함이 있다. 또 지혜자는 재앙의 두려움 없이 평안히 산다. 재앙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내리시는 것이요 의인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신앙의 변절자요 안이한 자이다. 그들 앞에는 죽음과 멸망이 있다. 그러나 지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다. 그들은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말씀을 순종하며 살자.





    2장: 지혜가 우리를 악에서 지킴


    [1-6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 . . .
    본문은 지혜를 얻는 길을 증거한다. 본문은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라고 말한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을 듣고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의 사상과 인격과 행동이 달라진다. 우리가 참된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또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지혜와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며 원해야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사람은 보통 돈을 벌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열심을 낸다. 만일 그런 부지런함과 그런 열심으로 지혜를 구한다면 그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사람이 그렇게 간절히 지혜를 구하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곧 지혜이시며, 그를 아는 것이 지혜요 그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고 표현한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하나님은 그의 충만한 지혜와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만드셨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무지한 죄인들에게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금은보화를 구하듯이 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구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풍성히 주실 것이다.
    [7-9절]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 . . .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위해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 ‘완전한 지혜’(토쉬야 הוּתּ)라는 원어는 ‘건전하고 유능한 지혜’ 또 ‘그로 말미암은 영속적인 성공’을 의미한다(BDB). 의와 지혜는 연결되어 있다. 의로운 자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를 얻는다. 또 하나님께서는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신다. 그들은 재앙이나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다.
    8절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시니라”고 다시 번역할 수 있다(KJV, NASB). 성도들의 길은 의와 공평의 길과 동일시된다. 하나님께서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신다. 구약 시대의 한 예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침으로 행실의 의를 지키더니 비록 감옥에 얼마 동안 갇혔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본문은 “그런즉 네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즉’이라는 원어(아즈 זאָ)는 ‘그때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성도가 정직하게 행하여 완전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할 때를 가리킬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공의와 공평과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다. ‘모든 선한 길’이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 복이 되는 길을 말한다. 본문의 요점은, 사람이 정직하게 살면 지혜를 얻으며 또 그는 의와 선을 더욱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D. L. 무디는, “순종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학교이다”라고 말했다.
    지혜와 의는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의롭고 정직하게 살면 더욱 지혜로운 자가 되며 또 더 의와 선을 깨닫고 의롭고 선한 자가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평안과 안전도 보장하신다.
    [10-15절]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
    10절은 앞절과 연관된 것 같다. 사람이 의롭게 살려 힘쓰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완전한 지혜를 얻고 또 그 때에 의와 선을 더욱 깨닫는데, 그것은 지혜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그의 영혼에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와 지식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기쁨과 즐거움이 되며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본문은 또 지혜와 명철이 우리를 보호하여 악한 자들의 길로부터 지키며 구원한다고 말한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근신’이라는 원어(메짐마 ה)는 ‘분별력’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지혜와 명철과 분별력을 얻으면 악한 길로부터 보호와 구원을 얻는다. 그는 악한 자의 길에 떨어지지 않고 악한 자가 되지 않고 악하게 행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본문은 악한 자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정로(正路)이며 정정당당하고 복된 길이지만, 그들은 그 길을 저버리고 무지와 거짓, 양심의 거리낌과 불행의 길로 행한다. 또 그들은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한다. 성도는 자신의 악을 통회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의 악을 탄식하며(사 66:2; 겔 9:4) 참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지만,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길은 구부러지고 그들의 행위는 패역하다. 즉 그들은 불순종적이며 반항적이다.
    지혜는 도덕적 생활에 크게 유익하다. 그것은 우리를 악한 길로부터 지켜주며 건져준다. 우리는 오직 지혜와 의와 선을 붙들어야 한다.
    [16-19절]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 . . .
    지혜는 우리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한다. ‘음녀’라는 원어(잇솨 자라 ה ה)는 ‘이상한 여자, 낯선 여자’라는 뜻이다. 여인은 단정하고 순결을 지키며 남편과 자기 자녀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정상적인데, 단정치 않고 다른 이에게 마음과 눈길을 두며 가정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한 여자이다. 그는 젊은 때의 짝을 버리며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이다. 남편과 결혼할 때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결혼 서약을 했을 것이지만, 그는 그 언약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저버렸다. 그는 이제 말로 많은 남자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이상한 여자가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이 세상의 음란 풍조를 멀리해야 한다. 음란 풍조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통해 퍼져나간다. 텔레비젼의 드라마들은 불륜의 주제로 넘쳐나고 젊은 가수들의 노래들과 춤들까지도 음란성이 많다. 젊은 세대들이 좋아하는 인터넷은 음란의 바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것들을 조심하고 멀리하는 것이 좋다.
    본문은 음녀의 집이 사망으로, 그 길이 음부로 기울어졌다고 말한다. ‘음부’라는 원어(레파임 םיאּ)는 ‘죽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음녀의 집은 잠시 동안 육신적 즐거움이 있겠지만, 사망과 멸망으로 향한다. 본문은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음행은 마약같이 중독성을 가져서, 남녀노소, 초신자, 직분자 할 것 없이 누구든지 거기에 빠지면 돌아오지 못하며 생명길을 잃고 말 것이다. 행음자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그러므로 성도는 음행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성도는 거룩한 삶을 위해 지혜가 필요하다. 그는 단정해야 하고 자기 의무를 다해야 하며, 특히 음란한 시대 풍조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20-22절]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본문은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라”고 말한다. 선한 자의 길은 남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유익을 주는 길이다. 지혜는 선한 길을 알게 하는 정도가 아니고 선한 길을 걷게 한다. 또 지혜는 의인의 길 즉 인생의 정로를 지키게 한다. 지킨다는 말은 보수(保守)한다는 뜻이다. 보수주의라는 말은 좋은 말이다. 배교와 타협의 시대에 시대의 풍조에 따라 속화되지 않고 옛길, 바른 길을 지키는 입장은 바른 입장이며 좋은 입장이다.
    본문은 또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혜가 선한 길, 의로운 길을 지키게 하는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의롭고 정직한 자가 땅에 거하고 악인이 땅에서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는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직하고 완전한 자는 땅에 거하고 땅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의인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곳이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땅은 본래 죄 없는 자들이 살도록 창조된 곳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함으로 악인들이 땅에 가득하게 거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땅에서 일시적 평안과 번영을 누리고 의인들은 일시적으로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땅에서 제거될 것이다. 악인들의 일시적 평안과 번영은 결국 갑작스런 멸망으로 끝날 것이다. 이 땅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으로 이어질 것이다. 천국에는 악인들이 전혀 없고 의인들만 영원히 거할 것이다.
    우리는 지혜를 얻고 정직하고 선한 길, 의롭고 완전한 길을 걷는 자가 되자. 또 하나님의 소유인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받는 자가 되자.




    3장: 지혜가 복됨



    [1-2절]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 . . .
    본문은,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이 교훈은 성령의 영감으로 주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나의 법’과 ‘나의 명령’은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가정 예배 때의 교훈과 교회에서의 성경적 설교일 수 있다. 사람이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리면 육신의 본성의 죄악성을 따라, 욕심을 따라, 세상의 풍조에 따라 행하기 쉽고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범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기억함으로써 그 법을 지켜야 한다.
    2절의 ‘그리하면’이라는 원어(키 י)는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성도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장수(長壽)와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함이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장수(長壽)를 누린다. 장수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사람들은 단명(短命)을 재앙이라고 보고 그것을 다 싫어한다. 사람들은 장수를 위해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며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건강과 장수의 비결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장수뿐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한다.
    성도는 또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 평안을 누린다. 평안이라는 말 속에는 심적 평안뿐 아니라, 육신의 건강과 경제적, 환경적 안정까지 들어 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문안 인사 속에는 이런 포괄적 의미가 들어 있다. 그 ‘안녕’의 비결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 있다.
    하나님의 법을 잊지 말고 지키자. 성경 말씀을 읽고 듣기를 사모하자. 또 그것이 몸의 건강과 장수, 심리적, 경제적 평안의 길임을 알자.
    [3-4절]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 . . .
    본문은, “인자(仁慈)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고 말한다. ‘인자’는 자비, 친절, 사랑을 가리킨다. 악과 강포는 마귀의 속성이다. 마귀는 살인자이다(요 8:44).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마 11:29). 인자는 거기서 나오는 덕이며 하나님의 계명의 요지이다. ‘진리’(에메스 ת)는 진실, 성실을 가리킨다.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며(요 8:44)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본문은 그 덕성들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고 그것들을 우리의 목에 매고 우리의 마음판에 새기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자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에베소서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실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본문은,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은총’은 호의와 사랑을 가리킨다. 또 ‘귀중히 여김’이라는 원어(세켈 토브 בוֹט ל)는 ‘좋은 이해’라는 뜻으로 ‘좋은 평판과 인정’을 가리킨다. 사람이 악하고 거짓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시고 사람들도 그를 멀리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인자하고 진실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더욱 사랑하시고 그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이해와 평판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인자와 진실을 간직하자.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며 범사에 진실하자.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과 인정을 받자.
    [5-6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본문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되 반심(半心)으로가 아니고 전심(全心)으로 해야 한다. 반심(半心)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실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명철, 지식과 실력, 건강과 재산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본문은 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권적 섭리자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주권적 섭리자로 믿는 것이 참 믿음이다. 본문은 ‘범사’에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영적인 일이든지 육적인 일이든지, 개인적 일이든지 단체적 일, 즉 가정의 일이나 교회의 일이나 국가의 일이든지,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실상, 거기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도 나온다.
    본문은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혹은 평탄케 하시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선한 지도하심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길 앞의 장애물을 피하게 하시고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좋은 길, 선한 길, 유익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 의지하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자.
    [7-8절]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본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적 지혜와 판단이나 처세술로 살지 말아야 한다.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불의와 악을 버리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 참 지혜이다. 실상 이것이 성경의 요점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또 사람이 참으로 악을 떠나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날 수 있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본문은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양약’이라는 원어(리프우스 תוּא)는 ‘치료’(BDB, NASB), 혹은 ‘건강’(KJV, NIV)이라는 뜻을 가진다. 사람이 의와 선을 행하면 건강을 누릴 것이다. 본문은 “네 뼈속까지 윤택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사람의 건강은 단지 영양식을 하고 보약을 먹고 충분한 잠을 자고 규칙적 운동을 함으로써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를 지으면 건강을 잃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적인 건강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나는 것이다. 또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과 병의 치료도 주실 것이다.
    [9-10절]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원문에는, “네 재물로 또 네 모든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우리의 재물, 즉 우리의 돈과 재산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실상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주신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네 소산물’이라는 원문은 ‘네 모든 소산물’이다. ‘소산물’이라는 원어(테부아 האָוּב)는 ‘소산’(product) 혹은 ‘수입’(income)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득과 수입의 첫열매, 즉 가장 좋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십일조와 정성어린 감사헌금은 바로 그런 것이다.
    본문은,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말한다. 물질로도 하나님을 공경치 않는 것은 죄 짓는 일이며 그럴 때 궁핍이 찾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에 무관심하고 자기들의 호화로운 집에 거주하는 것을 정죄하시며 그들의 물질 생활에 어려움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다(학 1:4-6). 또 그는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십일조와 헌물이 하나님의 것이며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말 3:8-9). 그러나 그들이 물질로 하나님을 섬길 때, 즉 전도와 구제를 위해 헌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질적 유여함, 즉 양식의 풍족함과 은행 잔고의 풍성함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다(말 3:10). 또 하나님의 종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 사르밧 과부는 기근 동안에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왕상 17:12-16).
    우리는 우리의 재물로 또 우리의 소득의 첫열매로 하나님을 섬기자.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 즉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고린도후서 8:7, “이 은혜[헌금하는 일]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11-12절]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 . . .
    본문은,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은 성경말씀을 통해 오기도 하고(딤후 3:16)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설교들을 통해 오기도 한다(딤후 4:2). 그것은 때때로 질병으로도, 경제적 어려움으로도, 환경적 어려움으로도 온다.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을 경히 여기거나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 ‘경히 여기고 싫어한다’는 말은 그것을 무시하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항상 그러하였었다.
    본문은,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징계와 저주는 다르다. 하나님의 징계는, 성도의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표이다. 히브리서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부모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은 자녀가 좋은 인격자가 되며 선생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은 학생이 좋은 학생이 되듯이, 하나님의 징계를 잘 받은 사람은 좋은 성도가 된다. 그는 더욱 거룩하여진다. 히브리서 12:10-11,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고 싫어하지 말고 달게 받자.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순종하며 즉시 회개하고 고치자.
    [13-15절]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 . .
    본문은,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지혜자는 참 행복자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의 일생이 결국 불행으로 끝날 것이다.
    본문은,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를 얻은 자를 복되다고 말한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지혜가 금이나 은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사실, 금이나 은, 즉 돈과 물질적 부요는 행복의 한 요소이긴 하다. 돈이 없으면 사람이 배가 고파도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을 수도 없고 몸이 추워도 입고 싶은 따뜻한 옷을 사 입을 수도 없다. 돈은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지혜는 그 보다 더 중요한 요소이다. 세상에는 돈만 가지고는 살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돈만 가지곤, 우주의 근원, 인간의 의미와 목적을 알 수 없고, 죄씻음과 의(義), 영생과 부활과 천국을 얻지 못한다. 또 사람은, 돈만 가지곤, 예상치 못하는 대형사고의 예방, 무서운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를 보장하지 못한다. 부자도 예상치 못한 큰 사고를 당하고 무서운 질병으로 죽기도 한다. 그러나 지혜는 이 모든 것들을 알게 하고 얻게 하고 보장한다.
    본문은 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16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여하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다. 여인들은 진주목걸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것은 여인들을 품위 있는 귀부인같이 보이게 하는 장식품이다. 또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가장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지혜는 그 모든 것보다 귀하다.
    지혜를 얻은 자는 복되다. 지혜는 금과 은보다, 또 진주보다 귀하다. 우리는 지혜를 가장 귀히 여기며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자.
    [16-18절]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 . .
    본문은 지혜가 복되며 금은보다, 진주보다 나은 이유를 증거한다. 본문은 “그[지혜의]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다”고 말한다. 3:2도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면 장수하리라고 말했다. 본문 18절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며 지혜는 영생의 길이다.
    본문은 또 “그 좌편 손에는 부귀(富貴)가 있다”고 말한다. 부귀는 부요와 존귀를 말한다. 지혜는 물질적 부요를 준다. 가난과 궁핍은 복이 아니다. 3:9-10에서도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면 창고가 가득 찰 것이라고 말했다. 경건한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었다(창 26:12-13). 신명기 28장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토지 소산과 우양과 떡반죽 그릇의 복을 받을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꾸어주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2-6, 11-12절).
    지혜는 또 존귀함도 준다. 지혜자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얻을 것이다. 3:3-4는 사람이 인자와 진리를 간직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고난의 위기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위기를 잘 극복하였고 그 후에는 더욱 높임과 존귀함을 얻었다(단 2:48; 3:30; 5:29).
    본문은 또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고 말한다. 즐거움과 평안은 복된 삶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데서 얻는 참 지혜는 평안의 길이다(사 48:18).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가운데 항상 기뻐함과 평안함을 누린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을 것이다(사 48:22).
    지혜는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안의 길이며 또 영생의 길이다. 우리는 복된 지혜를 사모하며 소유하자. 그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데서 얻을 것이다.
    [19-20절]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 . . .
    본문은 “여호와께서 지혜로 땅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지구는 공중에 떠 있는 약 6섹스틸리온 톤 무게의 거대한 공이다. (1섹스틸리온은 10의 21제곱이다.) 이 공이 하루에 한 번씩 자기 스스로 돌며 1년에 한 번씩 태양 주위를 돈다. 지구에는 그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 곧 중력이 있고, 지구의 중심에는 약 5,000도의 불이 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또 지구 표면에는 35만종 이상의 식물들이 있고 약 4,000종의 동물들과 약 6,000종의 파충류(기는 짐승들), 약 80만종의 벌레들이 있다. 참으로 신기한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이 땅을 만드셨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다”고 말한다. 하늘은 해와 달과 별들의 세계이다. 그것들은 규칙적이게 하늘에서 움직인다. 지구가 속한 은하수는 1,000억개 이상의 별들로 구성되었고 우주에는 이런 은하들이 약 1,000억개 있다고 한다. 또 창공에는 약 8,600가지의 새들이 있다고 한다. 하늘은 참으로 광대하고 신기하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다”고 말한다. 지구가 가진 물의 총량은 약 1억 3,600만 입방킬로미터이며 그것은 지구 전체를 약 2.7킬로미터 깊이로 덮을 수 있는 양이며, 이런 물들은 5대양 6대주, 및 작은 바다들과 호수들을 형성시켰다. 또 바다 속에는 약 21,700가지의 바다생물들과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본문은 또 하나님께서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공기 중의 수증기들과 바람의 이동을 주관하신다. 기상대는 우리나라의 고기압과 저기압 전선의 이동을 예측하여 알려주지만, 그것의 원인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와 지식으로 비와 눈, 구름의 이동, 기압과 바람을 주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잃어버린 지혜를 회복하고 복된 삶을 누리자.
    [21-26절]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 . . .
    지혜가 복되며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말한 솔로몬은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완전한 지혜’라는 원어(투쉬야 הוּתּ)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2:7) ‘건전하고 효력 있는 지혜’를 뜻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건전하고 효력 있는 지혜이다. ‘근신’은 ‘분별력’을 말한다. 우리는 완전한 지혜와 분별력에 항상 주목하고 관심을 두어야 한다.
    본문은 지혜의 유익에 대해 추가하여 말한다. 본문은 우선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의 영혼에 생명이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를 행하는 자마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또 지혜는 우리의 목에 장식이 된다. 지혜와 의는 사람의 인격을 아름답고 고상하게 만든다.
    본문은 또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고 말한다. ‘안연히’라는 원어(라베타크 ח)는 ‘안전하게’라는 뜻이다. 우리가 지혜를 소유하고 산다면 아무리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 많은 세상일지라도 안전하게 살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또 누워 잘 때 단잠을 잘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귀한 복이다.
    본문은 또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창졸간의 두려움’이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두려운 일들을 말한다. 성도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두려운 일들과 악인이 당하는 천벌과 재앙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섭리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을 지켜 넘어지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혜가 평안의 길임을 알고 완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항상 구하자. 또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세상의 재앙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27-31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 . . .
    본문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라고 교훈한다. 이웃 사랑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선을 베푸는 것은 주로 구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베풀 힘이 있거든’이라는 말은 ‘경제적 여유가 있거든,’ ‘쓰고 남음이 있거든’이라는 뜻이다. ‘마땅히 받을 자’는 의식주에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리킨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소유물은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받을 자’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구제할 여유가 있고 구제받을 대상이 있으면, 우리는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구제는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다(잠 19:17). 그러므로 우리는 손을 움켜쥐고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고 손을 펴서 가난한 자들에게 넉넉히 구제해야 한다(신 15:7-11).
    또 본문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라고 교훈한다. 이웃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 것이다. 본문은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안연히’라는 말은 ‘안전히, 편안히, 안심하며’라는 뜻이다. ‘모해(謀害)’는 은밀히 계획하여 남을 해치는 것이다. 본문은 또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라.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고 말한다. 물론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악행하는 자에게 정당하게 항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더 낫다. 마태복음 5:39,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고 정당한 이유 없이 다투지 말자.
    [32-35절]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 . . .
    본문은 우리가 의롭고 선해야 하며 악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본문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여 증거한다. 본문은 우선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라고 말한다. ‘교통하심’이라는 원어(소드 דוֹס)는 ‘함께 앉아 이야기함, 친밀한 교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뚤어진 자를 미워하시지만, 정직한 자와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신다.
    본문은 또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의 가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의인의 가정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악을 버리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본문은 또 “진실로 그[여호와]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거만을 미워하신다. 피조물인 인생, 특히 범죄의 경험이 있고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처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본문은 또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顯達)함은 욕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본절 후반부는 “미련한 자는 수치를 일으키느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NASB). 의인은 지혜로운 자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지혜자이며 의인이다. 그는 영광의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미련한 자요 악인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수치를 당케 하실 것이다.
    우리는 패역함을 버리고 의롭고 선하게 살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자가 되고, 미련함을 버리고 지혜자가 되자. 거기에 인생의 복이 있다.




    4장: 지혜를 얻으라



    [1-5절]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 . .
    본문은 솔로몬이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자녀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모세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했고(신 6:6-7), 사도 바울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했다(엡 6:4).
    본문은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이는 내가 선한 가르침을 너희에게 전함이니 내 법을 버리지 말라”(원문)고 말한다. 경건한 부모의 교훈과 법은 선하고 유익한 가르침이며 지혜와 명철을 주는 말씀이다. 솔로몬은 자신도 그의 아버지에게 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 보기에는 유약한 외아들이었다고 말한다. ‘유약한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왜냐하면 역대상 3:5는 솔로몬이 외아들이 아니고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네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이었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부친 다윗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그는 그에게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며 살라(원문, KJV, NASB).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피하지 말라(원문)”고 말했었다. 자녀의 의무는 경건한 부모의 교훈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그 명령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그 명령이 지혜와 명철이다. 그것을 얻어야 한다. 그 입의 말을 잊지 말고 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모로서 가정에서 자녀 교육의 의무를 다하자. 자녀들에게 경건한 교훈을 주는 부모가 되자. 그것이 참된 자녀 사랑이며 복이다.
    [6-9절]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 . .
    본문은 솔로몬의 부친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교훈한 내용을 전한 것으로(4:4)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본문은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를 사랑하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를 품으라”고 말한다. 참으로, 지혜는 제일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것인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지혜가 없으면 그 외의 모든 것은 다 헛되지만, 지혜가 있으면 그 외의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잠 3:13-18).
    그러므로 본문은 지혜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미 얻은 것이란 건강과 시간과 돈 등을 가리킬 것이다. 지혜가 가장 귀한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힘과 시간을 쓰고 돈과 물질을 아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또 지혜의 유익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은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고 말한다. 지혜는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준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고 지켜주는가? 그것은 죄로부터, 위험으로부터,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준다. 본문은 또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한다. 지혜는 내세의 천국의 영광을 줄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존귀와 영광의 복을 줄 것이다. 그것은 솔로몬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지혜의 가치를 알자. 그 지혜를 얻기 위해 힘과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말자. 그 지혜를 얻고 사랑하고 높이고 마음에 품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며 우리에게 존귀와 영광을 줄 것이다.
    [10-13절]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 . . .
    본문은 ‘지혜로운 길’ ‘정직한 첩경’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경건한 부모의 교훈이 바로 그 길이다. 본문은 그것을 ‘내 말’이라고 말하며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이라고 말한다. 길은 삶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본문은 그 지혜로운 길을 받으며 붙잡으라고 말한다. “내 아들아 들으라. 내 말을 받으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그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신명기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 11: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附從)하면[그를 꼭 붙잡으면].”
    본문은 지혜의 길에서 얻는 복을 증거한다. 본문은 “그리하면 네 생명의 해가 길리라”고 말한다. 보통, 병이나 자연재해나 사고로 인해 단명(短命)한 것은 재앙이지만, 장수(長壽)는 복이다. 본문은 또 네가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에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여러 문제들로 인해 믿음을 잃고 방황하고 곁길로 가고 범죄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함을 얻을 것이라는 안전과 평안의 약속이다. 본문은 또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고 말한다. 지혜의 결과는 영생이다. 그것은 가장 귀한 복이다.
    우리는 지혜의 말씀이 우리에게 장수와 평안과 영생의 길임을 깨닫고 지혜를 주는 성경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굳게 붙잡고 지키자.
    [14-17절]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 . .
    본문은 우리에게 악인의 길에 들어가지 말라고 교훈한다.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며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지어다.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돌이켜 떠나갈지어다.” ‘들어가지 말라,’ ‘다니지 말라,’ ‘피하라,’ ‘지나가지 말라,’ ‘돌이키라,’ ‘떠나라’는 여섯 마디의 말을 동원하여 그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악인의 길에 들어가지 말고 그 길로 다니지 말고 그 길을 피하고 그 길로 지나가지도 말고 그 길로부터 돌이키고 그 길을 떠나야 한다. 그것이 지혜이다.
    본문은 그 이유를 말한다. 원문에는 본문 16절과 17절 초두에 ‘이는’ 혹은 ‘왜냐하면’이라는 말(키 י)이 있다. 본문은 “이는 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면 자지 못하며 사람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잠이 오지 않음이니라”고 말한다. 즉 악인들은 항상, 날마다, 그리고 반드시 악을 행하기 때문에 악인의 길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본문은 “이는 그들이 불의의 떡을 먹으며 강포의 술을 마심이니라”고 말한다. 즉 악인들은 불의와 강포를 밥먹듯이, 술마시듯이 하며 불의와 강포로 얻은 것을 가지고 생활하기 때문에 악인의 길을 멀리하라는 말이다. 악인들은 불의와 강포로 사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성도가 악인의 길을 피해야 할 이유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악에 물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도가 악인들과 함께 있으면 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래서 시편 1:1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한 것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악인의 길을 피하고 멀리하라고 교훈한다. “악인의 길에 들어가지 말고 다니지 말고 피하고 지나가지 말고 돌이키고 떠나라.” 이것은 교제의 문제이다. 악한 교제는 우리로 악에 물들게 한다.
    [18-19절]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 . . .
    본문은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대조하여 말한다. 본문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라고 말한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돋는 햇볕은 새벽빛을 말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밝지 않다. 그것은 서서히 밝아져 대낮이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교훈했다(엡 5:8). 사도 요한도 구원받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를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고 증거하였다(요일 2:8-11). 성경에서 빛은 지식, 의, 진실, 기쁨, 행복 등을 상징한다. 의인의 빛은 이 모든 상징들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의인의 지식과 의와 진실, 또 의인의 기쁨과 행복은 비록 처음에는 작은 것일지라도 점차 커지고 마침내 충만해질 것이다. 그는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함에 이를 것이며 그의 기쁨과 행복은 마침내 천국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그와 다르다. 본문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어둠은 빛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무지, 불의, 거짓, 슬픔, 불행 등을 상징한다. 어두운 길은 거쳐 넘어지기 쉽다. 그래서 사실 빛이 필요한 것이다. 밤길에 가로등이 없다면, 밤길에 자동차에 전조등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위험할까? 악인의 길이 그러하다. 악인은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 거쳐 넘어지기도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죄와 재앙에 떨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어둡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또 그 죄의 결과로 어떤 재앙이 그에게 임했는지 잘 깨닫지 못한다. 그들의 이성과 양심은 매우 어두워졌고 무디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 빛의 세계에 들어온 의인들로서 빛의 길을 걷자. 지식과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의 길을 걸어가자.
    [20-23절]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 . .
    솔로몬은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교훈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받은 하나님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아들에게 그의 말에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주목하고 그것을 마음 속에 지키라고 당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에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주목하고 그것을 마음에 지켜야 한다.
    솔로몬은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된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얻는 자에게 육신의 건강이 된다. 사람의 건강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대로 살면 건강한 것은 정상적인 이치이다(출 15:26; 잠 3:7-8).
    솔로몬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과 건강과 가정과 자녀들과 재산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근원’이라는 원어(토츠오스 תוֹאוֹתּ)는 ‘나오는 것들’ 즉 ‘행위들’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의 행위는 마음에서 나온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가 나오고 선한 마음에서 선한 행위가 나온다. 우리가 중생한 새 생명을 소유한 자라면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지켜서 거룩하고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자. 우리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고 선하게 지키자.
    [24-27절]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 . . .
    본문은 세 가지를 조심할 것을 교훈한다. 첫째로, 본문은 입을 조심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궤휼은 거짓이며 사곡(邪曲)은 비뚤어진 것, 잘못된 것을 가리킨다. 성도는 거짓된 말, 잘못된 말을 매우 조심하고 진실하고 바른 말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본문은 눈을 조심하라고 교훈한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눈을 조심하라는 뜻은 생각과 생활의 목표와 방향을 조심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즉 실수하거나 실족(失足)지 않도록, 잘못된 길에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고 진리만 생각해야 한다. 히브리서 12:1- 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셋째로, 본문은 우리의 발을 조심하라고 교훈한다.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평탄케 한다’는 원어(팔라스 ס)는 (1) (무게를) 단다, (2) 주목한다(KB, NASB), (3) (길을) 평평케 한다(BDB, NIV)는 뜻을 가진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뜻이 적절할 것이다. 발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경솔하거나 조급하게 행동하지 말고 좌우로 치우쳐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하고 또 악에서 떠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23절), 또 우리의 입과 눈과 발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말을 조심하고 생각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5장: 음녀를 피하라



    [1-6절]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 . . .
    솔로몬은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고 말한다. ‘내 지혜,’ ‘내 명철’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하는 하나님의 교훈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의 말씀이며 분별력과 지식을 주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고 또 그 말씀의 교훈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이다.
    솔로몬은 특히 그의 아들이 그의 지혜의 교훈을 지킴으로 음녀 즉 매춘부의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잠언 6:23-24에서도 그는 훈계가 사람을 음녀의 호리는 말에서 지킨다고 말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특히 젊은이들이, 알아두어야 할 교훈이다.
    음녀의 미혹은 처음에는 즐거워 보인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음녀의 말은 꿀처럼 달콤하게 들리고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 결말은 불행과 비극이다. 음녀에게 미혹된 사람은 나중에는 죽음에 이른다.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잠언 7:25-27에서도 그는 음녀가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고 그의 집은 지옥의 길이라고 말했다. 6절은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이는 너로 생명의 길을 주목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의 길은 안정이 없어서 네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성도는 음녀의 미혹을 주의해야 한다. 음녀는 처음에는 즐거워 보이나 나중에는 죽음에 이른다. 성도는 오직 지혜의 말씀에 주의해야 한다.
    [7-14절]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 . .
    솔로몬은 아들들 혹은 젊은이들에게 음녀를 멀리하라고 교훈한다.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음녀를 멀리해야 한다. 또 음란한 환경에서는 음행에 떨어지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는 음녀를 멀리하며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한다.
    솔로몬은 음녀를 멀리해야 할 이유를 네 가지 말한다. 첫째로, 그는 네 존영을 빼앗기게 되므로 멀리하라고 말한다. 존영은 사람의 복이다. 그러나 음행하게 되면 존영을 빼앗기고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다.
    둘째로, 네 수명을 빼앗기게 되므로 멀리하라고 그는 말한다. 장수(長壽)는 복이다. 그러나 음행하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
    셋째로, 네 재물을 빼앗기게 되므로 멀리하라고 그는 말한다. 사람이 손으로 수고한 대가를 적당히 누리는 것이 복이다(시 128:2). 그러나 사람이 음행에 빠지면 그가 수고하여 번 재물을 다 탕진하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넷째로, 네 몸이 쇠패할 때 후회하게 될 것이므로 멀리하라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은 사람의 몸이 병이 드는 것이나 늙어 쇠약해지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잘 모르지만, 특히 병들어 몸이 심히 쇠약해졌을 때면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거의 모든 재앙에 빠지게 되었었노라”고 말하며 후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잃고 후회함이 없도록 음란을 멀리하자. 우리는 보는 것, 듣는 것을 조심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자. 
    [15-17절]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 . . .
    솔로몬은,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고 교훈한다. 물이 귀한 시대나 지역에서는 우물을 파서 물을 쓴다. ‘네 우물’이나 ‘네 샘’은 ‘네 아내’를 가리킨다.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라’는 말은 외도하지 말고 정당한 부부관계를 지키라는 교훈이다.
    16절에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는 본문은 두 가지로 번역되고 해석된다. 원문을 의문문으로 보면, 고대 헬라어역과 한글개역이나 대부분의 영어성경(NASB, NIV)처럼 번역되지만, ‘네 샘물들’과 ‘네 물들의 도랑들’(원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대략적 의미는 외도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문을 보통 문장으로 보면,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네 샘물들을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물들의 도랑들을 거리에 흘러가게 하라”고 번역되며, 이 경우 ‘네 샘물들’과 ‘네 물들의 도랑들’은 주석가들의 해석대로 ‘네 자녀들’을 가리킬 것이다(Poole, JFB). 부모는 샘의 근원이며 그 자녀들은 작은 샘물들과 여러 줄기의 도랑물들과 같다. 그들은 장차 부모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 구절은 정상적인 결혼생활에서는 많은 자녀들이 출산되며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많은 자녀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확실히 큰 복이다.
    또 17절,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는 말씀도, “그것들로 오직 네 것이 되게 하고 타인들이 너와 함께 소유하지 못하게 하라”고 고쳐 번역할 수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은, 우리의 많은 자녀들로 하여금 여러 명의 아버지들을 가지게 하지 말고 한 부모의 자녀들이 되게 하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결혼생활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 히브리서 13:4, “혼인을 귀히 여기라.” 또 우리는 자녀들의 출산과 출세를 복으로 누려야 할 것이다.
    [18-23절]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 . . .
    솔로몬은 우리에게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고 교훈한다. ‘샘’(마코르 רוֹק)이라는 말은 15절의 ‘우물’(보르 רוֹבּ)과 ‘샘’(베에르 ר)과 함께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아내를 우물과 샘으로 표현한 것은 자녀 출산의 근원이 됨을 뜻할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복되게 해야 한다. 그것은 그를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함으로써이다.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남편은 아내를 사랑스러운 암사슴, 아름다운 암노루같이 여기고 그를 즐거워하고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해야 한다. ‘연모한다’는 원어(솨가 ה)는 ‘취하여 비틀거리다, 유쾌함을 얻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내의 사랑에 취해 유쾌함을 누려야 한다. 그는 아내를 학대하지 말고 그에 대한 관심과 존중하는 고운 말과 물질적 공급과 함께 다정한 사랑을 나눠야 한다.
    솔로몬은 또 음녀를 사랑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연모한다’는 말은 역시 ‘취해 비틀거리다, 유쾌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성도가 음녀를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다 보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평탄케 한다’는 원어(팔라스 ס)는 ‘저울에 단다, 주목한다, 주시한다’는 뜻이 있다. 또 악인은 결국 그의 악으로 인해 패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
    우리는 부부 관계를 귀히 여기고 부부의 사랑을 만족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결코 음녀를 사랑하지 말고 음란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6장: 근면, 교만, 거짓, 간음에 대해

    [1-5절]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 . . .
    본문은 이웃을 위해 담보하거나 보증을 서지 말라고 교훈한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이웃을 위해 담보하거나 보증을 하는 것은 자신을 잘못 얽히게 하는 일이다. 보증은 항상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경제적 부담 능력을 점검함이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함으로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던 일을 기억하며, 또 오늘날 비우량 주택담보대출과 보증이 없는 파생상품 등 때문에 세계적 경제 위기가 발생한 것을 보고 있다.
    잠언은 보증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잠언 11:15, “타인을 위해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언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20:16,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 잠언 22:26,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본문은 우리가 잘못 보증했을 때 빨리 가서 겸손히 간구하여 자신을 구하라고 교훈한다.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그것이 남은 지혜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경제 능력과 신용 정도로 살고 자기 분수를 넘지 말고, 자기의 수입에 비해 과도하게 돈을 씀으로 빚을 져서는 안 되며, 상대를 위해 손해를 보아도 될 정도의 경우 외에는 보증을 서지 말자.
    [6-11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 . . .
    본문은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한다. 개미는 감독이 없어도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한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사람은 성인이 되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해야 하며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계획을 세워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또 개미는 여름 동안에 양식을 모은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여름은 덥고 일하기 싫은, 어려운 계절이지만 땀 흘려 일하면 양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계절이다.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배워야 한다.
    본문은 또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 . .”이라고 말한다. 단잠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지만(시 127:2), 과도히 자는 것은 게으름이다. 사람은 하루 보통 7~8시간 자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그 이상 자는 것은 게으름일 것이다.
    게으름의 결과는 궁핍이다. 본문은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말한다. 사람이 부지런하면 돈도 벌 수 있으나 게으르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부지런한 자가 부요함을 누릴 것이다.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고 교훈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명하였고(살전 4:11),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살후 3:10).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고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생활 계획을 세워서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12-15절]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하며 그 마음에 패역을 . . . .
    본문은 ‘불량하고 악한 자’에 대해 증거한다. ‘불량하다’는 원어(벨리야알 ל)는 ‘무가치하다’는 뜻이다. 악한 것은 무가치한 것이다. 본문은 무가치하고 악한 자의 특징을 몇 가지 말한다.
    첫째, 그는 입의 사곡함을 가지고 행하는 자이다.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라는 원어는 “입의 사곡(邪曲)함으로 행하며”라는 뜻이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는데, 악인의 말은 바르지 못하고 비뚤어져 있고 남의 말을 오해하고 왜곡하기를 잘한다.
    둘째, 그는 악한 표정과 몸짓을 한다. 그는 눈짓을 한다. 아마 독살스런 눈짓을 말할 것이다. 또 그는 발로 뜻을 보인다. 그것은 발로 사물을 차거나 땅바닥을 세게 밟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또 그는 손가락질로 알게 한다. 그것은 손가락으로 남을 멸시하거나 대적하는 몸짓을 가리킬 것이다. 이와 같이, 악인은 표정과 몸짓에서 나타난다.
    셋째, 그는 마음에 악을 품는다.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악인은 항상 마음에 악하고 패역한 일을 계획한다.
    넷째, 그는 다툼을 일으킨다. 사람이 선하면, 즉 겸손하고 다른 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하면, 그의 마음도 평안하고 다른 이들과의 일치와 화평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악하면, 즉 교만하고 사악하면, 형제 관계라도 다투고 분열하게 만들 것이다.
    본문은 악인의 결말에 대해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하리라.” 악인은 일시적으로는 번영을 누리지만, 재앙이 갑자기 임할 것이며 그때 그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즉시 패망할 것이다.
    우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의 입, 눈, 발, 손가락, 마음이 악하지 않고 선하도록 조심하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서로 화목하자. 물론 진리의 선한 싸움이 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는 일치하며 단합하자.
    [16-19절]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 . . .
    본문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 6, 7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는 “교만한 눈”이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남을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교만한 눈이라는 말은 교만이 눈빛에서 나타남을 보인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다.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는 교만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다.  거짓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다(요 8:44). 거짓은 천국에 가지 못할 죄이며(계 21:27; 22:15) 지옥 갈 죄이다(계 21:8).
    셋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이다. 무죄한 자를 미워하고 죽이는 것은 큰 악이다. 남을 해치려는 악한 계획을 꾸미는 것도 큰 악이다. 그것은 요셉의 형들이나 다니엘의 동료들이나 예수님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죄악이었다.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도 명백히 큰 악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밤 중에도 모였고 새벽에도 모였다.
    넷째는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즉 형제들 사이에 불화(不和)를 심고 싸움을 일으키는 자이다. 분쟁은 오해와 거짓말과, 미움과 시기와 욕심 때문에 생긴다(약 4:1-2). 성도의 특징은 그것들과 정반대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되다(마 5:9). 주의 제자들의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5).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고(고전 13:5) 남을 이해하려 하고 화평케 한다. 성령의 열매는 화평을 포함한다(갈 5:22).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를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 거짓된 말을 버려야 하고 모든 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형제 사이를 이간시키지 말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0-24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 . .
    본문은,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고 말한다. ‘네 아비의 명령’ ‘네 어미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이다. 우리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다니듯이, 열쇠뭉치를 가방이나 주머니나 손에 가지고 다니듯이, 성경을 가까이 하고 그 책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시간 나는 대로, 또 시간을 내어 읽고 듣고 배우고 복습하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야 하며, 그 말씀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떠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되다(시 1:2-3).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길 갈 때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우리를 바른 길, 의의 길, 복된 길, 평강의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잘 때 우리를 보호한다. 그것은 도둑이나 위험한 사고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또 그것은 우리가 자고 깰 때 우리 속에 기억이 나게 하여 우리를 교훈한다. 우리는 새벽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기억됨을 경험한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한다.
    본문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음녀에게 빠지지 않게 도와준다고 증거한다.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호리는 말’이라는 원어(켈캇 라숀 ןוֹשׁ ת)는 ‘부드러운 말’(NASB, NIV), ‘아첨하는 말’(KJV)이라는 뜻이다(BDB).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함을 지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의 교훈 지키기를 힘쓰자. 그러면 의와 평안과 영생의 길로 가며 특히 음란을 피하게 될 것이다.
    [25-29절]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 . . .
    본문은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 아름다운 색’이란 여자의 외적 아름다움을 가리키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는 말씀은 그의 눈웃음과 눈짓에 홀리지 말라는 뜻이다. 성도는 사람의 외적, 육체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은 외적인 아름다움을 최고 가치로 여기겠지만, 실상 인간의 외적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잠 31:30).
    성도가 음녀를 조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원문 26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어 그 이유를 보인다. 첫째로, 그것은 경제적 궁핍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음녀로 인해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녀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돈이며, 음녀를 가까이 하면 결국 돈을 탕진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생명의 낭패와 상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음녀를 가까이 하면 질병을 얻고 건강을 상실하며 육신의 생명을 잃고 영적 생명 즉 구원과 영생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은 간음죄를 불에다 비유하며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한다. 간음은 순간적 열정과 쾌락이 있을지 모르나 그 불은 큰 화상을 입을 불, 즉 건강의 파탄, 가정의 파탄, 경제의 파탄, 영혼의 파탄을 가져올 불과 같다.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
    사람의 성정은 외적인 것에 끌리기 쉽지만, 성도는 사람의 인격성과 도덕성을 중시하고 간음죄를 조심하고 부부의 사랑을 지켜야 한다.
    [30-35절]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치는 아니하려니와 들키면 7배를 갚아야 하리니 . . . .
    도둑은 잡혀야 하고 그가 훔친 것을 갚아야 한다. 본문은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치는 아니하려니와 들키면 7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게 되리라”고 말한다. 도둑이 너무나 배가 고파서 무엇을 도둑질하면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지 못하고 그의 사정을 동정할 것이다. 그러나 도둑도 그 도둑질이 발각되면 훔친 것의 일곱 배를 갚아야 하며 만일 갚을 것이 없다면 그는 그의 모든 소유를 다 내어주어야 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종으로 팔아야 할 것이다(출 22:1-4).
    그러나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도둑보다 더 큰 해를 받을 것이다. 그는 ‘무지한 자’이다. 잠언에는 ‘무지한 자’ 혹은 ‘지혜 없는 자’라는 말(카사르 레브 ב ר)이 11번이나 나온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는” 큰 해를 받으니 무지하고 지혜 없는 자인 것이다. 음행의 대가는 크고 무섭다. 우리는 그것을 피하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원문 34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그의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그는 아무도 용서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 벌금도 돌아보지 않고 많은 선물을 줄지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부부관계에서 자기 배우자의 외도보다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주는 일은 없다.
    간음죄를 짓는 자는 무지하다. 간음죄는 극히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부부관계에 파탄을 가져온다. 우리는 남녀관계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7장: 음녀의 길은 사망임

