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언18-20장 전편 강해 [1장]
  • 조회 수: 6507, 2017.01.04 23:12:29

  • 18장: 게으름, 겸손, 신중함, 아내


    [1절]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본문은,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고 말한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뉜다’는 말은 ‘진리 문제로 나뉘는 일 외에’라는 단서가 있는 말이다. 성경은 진리 문제에 관해서는 상대방과 교제를 끊으라고 교훈한다. 로마서 16:17,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6,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그러나 진리 문제가 아니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 즉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화목하고 일치단합하고 협동하지 않고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이다.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명예욕 같은 것이 다툼을 일으킨다. 겸손한 사람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협동하고 화합을 이루지만, 교만한 사람은 남을 멸시하고 시기 질투하며 화평과 질서를 깨뜨리고 다투고 분열한다.
    본문은 “[그는]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한다”고 말한다. 자기 욕심을 따르는 자는 모든 지혜를 대항해 싸운다. 그는 지혜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대적한다. 지혜의 말은 성결과 화평, 양선과 온유를 권장한다. 야고보서 3:17-18,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그러나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는 이런 지혜를 배척한다.
    우리는 겸손한 자가 되자. 명예욕을 포함하여 세상의 헛된 욕심들을 다 버리자. 우리는 진리 안에서 형제들과 화목함과 협력함을 이루자. 



    [2절]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고 말한다. 명철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곧 성경 교훈이다. 그것은 경건과 선에 대한 가르침과 깨달음이다. 그런데 미련한 자는 그러한 명철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시편 1:2,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은보다 더 귀히 여겼고(시 119:72) 꿀보다 더 달게 여겼다(시 119:103). 솔로몬은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이라”(잠 5:1)고 말했는데, 그의 지혜는 경건함과 선함에 대한 깨달음이다.
    본문은 또 미련한 자는 자기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며(잠 12:15) 자기 미련한 것을 나타내며(잠 13:16)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는다(잠 15:2).
    성도는 성경에 명확히 계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의사만 주장치 말아야 한다. 그런 주장은 교만과 독선일 수 있다. 사람의 의견은 바를 수도 있으나 잘못될 경우도 있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생각은 언제든지 고치거나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한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하며 들어야 한다. 그것이 겸손과 사랑이다. 경건한 자는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이므로 그의 의견은 바르고 좋은 것이 많을 것이다.
    독선과 확신은 서로 다르며 확실히 구별되어야 한다. 독선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채 자기의 의견만 계속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확신은 성경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고 굳게 붙들고 충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 지혜의 교훈을 기뻐하자. 그러나 성경에 근거치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의견만 주장치 말고 다른 이의 의견도 존중하자.


    [3절]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
    본문은,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존재이지만, 도덕적인 양심이 있기 때문에 악한 자를 멸시하고 비난한다. 더더욱,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재판자로서 악한 자들에 대해 공의의 징벌을 내리심으로 그들로 수치를 당케 하신다.
    이런 일들은 인간 사회에서 얼마든지 있으며 성경에도 많은 예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고라와 그 동료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하다가 땅이 갈라져 산 채로 땅 속에 묻히는 징벌을 당하였다(민 16장).
    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는 듯하였으나 마침내 상수리나무에 그 머리털이 감겨 매달렸고 요압의 창날에 죽임을 당하였다(삼하 18장).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도 반역자 압살롬과 힘을 합쳐 다윗을 대적하였으나(삼하 15:31), 그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자 판세를 예견하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삼하 17:23).
    유다 왕 여호람은 이스라엘 왕 아합의 집의 길로 행하며 악을 행하였고 자기의 모든 아우들과 이스라엘 백성 몇 사람을 칼로 죽였는데, 그 때 에돔이 배반하였고 립나도 배반하였으며, 그의 몸에는 창자에 고치지 못하는 중병이 들었고 2년 만에 그 창자가 빠져나와 죽었다. 성경은 그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한다(역대하 21장).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은 30을 받고 주님을 배신하였으나, 예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그 일을 후회하여 그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마 27:3-5).
    인간의 가치는 경건과 도덕성에 있으며, 경건하고 선하게 사는 자는 존귀와 영광을 얻고, 악하게 사는 자는 멸시와 수치를 당할 것이다. 



    [4절]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본문은,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다”고 말한다. ‘명철한’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는 것을 번역자들이 보충한 것이므로 우리 말 성경에 작은 글씨로 되어 있다. 명철한 자의 입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말을 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의 말에 담긴 뜻을 다 알기 어렵다. 의인의 말도, 악인의 말도 그러하다. 그것은 또 사람의 말이 풍성하다는 뜻도 가질 것이다. 말은 하여도 하여도 끝없이 나온다.
    말은 사람의 마음의 표현인데, 사람은 자기 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고 일부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그의 말로 일부분 표현되고 어느 정도 드러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더욱이, 악인들은 자기 마음을 정반대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은 마음으로는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말로는 위하는 것처럼 한다. 그것은 물론 거짓이요 위선이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은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다”고 말한다. ‘지혜의 샘’은 지혜가 물처럼 나오는 샘을 묘사한다. ‘솟쳐 흐르는 냇물’은 그 샘이 흘러 넘쳐 시내가 되어 메마름이 없고 다함이 없고 그침이 없이 풍성하게 흘러 내려감을 나타낸다. 그 샘과 시내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켰다(요 7:37-39).
    우리는 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풍성한 지혜의 물을 길어내자. 풍성한 지혜로 자신을 가르치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자. 



    [5절]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본문은,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잘못된 판단을 정죄한다. 악인을 두호하는 것, 즉 비록 자신이 드러난 악을 행치 아니하였을지라도 악인을 용납하고 옹호하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다.
    또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도 선하지 않다. ‘억울하게 하는 것’이라는 원어(레핫토스 תוֹטּ)는 ‘옆으로 밀치는 것, 밀어젖히는 것, 밀어 제치는 것’을 가리킨다. 의인을 억울하게 만들며 공의를 왜곡시키는 것은 선하지 않다.
    이사야 5:23,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4:23-25,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우리는 선악을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야 한다. 우리는 양심이 더러워지거나 마비되지 않고 본래대로의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에게 물욕, 이기심, 명예심 등의 욕심이 없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다.
    우리는 악인을 두호하거나 의인을 억울케 하는 악한 일을 하지 말자. 우리는 항상 선악을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자. 선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욕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만 받자. 



    [6절]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섬길 줄 모르는 자이며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행치 않는 자이다. 그는 죄 가운데 살며 불경건하고 불결하며 사랑이 없고 남을 미워하고 교만하며 흔히 게으르고 자기 일에 충실치 않으며 남의 일에 참견하며 남을 논단한다.
    미련한 자의 입술 즉 말은 교만하고 악하며 욕심이 있고 미워하며 무례하고 무질서하고 불평하고 거역하는 말이다. 거기에서는 싸움과 다툼과 분쟁이 생긴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의 말은 겸손하고 선하며 사랑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예절이 있고 감사하며 순종하고 질서를 지키는 말이다. 거기에는 화목이 있고 덕을 세우고 일치단합이 있다.
    본문은 또 “그 입은 매를 자청한다”고 말한다. ‘매’라는 말은 ‘맞는 것’을 말한다. 잠언 10:13,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잠언 19: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잠언 26:3,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미련한 자녀에게는 부모의 매가 있고 미련한 학생에게는 선생의 매가 있으며 미련한 종에게는 주인의 매가 있다. 그러므로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의 매뿐 아니라, 하나님의 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자의 악행에 대해 공의롭고 공평한 징벌을 내리신다. 미련한 자의 미련한 행위는 매를 불러온다. 죄악은 항상 하나님의 징벌을 가져온다.
    우리는 교만하고 악하고 거역하고 불평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겸손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자.


    [7절]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않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입, 곧 미련한 자의 말은 교만한 말, 불신앙적인 말, 부정적인 말, 불평하는 말, 거역하는 말, 미워하는 말, 무례한 말, 훼방하는 말 등 죄악된 말이다.
    미련한 자의 입, 곧 미련한 자의 말은 그의 멸망이 된다. 미련한 자의 말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고 그 죄는 그를 죽게 만들고 멸망시키는 것이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 1:6).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않으면 다 멸망할 것이다(눅 13:3). 미련한 자의 말은 그의 멸망이 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항상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거역하였다.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 보고를 하였다. 백성은 그 보고를 듣고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였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하는 자가 되고 마침내 다 죽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민 14:1-4, 30-33).
    본문은 또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는 지혜의 말, 선한 말을 하며 마귀의 올무에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아주시고 그를 지켜 주신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말, 곧 그 말의 실수와 범죄는 죄의 올무, 마귀의 올무, 멸망의 올무가 되어 더 큰 죄를 짓게 하고 마침내 멸망에 이른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입으로 범죄치 말자. 우리는 죄의 올무, 마귀의 올무, 죽음과 낭패의 올무에 걸리지 말자. 



    [8절]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본문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고 말한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보통 나쁜 뜻으로 쓰인다.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라고 말하는데,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 즉 쓸데없이 남의 말이나 하고 다니는 자와 거의 같다. 그들은 남의 험담하기를 좋아하며 남의 흉이나 보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 그런 말은 선하고 유익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잘 잊어버리지도 않고 잘 간직하고 기억한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잘 나타낸다. 우리는 차라리 성경 읽기와 연구하기에 힘쓰고 성경 암송에 힘쓰고 전도와 봉사에 힘써야 할 것이다.
    성도의 삶은 각자 자기 일에 성실하고 또 하나님의 일, 곧 전도와 봉사에 힘쓰는 것이다. 자기 일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일, 곧 전도와 봉사에 힘쓰는 성도는 남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특히 남의 말을 하지 말고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3:1). 잠언 20:19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베드로전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지 말고 듣기도 좋아하지 말자. 각자 자기 일에 성실하고 하나님의 일, 즉 전도와 봉사의 일에 힘쓰자.



    [9절]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본문은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게을러서는 안 된다. 학생은 자기가 할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직장인은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지 않고 상관의 눈가림만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결혼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을 잘 돕지 않고 아이들을 잘 키우지 않고 집안 살림의 일을 잘 하지 않고 밖으로 나도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이다. ‘패가하는 자’라는 원어(바알 마쉬키스 תי ל)는 ‘멸망하는 자’라는 뜻이다(BDB, NASB, NIV). 게으른 학생은 진학에 실패할 것이고, 게으른 직장인은 해고될 것이다. 게으른 부인은 가정 경제를 파탄시켜 부부가 이혼하고 아이들이 탁아시설로 보내지기도 한다.
    성도는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야곱은 하란에서 20년간 외삼촌 라반의 밑에서 일하면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다고 고백하였다(창 31:40).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 일할 때 주인이 그를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맡길 정도로 성실히 일한 자이었다(창 39:3, 6). 다윗은 아비의 양을 지킬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성실한 목동이었다(삼상 17:34-35).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그 집 사람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여종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 자라고 잠언에 묘사되어 있다(잠 31:13, 15, 27).
    우리는 자기 일을 게을리하는 자 곧 망하는 자의 형제가 되지 말고, 각자 자기 일을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하는 건실한 인격자가 되자. 



    [10절]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본문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의 이름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 곧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다. 그것은 원수가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망대이다. 하나님보다 힘센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이길 대적자는 세상에 없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8:2에서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라고 하였다.
    본문은 의인이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견고한 망대 안으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는다고 표현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의인은 하나님께 달려간다. ‘달려간다’는 말은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특히 어렵고 위험한 일을 만났을 때, 사탄과 악령들과 악인들의 공격이 있을 때, 또는 무서운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예기치 못한 큰 사고 등을 당했을 때 그러하다. 시편 61:3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고 말한다.
    의인이 하나님 안에 거하면 안전함을 얻는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그는 모든 원수들을 막아주시고  물리쳐 주신다. 그는 우리를 지켜 주신다. 시편 91:1-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견고한 망대이심을 알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에게 달려가고 기도하며 의탁하자. 


