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막 14:32-42) [사순절 시리즈]
  • 2013.09.04 07:50:59
  • 오늘 본문을 가지고 지난 주일에는 삽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가지고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사실은 오늘 본문에 십자가의 죽음에 직면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두렵고 공포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이 좀 의연한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드렸으면 얼마나 멋졌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33, 34절에 보면 예수님이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심지어 36절에 보니까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까지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셨는가? 혹시 예수님은 겁쟁이가 아니었던가? 어떻게 저런 유약한 모습을 해 가지고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인류 역사상에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세조 때에 사육신들의 죽음을 두고 당당한 선비의 죽음으로 칭송합니다. 구차하게 악에 굴복하여 사느니 당당하게 죽음으로 선비다움을 보이겠다.... 뭐 이런 마음으로 죽음을 택하였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장수가 구차하게 사느니 의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일본의 무인정신은 결투에서 졌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비교해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심지어 구차해보이기까지 합니다. 왜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그토록 슬퍼하며,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스스로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장차 우리가 하나님 없이, 죄인된 모습으로 죽게 될 미래의 모습을 재현한 것으로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죽음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은 외로운 것입니다. 그 죽음은 두려운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죽음은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너무나 두려웠기에 예수님조차도 피할 수 없는 공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피력하셨고,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절규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피참하게, 슬퍼하며, 두려워하며, 심지어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며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저와 여러분은 아주 우아하게, 평온하게,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여 하나님께도 영광을 올려드리고, 우리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천국의 소망을 전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 꼭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을 잘 압니다.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었어요.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하지 말라 그러면 괜히 궁금해져요. 하나님이 축복의 에덴동산에 철철이 과일들을 주셨어요. 영원토록 먹어도 모자람이 없는 그런 풍성함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에덴동산의 과일 중에서 선악과를 먹을 게 뭡니까? 그것은 마귀가 유혹해서 그런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허황된 상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먹음직, 보암직, 탐스럽게.... 이렇게 보이도록 하고서는 도둑질, 사기, 음란, 방탕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단절이고, 멸망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단절당하고, 가족으로부터, 배우자로부터 단절당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평생토록 저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마귀가 주는 유혹을 피하든지, 피할 수 없으면 이겨야 합니다. 이처럼 죄,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죄는 관계를 단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길은 외로운 법입니다. 그 최고의 외로움이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은 죽는 순간이 가장 외로운 것입니다. 그 외로움이 두려움이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시편 48편 14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죽을 때까지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죽는 그 순간, 죽음 그 후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까지 인도하신다는 귀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닌다고 할찌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우리가 세상의 정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야 가는 길이기에 그 길은 외롭습니다. 혼자 가기에는 더 외로운 것입니다. 거기다가 악령들이 괴롭힙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떠날 때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지팡이가 되어서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안전하게 통과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할렐루야....!  

    2. 죄에 대한 심판이 죽음을 공포스럽게 합니다. 히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이후는 심판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을 보면 참으로 용감무쌍합니다. 그들에게는 마치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모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의 모습을 보면 공포에 젖어들어 오줌을 질질 싸면서 끌려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받게 될 그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를 기억합니다. 해가 져서 집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포근하고 따뜻한 집과 그리운 어머니의 품이 있습니다. 맛있는 밥이 있습니다. 얼마나 집이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집에 들어가기가 싫은 때가 있습니다.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성적표를 내 주는데 거기는 성적이 수, 우 , 미, 양, 가.... 이렇게 표기되어 져 있습니다. 그런데 성적이 양, 양, 양, 양, 가, 가, 가.... 이렇게 나쁘니까 집에 들어가면 큰일입니다. 그래서 그 즐거운 방학이 되었지만 냉큼 집으로 들어가기가 찜찜한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죄인인 상태에서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됩니다. 심판을 받아야 하니까.... 그러니 죽기 전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신학적인 것도 아니고,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서 여러 모습으로 죽는 것을 보면서 죽음이 어느 정도 임박한 순간에는 육의 세계도 보이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도 희미하게나마 눈을 뜨고 보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아직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서 본 적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선명하게 경험하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찰나적이고... 잠간 경험하는 동안에 육체의 옷을 벗고 영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금방 숨을 거두는 고인을 바라보면서 유가족들이 간접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눈을 감으면서 저승사자가 보인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시커먼 그림자가 자기를 향해 다가온다고 하면서 공포에 떱니다. 그러나 또 어떤 분들은 빛이 보인다고 합니다. 제가 마산에서 교회를 담임할 때 교회 영수님이시고, 장로님이셨던 분의 주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얼굴이 죽고 난 뒤에 얼마나 밝고 고운지 몰라요. 손자가 교회 지휘자였는데 할아버지가 눈을 감으면서 몇 번씩이나 천사들이 당신의 손을 잡으려고 한다.... 이런 말씀을 하시다가 눈을 감았다고 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또 울산의 어떤 권사님은 토요일 저녁 늦게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담임목사님과 교구담당인 저에게 방문심방을 부탁하셨어요. 주일 준비로 바쁘지만 꼭 그렇게 해달라고 해서 가니까 자녀들과 손자들이 다 와 있었어요. 예배를 드리고 맛있는 저녁을 교역자들에게 대접해드리고...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 3시간 후에 그 권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전달을 받았습니다. 다시 가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모처럼 식구들이 다 모여 떠들고 놀고 있을 때 이 할머니는 머리를 감고 속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잠자리에 드셨는데 자녀들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인사를 하러 방에 들어갔는데 가서 보니까 운명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평생에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믿음이 없었던 막내 아들까지도 어머니가 하나님 품에 안겼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사람들마다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모습이 두 가지입니다. 그 한 가지 모습은 두려워 떠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가지 모습은 너무나도 죽음을 평화롭게... 얼굴은 광채가 나고, 마음은 평온해서 마치 참 좋은 세계로 가셨구나... 하는 확신들만한 그런 모습으로 죽음을 맞아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이와 같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왜요...? 우리 주님이 이미 끔찍한 죽으로 우리를 대신하셨기에 우리는 심판의 죽음이 아니라, 축복된 죽음을 맞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인생입니까? 잘 사는 것도 종요한 것이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수 믿어 심판의 죽음을 떨져버리고 영생복락 축복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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