    [1-5절] 내 아들아 내 말을 지키며 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 . .
    솔로몬은 자신의 말과 명령과 법을 지혜나 명철과 동일시한다. 그가 말한 ‘내 말’ ‘내 명령’ ‘내 법’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과 법, 곧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와 명철이 된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조심스럽게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지혜와 명철이다(신 5:32).
    솔로몬은 그의 아들이 그의 말과 명령과 법을 친근히 하라고 교훈한다. 그는 아들에게 그의 말을 지키며 그의 명령을 간직하라고 말한다. 또 그는 그의 명령을 지켜 살며 그의 법을 그의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말하며 그것을 그의 손가락에 매며 그의 마음판에 새기라고 말한다. 또 그는 지혜와 명철을 ‘내 누이’ ‘내 친족’이라고 부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친근히 하는 것이 좋고 또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이 좋다(신 6:6-9).
    본문은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고 말한다. 잠언 2:16도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라고 말했고, 또 6:24도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범죄치 않게 지켜준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고백했다(119:11). 사람이 죄짓지 않는 것이 지혜요 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친근히 하자. 그것이 거룩의 길이다.
    [6-23절] 내가 내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보다가 어리석은 자 중에, 소년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 . .
    솔로몬은 그의 집 들창으로, 살창으로 내어다보다가 어리석은 자들 중에, 소년들 중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다. 그 소년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이었다. 남녀관계는 가까이하면 사고나기 쉽다. 특히 음녀의 집은 멀리하는 것이 지혜인데, 그 소년은 그렇지 못했다.
    그때 창녀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자가 그를 맞았다. 음녀는 단정치 못한 옷을 입고 간교하다. 그는 떠들며 완패하였다. 음녀는 수다스럽고 억세다고 묘사되었다. 또 그의 발은 집에 머물지 아니한다. 그는 가정에 충실한 주부가 아니다. 그는 때마다 거리나 광장 모퉁이, 모퉁이에 서서 사람을 기다린다. 그는 그 소년을 붙잡고 입을 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서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그는 육신적 쾌락과 사랑을 사모하였고 그 상대를 찾았다. 그는 부드럽고 아첨하는 말로 그 어리석은 소년을 유혹했고, 그 소년은 곧 그를 따라갔다.
    소년이 그를 따라간 것은 마치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었다. 솔로몬은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고 말한다. 음녀를 따르는 자는 결국 실패하고 죽게 되고 멸망케 될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마음과 말과 몸가짐을 단정히 하자. 아담한 옷을 입자(딤전 2:9). 특히 음란의 죄를 조심하자.
    [24-27절]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 . .
    본문은 우리에게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라고 교훈한다. “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 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 이것은 잠언에 여러 번 나온 교훈이다. 5:8,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5:20,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6: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음녀로 인해 죽음을 맛보았다고 말한다.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옛날 삼손의 실패는 대표적인 한 예이다. 삼손이 가사의 한 창녀에게 들어가고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들어간 것이 그의 실패와 죽음의 원인이 되었었다(삿 16장). 세상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때때로 성도도, 심지어 목사도 음녀로 인해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고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음행의 죄는 항상 조심하고 피하고 멀리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본문은 음행의 결과가 죽음이요 지옥 형벌이라고 말한다.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구약성경에서 ‘음부’(쉐올 לוֹא)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그것은 ‘지옥’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KJV). 잠언 2:18도 “그[음녀의]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레파임 םיאּ ‘죽은 자들’)로 기울어졌나니”라고 말하고, 또 잠언 5:3-5도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음행이 많은 사람을 실수케 하고 실패케 했고 그 결과는 죽음과 지옥 형벌임을 깨닫고 항상 음행을 조심하고 그 길을 멀리하자.

    8장: 지혜가 부른다

    [1-11절]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 . . .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표현한다. 그는 지혜가 부르며 명철이 소리를 높인다고 표현한다. 그는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사람들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표현한다. 그는 지혜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니라.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고 외친다고 말한다. 지혜는 많은 사람이 있는 곳,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특히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에게 외친다. ‘어리석다’는 원어(페사임 ם)는 ‘단순하다’는 뜻이다. 단순한 사람은 때때로 어리석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은 지혜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본문은 지혜의 말씀의 내용에 대해 말한다. 지혜는 ‘가장 선한 것’을 말한다고 표현한다. ‘가장 선한 것’이라는 원어(네기딤 םיי)는 ‘고상한 것들, 귀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또 지혜는 ‘정직하고 의로운 것’을 말한다고 표현한다. 그 가운데는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다. 또 지혜는 ‘진리’를 말한다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혜는 고상하고 선한 것과 정직하고 의로운 것과 진리로 표현된다.
    본문은 또 지혜의 말씀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지혜의 훈계와 지식이 은과 정금보다 낫고 진주보다 나고 사람이 원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낫다고 말한다. ‘진주’라는 원어(페니님 םיי)는 ‘산호들’이라는 뜻이며(BDB, KB), 영어성경들은 ‘홍보석’(KJV, NIV) 또는 ‘보석’(NASB)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는 지혜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지혜의 말씀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말씀이다. 그 가치는 금은보다, 보석보다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의 음성을 사모하며 청종하자.
    [12-13절]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 . .
    본문은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라고 말한다. ‘명철’이라는 원어(오르마 ה)는 ‘사려깊음, 신중함’(prudence--KJV, NASB, NIV)이라는 뜻이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근신’이라는 원어(메짐마 ה)는 ‘분별력’(NASB, NIV)이라는 뜻이다. 잠언 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지혜가 사려깊음을 주소로 삼는다는 말은 사려깊음 속에 지혜가 있다는 말이다. 또 지혜와 지식과 분별력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지혜는 사려깊게,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의와 불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고 의와 진리와 선을 택하는 것이다.
    본문은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악은 바로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 등을 가리킨다.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이 둘은 다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본문은 교만과 거만이 악이라고 말한다. 잠언 6:16-17에서도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여섯 일곱 가지를 열거할 때 그 첫째가 ‘교만한 눈’이었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악한 행실’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뜻과 계명의 내용은 선과 사랑이며, 죄는 그것을 거슬러 악을 행하는 것이다. 본문은 또 패역한 입이 악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거역하고 의와 선을 거절하며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 지혜를 사모하며 가지자. 사려깊은 마음과 선악의 분별력을 가지자. 특히 교만과 거만,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자.
    [14-17절]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 . . .
    본문은 지혜에게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지혜가 명철이라고 말한다. ‘도략’이라는 원어(에차 ה)는 ‘목적, 계획’이라는 뜻이며, ‘참 지식’이라는 원어(투쉬야 הוּתּ)는 ‘완전한 지혜’라고 번역된 말로서(잠 2:7; 3:21) ‘건전하고 유능한 지혜’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의 배경과 건전한 진로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리킬 것이다. ‘명철’이라는 말(비나 הי)은 ‘이해력’이라는 뜻이다. 또 본문은 지혜에 능력 곧 일을 수행하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지혜에는 어떤 일에 대한 목적과 건전하고 유능한 통찰력이 있고 이해력과 추진력까지 있다.
    본문은 지혜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그것으로 다스린다고 말한다. 이 지혜는 특히 왕들과 방백들이나 재판관들에게 요청된다. 지혜로운 왕들과 방백들과 재판관들은 의와 선을 이루는 훌륭한 봉사자들이다. 힘과 용기가 없으면 비겁하게 불의와 타협하겠지만, 지혜는 힘과 용기가 있어 의와 선을 택하고 그것을 이룬다. 지혜는 사회의 각계 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
    본문은 또 지혜를 얻는 길을 말한다. 본문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말한다. 지혜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무시하거나 미워하는 자들을 무시하고 미워할 것이다. 또 지혜는 그것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난 바 될 것이지만, 그것을 간절히 찾지 않는 자에게는 만난 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의(義)와 영생을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의(義)와 영생을 얻듯이, 지혜도 그러하다.
    지혜는 우리의 영육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꼭 필요하다. 우리는 지혜 있는 성도가 되자. 그러기 위해 먼저 지혜를 사랑하며 간절히 구하자.
    [18-21절]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 . . .
    본문은 지혜의 유익과 가치를 증거한다. 첫째로, 지혜는 부요를 준다. 본문은 “부귀가 내게 있고”라고 말한다. ‘부귀’는 부(富) 혹은 재산과 영예라는 말이다. ‘장구한 재물’이라는 원어(혼 아세크 ק ןוֹה)는 ‘귀한 혹은 현저한 재물’(BDB), ‘물려줄 재물’(KB)이라는 뜻이고 영어성경들도 ‘장구한 재물’(KJV, NASB, NIV)이라고 번역했다. 21절은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게 하려 함이니 내가 그들의 곳간을 채우리라”이다. 지혜는 물질적 부요를 준다.
    둘째로, 지혜는 영예를 준다. ‘부귀’는 부(富)와 영예라는 뜻이다. ‘영예’라는 원어(카보드 דוֹב)는 ‘영광, 영예’라는 뜻이다. 다니엘은 지혜로웠고(단 1:17, 20) 존귀와 영예를 얻었다(단 2:48; 5:29).
    셋째로, 지혜는 의(義)를 준다. 본문은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내게 있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한다(딤후 3:15). 또 지혜는 사람들로 실제로 의로운 인격이 되도록 자라게 한다. 본문은 “나는 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평한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라고 말한다. 지혜와 의는 항상 같이 간다. 지혜는 의로운 길이며 또 사람을 의롭고 공평한 길로 이끈다.
    넷째로, 지혜는 천은[순은]과 정금[순금]보다 낫다. 본문은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잠언 3:14-15도,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었다.
    지혜는 참으로 유익하고 가치 있다. 그것은 정금보다, 천은보다 낫다. 지혜는 부요를 주며 영예를 주고 의를 준다.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자.
    [22-31절]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 . . .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혜를 가지셨고, 창세 전에 지혜가 세움을 입었다고 말한다. 본문의 이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7:35). 말씀으로 불린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시다(요 1:1).
    솔로몬은 또 창세 전, 즉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산이 세움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땅도, 들도, 세상의 흙의 근원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을 때, 지혜가 이미 났었고 또 하나님께서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후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었다(요 17:5).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말했다(골 1:15).
    솔로몬은 또 하나님께서 구름 하늘을 견고케 하시고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고 바다의 한계와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지혜가 하나님 곁에 있어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고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다고 말한다. ‘창조자’라는 원어(아몬 ןוֹמאָ)는 ‘기술가, 장인, 명인’이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지혜자로 살자.
    [32-36절]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솔로몬은 자녀들에게 날마다 지혜를 듣고 지키고 기다리라고 교훈한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솔로몬이 자녀들에게 주는 경건한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우리는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듯이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32절,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4절, “[지혜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35절, “대저 나[지혜]를 얻는 자는 생명[영생]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언 3장에서도, 지혜가 금은보석보다 낫고 그 길에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강이 있고 마침내 영생에 이른다고 말했다(잠 3:13-18). 지혜는 매우 복되다. 지혜를 얻는 자는 복되다.
    본문은, 반면에, 지혜를 버린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한다. 36절,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나를 잃는 자’라는 원어(코트이 יאּ)는 ‘나를 잃는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NIV), 또한 ‘내게 범죄하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KJV, NASB). 사람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거절하면, 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자요 또 지혜에게 범죄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지혜를 잃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함을 얻지 못하고 죄인 그대로이며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지혜는 복되다. 거기에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지혜 없음이 화(禍)요 죽음 곧 지옥 형벌이다. 우리는 날마다 지혜를 기다리자.

    9장: 참된 지혜

    [1-6절]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 . . .
    본문은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라고 표현한다. 집을 짓는 것은 교회 건립을 상징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고전 3:9). 일곱 기둥을 다듬는 것은 견고하게 집을 짓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시는 견고한 집이다(마 16:18).
    본문은 지혜가 잔치를 베푼다고 표현한다. 그 집에는 풍성한 잔칫상이 마련되었다. 짐승을 잡아 고기를 굽고 맛있는 포도주를 음료로 준비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말씀의 양식을 가리킨다.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본문은 지혜가 사람들을 초청한다고 표현한다. 본문은 지혜가 그의 여종들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사람들, 특히 어리석은 사람들을 부른다고 말한다. 그 여종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들, 곧 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한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은, 우선 “이리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의 요청이다. 또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한다. 지혜의 말씀을 먹고 마신다는 것(요 6:54-56)은 그 말씀을 믿는 것을 말한다. 또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고 말한다. 지혜의 말씀을 믿는 것이 곧 영생의 길이다. 또 “명철의 길을 행하라”고 말한다. 신앙은 결국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참 교회를 사랑하자. 또 그 지혜의 말씀, 구원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자. 또 그 지혜의 말씀을 믿고 행하자.
    [7-12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 . .
    본문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한다. 거만한 자는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어 본다. 그는 남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그는 남의 교훈이나 충고와 조언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마음이 높기 때문이다.
    본문은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그 계명을 순종하는 자이다. 지혜 있는 자는 책망을 들으면 달게 받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기 때문에 자기를 책망한 자를 사랑하게 된다. 본문은 또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나 의로운 자는 교훈을 받아 더 지혜로워지고 더 지식이 있는 자가 된다. 그는 점점 더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자가 된다.
    본문은 지혜의 길에 대해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케도쉼 םיד--강조의 복수형)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근본’이라는 원어(테킬라 ה)는 ‘시작’이라는 뜻이다. 잠언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데서 시작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자라간다.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곳에서 참 지혜가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불경건, 또 그의 계명을 어기는 죄와 부도덕이 가장 큰 어리석음이다. 또 본문은 지혜의 유익에 대해 또 말한다. 지혜는 장수(長壽)의 복을 주며 지혜자에게 유익을 줄 것이나, 거만한 자는 홀로 해를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믿어 구원받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지혜자가 되어야 하며, 그럴 때 교훈과 책망이 유익할 것이다.
    [13-18절]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 . . .
    지혜가 사거리에서 어리석은 자들을 부르듯이(잠 8:1-5), 그 여종들을 보내어 그들을 생명의 길로 초청하듯이(잠 9:1-6), 미련한 여자도 사람들을 부른다. 그 여자는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미련한 여자는 떠들며 말이 많다고 묘사된다. 빈수레가 요란하듯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말이 많으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유함과 조용함이다(벧전 3:3-4). 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묘사된다. 그는 진리의 지식이 없고 의롭고 선한 것을 알지 못한다.
    본문은 그 여자가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부른다고 말한다. 그 여자는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부른다.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은 “자기 길을 바로 가는” 성도에게도 있다. 마귀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마 6:13). 그 여자는 “무릇 어리석은 자”나 “지혜 없는 자”를 부르며 유혹한다. 누구든지 지혜로 무장하며 깨어 있지 않으면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이다.
    그는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은밀한 음행을 선전하는 말이다. 은밀한 음행은 순간적으로는 달고 맛이 있을지도 모르나, 심히 죄악되며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다. 성도는 은밀한 악을 버리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아야 한다.
    본문은 미혹받은 자의 결말에 대해 말한다. 18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그는 죽은 자들이 거기에 있는 것과 그 여자의 객들이 지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느니라”이다. 음행의 죄의 결과는 죽음이요 지옥 형벌이다. 행음자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어 있자. 우리는 은밀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살자.

    10장: 지혜, 근면, 사랑, 입술 제어

    [1절]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아들이 아버지로 기쁘게 한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들이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의와 선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부모를 공경하며 그의 교훈에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또 아버지를 기쁘게 한다는 말은 어머니도 기쁘게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자녀들이 바르게 행할 때 부모에게는 기쁨이 된다. 실상 그것이 참된 효도의 첫걸음이다.
    물론, 진리의 싸움이 있는 경우가 있다. 부모가 불경건과 부도덕한 일을 요구할 때 자녀와 부모의 싸움과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6). 그런 싸움에서는, 하나님이 첫 번째이어야 하고, 부모님이 그 다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리의 싸움 외에는 자녀들은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골 3:20).
    본문은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의 근심이라고 말한다. 미련한 아들이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역시, 어머니는 아버지를 포함한다. 자녀가 범죄하면 부모에게 슬픔과 근심이 된다. 그것은 불효이다. 자녀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효도요 부모님을 근심시키는 것이 불효이다. 자녀가 범죄하면 부모에게 슬픔과 근심이 되는 까닭은, 죄악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죄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자기 자신과 가정을 망친다. 또 하나님의 징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자녀들에게 큰 불행이다.
    우리는 부모님의 지혜로운 자녀가 되자. 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지혜로운 자녀들로 키우자.
    [2절]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본문은 불의의 재물이 무익하다고 말한다. 불의의 재물이란 불의하게 번 돈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의의 결과이며 돈에만 가치를 두고 의에 가치를 두지 않은 결과이다. 불의의 재물이 무익하다는 말은 그것이 얼마간 기쁨과 유익을 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마음의 참 평안과 기쁨이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그런 예가 많다. 아간은 여리고성 점령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 외투 한 벌, 은 200세겔, 50세겔 중 금덩이 한 개를 취하였다가 온 가족과 더불어 죽임을 당하였다. 유다왕 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나 자신도 결국 죽고 말았다. 엘리사의 시종 게핫시는 거짓말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취하였다가 문둥병에 걸렸다. 가룟 유다는 은 30개에 주님을 배신하였다가 자살하여 창자가 터져 죽었다. 이와 같이,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며 그것을 취한 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것이며 그 마지막이 비참할 것이다.
    본문은 의리가 죽음에서 건진다고 말한다. ‘의리’라는 원어(체다카 ה)는 ‘의’라는 뜻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의는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것이다. 그것은 돈을 많이 벌든지 못 벌든지 간에 양심에 거리낌 없이 버는 것을 말한다. ‘죽음에서 건진다’는 말은, 앞부분의 말씀과 대조해보면 의롭게 돈을 벌어 남을 구제하는 의(義)가 가난하여 굶주리는 자를 살린다는 뜻도 될 수 있겠지만, 더 깊고 완전한 의미에서 의는 구원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 건져내셨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의의 가치를 알자. 우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감사히 받고 믿고 의지하자. 또 실제로 의롭게만 살자.
    [3절]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여호와께서” 의인과 악인을 판단하시고 그들에게 복과 화를 내리신다. 그는 공의의 판단자이시며 보응자이시다. 그는 천지만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영혼을 주리지 않게 하신다. 그는 의인들에게 육신의 양식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옛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다. 그는 기근시에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어 먹을 것을 공급해주셨다. 다윗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증거하였다(시 37:25).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심령도 주리지 않게 하신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과 기갈의 때가 있을 것이지만(암 8:11),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과 음료를 부족함 없이 주실 것이다. 악인에게는 말씀의 기근과 기갈이 올지라도, 의인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시다(요 6:55).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영원한 생수의 샘물이 되는 성령을 부어주셨다(요 4:14; 7:38-3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신다. 악인에게는 물욕, 정욕, 명예욕, 권세욕 등 세상적 욕심이 가득하다. 욕심은 죄의 원인이 된다(약 1:15). 악인들은 여러 가지 욕심을 마음에 품지만, 그것들은 그들에게 결코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미워하시고 징벌하시고 물리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인으로만 살자.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자. 또 우리는 성령으로 행하며 육체의 소욕을 버리자(갈 5:16).
    [4절]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 사람의 게으름 여부는 그의 손의 움직임 정도에서 나타난다. 게으른 자는 손놀림이 느리다. 잠언 26:15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했다. 손이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 가난은 대개 게으름에서 온다. 그러므로 잠언 24:30-34는 교훈하기를, “내가 증왕에[이전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된다. 근면한 자는 손이 부지런하다. 우리는 손이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할 일이 있으면 뒤로 미루지 말고 빨리 처리하는 습관을 가지자. 잠언 31장에 묘사된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한 여자이다. 13절,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15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22절,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방석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24절,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고에게 맡기며.” 27절,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남자나 여자나 손이 부지런한 자는 지혜로운 자이며 근면의 열매는 물질적 부요이다. 잠언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잠언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자가 되자. 사도 바울도 “조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했다(살전 4:11).
    [5절]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유대 땅의 여름은 추수의 계절이다. 봄에는 보리 추수가 있다. 그것이 무교절 기간이다. 여름이 시작될 때 밀 추수를 한다. 그것이 맥추절 때이다. 한여름에는 무화과, 포도, 감람 등 열매를 추수한다. 그래서 그것들을 ‘여름 실과’라고 부른다(삼하 16:1; 암 8:1, 2; 미 7:1; 렘 40:10, 12; 48:32). 산지 지역은 늦가을까지 추수가 계속된다.
    본문은 여름에 거두는 자 즉 추수하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라고 말한다. 여름에 일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여름은 덥고 땀나는 계절이다. 그러나 여름은 일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추수할 때이다. 이것은 비유적인 의미도 가질 것이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때는 심는 때라면 청년 때는 일하는 때이며 거두는 때이다. 또 사람이 몸이 건강할 때는 부지런히 일할 때이다. 몸이 쇠약해지고 아플 때가 올 것이다. 시력이 떨어지고 청력도 떨어지고 손발의 근력도 떨어지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이 연로해지고 체력이 쇠해지면 많은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름에, 일할 만한 때에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문자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그러하다.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부모를 기쁘게 할 것이지만, 추수 때에 잠이나 자는 자는 어리석은 아들이요 부모의 근심거리이며 수치라고 본문은 말한다. 여름에 일하며 추수하는 자는 물질적 유여함도 누리고 부모님을 물질적으로 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추수 때에도 일하지 않고 잠이나 자는 아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할 것이며 부모님을 물질적으로 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부지런하게 일하며 사는 것은 미덕이지만, 게으른 것은 수치스러운 악이다.
    우리는 일할 만한 때에 힘써 일하자. 건강이 있을 때, 시력, 청력, 손과 발에 기력이 있을 때, 우리는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자기 직업의 일이나 가정의 일에도 성실하자.
    [6절]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축복도 그의 머리에 있다. 의인의 머리에는 영적인 복이 있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또 육적인 복, 곧 건강과 물질과 자녀들의 복도 의인에게 있다. 신명기 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고 본문은 말한다. 악인은 항상 거칠고 난폭한 말을 잘 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품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4- 35). 사도 바울은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했다(롬 3:13-14). 의인과 악인은 판연히 다르다.
    우리는 의인으로만 살자. 주 예수만 믿고 성경 교훈대로만 살자. 우리는 특히 악한 말을 버리자. 주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7절]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한다”는 원문은 “의인에 대한 기억은 복되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많은 의인들이 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늘나라로 올린 에녹, 홍수 심판으로 온 세상이 멸망할 때 홀로 그 가족만 구원을 받았던 노아,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린 아브라함,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통했던 요셉, 하나님의 사람 모세, 믿음과 순종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후대의 모든 왕들의 모범이며 메시야의 모형이었던 다윗, 하나님의 사람이며 불의 선지자이었던 엘리야, 모범적이었던 유다왕 히스기야,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체험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 신약성경 중 13권 내지 14권을 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 최초의 순교자 집사 스데반 등. 그들에 대한 기억은 복되다. 그것은 후대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고 교훈과 본이 되고 힘과 위로를 주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많은 악인들이 있다. 들판에서 동생을 쳐죽인 최초의 살인자 가인,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불신앙적 보고를 했던 열 정탐군,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와 250명의 유명한 족장들, 경건하고 의롭고 충성된 신하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 왕, 이스라엘을 바알 숭배의 깊은 수렁에 빠뜨렸던 아합 왕, 많은 우상들을 숭배하였고 의인들의 피를 많이 흘렸던 므낫세 왕,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실천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3년 동안 따랐던 주님을 배신하고 은 30개에 팔았던 가룟 유다 등. 그들의 이름은 부패되어 냄새가 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오래가지 않고 사라진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생각하기도 싫어하고 머리를 흔들며 혀를 찬다.
    우리는 악인으로 살지 말고 의인으로 살다 가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바른 지식과 믿음과 인격을 가지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8절]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리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는다고 본문은 말한다. ‘마음’은 영 혹은 영혼의 활동과 표현을 가리킨다. 그것은 지정의 곧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총체이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중생(重生)하여 새 생명의 지식과 소원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중생한 영의 대표적 활동과 표현은 지혜이다. 중생한 영은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의를 지향한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들을 받는다. ‘명령들’은 하나님의 계명들과 명령들과 교훈들을 가리킨다. ‘명령들을 받는다’는 말은 그것들을 즐거움으로 듣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창세기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창세기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본문은 또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한다고 말한다. ‘입이 미련한 자’라는 말은 미련한 말을 하는 자라는 뜻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한 말들로 자신의 미련함을 나타낸다. 우선, 미련한 자는 말이 많은 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말했다(약 1:19). 또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치 않고 입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반대하고 대적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조롱한다. 그의 말은 대체로 악하다. 그러나 이렇게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인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계명들을 즐거이 받고 순종하자. 우리는 입이 미련하여 말씀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자.
    [9절]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본문은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다”고 말한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라는 원어(홀레크 밧톰 םוֹתּ וֹה)는 ‘온전하게 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온전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곧 성경 교훈대로 올바르고 정직하게,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말한다.
    ‘걸음이 평안하다’는 원어(옐레크 베타크 ח )는 ‘안전하게 행한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죄와 재앙들과 사탄의 시험들이 많고 사람이 장래에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온전하게 행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행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의 악과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또 육신적, 심리적 질병과 경제적 파탄으로부터 지키시고 건지실 것이며 가장 선하고 복된 길로 그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은 또한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고 말한다. ‘굽은 길’은 하나님의 말씀의 정로를 이탈하여 인간의 죄악성을 따라가는 길이다. 그러면서도 악인은 그 길을 숨긴다. 그는 소박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되이 자기 행위를 숨긴다.
    그러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날 것이다. 우선, 그의 죄가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얼마나 죄악된지 그 자신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또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징벌도 드러날 것이다. 굽은 길로 행하는 악인은 패망할 것이다. 그는 죽을 것이며 경제적 파탄을 가질 것이며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우리는 바른 길로만 행하자. 그 길은 안전한 길이다. 그 길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인도하심이 있는 길이다. 우리는 결코 굽은 길로 가지 말자. 우리는 자신의 죄성을 따라, 또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말자.
    [10절]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느니라.
    본문은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친다”고 말한다. ‘눈짓하는 자’라는 원어(코레츠 아인 ן ץ)는 ‘눈을 찡그리는 혹은 찌푸리는 자’라는 뜻이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사랑과 동정의 마음은 그 눈빛에 반영되며, 교만한 마음과 남을 미워하고 멸시하는 마음도 그 눈에 나타날 것이다. ‘눈을 찡그리는 것’은 이웃에 대한 미움과 멸시의 마음을 나타낼 것이다. 잠언 6:13에도 악한 자는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로 알게 한다”고 말했는데, ‘눈짓을 한다’는 원어가 같다. 악한 자는 남을 향해 눈을 찡그린다.
    본문은 눈을 찡그리는 자는 근심을 끼친다고 말한다. ‘근심’이라는 원어(앗체벳 ת)는 ‘상함, 고통’이라는 뜻이다(BDB). 이웃을 향해 눈을 찡그리고 찌푸리는 것은 그 이웃의 마음에 상함과 고통을 준다. 동물도 주인이나 주인집 손님이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안다. 하물며 사람이랴! 우리의 눈빛이나 표정은 상대방에게 상함과 고통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시편 35:19에 보면, 다윗은 기도하기를,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눈을 찡그리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본문은 또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느니라”고 말한다. 같은 말씀이 8절에도 있었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고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다(약 3:2).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그의 말로 나타난다. 미련한 자는 대체로 듣기보다 말이 빠르고, 미움의 말, 남에 대한 비난의 말, 조롱과 멸시의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의 입의 미련함으로 패망을 당할 것이다. 사람이 눈을 찡그리는 것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정도이지만, 악한 말은 자신을 패망케 한다.
    우리는 좋은 마음을 품고 살자. 우리는 사랑과 동정의 좋은 눈빛을 가지자.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지혜롭고 덕스러운 좋은 말을 하자.
    [11절]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입이 생명의 샘이라고 표현한다.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교훈대로 행하는 자들도 의인이라고 불린다. ‘의인의 입’ 곧 의인들의 말하는 입은 하나님을 증거하고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구원을 증거한다. 그 입은 회개와 믿음을 전하며 의를 전하고 순종과 선행을 권한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생명의 샘’이라는 말은 생명수를 내는 샘, 곧 목마른 자에게 시원한 생수를 주는 샘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비유적인 말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요 4:14). 의인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 곧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말이다. 의인의 입은 사람을 살리는 입이다. 유다서 23은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교훈한다.
    그러나 반면에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고 본문은 말한다. 이미 본장 6절에서도 나온 말씀이다. ‘머금다’는 원어(카사 ה)는 ‘감추다, 덮다, 감싸이다’는 뜻을 가진다. ‘독’이라는 원어(카마스 ס)는 ‘난폭함, 폭력’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악인이 독하고 난폭한 말을 마구 내뱉는다는 뜻일 것이다. 악인의 악함은 그의 입의 말에서 드러난다. 그는 남을 상하게 하고 해치고 죽이는 독한 말, 곧 욕설과 독설과 비방의 말을 마구 내뱉는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산 사람을 죽이는 자이다.
    우리의 입은 사람을 살리는 입인가, 죽이는 입인가? 우리가 구원받은 의인들일진대, 우리는 독설과 비방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의를 증거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자가 되자.
    [12절]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본문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라고 말한다. 미움은 교만과 오해와 시기와 욕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람은 교만할 때, 상대를 오해했을 때, 상대를 시기할 때, 또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릴 때 상대방을 미워하고 또 다툰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고린도교회의 시기와 분쟁과 다툼은 교인들이 죄성을 따라 행하였기 때문에 생겼다(고전 3:3). 야고보는 당시의 교인들 중에 있었던 싸움과 다툼은 그들 속에 있는 육신적 욕심에서 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약 4:1-2). 사람의 교만과 오해와 시기와 욕심에서 상대에 대한 미움이 나오고 미움이 있는 곳에 다툼이 일어난다.
    본문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한다. 사도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했다(벧전 4:8).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속에서 천성적으로 비교적 착한 자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속에서 겸손과 착한 마음과 긍휼의 마음에서 사랑이 나온다고 본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온유하고 투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4-7).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이다(마 22:37-40; 요 13:34). 또 사랑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이다(요일 4:10).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의 크고 많은 죄들을 용서하셨다. 그것은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것과 같았다(마 18:21-35). 흠과 부족이 없는 사람은 없지만, 사람이 사랑이 있으면 다툴거리가 없고, 미움이 있을 때 싸우며 다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단합해야 한다(엡 4:3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교만, 오해, 시기, 욕심과 더불어 미움을 다 버리고, 서로 사랑하며 상대의 흠과 부족을 감추어 주는 자가 되자.
    [13절]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본문은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라고 말한다. 지혜는 심령과 인격의 문제이며 그것은 말로 표현된다. 어리석은 자는 입이 미련한 자이다(잠 10:10).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다(잠 10:6, 11). 그러나 지혜롭고 명철한 자는 지혜의 말,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한다. 잠언 10: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잠언 10:21,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그러나 본문은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지혜 없는’이라는 원어(카사르 레브 ב־ר)는 ‘마음이 없는’이라는 말로서 ‘생각이 없는, 깨달음이 없는, 양심이 없는, 지혜가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다(BDB). 한글개역에서는 주로 ‘지혜 없는’이라고 번역했다. 생각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자가 지혜 없는 자이다.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다고 본문은 말한다. 채찍은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질병이나 경제적 손실이나 궁핍, 환경적 어려움 등을 가리킨다. 성경은 어린아이들을 채찍으로 징계함으로 교육하라고 가르친다.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지혜 없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비로소 깨닫고 고치고 회복된다. 욥기 5:18-20,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자가 되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지혜의 말만 하자. 또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자.
    [14절]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지식은 하나님과 사람과 사물들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리킨다. 지식은 경건과 의와 선의 길을 보이며 사람이 그 길로 가면 영생에 이른다. 지혜와 지식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그것들은 세상의 금이나 은이나 그 어떤 보석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잠 3:13-18).
    ‘간직한다’는 원어(차판 ן)는 ‘쌓는다, 저장한다, 축적한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마음 속에 저장하였다가 필요한 때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5). 사람들은 세상에서 돈을 저축하는 것을 크게 여기지만, 실상 지혜와 지식을 저장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잠언 8:10-11,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무릇 원하는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고 불경건한 말,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 불순종하는 말, 부도덕한 말, 파괴적인 말을 잘 한다.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의 말은 한마디로 죄악된 말이며, 그 자체가 죄이다.
    미련한 자의 말은 멸망에 가깝다. 그는 위험한 상태에 있고, 만일 그가 그 죄를 회개치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자. 그것을 간직하고 저장하고 쌓자. 하나님과 의와 선에 대한 지식을 저장하고 실제로 의롭게 사는 자가 되자.
    [15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본문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라고 말한다. 견고한 성은 원수들이 공격하기 어렵고 상당히 안전한 곳이다. 부자는 돈이 많기 때문에, 오늘날 말로 하면, 집에 경비장치를 설치하고 경호원과 경비견까지 두므로 상당히 안전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나 돈을 의지하고 교만하고 방탕하기 쉽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면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24). 사도 바울도,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본문은 또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고 말한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가난한 자들의 멸망은 그들의 궁핍이니라”이다(BDB, KJV, NASB). 사람이 궁핍하면 남에게 구걸하게 되고 남의 종이 되고 심하면 굶어죽고 낭패를 당한다. 가난을 참는 것은 미덕이지만, 가난 자체는 미덕이 아니다. 확실히, 재물은 복이며 궁핍은 화다.
    그러나 복과 화는 다 하나님께 달려 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토지 소산의 복, 짐승 새끼의 복,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의 복, 자녀의 복, 건강의 복, 사회적 평안의 복을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신다. 오늘날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직장과 사업의 복, 은행 잔고의 복, 시장 바구니와 냉장고의 복, 자녀의 사회 진출과 행복의 복, 건강의 복, 사회적 평안의 복을 주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자. 물질적 탐심을 가지고 부자 되기를 원해서는 안 되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 여유를 누리며 살자.
    [16절]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라고 말한다. 구약 시대에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제사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이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수고’라는 원어(페울라 ה)는 ‘행위, 수고, 품삯’이라는 뜻이다. 의인의 수고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 순종으로 행하는 것,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하는 것, 정당하게 수고하여 받은 품삯 등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응]하신다”고 말했고(롬 2:7), 또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했다(롬 6:33). 또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했다(고전 15:58).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다(계 2:10).
    본문은 또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니라”고 말한다. ‘소득’이라는 원어(테부아 האָוּב)는 ‘열매, 소산, 수입, 소득’이라는 뜻이다. 악인의 소득이란 불경건하게 번 돈, 불의하게 번 돈, 거짓되게 번 돈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에 이른다’는 말은, 그렇게 번 돈이 죄악되며 자신에게 복이 되지 않고 도리어 화가 된다는 뜻이다.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잠언 16:8,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우리는 의인으로만 살고 일하며 수고하고 돈을 벌자. 의인으로 산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고 계명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17절]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본문은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한다고 말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생활 훈련(discipline), 징계, 훈계’라는 뜻이다(BDB).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사상뿐 아니라, 생활의 교훈도 포함한다. ‘지킨다’는 말은 생활 훈련과 징계를 달게 받아서 인격과 삶이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여지는 것을 말한다.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한다. 훈계를 지키는 것은 의(義)이며 의(義)의 결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의롭게 살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6:13,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본문은 또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고 말한다. ‘징계’라는 원어(토카캇 תוֹתּ)는 ‘책망, 징계’라는 뜻이다(BDB). 이 단어는 ‘훈계’라는 말(무사르 רוּמ)과 거의 동의어이다. 책망과 징계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나 환경 여건, 곧 질병과 궁핍과 사회적 곤란 등을 통해서 온다. ‘버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지 않고 무시하고 싫어하고 거절하는 것을 말한다. 징계를 버리는 자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한다. 그러나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정로(正路)로 벗어나 죄와 패역의 길로 가고 있고 마침내 실패와 멸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과 징계와 책망을 달게 받고 끝까지 지키는 자가 되자. 잠언 3:11-12,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18절] 미워함을 감추는 자는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요 참소하는 자는 미련한 자니라.
    본문은 “미워함을 감추는 자는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요”라고 말한다. 정당하게 미워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고 악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리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그의 허물을 용서하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다 맡겨야 한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것이나,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 등 부당하게 미워하는 경우가 있다.
    미워함을 감추는 자는 거짓의 입술을 가진 자이다. 속으로는 미워하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뿐이다. 그것은 미움에 거짓의 악을 하나 더 첨가하는 것뿐이다. 사도 요한은 교훈하기를, 미움은 살인이며(요일 3: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 어둠에 있고 사망에 거하고 있다고 증거하였다(요일 2:9; 3:14). 형제에 대한 미움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본문은 또 “참소하는 자는 미련한 자니라”고 말한다. 참소(讒訴)는 남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이웃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심는다. 그것은 미련하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 우리는 다 율법을 지켜야 할 자이며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뿐이시다(약 4:11-12). 둘째로, 우리도 죄인이며 때로는 더 큰 죄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의 띠를 빼려 해서는 안 된다(마 7:1-5). 건전한 인격자는 남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기뻐하기 않으시고 노하신다. 로마서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우리는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을 미워하지 말자. 또 미움을 감추고 거짓으로 친근히 하지도 말자. 우리는 특히 남을 비난하지 말자.
    [19절]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본문은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라고 말한다. 사람은 말로 마음을 표현한다.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은 그 인격을 나타낸다. 잠언 23:7,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하셨다(마 12:34-35). 그러므로 말은 사람의 인격적 성숙성의 척도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약 3:2).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고 실수하기 쉽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부정확한 말, 경솔한 말, 거짓된 말, 감정적인 말, 미움의 말, 부덕한 말을 하기 쉽다. 말의 실수는 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입술을 크게 벌린 자에게 멸망이 오고 그런 자를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잠 13: 3; 20:19).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한편, 본문은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생각이 말로 표현되기 때문에 마음을 지키고 입술을 제어하면 말실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했고, 또 잠언 17:27은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9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말이 많은 사람이 되지 말고 입술을 제어하고 필요한 경우에 믿음 있고 진실하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20-21절]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천은’(天銀)은 품질이 가장 좋은 은을 말한다. 의인들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말을 할 것이다. 그들의 말은 가치 있는 말이다.
    본문은 또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한다. ‘교육한다’는 원어(라아 ה)는 ‘먹인다, 인도한다’는 뜻이다.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은 여러 사람 곧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가르치고 진리의 지식으로 먹이고 선한 길로 인도한다. 그가 주일학교 교사가 되면,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먹이고 인도할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부도덕하게 사는 자들이 악인이다. 그들에게서는 악하고 강포한 말, 남을 비방하고 자신을 높이며 자랑하는 말, 거짓된 말이 나올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가치가 적다. 성경은 인간의 가치가 경건함과 도덕적임에 있음을 밝히 증거한다.
    또 본문은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는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인데, 그들은 지식이 없다. ‘지식이 없다’는 원어(카사르 레브 ב־ר)는 ‘마음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는 세상적 지혜와 지식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는 불경건한 언행(言行)과 부도덕한 언행이 나온다. 그런 언행은 죄악되며 그들은 마침내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미련한 자들은 다른 이들을 살리고 유익케 하기커녕 자기 자신 하나도 살리지 못한다.
    우리는 의인이 되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또 의롭고 선한 말만 하자.
    [22절]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복은 사람으로 부하게 하며”(원문)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의 복은 일차적으로 영적인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셨다. 에베소서 1:3-4,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또한 물질적 부요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셔서 창성케 하셨고 우양과 은금과 가축떼를 많이 주셨다(창 24:35).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도 복을 주셔서 창대하고 왕성하고 거부가 되게 하셨고 양과 소가 많은 떼를 이루게 하셨다(창 26:12-14).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신명기 28장에 토지소산의 복, 우양의 새끼의 복, 떡반죽 그릇의 복 등을 약속하셨다. 잠언 3장에도, 지혜를 얻는 자가 복되며 그 오른편에 장수(長壽)가, 그 왼편에는 부요와 존귀가 있다고 말했다(16절). 물질적 복도 하나님의 복이다.
    본문은 또 “그는 거기에 근심을 더하지 아니하시니라”(원문)고 말한다. 하나님의 복은 근심 없는 복이다. 근심은 죄 때문에 왔다. 그러므로 죄사함받고 의롭게 사는 자에게는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이 넘친다. 애가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요한복음 14:27,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주신 영육의 모든 복을 깨닫고 기억하고 감사하며 또 항상 사모하자. 우리는 또 그의 평안 가운데 살자.
    [23절]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낙을 삼는 것’이라는 원어(세코크 קוֹח)는 ‘웃음거리, 기쁨거리, 장난’ 등의 뜻이다. 미련한 자에게는 악을 행하는 것이 웃음거리나 장난 같다고 본문은 말한다. 미련한 자는 악한 일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악한 일을 행하면서도 “뭐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련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는다”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지혜로 기쁨을 삼는다는 뜻이다. 지혜자는 악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멀리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고 말씀하셨고(사 66:2),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고 하셨다(겔 9:4).
    또 반면에, 지혜자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의와 선을 즐거워하고 내세를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일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즐거워한다. 시편 119편 저자는,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라고 말했다(시 119:24).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고 말했다(빌 2:17).  사도 요한은,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했다(요삼 3-4).
    우리는 악을 행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여기지 말고, 악을 두려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지혜를, 곧 하나님과 그 말씀과 그의 일을 즐거워하자.
    [24절]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본문은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악인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질병과 궁핍과 사고 등으로 나타난다. 왜 두려워하는가? 양심 때문에 그러하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은 하나의 좋은 예이다. 하만은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의 제안대로 집 뜰에 50규빗(약 25미터) 되는 높은 나무를 세우고 다음날 왕에게 유대인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려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의 명으로 오히려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고 그를 왕의 말에 태워 성 중 거리로 다니며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자에게 이렇게 할 것이라고 외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그 일을 고했다. 그때 그들 중 지혜로운 자와 그 아내 세레스는,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족속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복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저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고 말했다. 마침내 그와 그 주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이 하만에게 닥쳐왔다.
    본문은 “[그러나]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의롭고 선한 것을 원할 것이며 그의 소원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시편 103:5는,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고 말한다. 잠언 16:3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고,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7:7). 빌립보서 2:13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다.
    우리는 악하게 살지 말고, 의인으로만 살자. 즉, 믿음으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25절]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본문은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진다”고 말한다. 토네이도 같은 회리바람은 한 마을을 황폐케 하는 무서운 바람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만나는 극심한 환난을 가리킨다. 때때로 전쟁이 있고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고 전염병이 있다. 그것이 회리바람처럼 한 지역을 지나가면 많은 인명피해가 생긴다. 오늘날 같은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일종의 회리바람이다. 그것은 악인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악인은 그 회리바람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 시편 1:5는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본문은 “[그러나] 의인은 영원한 기초이다”(원문)라고 말한다. 기초는 보통 튼튼하다. 오늘날도 집을 지을 때 먼저 기초를 튼튼히 만든다. ‘영원한 기초’라는 표현은 ‘흔들리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편 125:1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말한다. 의인에게도 고난은 있다. 그러나 그는 낙망치 않고 실패치 않고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시편 91:3, 5-7,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고전 10:1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극심한 고난 중에도 구원을 체험했고(고후 1:8-10) 낙심치 않는다고 고백했다(고후 4:8-9). 또 고난은 성도에게 유익이 된다. 그것은 거룩하고 믿음 있는 인격으로 단련시키기 때문이다(롬 5:3-4).
    우리는 악인으로 살지 말고, 의인으로만 살자. 또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자. 환난은 우리를 멸망케 못하며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킬 뿐이다.
    [26절]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본문은 게으름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본문은 게으른 자를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다고 말한다. 식초가 이에 닿으면 이가 시리고 아플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몹시 불편하게 하고 피하고 싶게 만든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도 그러하다. 눈이 따갑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 즉 그를 보내고 그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에게 그러하다. 그를 보내는 사람은 게으른 자로 인해 몹시 불편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보기도 싫을 것이다. 그는 그에게 고운 말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남자는 남자로서 자기의 일, 자기의 직장, 자기의 사업에 성실하고 근면해야 한다. 여자는 여자로서 자기 가사의 일, 가족들의 영양을 생각한 식사 준비, 위생적 청결을 위한 청소와 빨래, 자녀 출산과 양육 등의 일에 성실하고 근면해야 한다. 자녀들은 공부할 때 열심히 공부하고 몸의 건강을 위해서 적절히 운동도 해야 한다.
    또 성도는 성경 읽기, 기도, 성수 주일과 기타 집회참석, 사랑, 전도, 봉사 등의 일에 성실해야 한다. 또 직분자는 각자 맡은 직무를 따라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하고 또 성실해야 한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물론, 정서적 존재인 사람에게 어느 정도 휴식과 기분 전환이 필요하며, 음악, 독서, 운동, 원예 등의 취미생활도 가능하다고 본다. 마가복음 6:31,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그러나 휴식이나 기분 전환 또는 취미생활이 너무 지나치면 게으른 일이 될 것이다. 성경은 게으른 생활을 책망하고 부지런한 생활을 권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에 초 같고 하나님의 눈에 연기 같은 게으른 자가 되지 말자.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27절]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長壽)하느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보통 장수(長壽)를 복이라고 생각한다. 생에 대한 애착은 본능적인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장수의 비결로 맑은 공기, 소식(小食), 적당한 노동, 평안한 마음 등을 꼽는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장수의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법을 어기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은 율법을 순종하는 자에게 장수를 약속한다.
    신명기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신명기 11:8-9,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장수는 건강을 전제하며(출 15:26; 잠 3:7-8)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도 포함한다. 장수는 결국 영생을 포함한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은 병으로 일찍 죽거나 전쟁, 기근, 사고 등의 재앙으로 일찍 죽는다. 하만은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죽이려 하다가 자기가 죽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다가 자살해서 죽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 그 값의 일부를 감추고 거짓말했다가 즉시 죽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자.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구약성경을 다 믿고 순종하자. 또 우리는 악을 멀리하자.
    [28절]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룬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이다. 소망은 사람에게 즐거움과 힘이 된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교훈하였다(롬 12:12).
    성도의 소망은 주의 재림과 몸의 부활 및 천국과 영생이다. 베드로전서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성도는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기뻐한다. 로마서 5:3-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소망은 끊어진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며 악하게 사는 자이다. 악인의 소망과 기대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꿈이다. 그것은 주께서 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어리석은 부자의 헛된 소망과 같다. 그 부자는 큰 풍년을 맞아 그의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그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계획하였다. 또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다(눅 12:16-21).
    우리는 악인으로 살지 말고 의인으로 살자. 우리는 주의 재림과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간절히 소망하며, 또 소망 중에 즐거워하자.
    [29절]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정직한 자’라는 원어(톰 ם)는 ‘온전한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며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산성’(마오즈 ז)은 ‘요새, 피난처, 안전지대’라는 뜻이다. 그것은 환난으로부터, 원수 마귀로부터, 죄와 시험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지키는 요새, 피난처, 안전지대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지키며 순종하는 정직한 자에게는 요새와 피난처와 안전지대와 같다.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 순종은 안전과 승리의 비결이다.
    주께서는 산상설교의 결론에서도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라고 하셨다(마 7:24-25). 홍수와 같은 환난이 닥쳐와도, 말씀을 행하는 자는 망하지 않는다.
    본문은 “[그러나]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고 말한다. 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그것은 남을 해치는 것이다. 이웃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이 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악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는 안전을 보장하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어기는 자에게는 멸망의 신호인 것이다. 행악자는 결국 망할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도 질병이나 기근이나 전쟁 같은 재앙으로 인해 망할 것이지만,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며, 마지막 심판 날에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정직한 자로만 살자. 모든 악을 멀리하자. 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을 두려워하지 말자.
    [30절]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본문은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사는 자를 가리킨다. 신약 성도도 주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이다. ‘이동하다’는 원어(무트 טוּמ)는 ‘흔들리다, 요동하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있지만, 의인은 영영히 요동하지 않는다. 본장 25절에서도,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의인의 요동치 않음을 증거한다. 시편 125편의 저자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고 고백했다(시 125: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썼다(고전 1:8). 또 그는 빌립보교회에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썼다(빌 1:6).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5:4).
    본문은 “[그러나]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며 원래 의인들의 거주지로 창조되었다. 악인들이 현재 살고 있지만 그들은 땅에 거주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며 어느 날 땅에서 제거될 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고 말했다(시 37:22). 솔로몬은 잠언 2:21-22에서도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으로만 살자. 또 의인이 땅에서 결코 요동치 않고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을 알고 세상의 환난을 두려워 말자.
    [31절]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본문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낸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게 사는 자의 입에서는 지혜의 말이 나온다. 그것은 그 영혼이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신약 성도는 거룩하게 변화된 새 성향을 가진 자이다. 에스겔 36:26에서, 하나님께서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신약 시대에 성취되었다(딛 3:4-7).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 12:34).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다(약 3:11). 성도의 변화된 마음에서 지혜의 말, 곧 하나님을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찬송하는 경건한 말이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 복과 유익을 주는 의롭고 선한 말이 나오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말이 나온다.
    본문은 “[그러나]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패역한 혀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혀, 하나님의 계명을 대적하고 그의 교훈을 비방하는 혀, 다른 사람을 헐뜯고 비방하는 혀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혀이며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혀이다.
    마태복음 5:22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그는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패역한 혀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패역한 혀를 버리고 지혜로운 의인의 입을 가지자. 우리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덕스럽고 선한 말만 하자.
    [32절]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안다”고 말한다. ‘기쁘게 할 것’이라는 원어(라촌 ןוֹצ)는 ‘선의(善意), 호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의인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호의적인 말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호의적인 말은, 아첨의 말이 아니고 온유하고 겸손함에서 나오는 선한 말, 너그럽고 관용하는 말, 오래 참고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는 말,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 등을 포함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우리는 남에 대해 호의적인 말을 하는 입술을 가지자.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한다”고 말하였다.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 교만한 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이다.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지 않고 불신앙적이며 불평하고 원망하며 반항하고 대적한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거칠고 난폭한 말을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시기하고 욕하며 비방하고 또 정죄하며 저주하기까지 한다. 로마서 3:13-14,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야고보서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베드로전서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우리는 악하고 패역한 입술, 곧 하나님과 사람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다른 사람을 욕하고 비방하는 악한 말을 하는 입술을 버리자. 우리는 오직 의인의 입술, 곧 호의적인 말, 선한 말, 너그럽고 관용하는 말, 긍휼히 여기는 말,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할 줄 아는 입술을 가지자.