    [11절]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
    본문은,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고 말한다. 부자는 재물을 그의 견고한 성이나 높은 성벽같이 의지한다. 사람은 무지하고 연약하므로 그렇게 하기 쉽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려우니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실상, 재물은 사람에게 견고한 성과 높은 성벽이 되지 못한다. 재물은 환난 날에 무익하다. 재물은 사람에게 갑자기 닥치는 무서운 질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대형사고를 막을 수 없다. 잠언 11:4,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스바냐 1:18은,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고, 에스겔 7:19는,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자라지 못함과 같다(눅 8:14). 디모데전서 6:10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한다. 차라리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하였다(약 2:5).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견고한 망대이시다(잠 18:10).
    우리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자. 부자 되기를 사모하지 말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가까이하고 즐거워하자. 


    [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본문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마음의 교만은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왜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세상의 것, 즉 돈이나 미모나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권세 등을 남보다 더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영적 교만 때문에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남들보다 자기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면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며 마귀적인 죄이다. 사람의 마음의 병, 인격의 병 중에 가장 중한 병은 교만한 마음이라는 병이다. 사람은 피조물이며 죄성을 가진 자이므로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하면 멸망한다. 잠언 16:18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왜 교만하면 멸망하는가?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고 넘어뜨리시기 때문이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죄악들 중 첫 번째 죄악이다(잠 6:16-17).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5:5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겸손하면 존귀케 된다. 잠언 15:33도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27), 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마 23:12). 베드로전서 5:6에도,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며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교만치 말고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처신하자.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고 항상 감사하자. 



    [13절]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본문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고 말한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그것은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이며 자신의 일방적 생각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오해하기 쉽고 잘못 판단하기 쉽고 잘못 말하고 잘못 정죄하기 쉽다. 그러므로 잠언 18:17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하였다.
    남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말은 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큰 잘못이며, 그런 잘못을 범하는 자는 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성급한 말은 자기에게 해가 되는 참으로 미련한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29:20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지혜자는 다르게 처신해야 한다. 지혜자는 우선 남의 말을 듣는 것부터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좋은 말, 바른 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말, 잘못된 말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악을 잘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상대방의 인격의 됨됨이를 잘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좋은 사람의 말은 들어도, 나쁜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것이 좋다.
    또 우리는 남의 말을 들어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잠언 14:15는,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고 말한다. 특히,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해야 한다. 야고보서 1:19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다. 잠언 15:28도,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나 사연을 듣기 전에 성급하게, 경솔하게 대답하지 말자. 또 우리는 사연을 들은 후에도 신중하게 대답하는 습관을 기르자.


    [14절]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본문은 다시 번역하면, “사람은 심령으로 그 병을 견디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그것을 일으키겠느냐?”이다. 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자연적 원인이 있다. 사람이 심한 노동을 하면 몸살 나기 쉽고, 추우면 감기 걸리기 쉽다. 불결한 곳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감염되기 쉽고, 나이가 들면 자연히 쇠약해진다. 둘째, 징벌적 원인이 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징벌로 여러 가지 병들을 주실 것을 경고하였다(20-29절). 셋째, 인격훈련적 원인이 있다. 욥기의 진리가 그것이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믿음을 가지고 겸손해지며 거룩하고 깨끗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 8:28).
    병을 이기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도 여러 요소가 있다. 첫째, 신체 단련이 한 가지 요소이다. 그것을 위해 적절한 노동이나 규칙적 운동이나 보약도 유익하다. 둘째, 병균을 죽이거나 그것의 활동을 억제하는 약을 복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약은 몸의 다른 부분에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심령의 평안과 강건함이 중요한 방법이다. “사람은 심령으로 그 병을 견디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누가 그것을 일으키겠느냐?” 슬픔과 분노와 불안 등의 감정은 몸에 병이 되므로 버려야 한다. 상식적인 장수비결은, ① 규칙적 식사와 소식(小食), ② 적당한 노동이나 운동, ③ 마음의 평안이다. 심령의 평안과 강건함은 병을 이기는 중요한 길이다. 넷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병을 이기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우리는 심령의 평안과 강건함을 유지하자. 또 우리는 슬픔이나 분노를 품지 말고, 혹 품어도 오래 품지 말고(엡 4:26), 오직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평안한 삶을 살자. 




    [15절]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
    본문은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식을 거절하지만, 지혜로운 자와 명철한 자는 지식을 구하며 얻는다. 참 지혜와 지식은 성경 안에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참 지혜와 지식의 창고인 성경말씀 듣기를 거절한다. 그는 교만과 물욕(物慾)과 명예욕 등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세상적 가치관, 즉 경건이 없고 도덕성을 중시하지 않는 사고방식, 돈이 최고요 돈이면 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리석음은 무지(無知)로 나타나고 그것이 불경건과 불의의 죄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는 것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지적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호 4:1, 6). 성경은 악인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표현한다(고전 15:34; 갈 4:8; 살전 4:5). 주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이다(살후 1:7-8).
    그러나 지혜로운 자와 명철한 자는 지식을 사모하며 얻는다. 그는 지식의 창고인 성경책을 주야로 읽고 듣기를 사모하며 배우며 묵상하기를 힘쓴다. 지혜와 명철은 지식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경건과 의로 나타나고 마침내 평강과 형통과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 . .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호 6:3, 6).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며(요 17:3)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우리는 교만, 물욕, 명예심 등의 세상 것들을 버리고, 지혜와 지식을 사모하며 얻자. 우리는 지식의 창고인 성경을 날마다 읽고 묵상하자. 



    [16절]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하며 또 존귀한 자의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본문은 다시 번역하면, “사람의 선물은 그를 위해 길을 넓게 열며 존귀한 자들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 선물(맛탄 ן)은 사랑과 관심의 표시이며 존경과 감사의 표시이다. 선물은 남을 대접하는 것이며 좋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뇌물을 줄지 모르나, 대가 없는 선물은 주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남을 대접하라고 교훈한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신명기 15장 같은 구약 율법에 강조된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3). 또 그는 감독의 자격을 논하면서 감독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딤전 3:2). 


    선물의 효과는 크다. 사람의 선물은 그를 위해 길을 넓게 열 것이다. 그래서 잠언 17:8은 “뇌물(쇼카드 ד)(혹은 선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고 말하며, 잠언 19:6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한다. 


    특히 구제의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풍성한 복을 받을 것이다. 잠언 11:25는,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하였다. 주께서는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4). 바울은 자신을 위해 선물을 보낸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했다(빌 4:19).
    우리는 남을 대접하고 남에게 선물을 줄 줄 아는 성도가 되자. 우리는 특히 우리 주위의 어려운 전도자들과 교우들 대접하기를 힘쓰자. 






    [17절]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본문은,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고 말한다. ‘그 피고’라는 원어(레에후 וּה)는 ‘그 이웃’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때때로 서로 이해관계가 얽힌 다툼이 있다. 그 다툼은 법정에까지 나아간다. 우리가 뉴스에서 보는 대로 서로 간의 법정 다툼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든 일을 진실하게 말하지 않고 속이기 때문이다. 이런 다툼에서 원고의 말, 즉 첫 번째 사람 혹은 한 쪽 사람의 주장만 들으면 그가 바른 것 같다. 그러나 그 피고 혹은 그 이웃이 와서 모든 문제를 밝힌다. ‘그 이웃’이라는 표현은 그 이웃이 피고의 자격으로나 혹은 증인의 자격으로 와서 밝힌다는 뜻일 것이다. ‘밝힌다’는 말은 그가 원고의 주장에 과장된 부분이나 거짓된 부분, 불확실하고 근거가 없는 추측적인 부분, 자기의 치명적 잘못 같은 중요한 내용을 생략한 부분을 지적함으로써 밝힌다는 뜻이다. 


    무슨 일을 판단할 때, 한쪽 말만 들어서는 부족하다. 무슨 일이든지 두 사람의 말, 즉 양쪽 말을 다 듣고 그 둘을 비교해보면, 그 문제에 대한 바른 판단을 더 쉽고 분명하게 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판단할 때, 한쪽 말만 듣고 속단하지 말고 최종적 판단을 보류하고, 다른 한쪽의 말을 들은 후 최종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부족함이 없는 바르고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바른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바른 판단은 첫째로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이성과 양심에 근거해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에 근거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바른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한쪽 말만 듣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양쪽의 말을 다 들은 후에 신중하고 바르게 판단하자. 



    [18절] 제비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
    본문은,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고 말한다. 아무 때나 제비뽑기를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제비뽑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잘잘못이 분명할 때는 이성과 양심과 하나님의 법에 의거하여 판단해야지 제비뽑기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문제가 아닐 때, 특히 두 개 이상의 주장들이 다 선하고 그것들을 주장하는 자들의 태도가 다 강경할 때, 그래서 그것들 중 하나를 택하기 어려울 때, 제비뽑기가 필요할 것이다.
    제비뽑기의 유익이 많다. 본문의 말씀과 같이,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고 강한 자들 사이에 문제를 해결케 할 것이다. 그것은 다툼이 되는 두 생각과 의견들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이 된다. 성경에는 제비뽑기의 예들이 많다. 선지자 요나가 탔던 다시스로 가는 배의 선장은 선원들과 승객들 중에서 제비를 뽑게 함으로써 풍랑의 원인을 찾았다(욘 1:7). 에스더서에 보면, 악한 신하 하만의 동료들은 유대인들을 죽일 날을 정할 때에 제비를 뽑았다(에 3:7). 아마 몇 개의 날들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으로 제비뽑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마태복음 27:35에 보면,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다.
    제비뽑기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그의 선택을 구하는 방법이다. 잠언 16:33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고 말한다. 속죄일에 두 염소 중 아사셀 염소를 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레 16:8). 여호수아는 범죄한 아간을 찾아낼 때 그리고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수 7:14; 18:10). 또 신약시대에도 사도들은 가룟 유다 대신 한 명의 사도를 보선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다(행 1:26).
    이성과 양심과 성경의 법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분명한 문제가 아니고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에,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한 방법이다.



    [19절]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본문은,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말한다. 노엽게 한 형제란 성이 나고 감정이 상한 형제라는 뜻이다. 한글성경에 ‘화목하기가’라는 작은 글씨는 원문에 없는 말을 보충한다. 그것은 노엽게 한 형제의 생각이나 마음을 얻기나 설득하기가, 그래서 그와 화목하기가 심히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의 이성의 확고한 판단이나 굳어진 감정은 변경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정당성을 가진 경우도 있겠으나, 때로는 생각의 편협함과 잘못 때문에, 그의 감정도, 그의 행위도 그렇게 된다고 본다. 나는, 화나면 열쇠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아내의 잘못된 습관 때문에 그녀가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이혼한 한 청년이 1년 후 그 이혼을 후회하고 다시 아내와 재결합하기를 소원했으나 그 아내의 생각과 감정이 이미 굳어져서 화합되지 못함을 보았다. 사람의 감정과 마음이 그러하다.
    본문은, 감정이 상한 사람과 화목하기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렵고 산성 문빗장을 여는 것같이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견고한 성을 정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산성의 문빗장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희생을 치루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이 든 노인이 열쇠를 잃어버린 집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열쇠만 있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기 집이라도 열쇠가 없으면 문 앞에서 여러 시간을 서성이며 열쇠전문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열쇠전문가가 와서도 한참 만에야 겨우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 상해 화목하기 어려운 자에 대해, 우리는 열쇠전문가와 같은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주실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0절]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본문은,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입에서 나오는 열매나 그 입술에서 나는 것은 그의 말을 가리킨다. 사람의 입에서는 불신앙, 불평, 미움, 음란, 거짓말, 훼방, 희롱, 상스러운 농담 등 악한 말도 나온다. 이런 것은 입술의 선한 열매가 아니다.
    본문의 열매는 선한 말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덕을 세우는 선하고 은혜로운 말이며(엡 4:29) 감사하는 말이며(엡 5:4) 서로를 권면하며 권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이다(살전 5:11, 14). 이런 말은 입에서 나오는 선한 열매이다.
    본문은 입에서 나오는 이런 선한 열매들로 인해 배가 부르고 만족하게 된다고 표현한다. 말은 힘이 있다. 말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동시에 자신에게도 기쁨과 평안과 유익을 준다.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말의 유익을 두고 한 말이다.
    선한 말은 우선 말의 내용이 좋아야 한다. 주께서 사람들 앞에서 은혜로운 말씀을 하셨고(눅 4:22) 그에게 은혜와 진리가 넘쳐흘렀듯이(요 1:16), 우리는 진리의 말, 선하고 은혜로운 말을 할 때 자신에게도 기쁨이 있고 남에게도 유익을 줄 것이다.
    또 선한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좋아야 한다. 우리는 좋은 말을 들을 귀(마 13:9), 할례받은 귀와 마음(신 29:4)이 있어야 하며, 또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어떤 이들은 흠 잡을 거리만 찾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즐거이 들었다(막 12:37). 그러므로 잠언 27:7은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선한 말, 덕스러운 말, 감사하는 말,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자. 또 우리는 듣는 마음, 가난한 마음, 겸손한 마음도 가지자.