    11장: 겸손, 의, 신중, 구제



    [1절]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시고 공평한 추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율법에 명시된 바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신명기 25:13- 15,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였다. 선지자 아모스는 그들이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자”고 말한다고 지적했다(암 8:5). 선지자 미가는 악인의 집에 있는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와 ‘부정한 저울’ ‘거짓 저울추’에 대해 언급하였다(미 6:10-11). 오늘날도 세상에는 불량 재료 사용, 원산지 속임, 가짜 상표, 허위 과장 광고 등 속여서 돈을 버는 죄악된 행위가 너무 많다.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시고 공평한 추를 기뻐하신다. 잠언 20:10, 23,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버리고 공평한 추를 사용해야 한다. 공평한 추는 정직하게, 정당하게 돈을 버는 행위를 말한다. 많은 소득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면 복이 되지 못하지만, 적은 소득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복이 된다. 그러므로 잠언 16:8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속이는 저울로 불의하게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말고, 적은 소득이라도 공평한 추로 정직하고 정당하게 돈을 벌려고 하자.
    [2절]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본문은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말한다.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잊었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며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이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며(딤전 3:6)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여섯, 일곱 가지 죄악들 중 하나이다(잠 6:16-17). 그것은 인간의 대표적인 큰 죄악이다. ‘욕’은 수치를 가리킨다. 사람이 교만하면 수치가 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기 때문이며 사람들도 그를 버리거나 따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영광보다는 수치를, 칭찬보다는 욕을 당한다.
    마귀는 교만한 천사이었다(딤전 3:6). 그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성도의 대적자이다(마 13:25, 39; 눅 22:31; 벧전 5:8). 그는 ‘마귀’ ‘사탄’ ‘온 천하를 꾀는 자’ 등의 악명을 가졌고 마침내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계 12:9; 20:10).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할 때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당을 짓고 모세를 대적하였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땅이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들을 다 삼키게 하셨다. 그 교만한 자들은 산 채로 땅 속에 묻히었다(민 16:1-3, 32-35).
    본문은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며 자신을 낮추는 자이며, 자신이 피조물이요 부족과 죄성을 가진 자임을 아는 자이다. 그는 자기 위치를 지키는 자이다. 겸손한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칭찬과 높임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언 15:3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고, 18:12도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했다. 겸손한 자는 복된 지혜자이다. 그는 결코 실패치 않고 항상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교만치 말자. 패망이 그런 자 앞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겸손한 자가 되자. 거기에 지혜가 있고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3절]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본문은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한다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이다. ‘성실’이라는 원어(툼마 ה)는 ‘온전함’이라는 뜻이다. 인도한다는 말은 어디로 인도한다는 뜻인가? 그것은 평강의 길로, 생명의 길로,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뜻일 것이다. 정직과 의와 온전함은 평강과 생명과 천국의 길이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사야 48:17-1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옛날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승천하였고(창 5:24) 또 노아는 의롭고 온전한 삶을 살다가 홍수 심판 때에 방주에서 구원을 받았다(창 6:8-9; 7:1).
    본문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한다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보그딤 םי)는 ‘배신자’라는 뜻이다. ‘패역’이라는 말(셀렙 ף)은 ‘비뚤어짐’이라는 뜻이다. 배신자는 양심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일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결국 자신을 망케 하고 만다. 성경에서도 예를 들면, 압살롬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일시적으로 왕권을 탈취했으나 결국 아버지와의 전쟁에서 죽음을 맞았고(삼하 15장, 18장), 그의 최측근 참모로 그를 도왔던 아히도벨도 결국 목매어 죽었다(삼하 17:23). 주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주를 배신한 후 자살하여 창자가 터져 죽었다(마 27:5; 행 1:18).
    우리는 정직하고 온전한 자가 되어 복된 길로만 가자. 우리는 결코 우리를 망케 만드는 사특한 자, 배신자, 패역한 자가 되지 말자.
    [4절]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본문은 재물이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다고 말한다. 재물이 평소에 유익이 많기는 하다. 돈이 있어야 음식도 옷도 사고 집도 차도 사고 문화적 혜택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재물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날 곧 재앙의 날에 무익하다.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에 걸리거나, 지진, 기근, 전쟁 등이 발생했을 때, 재물은 죽음과 지옥 형벌을 막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선지자 에스겔은,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고 말했다(겔 7:19).
    본문은 “[그러나] 의는 죽음을 면케 한다”고 말한다. ‘의리’(義理)라는 원어(체다카 ה)는 ‘의’(義)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의는 죽음을 면케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이다. 죽음과 지옥 형벌은 죄의 결과이다. 질병이나 기근이나 전쟁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지옥에 떨어지게 하지만, 의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의에 근거한 것이다. 로마서 5:18,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재물을 구하지 말고, 의를 구하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고 이제는 성실히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만 살아가자.
    [5절] 완전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그 길이 곧게 되려니와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하여 넘어지리라.
    본문은 완전한 자의 의가 그의 길을 곧게 한다고 말한다. ‘완전한 자’라는 원어(타밈 םי)는 크게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절대 완전한 사람은 없다. 성경에서 완전함이란 비교적으로 완전함을 가리킬 뿐이다. 그것은 크게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의’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완전함과 의를 요구한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이었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욥도 그러하였다. 욥기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완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디모데전서 3:2,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디도서 1:6-7,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고 . . .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우리 모두는 재림하시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나기를 힘써야 한다(벧후 3:14).
    ‘(그의 길을) 곧게 한다’는 원어(테얏쉐르 ר)는 ‘곧게 한다’는 뜻(NIV) 외에 ‘평탄케 한다’는 뜻이 있다(BDB, NASB). 그것은 장애물이 없이 평안한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뜻일 것이다. 완전한 자, 의로운 자는 그의 앞길이 평탄하며 평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본문은 그러나 악한 자는 그 악을 인해 넘어지리라고 말한다. 악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자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모든 말과 행동이 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근본적인 내용인 사랑의 원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악한 자는 그의 악을 인해 결국 넘어지고 만다. 넘어진다는 말은 실패하고 재앙과 불행을 당하고 마침내 죽는다는 것을 말한다. 죽은 후에는 지옥 형벌이 그를 기다린다.
    우리는 악을 버리고 완전한 길과 의로운 길로만 가자. 그것이 성도의 정로(正路)이다. 거기에 평안과 형통이 있고 복과 영생이 있다.
    [6절]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본문은 정직한 자가 그 의로 인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이다. 그는 의인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정직한 자는 그의 의로 인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영육의 의미를 다 포함한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과 죄, 곧 미움과 음란과 탐욕의 죄로부터의 구원과, 육신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원과,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다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보호하시고 마귀의 시험과 올무와 영육의 위험에서 건져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의롭게 행하려 했던 다윗을 사울의 칼로부터 구원해주셨다(사무엘상). 의인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다(시 1:3). 성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그를 안위하심을 믿기 때문이다(시 23:4). 하나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롬 2:7).
    본문은 “[그러나]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보그딤 םי)는 ‘배신자’라는 뜻이다. ‘자기의 악’이라는 원어(하우와 ה)는 ‘(악한) 욕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NIV). 배신자는 돈이나 세상 권세나 명예 등 세상 것에 대한 탐욕 때문에 배신한다. 그는 그의 악한 욕망에 사로잡히며 굴복된다. 주의 제자이었던 가룟 유다는 은 30개에 주를 배신하고 악한 무리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말했었다(마 26:15). 그는 돈의 욕심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악한 자, 배신자가 되지 말고 오직 정직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그것이 평안과 생명의 길이다.
    [7절]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본문은 악인이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계명을 어기며 사는 악한 자는 아무리 좋은 소망을 품어도 그 소망이 헛되게 된다. 실상, 악인의 소망이란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요, 세상적인 권세와 영광, 육신적인 쾌락 등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헛되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이다. 이 진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도서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밝히 증거하셨다. 또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하면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간다고 말했다(요일 2:15-17). 우리는 악인들이 죽을 때 그들의 소망이 끊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은 짧다. 인간은 유한하다. 인간은 죽을 때 그의 세상적 소망도 함께 끝난다. 더욱이, 악인이 하나님의 징벌로 갑자기 죽을 때 우리는 그의 소망이 끊어짐을 실감케 된다.
    본문은 또 불의의 소망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불의’라는 원어(오님 םיוֹא)는 ‘불의’(不義)보다 ‘힘’이라는 뜻이다(BDB, KB, NASB, NIV). 그것은 악인이 육신의 힘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고 소망한다는 뜻일 것이다. 악인의 소망은 힘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의 힘의 소망은 없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면 그는 병상에 눕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면 그가 누리던 세상 권세는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다. 악인의 소망은 참으로 일시적이고 헛되다.
    그러나 의인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의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천국, 영생을 소망하며, 또 땅 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일을 소원한다. 의인의 소원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잠 10:24).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인의 소망 곧 물질적, 육신적, 세상적 소망을 버리고 오직 의인의 소망을 가지자. 하나님을 소망하며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자.
    [8절]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본문은 의인이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 곧 신약적으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성경 교훈에 순종하여 의롭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것은 의인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함을 전제(前提)한 말이다. 세상에는 환난이 많고 의인도 환난을 당한다. 때때로 병에 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며 사람들의 미움과 핍박을 당하고 죽음의 위험도 당한다. 이 모든 일 배후에는 마귀의 시험이 있다.
    그러나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건지시기 때문이다. 잠언 11:6,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욥기 5:18-20,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심한 고생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셨음을 간증하였다(고후 1:8-10).
    본문은 또 악인이 와서 그를 대신한다고 말한다. 악인은 의인을 해치려고 음모를 꾸미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그 음모로부터 건져내시고 도리어 악인이 그 함정에 빠지게 하시는 것이다. 시편 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모르드개를 나무에 달아 죽이려 계획했던 악한 하만은 도리어 자신이 그 나무에 달려 죽었다(에 7:9-10). 또 다니엘을 참소하여 사자굴에 던져 넣게 했던 자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웠다(단 7:24).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이나 악인들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만 살자. 구주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9절] 사특한 자는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본문은 사특한 자가 입으로 그 이웃을 망하게 한다고 말한다. ‘사특한 자’라는 원어(카네프 ף)는 3절과 6절의 ‘사특한 자’라는 원어(보그딤 םי)(배신자)와 다르며 ‘불경건하다, 속되다’는 뜻이다(BDB, KB, NASB, NIV). 불경건한 자는 입으로 이웃을 망하게 한다. ‘망하게 한다’는 말은 ‘파괴시킨다’는 뜻이다. 불경건한 자는 악하고 거짓되게 이웃을 비난하고 중상모략함으로 이웃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신임성을 떨어뜨리고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키며 파괴시킨다. 오늘날 인터넷 ‘악플들’(악하고 거짓된 댓글들)은 이런 유의 것이다.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디도서 1:10-11,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사람의 모든 말은 심판날에 보응을 받는다(마 12:36).
    본문은 그러나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게 사는 자이다. 의인은 대체로 사물에 대한 건전한 지식을 가진다. 특히, 의인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 의인은 그 지식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 경건한 느헤미야는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이 그를 비난하며 느헤미야가 왕을 배반하고자 한다는 헛소문을 냈지만, 그는 그들에게 대꾸하지 않았고 자기 할 일에만 힘썼다. 그러나 그 대적자들의 음모는 좌절되었다.
    우리는 형제를 망케 하는 악한 말을 삼가자. 그러나 악인의 비방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10절]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본문은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형통한다는 말은 심리적으로, 가정적으로 평안하고 육신적으로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번창하고 사회적으로 승진하는 등 잘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르게 사는 자들이 잘 되면 성읍의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양심이 공의와 선과 진실을 다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불의와 악과 거짓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의인들이 잘 되면 일반 대중은 양심상 동감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양심적인 일반 대중은 의인들의 형통을 축하하고 기뻐한다. 또 의인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면 그 사회는 공의와 공평이 시행되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니 사람들은 더욱 기뻐할 것이다.
    유다 역사에 보면, 왕자들을 죽이고 왕권을 취한 악한 여자 아달랴가 6년간 통치하던 중 경건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충성된 주선으로 정통 왕자 요아스가 왕위에 올랐을 때, 온 국민은 즐거워했고 예루살렘 성이 평온하였다고 열왕기하 11:20은 기록했다. 또 에스더 시대에 악한 신하 하만이 죽임을 당하고 모르드개가 왕 앞에 높임을 받았을 때도 수산성은 즐거이 부르며 기뻐했다고 에스더 8:15는 기록했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친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남을 해롭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의인들과 약자들을 핍박한다. 패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무서운 병에 걸리든지, 세상적 지위나 신분에서도 큰 어려움을 당하고 마침내 죽는 것을 말할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악인들의 패망을 기뻐한다. 그들은 핍박에서 놓여나고 억울함이 갚음을 받고 사회에 공의가 시행됨을 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은 악인의 패망을 기뻐한다.
    우리는 악하게 행하지 말고 의인으로만 살자. 우리는 의롭고 선하게 삶으로써 사람들에게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는 자가 되자.
    [11절]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분문은 성읍이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해 진흥한다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사는 자이다. 의인은 정직한 자이다. 계명의 내용은 사랑이므로 정직한 자 곧 의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자이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으로 진흥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기도를 잘 들어주신다. 우리가 마음 속에 악을 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지만(사 59:1-3),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약 5:16).
    성읍이 진흥한다는 말은 여러 방면에서 발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속 사회가 전쟁이나 범죄가 없는 평안한 사회가 되고 또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세상 나라에는 전쟁과 전쟁 위험이 있고 각종 크고 작은 범죄가 있고 각 분야에서 불법한 일들이 있고 교육 분야에도 비정상적인 일들이 많은 실정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평안치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축복하자.
    본문은 그러나 성읍은 악한 자의 입을 인해 무너진다고 말한다. 악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없는 자다. 그의 말들이 성읍을 파괴시킨다. 불경건한 자의 입은 이웃을 망케 한다(잠 11:9). 예컨대, 이북의 거짓된 악선전이 얼마나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견해를 심어주었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했는가! 북한은 독재 정권이요 6.25 전쟁을 일으킨 자요 수많은 테러를 행한 자요 300만명의 인민을 굶어죽게 하였고 자유와 인권 존중이 없는 사회이지만, 그 사회가 이상적 사회요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미국을 남북화해의 방해꾼으로 선전하여, 우리 사회를 이념적 혼란과 멸망에 빠뜨리려 하고 있다.
    우리는 정직하고 의롭게만 살아가자. 또 우리는 우리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자. 또 우리는 악한 자들의 말을 분별하고 배격하자.
    [12절]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원문에는, “그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지혜가 없거니와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고 되어 있다. ‘지혜가 없다’(카사르 레브 ב־ר)는 원어는 ‘마음이 없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겸손의 마음, 사랑의 마음, 지혜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용서하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는데,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그런 마음이 없는 자이다. 또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제한적이며 의지력도 약하다. 그러나 이웃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 부족은 보지 못하고 남의 부족만 보는 자이며, 실상 교만하고 지혜와 생각이 없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서서 자신을 세리와 구별하며 자신의 경건과 도덕성을 감사하였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다(눅 18:9-14).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웃의 부족을 부족으로 알지 못해서가 아니고 사람이 누구나 다 부족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도 비슷한 부족이 있거나 혹은 더 큰 부족이 있음을 알 것이다. 또 현재 그에게 그런 부족이 없다 할지라도, 자신도 언젠가 그런 부족에 떨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나면, 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이웃도 자신의 부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그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의 부족을 볼 때 그를 멸시하지 말고, 잠잠하며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자.
    [13절]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본문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말한다. ‘한담한다’는 원어(라키일 לי)는 ‘중상’(中傷 slander)이라는 뜻이다(BDB). ‘중상’은 사실 무근한 말로 남을 비방하는 것이다. 두루 다니며 남을 중상하고 헐뜯는 말을 하는 자는 악한 자이며 불성실한 자이다. 남을 헐뜯는 말 하는 것 자체가 불성실한 일이며 또한 악한 일이다. 성실한 사람은 남의 집에 두루 다닐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두루 다니며 쓸데없는 말, 혹은 거짓말, 더러운 말, 부덕한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자이다(약 3:2). 사람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해야 한다(약 1:19).
    본문은, 두루 다니며 남을 중상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종종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그의 실수와 죄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의 약점일 수도 있다. 그것은 그에게 슬프고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일 수 있고, 또 그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대체로 남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남을 중상하는 자는 그가 아는 남의 비밀을 감추어 두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남을 낮추고 비난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것을 숨긴다고 말한다. 마음이 신실한 자는 믿을 만한 자, 성실한 자를 가리킨다. 마음이 신실한 자는 남의 비밀, 곧 남의 약점이나 실수, 혹은 그의 개인적 은밀한 일은 숨긴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까지도 덮는데, 하물며 남의 은밀한 일이랴. 사람이 알 권리를 주장하지만, 남의 비밀까지 다 알 권리를 가지지는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숨긴다.
    우리는 두루 다니며 남을 중상하지 말자. 우리는 결코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오직 자기 일에 성실하고 충성하자.
    [14절]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도략’(鞱略)이라는 원어(타크불로스 תוֹל)는 ‘조언’(counsel)이라는 뜻이다(BDB). 그것은 좋은 조언을 뜻한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좋은 조언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지만, 좋은 조언자가 많으면 그 국가는 평안한 길로 인도될 것이다. 좋은 조언이란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에 부합하는 조언,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조언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사회 문제에 대해 말한다면, 무엇보다 도덕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폭력과 음란과 거짓이 징벌되어야 한다.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 곳곳에서 폭력이 근절되어야 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음란의 풍조, 특히 공공연한 성매매업이 근절되어야 하고,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및 불량식품이 근절되어야 한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체제가 재확인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유와 인권 존중에 필수적이다. 자유와 인권 존중은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한 가치이다. 오늘날 흔히 평등을 말하는데, 평등은 기회의 평등을 의미해야 한다. 물질적 평등 곧 부의 평등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강제적으로 이루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의 적화(赤化)통일 계략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6.25전쟁의 원인과 그 처참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북한을 긍휼히 여기지만, 북한의 독재정권이나 인권탄압, 특히 종교자유의 탄압은 분명하게 규탄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미국과 자유 우방에 대해서는 크게 감사해야 한다. 6.25전쟁 때 그들의 많은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죽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특히 종교적 자유는 인간적 측면에서 그들의 은혜를 크게 입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경건하고 도덕적인 좋은 조언은 나라를 평안의 길로 이끈다. 나라뿐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단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좋은 조언자가 되자.
    [15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본문은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한다고 말한다. ‘타인’이라는 원어(자르 ר)는 ‘낯선 자’라는 뜻이다. 이웃이나 친구를 위한 재정 보증은 물어줄 만큼 가깝거나 물어줄 만큼 돈의 여유가 있다면 괜찮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손해를 볼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손실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물질적 손해와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된다. 낯선 자를 위한 보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잠언 22:26-27은,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고 말하였다. 또 잠언 6:1-5는,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은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다고 말한다. 평안하다는 말은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대신 물어줄 만큼 가깝거나 그를 참으로 신임하든지 또는 물어줄 만큼 돈의 여유가 있다면 보증을 서는 것이나 돈을 빌려주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재정 보증이나 돈 거래를 안 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재정 보증이나 빚 보증은 사랑의 행위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어리석은 행위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성도 간에 돈 거래가 없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형제와 이웃을 위해 구제는 해야 한다. 그러나 재정 보증을 하거나 돈을 빌려주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옳다.
    [16절]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본문은 유덕(有德)한 여자는 존영을 얻는다고 말한다. ‘유덕한’이라는 원어(켄 ן)는 ‘은혜, 덕,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사람의 덕성은 내면적, 인격적 아름다움이다. 유덕한 여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성품을 본받은 자이다. 잠언 31장은, 현숙하고 덕행 있는 여자는 외적으로 아름다운 자가 아니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했다(28-30절). 유덕한 여자는 외모, 돈, 옷, 집, 차 등 외적인 데 가치를 두지 않고 내면성 즉 경건성과 도덕성에 가치를 두는 자이다. 디모데전서 2:9-10,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유덕한 여자는 사람들 앞에서, 곧 남편과 자녀들에게서,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서 존중히 여김과 칭찬과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다.
    본문은 또한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는다고 말한다. ‘근면한’이라는 원어(아리침 םיי)는 ‘강한’(KJV), ‘난폭한’(KB, NASB), ‘무자비한’(BDB, NIV)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강한 체력과 의지력을 가지고 일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런 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심지어 싸움도 하고 간혹 난폭한 행동도 한다. 그러면 돈은 벌겠지만, 그것이 큰 가치를 가지지는 못한다. 돈은 마음의 평안, 몸의 건강, 삶의 행복, 특히 죄사함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내면성에 가치를 두고 살자. 곧 경건성과 도덕성과 인격성에 가치를 두고 살자. 여자들은 유덕한 여자가 되기를 소원하며 힘쓰자.
    [17절]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인자함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우리는 우리가 상대방의 처지에 있듯이 상대방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누가복음 6:27,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로마서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인자한 자는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자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힘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인자한 삶은 결국 자신에게 복이 된다.
    그러나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잔인함은 무정하고 무자비함이다(롬 1:31).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 잔인한 자는 양심의 가책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며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몸에 해가 된다. 특히 미움과 분노의 독한 감정은 몸에 큰 해가 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 그에게 있다. 시편 18:26,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아합과 이세벨은 순진한 백성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 증거하는 거짓 증인 둘을 세워 그를 돌에 맞아 죽게 하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으나 그들은 마침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왕상 21-22장).
    우리는 결코 악하고 잔인한 자가 되지 말자. 그것은 자신을 해롭게 할 뿐이다. 우리는 항상 선하고 인자한 자가 되자. 그것이 복된 삶이다.
    [18절]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악인의 삯은 허무하다”고 본문은 말한다. ‘삯이 허무하다’는 원어(오세 페울랏 솨케르 ר ת ה)는 ‘거짓된 일을 한다’(KJV)는 뜻이다. ‘거짓된 삯을 얻는다’고 번역되기도 한다(NASB, NIV). 거짓된 일은, 경건한 듯하나 불경건하고, 기도하지만 형식에 불과하고, 남을 축복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선을 행하는 듯하나 실상은 악을 행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의 수고는 현세적이며 육신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적이다. 그것은 죄악되다. 그것은 의롭고 선한 일 같으나 실상 그렇지 않으며 결국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헛된 일이다. 요한일서 2:16-17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나 그와 반대로, 본문은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의를 행하는 자에게 확실한 보상이 있다는 뜻이다. 성도의 의롭고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그것에 대해 갚아주시며 상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 갚으시리라.” 기도도, 용서도, 금식도 그러하다. 또 주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이 세상에서도 또 마지막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악인처럼 현세적, 육신적, 물질적 유익을 구하며 살지 말자. 그것은 다 거짓되고 헛되다. 우리는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19절]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본문은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른다”고 말한다. ‘의를 굳게 지키는 자’라는 원어(켄 체다카 ה־ן)는 ‘참된 의’라는 뜻이다(BDB). 본문은 “참된 의는 생명에 이른다”는 뜻이다. 참된 의라는 말은 거짓된 의, 외식적 의와 구별하는 개념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행하는 것이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의 요점은 사랑이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베풀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참된 의는 생명에 이른다. 율법의 원리가 그러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6-7).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의(義), 곧 믿음의 의는 신자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물론,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난다. 성도의 삶이란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롬 6:22).
    반면에,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른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죄가 악이다. 타인의 생명과 정조와 재산과 명예를 해치는 모든 행위가 악이다. 악인은 망하고 죽고 죽은 후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는 생명에 이르고 악은 사망에 이른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행하자. 사망의 길을 버리고 생명의 길을 붙들자.
    [20절]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본문은 마음이 패려한 자가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원어(익케쉬 שׁ)는 ‘패역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정상적인 마음은 양심에 거리낌없이 올바르고 선하게 행하는 것이다. 양심은 선악을 분별하고 선을 택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패역한 마음은 악하고 거짓된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패역한 자, 곧 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가진 자를 미워하신다. 잠언 6장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죄악을 열거하기를, ① 교만한 눈, ② 거짓된 혀, ③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④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⑤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⑥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⑦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등을 들었다(잠 6:16-19). 잠언 8:13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미워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의 표현이다. 온전함이라는 말은 흠과 점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을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이며 구원의 목표 곧 성화(聖化)의 목표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죄에서 구원을 받고 선한 행위의 열매로 우리의 구원을 증거하기를 원하신다. 경건과 도덕성, 즉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것은 인간다움의 중요한 내용이며 인간의 가치이다. 행위 완전하여 하나님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시 119:1).
    우리는 마음을 악하게 가지지 말자.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힘써 순종함으로써 행위의 온전함을 위해 힘쓰자.
    [21절]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은 악인이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한다고 말한다.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라는 원어(야드 레야드 ד ד)는 ‘확실히’라는 뜻이라고 본다(KB, NASB, NIV, Keil-Delitzsch). 본문은 “확실히 악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악인은 남을 해치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말로나 물질로나 폭력으로 남을 해친다.
    그러나 악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다. 그는 악인의 악행을 다 보시고 아시고 판단하신다. 그는 마침내 노하셔서 악인의 악에 대해 보응하시고 벌하실 것이다. 사랑은 결코 악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20:5,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본문은 그러나 의인의 자손들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로 살고자 힘쓰는 자이다. 의인에게도 때때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 오기도 하고 단순히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에서 항상 그를 건져주신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또 그 고난은 그를 더욱 거룩하게, 겸손하게, 믿음 있게 만든다.
    의인은 자손들도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다윗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증거했다(시 37:25).
    우리는 말로나 물질적으로나 더욱이 폭력으로나 결코 악을 행하지 말자. 우리는 성경 교훈대로 오직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22절]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본문은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외적인 아름다움의 가치와 내면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대조하여 말한 것이다. 세상은 외적인 아름다움에 큰 가치를 두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 즉 아름다운 얼굴, 고운 피부, 균형잡힌 몸매 등 외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인들은 운동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비싼 화장품을 쓰고 피부 관리를 하고 성형 수술까지도 하는 것이다.
    물론 외적 아름다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다. 사람의 본래의 모습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사라의 나이 65세 때에 아브라함이 그에게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창 12:11),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름다웠다.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도 곱고 아름다웠다(창 29:17). 경건한 욥의 딸들도 아름다웠고(욥 42:15), 믿음 있는 에스더도 용모가 곱고 아름다운 처녀이었다(에 2:7).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참 가치를 외적인 데 두지 않는다. 본문은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려 깊지 못한 여인의 외적인 아름다움이 돼지코에 단 금고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내면적, 인격적 아름다움은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도 여성들이 외모의 단장보다 염치와 정절과 선행으로, 또 온유하고 조용함으로 자신을 단장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2:9; 벧전 3:3-4).
    우리는 외적인 데 너무 마음을 쓰지 말고 내면성, 인격성, 즉 경건함과 거룩함과 선행에 마음을 쓰자. 우리는 좋은 인격자 되기를 힘쓰자.
    [23절]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소원이 오직 선하다고 말한다. ‘오직 선하다’는 말은 그의 소원하는 내용이 오직 선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오직 선하다는 뜻일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의인의 소원은 선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소원을 가진다. 또 그는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소원을 가진다. 즉 그는 부모님을 섬기며 가족들을 돌아보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의인의 소원은 그 내용이 선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신앙의 좋은 열매는 선행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하게 살기를 소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소원을 기쁘게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이다. 의인의 소원은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것은 선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앞부분과 대조를 이룬다. 소망은 소원과 비슷한 뜻이다. 악인의 소망은 그 내용이 악할 뿐 아니라 그 결과도 나쁘다. 악인은 이기적이고 남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며 그의 영광을 가린다. 아합의 욕심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이었다. 가룟 유다의 소원은 은 30이었다. 헤롯의 소망은 세상 권력과 명예, 또 물질적 부귀와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죄악된, 세상적, 물질적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도 복된 선한 소원을 가지자.
    [24-25절]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본문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자가 있고,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본문은 구제를 권장한다. 율법은 구제를 교훈한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 .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0-11).
    구제는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이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또 구제는 하늘에 저축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풍성한 헌금을 하라고 교훈한다.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구제 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사람이 헌금이나 구제를 많이 하면 가난하게 되는가? 아니다. 본문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자가 있고,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되는 자가 있다고 말하며 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지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구제에 대해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는 약속이 있다(신 15:10).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풍성한 물질적 복을 약속하셨다(말 3:9-10). 사도 바울도 구제헌금에 대해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증거하였다(고후 9:7-8, 10).
    우리는 헌금이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헌금에 힘쓰자. 또 헌금과 구제는 도리어 자신을 풍족케 하고 윤택케 하는 것임을 알자.
    [26절]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본문은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에 대해 말한다. 곡식을 내지 않으면 이웃이 굶게 되고 죽게 된다. 곡식을 내지 않는 것은 자기 배만 위하는, 즉 자기 생명, 자기 건강, 자기 행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일이다. 그것은 남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행동, 곧 사랑 없는 행동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며 서로 의지하고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만일 사람들이 남을 위하는 물건을 만들지 않거나 그것을 시장에 팔려고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장 매우 불편한 생활을 할 것이다. 오늘날 시장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심령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본문은 “곡식을 내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려운 이웃에게 구제하기는커녕 자기가 가진 것을 적당하게 파는 행위도 거부하는 것은 심히 이기적 행동이며 백성들은 그런 사람에 대해 “혼자 실컷 먹고 배가 터져 죽어라”고 저주할 것이다. 그러나 곡식을 파는 자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축복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외쳤다(눅 3:11).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라고 말했다(요일 3:17).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삶을 살았다(행 2:44-45; 4:32). 야고보는, 부자들이 자기들을 위해 재물을 쌓고 추수한 품꾼들에게 삯을 주지 않아 그들로 부르짖게 만들었다고 책망하였다(약 5:1-5).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돌아보며 살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27절]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본문은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는다”고 말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죄 되는 것, 즉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말로나 물질로나 힘으로 남을 돕는 것을 가리킨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것은 선을 행하기 위해 부지런히 시간을 들이고 돈을 쓰고 땀을 흘려 수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와 사람들에게 은총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로마서 2:6-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본문은 그러나 악을 좇는 자에게는 악이 임한다고 말한다. 악이라는 원어(라아 ה)는 도덕적 악과 물질적, 환경적 악 곧 재난을 다 의미한다. 악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남에게 해를 주는 일을 가리킨다. 이런 자에게는 재난이 임할 것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잠언 14: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로마서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
    우리는 결코 악을 계획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가 되자. 또 섭리자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믿자.
    [28절]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본문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고 말한다. 돈은 인간의 삶에 필요하고 유용한 수단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돈이 있으면 좋은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옷도 사고 좋은 음식도 먹을 수 있지만,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돈은 인간의 죽음을 막고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 돈은 인간에게 죄사함과 의를 줄 수 없다. 돈은 죄인들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하지 못한다.
    돈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 돈은 성도에게 큰 시험거리와 유혹물이다. 돈은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는 일을 방해한다. 돈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해이하고 방탕하게 만든다.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성경은 돈을 의지하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디모데전서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
    본문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켜 의를 행하는 자는 푸른 나무처럼 번성할 것이다. 시편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신명기 28장의 복의 약속도 그 사실을 증거한다.
    우리는 허무한 돈, 우리를 멸망케 하는 돈을 의지하거나 사랑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여 의를 행하자.
    [29절]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본문은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고 말한다. 자기 집은 자기의 가정과 가족들을 가리킬 것이다. ‘해롭게 한다’는 원어(아카르 ר)는 ‘소란케 한다, 괴롭힌다, 근심과 고통을 준다’는 뜻이다. 자기 집을 소란케 하고 괴롭힌다는 말은 가족들에 대해 거칠게 대하고 가족을 미워하고 비인격적인 말이나 행동을 하고 구타하고 경제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등을 말할 것이다. 이것은 온유 겸손한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가족들을 평안케 하고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해야 하는, 사람의 기본적 의무와 너무 거리가 있다.
    자기 집을 괴롭히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다. 남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여 받은 것이 부도수표나 위조지폐인 것과 같다. 부부가 사랑하면서 함께 늙고 자녀들이 효도하고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를 가지는 것은 가정 행복의 요소이다. 그러나 가족들을 괴롭힌 자는 가정파탄, 곧 인간관계의 파탄이나 경제적 파탄을 경험할 것이며, 부부의 이혼이나 가족들의 뿔뿔이 흩어짐, 또 자녀들의 방탕과 부모 거역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편들에게 해당하는 교훈이지만, 아내들에게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본문은 또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들에 순종함이 없고 교만하고 강포하고 남을 미워하는 악한 자이며,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며 겸손과 온유, 사랑과 의,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이다. 미련한 자는 일시적으로 성공할지 몰라도 결국 파탄하고 말 것이다. 그는 결코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다른 이들, 특히 지혜자들의 종이 될 것이다(신 28:43-4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고 온유와 겸손, 사랑과 의와 선과 진실함으로써 자기 집을 평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하자.

    [30절]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생명나무는 생명을 주고 생명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의지하며 그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이 맺는 열매나 받는 보상은 생명나무이다. 본인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의 강건함 즉 심령의 평안과 몸의 건강을 얻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으나 의인에게는 강물 같은 평안이 있다. 또 의인에게는 몸의 건강도 보장된다. 잠언 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근심 걱정과 질병과 가난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의의 결과는 생명이다. 그것은 평안과 건강과 영생을 포함한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본문은 또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을 얻는다’는 원어는 ‘영혼들을 얻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사는 의인이 지혜자이며, 그는 영혼들을 얻을 것이다. ‘영혼들을 얻는다’는 말은 우선 지혜로운 자가 친구와 동료들을 얻는다는 뜻일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를 사랑하고 아끼고 협력할 동료들을 얻을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는 디모데(빌 2:20-22)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롬 16:3-4)나 오네시보로(딤후 1:16) 같은 동료들이 있었다. ‘영혼들을 얻는다’는 말은 또한 영혼들을 구원한다는 뜻도 가질 것이다. 지혜자들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는 자신만 생명을 누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생명의 길로 이끌 것이다(단 12:3). 의인은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와 선을 행하는 의인이 되자. 그것이 평안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그것은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이다. 


    [31절]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본문은,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로 보응하신다. 즉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 인간은 도덕적 존재이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욥기 7:17-18,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하나님의 심판은 성실하시며 한 순간도 놓침이 없으시다.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동시에 도덕세계의 이치이다.
    히브리서 12:6, 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된 표이기도 하다.
    베드로전서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다윗이 간음과 살인의 큰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는 징벌을 내리셨다. 그의 아들 암논은 이복여동생 다말을 강간하였고 그의 오빠 압살롬은 그 형 암논을 죽였고 또 후에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들었다.
    의인에게도 이런 징벌이 있다면, 하물며 악인들이 하나님께 받을 보응은 얼마나 더 무서우랴! 악인의 결국은 지옥 불못이다(계 21:8).
    우리는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말고 악을 행치 말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그것이 평안과 형통의 길이며 영생의 길이다.




    12장: 어진 여인, 지혜자의 혀, 근면



    [1절]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본문은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징계’(discipline)라는 뜻에 가깝다(BDB, NASB, NIV). 징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 곧 의(義)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죄악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권면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징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한다. 징계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지혜, 지식, 분별력, 영혼 사랑, 힘과 용기가 있는 자이며, 징계받기를 좋아하는 자도 징계의 의도와 목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해하고 겸손히 받고 참는 마음이 있는 자이다. 잠언 3:11-12,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무사르 רוּמ)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토카카스 תוֹתּ)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본문은 또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고 말한다. ‘징계’라는 원어(토카카스 תוֹתּ)는 ‘책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이것은 전반절의 ‘훈계, 징계’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다. 그는 지혜가 없는 자요 어리석은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는 일에 부족하고 죄를 버리고 멀리하는 일에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죄는 불행의 원인이며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다. 죄인은 현세에서 평강과 형통을 얻지 못하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좋아하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자. 그것은 우리를 바른 길로 가게 하며 우리에게 결국 복과 유익이 될 것이다.
    [2절]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본문은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다”고 말한다. ‘선인’(善人)은 선한 사람,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을 가리킨다. 선은 도덕적 이상이나 기준에 맞는 것이다. 선과 의는 뜻이 거의 비슷하다. 또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것도 선(good)이라고 표현한다. ‘좋은 차, 좋은 날, 보기 좋다’는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또 ‘은총’이라는 원어(라촌 ןוֹצ)는 ‘선한 뜻, 기쁘심, 호감, 은총, 사랑’ 등의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더욱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사람, 착한 사람, 좋은 사람 되기를 원하신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천국은 선한 사람, 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롬 2:7; 14:17).
    본문은 그러나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로마서 1:28-32에 보면, 추악, 악의가 가득한 자, 악독이 가득한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등이 하나님께 정죄받을 죄악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과 불의를 좇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마지막 날에도 노와 분으로 심판하실 것이다(롬 2:8).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자가 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을 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는 선한 사람이 되자.
    [3절]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하나니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사람이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악인가? 불경건이 악이다. 무신론과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것과 안식일 없이 사는 것과 우상숭배 등이 악이다. 또 부도덕이 악이다.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이 악이다. 사람은 악으로 굳게 서지 못한다. ‘굳게 서지 못한다’는 말은 안정을 얻지 못한다, 평안치 못하다는 뜻이다. 악인은 평안치 못하다. 시편 1:4-5,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건강도, 경제도, 가정도, 사회도 평안치 못하다. 악인은 질병에 걸릴 것이며 실직과 부도와 파산에 넘어질 것이며 그 사회는 전쟁도 경험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의 율법이 그것을 경고하였고,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그것을 증거하였다.
    본문은 그러나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의와 선을 행하는 자,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 뿌리가 움직인다는 표현은 뿌리가 뽑혀 나무가 죽는다는 뜻이고, 뿌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표현은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 안전하다는 뜻이다.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고 안정이 있다. 평안이라는 말 속에는 건강도, 경제적 안정과 번영도, 사회적 평안도 포함된다. 의인은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도 있고 가정적, 사회적 평안도 있다.
    인생의 성공 여부는 그가 의롭게 사는가, 악하게 사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복과 재앙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4절]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본문은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라”고 말한다. ‘어질다’는 원어(카일 ל)는 ‘힘, 능력, 덕’이라는 뜻이다. 잠언 31:10에서는 ‘현숙한 여인’이라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들은 ‘덕 있는 아내’(KJV), ‘휼륭한 아내’(NASB), ‘고상한 인격의 아내’(NIV)로 번역했다. ‘어진 여인’은 덕과 능력을 가진 여인, 즉 지혜와 총명, 사리 판단력, 근면, 성실의 덕을 가진 여인이다. 그는 돕는 자로서 아내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자 즉 좋은 아내, 훌륭한 아내, 1등 아내이다. 그는 집안일 뿐 아니라, 자녀 교육도 잘 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어진 여인, 곧 현숙한 여인은 그 남편의 면류관이다. 즉 그는 그 남편의 자랑과 기쁨이다. 잠언 31:10은 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귀하다고 표현하였다. 또 그러한 자는 온 동네의 자랑이기도 하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 성읍 백성이 다 안다고 증거하였다(룻 3:11).
    본문은 그러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한다”고 말한다. 욕을 끼친다는 말은 남편을 부끄럽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에 대해 불만하고 불평하며 남편과 다투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하며 아내는 자기 남편을 주님처럼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1:3,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에베소서 5:22-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남편으로 뼈가 썩음 같게 한다. 남편의 심적 고통이 매우 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잠언 21:9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했다.
    여성도는 자기 남편이 그의 머리임을 깨닫고 그를 존중해야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덕스럽고 유능한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한다.
    [5절]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본문은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다”고 말한다. ‘생각’이라는 원어(마카솨바 ה)는 ‘생각, 의도, 판단, 계획’이라는 뜻이다. 후반부와 비교해보면, ‘계획’이라는 뜻일 것 같다. ‘공직하다’는 말은 올바르다는 뜻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자인데, 그의 생각은 올바르고 정정당당하다. 그것은 불의하거나 악하지 않고 또 거짓되지도 않다. 그것은 십계명이나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고 성경 교훈에 어긋나지 않고 양심이나 이성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고 말한다. ‘도모’라는 원어(타크불라 ה)는 ‘계획, 방책, 조언’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잠언에서 ‘도략, 모략’으로 자주 번역되었다(11:14; 20:18; 24:6).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법을 거스르는 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인데, 그의 계획은 거짓이며 속임이라는 뜻이다. 그는 거짓으로 악을 계획하고 그것을 숨기며 또 거짓으로 악을 행하는 자이다.
    사람의 행동은 그의 생각하는 바에 따른다. 사도 바울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했고(롬 8:5-7), 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다(롬 12:2).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르게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악하고 거짓되게 살지 말고 또 그런 생각도 버리고 멀리하고, 항상 바른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올바르고 정정당당하게 살아가자.
    [6절]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어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은 생각과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악한 생각, 악한 마음, 악한 인격에서 악한 말이 나온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며 남을 미워하는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인은 사람 앞에서 그를 책망을 하면 하더라도 그의 뒤에서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은 은밀히 남을 해치며 그를 죽이려 한다. 그가 은밀히 악을 행하는 것은 그의 행동이 사람 앞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자기 양심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피를 흘리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창세기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고, 출애굽기 21장에서는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고 명령하셨다(12, 14절).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양심대로 그의 계명에 복종하며 사는 자이다. 그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뜻인가? 그가 구원하는 사람은 악인에게 위험을 당하는 순진한 자들과 악인들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들을 구원할 것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위험성을 알려줌으로써, 또는 악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 회개케 하며 또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우리는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악한 말을 하는 악인이 되지 말자. 우리는 오직 사람들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는 정직한 자가 되자.
    [7절]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본문은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된다”고 말한다. 악인들의 형통은 잠시뿐이며 길어도 이 세상에서뿐이다.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도 엎드러질 때가 있다. 악인들은 어떻게 엎드러지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환난과 재앙으로 치심으로 그렇게 된다. 그들은 원수들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거나 강도나 도적을 만나든지, 전쟁이나 기근을 당하든지, 화재 같은 대형사고나 부도를 당하거나 무서운 질병의 침입을 당하여 엎드러진다. 악인들은 엎드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망한다.
    그러나 본문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고 말한다. 의인들에게도 고난은 있다. 고난은 죄와 부족에 대한 징벌 때문에 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높으신 뜻 가운데서 오기도 한다. 고난은 유익이 많다.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고 성결하게 만들며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뜻에 절대순종하게 만든다. 고난은 성도로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한다. 의인은 그 고난을 다 이겨내며 거기에서 구원을 얻는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특히 ‘의인의 집’ 즉 의인의 자녀들은 든든히 세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적 복을 약속하셨다. 출애굽기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하였다(시 37:25). 하나님께서 의인과 그의 집을 복 주신 예는 성경과 인류 역사에 많다.
    우리는 악인의 일시적, 금세적(今世的)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또 의인이 당하는 환난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의인으로만 살아가자.
    [8절]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패려한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
    본문은 사람이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는다고 말한다. 지혜는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즉 사리에 맞고 양심에 맞게,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지혜를 어떻게 얻는가?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거슬러 부도덕하게 행하는 것, 남을 미워하고 이기적이고 음란한 것, 또 세상의 것, 육신의 것만 구하는 것, 또 게으른 것 등이 미련함이다. 예레미야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고 말씀하셨다(8:9).
    사람이 지혜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사람은 다 이성과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성적이게, 양심적이게 행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그렇게 온전하게 살지는 못해도 이성적이게, 양심적이게 행하는 자를 다 칭찬할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패려한 자는 멸시를 받는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말은 패역하다는 뜻과 같다. 그것은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생각과 판단력이 비뚤어진 것을 말한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며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마음이 패려하면 말과 행동도 악하고 비뚤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말과 행동이 경우나 사리에 맞지 않고 양심에도 어긋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이 패려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에 맞게 또 이성과 양심에 맞게 살아가자.
    [9절]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낫다고 말한다. 본문은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가 되라고 권장한다. 그는 왜 사람들에게 비천히 여김을 받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아마 자신을 높이지 않고 무슨 일이든지 직접하고 겸손하며 근면하고 그래서 사람들 보기에는 종들과 똑같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을 소유하고 있고 그에게 할 일을 지시하고 감독하고 일을 하게 하는 자이다. 그러면 그는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는 농사를 짓거나 과수원을 하거나 기타 무슨 일을 하든지 소득을 얻을 것이다. 윗사람은 부지런히 일을 시키는 자가 잘 하는 사람이다.
    본문은 그러나 스스로 높은 체하지만 음식이 핍절한 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고상한 자라고 생각하고 궂은 일이나 땀 흘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부릴 종이 없거나, 혹은 종이 있어도 부리지 않고 그에게 일을 시키거나 지시하거나 감독하지 않는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보기에 고상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의 일에 아무 진전이 없고 좋은 결과가 없고 열매나 소득이 없다.
    오늘날같이 어려운 시대에는 100만원도 못 버는 사장보다 100만원이라도 버는 직원이 낫고, 취직도 못하는 대학졸업자보다 취직이라도 하는 고등학교졸업자가 낫다. 또 손에 기름떼 묻히며 일하지만 돈을 좀 버는 기술자가,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무직원보다 낫다. 겉치레나 체면을 중시하지 말고 내면과 실속을 중시하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지 말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 관심을 두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겸손히, 부지런히, 우리의 할 일을 하는 자가 되자.
    [10절]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본문은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본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자들은 타인의 인격, 명예, 정조, 재산, 생명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짐승들의 생명까지도 돌아본다. 그들은 짐승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추위와 더위를 염려하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그것들을 학대하지 않는다.
    이것은 살생(殺生)을 금하는 사상이 아니다. 사람은 본래 채소와 과일을 먹도록 되어 있었으나 홍수심판 후 생물도 먹도록 허락되었다(창 9:3). 단지, 짐승 중에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어야 했고, 또 물고기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먹어야 했다. 또 생물을 피채 먹지는 말아야 했다(레 11장; 17장). 물론, 신약시대에는 이 법을 그대로 지키지 않고, 오직 도덕적 교훈만 참고한다.
    가축의 생명을 돌아보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심정이며 섭리이다. 율법에는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고 말했다(신 25:4). 욥은 하나님께서 까마귀 새끼가 그를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시는 자이시라고 고백했다(욥 38:41). 시편 104편은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며 바다의 생물들이 주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21, 27절). 예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셨다(마 6:26, 30).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라”고 말한다. 악인은 가축들에 대해서도 학대하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아플 때 치료해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노부모 학대, 여성 학대, 아동 학대, 외국인 노동자 학대 뿐만 아니라, 또한 동물 학대도 미워하신다.
    우리는 선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자. 다른 이의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고 어려운 자들을 배려할 줄 알며 짐승까지도 돌보는 자가 되자.
    [11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본문은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다”고 말한다.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란 직장이든지 가정이든지 자기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는 자는 소득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면 그러할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이다.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예를 들어, 농사를 지을 때,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서 적절한 비를 주시고 병충해를 막아주시면 많은 수확을 거둘 것이다. 또 사업을 할 때, 열심히 일하고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갑작스런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소득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게 되었다(창 3:19).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출 20:9). 그러므로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살전 4:11; 살후 3:10).
    본문은 그러나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 ‘방탕한 것’이라는 원어(레킴 םיי)는 ‘헛된 것들’(BDB, NASB)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사치하고 시간과 돈과 힘을 낭비하며 절제치 못하는 행동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것들을 따르는 자들은 소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사치하거나 낭비하지 말고 절제 있게 살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자가 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죄짓지 말고 일하면서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수고의 대가를 누리자.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본문은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악한 자들은 불의의 이익 혹은 ‘악한 자들의 그물’(KJV) 혹은 ‘악한 자들의 탈취물’ (NASB, NIV)을 탐한다. 불의의 이익이란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악한 일을 하여 쉽게 돈을 버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사기를 쳐서 돈을 벌거나 도적이나 강도짓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이 그러하다. 악한 자들은 그런 불의의 이익을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소원하고 사모하며 자기도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사도 바울은 장로와 집사의 자격을 논하면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함’을 그 중 한가지로 꼽았다(딛 1:7; 딤전 3:8). 우리는 땀 흘려 성실하게 일함으로 얻는 의롭고 정당한 이익을 구해야 한다. 시편 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잠언 31:27, “[현숙한 여인은]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에베소서 4: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본문은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한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려고 애쓰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의인의 뿌리’란 의인의 경건과 의를 가리킬 것이다. 의인들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할 것이다. 경건과 의는 성도의 생명이며 성도가 경건과 의 가운데서 일하며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수고의 대가를 누리게 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결코 불의의 이나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자. 우리는 경건과 의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일함으로써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누리자.
    [13절]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본문은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린다”고 말한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주 예수께서,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악인은 말로 범죄한다. 그에게서는 독한 비난과 저주, 미움의 말, 거짓말, 거짓 소문 퍼뜨림, 이간질 등이 나온다. 그러나 악인은 그 입술의 허물로 인해 그물에 걸린다. 그는 자기의 말 때문에 낭패하고 곤란을 당하고 죽음과 멸망을 초래한다. 주께서는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7). 그러므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했다(약 1:19).
    본문은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의인에게도 환난은 있지만 그는 그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악한 마음과 악한 말을 버리고 오직 의와 선과 사랑만 품고 살자. 또 환난을 당할 때 염려치 말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성찰하여 회개할 바를 회개하며 오직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14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본문은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福祿)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고 말한다. 복록에 족하다는 말은 복으로 만족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과 행위는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마태복음 12:34-35,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선한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온다. 시편 35:13,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마태복음 10:12-1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사람은 그 손의 행한 대로 받는다. 선한 행위는 남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에게도 복이 된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갈라디아서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악간의 행위에 대해 공의로 보응하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로마서 2: 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의롭고 선한 자가 되어 의롭고 선한 말만 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만 하자. 그것은 남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복되다.
    [15절]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위가 바르지 않지만, 그가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이다.
    완고함과 확신은 다르다. 완고함은 인간적, 주관적 생각에 근거한 무지하고 교만한 고집이지만,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근거한 확고한 신념이다. 우리는 완고함 곧 무지하고 교만한 고집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기 주관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대한 확신은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애매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그 뜻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며 외로운 길이며 세상의 비난을 받는 길이다. 그러나 노아나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는 그 외로운 길을 갔고 다니엘과 사도 바울도 그 고난의 길을 갔다. 옛날부터 세상은 넓은 길을 좋아했으며 오늘날 교회들 안에도 교리적, 윤리적 오류를 포용하는 무분별한 포용주의와 연합운동의 세력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며 좁은 길을 가야 한다.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는다”고 말한다. 권고는 조언을 가리킨다. 조언에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조언이 있고, 인간적 조언이 있다. 성경적 조언은 유익하고 건설적이다. 그것은 의와 선을 이룬다. 그러나 인간적 조언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기회주의적이고 악한 것이며 결국 사람을 실패케 한다. 지혜로운 자가 조언을 듣는다는 것은 성경적 조언을 듣는다는 뜻이다. 겸손하고 지혜 있는 자만이 성경적 조언을 잘 들을 것이다.
    우리는 무지하고 교만한 고집을 버리자. 우리는 성경적 조언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그 뜻대로 좁은 길, 고난의 길이라도 걷자.
    [16절]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낸다”고 말한다. 사람이 분노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의한 일을 볼 때 정당한 분노가 생긴다. 또 물질적 손실이든지 부당한 비난이나 명예훼손이든지 간에 남에게 손해를 당했을 때 또는 자존심이 몹시 상할 때 보통 분노한다.
    사람이 분노를 당장 나타내는 것은 왜 잘못인가? 그것은 상대방의 비난이 옳은데도 자신이 잘못 판단하여 급하게 화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의 분노가 지나쳐 입에서 욕이나 저주 같은 말의 실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성급한 분노나 말의 실수는 죄를 짓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화가 날 때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며 그런 인격 훈련이 필요하다. 야고보서 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본문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고 말한다. ‘참는다’는 원어(카사 ה)는 ‘감춘다’는 뜻이다. ‘수욕을 참는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상황에서도 금방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좀더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후에 화를 내어도 늦지 않을 것이며 그런 후에 화를 내는 것이 실수 방지를 위해 더 안전할 것이다. 또 생각해보니 자신이 잘못해서 당한 수욕이라면 달게 받고 반성하고 고치면 될 것이고,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당한 수욕이라면 후에 가라앉은 감정과 마음으로 상대에게 충고하면 될 것이다. 또 우리가 다 부족과 실수가 많으므로 상대를 불쌍히 여길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지나치게 반응하여 실수하거나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처럼 분노를 당장에 내지 말자. 우리는 수욕을 참고 좀더 생각하고 판단한 후에 적절하게, 지혜롭고 덕스럽게 처신하자.
    [17절]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
    본문은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진실을 말하는 자여야 한다. 특히 우리는 주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낸다. 그는 옳은 것을 말한다. 진실과 의는 함께 간다. 옳은 것은 참된 것이며 불의한 것은 거짓된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다 옳다. 사람이 진리를 말한다면, 하나님의 법이 옳다는 것과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과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말한다면, 옳은 것을 말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법의 의를 나타낼 것이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낼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한다”고 말한다. 거짓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은 마귀의 죄악이다. 예수께서는 마귀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또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갈 만큼 거짓말은 큰 죄악이다(계 21:8).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한다. 궤휼은 거짓을 뜻한다. 거짓 증인은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증거하며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증거한다. 그는 의와 선을 불의와 악이라고 증거하며 불의와 악을 의와 선이라고 증거한다. 진실과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세계의 덕목이지만, 거짓과 불의는 마귀의 속성이며 마귀 왕국의 악이다. 거짓과 거짓말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진리와 진실만 말하는 자가 되고, 의만 나타내는 자가 되자. 우리는 결코 거짓 증인이 되지 말고,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자.
    [18절]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본문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한다”고 말한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인격의 표현이다. 주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그러므로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 그는 온전한 자이다(약 3:2). 그런데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다윗은 자주 악인의 말을 칼에 비유하였다. 시편 55:21,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편 57:4,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편 64:3, “저희가 칼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사람은 잘못된 판단이나 미움에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하는 말을 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했고(엡 4:31), 골로새서에서도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을 벗어버리라고 하였다(골 3:8). 사도 베드로도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했다(벧전 2:1).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씀한다. ‘양약’이라는 원어(마르페 א)는 ‘치료’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지혜로운 자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물론 지혜자도 때로는 책망의 말도 한다. 그러나 참된 충고는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며, 사랑에서 나온 책망은 상대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잠언 27:5-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우리는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남에게 치료와 유익을 주는 말을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19절]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본문은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된다”고 말한다. 진실한 입술은 진리를 말하는 입술,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입술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진실을 말하는 자, 진리를 말하는 자를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러하였다. 그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라고 했었고(왕상 18:22), 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고 부르짖었었다(왕상 19:10). 미가야도 그러하였다. 그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다르게 홀로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말하였다(왕상 22:13-14). 사도 바울도 외로운 싸움을 하였었다. 그는 말하기를,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했고(딤후 1:15), 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다”고 말했다(딤후 4:16).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난 오늘날 우리는 엘리야, 미가야, 바울의 말들이 진실했음을 알고 그들의 말과 행위를 본받으려 한다.
    본문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거짓혀는 속이는 혀, 사실이 아닌 말을 하는 혀, 사실을 왜곡시키는 말을 하는 혀이다. 말쟁이, 아첨꾼의 혀가 그런 혀이다. 그런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속아넘어가는 동안뿐이라는 뜻이다. 그 동안만 사람들은 그를 믿고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체가 드러나면, 즉 그의 거짓과 허풍, 속임수와 위선이 드러나면,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며 다 그를 떠나갈 것이다.
    우리는 말쟁이나 아첨꾼처럼 거짓말을 하지 말자.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도, 거짓말에 현혹되지도 말자. 우리는 오직 진실한 말만 하자.
    [20절]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고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
    본문은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궤휼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양심이 있기 때문에 악을 꾀할 때, 악을 계획하고 도모할 때 거짓말과 속임을 사용한다. 그는 악하지 않은 듯하게 악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범죄케 했던 뱀의 모습이다. 그는 하와에게 “너희가 [선악과 열매를 따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었다(창 3:4).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했을 때도 그들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말하는 거짓 증인을 세웠었다(왕상 21:10). 로마서 3:13-14는 “저희[악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박윤선 목사는 “거짓은 악의 엄호자요 온상이다”라고 말했다.
    본문은 그러나 “화평을 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다”고 말한다. 진실과 선과 화평은 같이 간다. 그것들은 동류이다. 또 거기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했고(롬 14:17), 또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했다(갈 5:22-23).
    그러나 남을 속이고 해치는 자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로마서 3:16-17, “파멸과 고생이 그[악인의]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우리는 악과 거짓을 버리자. 그것은 마귀의 자녀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오직 선과 화평을 구하자. 거기에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도 있다.
    [21절]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본문은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 곧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다. 본문은 그런 의인에게 아무 재앙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의인에게도 고난은 있다. 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 있다. 다윗은 범죄한 이후 여러 가지 징계의 고난을 당했다.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했다. 또 욥의 고난 같은 신앙인격 훈련의 고난도 있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의인의 고난은 실상 재앙이 아니다. 의인의 고난은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에서 그를 건져주신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91: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 또 고난을 포함하여 성도의 당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유익을 이룬다(롬 8:28).
    순교는 가장 높은 차원의 고난이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재앙이나 징벌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다가 죽는 영광스런 죽음이다.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9).
    본문은 그러나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고 말한다.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들에게 기근과 가난, 전쟁과 열방으로의 흩어짐, 온갖 질병 등의 재앙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그것은 지옥에서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결코 악하게 살지 말고 오직 의롭게만 살자. 우리는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믿자.
    [22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본문은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거짓말은 마귀적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속여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었다. 이단들과 이방 종교의 지도자들은 다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열왕기상 22: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마태복음 24:11, (말세의 한 징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잠언 6장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를 증거하면서 그 중에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포함하였다(잠 6:16-19). 또 성경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며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증거하였다(계 21:8, 27; 22:15).
    본문은 그러나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며, 그의 모든 말씀은 진실한 말씀 곧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 안에서, 진리대로 행하고 진실하게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라”고 말씀하셨고(슥 8:16),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5).
    우리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모든 거짓을 버리고 또 거짓된 말들을 멀리하며,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23절]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본문은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둔다”고 말한다. 슬기로운 자는 많이 알아도 아는 척하지 않고 그 지식을 감추어 둔다. 왜냐하면 그는 겸손하고 선하며 지식의 참 용도를 알고 있고, 또 사람의 지식이란 보잘것없는 것이며 작은 지식도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는 상대가 자기보다 더 잘 알 수도 있고 또는 자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다. 지식은 물론 가르치는 경우에는 가르쳐야 하지만, 아무 때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할 때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많이 알아도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그 지식을 감추어 두는 것이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고전 8:1)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는 것이다(고전 13:4).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것이란 바른 지식이 아닌, 잘못된 지식이나 잘못된 생각과 판단과 느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 잠언의 다른 구절들도 이와 비슷하게 말한다. 잠언 13:16,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미련한 자는 왜 미련한 것을 전파하는가? 왜냐하면 그는 무지하고 교만하고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미련한 자는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자기만 미련할 뿐 아니라, 미련한 것을 전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미련하게 만든다. 또 그는 교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려 한다. 그것은 사랑의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뽐내거나 미련한 것을 전파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의 지식을 감추고 꼭 필요한 때 그것을 쓰는 지혜자가 되자.
    [24절]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본문은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고 말한다. 일은 보통 손으로 한다. 농사도 목축도 건축도 가사도 사무 일도 다 손으로 한다. 사람은 자기의 하는 일에 근면하고 충실해야 한다. 손이 부지런한 사람은 많은 소득을 얻을 것이다. 한 시간에 물건을 열 개 만드는 사람보다 열세 개 만드는 사람은 여덟 시간이면 스물네 개나 더 만들며 그러면 수입도 그만큼 늘 것이다. 부지런한 학생은 성적이 올라 좋은 학교에 진학할 것이며, 부지런한 직장인은 점점 승진하여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신앙인격도 비슷하다. 더 많은 성경 읽기와 배우기, 기도, 성도들 간의 교제, 봉사 등을 통해 부지런히 자신을 단련시킨 자는 지식과 인격이 많이 성장하여 교회의 중요한 책임을 맡을 직분자가 될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는다”고 말한다. 자기 일에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른 자는 그 일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좋은 열매를 얻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8:9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한다. 그런 자는 남의 밑에서 부림을 받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은 그런 자는 그 부리는 자에게 기쁨이 되지 못하고 괴로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잠 10:26).
    우리는 범사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 직업이나 가정의 일에도, 신앙생활에도 그러하자.
    [25절]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본문은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한다”고 말한다. ‘번뇌케 한다’는 원어(솨카 ה의 사역형)는 ‘침체시키다. 풀이 죽게 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마음은 약해서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있으면 마음이 침체되고 풀이 죽게 된다. 모세도 불평하는 백성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의 곤고함을 아뢰었고(민 11:12-15), 엘리야도 낙심하여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취하소서’ 하고 기도하였다(왕상 19:4).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염려와 생활의 염려를 조심해야 한다. 마태복음 13: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태복음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누가복음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본문은 그러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한다”고 말한다. 선한 말, 좋은 말은 믿음의 말, 위로와 격려의 말이다. 그것은 열두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과 같은 믿음의 말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말했다(민 14:8).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며(잠 3:6), 또 우리에게 주신 모든 현실이 결국 선을 이룰 것을 믿어야 한다(롬 8:28). 그것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교훈하였다(빌 4:6). 참된 믿음에서 위로와 격려의 말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항상 기뻐하자. 또 우리는 항상 믿음의 말을 하고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자.
    [26절]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기를 미혹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된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자, 곧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 말씀대로 선하게 사는 자이다.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된다’는 원어(야세르 메레에후)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그 이웃보다 낫다’(KJV),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된다’ (NASB, Langenscheidt), ‘그 이웃을 살핀다’(BDB, KB, NIV). 의인은 그 덕성이나 평안의 복에 있어서 이웃보다 낫다. 또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또 의인은 아무 친구나 사귀지 않고 이웃을 살피며 조심한다. 어느 번역도 뜻은 다 좋지만, 언어적으로 두 번째나 세 번째 번역과 해석이 타당한 것 같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들의 소행은 자기를 미혹하게 한다”고 말한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대로 행치 않는 자, 곧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성경의 교훈대로 살지 않고 자기의 욕심과 세상의 악한 풍조를 따라 사는 자들을 가리킨다. ‘자기를 미혹한다’는 원어(타세엠 ם)는 직역하면 ‘그들을 미혹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물론 그것은 문맥적으로 전반절의 ‘이웃 사람’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반절의 ‘그 이웃’이라는 원어(메레에후 וּה)는 단수명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마 악인들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들의 소행은 다른 사람들을 곁길로 가게 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더욱 곁길로 가게 만든다. 사람의 작은 악행은 그를 더 큰 악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이 되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 교훈대로 살자. 또 이웃의 인격을 잘 살펴서 사귀자.
    [27절]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
    본문은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사냥하다’는 원어(카라크 )는 ① ‘(사냥을) 시작하다’(BDB), 혹은 ② 유대인의 전통이나 아람어역에 의하면, ‘굽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게으른 자는 그 사냥한 것도 굽지 아니한다”고 번역한다(KJV, NASB, NIV). 게으른 자는 사냥하는 것도 힘들어 하고 귀찮아 할 것이며, 사냥하여 잡은 짐승, 이미 가지고 있는 음식 재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구워 먹는 일도 힘들어 하고 귀찮아 할 것이다. 잠언 26: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 성도는 그런 게으른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용감히 나아가 사냥도 하고 또 사냥한 것을 굽기도 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직장에나 집에서나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방법이다.
    본문은 그러나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라”고 말한다. 옛날 영어성경은 “부지런한 사람의 재산은 귀하니라”는 뜻으로 번역했으나(KJV), 근래의 한 영어성경은 한글 본문과 비슷하게 “사람의 귀한 재산은 부지런한 것이니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NASB). 이 번역이 적절할 것이다. 손이 부지런한 자는 물질적 유여함을 누릴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요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바이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부지런함은 물질적 유여함보다 더 귀한 재산이다. 부지런한 사람은 재산도 모을 것이지만 또 남을 다스리는 자도 될 것이다.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우리는 범사에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자. 세상 일뿐 아니라, 주의 일에도, 또 개인적 경건생활에도 그러하자. 사도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했다(롬 12:11).
    [28절]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본문은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본래, 의는 생명이며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어 죄를 범함으로써 죽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대로이었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본래부터 의로우신 하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 영원자존적(永遠自存的) 생명이 있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 그 의에 근거하여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셨다. 의의 결과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定罪)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본문은 또 “그 길에는 사망이 없다”고 말한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고 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5:55-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곧 그의 의를 믿는 믿음 안에만 거하자. 또 우리는 의와 영생의 백성으로서 죄짓지 말고 의만 행하자.