    [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본문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한다. 사람의 혀는 권세가 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위로의 말과 격려의 말은 낙심한 사람에게 힘이 나게 한다. 충고의 말은 그의 잘못을 반성하고 고치게 한다. 좋은 소문을 내는 것은 그 소문의 내용이 되는 사람이나 단체의 이름에 영광이 되고 부흥 발전에 도움이 된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완고하고 미련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겸손한 말로, 노한 다윗이 그 집을 치려 한 것을 막았다.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키는 악하고 독한 비난의 말은 상대방을 죽이는 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에는 그런 말로 인해 상대방이 마음이 상하여 진짜 자기 목숨을 끊는 일도 있는 것을 우리는 종종 뉴스에서 본다.
    악한 말은 상대를 죽일 뿐 아니라, 자신도 멸망으로 이끈다. 주께서는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7).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다(롬 10:9-10).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입으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자는 자신의 멸망을 스스로 확인한 셈이 된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의 혀의 열매, 즉 자신의 말의 열매를 먹는다. 선한 말은 자신을 복되게 하지만, 죄악된 말은 자신과 남을 멸망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고 우리 입술의 문을 지키고(시 141:3), 사람을 살리고 유익케 하는 의롭고 선하고 덕스러운 말만 하자.


    [22절]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본문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고 말한다. 고대의 번역들(LXX, Syr, Vg, Targmss)에는 ‘아내’가 ‘좋은 아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아내가 좋은 아내인가? 남편을 돕는 아내가 좋은 아내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여자를 만드실 때 남자를 돕는 자로 만드셨다. 그는, “사람의 독처하는[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helper)을 지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의도대로 남편을 돕는 여인이 좋은 아내이다. 또 어진 아내, 즉 지혜롭고 덕스런 아내가 좋은 아내이다. 잠언 12:4는,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어진’이라는 원어(카일 ל)는 ‘힘이 있는, 덕스러운(virtuous), 훌륭한’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이 좋은 아내이다. 잠언 31:30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순종하는 여인이 좋은 아내이다. 에베소서 5:22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말한다.
    본문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라고 말한다. 좋은 아내는 하나님의 복이며 은총이다. 물론, 그것은 남자의 분복이기도 하다. 잠언 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좋은 아내는 남편을 도우며 그에게 선을 행하며(잠 31:12)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위로, 격려하며 필요할 때 그에게 조언을 주기 때문이다.
    결혼과 가정의 복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자. 또 여인들은 좋은 아내가 되고 또 그들의 딸들을 좋은 아내가 되도록 교훈하고 양육하자.


    [23절]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본문은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사납게](BDB) 대답하느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는 슬프다. 우리는 가난한 자가 되지 않는 것이 좋다. 잠언 30:8에 보면, 아굴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가난은 복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가난하지 않게 하신다. 신명기 28:12는,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며 의식주의 기본적 필요를 주실 것이다(마 6:33).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치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실 것이며 먹어도 배부르지 않게 하실 것이다(레 26:26).
    우리는 항상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한다. 욥은 부자이었지만 종들의 사정을 멸시치 않았고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으며 고아를 기르고 과부를 인도하였고 의복 없는 자에게 덮을 것을 주었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하였다고 말하였다(욥 31:13-23).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자들에게 명하기를,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 . .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딤전 6:17-18).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으로 가난한 자가 되지 말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에게 항상 너그럽고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자.


    [24절]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본문은,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고 말한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고대역본들(Syr, Targ, Vg)을 따라서 “친구들을 가진 자는 친절해야 하나니”라고 번역하지만, 한글개역성경은 히브리어 전통본문을 따른다.
    친구는 두 종류가 있다. 나쁜 친구와 좋은 친구이다. 나쁜 친구는 해를 끼치는 친구이다. 예를 들면, 자기 이익만 구하다가 어려울 때, 위급할 때 떠나가는 이기적인 친구, 무엇보다 죄 짓게 하는 친구 등이 그렇다. 사무엘하 13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에게 요나답이라는 심히 간교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 곧 자기의 이복누이 다말을 연애하는 것을 알고 그에게 좋지 않은 조언을 하였다. 암논은 결국 다말을 강간하게 되고 그 일로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게 되었고 다윗의 집에는 큰 불행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5:33은,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좋은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이다. 신앙적인 친구는 좋은 친구이다. 다윗이 목숨을 내놓고 골리앗과 대결하여 이기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였다. 사무엘상 18:1,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은 피신 다니는 다윗을 만나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였다(삼상 23:16). 또 사랑이 있는 친구도 좋은 친구이다. 잠언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주의 말씀처럼,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줄 정도의 사랑을 가진 자는 참 좋은 친구이다(요 15:13-14). 그런 친구는 상대에게 충성어린 충고도 한다(잠 27:6).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죄 짓게 하는 친구를 멀리하고, 신앙적인 친구, 참된 사랑이 있는 친구를 사귀고, 또 그런 친구가 되자. 





    19장: 노, 아내, 구제, 인자(仁慈)




    [1절]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성실히’라는 원어(베숨모 וֹמּ)는 ‘자신의 완전함에, 완전하게’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맞는 도덕적 완전을 가리킨다. 성경은 도덕적 완전을 가르친다. 노아는 당세에 완전한 자(타밈 םי)이었고(창 6:9), 욥도 순전한 자(탐 ם)이었다(욥 1:1). 사도 바울은 성도의 영적 성장의 모범인 감독의 자격요건이 첫째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고 말하였다(딤전 3:2).
    본문은 도덕성을 가진 자는, 비록 가난할지라도 가치 있는 인생임을 보인다. 즉 인간의 가치가 재물의 많음에 있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무가치한 인생이 아니다. 재물의 많음은 인간의 가치에 무엇을 더해주지 못한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경건과 의는 인생이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본문은 성실히 행하는 자를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와 비교한다. 입술이 패려한 자는 바르지 않은 말, 거짓된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악하고 불순종적인 말을 하며 불평, 원망의 말을 하는 자이다. 그는 미련한 자이다. 그는 믿음이 없는 자요 도덕적으로 악한 자이다. 주의 말씀대로,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낸다(마 12:34-35). 또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인격자이다(약 3:2).
    우리는 인간의 가치가 재물의 많음에 있지 않고 경건과 도덕성에 있음을 알고 의를 삶의 목표로 삼고(마 6:33) 바르고 선한 말을 하자. 



    [2절]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
    본문은,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고 말한다. ‘소원’이라는 원어(네페쉬 שׁ)는 첫 번째로 ‘영혼’이라는 뜻이다. 옛날 영어성경(KJV)은 “영혼은 지식이 없으면 좋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하느니라”고 번역하였다. 영혼은 지식이 없으면 좋지 못하다.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육신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단지 육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영혼은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지식, 경건과 의와 선에 대한 지식, 죄와 구원과 내세에 대한 지식 등이 필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 말고, 가슴으로 느껴지고 행위로 나타나는 지식을 가리킨다. 


    호세아 4:6에서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셨고, 호세아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셨다(호 6:3, 6). 영혼은 참 지식이 필요하다.
    본문은 또 발이 급한 사람은 범죄한다고 말한다. 발이 급한 자는 부지런한 자를 가리키지 않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성급한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는 실수하고 범죄한다. 잠언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언 29:20,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사람은 조급하지 말고, 지식을 가지고 신중히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한 후에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지식을 귀히 여기며 성경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범사에 지식을 가지고 신중히 생각한 후 말하고 행동하자. 


    [3절]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본문은 다시 번역하면, “사람의 미련함은 자기 길을 굽게 하고 그의 마음은 여호와께 격노하느니라”이다. 본문은 미련한 자의 이중적 범죄를 증거한다. 하나는 자기 길을 굽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 격노하는 것이다.
    미련한 자는 자기 길을 굽게 한다. 길은 행위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는 인생의 정로인 의의 길에서 벗어난다. 그의 삶은 비뚤어진 삶, 탈선된 삶, 곧 불의한 삶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 계명을 무시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과 주관과 고집대로 사는 자기중심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자이다.
    미련한 자는 또한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격노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께 격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그에게 감사하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미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불경건이다. 사람은 경건해야 선을 행하는 법이며 하나님을 경외치 않으므로 악을 행하는 것이다. 불경건과 불의, 이것이 죄인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할 때, 이전에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와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를 기억하며 원망하며 불평하였다(출 15:2-3; 17:3). 또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열두 정탐꾼을 보내고 그들 중 열 명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들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믿지 않고 밤새도록 통곡하여 원망하였다(민 14: 1-2, 1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그들의 원망과 그들의 멸망을 거울삼아 원망치 말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0:10).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하며 그를 경외하고 악을 버리며 인생의 정로, 즉 의의 길, 선한 길을 걷자.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본문은,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고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친구란 친하게 지내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보다 더 친밀하게 어릴 때부터 한 가정에서 자란 형제가 있고, 사귄 지 오래된 고우(故友)도 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가족된 영적, 신앙적 형제들인 교우(敎友)들이 있다.
    본문은 재물이 있으면 친구들도 많아진다고 말한다. 잠언 14:20도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고 말한다. 세상의 친구들은 물질적 이해관계를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난하면 친구가 떨어진다. 돈 떨어지면 친구도 떨어진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또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있는 집 아이와 친구가 되려 하는 것 같다. 순수한 친구는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신앙적 친구는 물질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친구여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들이다. 주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주께서는 또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3:8). 바울도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말하였다(엡 2:19). 신앙적 친구는 바른 교훈 안에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또 책망도 하는 친구, 어려울 때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이다. 사도 바울은,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하였다(살전 5:14).
    우리는 물질적 이익을 위해 사귀는 세상적 친구가 되지 말고, 그런 것을 초월하고 신앙적 권면과 위로를 주고 기도하는 친구가 되자. 


    [5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본문은,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고 말한다. 거짓 증인은 보통 자기의 이익을 구하며 남에게 악을 행하는 자이다. 그는 남의 명예를 훼손하고 남의 재산을 손실케 하고 남의 생명을 해한다.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9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잠언 6:16-19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6, 7가지의 죄들 중에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이 들었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신명기 19:16-19에 보면, 위증 즉 거짓 증거하는 자는 그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확인되면 그가 그 형제에게 하려 했던 그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명령되었고 또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고 말하였다. 공의의 보응을 명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였고, 요한계시록 21:27은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하였고, 22:15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거짓은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고 마귀의 속성이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는 거짓된 속성이 있다. 예레미야 17:9에서 하나님께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배척해야 한다. 거짓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고 자기합리화에 사용되지 않게 해야 한다. 선의의 거짓말에 익숙하면 보통 거짓말도 잘 할 것이다. 그런 자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거짓을 철저히 버리고 배격하자. 그것은 큰 죄악이다. 우리는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말자. 거짓말이 습관이 되지 않게 하자.