    13장: 교만, 친구, 자녀 징계



    [1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듣는다”고 말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교훈, 책망, 징계’라는 뜻을 가진다. ‘아비의 훈계’라는 말은 자녀 교육의 일차적 책임이 아버지들에게 있음을 보인다. 자녀 교육, 즉 신앙 교육뿐 아니라, 도덕 교육, 그 외의 모든 교육의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지 않고 심지어 교회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있고 특히 아버지에게 있다.
    지혜로운 아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듣는다. 사람은 미완성된 인격 같아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잠 22:6). 특히 경험 많은 경건한 어른들의 교훈은 유익이 많다. 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들이 얽혀 있고 징계의 매가 이를 멀리 쫓아낸다고 성경은 말한다(잠 22:15).
    본문은 그러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 ץ)는 ‘비웃는 자, 조롱하는 자’라는 뜻이다. 교만한 자는 남을 비웃고 조롱한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옳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책망을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특히 성경적으로 확증한 후에 책망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책망은 유익이 없고 도리어 반발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부모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말라고 교훈하였다(엡 6:4; 골 3:21).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그의 훈계를 달게 받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또 우리의 자녀들을 지혜로운 자녀로 바르게 양육하자.
    [2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본문은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린다”고 말한다. 입의 말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인격의 표현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 경우에 맞는 말, 자기 위치를 지키는 말, 이웃을 배려하는 말을 할 것이다. 이런 선한 말은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 선한 말을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며 그들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성경은 진실한 증인이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고 말했고(잠 14:25) 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말했다(잠 15:1). 또 성경은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했다(잠 25:15). 예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속담에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이 있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다. 사람은 입의 열매를 복으로 누린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궤사한 자들’이라는 원어(네페쉬 보게딤 םי שׁ)는 ‘반역자들, 배신자들의 영혼’이라는 뜻이다. 반역자들은 남을 악하게 비방하고 대적하고 불평하며 속이는 말을 잘 할 것이다. 그러나 반역자들의 영혼은 강포를 당할 것이다. 그 강포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내리시는 보응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들은 공의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반역자들은 또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저항과 반대로 인한 강포도 당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두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거둘 것이다.
    우리는 선하고 진실한 말만 하자. 우리는 우리가 말한 대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선하고 진실한 자만 되자.
    [3절]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본문은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인격은 말로 표현되기 때문에 입을 지키고 말을 조심하는 것은 죄를 안 짓는 길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했다(약 3:2). 사람은 입을 지켜야 악하고 죄악된 말, 거짓된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깨끗한 말, 덕스러운 말, 진실한 말만 할 수 있다.
    사람이 입을 지키면 그 생명을 보전할 것이다. 사람이 입을 지키면 죄를 안 짓게 되니 그 생명도 보전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므로 잠언 21:23은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고 말했다. 혀의 역할이 크고 그 열매가 중하다. 그러므로 잠언 18:21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했다.
    본문은 그러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온다”고 말한다.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는 말이 헤픈 자, 말이 많은 자, 생각 없이, 조심 없이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킬 것이다. 그런 자는 말로 실수하게 되고 범죄하게 되며 그 결과로 멸망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했다. 또 잠언 12:13은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해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많이 하려 하지 말고 또 말할 때 조심해야 하겠다. 시편 141: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또 우리는 말할 때에는 더러운 말을 버리고 선한 말,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만 하자(엡 4:29; 5:4).
    [4절]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본문은,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소원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 누구나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하고 좀더 나아지기 원하고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한다. 육신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육신적으로,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고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여유를 누리기를원하며 몸의 건강과, 자녀들의 평안과 건강과 출세, 또 사회적인 안정을 소원한다. 영적으로도, 우리는 믿음의 성장, 성화, 성령의 충만, 또 좋은 교회를 원한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이 모든 것들 중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오직 부지런한 자만 얻을 것이다. 물질적 여유도 게으른 자는 얻지 못할 것이다. 잠언 6:9-11,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몸의 건강도 게으르지 말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마음을 써서 부지런히 영양가 있는 음식물을 섭취해야 얻는다. 또 신앙의 성장도 게으른 자에게는 기대하기 어렵다. 매일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교회의 공예배회에 참석하기를 힘쓰고 교제하며 봉사할 때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우리는 영적 성장을 위해 힘써야 한다(벧후 1:5-11).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좋은 것을 기대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물질적 여유도, 몸의 건강도, 신앙의 성장도 이치가 비슷하다.
    [5절]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 이르느니라.
    본문은 의인이 거짓말을 미워한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한다. 왜 그런가? 거짓말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모든 좋은 관계를 하루아침에 깨뜨리는 참으로 나쁜 악이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다(출 34:6; 사 65 :16). 둘째, 마귀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셋째,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신다(시 5:4-6; 잠 6:16-19). 넷째, 거짓말은 십계명의 제9계명에 명백히 정죄된 죄악이다. 다섯째, 거짓말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악이다(시 15:2; 계 21:27; 22:15). 여섯째, 거짓말은 지옥 갈 만한 큰 죄악이다(계 21:8).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살기를 원하는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는 자이다. ‘행위가 흉악하다’는 원어(바아쉬 שׁאַ)는 ‘싫어할 만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악인을 다 싫어한다. 악인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만하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불쾌한 냄새를 낸다. 성경은 악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말한다(롬 3:13). 악인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남을 암시한다. 또 본문은 악인은 부끄러운 데 이른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성경은 수치에 대해 많이 말한다(보쉬 שׁוֹבּ 110회, 보쉣 תבּ 29회, 켈림마 ה 30회, 칼론 ןוֹל 17회).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야지 다른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을 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싫어함을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악인같이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인답게 살자. 모든 거짓말을 미워하자.
    [6절] 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하느니라.
    본문은 “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이다. ‘정직하다’는 원어(탐 ם)는 ‘온전하다, 흠이나 책망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의는 흠이나 책망할 것이 없이 온전한 자를 보호한다.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는가?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즉 질병이나 경제적 파탄이나 기타 불행한 일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가 보호한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시편 91:3, 10은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도 환난과 어려운 일들이 오나 그는 그 환난에서 실패치 않는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그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마태복음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또 그러한 사람은 환난 중에도 결코 낙심하거나 변절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극심한 고난 중에 고백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억눌림]을 당하여도 싸이지[눌리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고후 4:8-9).
    본문은 그러나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그의 계명을 거역하는 것이 악이다. 죄인은 이런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죄인이 멸망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행하는 악 때문이다. 죄악이 그를 패망케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함으로써 의롭고 정직하고 온전하게만 살자. 그것이 복되고 승리하는 길이다.
    [7절]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 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본문은 두 가지 뜻으로 번역된다. 옛날 영어성경은 “자신을 부하게 만들어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들어도 크게 부요한 자가 있느니라”라고 번역했다(KJV, BDB, JFB주석). 그러면 이것은 이기적이지 말고 구제에 힘쓰라는 교훈이다. 잠언 11:24-25도 비슷한 말씀이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이기적이게 움켜쥐고 살면 가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제와 선행을 힘쓰면 물질적 여유를 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부요했으나 실상 영적으로 가난했고 서머나 교회는 반대로 외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했으나 영적으로는 부요했다(계 2-3장).
    본문은 또한 한글개역과 같이 번역되기도 한다(NASB, NIV).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그러면 이것은 허영과 외식을 경계한 말씀이다. 사람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부한 체하는 사람은 허영심, 명예심이 있는 자이다. 그러나 재물이 많이 있으면서도 가난한 체하는 자는 겸손한 자일 것이다. 물론 지나치면 인색한 자가 되겠지만. 성경은 외식과 허영을 경계한다: 구제나 기도할 때 외식하지 말라(마 6:1-2, 5).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빌 2:3).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구제와 선행에 힘쓰자. 또 남에게 보이려고 또 헛된 세상 영광을 위해 외식과 허영으로 살지 말자.
    [8절]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본문은 “사람의 재물이 그 생명을 속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재물은 유익한 점이 많다. 돈이 있으면 필요한 좋은 것들을 살 수 있다. 또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재물을 속전(贖錢) 즉 몸값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해적들에게 납치된 자들이 몸값을 주고 풀려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재물은 위험성도 있다. 재물이 있으면 사람은 교만하고 방탕하기 쉽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또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딤전 6:9-10).
    본문은 그러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 돈의 여유가 없으면 꼭 필요할 때 쓸 수 없어서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에도 다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가난이 유익한 점도 있다. 사람이 가난하면 교만하거나 방탕에 떨어질 가능성이 적다. 또 가난하면 도적이나 강도의 위험이 적고 협박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가난한 자는 그런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 그러므로 가난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난은 부요보다 장점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요하든지 가난하든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자(딤전 6:7-8). 우리는 특히 우리 속에도 남아 있는 사치와 탐심과 허영의 성질들을 경계하자. 그것들은 신자를 실족케 하는 것들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심을 믿고(시 23:1)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등 내일 일들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만 구하며 믿음과 순종으로만 살자(마 6:31-33).
    [9절]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빛 혹은 등불은, 진리의 지식과 도덕성(의, 선, 진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또한 기쁨, 평안, 형통 등 행복을 가리키기도 한다. 본문은 후자의 뜻에 적절해 보이지만, 전자의 뜻에도 맞다.
    의인은 진리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환하게 빛난다. 의인은 돋는 해이신(눅 1:78-79) 그리스도의 진리와 의를 받은 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온 자들이다(요일 1:5-7; 2:9-10).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나 악인은 어두움에 사는 자이며 자신이 가진 양심의 등불조차도 꺼지는 자이다.
    의인은 또한 기쁨, 평안, 형통 등 행복에 있어서도 환하게 빛난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이 가진, 현재 누리는 기쁨, 평안, 형통 등의 행복조차도 조만간 잃게 될 것이다. 그는 슬픔과 불안과 낭패 등 불행을 당할 것이다. 잠언 4:18-19,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기 11: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욥기 18:5-6,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잠언 20:20,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잠언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의인은 행복하고 악인은 불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지식과 도덕성 곧 의와 선과 진실을 가진 의인으로만 살자. 또 의인의 기쁨과 평안과 형통 등의 행복을 누리자.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본문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오직 교만으로 말미암아 다툼이 생긴다”(KJV)이다. ‘교만’이라는 원어(자돈 ןוֹד)는 ‘오만함, 거만함, 건방짐’이라는 뜻이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는 마음이며,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일종의 욕심이다. 잠언 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탐한다’는 원어(레카브 ב)는 ‘교만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교만하고 명예에 대한 욕심이 있으면 다툼이 일어난다. 잠언 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야고보서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각종 욕심이 싸움의 원인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알고 상대방의 부족도 이해하려 한다. 또 그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욕심, 즉 칭찬과 높임을 받으려는 욕심을 버리거나 매우 자제한다. 그런 자들과는 다툼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빌 2:2-3).
    본문은 “[그러나]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옳은 권면, 경건하고 도덕적인 권면을 듣지 않지만, 겸손한 자는 옳은 권면을 듣는다. 권면을 듣는 자 곧 권면을 들어 무엇이든지 잘못된 점을 고치려는 자가 지혜가 있다. 만일 그 권면이 자신에게 해당하면 고치면 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하지 않으면 앞으로 참고하면 될 것이며, 또 필요하고 기회가 된다면, 정중히, 겸손히 해명하면 될 것이다.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는 자이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으로 자신을 단장하자. 또 옳은 권면 즉 경건하고 도덕적인 권면을 잘 듣는 자가 되자.
    [11절]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본문은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간다”고 말한다. ‘망령되이’라는 원어(메헤벨 ל)는 ‘헛되이’라는 뜻이다. 헛되이 얻은 재물이라는 말은 성실하게 수고하여 번 돈이 아니고 게으르게 혹은 부도덕하게 번 돈을 가리킬 것이다. 불법이나 사기나 강탈로 얻은 재물이 그런 돈이다. 복권 당첨 같은 투기성 소득이나, 쉽게 받은 유산도 좋지 않다.
    그런 돈은 줄어간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돈은 그에게 복이 되지 못한다. 그런 소득은 예상치 못하는 지출이 많다. 그것은 사람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 불의의 소득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된다”고 말씀하셨고(학 1:6) 또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고 말씀하셨다(학 1:9). 또 쉽게 돈을 버는 자는 재물 귀한 줄 모르고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돈을 쉽게 버는 자는 돈을 쉽게 쓴다.
    본문은 그러나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간다”고 말한다. 돈은 수고하여 버는 것이 정상이다. 성실히 일하며 노동하며 수고하여 버는 돈이 바른 돈이며 복된 돈이다. 농사를 짓든지, 장사를 하든지, 사무실에서 일하든지, 이치는 똑같다. 잠언은 손이 부지런한 자가 부하게 되며 부지런한 자가 풍족함을 얻는다고 말했다(잠 10:4; 13:4; 21:5).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간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수고하며 살며 또 조금씩 저축하여 여유를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복 주실 것이다. 또 그는 재물이 귀한 줄 알아 절약하며 살 것이다. 근검절약하는 자만 저축하며 살 수 있다.
    우리는 쉽게 돈을 벌려는 생각을 버리고 게으르게 음식을 먹으려 하지 말자. 우리는 성실히 일하며 돈을 벌고 근검절약하며 저축도 하자.
    [12절]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본문은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부족할 때 그것을 바라며 소원한다. 그러나 그것이 더디 이루게 되면 마음이 상한다. 청년들이 고시 준비나 취직 시험 준비를 하는 동안 마음이 힘들고 지친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를 원하는 젊은이의 마음도 그러하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일들을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까지는 마음을 조린다. 시편 42편의 저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였다(시 42:1-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도 비슷하다.
    본문은 그러나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고 말한다. 취직을 소원하는 자가 취직하면 ‘살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결혼을 소원하는 자가 결혼하면 기뻐하고 행복해 할 것이다. 성도가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기쁨과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가 고대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면, 우리가 사모하던 천국에 들어가면, 우리는 큰 기쁨과 힘을 얻을 것이다. 성도의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다. 로마서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반드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하나님을 굳게 소망하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라고 교훈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동료들도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둔다고 고백하였다(딤전 4:7-10). 하나님만 굳게 의지하자.
    [13절]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본문은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말씀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가 불경건의 죄악이며 다른 죄악들의 뿌리가 된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적 설교를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 대신에 자기 자신이나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룬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실패와 불행과 멸망을 포함한다. 물을 떠난 고기가 죽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말씀, 의의 말씀, 곧 의(義)를 떠나면, 죄 가운데 살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다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본문은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다. 그 요점은 십계명이다. 그것은 인생의 삶의 지침이요 기준이다. 계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피조물로 인정하는 것이요 또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것이 당연한 의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계명을 두려워하는 증거는 성경 읽기와 설교 듣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들은 말씀을 힘써 순종하는 것이다.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을 것이다. 잠언 16: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순종은 인간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를 더욱 사랑하시고 상을 주신다. 그는 평강, 건강, 물질적 여유, 존귀, 마침내 영생 등 모든 좋은 것을 상으로 주신다. 경건했던 요셉과 다니엘은 그런 상들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을 멸시하지 말고 두려워하고 힘써 배우며 순종하자. 그것이 평강의 길, 복된 길, 영생의 길임을 알자.
    [14절]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 사람으로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느니라.
    본문은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이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 곧 지혜 있는 자가 가진 바른 깨달음과 지혜와 지식에서 나온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생명의 샘’이라는 말은 생명수를 길을 수 있는 샘, 곧 생명을 주는 샘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살리는 교훈이라는 뜻이다.
    불경건하고 악하고 거짓된 말은 어리석은 말이며 사람을 죽이는 말이다. 에덴 동산에서 뱀의 말이 그러하였다. 그것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케 만들고 죽게 하였다. 그러나 지혜자의 교훈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교훈이며 그것은 듣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버리며 의를 행케 함으로써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의인은 지혜자의 교훈을 듣고 생명을 얻는다. 잠언 4:13,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잠언 4:20-22,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잠언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생명은 평안과 건강을 포함한다.
    본문은 지혜자의 교훈이 “사람으로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죄는 사망의 그물 곧 사람을 걸어 죽게 하는 그물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사망의 그물에 걸린 자요 회개치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혜자의 교훈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교훈이므로 그것이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지혜자가 되고, 어리석은 자의 조언을 듣지 말고 지혜자의 교훈만 받고, 또 자녀에게든지 교우에게든지 남을 지혜로 교훈하는 자가 되자.
    [15절]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본문은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푼다”고 말한다. ‘지혜’라는 원어(세켈 ל)는 ‘명철’ 혹은 ‘깨달음’(understanding)(KJV, NASB, NIV)이라는 뜻이다. 선한 깨달음은 남을 이해하고 남을 유익케 하는 마음이다. 악한 지혜, 뱀과 같이 간교한 지혜는 남을 해치는 지혜이지만, 선한 지혜와 깨달음은 남에게 은혜와 호의와 사랑을 베푼다.
    본문은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다”고 말한다. ‘궤사한 자’라는 원어(보게딤 םי)는 ‘배반하는 자들, 속이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배반하는 자들은 남을 해치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궤사한 자, 배반하는 자의 길은 험하다. 그의 길은 거칠고 평탄치 않고 형통치 않다. 의인에게도 고난은 있으나, 의인의 심령에는 평안이 있고 그의 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좋은 결과가 있다. 그는 고난 중에도 인격 단련을 받고 겸손과 믿음, 의와 거룩이 배양된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실 것이다.
    레위기 2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폐병과 열병으로 치셔서 그들의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하시며, 곡식을 거두나 대적들이 와서 빼앗아 가 먹게 하시고 대적에게 패하게 하시고,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땅으로 놋과 같게 하셔서 흉년이 들게 하시며, 들짐승이 어린 자녀들을 움켜 가게 하시고, 칼 곧 전쟁을 보내시고 무서운 전염병을 보내시고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셔서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줄 것이며 먹어도 배부르지 않게 하실 것이며, 그들을 온 세계에 흩으시며 칼로 치셔서 그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성읍들을 황폐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레 26:16-17, 19, 22, 25-26, 33). 악인들의 길은 참으로 험할 것이다.
    우리는 선한 지혜를 가져서 이웃에게 은혜와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자.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참된 성도들을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말자.
    [16절]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본문은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한다”고 말한다. 지혜와 지식은 같이 간다. 지혜와 지식이 같은 말은 아니지만, 그 둘은 같이 간다. 모든 지혜 있는 자는 참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사용한다. 잠언 12: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잠언 22: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지식이 무엇인가? 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된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참된 지식의 시작이요 참 지식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또 참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의 내용은 경건과 도덕성 즉 거룩과 선과 진실이다. 그것이 구원이며 구원의 열매이다.
    사람이 그 지식을 가지고 행할 때 그것이 그에게 의가 되고 거기에 평안이 있다. 그것이 사람의 행복이며 생명의 길이다. 그것이 사람의 지혜이다. 모든 지혜 있는 자는 그 길, 즉 그 지식으로 행한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미련한 것이 무엇인가? 미련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혹은 무시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 중심적이고 물질 중심적, 육체 중심적인 것이다. 그것은 무지와 불경건, 또 불결, 악, 거짓의 부도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마침내 죽고 영원한 멸망에 던지우고 만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자신의 미련한 것을 말로나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소원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17절]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본문은 “악한 사자(使者)는 재앙에 빠진다”고 말한다. ‘사자’(使者)는 ‘임무를 받아 파송된 자’이다. ‘악한 사자’는 자기 임무를 저버리거나 그 임무에 불성실한 자이다. 그는 그를 보낸 자에게 악을 행하는 자이다. 선지자 엘리사의 수종자 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이름을 팔아 악을 행하였다(왕하 5:20-24).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었던 가룟 유다는 사도의 본분을 저버리고 주님을 배신하였다(마 26:14-16).
    그러나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다. 그를 파송한 주인은 그를 벌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도 그의 악에 대해 재앙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게하시는 몸에 나병이 들었고(왕하 5:27),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매었고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마 27:3-5; 행 1:18).
    본문은 그러나 “충성된 사신(使臣)은 양약이 된다”고 말한다. ‘충성된 사신’은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자이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주인의 뜻을 따라 하란에 갔던 아브라함의 종은 충성된 사신이었다. 그는 긴 여행으로 인해 배도 고팠을 것이지만,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했었다(창 24:33). 사도 바울도 충성된 사신이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고난도 견디었고 죽을 각오도 하였다(고전 4:9-13; 고후 6:4-10; 11:23-27). 사도행전 20:24에 보면,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하였다.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된다고 본문은 말한다. 충성된 사신은 그를 보낸 자의 마음에 기쁨과 시원함과 위로를 줄 것이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것이다. 또 그 자신도 또 칭찬과 상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악한 사자가 되지 말고 충성된 사신이 되자. 우리는 성도로서 언행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또 교회 직분자로서도 임무를 다하자.
    [18절]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
    본문은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른다”고 말한다. 훈계는 교훈과 징계를 가리킨다. 훈계는 의와 평안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왜 훈계를 저버리는가? 그것은 무지와 죄성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의(義)의 가치를 알지 못하므로 훈계를 저버리거나 또는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한 풍조와 마귀의 시험에 빠져 있기 때문에 훈계를 저버릴 것이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를 것이다. 땅의 모든 풍부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신 10:14; 시 24: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 그 모든 좋은 것을 거두실 권리도 있고 그렇게 하실 것이다. 전쟁이 오고 가뭄이 오고 경기 침체가 올 때,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또 그 때 수욕도 경험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누릴 땐 존귀해 보이지만, 병에 걸렸거나 기근으로 굶주림이 심할 때나 전쟁이 나서 헐벗고 방황할 때에는, 넘치는 수욕을 경험하는 때가 될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는다”고 말한다. ‘경계’는 책망과 징계를 뜻한다. ‘경계를 지킨다’는 말은 ‘징계를 주의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교훈에 주의하고 징계를 달게 받으면, 회개에 이르고 의(義)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그가 아무리 비천해졌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존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바이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다(삼상 2:30).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고 그 말씀을 존중하자.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고 이 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힘써 지키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존중하고 그 징계를 달게 받자. 그것이 지혜이다.
    [19절]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본문은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다”고 말한다. 소원의 성취 즉 기도 제목의 응답은 의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사야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도는 들어주신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시편 145:19,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요한일서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가진 선한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의 마음은 기쁨이 넘칠 것이다. 잠언 13:12,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요한복음 16:23-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의 악행은 그의 기도의 응답을 가로막고 도리어 하나님의 미워하심과 진노와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그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니 그것이 그의 미련함이다.
    우리는 모든 불경건과 악한 마음과 언행을 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면서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고 응답받는 즐거움을 누리자.
    [20절]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한다. 교제에 있어서는 그 대상이 중요하다. 친구 관계도, 일생의 반려자를 취하는 결혼도, 또 교회 소속도 그러하다. 본문은 교제와 동행의 대상을 지혜자와 미련한 자로 구분한다. 잠언이 밝히 증거하는 대로,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이며,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거슬러 우상숭배하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본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사람은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람은 그의 친구를 보면, 그의 인품을 대개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지혜는 경건과 도덕성이며 그 결과는 평안과 형통과 행복과 영생이다. 그러나 죄는 미련함이며 그 결과는 질병과 기근과 불행과 죽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악한 교제를 경계한다. 고린도전서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성도의 첫 번째 교제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라[꼭 붙드라]고 교훈한다(신 10:20). 옛날에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창 5:21-24).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이었다(창 6:9). 욥은 고난 중에서 이전에 하나님의 우정[친밀한 교제]이 그의 장막 위에 있었던 날들을 회상하였다(욥 29:4). 누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직한 자에게 그의 친밀한 교통이 있다고 말한다(시 25:14; 잠 3:32).
    우리는 하나님과, 또 경건하고 선한 지혜자들과 교제하고 동행하고, 악한 자들과는 교제하지 말자(고후 6:14-16; 살후 3:14; 딛 3:10).
    [21절]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본문은 “재앙은 죄인을 따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증거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사람들에게 각가지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폐병, 열병, 종기, 미침, 눈멂 등 각종 질병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극심한 흉년과 굶주림을 경험할 것이다. 들짐승들이 내려와 농작물을 해칠 것이다. 그들은 이웃 나라들의 침략을 당할 것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은 무서운 질병들과, 육체적, 경제적 큰 해를 가져올 대형사고들과, 전쟁과 지진과 기근, 경제공황, 또 가정의 파탄 등의 재앙을 경험할 것이다.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은 그 대표적인 예이었다(창 6:17; 7:21-23). 소돔 고모라성의 유황불 심판도 그러하였다(창 19:24-25).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심히 음란했던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멸망을 당해야 했다(신 7:1-2). 여호와께서는 악한 유다 왕 여호람을 치셔서 고칠 수 없는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고 2년 만에 창자가 빠져나와 죽었다(대하 21:18-19). 또 교만했던 웃시야 왕은 성전에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나병 환자가 되었고 죽는 날까지 쓸쓸히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다(대하 26:19, 21).
    본문은 그러나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른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가 의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선한 보응, 즉 평안과 형통의 복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짓는 일을 가장 두려워한 요셉과 함께하셨고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고(창 39:23) 그의 가족을 구원케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했던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고(삼하 8:6), 경건했던 히스기야와 함께하셔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형통케 하셨다(왕하 18:7).
    우리는 죄를 버리고 의(義)에 길에만 서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힘써 순종하자.
    [22절]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본문은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친다”고 말한다. 선인(善人) 곧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선과 의와 사랑으로 사는 자이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며 배려하는 자이다.
    선인은 갑자기 재산을 모으지는 못해도 서서히 조금씩 정당하게 재산을 모을 것이다. 잠언 13:11,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성도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면서 돈을 벌고 하나님께 십일조 이상을 드리고 나라의 세금도 정당하게 내고 남는 것을 쓴다. 그것이 그의 정당하고 복된 수입이다. 성도의 사업에는 소위 이중장부(분식회계)나 비자금 같은 것이 없어야 한다. 성도가 이렇게 경건하고 의롭게 사업을 하면 탄탄한 기업을 이룰 것이다. 또 성도가 이렇게 번 돈과 가꾼 산업은 자자손손에게 끼칠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인다”고 말한다. 죄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행하는 자이다. 그도 재물을 벌기는 하나 불의하고 불법한 방식으로, 이기적이게 벌 것이다. 그의 모든 소득은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뇌물을 주고 받을 것이다. 그는 탈세도 할 것이다. 물론 그는 주일성수도,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이렇게 모은 재물은 자기에게나 자기의 자녀에게 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의인을 위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의 집과 땅, 그의 회사와 공장이 어느 날 의인의 것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는 그가 상속할 자녀가 없어서 다른 후계자를 둘 때, 그의 양심상 악인보다는 의인에게 자기 유산을 맡기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의인과 선인으로만 살자. 돈을 많이 벌려고만 하지 말고 적게 벌더라도 정직하게 벌자.
    [23절]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혹 불의로 인하여 가산을 탕패[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다시 번역하면, “가난한 자들의 경작할 밭에서 많은 양식이 나오나 불의 때문에 그것을 빼앗기는 일이 있느니라.”
    본문은 “가난한 자들의 경작할 밭에서 많은 양식이 나온다”고 말한다. 사람이 비록 가난할지라도 밭을 경작하면 많은 양식을 얻을 것이라는 뜻이다. 밭을 경작한다는 말은 오늘날 말로 자기의 직장과 사업에서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부지런히 자기 일을 하면 소득이 늘어나고 물질적 여유를 얻을 것이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본문은 “[그러나] 불의 때문에 그것을 빼앗기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열심히 일하여 양식이 많아진다 할지라도, 사람이 불의하면 즉 죄를 지으면 모은 물질적 유여함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의 재물을 가져가 버리실 것이다. 의는 평강의 길이며 물질적 여유를 얻는 길이고, 죄는 불행의 길이며 물질적 여유를 잃어버리는 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지런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번 돈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의는 물질적 여유를 유지하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존중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며 또 그들이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그들이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셨다고 말씀하셨다(학 1:4-6, 9).
     우리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손으로 수고하고 부지런함으로써 물질적 여유의 복을 누리자. 또 그것을 잘 유지하기 위해 항상 의를 행하자.
    [24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본문은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고 말한다. 어떤 부모는 매를 때리면 자식이 몸과 마음이 아프고 상할까봐 매를 때리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을 자식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녀의 잘못과 악행을 책망하고 징벌하지 않고 그의 인격의 결함과 부도덕함을 내버려두는 것은 장차 부모의 매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한다”고 말한다. ‘근실히 징계한다’는 원문(쉬카로 무사르 רוּמ וֹר)은 ‘훈계 혹은 징계로 일찍이 그를 찾는다’는 뜻이다. 진정한 자식 사랑은 단순히 그의 몸을 사랑함이 아니고 그의 영혼을 사랑함이어야 한다. 그의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잘 되도록, 즉 그의 인격이 바른 인격, 경건하고 선한 인격이 되도록 교훈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잘못을 행할 때 그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고 적당한 벌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자녀를 징계하되 근실히, 부지런히, 때가 늦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녀가 그 잘못을 회개하고 고쳐 좋은 인격자가 되면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며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성경은,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했고(잠 22:15), 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했다(잠 23:13-14). 또 성경은,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했다(잠 29:15).
    우리는 자녀를 매 없이 키우지 말고 근실히 징계하며 키우자. 그래야 그가 좋은 인격이 되며 복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자식 사랑이다.
    [25절]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본문은 “의인은 포식하여도[즉 배부르게 먹어도] 악인의 배는 주린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며 악인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본문에 배부르게 먹는 것과 주리는 것은 영육으로 다 해당할 것이다. 사람은 육적으로 양식이 필요하지만,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이 필요하다.
    의인은 배부르게 먹을 것이다. 시편 34: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37: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양식을 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양식을 주어 누리게도 하시고 그것을 거두기도 하신다. 잠언 10: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또한 사람이 양식을 배부르게 먹으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음식 살 돈도 넉넉하고 음식도 풍부하며 몸도 건강해 식욕이 있고 소화기능도 좋아야 한다. 사람이 아프면 식욕도 떨어지고 소화기능도 약해져 양식이 풍부해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인의 배는 주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음식이 부족할 것이며 경제 여건이 매우 나쁠 것이다. 게다가, 몸에 병까지 주시고 식욕도 거두실 것이다.
    우리는 의식주의 문제 등의 세상의 일들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믿음으로 또 선을 행하며 살아가자.

    14장: 지혜로운 여인, 분노, 구제, 의

    [1절]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여자들(카크못 나쉼 םי תוֹמ)은 그[자기] 집을 세운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여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사랑과 겸손과 인내를 실천하는 자이다. ‘세운다’는 말은 가정은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고 힘써 세워야 함을 보인다. 부부 관계의 문제, 부모 자식 관계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 문제, 경제 문제 등 어려운 문제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자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자기 가정을 반듯하게 세울 것이다.
    물론 가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야 세워진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그러나 인간편에서 가정 건립에는 부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본문은 가정이 남편의 수고만으로 잘 세워지지 않고 아내의 역할이 큼을 보인다. 다시 말해, 남편이 좀 부족해도 아내가 지혜롭게 행하여 남편의 부족을 보충하면 가정을 세울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여자는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헌다”고 말한다. 미련한 여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교훈대로 행치 않는 자이다. 그는 겸손하게 사랑과 선을 행치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그는 이해심이 부족하고 편협하며 자제심이 없고 급하다. 그는 고집스럽고 교만하다. 그는 게으르고 무절제하고 사치하고 낭비한다. 그의 언어생활은 매우 부덕하다. 그런 여자는 자기 손으로 자기의 가정을 허물며 자기에게 오는 복을 막으며 오히려 그것을 발로 찬다.
    인간의 일생은 가정을 세우는 과정과 같다. 사람이 가정을 잘 세우려면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은 곧 경건과 도덕성과 인격성이다.
    [2절]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본문은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말한다. 정직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또 양심대로 올바르게 행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기주의, 편리주의, 기회주의 , 타협주의를 버리는 것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증거라는 뜻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입법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죄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징벌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두려워하는 자이다. 참 경건과 믿음은 의로운 행위, 정직한 행위, 선한 행위, 진실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것은 노아의 삶에서 잘 나타났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의롭고 정직하고 크게 책망할 것이 없이 살았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본문은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긴다”고 말한다. 패역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불평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완악하고 고집스럽게 행한다는 뜻이다.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는 자이다. 패역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입법자요 심판자이시며 인생에게 상과 벌을 주시는 자이신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지 않고 그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의 명예를 무시하며 자기 뜻대로 살기 때문이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것을 듣는 대로 작은 칼로 그 책을 베어 화롯불에 던져서 그 모든 두루마리를 태웠다(렘 36:22-2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를 멸시하지 말자. 우리는 이기적이게, 자기 편리한 대로, 적당하게 살지 말고, 오직 성경대로 바르게 살자.
    [3절]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한다”고 말한다. ‘교만하여 매를’이라는 원어(코테르 가아와 ה ר)는 ‘교만의 매’라는 뜻이다(KJV, BDB, LXX).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교만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 겸손해진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운다. 그것이 교만이다.
    미련한 자는 입으로 매를 자청한다. 사람의 인품은 말로 표현된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말, 교만한 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말을 할 것이다. 그는 그의 말로 매를 자청한다. 그 매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벌과 재앙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질병이나 물질적 궁핍을 포함할 것이다. 미련한 자는 자기가 행한 일을 자기가 받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한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자이다. 지혜로운 자의 특징은 겸손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 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자는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자신을 보전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겸손한 인품은 그의 겸손한 말로 나타날 것이며, 그의 겸손한 말은 그를 죄로부터 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전할 것이다. 말의 의롭고 온전함이 의롭고 온전함이며, 하나님은 그런 의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우리는 교만한 말을 하여 매를 자청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겸손한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자.
    [4절]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본문은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사실이지만, 비유적인 뜻을 가질 것이다. 구유는 소의 먹이통인데, 거기에는 음식 찌꺼기가 항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며 냄새도 좀 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소에 관심이 있으시다기보다 사람에 관심이 있으시다. 고린도전서 9:9-10,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소는 교회의 목사나 전도사를 비롯하여, 찬양 지휘자, 반주자, 사무직원, 관리인, 주방 봉사자 등 교회의 여러 봉사자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여러 봉사자들이 있으면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필요한 일들도 있다. 그 중에는 여러 마음 쓰이는 일들도 있다. 어떤 봉사자들에게는 거주할 주택과 사례비도 책정될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적지 않은 재정지출도 필요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인격적 결함들도 있을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고 말한다. 소가 있으면 구유가 항상 아주 깨끗하지는 못하고 냄새도 없지 않겠지만, 소가 하는 일은 참으로 많다. 소는 논과 밭을 가는 것과 추수하기 등 농사 일에는 필수적이다. 또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에도 유용하다. 교회에 일할 일꾼이 많은 것은 유익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각각의 재능을 따라 어떤 이는 음악적 기술과 재능으로, 어떤 이는 계산적 재능으로, 어떤 이는 공예적 재능으로, 어떤 이는 사무적 재능으로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 사역에 유익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꾼들의 필요성을 인식하자. 교회의 목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의 유익만 생각하며 일하자.
    [5절]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본문은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한다”고 말한다. 증인은 보거나 들은 것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믿을 만한 증인을 가리킨다. 우리는 왜 진실한 증거를 해야 하는가? 첫째,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실한 증거를 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셋째, 그것은 교회와 사회에 결국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사회를 멸망시키지만, 진실한 증거는 영혼을 구원한다.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도 “우리는 [예수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했다(행 4:20).
    본문은 그러나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는다”고 말한다. 거짓 증인은 참된 증인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잠 8:13). 둘째, 자기 이익을 위해서이다. 셋째, 상대방을 해치기 위해서이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말하는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 죽임을 당케 하였다(왕상 21:1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였었다(마 26:59). 그러나 거짓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큰 악이다(잠 6:16-19). 또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진실한 증인이 되자. 우리는 결코 지옥 갈 죄악인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지 말자.
    [6절]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본문은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크게 여기고 남을 비웃고 경멸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도 남들이 지혜를 구하니까 자기도 지혜를 구하며 또 때때로 지혜의 가치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약 1:5), 거만한 자에게는 지혜를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거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야고보서 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거만한 자는 지혜를 얻지 못한다.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모하는 자이다.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세상 지식, 과학 지식, 돈 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지식, 인간 지식, 삶의 지식, 영적 도덕적 지식을 가리킨다. 세상 지식도 유익이 있지만, 영적 지식은 근원적 지식이며 인간이 마땅히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이다. 인생의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시작된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참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온다.
    우리는 거만을 버리고 겸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명철하자. 그래서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얻어 바르고 복된 삶을 살자.
    [7절]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본문은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에 순종치 않는 자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지혜 있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는 미련한 자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미련한 자의 입술에는 지식이 없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가 지식이 없다는 것이 그의 말로 드러난다. 여기의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아는 참 지식, 바른 지식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 예배와 찬송과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함, 인간의 행위의 법칙인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 인간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 등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러한 참 지식이 없다.
    본문은 미련한 자의 입술에 지식이 없으므로 그 앞을 떠나라고 말한다. 왜 떠나라고 하는가? 무지의 영향으로 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불경건과 죄악에 빠지며 그와 교제하는 자도 죄악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곧 멸망의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지식을 사모하자.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자. 사람들이 자기 사랑, 돈 사랑, 교만, 쾌락 사랑 등에 빠지는 고통하는 때에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서 돌아서자(딤후 3:1-5).
    [8절]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본문은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슬기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대로 사는 지혜자를 말한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길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자기의 길’이란 인생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죽어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성경에 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다가 그에게로 가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다. 인간의 삶의 가치는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며 그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26). 사도 바울은,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하였고(고후 5:9),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딛 2:14).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교훈대로 살지 않는 미련한 자들은, 자신이 의미와 가치를 두고 한 일들, 곧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신의 쾌락 등이 실상 허무한 일이기 때문에(전 1:2, 14; 요일 2:15-17), 결국 속은 것과 같다. 그의 어리석음이 그를 속였다. 그의 불경건과 부도덕, 그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세상 사랑은 결국 그를 속인 헛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받아 인생의 정로(正路)를 바로 깨닫자.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바로 알고 참되게 살자.
    [9절]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고 말한다. ‘심상(尋常)히’라는 말은 ‘보통으로, 예사로이, 대수롭지 않게’라는 뜻이다. 미련한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죄를 보통으로, 예사로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는 불경건을 큰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큰 일로 여기지 않는다. 사사 시대 말의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그러하였다. 사무엘상 2:17은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사무엘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또 미련한 자는 부도덕한 것, 즉 십계명 어기는 것을 큰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부모를 거역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음란하고 거짓말하고 물질을 탐하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다”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를 큰 문제로 여기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멀리한다. 그에게는 은혜 곧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물론 세상에 행위로 완전한 자는 하나도 없다(롬 3:11-12, 23). 그러나 사람이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받는 길이다. 예수께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고 말씀하신 것(마 13:12)은 그런 뜻일 것이다.
    우리는 죄를 보통으로, 예사로이 여기지 말고 큰 문제로, 심각한 문제로 여기자. 우리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망하는 줄 알고 죄 짓지 않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알자.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자.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느끼는 고통은 자신만 아는 것이다. 어떤 때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전혀 모른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친구나 가족에게도 그의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 일이 있다. 또 어떤 때는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하소연이라도 할 친구나 가족이나 이웃이 없다. 또 말하여 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이웃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크게 다를 것이다.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느끼는 즐거움도 비슷하다. 그가 느끼는 그 즐거움을 누가 다 알겠는가? 그가 너무 기뻐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알려주지만 그들은 그의 즐거움에 전혀 미치지 못하며 조금 알고 느낄 뿐이다.
    사람은 이처럼 서로를 다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다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시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참 사랑이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말한다.
    로마서 12:15-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빌립보서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 베드로전서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體恤)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체휼하다’는 말은 ‘같은 감정(곧 동정심[同情心])을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형제의 마음의 고락(苦樂)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 애쓰자.
    [11절]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본문은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악한 자와 정직한 자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악한 자는 불경건하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외치 않고 감사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섬기거나 예배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경건하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며 감사하고 의지하며 섬기며 예배드린다.
    또 개인의 경건은 그의 도덕성을 좌우한다. 불경건한 자는 부도덕한 데로 나아간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악한 자는 하나님을 계명을 거역하여 부모를 공경치 않고 이웃을 미워하며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탐낸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도덕성이 있다. 그는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개인의 경건과 도덕성은 그의 흥망과 생사(生死)를 결정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흥망도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기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그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시며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다(출 20:5-6). 또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사회적인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등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2-6절).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 말씀을 거역하면 온갖 재앙을 당할 것이다(15-19절).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개인의 경건과 도덕성은 그의 흥망과 생사(生死)뿐 아니라, 그의 가정과 사회의 흥망을 결정한다. 우리는 경건하고 정직하게만 살자.
    [12절]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본문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생각은 도덕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도덕 기준은 매우 낮고 또 환경이나 기분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변화한다. 사람의 도덕 판단은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쉽고 선입견과 편견에 영향을 받기도 쉽다. 그러므로 사람의 보기에 바른 것이 항상 바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 기준에 맞을 뿐이다.
    구약의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므로 사사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가 왕성하였고 음란 풍조, 심지어 동성애의 풍조가 가득하였다. 오늘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길이 아니며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소위 종교다원주의가 교회 안에서까지 유행하며, 세속 사회에 음란 풍조가 만연하며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사회의 양심이며 도덕성의 최후 보루인데, 교회까지 부패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의 보기에 바르게 보여도 필경 사망의 길인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 보기에 바르게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니까 그렇다. 결혼한 부부가 다른 이성 친구를 사귀는 음란 풍조, 거짓말에 능숙한 풍조, 육신적 향락에의 도취 등이 다 그러하다. 하나님은 의의 기준, 도덕의 기준이시며 또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우리는 사람을 표준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과 성경을 표준으로 살자. 우리는 사망의 길과 영생의 길을 분별하고 영생의 길에 굳게 서자.
    [13절]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본문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웃고 즐거워할 때가 있다. 사람이 왜 웃으며 즐거워하는가? 세상의 여러 가지 좋은 일들 때문에 그러하며, 그것은 대개 육신적인, 물질적인 것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직장에서의 승진, 세상 권세와 명예 등을 기뻐한다. 물론, 사람은 이성 간의 사랑이나 친구 간의 우정을 기뻐하기도 하고, 또 자기가 땀 흘려 이룬 업적들을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현실일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공허함, 고독, 불만족, 불안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것은 사람에게 한가지의 좋은 일이 있을 때 다른 한가지의 근심과 걱정거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 거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참된 평안과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세상에는 완전한 평안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우리는 천국에서 그것을 맛보며 누릴 것이지만, 이 땅 위에서도 어느 정도 그것을 누린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올 때 시온에서 영영한 희락을 누릴 것을 예언하였다(사 35:10). 또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즉 천국에서 모든 눈물과 애통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계 21:4). 주 예수께서는 참된 평안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요 14:27) 성령의 열매는 희락을 포함한다(갈 5:22).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살전 5:16).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적 기쁨을 추구하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을 바라고 확신하며 주 안에서 항상 평안과 기쁨을 누리자.
    [14절]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본문은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원어(수그 גוּס)는 ‘뒤로 물러나다, 타락하다, 배교하다’는 뜻이다. 마음이 패려한 자라는 말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러난 자, 경건과 도덕성을 잃어버린 자, 배교자라는 뜻이다.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다’는 말은 ‘행위의 보응을 충분히 받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패려하면 그의 행위도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말과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패려한 자,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는 자기 행위의 보응을 충분히 받을 것이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듯이,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선한 자는 하나님의 평강과 형통의 복을 받을 것이지만, 악한 자는 하나님의 재앙을 당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을 것이다(사 48:22; 57:21).
    본문은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선한 사람은 그 선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는 뜻이다. 잠언 12:14,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이사야 3:10-11,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 선한 자는 선한 보응을 받고 악한 자는 악한 보응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만 하는 선한 자가 되자.
    [15절]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본문은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는다”고 말한다. 사람이 온갖 말을 믿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거짓된 말이 많고 특히 마귀의 속이는 말, 곧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1-3).
    물론, 무슨 말이든지 안 믿어도 문제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진실한 증언들은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는 말을 믿지 않고,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주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그의 손을 내밀어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요 20:25-27). 우리는 믿어야 할 것들을 다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바른 말을 분별하여 믿고 자신의 행동을 삼간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였다(딤후 2:15).
    우리는 아무 말이나 믿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바른 말을 분별하고 그 말만 믿고 그 말대로 행동을 조심하며 바르게 사는 자가 되자.
    [16절]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고 말한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누구를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사람이나 세상이나 육신의 죽음이나 현실적 조건을 가리키기보다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본다. 지혜로운 자는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떠나는가? 왜냐하면 그는 악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옴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을 징벌하신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떠나게 된다(잠 16:6).
    본문은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는다”고 말한다. ‘방자하다’는 원어(밋압베르 ר)는 ‘거만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믿는다’는 원어(보테아크 וֹב)는 ‘자신만만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부주의하다’(NASB), ‘무모하다’(NIV)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겸손해지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면 교만해진다. 어리석은 자는 거만하며 자신만만하게 산다. 그러나 그가 사람 보기에 용감하게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고 죄를 짓되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산다면, 그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며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인생을 그림자 같고 허사뿐이라고 말하며(시 39:5-6) 또 안개와 같다고 말한다(약 4:14). 성경은 또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한다(사 2:22).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그를 따르라고 교훈하셨던 것이다(마 16:2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자. 그것이 지혜이다. 또 우리는 거만한 마음과 자신만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자.
    [17절]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본문은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언제 노하는가? 사람은 대개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다든지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일이 있을 때 노한다. 물론, 사람은 불의한 일을 보거나 고의적인 큰 악을 볼 때, 게다가 상대가 그 악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변명하고 합리화시킬 때에도 노할 것이다. 그런데 왜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가 어리석은 일을 행하는가? 그것은 그의 생각과 이해와 판단의 부족 때문에 실수하여 상대에 대한 잘못된 감정, 즉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상대에게 심신의 상처를 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람이 전혀 노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하더라도 신중히 판단해서 천천히 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야고보서 1:19,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본문은 또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악한 계교를 꾀하는 것은 속히 노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그것은 실수나 연약이 아니고 고의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고의적인 악을 행한다면 그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누구의 미움을 말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 또 그는 진실한 성도들이나 일반 사람들의 미움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악한 계교를 꾀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결코 복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악을 매우 미워하시고 반드시 공의로 보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하자. 무슨 일이든지 충분히 이해하고 신중히 판단한 후 노해야 한다. 또 우리는 결코 악한 계교를 꾀하지 말자.
    [18절]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본문은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고 말한다.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는 표현은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받는다, 어리석음을 이어받는다, 어리석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부모나 선배에게서 어리석음을 물려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며 자기 생각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은 그가 부모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의 재산이며 그의 장기가 되었다. 그는 어리석은 유산을 받아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
    본문은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는다”고 말한다. 세상에서도 지식은 사람의 면류관과 같다. 학자나 기술자의 그의 전문분야 혹은 전공분야에서의 전문적 지식은 그의 영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슬기로운 자에게도 그러하다. 그의 참된 지식 곧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알고 인생의 정로를 알고 죄의 심각성을 알고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아는 지식은 그의 면류관이다. 잠언 1:7-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잠언 4:6-9,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가 되자. 또 우리는 지식 있는 자로서 지식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19절]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본문은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린다”고 말한다. 언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렇다. 의인과 선인이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악인이 의인 앞에 굴복될 것이다. 어디에서 그렇게 되는가? 내세에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그렇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를 드러내실 것이다. 그는 의인을 변호하시고 악인의 악에 대해 징벌할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예들이 나온다. 요셉과 그 형들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 하다가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넘겼다. 그것은 사형을 받을 만한 큰 죄악이다. 출애굽기 21:16, “사람을 후린[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 그의 형들은 애굽에 와서 양식을 얻기 위하여 총리 요셉 앞에 꿇어 엎드렸다(창 42:6).
    다윗과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경우도 그러했다. 골리앗은 이방신을 믿는 장수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욕하였었다. 그러나 경건한 소년 다윗은 믿음으로 나아가 그를 이겼다. 악한 이방인 장수 골리앗은 경건한 다윗 앞에 거꾸러져 죽임을 당했다(삼상 17:49).
    모르드개와 악한 신하 하만의 경우도 그러했다. 파사왕 아하수에로의 가장 높은 신하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 민족인 유다 민족을 미워하여 죽이려 했다. 그러나 경건한 왕후 에스더의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왕께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만과 그 가족들과 동료들은 다 모르드개 앞에 굴복되고 죽임을 당하였다(에 7:10; 9:24-25).
    악인은 선인과 의인 앞에 결국 굴복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우리는 결코 악을 행치 말자.
    [20절]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본문은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사람이 가난해지는 것은 게을렀거나 낭비가 많았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가난한 자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학대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고 말하였고, 또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잠 17:5)고 말했다.
    성도는 가난한 자를 미워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과 존귀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고전 1:26-29). 야고보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하였다(약 2:5).
    본문은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다”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부요한 자를 사랑하는 자들은 많으니라”(NASB)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또 근면함으로, 또 검소함으로 물질적 소득을 얻고 저축하게 되고 부요케 된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자신에게 복이 되지 않는다(잠 16:8). 사람이 부요하면 일반적으로 친구가 많다. 왜냐하면 그가 남을 대접하며 선행과 구제를 위해 돈을 쓰기 때문이다. 성도는 믿음 안의 형제들과 이웃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3:2, “[장로의 자격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6:18, “선한 일을 하며,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적 복을 누릴 때에도 가난한 자를 미워하거나 무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또 항상 선행과 구제에 힘쓰자.
    [21절]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본문은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라고 말한다. 사람이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것은 주로 그의 인간적, 외적 조건을 보기 때문이며 그것은 교만에서 나온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돈이나 외모나 세상적 조건에 있지 않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 됨됨이, 즉 인격에 있고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며 교만에서 나온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남을 존중해야 한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그들 중 다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셔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기 때문이며, 또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성경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은 복이 있는 자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편 10:14,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또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를 기뻐하시고 복주실 것이다. 시편 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라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자. 또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아보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도와주자.
    [22절]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본문은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악을 도모하는 것’은 순간적인 실수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계획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인생의 정로(正路)가 아니고 그릇가는 것, 즉 잘못된 길로 가고 곁길로 가는 것이다. 그 길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며 사망과 멸망의 길이다. 그것은 결코 복된 길이 아니고 평강과 형통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법과 명령은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주께서도 율법 중에 큰 두 가지 계명은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둘째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6-40).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은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고 말한다. ‘선을 도모하는 것’은 일시적, 즉흥적 선행이 아니고 선을 행하려고 계획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 인자와 진리가 있을 것이다. ‘인자’는 긍휼, 자비, 은혜와 거의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인자, 자비, 은혜’를 가리킬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의 진실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또 모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다. 그의 약속 안에는 기도의 응답과 영육의 공급과 보호의 약속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항상 선을 생각하며 힘써 행하자.
    [23절]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본문은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경험하는 바이다. 학생이 열심을 다해 공부하면 상도 받고 졸업하여 원하는 직장에 취직도 할 것이다. 농부가 땀 흘려 수고하면 추수 때에 풍성한 수확을 얻을 것이다. 노동자가 성실히 일하면 돈을 벌고 유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라”고 말한다. 영어성경들은 “말만 하는 것(mere talk)은 궁핍을 이룰 뿐이라”고 번역하였다(NASB, NIV). 말은 힘과 시간을 소모하고 또 말만 많이 하는 자는 자기의 생활, 즉 자기의 일에 불성실할 것이다. 그런 자는 물질적으로도 궁핍할 것이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자는 말을 많이 할 틈이 없고 그럴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나 일 잘하는 직장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자기 일에 전심전력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달인이 된다.
    성경은 성도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또 성경은 성도가 말만 하지 말고 선한 행실을 실천하라고 교훈한다. 실행이 없는 말은 허풍이요 위선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고(약 2:17),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교훈하였다(요일 3:18).
    우리는 말의 실수가 없도록 가급적 말수를 줄여야 하고, 자기 일에 전념해야 한다. 또 우리는 말보다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힘써야 한다.
    [24절]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라,” 혹은 다시 번역하면, “지혜로운 자의 면류관은 그의 재물이라”(MT, KJV, NASB)고 말한다. 지혜로운 자에게 재물은 하나님의 복의 증거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경건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욥 등은 물질적 부요함을 누렸다. 창세기 24: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아브라함]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창세기 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巨富)가 되어.” 욥기 1: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지혜로운 자는 그 재물로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는 그 재물을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쓸 것이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그것이 하늘에 저축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 혹은 다시 번역하면,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내느니라” (NIV)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어리석음만 드러내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치료되지 않는 어리석음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 악화되는 어리석음이다. 잠언 27:22,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자. 또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전도와 구제를 위해 선하게 쓰자.
    [25절]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본문은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십계명에서 명령하셨다. 신약의 사도들은 다 증인들 곧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 .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들은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순교까지 하였다.
    주의 사도들의 진실한 증거를 통해 구원의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었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전했고 사람들은 그들의 증거의 말씀을 믿었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이 거짓말을 전했다면 영혼들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의 피로 인쳐진 그들의 진실한 증언들은 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본문은 그러나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다시 번역하면,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하느니라”(KJV)고 말한다. 거짓말은 진리의 세계에서 합당치 않다. 거짓말은 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쓴 도구이며 사탄의 주특기이다(요 8:44). 거짓말은 그 자체가 죄악이며 인류를 멸망시켰고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사람의 영혼들은 거짓말로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남을 속이는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뭇 영혼들을 구원할 만한 진리만 말하는 진실한 증인이 되자.
    [26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다”고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견고한 의뢰’라는 원어(미브타크-오즈 ז־ח)는 ‘견고한 담대함’이라는 뜻으로 곧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모신 자들은 안전함과 보호, 힘과 위로, 도우심과 공급하심과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안전함과 보호, 그들의 힘과 위로, 그들의 도우심과 공급하심과 구원이 되실 것이다.
    시편 33:18-19,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시편 34:7-10,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견고한 의뢰, 견고한 담대함이시다.
    본문은 또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고 말한다. ‘피난처’는 환난 날에 피할 곳, 의지할 대상을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자신이 복 될 뿐 아니라, 자기 자녀들도 복되다. 사람들은 의료보험, 교육보험, 생명보험 등 여러 가지 보험을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보증이시며 보호자시요 공급자이시다. 그는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신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자녀의 피난처이시다. 그는 우리 가족의 보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하며 따르자.
    [2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를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바다의 물고기들, 공중의 새들, 땅 위의 생명체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다. 시편 36:9, “생명의 원천이 주[하나님]께 있사오니.”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과 같다.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살고 생명의 강건함을 얻을 것이다. 또 하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 있다. 인생은 지금 사망의 그물에 걸린 자들과 같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그러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며(요 3:16)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떠나게 된다.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고 의를 행하게 된다(잠 16:6). 그래서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악을 버리고 의를 행하는 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 중심, 믿음 중심으로만 살자. 또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만 행하며 또 영생을 확신하자(롬 6:22).
    [28절]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본문은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고 말한다. 백성이 많고 적은 것은 여러 여건에 관계될 것이다. 영토가 넓든지, 경제적 여건이 좋든지, 사회 제도나 통치자들의 인격과 덕이 좋아야 할 것이다. 또, 사회질서가 안정된 가운데 자녀 출산도 많고 들어오는 이민자들도 많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 제도는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도덕성과 질서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강제성이 많은 사회는 그렇게 평안치 못할 것이다. 경제나 교육이나 사회생활 전반에 있어서 자유로운 경쟁은 성경적이며 사회 발전을 가져온다. 그것은 지난 50년 이상 옛 소련이나 중국에서 실시한 공산주의 제도가 경제적으로 실패함으로써 확인된 바이다.
    미국 같은 나라는 1753년에 인구 130만명이었지만, 1988년 즉 불과 235년 만에 인구 2억 4천5백만명의 큰 나라가 되었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여러 조건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구 소련은 연방이 해체되고 축소되었고 지금도 일부는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중국의 티베트도 독립을 원하는 대표적인 예이며, 또 우리나라의 북한은 많은 탈북자들을 낳는 참으로 불행한 곳이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속 국가와 다르다. 주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진리 운동은 좁은 길 가는 운동이며 참된 교회는 단순히 교인수로 판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교회에 구원받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나기를 기도해야 하며,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사람들이 이민 오기를 원하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자. 또 주님의 교회의 참된 성장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29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다”고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도 좀더 생각하고 오래 참고 지나친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자이다. 그런 자는 크게 명철한 자이다.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그러면, 사람이 과격한 말과 행동을 피하게 될 것이며 실수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마음이 조급한 자는 참을성이 없고 성질이 급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노출하는 자이다. 그런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그는 정당한 이유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성급히 화를 내는 실수를 하기 쉽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데스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그를 공박하는 무리 앞에서 지나친 감정을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실수하며 범죄하였다(민 20:10-11). 그는 그 일 때문에 그렇게도 기다리며 사모했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언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전통사본)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22).
    우리는 조급한 마음으로 쉽게 성내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노하기를 더디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다스리자.
    [30절]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본문은 마음의 화평이 육신의 생명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화평’이라는 원어(레브 마르페 א ב)는 ‘건강한 마음’(BDB, KJV) 혹은 ‘평온한 마음’(NASB, NIV)이라는 뜻이다. 육신의 건강에는 정신적, 심리적 요인이 크다.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본문은 시기(猜忌)가 뼈의 썩음이라고 말한다. ‘시기’라는 원어(키느아 האָ)는 ‘시기, 질투’(KJV, NIV)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또한 ‘격노’(passion)(NASB)라는 뜻을 가진다. 시기와 질투이든지 격노의 감정이든지 그것은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건강 상식은 가지고 있다. 특히 시기와 질투는 겉보기에는 큰 문제처럼 안 보일지 모르나, 거기에서 미움과 살인의 감정이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뼈의 썩음’같이 건강에 큰 해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3:13-18은,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위로부터 난 지혜요 또 하나는 세상적인 지혜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거룩과 건강을 위해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자. 또 우리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나 격노하는 감정을 품지 말자.
    [31절]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본문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말한다. 잠언 17:5에도,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의 가치, 즉 그의 인격성과 도덕성의 가치를 모르고 단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섞여 살고 있으나 그들을 다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잠 22: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특히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가치는 돈보다 심히 크다. 인간의 가치가 100이라면 돈이나 집이나 차나 옷의 가치는 10,000분의 1도 못 된다.
    본문은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사람의 영혼의 가치, 즉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도덕적 존재임을 아는 자이다. 그는 결국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존중하는 자이다. 그는 사물을 바로 보는 자이며 사람의 가치와 돈의 가치의 경중(輕重)을 바로 아는 자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욥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고 소경의 눈이 되고 절뚝발이의 발이 되었다고 고백했고(욥 29:12, 15), 또 고아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고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욥 31:17, 19-20, 32). 잠언 30:20에는 현숙한 여인은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해 손을 내민다고 묘사되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본래 힘썼다고 증거하였다(갈 2:10).
    우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자.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는 태도요 사람의 가치를 바로 아는 자다.
    [32절]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본문은 악인이 그 환난에 엎드러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며 그의 계명을 어기고 죄만 짓고 회개할 줄 모르는 자는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가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과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공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또 사람들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기 위해 환난을 주신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악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환난으로 인해 엎드러질 것이다. 잠언 10:24-25,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본문은 그러나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에 순종하는 자는 죽을 때도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죽음을 귀히 보신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또 죽음은 성도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성도는 죽음 때문에 항상 깨어 있을 수 있고, 또 죽음을 의식할 때 세상이 허무하고 일시적임을 깨닫고 세상을 사랑치 않을 수 있고, 또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며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영생도 그러하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는 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의롭게만 살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고 천국의 소망을 든든히 가지자.
    [33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본문은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문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덕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 즉 경건과 의와 거룩의 길에서 얻는다. 그것은 사람을 평강의 길로 이끈다. 그런데 이 복된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문다고 본문은 말한다. 그것은 평소에 명철한 자의 마음 속에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지혜자는 말이 많지 않고 떠벌리지 않는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 지혜는 말과 행위로 나타난다. 성령은 지혜의 영으로서 신자 속에 계신다. 그는 우리나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 속에서 감화 감동하시고 일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깨우치시며 우리가 범죄할 때 근심하시며 책망하신다. 또 그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격려를 주신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난다”(KJV)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뜻과 계명을 거스르는 자이며,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미련함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은 지혜가 명철한 자의 마음 속에 있어서 평소에 보이지 않지만,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시시때때로 말과 행위로 나타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조만간 밖으로 드러난다. 주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 지혜자의 지혜도, 미련한 자의 미련함도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함으로써 지혜를 얻어서 꼭 필요할 때 지혜의 말과 지혜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자.
    [34절] 의(義)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본문은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한다”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것인데,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이다. 즉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며 사람의 생명과 순결성과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다. 세속사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도덕성이 존중되는 사회,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고 신앙과 경제생활과 교육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즉 평안하고 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다. 왕은 의로 나라를 견고케 한다(잠 29:4). 레위기 26:7-9, “너희가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천국은 의의 나라이다.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그 의의 나라를 사모하며 고대한다. 또 우리는 우리나라도 경건과 의가 있는 나라가 되도록 나라와 위정자들과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모범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 뜻이다(마 5:16).
    본문은 그러나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적 재난과 무질서, 전쟁, 흉년이나 경제 공황, 대형사고, 전염병 등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6장에서 이스라엘이 그의 계명을 거역하면 흉년이 들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패하고 전염병과 기근이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셨고, 신명기 28장에서는 그 재앙들 중에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옴 등 각종 질병들을 언급케 하셨다.
    사회의 평안은 백성의 경건과 도덕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사회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자.
    [35절]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본문은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는다”고 말한다. 슬기롭게 행하는 것은 지혜롭게, 정직하고 의롭게, 진실하게, 또 충성되게 행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신하는 왕의 사랑을 더욱 받을 것이다. 잠언 16:13,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잠언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다윗 왕은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고 말했다(시 101:6).
    본문은 그러나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한다”고 말한다. 욕을 끼치는 것은 교만하고 권력을 악용하고 뇌물을 받거나 불의의 이익을 구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등의 불법을 행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이러한 신하는 왕의 진노를 당할 것이다. 다윗은,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 . .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했다(시 101:3-5).
    본문의 말씀은 어떤 단체나 직장에서도 적용된다. 슬기롭게 행하는 사람은 윗사람의 총애를 받을 것이나, 어리석고 부덕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노를 당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마 24:45-47), 또 10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것을 강조하셨다(마 25장).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나,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좋은 국민, 좋은 공무원, 좋은 직장인이 되자. 우리는 특히 하나님 앞에서 좋은 성도와 좋은 직분자가 되자.

    15장: 유순한 대답, 사랑, 분노

    [1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본문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말한다. 유순한 대답은 온유와 겸손의 심령에서 나오며, 윗사람이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심을 가진 자에게서 나온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마 11:29)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셔서 맺는 열매이다(갈 5:23). 잠언 25:15는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했다. 본인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도 온유한 말은 상대방의 분노를 쉬게 할 것이다.
    미디안 전쟁에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분노한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사사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고 겸손히 말함으로써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혔었다(삿 8:1-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교훈하였고(갈 6:1), 그는 또 디모데에게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교훈하였다(딤후 2:25).
    본문은 그러나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한다”고 말한다. 과격한 말은 교만한 마음과 상대방을 무시함에서 나온다.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고 그의 종들을 모욕했던 나발의 과격한 말은 다윗을 격노케 만들었었다. 지혜로운 그의 아내 아비가일의 겸손한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면 나발은 아마 그 날 즉시 죽임을 당했을 것이었다(삼상 25:10-11; 23-41). 또 르호보암의 포학한 말은 백성들을 매우 노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왕국은 둘로 분열되었다(왕상 12:13-14).
    우리는 주의 교훈을 본받아 온유와 겸손으로 항상 자신을 단장하자. 그래서 자신에게 불쾌한 일이 있을 때도 유순한 대답을 하는 자가 되자.
    [2절]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본문은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말은 인격의 표현이다. 지혜자는 지식을 선히 베푼다. 여기에서 지식은 참 지식, 바르고 좋은 지식, 곧 하나님께서 성경에 주신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선히 베푼다’는 말은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 적절히 사용한다는 뜻일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활용 능력이다. 지혜 없는 지식은 유익이 없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뜻을 무시하고 이웃을 무시하고 죄를 버리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쏟는다. 미련한 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것, 잘못된 생각과 판단, 선입견과 편견, 오해, 잘못된 혹은 과격한 감정, 건설적이지 못하고 덕스럽지 못한 말과 행동 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우리는 참된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가 되고 또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는 자가 되자. 그러려면 우리는 두 가지를 힘써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항상 묵상해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항상 구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절]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눈’이라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 즉 하나님을 사람과 같은 모양을 가지신 존재로 표현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사람의 눈을 만드신 하나님은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그는 생명 없는 우상과 다르시다.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천지에 충만하신(렘 23:24)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서나, 정확하고 완전하게 사물을 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잠언 15:11, “음부와 유명(幽冥)[멸망의 깊은 웅덩이]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하나님의 눈은 완전한 감시용 카메라(CCTV)와 같다.
    본문은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인생의 도덕적 행위이다. 그는 사람들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하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는 악인들의 악행도 아시고, 의인들의 선행이나 심지어 억울함도 아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는 선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들에게 벌을 주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마태복음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리는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항상 두려운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와 선만 행하자.
    [4절]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사람의 혀 곧 말은 인격의 표현이며 성화의 정도를 나타낸다. 말의 온전함이 온전한 것이다(약 3:2). ‘온량한’이라는 원어(마르페 א)는 ‘건강한, 치료하는, 평온한, 부드러운’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평안과 유익을 주고 다른 이의 상한 마음을 치료해 줄 수 있는 혀를 말한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골로새서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본문은 온량한 혀, 곧 건전하고 부드럽고 선한 말이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 생기와 활기를 준다. 우리는 다른 이에게 기쁨과 활기를 주는 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고린도전서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본문은 그러나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말은 악하고 비뚤어진 것을 말한다. 악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악하고 비뚤어진 말을 하는 자, 남을 함부로, 파괴적이게 비난하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는 패려한 혀를 버리고 건전하고 선하고 부드러운 혀를 가지자.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기쁨과 활기를 주는 자가 되자.
    [5절]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본문은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이다”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낳고 기른 부모를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나이가 많고 인생 경륜이 있는 자, 지식과 경험이 많은 자도 가리킬 것이다. 교회의 경건한 직분자들도 영적 아비들이다. 아비의 훈계는 자녀에게 바른 길을 지시하고 잘못된 길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고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사랑과 본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다.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이 미련한 까닭은, 경건한 아버지가 주는 지혜와 지식과 경험의 말씀, 곧 바르고 선한 길을 거부하고 잘못된 길로 가서 마침내 그 자신이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러나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슬기로운 자]이다”라고 말한다. 부모나 윗사람을 공경하는 자는 순종할 것이며 부모나 윗사람을 무시하는 자는 거역할 것이다.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은 바른 길을 가고 잘못된 길을 피하며 또 부모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의의 길, 평강의 길, 형통의 길을 가는 것이니까 지혜롭고 슬기로운 일이다.
    우리는 지식과 사랑과 모범을 가지고 자녀들과 아이들을 훈계하자. 또 자녀들과 아이들로 부모와 어른들의 훈계를 잘 듣게 하자.
    [6절]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고 말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의 집에는 영육의 많은 보물이 있다. 그에게는 영적인 보물이 있다. 그에게는 경건함, 말씀의 지식, 의와 선과 진실의 덕이 있다. 그것들은 귀한 보화들이다. 그에게는 육적인 보물도 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을 약속하였다. 의인은 물질적 여유를 가질 것이다. 잠언 3:16, “그[지혜의]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富貴)가 있나니.”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금생(今生)의 약속 속에는 건강과 물질의 복이 포함될 것이다.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다.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된다,” 다시 번역하면,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는 자이다. 악인의 소득에는 고통이 있다. 정당한 소득이라도 그러할 것이며 불의한 방식으로 얻은 것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일 것이다. 잠언 13:25,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아간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중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했는데, 그 결과 그는 그 자녀들과 더불어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죽임과 불사름을 당하였다(수 7장).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만 살자.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치 말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자.
    [7절]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잠언 15: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인격은 말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지혜자의 인격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말로 나타난다.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 잠언 10:20-21,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지혜로운 자의 입술이 전파하는 지식은 진리의 지식 곧 참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죄와 구원에 대한 지식, 의와 선과 평안에 대한 지식, 형통과 행복과 영생에 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 그는 이 지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한다. 그것이 전도요 간증이다. 그는 자녀들에게는 물론이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전파한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의 계명을 순종치 않는 자이다. ‘마음이 정함이 없다’는 원문(로 켄 ן־א)은 ‘그렇지 아니하니라’는 뜻이다(KJV, NASB, NIV). 미련한 자는 세상적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전파할 지식,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과 죄에 대한 지식, 구원에 대한 지식, 의와 선에 대한 지식, 평안에 대한 지식이 없고 오직 미련한 것을 말할 뿐이다. 잠언 12:23,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3:16,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것을 나타내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참된 지식, 곧 하나님과 구원과 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8절]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며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이다. 그것은 신약 교인들이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다. 악인들도 때때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자기 양심의 평안과 위안을 위해 드리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종교의식적이며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계명들을 거역하는 자들의 제사를 미워하신다. 이사야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헛되다. 이사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악인의 제사는 자신의 악에 외식(外飾)의 악을 더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고(삼상 15:22)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호 6:6).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신다”고 말한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예배이든지 기도이든지 헌금이든지 단순히 종교적 의식만 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자.
    [9절]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
    본문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악인의 길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 악인가? 악은 선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선인가? 선은 하나님 앞에 좋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반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모욕하고 그에게 해(害)를 끼치는 것이다. 그 해(害)는 영적, 정신적, 육신적, 물질적 해를 다 포함한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해이고, 남을 욕하고 비방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정신적 해이고, 구타, 성폭력, 살인 등은 육신적 해이고, 도적질이나 남의 돈을 떼어먹는 것은 물질적 해이다. 이런 해들은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반대되는 악한 행위들인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은 사랑,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경건하게 살 것이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 증거하지 않고 탐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
    본문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신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와 재앙이 임할 것이다. 그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과 평안이 임할 것이다. 참된 평안과 행복이 그들의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오직 의만 따르며 의만 행하자.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가자.
    [10절]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
    본문은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도(道)는 길 곧 인간의 바른 생활법칙을 가리킨다. 그것은 좁게는 십계명이요 넓게는 신구약성경 전체이다. 신명기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배반하는 자’라는 원어(오제브 ב)는 ‘저버리는 자’라는 뜻이다. 도를 배반하는 자는 성경의 교훈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도, 곧 성경의 바른 교훈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시하고 거역하고 저버리는 것이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공의와 사랑의 징계이다.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요 참 아들의 표요 거룩과 의로 인도하는 것이다(히 12:6, 8, 10). 또 ‘견책’이라는 원어(소카캇 תוֹת)는 ‘징계’라는 말(무사르 רוּמ)과 비슷한 뜻이다.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와 견책을 경히 여기지 말고 달게 받아야 하는데(잠 3:11),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죽음과 멸망을 당할 것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 곧 인생의 정로(正路)인 성경의 교훈을 저버리지 말고 그대로 잘 지키자. 또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지 말고 달게 받자.
    [11절]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본문은 “음부와 유명(幽冥)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난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음부’(쉐올 לוֹא)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또 ‘유명’(幽冥, 아밧돈 ןוֹדּ)은 ‘멸망의 깊은 웅덩이’라는 뜻으로 지옥과 동의어로 쓰인다. 무덤 깊은 곳도, 멸망의 깊은 웅덩이인 지옥도, 하나님 앞에는 다 드러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땅의 깊은 곳도 다 보시고 지옥의 깊은 곳까지도 다 아신다. 물질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눈을 떠나 있지 않다. 하늘 높은 곳도, 바다 깊은 곳도, 땅 깊은 곳도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다. 욥기 26:6, “하나님 앞에는 음부도 드러나며 멸망의 웅덩이(아밧돈)도 가리움이 없음이니라.” 시편 139:8, 12,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본문은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물질계뿐 아니라 정신세계, 영의 세계도 다 아신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 . .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도, 인간의 마음의 선함과 악함, 진실과 거짓을 다 아신다. 그는 인간의 은밀한 것을 아시고 공의로 보응하신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공의로 보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솔직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12절]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 ץ)는 ‘경멸하는 자’(BDB, KJV), ‘조롱하는 자’ (NASB)라는 뜻이다. ‘견책받기’라는 원어(호케아크 로 וֹל וֹה)는 ‘그를 책망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잠언 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경멸하는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남을 경멸하는 자가 그를 책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미련하고 거만하고 자기의 행위를 바른 줄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잠언 1:7,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2:1,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본문은 또 그는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한다”고 말한다.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이다. 남을 경멸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않는 까닭은 자기가 남보다 더 지혜 있다고 생각하고 그의 지적과 충고 혹은 책망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이며 또 그와 비교되므로 자신의 미련함과 부족과 악함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혜 있는 자는 책망 듣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부족을 지적받고 그것을 고치기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충고]를 듣느니라.” 잠언 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의 길은 그것을 지키고 행하는 자에게 결국 평강과 형통과 행복을 준다.
    우리는 거만한 마음으로 남을 경멸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힘써 지키는 자가 되자.
    [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본문을 직역하면, “기쁜 마음은 얼굴을 좋게 하나 마음의 고통에는 상한 영이 있느니라.”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사람의 마음과 영과 몸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soul)은 영(혹은 영혼)의 활동작용 혹은 활동영역이다. 그것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로 나타난다. 몸은 단독으로는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이 없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영육(靈肉)의 결합체로서 활동한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는 선한 마음도 있고 악한 마음도 있다. 또한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음이 기쁘면 몸도 힘이 나고 마음이 슬프면 몸도 약해지기 쉽다. 또 반대로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기 쉽다. 잠언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기쁜 마음은 얼굴을 좋게, 밝게, 빛나게 하지만, 마음의 고통에는 상한 영, 혹은 상한 심령이 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얼굴에 어느 정도 나타난다. 기쁜 마음은 기쁜 얼굴로, 슬픈 마음은 슬픈 얼굴로, 평안한 마음은 평안한 얼굴로, 고통하는 마음은 고통스런 얼굴로, 미움과 사랑의 마음은 미움과 사랑의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우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9)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도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했다(빌 4:6-7).
    우리는 죄 짓지 말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써 영과 마음의 즐거움을 가지며 그것이 얼굴에도 나타나게 하자.
    [14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
    본문은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연합체이며 거기에서 말과 행동이 나온다.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한다. 그 지식은 참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책인 성경의 지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 지식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성경을 듣고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묵상한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14- 16,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시편 119:147-148,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긴다”고 말한다. ‘미련한 것’은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인 것, 미움이나 음란 등 부도덕한 것, 또 말의 실수, 남을 비방함, 게으름, 사치와 낭비 등을 포함한다. ‘즐긴다’는 원어(라아 ה)는 ‘먹고산다’는 뜻이다. 미련한 자들은 미련한 것을 먹고살며 미련한 것들을 나타낸다. 잠언 12:23,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잠언 13:16,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2,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잠언 18:2,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우리는 미련한 것을 먹고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명철한 마음을 가지자. 우리는 참 지식 곧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사모하자.
    [15절]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본문은 “고난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다”고 말한다. ‘고난받는 자’라는 원어(아니 י)는 ‘핍박받는 자, 비천한 자, 가난한 자’라는 뜻이다. ‘그 날이 다 험악하다’는 말은 그의 날들이 굶주림이나 헐벗음, 멸시나 천대 등의 어려움을 당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러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즐거운 자’라는 원어(토브 레브 ב־בוֹט)는 ‘마음이 좋고 기쁜 자’라는 뜻이다. 마음이 좋고 기쁜 자는 잔칫날이 따로 없고 항상 잔치할 것이다.
    성경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한다. 성도의 마음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람이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약간의 도움이 될 뿐이다. 성도가 마음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성령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4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16-18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한다. 또 성경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가 기쁨이라고 증거한다(갈 5:22-23).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환경 여건이나 신체적 조건을 초월한다. 성도는 심지어 고난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또 기뻐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했으나 기뻐하며 계속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5:40-41). 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많은 매를 맞았고 옥에 갇혔으나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행 16:25). 또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중에서도 넘치는 기쁨을 누렸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1).
    영육으로 고난이 많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또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아 항상 기뻐하자.
    [16절]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의 행복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을 증거한다. ‘가산이 적다,’ ‘크게 부하다’는 원어(메아트, 라브 ט, ב)는 각각 ‘적다,’ ‘많다’는 단어이다. 그것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이 적거나 많다는 뜻이다. 사람이 돈이 많아야 행복한 것은 아니다. 물론 돈이 없어야 행복하다거나 돈이 넉넉한 것이 행복에 불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돈이 적어도 행복할 수 있고 돈이 많아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사람의 행복은 돈이나 소득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본문은 사람의 행복이 평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본문에 ‘번뇌’라는 원어(메후마 הוּה)는 ‘혼란, 소란, 불안’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걱정거리’(trouble)(KJV), ‘소란’(turmoil)(NASB, NIV)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심리적인 불안이나 건강상의 걱정거리, 물질적, 환경적 걱정거리 등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거리들이 있으면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돈이 좀 부족해도 평안하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참 평안과 행복을 주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 말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평안을 주시는 분이시다(레 25:18-19; 레 26:5-6; 시 4:8; 마 11:28; 요 14:27). 그것은 몸의 건강과 물질적 여유와 환경적 평안을 포함한다. 민수기 6:26, (아론의 축도)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사람의 행복이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에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계명에만 순종하자.
    [17절]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본문은 특히 가정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여간’은 ‘보통’이라는 뜻이다. ‘채소를 먹는다’는 말은 부잣집이 아닌 보통의 가정을 가리킬 것이다. 비록 가정의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 채소만 먹는 형편이라도 가족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가정적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가 있어 살진 소를 먹는 부잣집일지라도 가족들 간에 서로 미워함이 있다면 그 가정은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부요 자체가 가정적 행복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물론 물질적 여유는 인간의 삶이나 가정의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복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 그것이 평안과 사랑 같은 것이다. 그래서 잠언 15:16에서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 것이고 또 본문도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미움은 갈등과 다툼을 일으키고 평안과 행복을 빼앗아간다. 가족들은 언제 서로 미워하게 되는가? 그것은 가족들 중 누가 이기적(利己的)이게 행동하거나 가인처럼 형제를 시기하거나 남을 욕하고 구타하고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해를 끼칠 때일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상대의 부족과 허물을 감싸고 용서하고 상대를 관용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때 마음의 평안과 기쁨도 얻게 될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단지 물질적 부요에 있지 않고 평안과 서로 사랑함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평안을 얻고 서로 사랑하며 살자.
    [18절]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본문은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사람이 정당하게 분을 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공의로 노하실 때가 있다. 그러나 잘못된 분노도 있다. 자신의 잘못된 선입견과 추측 혹은 오해로 인해 부당하게, 실수로 분노하는 경우가 있다. 또 정당한 분노라 하더라도 상대의 실수에 대해 지나치고 과격한 감정이 표출되는 경우도 있다. 미움의 감정은 때때로 그런 지나친 분노의 실수를 범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전도서 7:9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한다”고 말한다. 분노는 때때로 의견 대립에서 생긴다. 무슨 일에든지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여러 의견들이 다 좋은 것들이며 각각 상당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과 겸손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후 회의의 절차를 따라 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건전한 성도들의 모임에서는 어떤 다툼도 피할 수 있다.
    성도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살 때 필요한 덕목들 중에는 사랑과 겸손이 있고 또 특히 자기 통제력 즉 자제심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나친 감정을 통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겸손과 사랑과 덕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잠 14:29; 19:11). 또 야고보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다(약 1:19).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분노를 쉽게 내지 말고 더디 내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과 겸손과 자제심을 가지고 처리해야 한다.
    [19절]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본문은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다”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자기 일에 불성실하고 자기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이다. 게으름은 악이다. 가시울타리는 가시가 찔러 가기 어려운 길을 가리킨다. 게으른 자의 길이 가시울타리 같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된다고 말한다(잠 10:4). 또 게으른 자에게는 할 일이 밀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게으른 자가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잠 12:27). 또 게으른 자는 의지가 약해서 난관을 잘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잠언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며 주리게 만들고(잠 19:15)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고 말한다(잠 19:24; 26:15).
    본문은 그러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大路)니라”고 말한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자이다. 그는 물론 부지런하다. 부지런하게 땀흘려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자의 길이 대로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그와 함께하시고 복을 주시기 때문일 것이며, 할 일을 그때그때 다 처리하기 때문일 것이며, 또 의지가 강해져서 웬만한 난관은 잘 극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1:1-3은 같은 진리를 보인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아가자.
    [20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한다”고 말한다. 잠언 10:1도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아들이 아비를 즐겁게 하는 방법은 그의 경건하고 선한 교훈을 순종하여 경건하고 선하게 살고 범사에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잠언이 주는 지혜의 교훈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며 즐겁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일이요 자신에게 복이 되는 지혜로운 일이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에베소서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긴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가 어미를 업신여기는 방법은, 그를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들의 교훈을 버리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거역함으로써이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은 부모에 대한 멸시이다. 그런 사람은 실상 그 아비의 근심이고 그 어미의 고통이다(잠 17:25).
    부모를 멸시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제5계명에 약속된 복, 즉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복을 얻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정죄를 받고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잠언 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한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은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들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도 지혜로운 성도가 되고 사회에서도 좋은 시민이 되자.
    [21절]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본문은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하여도”라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미련한 것은 무지한 자에게 즐거움이어도”이다. ‘미련한 것’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 사람의 좁은 소견을 따라 행하는 것, 사람의 양심에 바르지 못하고 악하게 행하는 것, 즉 한마디로 죄악된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무지한 자’라는 원어(카사르 레브 ב־ר)는 직역하면 ‘마음이 없는 자’라는 말로서 ‘생각이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라는 뜻이다.
    미련한 것, 죄악된 것은 무지한 자에게 즐거움이다. 사람이 생각이 있다면 미련한 일에 대해 슬퍼하고 미워하고 탄식하고 멀리해야 하는데, 무지한 자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죄의 형벌은 죽음과 멸망이기 때문에, 미련한 것 곧 죄악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무지하고 생각이 없고 지혜가 없는 행동이다.
    본문은 그러나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지혜와 깨달음이 있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이다. 그는 그 길을 바르게 한다. 길은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바르게 한다는 것은 미련한 것, 죄악된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성경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르고 복된 길이다.
    우리는 생각이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생각이 있는 자, 지혜가 있는 자가 되자.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또 우리는 미련한 것을 즐거워하지 말고 그것을 미워하고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길을 걷자. 그것이 지혜 있고 복된 삶이다.
    [22절]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본문은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말한다. 잠언 11:14도 비슷하게 말하기를,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할 것이다. ‘의논’은 ‘회의, 토의, 조언’이라는 뜻이다. 보통 한 사람의 생각보다 두 사람 이상의 의논과 조언이 낫다. 의논이 없으면 계획들이 좌절되는 까닭은, 개인의 생각의 미흡함과 제한성, 독단적 생각과 고집과 치우친 감정 등으로 인한 실수, 또 경험 미숙으로 인한 예상치 않은 일들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할 때 머리를 맞대고 그 문제를 의논하고 연구하는 것이 좋고 그런 것이 없으면 그 일을 잘 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문은 그러나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모사는 조언자, 참모를 가리킨다. 조언자가 많으면 무슨 일이든지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20:18은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하고, 잠언 24:6은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회의의 필요성과 유익이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관계자들, 책임 있는 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먼저 성경의 교훈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또 각자 자기 생각과 의견을 발표하고 또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인내하며 듣고 다함께 그 일을 연구하고 숙고하고 또 필요한 경우는 그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또 충분히 토의한 후 최종적으로 표결하여 다수의 의견을 따라 행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이 때 모든 참여자들에게는 믿음과 겸손함과 포용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독단적 생각으로 하지 말고, 성경 진리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경험자들의 의견을 참조하여 서로 의논하며 행하자.
    [23절]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본문은 “사람이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고 말한다. 입의 대답에는 좋은 대답도 있고 나쁜 대답도 있다. 좋은 대답은 지혜로운 대답이요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선하고 덕스러운 대답이요 진실한 대답이다. 그러나 나쁜 대답은 어리석은 대답, 남을 해치는 대답, 악하고 파괴적인 대답, 미움에서 나온 대답, 거짓된 대답이다. 좋은 대답은, 듣는 이에게 유익도 주지만, 말하는 자신에게도 기쁨을 일으킨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어 그의 나병의 깨끗함을 받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노하여 떠나려 하였던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선하고 지혜로운 충고를 한 종들은 그들의 마음도 크게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대답은, 듣는 이에게 상함과 불쾌함과 불안함과 낙심함을 줄 뿐 아니라, 말하는 자신에게도 불안을 가져올 것이다.
    본문은 또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경우에 맞지 않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것을 동문서답이라고 말한다. 또 상대에 대한 오해나 이기적 욕심 때문에 잘못된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말, 때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때에 맞는 말이란, 이해가 필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거나 곡해하지 않고 이해하는 말이며, 상대방에게 위로나 격려가 필요할 때 그를 낙심시키지 않고 위로 격려하며 또 잘한 것은 칭찬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아첨하지 않고 권면이나 책망이 필요할 때 권면하고 책망하는 말이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한다. 때에 맞는 말은 매우 아름답다고 선하다. 잠언 25:11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상대방의 형편과 말을 잘 이해하고 때에 맞는 바르고 적절한 말, 곧 상대방에게 꼭 필요하고 유익한 말을 하는 자가 되자.
    [24절]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생명의 길은 지혜로운 자들을 위해 위로 향한다”이다(KJV, NASB, NIV). ‘생명의 길’은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길이다. 생명은 귀하고 복되다. 그래서 우리는 생일을 축하하고 생명의 건강한 보존을 위해 영양 있는 음식과 보약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병원 치료를 받고 좋은 약을 복용한다. 영생의 가치는 더 크다.
    그런데 생명의 길은 지혜로운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의 뜻을 알고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에게 주어진다. 죄는 인생에게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지혜는 의를 얻고 의를 행케 하고 그 의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이 ‘위로 향한다’는 말은 천국과 영생의 나라가 현재 위에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땅 속에, 어두움 속에 갇혀 계시지 않고 하늘에 계신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실상 그가 세상을 초월해 계시다는 뜻을 의미한다. 하늘이라는 말 외에 하나님의 처소를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다.
    본문은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된다”고 말한다. ‘음부’(陰府)라는 원어(쉐올 לוֹא)는 구약성경에서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무덤과 지옥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처소로서 공통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죽고 죽은 자는 땅에 묻힌다. 산 자가 땅에 묻히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지옥도 악인들이 죽은 후 형벌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곳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요 그 후에는 지옥 형벌이 있다. 그것이 어리석은 악인들의 길이다. 그러나 의의 보응은 생명이요 의인들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길이다.
    우리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지혜로운 자가 생명의 길을 감으로 지옥에서 떠나 천국에 들어감을 알자. 우리는 오직 지혜자로만 살아가자.
    [25절]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께서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무시하는 자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인임을 모르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거역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무신다. 집은 가정과 가족들을 가리킨다. 사람이 교만하면 그와 그의 집이 망할 것이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하였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본문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부의 지계(地界) 즉 땅의 경계를 정하신다고 말한다. ‘정한다’는 원어(얏체브 ב [ב])는 ‘세운다,’ ‘견고케 한다’(fix, establish)는 뜻이다. 과부는 외로운 자이며 이 세상에서 때때로 무시와 부당한 취급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이다. 교만하고 악한 자들은 때때로 과부의 땅과 재산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외로운 과부들을 돌보아 주시며 도우시며 그의 땅과 재산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같이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돌보시며 도우시는 자시다. 신명기 10:18,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원통한 일을 갚으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시편 10: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편 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우리는 주께서 미워하시는 교만한 자가 되지 말자. 또 우리는 인간적 도움이 없다고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26절]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본문은 악한 꾀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꾀’라는 원어(마카솨보스 תוֹב)는 ‘생각들’(KJV, NIV), ‘계획들’(NASB)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악한 생각들과 계획들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5:4-5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러나 선한 말은 정결하다고 말한다. ‘선한’이라는 원어(노암 ם)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의 원문은 한글개역성경처럼 “선한[기쁨의] 말들은 정결하니라”(NASB)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또는 “정결한 자들의 생각들은 [하나님께] 기쁨의 말들이니라”(KJV)고 번역되기도 한다. 두 번역이 다 뜻이 통하는 것 같다. 악한 생각은 독한 말로 표현될 것이지만, 기쁨의 말은 깨끗하다. 또 ‘정결한 자들’은 악하지 않고 선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악은 더럽고 불결한 것이며 선은 깨끗하고 정결한 것이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킬 것이지만, 정결한 자들의 생각은 하나님께 기쁨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을 생각하고 선을 말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주께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목적은 우리를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한 생각과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깨끗하고 선한 말과 행동을 하자.
    [27절]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
    본문은 “이(利)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한다”고 말한다. ‘이(利)를 탐하는 자’라는 원어(보체아 베차 ע וֹבּ)는 ‘토색하는 자, 불의한 이익을 얻는 자’라는 뜻이다. ‘해롭게 한다’는 원어(아카르 ר)는 ‘소란케 한다’(disturb, trouble)는 뜻이다. 본문은 불의한 이익을 얻는 자가 자기 집을 소란케 만든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가정과 가족들에게 건강상, 경제상 어려운 일들을 만든다는 뜻, 즉 자기 가정을 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다.
    본문은 그러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산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뇌물을 구하며 받는다. 잠언 17:23은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뇌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정당한 이익만 구하고 부당한 이익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며 탐심을 버린 자이다.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산다.” ‘산다’는 말은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고 형통하게, 즉 몸의 건강과 물질적 유여함을 가지고 산다는 뜻이다.
    성경은 뇌물을 받지 말고 불의한 이익을 구하지 말라고 교훈한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디도서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 .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베드로전서 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디모데전서 3:8,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 .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우리는 자기의 집을 해롭게 할 뇌물이나 불의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도답게, 정정당당하게,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자.
    [28절]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본문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한다”고 말한다. ‘깊이 생각하다’는 원어(하가 ה)는 ‘신음하다, 심사숙고하다, 묵상하다’는 뜻이다(BDB). 야고보서에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말하였고(약 1:19), 잠언 다른 곳에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또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잠 17:29)고 말하였다.
    왜 우리는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말로 범죄하거나 실수하지 않고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고 말한다. 시편 37:30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른다”고 말하며,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본문은 그러나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는다”고 말한다. 잠언은, 미련한 자는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며 미련한 것을 쏟으며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증거한다(잠 12:23; 13:16; 15:2; 18:2). 주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악인의 입은 미련하고 악한 말들을 쏟아낸다.
    우리는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는 의인 되기를 원한다. 또 우리는 결코 악한 말을 내뱉지 말고,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하자.
    [29절]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신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자이며 악은 하나님의 계명 즉 성경 교훈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고 악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시며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시편 5: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시편 15:1-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 22:15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멀리하신다.
    본문은 그러나 “[그는]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한다. 의인은 메시야의 의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야고보서 5: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요한일서 3:21-22,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고 이제 성경 교훈에 순종하며 의롭게 삶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자.
    [30절]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말한다. ‘밝은 것’이라는 원어(마오르 רוֹא)는 ‘빛, 발광체’를 가리킨다. ‘눈의 빛’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려워 보인다. 그것이 사람의 눈의 시력이나 내면적 깨달음을 가리킨 것인가? 예수께서는 사람의 내면적 깨달음을 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셨다. 그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다(마 6:22-23).
    그러나 본문의 ‘눈의 밝은 것’ 혹은 ‘눈의 빛’이라는 말은 ‘밝은 눈’ (bright eyes)(NASB)을 가리킨다고 본다. 밝은 눈은 ‘기쁜 얼굴 모습’ (NIV)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눈의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말은 “밝은 눈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Amplified Bible). 어둠은 마음을 우울케 하지만, 빛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 집의 조명도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사람의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어둡고 불쾌한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우울함과 불안과 불쾌함을 줄 것이지만, 밝은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본문은 또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한다”고 말한다. 나쁜 소식은 사람에게 근심과 걱정, 불안과 낙망을 주어 몸에 병이 들게까지 한다. 그러나 기쁘고 좋은 소식은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 평안과 소망을 주며 몸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잠언 25:25는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말한다. 좋은 소식은 시원함과 기쁨을 주는 것이며, 그런 소식은 몸에도 유익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밝은 눈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복음을 전함으로 다른 이들에게 건강까지 주는 자가 되자.
    [31절]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본문은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한다. ‘경계’라는 원어(토카카스 תוֹתּ)는 ‘책망, 꾸지람’이라는 뜻이다. ‘생명의 경계’ 곧 ‘생명의 책망’이라는 말은 ‘생명을 주는’(life- giving)(NASB, NIV) 혹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책망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듣는 귀’라는 말은 생명을 주는 책망을 건성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마음으로 달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교훈과 책망과 징계를 그런 태도로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을 주는 책망을 진심으로 달게 받는 자는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있다. 그는 지혜자이다. 죄를 짓고 그 결과로 불행과 죽음을 당하는 자는 결국 어리석은 자이지만, 의를 소유하고 의를 행함으로 평안과 생명을 누리는 자는 지혜로운 자인 것이다.
    잠언의 여러 말씀들이 같은 교훈을 준다. 잠언 1:7-8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말한다. 경건한 부모의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지만, 그 훈계를 듣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다. 잠언 4:13은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고 말한다. 훈계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훈계는 생명을 준다. 잠언 6:23도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말한다. ‘훈계의 책망’ 곧 ‘징계의 책망’은 생명의 길이다. 또 잠언 10:17도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고 말한다. 징계와 책망을 지키는 것이 생명길이요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잘못 가는 것, 곧 죽음과 지옥형벌의 길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모든 죄를 버리고 의와 선만 행하다가 영생에 이르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자.
    [32절]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본문은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고 말한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BDB). 사람은 징계를 받을 때 자기 잘못을 깨닫고 고치게 된다. 그러나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지 못하고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결국 자신의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사람의 불행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경히 여기는 자이다. 그는 외적,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요소만 중시하고, 영적, 도덕적 요소를 경히 여기는 자이다.
    잠언 1:7은 미련한 자는 훈계를 멸시한다고 말한다. 잠언 1:29-32는, 악한 자들이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그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으며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또 잠언 8:35-36은,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그러나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는다”고 말한다. ‘견책’이라는 원어(토카카스 תוֹתּ)는 ‘책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나 징계의 고난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을 것이다. 그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사람에 대한 지식, 구원의 지식, 영생의 지식, 평안의 길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을 달게 받고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의와 선을 구하며 행하는 자는 지혜와 형통과 승리를 얻을 것이다. 잠언 1:33은 “오직 나[지혜]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교훈과 책망과, 현실 속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자. 그것이 참으로 영생과 행복의 길이다.
    [3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겸손히 그를 따르는 것을 가리킨다. ‘훈계’라는 원어(무사르 רוּמ)는 잠언에 자주 나오는 단어로서 ‘훈련, 징계’(discipline)라는 뜻이다. ‘지혜의 훈련’이라는 말은 ‘지혜로운 훈련’ 혹은 ‘지혜를 주는 훈련’이라는 뜻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혹은 시작]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무사르)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교훈을 잘 받을 것이며, 그의 교훈은 죄악된 일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그를 의의 길로 이끈다.
    본문은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겸손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겸손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한하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바로 알 때, 또 자신을, 유한하고 죄악된 피조물임을 바로 알 때 겸손할 수 있다. 또 사람은 겸손할 때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된다.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한 자리에 오른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람이 교만하면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하고 그의 진노를 받아 수치와 불행을 당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 잠언 1:8-9,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겸손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은 영광과 존귀를 얻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에 순종하자. 또 이것이 지혜의 길이요 존귀함에 이르는 길임을 알자.