    [6절]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본문은,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한다. ‘너그러운’이라는 원어(나디브 בי)는 ‘존귀한, 고상한, 너그러운’이라는 뜻을 가진다(BDB). 이 말은 사회적 신분뿐 아니라, 인격의 고상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 자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다. 또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친구가 되려 하는 사람이 많다.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도 단지 물질적 여유를 가진 자를 가리키지 않고 심령의 너그러움과 여유를 가진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물질적 여유를 가지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은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사람이 그의 계명을 순종하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신 28:13). 성경의 훌륭한 인물들 중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의인 욥은 동방에서 가장 큰 자이었고(욥 1:3), 요셉은 애굽의 총리(창 41:43),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삼하 5:4-5), 다니엘은 메데 파사의 총리가 되었다(단 6:1-2).
    우리는 심령과 인격에 천박한 자가 되지 말고, 고상한 자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 천박함이며 무엇이 고상함인가?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이기적이고 인색하고 인정이 없는 것이 천박함이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너그럽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 고상함이다. 디모데전서 3장은 장로의 자격으로 ‘아담함’(코스미오스 κόσμιος) 즉 ‘존경할 만함’을 들었고, 집사의 자격과, 또 장로와 집사의 아내들의 자격으로 ‘단정함’(셈노스 σεμνός) 즉 ‘고상함, 존경할 만함’을 들었다(딤전 3:2, 8, 11). 모세는 온유하였다(민 12:3).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온유와 너그러움을 교훈하였다(빌 4:5). 주의 종들은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
    우리는 심령과 인격이 천박한 자가 되지 말고, 심령과 인격이 고상한 자, 온유함, 너그러움, 존경할 만함을 지닌 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7절]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본문은,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거처할 곳이 없는 자이다. 본문은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다고 말한다. 원문에는 ‘그 모든 형제들에게’라고 되어 있다. 대략적인 표현이다. 예외는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의 설움이다. 가난한 것도 슬픈데, 모든 형제에게 미움을 받으니 더욱 슬플 것이다.
    본문은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고 말한다. 한 집에서 자라며 한 밥상에서 밥을 먹던 형제들도 그를 미워하는데, 친구들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따라가며 말을 붙이려 해도 상대도 해주지 않고 가버린다. 사람들은 대체로 인간의 가치를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한다. 심지어 교인들도 그러하다. 그래서 야고보는 교인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박대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약 2:1-5).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로 일시적으로 가난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주신다. 그는 성도들에게 물질적 여유를 약속하셨다. 그는 신명기 28장에서 계명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셨다(1-6절). 예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33). 모든 성도가 부자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며 물질적 필요를 주실 것은 분명하다(히 13:5).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으로써 그의 약속대로 가난을 피하자. 또 우리는 우리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아보자.


    [8절]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라는 원어(레브 ב)는 ‘마음’이라는 말로서 바른 마음과 바른 생각을 가리킨다. 사람은 생각이 발라야 말도 바르게 하고 행동도 바르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생각은 지혜이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라는 표현을 한다. ‘얻는 자’라는 말은 바른 마음과 생각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무지하여 그릇된 길로 잘 간다. 바른 마음과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로, 또 자신이 사모하여 얻게 된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배회에 잘 참석하여 말씀을 힘써 배우는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다.
    본문은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무지함은 불경건하고 악한 행실을 낳고 심령의 병과 환경적 황폐와 영육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지만, 지혜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을 낳고 평안과 강건함과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잠언 1:32-33,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잠언 8:35-36,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본문은 또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느니라”고 말한다. 명철은 바른 깨달음이며 성경에 근거한 바른 생각과 교훈에서 나온다. 명철을 지키는 자는 복을 얻는다. 그 복은 평강, 형통, 건강, 물질적 여유 등을 포함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영생의 복을  가리킨다.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며 얻자. 우리는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을 사모하며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자. 우리는 지혜와 명철을 지키자.


    [9절]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본문은,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요한복음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7:17,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에는 ‘진실로’(아멘)라는 말이 51회나 나온다(신약 전체에는 152회).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기독교는 진실한 증거 위에 세워져 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증인들이라고 불렸다. 사도행전 1:8,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그것은 참된 증인, 진실한 증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하며 진실한 말만 하라고 명하신다. 에베소서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거짓은 마귀의 속성이며 마귀의 죄이다.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9계명에서 거짓 증거를 정죄하셨다. 잠언 6:16-19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 6, 7가지 중 ‘거짓된 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들었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였고(계 21:8), 또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계 22:15).
    우리는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말자. 우리는 우리 속에서 거짓의 요소를 추방하고 오직 진실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자.


    [10절]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본문은,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교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만 짓는 자이다. ‘사치하는 것’이라는 원어(타아누그 גוּנ)는 ‘사치, 연락(宴樂), 기쁨’이라는 뜻이다(BDB).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조심하며 살지만, 미련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고 사치하고 먹고 즐기며 산다.
    본문은 미련한 자가 사치하며 즐거워하는 것이 적당치 못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앞에 있어도 그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해이하게 하고 교만하게 만들고 결국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련한 일이다. 이런 미련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상, 사치와 연락이 아니고,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고난과 책망이다.
    본문은 또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라고 말한다. 방백이 종을 다스리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지만,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께서 한 사회를 심판하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종이 방백을 다스리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며 또 종은 방백들을 잘 다스리지도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스리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에게는 다스리는 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 또 다스리는 자는 건전한 생각과 판단력, 도덕성과 사랑, 말의 덕스러움, 용기와 담력, 단호함 등의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스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들 중 하나이다(고전 12:28; 롬 12:4-8).
    우리는 미련한 자처럼 사치하고 연락지 말고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자. 우선,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 기쁨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며 겸손히 처신하며 남을 섬기며 근검절약하고 절제하자.
    [11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본문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이다. 우리는 왜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것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이의 부족을 긍휼히 여기고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기 위해서, 또 자신의 부족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참는 훈련, 관용하는 훈련, 너그러움의 훈련이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출애굽기 34:6,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민수기 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느헤미야 9:17,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그 외에, 시편 86:15; 103:8; 145:8; 욜 2:13 등에도 같은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16:32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또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고 말한다. 잠언 10:12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말한다.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교훈하기를,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하였다(엡 4:32).
    우리는 쉽게 성내는 자가 되지 말자. 노하기를 더디하자. 또 우리는 남의 허물에 대한 감정을 오래 품고 있지 말고 남의 허물을 용서하자.
    [12절]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
    본문은,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고 말한다. 왕은 힘과 권세를 가진 주권자이다. 사자는 먹이를 찢고 삼키려 할 때 부르짖는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 사울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과 공모(共謀)했다고 오해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85명을 죽이게 하였다(삼상 22장). 파사 왕 아하수에로는 잔치자리에 오라는 남편의 명을 어겼다고 진노하여 왕후 와스디를 왕후의 직에서 폐하였다(에 1, 2장).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크고 두렵다. 노아의 시대에 온 세상이 부패하고 강포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멸하셨다. 소돔 고모라성이 심히 부패하고 음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불비를 내리셔서 멸망시키셨다.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이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심히 부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땅의 거민을 다 멸하라고 명하셨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라 할지라도 그들이 우상숭배하며 부도덕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시키셨다. 예레미야는 유다 멸망 때의 하나님의 진노를 눈물로 증거하였다(애 2:1-3). 현 세상도 세속주의, 쾌락주의, 음란의 큰 죄악 때문에 마침내 불심판을 당할 것이며 악인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벧후 3:7; 계 21:8).
    본문은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고 말한다. 들의 풀은 새벽 이슬로 생기를 얻어 파릇파릇해진다. 왕의 은택과 호의로 백성들은 좋은 것을 얻는다. 하나님의 은택과 호의로 인생은 온갖 복된 것들을 누린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해방과 홍해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의 물 등 하나님의 귀한 은택들을 받아 누렸다.
    우리는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하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도록 죄를 회개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자.

    [13절]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본문은,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고 말한다. 미련한 자녀는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부모를 공경치 않고 죄만 짓고 게으르고 방탕한 자녀이다. 사람은 언제 미련한 자녀가 되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때, 부모의 바른 교훈과 본이 없을 때, 또 부모의 바른 교훈을 받아도 고의로 그것을 대항할 때, 미련한 자녀가 된다. 잠언 1:7,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미련한 자녀는 그 아비의 재앙이다. ‘재앙’이라는 원어(하오스 ת)는 ‘멸망’이라는 뜻이다(BDB, NASB, NIV). 잠언 17:21은,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자녀는 부모의 대를 잇는 자요 부모의 기업이다. 자녀가 잘 되면 부모에게 기쁨과 낙, 영광과 복이 되지만, 자녀가 잘못되면 부모에게 근심과 슬픔, 수치와 멸망이 된다.
    본문은 또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고 말한다. 다투는 아내는 아내의 역할에 역행하는 자이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을 돕는 것이다. 돕는 자가 되려면, 특별한 경우는 겸손히 조언을 줄 수 있겠으나, 대체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아내가 왜 남편과 다투나? 겸손과 이해심이 없고 교만과 욕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은 끊임없이 남편을 괴롭게 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잠언 12:4는,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21:9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련한 아들이 되지 말자. 또 다투는 아내가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로, 또 의무를 다함으로 복된 가정을 만들자.


    [14절]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본문은,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말한다. 물론 그 부모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야 상속해줄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아내는 부모가 줄 수 없다. 슬기로운 아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자이다. 그는 죄악된 것을 다 버리며 선하고 온순하며 단정하고 순종하며 부지런하다. 반대로, 어리석은 여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돈과 쾌락과 세상영광을 구한다.
    성경은 슬기로운 여인을 칭찬하며 권장한다. 잠언 12:4, “어진[현숙한]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잠언 14:1,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잠언 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본문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예비하시고 구원하시고 거룩케 하시며 지혜와 총명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실 수 있고 또 주신다. 슬기로운 아내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고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8:22도, “[좋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슬기로운 아내를 주시는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다. 그러나 고난도 때때로 유익하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자신의 불경건과 불순종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시 119:67, 71) 경건과 순종의 훈련을 받으며 회복의 은혜를 얻게도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자이시다(롬 8:28).
    우리는 슬기로운 아내가 되고, 딸들을 슬기롭게 잘 키우자. 그러나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주심으로 되므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자.


    [15절]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본문은,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懈怠)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고 말한다. 게으름은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한다. 게으름은 자기 할 일을 등한히 하는 것, 시간을 낭비하는 것, 놀고 먹으려 하는 것을 가리키며, 그런 사람은 잠도 하루에 아마 8시간 이상 잘 것이다. 잠언 6:9는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라고 말한다.
    본문은 해태한 자, 즉 나태한 자, 게으른 자는 주릴 것이라고 말한다. 잠언 6:10-11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말하고, 잠언 10:4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한다. 잠언 13:4는,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고 말하고, 잠언 18:9는,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가난해지고 파산하고 만다.
    성도는 부지런해야 한다. 성도는 잠도 적당히 자야 하고 자기 일을 정직하게, 성실하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에베소서 5:15-16,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성도는 놀고 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데살로니가후서 3: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부지런하게 사는 자는 몸도 건강해지고 물질적 여유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잠도 적당하게 자자. 우리는 우리의 하여야 할 영적인 의무들과 육적인 의무들을 성실하게, 부지런하게 하자.


    [16절]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
    본문은,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거니와 그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말한다. 계명 즉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바른 길, 선한 길을 지시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서 의를 행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 한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 의롭게 살았던 노아는 홍수로 멸망하는 세상에서 방주로 구원을 받았다. 믿음과 순종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다른 이들은 다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였다.
    본문은  그러나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는 죽는다고 말한다.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라는 원어는 ‘그 길을 멸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 길’은 그가 가야 할 바른 길, 계명에 따른 바른 생활을 가리킨다. 그 길을 멸시하는 것은 어그러진 길로 가고 잘못된 행실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곧 죄가 된다.
    그 행실을 삼가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 에스겔 18:20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말하며, 로마서 8:13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하였다. 의는 생명에 이르고 죄는 죽음에 이른다.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다가 다 망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광야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악을 행하다가 다 망하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자.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조심하며 바른 길, 선한 길을 멸시하지 말자.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본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구제하는 뜻을 포함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 즉 꾸어드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 14:31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하였고, 또 잠언 17:5는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하였다.
    또 특히 교인의 경우, 주의 이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10:40), 또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본문은 가난한 자에게 한 구제를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고 말한다. 시편 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사도 바울도,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主)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안다”고 말하였다(엡 6:8).
    우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말자.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자.


    [18절]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본문은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녀를 의지하지는 않으나, 자녀에 대한 소망을 가진다. 성도는 그의 자녀가 경건하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고 살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자녀의 심령이 굳어져 도저히 고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 전까지 그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문은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라”고 말한다. 자녀의 잘못을 버려두는 것은 그를 사랑함이 아니고 미워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책망하며 상당한 벌을 주어야 한다. 잠언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3: 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언 29:15, 17,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
    본문은 그러나 그를 죽일 마음은 두지 말라고 한다.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한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교육의 목적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리는 것이다. 교육은 주로 말로 하는 것이며 징계는 약간만 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징계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6:4,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 3: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는 자녀에 대한 경건하고 선한 소망을 두고 그를 교훈하고 근실히 징계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징계해서는 안 된다.


    [19절]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건져 주게 되리라.
    본문은,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건져 주게 되리라”고 말한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하게 노하는 것을 말한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반복해서 실수하므로 한두 번 용서해주어도 결국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 벌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미련한 아들이나 미련한 종의 모습이다. 사람이 이성과 양심과, 성경의 교훈을 따르면 바른 판단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할 것이지만, 맹렬한 노, 즉 상한 감정으로 행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고 그릇된 말과 행동을 하여 심판에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노하기를 더디하라고 교훈한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22:24-25,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잠언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도서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怒)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하자.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않는다(고전 13:4-5). 우리는 형제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실천하자.


    [20절]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본문은,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한다. ‘권고’는 조언, 충고, 권면이라는 뜻이며, ‘훈계’는 교훈, 경고, 책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런 여러 요소들이 있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교훈이 있고 책망도 있고 권면과 충고도 있고 바르게 하는 것도 있고 위로도 있고 마침내 의의 인격과 삶에 이르게 함이 있다.
    본문은 ‘들으며’ ‘받으라’고 말한다. 교만한 자, 닫힌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받지 않는다. 그는 말의 꼬투리나 잡으려 하고 말을 들어도 거역한다. 그는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이 없고 그 말씀을 배척하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받을 때 겸손히, 단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우리는 칭찬과 위로의 말만 좋아하지 말고 충고와 책망의 말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본문은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고 말한다. ‘필경은’이라는 원어(베아카리세카 יאַ)는 ‘너의 말년에’라는 뜻이다(BDB). 비록 우리가 과거에 지혜가 없었고 지금 지혜가 부족할지라도, 우리가 권고와 훈계를 받으면 지혜가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길은 성경을 읽고 듣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원수보다, 스승보다, 노인보다 지혜롭게 되었다고 고백하였고(시 119:98-100), 야고보는 지혜 얻기를 구하라고 교훈하였다(약 1:5).
    우리는 권고와 훈계를 달게 받고 성경을 힘써 읽음으로 지혜를 얻어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며 평강과 형통과 영생을 누리자.



    [21절]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본문은,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계획을 세운다. 또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즉흥적으로 하지 말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무슨 일을 계획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하는 여러 일들이 있다. 우리의 여러 계획들 중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한 것만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어떤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6:1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하며, 또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악한 계획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따르며 섬겼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 때문에 배반하였고 유대 지도자들은 계획한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다.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완성되었고, 또 그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성(神性)과 사역이 확증되었다. 잠언 16:4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악한 일들까지도 섭리하셔서 그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자(잠 3:6). 그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믿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자.


    [22절]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본문은, “사람은 그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고 말한다. ‘남에게 사모함을 받는다’는 원어(타아와 ה)는 ‘사모함을 받는 것, 장식, 광채’(BDB) 혹은 ‘사모하는 것, 사모할 만한 것’(NASB)이라는 뜻이다. 인자함은 사람의 좋은 인격성의 대표적인 덕이다. 그것은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너그럽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인정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의 반대는 무정하고 냉정하고 이해심이 없고 무관심하고 이기적이며 거칠고 가혹하며 너무 비평적인 성품이다. 사람의 인격의 광채와 영광은 그의 인자한 성품에 있다.
    본문은 또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말한다. 거짓말은 심히 나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거짓말로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사탄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이단 사상들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무너진다.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회개는 죄의 진실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거짓말하는 자는 사람 간에도 참 친구가 될 수 없다. 거짓말하는 자는 가난한 자보다도 못한 자이다. 성도는 가난할지라도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인자함과 진실함, 이 두 가지 덕성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이 두 덕성을 강조한다. 잠언 3:3-4는,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하였고,  미가 6:8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우리는 인자한 자가 되되, 불의를 용납하거나 악과 타협지 말자. 또 진실한 자가 되되, 무정하거나 거칠고 가혹한 자가 되지 말자.


    [2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인간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지식이며 인간이 행해야 할 첫 번째의 마땅한 의무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살면서 창조자요 섭리자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가장 큰 무지요 가장 큰 불행이며 가장 큰 죄악이다. 피조물인 인생은 마땅히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며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아니라, 또한 큰 유익이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어기고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영원한 생명의 복을 누린다. 다윗은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였다(시 36:9).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내 백성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다(렘 2: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평강을 얻는 길이다. 평강은 심적 평안, 육신적 건강, 물질적 여유,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한다. ‘지낸다’는 원어(린 ןי)는 ‘밤을 지낸다, 거한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물질적 유여함으로 배부르게 밤에 쉬며 평안하게 거할 것이며, 또 재앙을 만나지 아니할 것이다(사 48:17-18; 딤전 4:8).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일이며 기본적인 의무이다. 또 그것은 건강, 일용할 양식, 평강, 영생 등을 주는 유익한 일이다.

    [24절]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본문은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한다. ‘넣는다’는 원어(타만 ן)는 ‘감추다, 숨기다’는 뜻이다. ‘그릇’이라는 원어(찰라캇 ת)는, 헬라어 70인역, 유대인 주석가들은 ‘품’(bosom), 주후 2세기 헬라어역들(아귈라역, 시마쿠스역)은 ‘겨드랑이’로 번역했고, 옛날 영어성경(KJV)은 ‘품’으로 번역했으나, 권위 있는 히브리어 사전들(BDB, KB)에 의하면 ‘그릇’이라는 뜻이며 현대영어성경들(NASB, NIV)은 ‘그릇’으로 번역하였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려 하지 않는다. 먹을 것이 앞에 있어도 먹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 음식을 만들고 집안일을 하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는 것 같다. 잠언 12:27은,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성경은 게으름을 책망한다. 게으른 자는 가난해지고 그 부리는 자에게 고통이 되고 남에게 부림을 받는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잠언 10:26,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자가 되자. 경건과 봉사도 마찬가지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25절]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본문은,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잠언 21:11도 비슷하게,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고 말한다. 본문은 거만한 자, 어리석은 자, 명철한 자, 세 종류의 사람을 말한다.
    첫째로, 거만한 자(레츠 ץ)는 남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를 말한다. 그는 마음이 악으로 굳어진 자이다. 본문은 그런 자를 때리라고 말한다. 잠언 9:7-8은,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개인적 책망을 피하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거만한 자를 때리라는 교훈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공적 징벌을 가리키며 그것은 오늘날 교회적 권징에 해당된다. 거만한 자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둘째로, 어리석은 자(페시 י)는 순진한 자를 가리킨다. 그는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지 못하는 자이며, 우유부단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한 자가 징계받는 것을 볼 때 두려움을 갖고 그런 악을 피하며 조심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명철한 자(나본 ןוֹב)는 참된 지혜를 얻은 자를 가리킨다. 그런 사람도 책망받을 잘못이나 실수를 할 때가 있겠으나, 그는 책망을 받을 때 지식을 얻는다. 그는 매로써가 아니고 말로써 자신의 부족을 고칠 것이다. 잠언 9:8-9는,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남을 조롱하는 거만한 자가 되지 말고 어리석은 자도 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롭고 명철한 자가 되자.
    [26절]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본문은,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다. 성경은 부모뿐 아니라, 학교의 선생, 국가의 통치자, 교회의 목사와 장로도 공경하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윗사람을 공경하고, 죄 되는 일이 아닌 한 순종해야 한다.
    본문은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자에 대해 말한다. ‘구박하다’는 원어(메솻데드 ד)는 ‘핍박하다, 강포하다’는 뜻이다. 쫓아낸다는 말은 무시하고 배척하고 학대한다는 뜻이다. 악한 자녀는 가정에서 부모를 무시하고 학대하며, 나쁜 학생은 학교에서 선생을 무시하고 대항한다. 나쁜 국민은 국가의 통치자들을 무시하고 반항하며, 나쁜 교인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을 무시하고 힐난하고 대항한다.
    본문은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행한 대로 받는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영광, 악을 행하는 자에게 수치와 욕을 내리신다.
    율법에 의하면, 부모를 치거나 저주하는 자는 사형을 당한다(출 21: 15, 17).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고 그 징책을 듣지 않고 술취하고 방탕한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은,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여 성읍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죽이게 하였고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악을 제하게 하고 온 이스라엘로 듣고 두려워하게 하였다(신 21:18-21). 또 잠언 30:17에도,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하였다. 부모를 구박하고 쫓아내는 죄에 대한 징벌은 매우 크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자. 윗사람을 공경하고, 죄 되는 일 외에는 다 순종하자.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받기 때문이다.
    [27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본문은,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근래의 영어성경들(NASB, NIV)은 이 본문을, “내 아들아, 교훈을 듣지 말라. 그러면 네가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되리라”고 번역하지만, 옛날 영어성경(KJV)과 한글개역의 본문이 원문의 바른 뜻 같다. ‘내 아들아’라는 말은 보통 다른 구절들에는 없는 표현이다. 이 말은 사랑과 관심과 간곡함을 나타낸다.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은 선한 지식과 멀어지게 만드는 잘못된 교훈을 가리킨다고 본다. 참된 교훈은 바르고 선한 지식을 주는 유익한 교훈이지만,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은 유익이 없는 교훈이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 즉 이단들의 교훈이다.
    주께서는 말세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겠다고 예언하셨다(마 24:11). 사도 바울은 그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전하며 다른 영을 받게 하는 자들이며(고후 11:4), 사탄의 일꾼들이며(고후 11:14-15), 그들의 사상은 저주받을 사상이며(갈 1:8),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이며(딤전 4:1), 또 바른 교훈과 진리에서 떠난 허탄한 이야기들이라고 표현하였다(딤후 4:3-4). 사도 요한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교훈이 아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1).
    본문은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라고 말한다. 무지한 교훈을 들으면 생각과 지식이 잘못되어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혹 들었을지라도, 앞으로는 듣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듣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듣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바른 교훈, 선한 교훈, 곧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만 들어야 한다. 잠언 19:20,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우리는 듣는 것을 조심하여, 바른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잘못된 말은 듣지 말고, 바르고 선한 교훈만 사모하며 듣고 붙들자.
    [28절]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본문은,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고 말한다. ‘망령된’이라는 원어(벨리야알 ל ד)는 ‘무가치한, 사악한, 비열한’이라는 뜻이다.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긴다. 진실하고 참된 증인은 사실을 증거하며, 진실과 의를 생명같이 여기며,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며, 시시비비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사악하고 비열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성경적으로 옳은 말을 무시한다.
    본문은 또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고 말한다. 악인의 입은 악한 사람의 말을 가리킨다. 죄악을 ‘삼킨다’(빌라 ע)는 표현은 죄악을 취하고 택하고 행한다는 뜻이다(BDB). 악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길 뿐 아니라, 죄악된 말, 즉 부정하고 불법한 말, 옳지 않고 정당치 않은 말, 또 완전한 거짓말이든지 반쯤 거짓말이든지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나 사람의 예와 아니오 한마디가 다른 사람을 무죄자로 만들기도 하고 유죄자로 만들기도 한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말 한마디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고(출 20:16), 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3:1-3). 주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37). 사람의 한마디 말이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공의를 업신여기는 망령된 증인, 죄악을 내뱉는 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진실한 증인이 되고 선과 의를 생명같이 여기자.
    [29절]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본문은,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고 말한다. ‘거만한 자’는 마음이 높은 자, 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자, 남의 충고를 듣기 싫어하는 자, 자기의 실수를 인정치 않는 자이다.
    그와 반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자, 남의 충고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 남의 충고를 겸손히 듣는 자,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 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주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케실 לי)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거만하고 악한 자를 가리킨다. 잠언에 의하면, 그는 참된 지식을 미워하고(잠 1:22) 명철을 기뻐하지 않으며(잠 18:1)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자이다(잠 10:23). 그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잠 12:23) 그 입은 미련한 것을 쏟으며(잠 15:2) 그는 미련한 것을 먹고산다(잠 15:14).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해 예비된 것이며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거만한 자와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세상에서도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결코 죄인을 죄 없다 하지 않으신다(출 34:6-7).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잘못이 있어도 용서를 받는다. 그는 남의 충고와 책망을 달게 듣고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부족과 실수가 없는 자는 없다.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선한 자가 되자. 