    16장: 하나님 의지, 의, 교만, 노 억제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본문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라고 말한다. ‘경영’이라는 원어(마아라크 )는 ‘정돈’(arrangement)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준비’(KJV) 혹은 ‘계획’(NASB, NIV)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마음의 정돈 혹은 계획’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생각들을 정돈하고 일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생각들을 정돈하고 그 일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일은 사람의 몫이다. 사람이 생각 없이, 계획이나 준비 없이 무슨 일을 할 수는 없다.
    본문은 그러나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한다.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기도의 말에 대한 응답을 가리킬 것이다. 말의 응답은 하나님께로서 난다. 즉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람의 계획한 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잠언 16:9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하며, 잠언 19:21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주권적 섭리를 믿는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짐을 믿고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일을 계획하고 행하자.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은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심령’이라는 원어(루코스 תוֹחוּר)는 ‘영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 여러 영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영의 여러 활동들 즉 생각과 감정과 의향 등의 활동들을 의미할 것이다. ‘감찰하다’는 원어(타칸 ן)는 ‘시험하다, 평가하다’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저울에 단다’(weigh)라는 말로 번역하였다(KJV, NASB, NIV).
    사람은 모든 행위를 자신이 보기에 깨끗하게 해야 한다. 자기 보기에 깨끗지 못한 행위가 있으면, 그는 그것을 즉시, 철저히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4:3-4).
    그러나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 모두 깨끗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 곧 우리의 영혼의 활동들을 감찰하시고 시험하시고 저울에 달아보신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드러난 행위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숨은 마음까지, 곧 그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과 의향, 그리고 행동의 동기까지 살피시고 그것이 과연 깨끗하고 선한지, 혹은 불결하고 악한지 시험하고 평가하신다. 시편 7:9,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예레미야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요한계시록 2:23,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는 사람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뿐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하고 모든 잘못된 것을 철저히 회개하자.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본문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한다. ‘행사’는 우리가 하는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 개인적인 일과 가정적인 일을 다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맡기다’는 원어(갈랄 ל)는 ‘[돌을 굴리듯이] 굴리다, 맡기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혼자서만 염려하지 말고 또 조급하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일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홀로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자이시며 우리는 지혜와 능력이 매우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교만하지도 또 낙심하지도 않는다.
    시편 37:5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고 비슷한 진리를 증거하며, 시편 55:22는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5:7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말한다. ‘너의 경영하는 것’이라는 원어(마크쉐보세카 י)는 ‘너의 생각들 혹은 계획들’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행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의 계획한 바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방해거리들을 막아주시고 이루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일은 사람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짐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행할 때 내가 무엇을 이룰 것처럼 교만하지도 말고 또 내가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우리의 모든 일을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 맡기고 지혜와 용기를 구하며 담대히 행하자.
    [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본문은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다”고 말한다. ‘지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최초에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과 그 후에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것을 다 포함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그 씌움에 적당하게’라는 원어(라마아네후 וּה)는 ‘그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모든 일이 그 자체의 목적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특별한 교훈을 주는 뜻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옛날 영어성경(KJV)은 ‘그 자신을 위하여’라고 번역하였다. 고대의 라틴어 벌게이트역과 갈대아어역도,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이 목적을 위하나니, 곧 그것들이 그를 순종하게 함이니라”고 번역하였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창조의 목적이 그러하고 섭리의 목적도 그러하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본문은 또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원문의 뜻은,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하여 [지으셨느니라]”이다. ‘악한 날’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하나님의 공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뜻과 목적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그의 계명에 복종하며 살아가자.
    [5절]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본문은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사람이 왜 마음이 교만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얼마나 크시고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또 자신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허무하고 죄악된 피조물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교만은 죄 중에 근원적인 죄이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다. 디모데전서 3:6에서, 사도 바울은 장로의 자격을 말씀하면서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라고 말한다. 교만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매우 미워하신다. 잠언 6:16-17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 . .”라고 말하였고, 잠언 8:1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하였다. 교만은 피조물이며 죄인인 인생에게 합당치 않은 큰 죄악이다.
    본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한다”고 말한다.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라는 원어(야드 레야드 ד ד)는 ‘정녕히, 확실히’라는 뜻이라고 본다(KB, NASB, NIV). 잠언 11:21도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정녕히]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잠언 16:18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하며, 잠언 18:12도,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마귀와 함께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며 허무하고 불쌍한 죄인임을 알고 교만과 거만을 버리고 범사에 겸손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처신하자.
    [6절]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본문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우선 하나님께 합당하다. 하나님께서는 인자와 진리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속(贖)하여 주셨다. 우리가 죄사함받은 것은 그의 크신 긍휼과 은혜 때문이었고 또 그의 진실하신 구원약속과 그 이행 때문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엡 2:8).
    그러나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안에서] 죄악이 속하게 된다”는 이 말씀은 문맥상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합당하다. 인자(仁慈)와 진실은 성도의 표이다. 주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마 7:21). 성도의 선한 행위는 구원의 공로가 아니지만, 구원받은 증거이며 영생에 이르는 과정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또 진실한 죄의 고백과 청산, 진실한 기도, 진실한 삶은 구원받은 성도, 구원받을 성도에게 합당한 덕이다. 아모스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라”고 말하였다(암 5:14). 주께서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한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하신 후,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다(눅 7:47).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 후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10).
    본문은 또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운 심판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마다 악에서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함의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버리고 인자와 진실의 덕을 간직하자.
    [7절]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본문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행위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경우는 어느 때인가?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며 그의 계명에 일치할 때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게 생각하고 행할 때이다.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성령을 근심시키게 되며(엡 4:30) 심지어 하나님의 노를 일으키게 된다(롬 1:18).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면 대다수의 사람들과 화목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의 원수들, 즉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며 해하려 하였던 자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창세기에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였으나 꿈에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를 받고 그를 돌려보내었고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은 천 개를 주며 화해하였다(창 20장). 또 그는 얼마 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하며 그와 맹세하며 서로 언약을 맺었다(창 21:22-23). 아비멜렉은 이삭 때에도 그와 맹세하며 서로 언약을 맺었다(창 26:26-33). 또 야곱의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해하려고 쫓아왔으나 꿈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그를 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해하지 않기로 맹세하며 그와 더불어 언약하였다(창 31:51-5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며 살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명대로, 성경의 교훈대로, 바른 생각과 말과 행실을 하자.
    [8절]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득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가치는 그 소득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경건과 인격성과 도덕성으로 그의 가치를 평가하신다. 하나님의 주관심은 사람의 죄(罪)와 의(義)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돈을 많이 버는 데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죄 짓지 않고 그의 계명대로, 즉 성경 교훈대로 경건하게, 바르게, 의롭고 선하게 사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사 48:22). 또 성경은 “불의로 치부(致富)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고 말한다(렘 17:11).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신다(롬 1:18).
    인간의 삶에 물질은 필요하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그 필요를 아시고 그것을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들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마 6장). 우리에게 물질적 유여함이나 풍요함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단지, 우리는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자기의 재능에 따라, 자기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하고 일을 배우고, 게으르지 말고 그 직업과 일에 충실해야 한다. 땀흘려 일하는 것은 인생의 의무이다(창 3:19).
    우리는 세상이 장망성(將亡城)임을 알고, 탐심과 돈사랑, 사치와 허영과 낭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며, 죄 짓지 말고 바르게 살며, 근면하며 검소 절약하며 절제하며 자족하며 살자.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본문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의 길, 즉 자기의 삶의 목표와 방향, 일들을 전체적으로도 구상하고 개별적으로도 계획한다. 일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일을 즉흥적으로나 대충하지 말고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여서 철저하게 잘 계획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편에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이다.
    그러나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자, 곧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우리의 모든 계획한 일들을 이루는 하루하루의 과정과 전체의 과정은 다 그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길을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시며, 평탄케도 하시고 어렵게도 하신다. 이사야 45: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29).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방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는 방향으로이다. 시편 23편은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한다(시 23:3). 하나님의 주관심은 우리의 의와 선과 거룩이다.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그 ‘선’은 우리의 영적 성장 곧 성화(聖化)를 가리킨다.
    우리는 범사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잠 3:6)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잠 16:3) 기도하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자.
    [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어(케셈 ם)는 ‘신적 판결’(oracle)이라는 뜻이다(BDB).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기록하신 도덕법에 따른 공의로운 판결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국가나 정부 같은 제도를 두신 것은 세상을 너무 부도덕하고 무질서하게 버려두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일반적 은총의 일이다. 왕들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따라 어느 정도 공의를 집행하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시행한다.
    로마서 13:1-5,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베드로전서 2:13-15,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선한 왕은 물론이고 모든 왕이 다 그러해야 한다.
    모든 위정자들은 다 양심의 법에 따라 공의를 시행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왕이 아니지만, 우리의 처한 곳들에서 공의를 실행해야 한다.
    [11절]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본문은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고 말한다. ‘간칭’(杆秤)과 ‘명칭’(皿秤)은 저울들을 말한다. 저울에는, 지렛대 양쪽에 같은 무게를 매닮으로 수평을 이루게 하는 맞저울(천칭)과 접시에 올려놓아 수평을 이루게 하는 접시저울이 있고, 그 외에 대저울, 스프링식 저울 등이 있다.
    공평한 저울은 하나님의 것이며 저울에 쓰는 추돌들도 그의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정한 저울을 인정하시고 기뻐하신다. 그는 상거래에서 공정한 저울들을 쓰라고 명하셨다. 레위기 19:35-36에서, 그는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잠언 11:1은,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20:10, 23은,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또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성도는 장사를 할 때, 사업을 할 때, 모든 종류의 금전 거래에서, 또 학생은 시험을 칠 때, 속이지 말고 공정하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사람은 더러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모든 인간 관계에서도 공정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과소평가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래도 평가해야 할 것이며, 잘못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 것이며, 시기와 질투심을 버릴 것이며, 남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하며, 또 자기의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우리는 장사나 사업에서, 그 외의 모든 금전 거래에서,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범사에 공정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12절]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본문은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 말한다. ‘악’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양심의 법을 어기는 것, 바른 국법을 어기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상숭배, 불효, 미움, 살인, 음란, 도적질, 거짓말 등이 악이다. ‘왕들’(원문)은 나라의 통치자들로서 나라의 도덕적 질서와 평안과 안보와 번영의 책임을 가진 자들이다. 왕들은 백성이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보좌, 즉 그들의 왕권,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의 정권이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죄와 불의와 부도덕은 나라를 쇠약케 하며 결국 멸망시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의와 도덕성은 나라를 견고케 만들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시기 때문이며 백성들도 의로운 왕권을 따르며 양심상 그것을 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로운 왕은 절대다수의 백성의 지지를 받을 것이다. 언제나 소수의 악한 무리는 있겠지만, 그들의 불평과 대항이 나라를 크게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역사를 보면, 왕들이 의를 구하며 백성들이 의를 따르면 그 나라는 평안하고 견고하였다. 예를 들어, 다윗은 경건하며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하였고(삼하 8:15), 하나님은 그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씀하셨다(삼하 7:16). 다윗 때에는 나라에 평안과 강성이 있었다. 그러나 왕들과 백성들이 악을 행하면 전쟁이 일어났고 기근이 찾아왔으며 또 반란과 반역이 끊임 없이 일어났다. 세상 나라들도 부도덕한 나라들은 오래가지 않아 붕괴되고 멸망하였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의로운 나라가 되어 평안과 강성함을 누리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나라 백성들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위해 기도하자.
    [13절]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본문은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고 말한다. 의로운 입술은 진리를 말하고 비진리를 배척하는 입술이다. 그것은 선을 선이라고 말하고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입술이며, 선을 악이라 하든지, 악을 선이라 하지 않는 입술이다. 불의한 사람들은 불의한 입술, 거짓된 입술을 가지고 있고, 악과 타협하고 악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고 아부하며, 또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 악에 동조한다. 그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좁은 길로 간다. 물론, 그는 쓸데없이, 까닭 없이 남을 논단하지 않고, 계명에 입각하여 진실히 충고한다.
    왕들은 의로운 입술을 기뻐하고 정직히 말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불의한 말, 거짓된 말, 왕에 대한 거짓되고 악한 비방 등은 백성들을 불안하고 근심하고 염려하게 만들고 불평, 불만, 원망하게 만들지만, 의롭고 정직하고 덕스러운 말은 백성들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 위로와 격려를 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말은 힘이 있어 불의하고 악한 말은 백성들과 나라를 혼란시킬 것이지만, 의롭고 정직한 말은 백성들과 나라를 평안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의롭고 정직한 말을 하는 자들은 나라의 도덕성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왕들은 그들을 사랑한다. 나라의 도덕성은 나라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하다. 의롭고 정직한 말을 하는 자들로 인해 나라의 도덕성이 향상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복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고 정직한 말을 하는 자들은 나라를 번영케 하는, 나라의 충신들인 셈이다. 잠언 11:11은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악하고 거짓된 말로 남을 비방하고 사람들을 혼란시키지 말고, 의롭고 정직한 말, 선하고 덕스러운 말로 남들에게 유익을 주자.
    [14절] 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본문은 “왕의 진노는 살육의 사자와 같다”고 말한다. 통치의 권세를 가진 왕이 진노하면 살육의 사자와 같이 무섭다. 왕은 불의와 악을 볼 때 진노하며, 그가 노하면 악인을 죽일 수 있다. 그에게 그런 권세가 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다. 그는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노아 시대에 강포해진 온 세상 사람들을, 또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음란했던 사람들을 홍수로 그리고 유황불비로 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악인들에게 진노하시고 그들을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본문은 “왕의 진노는 살육의 사자와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고 말한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그의 계명들을 지켜 행하는 자이다. ‘쉬게 한다’는 원어(킵페르 ר)는 ‘덮는다, [감정을]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진노한 왕의 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 그는 왕 앞에서 바르고 지혜롭고 선한 말을 겸손히 그러나 담대하게 아룀으로써 왕의 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머물고 모세가 40일간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율법을 받고 언약의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산 아래서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섬기며 즐거이 뛰놀았다. 그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고 그들을 다 멸하고자 하셨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돌이키게 하였다(출 32:10-14).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의를 행하는 지혜자가 되어 사람의 노 뿐만 아니라, 또한 감히 하나님의 노를 쉬게 하는 자가 되자.
    [15절]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본문은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희색’이라는 원문(오르 페네 י־רוֹא)은 ‘얼굴의 빛’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밝고 기쁜 얼굴빛을 가리킬 것이다. 왕의 진노는 ‘살육의 사자’(14절) 같지만, 왕의 기쁜 얼굴빛은 생명을 줄 것이다. 근심과 분노는 자신도, 남도 죽게 한다. 왕의 근심과 진노는 백성의 마음에 근심과 죽음의 두려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평안과 기쁨은 자신도, 남도 살게 한다. 기쁨은 살맛을 나게 하며 삶의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왕의 평안과 기쁨은 백성에게 생기를 줄 것이다.
    본문은 “그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다”고 말한다. ‘그 은택’이라는 원어(레초노 וֹנוֹצ)는 ‘그의 호의’(KJV, NASB, NIV), ‘그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늦은 비’는 봄비, 즉 봄에 곡식을 여물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하고 유익한 비를 가리킨다. 유대 땅에는 가을에 비가 내린 후 곡식을 파종하는데, 그 비를 ‘이른 비’라고 부른다. 그것은 곡식의 파종을 위해 필요하다. 봄에는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데 필요한 봄비가 내리는데, 그것을 ‘늦은 비’라고 부른다. 사람이 기쁘면 다른 이에게 좋은 것을 주려 하듯이, 왕도 기쁘면 백성에게 그럴 것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다. 그가 노하시면 우리에게 죽음뿐일 것이지만, 그가 기뻐하시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이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셨고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또 우리는 그의 의, 그의 기쁨, 그의 은총 안에 항상 거하자.
    [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본문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고 말한다. 금과 은은 세상 사는 데 많은 유익이 있다. 금은(金銀)이 있어야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예쁜 옷도 살 수 있고 편안한 집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금은은 환난 날에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금은은 우리에게 마음의 참된 평안도 주지 못하며, 우리 몸의 건강도 보장해 주지 못한다. 부자가 다 평안하거나 건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혜와 명철은 이것저것을 다 얻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죄 문제의 해결을 얻게 하며 심령의 평안을 얻게 한다. 그것은 행복의 가장 큰 요소이다. 그것은 또 몸의 건강을 얻게 하며 경제의 안정도 얻게 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육의 좋은 것들을 다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3:13-18은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은을 얻는 것보다 나으며 지혜가 진주보다 귀하며 그 오른편에 장수가 있고 그 왼편에 부요와 존귀가 있으며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평강의 길이며 지혜는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하였다.
    지혜는 하나님을 소유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화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지혜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지혜는 곧 경건함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다(딤전 4:8). 경건의 유익은 무엇보다 영생이지만, 현세의 육신적인 일들, 즉 건강과 경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보장된다.
    우리는 금은보다 더 귀한 지혜와 명철을 늘 사모하며 풍성히 누리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의와 선만 힘써 행하자.
    [17절]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본문은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니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고 말한다.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정직한 사람은 악을 떠난다. ‘악’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곧 불경건과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것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악을 떠나는 것이 정직한 자의 대로이다. 정직한 자는 악을 행치 않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는다.
    본문은 “그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한다”고 말한다. 죄 안 지으려고 조심하고 의롭게 살기를 힘쓰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는 자이다. 그렇게 할 때 그의 영혼의 생명과 평안이 보전될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 영혼의 평안을 잃고 고통을 당하고 생명을 잃고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악인의 길은 넓고 평탄해 보여도, 실상 평강이 없고 하나님의 징책으로 인한 고생이 많다.
    그러나 사람이 의를 행하며 죄를 짓지 않으면, 영혼이 평안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사람은 악을 떠나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 성도는 이제 죄 짓지 말고 의를 행해야 한다. 의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3:23).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본문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이 교만하면 패망이 뒤따르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면 넘어짐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교만’이 무엇인가? 교만은 자신을 그릇되이 높이고 남을 낮추어 생각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근본적 악이다. 모든 악의 원인인 마귀의 죄는 교만이다(딤전 3:6).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피조물됨과 죄악됨을 알지 못할 때 교만해진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말씀할 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말하였고(창 18:27),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하였고(사 6:5), 베드로는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다(눅 5:8). 사람은 또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지 못할 때 교만해진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말하였다(고전 4:7). 교만은 사람에게 합당치 않은 악이다. 모든 불순종은 교만에서 나온다.
    그러나 사람이 교만하면 결국 망하고 만다. 하나님은 교만을 매우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죄악들 중에 첫 번째가 교만한 눈이다(잠 6:16). 잠언 8:13은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말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였다”고 말하자,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위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셨듯이(단 4:30), 교만은 멸망의 첩경이다.
    우리는 결코 교만치 말자. 사람이 교만하면 멸망함을 명심하자.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유지하는 길이다.
    [19절]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친구의 영향은 크다.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교만한 자들 가운데서도 교만의 악을 깨닫고 겸손한 길로 나갈 수 있지만, 사람은 보통 친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잠 13:20). 또 교만은 세상적 유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스스로를 강하게 하면 무슨 일을 해낼 것 같고, 사람이 겸손하면 유약하고 무슨 일을 해낼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겸손한 자와 함께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미워하시고 교만한 자를 벌하시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교만하면 패망하며 넘어진다(잠 16:18).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벧전 5:5; 약 4:6에도 인용됨).
    그러므로 성도는 교만한 자들과 친근히 사귀지 않는다. 시편 1:1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한다(고전 15:33). 또 성도는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 시편 131편의 저자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고 말한다(시 131:1). 또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교훈한다(롬 12:16).
    우리는 항상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겸손한 자들과 사귀고, 교만한 마음가짐을 버리고 교만한 자들과 사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본문은,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할 것이다. ‘좋은 것’과 ‘복’도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심리적, 환경적 평안, 육신적 건강, 물질적 여유 등을 포함할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영육의 복을 얻을 것이다.
    첫사람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그들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마귀의 말을 따른 데 있었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1-24; 6:9).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믿고 그에게 기도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던 자이었다(민 12:6-8).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들었고 그 뜻대로 행하였다. 그들은 다 복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다(수 1:7-8). 시편 1:2-3은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편 119:165도,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말씀인 성경에 주의하고 그것을 항상 읽고 배우고 묵상하며 힘써 실천하자. 그것이 복된 길이다.
    [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본문은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는다”고 말한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믿고 실천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은 명철하다고 일컬음을 받는다. 그는 명철하고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생각이 깊지 못하고 분별력이 없어 자주 실수하고 범죄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생각이 있고 분별력이 있어 불의와 악과 거짓을 버리고 의와 선과 진실을 힘써 실천한다.
    본문은 또 “입이 선한 자가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지혜로운 자와 입이 선한 자를 같은 부류에 둔다. ‘선하다’는 원어(메세크 ק)는 ‘달콤함, 매력적임’이라는 뜻이다. ‘입이 선한 자’라는 말은 ‘입술의 달콤함’ 즉 즐거움을 주는 말, 은혜로운 말을 하는 입술을 가리킨다. ‘남의 학식’이라는 원어(레카크 ח)는 단순히 ‘지식’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듣는 이의 지식뿐 아니라, 말하는 이의 전달 능력 즉 설득력을 의미한다고 한다(BDB). 근래의 한 영어성경은 “말은 달콤함은 설득력을 증가시킨다”고 번역하였다(NASB).
    즐거움을 주는 말을 하는 입술은 듣는 이의 지식을 더하게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말은 남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주지만, 지혜로운 자의 말, 곧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은 듣는 이의 지식을 더하게 할 것이다. 잠언 10:21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은 말하는 이의 전달 능력도 더하게 할 것이다. 그는 더 설득력 있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때 닫힌 마음을 열고 잘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여 그들에게 지식을 더하게 하는 자가 되자.
    [22절]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본문은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된다”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지혜로운 자를 가리킨다. 명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알고 의를 행하는 것이며, 명철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명철한 자에게는 그의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된다. ‘생명의 샘’은 생명수를 길을 수 있는 곳이다. 생명수는 생명을 주는 유익한 교훈을 가리킬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지혜와 명철은 생명을 주는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은 우리를 의의 길로 행케 하고,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주고, 몸에 건강과 힘도 주고, 마침내 우리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잠언 3:18은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고 말하며, 잠언 4:23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하고, 잠언 11:30은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는 의를 주고, 의는 생명을 준다.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다시 번역하면, “미련한 자들의 훈계(혹은 징계)는 미련함이니라”이다(KJV). 미련한 자들에게서는 미련함만 나온다. 그들의 훈계, 곧 그들의 가장 최선의 교훈과 진지하게 보이는 훈계도 미련함이다. ‘미련함’은 인간의 본분을 저버리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결국 영육의 사망에 이른다. 즉, 심령의 어두움, 고통, 침체, 방황과, 몸의 쇠약과 질병을 가져오고, 또 영원한 멸망 곧 둘째 사망이라 불리는 지옥 형벌에 이른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명철한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인 성경책을 가까이 하고 죄짓지 말고 의와 선을 힘써 행함으로 가능하다.
    [23절]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는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력, 사리판단력, 선악분별력, 선악판단력을 가리킨다. ‘슬기롭게 한다’는 원어(야스킬 לישׂ)는 ‘가르친다’는 뜻이다(BDB, KJV, NASB).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 즉 그 자신의 입을 가르친다. ‘그 입을 가르친다’는 말은 그 자신의 입에 말할 바를 가르쳐서 바른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 등을 하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지혜로운 자의 마음이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한다고 말한다.
    잠언의 다른 곳들에 보면,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고(잠 10:31), 여러 사람을 교육한다고 말한다(잠 10:21). 또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고(잠 12:18), 지식을 선히 베풀고(잠 15:2), 그 입술은 지식을 전파한다고 말한다(잠 15:7). 이것은 남을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자신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반면에, 지혜 없는 자 곧 미련한 자는 이웃을 멸시하고(잠 11:12),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한다고 말하며(잠 12:18), 또 그 마음에 정함이 없고(잠 15:7), 그 미련한 것을 나타내고(잠 13:16),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으며(잠 15:2), 그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한다고 말한다(잠 12:23).
    다시 정리하면, 지혜를 가진 사람은 지혜로운 말, 바른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고, 지식 곧 의의 지식, 선한 지식, 덕스러운 지식을 더하고, 자신과 남들에게 유익을 준다. 그렇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 곧 미련한 사람은 미련한 말, 악한 말, 불의한 말, 부덕한 말을 하고, 자신의 무지와 죄악을 더하고, 자신과 남들에게 해를 끼친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의 지혜로운 마음, 즉 사리분별력과 판단력, 선악분별력과 판단력을 구하자. 우리는 지혜로운 말을 하는 자, 곧 의롭고 선하고 은혜롭고 덕스러운 지식의 말을 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본문은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선한 말’이라는 원어(이므레 노암 ם יאּ)는 ‘사랑스러운 말, 기쁘고 즐거운 말’이라는 뜻이다. 사랑스러운 말, 기쁘고 즐거운 말은 꿀송이 같고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 잠언 4:22는 지혜의 말이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몸의 건강이 된다고 말하고, 잠언 12:18은 지혜로운 자의 혀가 양약 같다고 말한다.
    죄는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염려, 두려움을 만들고, 그것은 슬픈 말, 불쾌한 말, 싫은 말을 하게 만들고, 그런 말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에 쓰고 뼈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스럽고 기쁘고 즐거운 말은 꿀송이 같고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될 것이다. 그런 말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도, 다른 이의 몸과 마음에도 유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자고 교훈하며(롬 15: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하고(엡 4:29), 또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한다(살전 5:14).
    하나님의 말씀은 선한 말의 본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스럽고 기쁘고 즐거운 말씀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즐거움이며(24절), 그 맛이 꿀보다 더 달며(103절), 그가 그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한다(127절). 실상,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이며(갈 5:22) 천국은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이다(롬 14:17).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 안에, 또 그의 말씀과 의 안에 거하여 사랑과 기쁨을 누리며, 또 남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랑과 기쁨의 말을 하자.
    [25절]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본문은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잠언 14:12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여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도덕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율법의 반영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범죄함으로 본성이 부패되었기 때문에 사람의 양심도 때때로 어두워져 있고 더러워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보기에 바른 길이 종종 사망의 길인 경우가 있는 것이다.
    구약의 사사 시대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 시대의 특징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다.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나 사사 시대는 우상숭배와 음란의 풍조가 포용되었던,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대이었다(삿 18, 19장).
    오늘날도 사사 시대와 비슷하다. 교회들 안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있고, 황금만능주의, 쾌락주의의 풍조가 있다. 어떤 교회들은 낙태와 동성애도 용납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들이다. 이런 풍조의 용납은 확실히 사망의 길이다.
    도덕 기준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십계명은 의의 기준이며 우리의 생활 원칙이다. 그 법들은 양심에도 부합한다. 도덕법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들은 사망에 이르는 넓은 길이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만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이다. 넓게 말하면,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견해를 표준으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표준으로 삼고 살자. 그것이 의의 길, 생명의 길이다.
    [26절]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본문은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쓰나니 이는 그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고 말한다. ‘노력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쓴다’는 원문(네페쉬 아멜 아멜라 로 וֹלּ ה ל־שׁ)은 ‘노동자의 영혼은 자신을 위해 수고한다’는 뜻이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가 ‘식욕’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하여 영어성경들은 ‘노동자의 식욕(appetite)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NASB, NIV).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 수고한다. 왜냐하면 그의 입이 그를 독촉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며 사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19). 농사나 목축이나 고기잡이나 장사나 심지어 여성들의 집안 일도 다 수고로운 일들이다. 욥은 인생의 삶이 힘든 노동 같다고 말하였다(욥 7:1). 모세는 인생의 일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표현하였다(시 90:10). 사람은 일하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일한다. 일하는 즐거움이 있고 먹는 즐거움이 있다. 사람은 근면해야 한다. 게으름은 죄악이다.
    그러나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이 모든 수고로운 삶이 실상 헛된 일이다. 주께서는 그것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요 6:29) 하나님의 일들을 받드는 것이다. 그것들은 영혼 구원의 일, 성화(聖化)의 일, 전도와 교회 건립과 확장의 일, 전도와 구제를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하는 헌금 등이다.
    우리는 자기 일, 곧 직장과 가사의 일에 근면하되, 특히 하나님의 일들, 곧 믿음의 일, 성화의 일, 전도와 교회 건립과 구제의 일을 힘쓰자.
    [27절]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본문은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며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불량한 자’라는 원어(이쉬 벨리야알 ל שׁיאּ)는 ‘벨리알의 사람’이라는 말로서 ‘악한 자, 무가치한 자’라는 뜻이다. ‘악’이라는 원어(라아 ה)는 도덕적인 악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해(害) 즉 정신적, 심리적인 해와 물질적, 육신적 해를 다 포함한다. ‘꾀하다’ (plot)(NIV)는 원어(카라 ה)는 ‘[우물이나 함정 등을] 파다, 파내다(dig up)(KJV, NASB), 탐구하다’는 뜻이다.
    무가치한 자는 악을 꾀하며 궁리한다. 선한 자는 선한 일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행하지만, 악한 자는 악한 일을 생각하고 악한 일을 행한다. 또 무가치한 자의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다. ‘불같은 것’이란, 미움, 시기, 질투, 욕심에서 나오는 교만하고 남을 멸시하는 독한 감정으로 독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하셨고(마 12:34-35), 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사도 바울은 악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하였고(롬 3:13-14), 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였다(엡 4:31). 또 야고보는,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교훈하였다(약 3:14-16).
    우리는 악을 꾀하고 악한 것을 말하고 행하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선한 일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말하고 행하는 선한 자가 되자.
    [28절]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본문은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패려하다’는 원어(타푸코스 תוֹכ)는 ‘정로를 벗어나다, 비뚤어지다, 패역하다’는 뜻이다. 비뚤어진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대항하고 불순종하며 올바른 교훈을 대적하는 자이다. 그는 남에 대한 이해심이 없고 자기 중심적이며 마음이 높고 욕심이 많은 자이다. 그런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 다툼은 주로 인격의 부족에서 생긴다.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또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욕심]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약 4:1-2). 사람의 마음이 온유 겸손하고 남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있고 또 오래 참을성이 있으면, 서로간에 다툼이 생길 여지가 없을 것이다.
    본문은 “말장이[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가 많다. 그러므로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한다. 특히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잘 하는 것은 인격적 결함이다.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한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들 6, 7가지 중에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가 포함되어 있다(잠 6:19). 이간은 한 사람에게 한 말과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 서로 다를 때, 또 상대에게 이해심을 가지게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그릇된 오해를 충동질할 때 생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남을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라고 교훈한다(엡 4:31-32).
    우리는 비뚤어진 심령을 버리고 온유 겸손하고 남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하며, 또 말로 형제를 이간하지 말고 화목과 덕을 이루어야 한다.
    [29절]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본문은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不善)한 길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강포한 자’라는 원어(카마스 ס)는 ‘사납고 폭력적인 자’라는 뜻이다. ‘불선(不善)한 길’이라는 말은 남을 해치는 악한 길을 말한다. 사납고 난폭한 자는 그 이웃을 꾀어 선하지 않은 길 곧 남을 해치는 악한 길로 인도한다.
    성도는 사납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웃을 불선한 길로 이끄는 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시편 15:1-3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는 자니이다”라고 말한다.
    성도는 악한 자와 친구가 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인간의 교제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사람은 남을 따라하는 모방의 습성이 있다. 선한 자와 교제하면 선한 영향을 받고 악한 자와 교제하면 악한 영향을 받는다. 잠언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한다(잠 13:20). 시편 1:1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말하였고(고전 15:33), 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교훈하였다(고후 6:14-16).
    우리는 사납고 강포한 자가 되지 말고 주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는 자가 되자. 또 악한 자와 교제하지 말고 선한 자들과 교제하자.
    [30절]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본문은, “눈을 감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고 말한다. ‘[눈을] 감는다’는 원어(아차 ה)는 ‘감는다’(shut)(BDB, KJV), ‘찌푸린다(contract), 좁힌다(narrow)’ (KB)는 뜻을 가진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눈짓하다’(wink)는 말로 번역하였다(NASB, NIV). 또 ‘[입술을] 닫는다’는 원어(카라츠 ץ)는 ‘깨물다(nip), 움츠리다(pinch)’(BDB), ‘오므리다’(purse) (KB)는 뜻을 가진다. 근래의 영어성경들은 ‘움츠리다’(compress)(NASB) 혹은 ‘오므리다’(purse)(NIV)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의 눈을 찌푸리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그의 입술을 움츠리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고 다시 번역할 수 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다. 교만하고 패역한 사람은 그의 교만과 패역함이 그의 눈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잠언 6:16-17은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 등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악하고 교만한 마음은 그의 눈, 특히 그의 찌푸린 눈으로 나타난다.
    또 악한 사람의 입술도 그의 악한 마음을 드러낸다. 말은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 주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5). 사도 바울은 “[악한 자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하였다(롬 3:13-14). 사람의 악하고 패역한 마음은 그의 말과 그의 입술 모양으로도 나타난다. 그 입술을 움츠리는 자는 패역한 일을 꾀하고 악한 일을 이루는 자이다.
    우리는 눈을 찌푸리거나 입술을 움츠리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눈빛이 선하며 입으로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선한 자가 되자.
    [31절]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본문은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장수(長壽)를 약속하셨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또 잠언 3:16은 “[지혜의]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성경은 악인들에게 단명(短命)을 경고한다. 악인들의 단명은 마치 불량품 기계와 같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고백한다(시 55:23).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며 그것은 의로운 길에서 얻는다. 잠언 20:29는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고 말한다. 실상, 의인들의 백발만 복되다. 사람이 악을 행하면서 장수하는 것은 결코 영화의 면류관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그는 더 많은 죄를 지을 것이며 그의 죄의 벌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인의 장수는 복되며 의로운 길에서 얻는 그 백발은 참으로 영광의 면류관이다.
    의인들의 백발은 지혜의 표이다. 그것은 많은 실패와 성공 속에서 얻은 지혜를 증거한다. 또 그 백발은 성화의 표이다. 인생의 일생은 성화의 과정이다. 또 그 백발은 봉사사역의 표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봉사한 표이다. 또 그 백발은 그의 행복의 표이기도 하다. 성도의 삶은 복되다. 그러므로 노인들은 공경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9:32).
    노인들은 백발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꼭 머리에 검정색 물감을 들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의롭게 살면서 영화의 면류관인 백발을 가지자.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용사’나 ‘성을 빼앗는 자’는 아무나 되지 않는다. 그들은 체력이 있고 전투 기술과 능력도 있는 자들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지혜와 용기가 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이는 말씀이다. 아직 인격적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고 노하기를 속히 한다. 그는 자기 감정과 성질대로 말하고 화를 내고 행동하며 실수하고 범죄하는 것이다. 그는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어린아이이다.
    자기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인격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은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다. 그것은 용사보다 낫고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은 인격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들 중에 ‘절제’를 꼽았다(갈 5:23). 또 그는 사랑을, “오래 참고 온유하며” 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전 13:4, 7).
    그러므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교훈하였다(약 1:19-20). 또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남을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31-32).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삶으로 절제의 열매를 맺어 자기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자가 되고, 노하기를 더디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되자.
    [33절]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본문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제비를 품에 던지나](원문)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한다. 제비뽑기는 옛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한 방법이었다. 레위기 16:8에 보면, 속죄일에 사용할 두 염소 중에 제비뽑기를 통해 ‘내어놓는 염소’가 구별되었다. 여호수아 7:1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한 아간을 찾아낼 때 제비뽑기를 사용하였고, 여호수아 18:10에 보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제비뽑기로 분배하였다. 또 사도행전 1:26에 보면, 열한 사도들은 사도 한 명을 보선하여 맛디아를 세울 때 제비뽑기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세상 사람들도 종종 제비뽑기를 사용하였다. 요나가 탄 배의 선장은 풍랑의 원인을 찾는 데 제비뽑기를 사용하였고(욘 1:7), 악한 하만의 동료들이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몰살시킬 날을 정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에 3:7).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 군병들은 그의 옷을 나눠 가지려고 할 때에 제비뽑기를 하였다(마 27:35).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다. ‘일을 작정하기’라는 원어(콜 미슈파토 וֹט־ל)는 ‘그것의 모든 결정’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의 뜻이나 우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사용하기도 하시고 우연해 보이는 일들도 있고 사람의 결심이나 회의의 결정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11).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불성실한 자가 되지 말고 인간의 할 도리를 다 해야 하지만, 우리의 계획하는 모든 일의 결정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자.