    20장: 술, 잠, 말



    [1절]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
    본문은, “포도주는 거만케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시대에 술은 주로 ‘포도주’(야인 ן)다. 물론 ‘독주’ (쉐카르 ר)도 있었다. 본문은 포도주나 독주를 사람을 거만케 하고 떠들게 하는 유익이 없는 음식으로 묘사한다. 술은 사람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며 허풍과 허세를 부리게 만든다.
    본문은 “무릇 이에 미혹되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느니라”고 말한다. ‘미혹되다’는 원어(솨가 ה)는 ‘실수하다, 비틀거리다, 술취하다’는 뜻이다. 성경은, 술을 한두 잔 마시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술취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지만, 술취하면 이성과 양심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실수하고 범죄하게 되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의인 노아는 술취함으로 그 장막에서 벌거벗는 실수를 하였고(창 9:20-27), 의로운 롯도 술취함으로 근친상간의 부끄러운 죄를 범하였다(창 19:30-38). 실상, 술은 유익이 별로 없다. 술은 개인과 가정에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고 자기 몸에 해를 주며 사람을 생활에 불성실하게 만들고 더욱이 그를 실수하며 범죄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술취하지 말라고 교훈하였고(엡 5:18), 감독과 집사의 자격으로 ‘술을 즐기지 않음’ ‘술에 인박이지 않음’을 들었고(딤전 3:3, 8; 딛 1:7), 늙은 여자들에게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딛 2:3). 또 그는 술취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고전 6:9-10; 갈 5:19-21).
    우리는 술을 즐기지 말고 술취하지 말자. 완전 금주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할 만한 좋은 전통이다. 우리는 깨어 근신하며 살자.


    [2절]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본문은,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고 말한다. 왕은 나라의 주권자요 우두머리이다. ‘진노’라는 원어(에마 הי)는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왕은 두려운 자이다. 왕의 진노는 두려운 일이다. 왕이 언제 진노하는가? 백성이나 신하가 악을 행하고 거짓되이 행할 때, 특히 반역을 꾀할 때 그러할 것이다. 왕이 화내는 것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다. 동물의 왕인 사자의 부르짖음은 짐승들에게, 심지어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을 줄 것이다. 왕이 진노하면 특히 악하고 거짓된 자들과 반역자들에게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본문은 또,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서를 명하셨다.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특히, 왕은 칼을 가진 자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왕을 대적하고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해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하물며,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대주재자이신 하나님께서 노하시면 어떠하겠는가. 나훔 1:2, 6은,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라고 말하였다. 로마서 1:18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불의한 자에게 노하신다.
    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도 공경하고 그들에게 복종하자. 우리는 특히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말고, 그에게 절대 복종하자.



    [3절]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본문은,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교만 때문에 다툰다. 잠언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또, 사람은 욕심 때문에, 즉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육신적 사랑 등의 욕심 때문에 다툰다. 잠언 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야고보서 4: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또, 사람은 미움 때문에 다툰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이런 동기에서 나온 다툼들은 아무 유익이 없다.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
    본문은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온유와 겸손의 덕을 가질 때, 또 세상적 욕심을 버릴 때, 또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을 가질 때 다툼을 멀리할 수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 성도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있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요 그의 영광이다.
    예수님은 온유하시다. 그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모세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이었다(민 12: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함이다(갈 5:22-23). 교회의 직분자는 온유하고 다투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3:3, (장로의 자격)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디모데후서 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우리는 교만, 욕심, 미움을 버리고 다툼을 멀리하자. 우리는 주님을 본받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열매를 맺자.


    [4절]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본문은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가을에’라는 원어(메코레프 ף)는 ‘가을이 지난 후’(BDB, NASB)라는 뜻이며 옛날 영어성경은 ‘추위 때문에’(KJV)라고 번역하였다. 유대 땅에는 가을에,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이른비가 내리고 그런 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고 한다. 밭을 가는 것은 땀을 흘리는 수고로운 일이다. 게으른 자는 일해야 할 시기에 일하지 않는 것이다. 잠언 10:5는,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고 말하고, 잠언 19:24는,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은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심은 것이 없으니 거둘 것도 없으며, 수고한 것이 없으니 기쁜 날도 없을 것이다. 세상 일은 무슨 일이든지 부지런하게 행해야 유익하고 소득도 생긴다.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언 12:24,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 잠언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나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영적인 일도 비슷하다.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사람이 경건의 훈련에 힘쓰고 성경 읽고 기도하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면 인격이 변화되고 덕을 세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딤전 4:8; 갈 6:9).
    우리는 세상 일에 부지런하자. 손으로 땀 흘리며 일하기를 힘쓰자. 또 우리는 영적인 일에도 부지런하자.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자.


    [5절]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본문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고 말한다. ‘모략’이라는 원어(에차 ה)는 ‘계획’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계획을 세우고 행한다. 지혜로운 자는 계획을 잘 세워 일을 성취시킨다. 잠언 11:14, “도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언 15:22,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언 20:18,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잠언 24:6,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있는 계획은 깊은 물과 같다. 그것은 감추어 있어 쉽게 생각해내기 어렵다. 잠언 18:4,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깊은 물을 길으려면 두레박과 긴 줄과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다.
    본문은,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고 말한다. 명철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와 총명을 얻은 자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에게 필요한 지혜와 명철을 주신다. 하나님의 영은 지혜와 총명과 모략(에차 ה)의 영이시다. 이사야 11:2,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 의와 선과 거룩의 길을 행할 때 더욱 총명을 얻는다. 명철한 자는 마음 속에서부터 좋은 계획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맑은 정신, 깨닫는 지혜, 바른 판단력, 지혜롭고 사려 깊은 생각들을 주셔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었던 요셉과 다니엘이 그러하였다(창 41:38; 단 4:9; 5:11).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며 의와 거룩과 선을 행함으로 명철한 자가 되어, 무슨 일을 할 때 좋은 계획을 세우는 자가 되자. 



    [6절]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본문은,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남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고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의 선함과 인자함을 자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선함과 구제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 선(善)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외식적 선행을 경계하셨다. 마태복음 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과 위선(僞善)을 책망하셨다(마 23장).
    본문은 또,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충성된 자’는 겉과 속이 같은 자,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자, 참으로 믿을 만한 자를 가리킨다. 성령의 열매들 중 하나는 충성이다(갈 5:22).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은 충성된 일꾼이었다(빌 2:20, 30). 사도 요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하였다(요일 3:18). 선한 행위로 자신을 증거하는 충성된 성도와 일꾼은 찾기 어렵고 만나기 어렵다.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고 자랑하려고 선을 행하지 말고, 은밀히 선을 행하고 남을 구제하자. 우리는 범사에 충성된 자, 믿을 만한 자가 되자. 



    [7절]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본문은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말한다. ‘완전히’라는 원어(베숨모 וֹמּ)는 ‘그의 완전함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완전함’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심으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도덕적으로 큰 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완전함에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자이다. 그는 십계명을 힘써 지킨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산다. 노아가 의인이었고(창 6:9) 욥도 그러하였고(욥 1:1), 다니엘도 그러하였다(겔 14:14, 20). 또 그런 사람은 범죄하였을 때 즉시 회개한다. 구약시대에는 그가 회개할 때 번제와 화목제와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는다.
    본문은,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말한다. 부모의 신앙과 선행은 자신들에게뿐 아니라, 또한 그들의 자손들에게도 복이 된다. 출애굽기 20:5-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워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죄를 갚으시지만,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신명기 28:4, 18도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자녀에게 복을 주실 것이나, 그의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는 자녀에게 화를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였다. 시편 37:25-26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고 말한다.
    우리는 완전함에 행하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믿고 죄를 떠나고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녀들도 복될 것이다.



    [8절]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본문은,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옛 시대에 왕은 심판 자리에 앉은 자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였다(왕상 3:9). 왕은 재판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경건하고 의로운 왕은 공의를 세웠다. 사무엘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공(公)과 의(義)를 행할새.”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한다. ‘그의 눈으로’라는 말은 ‘그의 의로운 관찰과 통찰과 판단의 눈으로, 고의적인 악을 분별하고 미워하는 눈으로’라는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로운 재판장은 의와 불의, 선과 악을 분별하고 모든 악을 징벌하며 흩어지게 한다. 악은 그 앞에 설 수 없고 다 흩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며 공의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통치자이시다. 그는 온 세상의 재판장이시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으로 오셨다. 예레미야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요한계시록 19:11,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사람이 악을 버려야 할 이유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서 모든 악인을 다 엄히 징벌하시고 멸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자. 세상의 재판장도 두려워해야 하지만, 특히 온 우주의 재판장이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자.



    [9절]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본문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라고 말한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마음이 완전히 깨끗한 자는 없고 죄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자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죄성을 가지고 있고 실수와 연약함이 있다.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렘 13:23). 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51:5).
    사람은 중생하고 구원받은 후에도 본성의 연약성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7:18-19, 25,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義)이시다. 또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만 죄악성을 이길 수 있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자.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만 구하자. 



    [10절]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본문은,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돌과 돌, 에바와 에바, 이 둘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니라.” 옛날에는 돌을 저울추로 사용했던 것 같다. 에바는 큰 통이다. 1에바는 약 22리터이며, 우리나라에서 예전에 쓰던 말(10되, 약 18리터)보다 좀더 큰 단위이다. ‘돌과 돌’ ‘에바와 에바’라는 표현은 서로 다른 저울추와 말을 의미한다. 그것은 저울추를 속이고 말을 속이는 것을 말한다. 즉 공정치 않은 상거래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가 공정한 상거래를 할 것을 명하셨다. 레위기 19:35-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신명기 25:13-15, “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요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잠언도 이 진리를 강조한다. 잠언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언 16:11,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추돌들도 다 그의 지으신 것이니라.” 잠언 20:23은,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사회에는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모스 8:5, “[그들이]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미가 6:10, “악인의 집에 오히려 . . .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에스겔 45:10,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
    우리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거짓과 불의를 버리고 진실과 정직을 행하자. 상거래뿐 아니라, 말과 행실과 돈 거래에 있어서도 그러하자.