    17장: 화목, 용서, 말 절제

    [1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다’는 말은 고기나 우유나 과일이 없는 가난한 가정의 모습을 나타낸다. ‘화목하는 것’이라는 원어(솰와 ה)는 ‘조용함, 평안함’이라는 뜻이다. 다투는 곳에는 시끄러움이 있으나 서로 사랑하고 화목한 곳에는 조용함과 평안함이 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다.
    ‘육선(肉饍)’이라는 원어(지브케 י)는 ‘제물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의 규정대로, 화목제물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화제(火祭)로 드리고 또 일부분을 제사장에게 돌린 후에, 나머지는 제사드린 자들이 먹는 것을 가리킨다. 제물들이 집에 가득하다는 말은 물질적으로 유여하고 식탁에 고기가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물질적 유여가 있는 집이라도 다툼과 시끄러움이 있으면 행복하지 못하다.
    가정의 행복은 돈의 많음에 있지 않고 가족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조용하고 평안한 삶에 있다. 잠언 15:17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부요를 추구하지 말고(딤전 6:9-10) 평안함과 자족하는 마음을 구해야 한다. 골로새서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6:7-8,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는 부하려 하는 욕심을 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딤전 6:6-8) 서로 사랑함과 평안한 마음을 귀중히 여기며 지키자.
    [2절]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
    본문은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다”고 말한다. 종들 중에는 슬기로운 종이 있고 미련한 종이 있을 것이다. 미련한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성질도 말씨도 나쁠 것이지만,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뜻을 알고 부지런하며 충성되고 헌신적이며 성격도 말씨도 좋을 것이다.
    본문에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런 아들은 부모에게 수치가 된다. 그러므로 주인은 그가 신임하는 그의 충성된 종에게 자기 아들을 맡기며 그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어 아들을 다스리게 한다. 그 종은 주인의 기쁘고 선한 뜻을 받들어 아들을 충실하게 교육하며 돌볼 것이다.
    본문은, “또 [슬기로운 종은]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고 말한다. ‘아들들’이라는 원어(아킴 םיאַ)는 ‘형제들’이라는 뜻이다(KJV, NASB, NIV). 그 형제들이란 그 아들의 형제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 아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유업을 나눠 얻는다는 말씀은 주인이 그 종을 아들들 중 하나처럼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마치 다윗이 므비보셋의 종 시바에게 그 주인의 소유를 주었듯이(삼하 16:4), 주인은 그 종에게 아들들에게 줄 기업의 일부를 줄 것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교역자들과 교회 직분자들은 그의 종들이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주실 기업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교훈하셨다(마 24:45). 미련한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게으르고 악하지만, 슬기로운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부지런하고 충성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않고 영광을 돌리는 좋은 아들들이 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이 되자.
    [3절]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본문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연단하다’는 원어(바칸 ן)는 ‘검토하다, 시험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검토하시고 시험하신다.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으로 악을 생각하고 행하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으로 선을 생각하고 행한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심히 부패되어 있었다. 예레미야 17:9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였다.
    중생은 마음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서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겔 36:26).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였다(엡 4:22-24).
    성화는 마음의 계속적 변화이다. 에베소서 4:23에,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아나네우스다이 ἀνανεούσθαι)는 현재부정사로서 계속 진행적, 반복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우리의 성화에 관계된다. 용광로가 원광을 제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금과 은을 만들어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여 악성과 악습을 제거하고 깨끗하고 선하고 좋은 인격을 만드신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마음의 단련이다. 그것은 계속적이며 점진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을 항상 긍정하고 그 현실 속에서 마음의 단련을 받아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 26:2).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 겸손하게 되고 더러운 마음이 깨끗하게 되고 악한 마음이 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단련을 받자.
    [4절]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본문은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고 말한다. ‘궤사한’이라는 원어(아웬 ןאָ)는 ‘거짓된’(KJV), ‘악한’(BDB, NASB, NIV)이라는 뜻이다. 거짓과 악은 잘 통한다. 사람의 악은 마귀의 거짓말에서 비롯되었다(창 3장). 그 후, 거짓은 인간 본성의 죄악성의 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예레미야 17:9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였다. 예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악들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 등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
    거짓과 악은 서로 통한다. 악은 정당성이 없으므로 속여야 행할 수 있고 거짓말은 대개 악을 행하기 위해 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거짓말 자체는 악이다. 그러므로 선의의 거짓말도 안 해야 한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도 좋아야지, 목적이 좋다고 수단이 나빠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길을 명하실 때 거짓말하지 말 것도 명하셨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하였다(엡 4:25).
    성경은 거짓말을 지옥갈 죄로 크게 여긴다. 요한계시록 21:8은,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한다. 또 요한계시록은 거짓말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증거한다(계 21:27; 22:15).
    우리는 악을 행치 말고 악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멀리하자. 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고 또 거짓말을 듣지도 말자.
    [5절]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본문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잠언 14:31도,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학대하는 자가 왜 그를 지으신 자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되는가? 왜냐하면 첫째로 가난한 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잠언 22:2에 말씀한 대로이다. 둘째로, 가난한 자의 환경여건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모든 환경여건은 창조주시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작정과 뜻 가운데 주신 것이다. 셋째로, 부자들의 물질적 유여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대상 29:14에서, 다윗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였고, 사도 바울은 교만하고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책망하듯 말하기를,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하였다(고전 4:7).
    본문은 또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이다”라고 말한다. 잠언 24:17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는가? 왜냐하면 첫째로 자신도 그 사람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자신이 재앙을 받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신에게 어떤 의가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의 작은 의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또 재앙 당하는 자를 기뻐하지 말자. 우리는 항상 이웃을 긍휼히 여기자.
    [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본문은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말한다. 노인들에게 손자들은 기쁨과 낙이며 세상적인 소망이며 자랑거리이다. 노인이 경건하고 훌륭한 손자들을 많이 가진 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은 일찍이 신명기 28장에서 그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그의 몸의 소생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28:4).
    그러므로 시편 112:1-2는,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하였고, 시편 127:3은,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또 시편 128:3-4는,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말하였다. 노인에게 경건하고 지혜롭고 착한 손자와 손녀가 많고 그들이 교회와 사회의 훌륭한 인물들이 된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복이다.
    본문은 또 “아비는 자식의 영화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자녀들에게는 그들의 아빠,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일 것이지만, 특히 그 부모가 복될 때 부모는 그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 부모는 언제 복된 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복을 받을 때이다. 즉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과 기도 응답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을 체험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또 부모가 교회에 기둥 같은 성도와 일꾼이 되고 사회에도 빛이 되고 인생의 좋은 본이 될 때, 자녀들은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적, 영적 자녀들이 번창하고 복되기를 기도하며, 또 자녀들에게 신앙적, 인격적 본이 되고 복의 본이 되기를 노력하자.
    [7절] 분외의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본문은 “분외의 말을 하는 것이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말한다. ‘분외의 말’이라는 원어(세팟 예세르 ר ת)는 ‘과도한 말, 거만한 말’이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지만(BDB, NIV), 어떤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훌륭한 말’(KJV, NASB)이거나, 어떤 고대 번역대로 ‘경우에 맞는 말’(Vg)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며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며, 그에게는 훌륭한 말이나 경우에 맞는 말이 합당치 않다.
    본문은 또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더욱 합당치 아니하도다]”라고 말한다. ‘존귀한 자’는 왕이나 방백 등을 가리키지만, 신약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요 1:12; 벧전 2:9).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잠 6:16-19).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며(요 8:44),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그러므로 존귀한 자에게는 거짓말이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주장과 십부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利)를 미워하는 자이어야 하였다(출 18:21, 24). 또 신약교회의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딤전 3:8). 성도는, 또 교회 직분자는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진실은 신임의 기초이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믿을 수 없다. 성도는 자신의 이익 관계를 떠나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성도로서, 또 교회 봉사자라면 더더욱, 모든 거짓말을 버리고 항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에게 합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8절]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
    본문은,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고 말한다. ‘뇌물’이라는 원어(쇼카드 ד)는 ‘선물’ 혹은 ‘뇌물’이라는 뜻이다(BDB). 영어성경들은 ‘선물’(KJV) 혹은 ‘뇌물’ (NASB, NIV)이라고 번역하였다. 선물과 뇌물은 가깝다. 선물이 의도가 나쁘면 뇌물이 된다. ‘임자’는 ‘소유자’라는 말로서 그것을 주는 자든지 받는 자든지 그것을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 선물 혹은 뇌물은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 보석과 같아서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한다.
    선물은 어느 때든지 효과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닫힌 마음을 연다. 잠언 18:16은,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19:6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21:14는,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도 감독 곧 장로의 자격 요건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들어 있다(딤전 3:2). 그것은 선한 일이다.
    뇌물도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뇌물은 불의를 조장하고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고 사회를 부패시킨다. 잠언 17: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이스라엘 사회가 부패했을 때, 뇌물이 성행하였다. 이사야 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3:8). 또 시편 15:5는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는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않는 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남에게 선을 베풀고 남을 대접하는 좋은 인격자가 되자. 그러나 뇌물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이다.
    [9절]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본문은,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잠언 10:12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 상대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다. 사도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한다(벧전 4:8).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남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이 와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8:22).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고 말하였다(고전 13:4, 7). 우리는 남의 허물을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하였다(엡 4:31-32).
    본문은 그러나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남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한번 용서하면 그것을 거듭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31:34에서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웃의 잘못을 거듭 말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가 되고, 그들의 실수와 잘못을 거듭 말하는 사랑 없는 자가 되지 말자.
    [10절]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본문은,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 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고 말한다. ‘경계’라는 원어(게아라 ה)는 ‘책망’이라는 뜻이다(BDB). 본절의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한마디의 책망이 총명한 자 속에 더 잘 박이느니라”이다.
    교육에 있어서, 미련한 자와 지혜자는 큰 차이가 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는 교만하고 반항적이고 불평 원망하고 항상 남의 탓만 한다. 그는 바른 책망을 진지하게 받지 않는다. 그에게는 백 대의 매도 별 효과가 없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증거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반복적으로 범죄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의 죄악성 곧 전적 부패성을 잘 나타낸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며 남의 권면을 듣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잠 12:15; 13:1). 미련한 자의 미련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잠언 27:22는,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이다. 그는 책망을 들을 때 겸손히 받고 진지하게 자신을 반성하며 고친다. 잠언 12:15는,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부모나 선생에게 매를 맞을 필요도 없다. 왜냐면 그에게는 한마디의 책망이 효력이 있고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지혜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데 있다.
    우리는 교훈과 징계 이전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먼저 지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함을 알고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자.
    [11절]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본문은,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쓴다”고 말한다. ‘반역’은 하나님이나 부모나 윗사람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쓴다. 왜 그런가? 그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높이고 남을 무시하고 자신을 크게 생각한다. 그는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순종하고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불평하고 원망하며 대적하고 반항한다.
    구약시대의 고라는 한 예이다. 고라는 레위 지파 사람인데 동료들과 함께 당을 지어 유명한 족장 250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하였다. 그는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 위에 자신을 높인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아 놓고 모세를 대적하였다(민 16:1-3, 19). 신약성경 유다서에 보면, 초대 교회의 거짓 교사들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 권위를 가진 목사와 장로들을 무시하고 교회의 일들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였고 당을 지어 교회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의 일들을 방해하였다(유 8, 16, 19).
    선한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종하고 질서를 지킨다. 그들은 윗사람을 존중하고 복종하며 동료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이 속한 단체를 건립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 세우신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하였고(벧전 2:13-14, 17), 바울도 주 안에서 성도들을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을 가장 귀히 여기라고 교훈하였다(살전 5:12-13). 또 히브리서 13:17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그러므로 그에게[악한 자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말한다. 모세를 대적하였던 고라와 그 동료들과 그 가족들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땅 속에 묻히어 멸망하였다(민 16:31-33).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에 복종하자. 우리는 결코 반역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12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본문은,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말한다. 새끼 빼앗긴 암콤은 매우 화가 나서 난폭한 상태에 있을 것이다. 미련한 자는 그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즉 미련한 자는 심히 난폭하고 거칠며 이성도 이해심도 자제심도 없어 보이는 자이다.
    사람은 참으로 미련하고 악하다. 사람이 서로 위하고 서로 사랑하며 조용히, 평온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우 이기적이고 악하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무시하고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적대시한다. 서로 속이고 속으며 서로 죽이고 죽는다. 세상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싸움터이다.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부와 권세를 얻으려 하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불법과 비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때로 짐승보다도 못하다. 예를 들어, 헤롯 대왕은 자기의 왕위의 안전을 위하여 베들레헴 부근의 두 살 이하의 어린 아기들을 다 학살하였다(마 2장). 이것은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보다도 더한 일이며, 이런 일이 인류역사에는 많이 있었다. 20세기의 2차 세계대전 기간, 독일의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멸종정책을 폈고 약 6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또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오늘까지 세계적으로 약 1억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이북에서 일어난 학살과 강제처형들도 포함된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는 선을 행하고 남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졌어도 못 배우고 못 가진 자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고 선을 베푼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승보다도 못한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는 지혜로운 자로 살라고 교훈하신다.
    [13절]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본문은,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가 악으로 악을 갚는 것도 금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마태복음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도 바울도 같은 교훈을 주었다. 로마서 12: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물며, 악으로 선을 갚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그것은 배갑절의 악이다. 사람이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도 악한 일인데, 자기에게 선을 베푼 자에게 악으로 갚는 것은 얼마나 큰 악인가!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사시대에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도와 기드온의 아들 자기 형제 70명을 죽이게 하였는데, 3년 후 하나님께서는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케 하셨고 아비멜렉과 많은 세겜 사람들을 죽게 하셨다(삿 9장). 또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배려로 7살에 왕위에 올랐던 유다 왕 요아스는 후에,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에서 돌로 쳐죽이게 했는데, 1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람 군대의 침입으로 인해 크게 부상을 입게 하셨고 신하들의 모반으로 침상에서 죽임을 당케 하셨다(대하 24장).
    우리는 악으로 선을 갚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자가 되자.
    [14절]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본문은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말한다. 작은 싸움에서 큰 싸움이 나오며 사소한 다툼이 큰 다툼으로 확대된다. 담뱃불이 대형 산불로 번진다. 1914년 세르비아의 한 암살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시스 페르디난드를 쏘아 죽인 사건이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고 4년간의 전쟁으로 전세계적으로 군인들만 약 천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다툼은 육신적 죄악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0에서 사람을 천국에 들어가게 못하는 육체의 일들을 열거하면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 등을 말하였다. 야고보도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말하였고(약 3:14-15) 또 인간의 다툼은 육신적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약 4:1-2).
    물론, 진리의 싸움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근본적 진리들에 있어서는 일치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으며 끝까지 싸워야 하고, 중요한 진리들에 있어서도 겸손과 인내로 변론함으로 일치된 생각에 이르기를 힘써야 하지만, 사소한, 지엽적, 혹은 불확실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하고 서로 관용해야 하며 무익한 논쟁이나 변론을 피해야 한다(딤후 2:23-24).
    그러므로 진리의 싸움 외에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려면 겸손과 관용과 인내와 양보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양보의 정신을 발휘하였다(창 13장). 우리는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전 1:10).
    우리는 꼭 필요한 진리의 싸움, 그것도 근본적 진리의 싸움 외에는 가급적 싸움을 피하고, 겸손과 양보, 인내와 관용의 덕을 가지자.
    [15절]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본문은,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말한다. 악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은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이 흐린 것이며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 때 그러하기 쉽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자기 가족이나 친한 친구의 잘못을 옹호하기 쉽다. 그러나 바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유다 왕 아사는 우상숭배하는 모친을 정죄하여 그의 태후의 위를 폐하였다. 또 악한 자를 의롭다고 하는 자는 본인도 악한 자일 가능성이 많다. 악한 생각과 판단은 악에서 나온다. 사실상, 악인을 의롭다고 칭찬하면, 그로 회개치 못하게 함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또한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도 매우 악한 일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악평하며 비방하였다.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850 대 1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고, 미가야는 거짓 선지자들과 400 대 1의 싸움을 싸워야 하였다. 예레미야도 거짓 선지자들과 싸웠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악하다고 비방하였고 그를 정죄하여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게 하였다. 율법주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악하고 속이는 자, 돈이나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였고 정죄하였다.
    그러나 악인을 의롭다고 말하든지 의인을 악하다고 말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받을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를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호의가 주께 베푼 것이요 그를 해친 것이 주를 해친 것이다(마 25:31-46).
    우리는, 비록 긍휼과 용서의 마음을 가지지만, 깨끗한 양심과 말씀의 바른 지식을 통해 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바른 판단을 하자.
    [16절]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본문은,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다. 그는 진리를 깨닫는 마음, 그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나 본문은 “미련한 자가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진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나 사모함이 없으면서도 때로는 세상적 욕심으로나 형식적, 외식적으로 지혜를 돈으로 사려 한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마술쟁이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사람들이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행 8:18-19).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책망하였다(행 8:20, 22).
    돈은 자신이 지혜를 얻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다. 돈이 있으면 시간의 여유를 조금 가질 수 있고 성경책이나 기타 신앙적 서적들을 살 수 있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돈으로 지혜를 살 수는 없다. 지혜는 돈을 가지고 얻을 수 없으며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돈이 드는 일이 아니다. 예배당은 입장권을 사서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여호와는 지혜를 주신다”(잠 2:6).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얻을 수 있고 충만히 얻을 수 있다. 야고보서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그것을 받아 누리자. 또 돈을 쓰되, 지혜를 위해, 선한 일을 위해 바르게 쓰자.
    [17절]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본문은,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참된 친구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사랑하는 자이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같이 강도 만나 죽게 된 이웃을 위해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않고 돌보는 자이다. 주께서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이 참 사랑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우리가 주의 명령대로 행하면 주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3-14).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친구이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시 25:14).
    본문은 또,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서로 형제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마 28:10). 예수 믿고 구원얻은 성도들은 서로를 향해 형제 사랑을 가져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형제를 미워하면 아직 사망 가운데 사는 자라고 말했고, 또 주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며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였다(요일 3:14-17).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거나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고 말하였다(고전 13:4-7). 참 사랑은 친구와 형제가 위급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를 돕는다.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이 시날 왕과 그 연합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가신들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가서 밤에 쳤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즉 약 240킬로미터 이상(서울에서 대구나 광주까지)을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을 찾아왔다(창 14:14-16). 그것이 참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된 줄 알고 서로를 위하고 어려울 때 도울 수 있는 좋은 친구가 되고 좋은 형제가 되자.
    [18절]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본문은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지혜 없다’는 원어(카사르 레브 ב־ר)는 ‘마음이 없다’는 말로서 ‘지혜와 지식이 없다’는 뜻으로 잠언에서 빈번히 쓰인다. ‘손을 잡는다’는 원어(토케아 카프 ף )는 ‘손바닥을 친다’는 말로서 ‘서약하다, 보증하다’는 뜻을 가진다(BDB). 손바닥을 치는 것은 옛 시대에 서약하고 보증하는 행위였다고 보인다. 욥기 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잠언 6:1,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손바닥을 쳤으면].”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손바닥을 치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본문은 보증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자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보증을 서지 않지만, 지혜 없는 자는 남의 보증을 선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바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연대보증 제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거나 물질적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므로 보증을 서는 것이 지혜 없는 일이라는 것은 옳다.
    보증이란, 상대방이 무슨 사정이 생겼을 때에 대신 돈을 갚을 만한 충분한 물질적 여유가 있는 경우이든지, 아니면 상대에 대한 충분하고 확실한 사랑과 신뢰가 있는 경우이든지, 아니면 보증한 금액만큼을 잃어버릴 각오를 할 경우에만 서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 것 없이 보증 서는 것은 명예심이나 모험심에 불과하고 악한 자들에게 이용을 당하며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 남의 보증을 서지 않는 것이 좋다. “너는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잠 22:26). 왜냐하면 우리가 상대방의 진심을 참으로 알기 어렵고 또 아무도 미래의 경제여건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절]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본문은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이니라”고 말한다. 원문은 “율법 어기기를 좋아하는 자는 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이다(MT, NASB). ‘죄과’라는 원어(페솨 ע)는 ‘율법 어김’이라는 뜻이다(BDB). 교만한 자는 율법 어기기를 좋아하고 다툼도 좋아한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겸손히 받고 지키려고 하지만, 마음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역한다. 또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서로 다투지 않지만, 교만한 자는 남과 잘 다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선한 마음을 명하셨다. 그것이 사랑이고 거기서 관용과 양보와 인내가 나온다. 주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라고 말하였다(약 3:13-18).
    본문은 또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자기 집을 돋보이게 하는 자, 즉 교만하고 자랑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라고 본다. 그는 파괴 혹은 멸망을 구하는 자이다. 교만은 멸망을 가져온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우리는 교만하고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 겸손하고 선한 마음, 남과 화목하는 마음을 가지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다.
    [20절]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본문은,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특한’이라는 원어(익케쉬 שׁ)는 ‘정도에서 벗어남, 패역함’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사특하고 패역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미워하신다. 잠언 11:20은,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마음이 정직하고 순진하며 온유하고 선해야 한다. 그는 나다나엘같이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요 1:47).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는 정직하며 의로운 자이어야 한다(시 15:1-2). 우리는 과거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죄악된 옛 습관을 좇았으나, 이제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되었다(엡 4:22-24).
    본문은 또,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진다”고 말한다. ‘패역하다’는 말도 ‘사특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마음이 패역하며 말도 그러하다. 그는 윗사람이나 동료에 대해 기본적 예절을 갖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이웃에 대해 이해심이 없고 남을 비방하는 말을 쉽게 한다. 그는 재앙에 빠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과 재앙은 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잠언 10:31은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성도의 선한 인격은 그의 말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자는 그 혀로 남을 비방하고 헐뜯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시 15:3).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한다(엡 4:29).
    우리는 마음의 사특함과 혀의 패역함을 버리고, 정직하고 순진함과 온유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또 바르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자가 되자.
    [21절]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경외치 않고 섬기지 않으며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뜻에 순종치 않는 자이다. 그는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하고 악하다.
    미련한 자는 타고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그러므로 다 미련하다. 육으로 난 상태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없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여 치료불가능하다(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참된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교훈으로 어느 정도 경건과 도덕성을 지니게 되고 또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9:10). 잠언 29:15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를 낳은 자는 근심을 당하며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다. 그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이웃에게 해를 주는 일만 하기 때문이다. 잠언 10: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잠언 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그러나 모든 일이 유익할 것이다. 미련한 자는 자신의 미련을, 그 부모는 자신의 부족과 책임 다하지 못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녀가 되지 말자. 또 우리의 자녀가 미련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그를 위해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
    [22절]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본문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말한다. 양약은 병을 치료하고 건강 회복에 좋은 약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약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경험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이 이치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고 웃음 치료라는 말이나 억지로라도 웃어보라는 조언도 있다.
    그런데 인간의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다. 슬픔과 근심은 죄로부터 왔다. 구주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28).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다(갈 5:22). 천국에는 더 이상 눈물과 고통이 없을 것이다(계 21:3-4).
    본문은 그러나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심령의 근심이나 스트레스가 몸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적인 일이 되었다. 현대적 질병인 우울증은 심각한 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인생의 삶은 수고와 슬픔의 삶이 아닌가.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증거하였다(시 90:10). 주께서도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인간의 삶이 수고롭고 슬픔과 근심이 많은 까닭은 죄 때문이다. 심령의 참된 안정과 평안은 하나님 안에만 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57:21). 또 심령의 근심과 염려는 뼈로 마르게 하고 몸의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삶으로써 늘 평안함과 성령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자. 성도는 행복자이다.
    [23절]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본문은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뇌물은 불순한 선물, 곧 그것을 주는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지 않은 선물을 가리킨다. ‘사람의 품에서’라는 말은 뇌물이 은밀히 전달되는 것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뇌물은 다른 사람 보기에 떳떳지 못하고 또 양심에 거리끼므로 은밀하게 주고받는다.
    특히 뇌물은 판결을 굽게 한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공의는 법정의 재판관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생의 정로이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시편 15:1-2,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편 106:3,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인간은 왜 불의의 길로 가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 16: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또 인간은 돈과 명예와 권세 등 세상의 욕심 때문에 불의의 길로 간다. 아간은 아름다운 외투와 금은을 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수 7:21), 가룟 유다는 은 30개에 주님을 배신하였다(마 26:15).
    우리는 뇌물, 곧 순수하지 않은 선물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항상 공의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자.
    [24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본문은,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다”고 말한다. ‘명철한 자’는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자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모두가 명철한 자이다. 지혜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명철한 자는 지혜를 앞에 두고 생활의 지침을 삼는다. 또 그의 단정하고 침착하고 신중한 얼굴 표정에서도 지혜가 엿보일 것이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다(잠 9:10). 시편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 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시편 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또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지혜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늘 지혜롭게 살 것이다. 모세는, “너희는 [율법을]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말하였다(신 4:6). 신명기 30: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본문은, 그러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둔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지혜를 먼데서 찾는다. 그는 자신의 현재의 생활에 성실하기보다 이루지 못할 허영과 탐욕을 품고 항상 불만족스런 얼굴로 살 것이다.
    우리는 불성실과 허영과 탐욕을 내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그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자.
    [25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아들은 불경건한 자, 곧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며, 그 결과, 인격성이나 도덕성에 결함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목사도 그러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교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함을 볼 때 크게 기뻐하였다(요이, 요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바르고 선하게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레 26장, 신 28장). 이와 같이, 우리의 자녀들도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의 복된 삶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며 물질적 안정과 여유도 주실 것이며 가정적 행복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게 산다면, 예를 들어, 그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줄 모르고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할 줄 모르고 교회 생활을 크게 여기지 않고 술 취하거나 담배 연기 속에 빠져 산다면, 그들은 평안치 못할 것이다. 그들은 무서운 질병에 걸릴지 모르며, 그들의 결혼생활에 갈등이 생길지 모른다. 그들의 사업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그들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내리실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자들이므로, 경건한 부모에게는 그 사실이 가장 큰 고통이 된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탄원하기를, “[세상에]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다(눅 16:28).
    우리는 지혜로운 자녀가 되자. 또 우리의 자녀들을 지혜로운 자녀로 키우자. 우리 자녀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말씀을 힘써 가르치자.
    [26절]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
    본문은,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의를 명하시고 의를 권장하신다. 그러므로 의인의 의나 귀인의 정직함은 우리가 칭찬하고 기뻐하고 본받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못하고 악한 세상은 그렇지 못하여 의인을 벌하고 귀인을 정직하다고 때리는 일들이 있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이 많이 있다.
    선지자 미가야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말씀을 전하였으나,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그의 뺨을 쳤고, 아합 왕은 그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였다(왕상 22:24, 27). 유다 왕 요아스는 자기를 왕위에 오르게 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무리와 함께 꾀하고 그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다(대하 24:21). 므낫세 왕은 무죄한 자들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부터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다(왕하 21:16). 유다 방백들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토굴옥 어두캄캄한 방에 가두었다(렘 37:15-16).
    신약시대에도, 유다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쳤다(딤후 4:14). 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을 영접하지 않고 악한 말로 그를 부당하게 비난하였고 또 그것도 부족하여 형제들을 영접하지도 않고 영접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요삼 9-10).
    이런 일들은 다 악한 일이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우리는 의인을 칭찬하고 본받고, 악인을 책망하고 경계하자. 요한삼서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27절]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본문은,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말한다. ‘성품이 안존하다’는 원어(카르 루아크 וּר־ר)는 ‘심령의 냉철함, 침착함’을 의미한다.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끼고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다(KJV, NIV).
    지식이 있는 자는 말을 아낀다. 그래서 말의 실수를 피하거나 줄인다. 말이 많으면 말의 실수도 많게 된다. 그러므로 잠언 10:19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며(약 3:2), 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한다(약 3:2).
    명철한 자는 심령이 침착하다. 그는 심령이 조급하지 않고 경솔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는 침착한 말, 바른 말, 덕스러운 말을 한다.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지혜자는 유익한 말만 한다. 그러므로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하며,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엡 4:29).
    우리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말을 아끼는 자가 되자. 또 심령의 조급함, 경솔함, 감정적임을 버리고 침착함을 지키자.
    [28절]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인 선과 사랑을 행치 않는 자이다. 미련한 자는 그의 말로 그의 미련이 드러나므로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잠잠한 것이 낫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울 것이다.
    말은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영적으로 성숙하고 온전한 사람은 말에 온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에는 증거하기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였다(약 3:2).
    지혜자는 덕스러운 말을 한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그를 충고하고 뒤에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 잠언 27:5-6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말한다. 사도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한다(엡 4:29).
    그러나 미련한 자는 악한 말을 한다. 그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잘 한다. 성도가 사람 앞에서 그를 충고하고 뒤에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 반면, 미련한 악인은 사람 앞에서 친절히 인사하고 뒤에서 그를 비난한다. 그는 덕스럽지 못하고 남의 인격과 명예에 파괴적인 말을 한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말을 하는 악하고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덕을 세우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또 지혜가 부족한 자는 차라리 잠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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