    [11절]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본문은,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고 말한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라도 자신의 행위의 정직과 깨끗함을 드러내며 자신이 잘못이 없고 거짓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린아이에게도 양심과 도덕적 분별력이 있고 이성적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아이들은 가정에서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격이 비뚤어져서 말과 행실이 나쁘고 부모에게 또 사회에 대해 반항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아이들, 특히 믿음의 자녀들 속에는 상당한 도덕적 관념이 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도덕성이 있고 자신의 정결함과 정직함을 나타냄을 볼 수 있다면, 하물며 성인인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씻음과 새 생명을 받은 성도인 우리는 얼마나 도덕적인 삶, 얼마나 깨끗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인격적 미성년자, 미성숙자도 그러하다면, 성인들의 책임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지만, 타락한 인간 본성 속에는 죄악된 성질이 있고 그 죄악성의 중심은 욕심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했다. 사람의 욕심은 육신의 정욕, 물질적 탐욕 즉 돈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남보다 위에 서려는 명예욕을 포함한다. 이런 욕심에서 미움, 시기, 질투, 속임,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의 온갖 죄악이 나온다. 사회의 죄악은 대개 아이들의 탓이 아니고 어른들의 탓이다. 성인들은 도덕적 책임을 가지지만, 그 책임을 저버리고 온갖 죄를 범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른들조차도 아이들에게 도덕적 모범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경건하고 도덕적이게 키우자. 또 우리 자신도 경건하고 도덕적인 인격자가 되자.


    [12절]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본문은,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시력과 청력 지켜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에게 마음의 눈과 귀도 주셨다. 주께서는 무리에게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마 13:9). 그것은 마음의 귀를 가리켰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의 눈과 귀를 열기도 하시고 닫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엡 1:17-19).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의 눈과 귀를 항상 열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우리는 이 기관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우리의 눈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책과 신앙에 유익한 좋은 책들은 보아야 하지만, 우리의 심령을 더럽히는 헛되고 죄악된 그림이나 글들은 보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의 귀는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말씀, 성경적 설교, 찬송, 유익한 충고 등은 듣지만, 이단사설, 거짓말, 헛소문, 죄악되고 허탄한 잡담은 듣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의 모든 부분을 다 보시고 다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를 보시고 들으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는 우리의 은밀한 선행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복 주시며, 또한 우리의 악행을 보시고 슬퍼하시고 벌 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자.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을 보시고 들으심을 알고 우리의 눈과 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하게만 사용하자. 



    [13절]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
    본문은,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하면 양식에 족하리라”고 말한다. 잠은 사람의 휴식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복된 것이다. 잠에는 피로 회복의 비밀이 있다. 몸 건강의 첫 번째 방법은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다. 수면 시간은 사람의 체질과 건강상태에 따라 또 하루의 일의 성격과 양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지만, 최소 5시간 이상 8시간 미만일 것이다. 수면 부족은 병의 원이 되므로 충분히 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자기를 좋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게으름의 표가 되기 때문이다. 게으른 자는 잠자기를 좋아하고 그 결과 가난해진다. 농사도, 고기잡이도, 장사도, 공부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잠을 줄이고 자기 일에 부지런해야 한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성도는 영적인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영적인 잠은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앙의 성장이 없고 심령의 연약함이 찾아온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세월을 아끼고 주의 뜻을 분별하고 행해야 한다(엡 5:15-17).
    우리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자기 일에 충실하자. 우리는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또 의와 선을 행하자.


    [14절]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본문은,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고 말한다. 본문은 세상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지적한 것이라고 본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살 때 물건값을 깎아 보려고 ‘이 물건이 좋지 못하다’고 거짓말을 쉽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한다. 자기에게 유익하면 악한 것도 선하다고 하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선한 것도 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물건을 사서 돌아간 후에는 그 물건을 자랑한다. 이것은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스스로 모순된 말을 하는 것이다. 조금 전에 ‘좋지 못하다’고 말하던 그 물건을 지금 자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성도는 자기 중심적이거나 물질 중심적이게 살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는 안 좋은 것은 안 좋다고 말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해야 한다. 물건을 파는 자도 올바르고 진실하게 팔고 물건을 사는 자도 그것을 진실하게 평가하고 말하며 사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성도는 세상 사람들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성도는 범사에 진실의 원리를 따라 행해야 하고 또 사랑의 원리를 따라 행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고 말하였다(엡 4:25). 또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저 유명한 사랑의 성격에 대한 교훈을 하였다. 그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하였다(고전 13:5-6). 우리는 진실과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유익만 생각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 중심적으로 살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서 의롭고 진실하게만 살자. 



    [15절]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
    본문은, “세상에 금도 있고 진주도 많거니와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니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입술’이라는 원어(시프세 다아스 ת־י)는 ‘지식의 입술’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말을 하는 입술을 가리킨다. ‘진주’라는 원어(페니님 םייפּ)는 ‘산호’라는 뜻이다(BDB, KB). 잠언 10:20-21에는,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으므로 죽느니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처신해야 할 것과 남에게 선을 베풀고 진실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는 입술은 지식의 입술이다. 성경은 덕스러운 말, 은혜로운 말,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하라고 교훈한다. 잠언 12:18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말한다. 또 에베소서 4:29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교훈한다.
    지식 있는 입술은 금과 진주보다 더 귀한 보배이다.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을 나타낸다. 경건하고 겸손하고 선하고 진실한 말을 하는 자는 경건하고 겸손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임을 나타낸다. 덕스럽고 은혜롭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하는 자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선한 인격자임이 분명하다. 사람의 인격성과 도덕성의 가치는 금과 보석 등의 물질적 가치와 비교할 수 없이 크다. 그것은 정금보다 산호보다 낫다(잠 3:14-15).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고 말하였다(잠 8:10).
    우리는 지식의 가치를 깨닫고 물질적 부요를 구하지 말고 지식을 구하자. 우리는 경건하고 겸손함과 선하고 덕스럽고 진실함을 구하자.


    [16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
    본문은, “타인을 위해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잡힐지니라”고 말한다. 잠언 27:13도 동일한 말씀이다. ‘타인’이라는 원어(자르 ר)는 ‘낯선 자’라는 뜻이다. ‘외인들’이라는 원어(노크리얌 ם)는 ‘낯선 자들’(케팁--노크림 םי) (Syr, Vg, NASB) 혹은 ‘낯선 여자, 즉 음녀’(케레--노크리야 ה) (Targ, KJV, NIV)라는 뜻이다. 본문은, 낯선 자를 위해 보증이 되면, 그 옷도 빼앗기고 그 몸도 볼모잡히며 종이 된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잘못된 보증을 서면 큰 손실과 낭패를 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제할 마음과 힘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남의 보증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갚을 힘이나 마음이 없으면서 남의 보증이 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다.
    잠언 6:1-5,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언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22:26-27,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만일 갚을 것이 없으면 네 누운 침상도 빼앗길 것이라.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우리는 성경의 지혜의 교훈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자를 위해 또 자신이 갚을 힘도 없으면서 남을 위해 보증을 서지 말아야 한다.


    [17절]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
    본문은,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다”고 말한다. ‘속이고 취한 식물’이라는 원어(레켐 솨케르 ר ם)는 ‘거짓의 떡’이라는 뜻이다. 거짓의 떡이란, 온갖 부당하고 불의한 소득, 예를 들어, 사기를 쳐서 번 돈, 점원이 물건이나 돈을 훔치는 것, 공금 횡령, 공적인 물건을 사적으로 쓰는 것, 돈을 빌리고 안 갚는 것, 헌금을 훔치는 것 등을 가리킨다. 그것은 더러운 이익, 불의하고 거짓된 이익이다.
    성경은 장로의 자격을 가르치면서 “더러운 이[이익]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하고(딛 1:7), 또 집사의 자격도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한다(딤전 3:8). 사도 베드로도 장로들에게 교훈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말하였다(벧전 5:2).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다. 더러운 이익, 불의한 이익은 당장에는 이익이 되는 듯하다. 그런 돈으로 좋은 옷을 사고 좋은 음식을 사먹고 차를 사고 집을 살 때는 그러할 것이다. 사람들은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고 말한다(잠 9:17).
    본문은 그러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고 말한다. ‘후에는’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의 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얼마 동안 참으신다. 그 기간은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기간이다. 그러나 얼마 후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될 것이다. ‘모래’라는 원어(카차츠 ץ)는 ‘자갈’이라는 뜻이다(BDB, NASB).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나타낸다. 사람이 의와 선을 행하면 평강을 누릴 것이지만, 불의와 거짓과 악을 행하면 재앙을 얻을 것이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낫다(잠 16:8). 우리는 돈 욕심을 버리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번 돈으로 살자.


    [18절]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본문은,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한다. ‘경영’은 어떤 일을 구상하고 계획하는 것을 말한다. ‘의논함’은 어떤 일의 목표와 진행과정에 대해, 또 주의할 점에 대해 그 방면에 지식과 경험이 있고 지혜가 있고 사리판단력이 있는 자들의 의견과 조언을 듣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것을 구상하고 계획한다. 그런데 그 일을 계획할 때 지혜로운 의견과 조언이 필요하다. 지혜롭고 좋은 조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고 이성적 판단과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가리킨다. 진학이나 취직, 결혼 등의 개인의 진로와 가정의 일과 사업의 일 같은 세상일들이나 교회 일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잠언 15:22는,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고 말한다. 또 잠언 11:14는, “도략[조언]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도 말한다.
    특히 전쟁을 할 때 그러하다. 전쟁은 단지 군사력의 싸움이 아니고 무엇보다 머리 싸움이다. 그래서 본문은 “모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고 말한다. ‘모략을 베풀고’라는 원어(비사크불로스 תוֹל)는 ‘[좋은] 조언을 받아서’라는 뜻이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지혜와 경험이 있는 참모들의 좋은 조언이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잠언 24:6,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고 말한다.
    영적 전쟁인 성도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그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성도는 좋은 조언들이 필요하다. 그 조언들은 성경책에 있다. 또 그들의 실제의 삶 속에서 성경의 조언들을 실험하고 검증한 경건한 성도들의 간증들도 좋은 조언들이 된다.
    우리는 세상일을 하기 전에 지혜자들과 경험자들의 좋은 조언들을 받자. 또 신앙 생활에서도 성경말씀과 경건한 성도들의 조언을 받자.


    [19절]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본문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말한다. 각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남의 집에 두루 다니는 것은 성실한 삶이 아니다. ‘한담하는 자’는 말을 많이 하는 자, 말쟁이, 수다쟁이를 가리킨다. 사람이 남의 집에 두루 다니며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남을 비방하며 남의 험담을 하고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되기 쉽다. 그런 사람은 입이 가벼운 자이며 인격적 결함을 가진 자이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게 된다. 남의 비밀이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를 원치 않는 일, 즉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 수치스런 일을 가리킨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입이 가벼우므로 남의 비밀을 누설하게 된다. 그것은 남의 인격과 명예를 해치는 나쁜 일이다. 그것은 사랑과 화평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마태복음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므로 본문은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라고 말한다. ‘입술을 벌린 자’는 말이 많은 수다쟁이를 가리킨다. 성경은 말을 자제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한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성도가 수다쟁이와 사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첫째, 자기 자신도 나쁜 영향을 받아 입이 가볍고 결함 있는 인격이 되기 쉽기 때문이며, 둘째, 자신도 남을 비난하는 죄에 동참하기 쉽기 때문이며, 셋째, 어느 날 자신의 숨은 약점들도 그에 의해 다른 이에게 알려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루 다니며 한담하며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말쟁이가 되지 말자. 또 우리는 말이 많고 입이 가벼운 자와 사귀지도 말자.


    [20절]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본문은,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서 부모 공경을 명하셨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에베소서 6:1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부모를 무시하고 욕하고 저주하고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며 큰 죄를 범하는 자이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어두움] 중에 꺼짐을 당할 것이다. ‘등불’은 번영과 형통, 곧 행복을 가리킨다. 제5계명의 말씀대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할 것이지만, 부모를 거역하고 저주하는 자는 그 행복을 빼앗길 것이다.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이다.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며, 부모를 저주하거나 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출애굽기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애굽기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또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고 그 책망을 듣지 않는 완악하고 술취하며 방탕한 사람을 성문 앞에 성읍의 장로들 앞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이라고 모세를 통해 신명기 21장에서 명령하셨다(신 21:18-21). 잠언 30:17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를 무시하거나 저주하여 불행해지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고 순종함으로 복 받기를 원한다.


    [21절]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처음에’라는 말은 그 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때를 가리킨다. ‘속히 잡은’이라는 원어(메보켈렛 ת)는 전통적 히브리어 본문에 쓰여진 대로는 ‘탐욕으로 얻은’(BDB)이라는 뜻이다. ‘처음에 탐욕으로 얻은 산업’이란, 처음부터 성실히 이룬 산업이 아니고 탐욕을 가지고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산업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을 보관하고 연구하고 필사(筆寫)하였던 전통적 히브리 서기관들(이들을 마소라 학자들이라고 부름)은 이 단어를 ‘성급히 얻은’이라는 말(메보헬렛 ת)로 읽으라고 제안하였다. 그것이 고대 역본들(LXX, Syr, Targ, Vg)의 본문의 뜻이다. 주요 영어성경들(KJV, NASB, NIV)과 한글개역성경도 그렇게 읽었다. ‘처음에 성급히 얻은 산업’이란, 처음부터 차근히 수고하며 이룬 산업이 아니고, 크게 수고하지 않고 우연하게, 쉽게 얻은 산업이라는 뜻이다.
    본문은, 처음부터 탐욕으로 얻은 산업 혹은 처음부터 우연히 쉽게 얻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작은 그가 무엇을 얻은 것 같았으나, 결말이 복이 되지 않다는 뜻이다. 본문의 뜻이 어느 쪽이든지 다 뜻이 통한다. 처음부터 탐욕으로 얻은, 불의하게 얻은 산업은 결말이 복되지 않을 것이다. 잠언 10:2,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잠언 13:11,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잠언 20:17, “속이고 취한 식물은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 입에 모래[자갈]가 가득하게 되리라.” 혹은, 우연히 쉽게 얻은 산업이라도 역시 결말이 복되지 않을 것이다. 땀 흘려 얻은 산업이라야 복되다. 그런 산업은 잘 보존되고 관리될 것이다.
    우리는 정당하게, 땀 흘리며 돈을 벌어야 한다. 또 우리는 무슨 일을 책임 맡기 전에 그 일에 대해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22절]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본문은,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말한다. 본문은 개인적 보복을 금한다. 예수께서도,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39, 44). 사도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교훈하였고(롬 12:17), 사도 베드로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교훈하였다(벧전 3:9).
    우리는 하나님만 기다리며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원수를 우리에게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만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악한 계획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로 이기게 하실 것이다. 신명기 32:3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보수(報酬)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교훈하였다(롬 12:19). 경건한 다니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체험한 자이었다(단 6:26-27).
    물론, 본문은 성도의 교제와 교회적 권징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교회적 권징과 절교(絶交)가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마 18:15-19). 사도 바울도, 악을 행한 자들을 교회에서 제명시키고, 사도적 교훈을 순종치 않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명하였다(고전 5:11-13; 살전 3:6, 14-15).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


    [23절]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
    본문은,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는 서로 다른 춧돌을 가리킨다. 그것은 속이는 저울에 사용된다. 한결 같지 않은 저울추와 속이는 저울은 불의와 부정직과 속임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악한 것이다.
    사람은 왜 불의하고 부정직하며 속이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적, 세상적 욕심에서 나오고 또 미움과 악한 마음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과 미움 때문에 악을 행하고 속인다.
    하나님의 명하시는 바는 의와 정직함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신 6:25).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에게 의로운 삶을 원하신다.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사람은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이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공의롭고 진실해야 한다. 특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해야 한다. 그는 자기 이해관계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로마서 6:13,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모든 불의와 불법, 부정직과 거짓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공의롭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4절]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본문은,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걸음은 사람의 행위와 삶을 가리킨다. 사람의 걸음이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는 말은 사람의 행위와 삶이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와 간섭과 도우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라고 말한다. ‘자기의 길’은 자신의 현재의 삶의 과정과 미래의 과정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람은 특히 자신의 앞길, 자신의 미래가 평안할지, 잘되고 형통할지, 아니면 고통과 고난이 있을지, 재앙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잠언 16:1은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말한다.
    야곱은 자기 아내들 곧 외삼촌 라반의 딸들에게,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하였다(창 31:6-7).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애굽에 팔았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제들과 친족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며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와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다고 말하였다(창 45:3-8).
    에스더서에 보면, 파사 왕 아하수에로의 가장 높은 신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다 민족을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살리시고 하만을 죽게 하셨다.
    우리의 미래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고 그의 계명만 순종하자.


    [25절]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본문은,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거룩하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 무엇을 서원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살피고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잠언 29:20은,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고 말하였고, 잠언 15:28은,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서원 혹은 서약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 성경은 자신에게 해로운 서원이라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시편 15:4,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전도서 5:4-6,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 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지 못하였다. 그 일을 인해 이스라엘 회중은 족장들을 원망하기도 하였다(수 9:14-15, 18). 사사 입다는 암몬 전쟁에서 평안히 돌아올 때 그의 집 문에서 나와 그를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약한 대로 자기 외동딸을 번제로 드렸다(삿 11:31-35).
    우리는 평소에 말할 때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특히 서원할 때 성급히 하지 말고 신중히 해야 한다. 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26절]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
    본문은,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 왕의 직무를 잘 행하는 왕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와 선을 실천한다. 그는 악한 자들을 키질하고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린다. ‘키질한다’는 말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타작하는 바퀴로 곡식 위에 굴리는 것도 곡식 껍질을 부수고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는 과정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왕은 악인의 악함을 드러내어 응징하고 의인들의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킨다.
    세속 국가는 의와 선이 시행됨으로 견고해진다. 의는 나라를 견고케 하고 영화롭게 한다.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잠언 14: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또 의의 내용이 사랑이므로, 선과 인자함의 실천도 나라를 견고하게 만든다. 잠언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잠언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그러므로 악이 제거될 때 왕국이 평안하고 견고해진다. 잠언 25:5,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모습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불의와 미움이 있을 때 분쟁하지만, 의와 사랑이 있을 때 견고하게 세워질 것이다. 지혜로운 왕이 나라 안에서 악인들을 분리시키고 제거하듯이, 지혜로운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 안에서 회개치 않는 악인들을 성실히 권면하고 책망하며 징벌한다. 그럴 때 교회는 든든히 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로운 왕이시다. 그는 악인을 제하시고 의로 나라를 굳게 세우신다. 우리는 악인이 되지 말고 의인으로만 살자.


    [27절]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본문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고 말한다. ‘영혼’이라는 원어(네솨마 ה)는 ‘호흡’이라는 뜻이며 본문에서는 생명의 호흡인 ‘영’을 가리켰다(BDB, KJV, NASB). 사람의 영은 하나님의 등불이다. ‘등불’은 지식을 가리킨다. 그것은 마음의 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마태복음 6:23,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에베소서 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사람의 영은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핀다. 고린도전서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육신의 눈은 사람의 겉만 볼 수 있다. 눈이 좋으면 잘 볼 수 있고 눈이 나쁘면 잘 못 본다. 그러나 사람의 깊은 마음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사람의 깊은 생각과 감정과 의향은 그의 가족이나 친구라도 잘 알 수 없다. 오직 자신의 영이 그것을 살핀다.
    사람은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 영의 눈이 어두워지고 회개하면 밝아진다. 사도행전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요한계시록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우리는 죄를 철저히 회개하여 영의 눈의 시력이 밝기를 기도하자. 또 우리가 바른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 속을 살피자. 



    [28절]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본문은, “왕은 인자(仁慈)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位)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고 말한다. 왕은 백성의 인도자와 치리자로서 백성을 잘 인도하고 다스리는 것이 그 임무이다. 또 부수적으로 그는 외세의 침입을 잘 막아야 한다.
    인자(仁慈, 케세드 ד)는 남에게 선을 베풀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특히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또 진리 혹은 진실(에메스 ת)은 겉과 속이 같고 언행(言行)이 일치하고 시종일관하고 믿을 만한 것을 가리킨다.
    인자와 진리는 왕을 보호한다. 또 왕위는 인자함으로 견고케 된다. 왜냐하면 백성이 그 왕을 알고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그를 복종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에게 필요한 덕은 인자와 진실이다. 잠언 16:12는,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의 계명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약하면 사랑이므로(마 22:36-39), 결국 같은 뜻이다.
    이상적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다 교회의 치리자된 목사와 장로들도, 그리고 모든 성도도 그러해야 한다. 잠언 3:3-4,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타락한 이스라엘 사회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었고 거짓과 강포가 충만하였다(호 4: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를 요구하셨다(호 6:6; 미 6: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다(엡 5:9).
    우리 모든 성도는 인자(仁慈)와 진실의 덕을 가져야 한다. 특히 교회의 치리자들인 목사와 장로들과 교회직분자들은 이 덕을 가져야 한다.


    [29절]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
    본문은,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고 말한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 그의 체력과 근력이다. 젊은 병사들의 체력은 그 나라의 군사력의 중요한 요소이다. 또 젊은 운동선수들의 체력는 그 나라의 자랑이다. 그래서 올림픽 경기는 국가간의 친선도모를 위한 의미도 있지만, 어떤 경기에서 이길 때 그 나라 전체의 기쁨과 자랑이 되며 영광이 된다. 축구, 농구, 야구, 마라톤, 태권도, 역도 등이 다 그러하다. 또 건설현장 등에서 볼 수 있는 젊은 노동자들의 체력은 그들의 영광이다. 사람은 체력이 있어야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또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
    본문은 또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라고 말한다. 흰 머리털은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표시이다. 그것은 인생의 고난을 많이 경험했다는 인생 경륜의 표시이다. 그것은 또 영광의 천국에 가까웠다는 표이기도 하다. 노인들의 백발은 결코 검은 물을 들여 감출 만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할 것이 아니다. 백발은 노인의 영광이다. 잠언 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장수(長壽)는 하나님의 복 중의 하나이다. 신명기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잠언 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장수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며, 백발은 장수에 수반되는 영광스러운 표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선한 일 많이 할 수 있도록 건강하고 튼튼하게 키우자. 또 우리는 노년기의 백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기뻐하자.


    [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본문은,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고 말한다. 엄한 징계와 체벌은 효과가 있다. 사람을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한다.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간다. 그러므로 잠언 22:15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말하였다. 어린아이라도 타고난 죄성과 미련함이 있기 때문에,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 그것을 멀리 쫓아낼 것이다. 또 잠언 23:13-14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 징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의 매는 자녀 교육에 필요하고 유익하다. 엄한 매는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은 사람의 구원과 성화(聖化)에 매우 유익하다. 사람은 징계의 채찍을 통하여 성화를 이루어 나간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간증하였고(시 119:67), 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19:71).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교훈하기를,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연단을 받은]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하였다(히 12:10-11).
    우리는 바른 자녀교육에서 징계의 매를 무시하지 말자. 징계의 매는 사람에게 유익하여 그에게서 악을 없이할 것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지 말고 또 낙심하지도 말고, 그것을 달게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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