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 없는 감사(하박국 3:17-19)
  • 조회 수: 171, 2013.07.14 16:59:01
  • 경기도 안양에 <삼덕제지>라는 종이공장이 있습니다. 42년 전에 세워져서 지금까지 학생들 교과서나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하는 크리넥스등 많은 종이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회사의 [전재준(全在俊)]회장은 80세의 노인입니다. 그런데 조만간에 종이공장이 문을 닫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놀랍습니다. 부도가 난 것도 아닙니다.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전재준 회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61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주변이 한적했는데 그동안 사람들이 모여들며 덩달아 땅값도 올라갔다. 내가 땀 흘려 번 돈도 아니고 그동안 시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가족들과 상의해 흔쾌히 기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종이 공장에서 나오는 먼지와 진동 때문에 고생하신 안양 시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제 공장을 닫으면서 시민 여러분께 이 땅을 드립니다.”하면서 자신의 회사 부지 4천3백64평, 시가 3백억 원 상당의 땅을 그저께 안양 시에 헌납했습니다. 헌납의 뜻을 밝히면서 활짝 웃는 80노인네의 얼굴 속에 진실한 감사의 자세가 있었고 한 없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애 속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땅값만 300억에다가 거기에다 빌딩을 세우면 얼마가 될까? 아깝다. 제 정신이냐!”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우리는 조건 없이 베푸는 감사의 정신이 부족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불교는 초상집과 같고, 유교는 제삿집과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과 같다.”참 그럴듯하게 비교한것 같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활자세는 잔치하는 자세여야 합니다. [윌리암 로우(William Law)]라고 하는 사람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요, 금식을 많이 한 사람도 아니요, 자선을 많이 베푼 사람도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정말 옳은 말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냐>, <누가 하나님께 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냐>할 때 그 기준은 <누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감사>와<기쁨>이라고 단어의 헬라어 어원은 같은 것입니다. 기쁨은 내적인 것이고, 감사는 외적인 것입니다. <기쁨>이란 그 내용이요, <감사>는 표현의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기쁨 없는 감사는 위선이며 외식이며, 수단과 처세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는 기쁨이 없는 세대입니다. 잃은 사람은 억울해서 기쁨이 없고, 얻은 사람은 더 얻지 못해서 기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적으면 모자라서 걱정, 많으면 지키느라 걱정, 이래저래 기쁨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지구촌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이 72가지가 있었고, 그 중에 절대 필요한 것은 18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생활조건에 필요한 것은 5백가지이며 절대 필요한 것은 50가지라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합니다. 필요한 것과 절대 필요한 것이 더 많아졌고, 실제로 더 많이 누리며 사는 현대인들입니다만 과연 60년 전에 누리던 행복지수보다 더 높아졌을까요? 아닙니다. 현대는 여전히 행복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원망하는 사람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꼭 자기한테 없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가진 것도 많은데 못 가진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가진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없는 것도 많지만 가진 것, 있는 것을 생각함으로 늘 감사가 넘칩니다. 비록 없어진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이미 누렸던 바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남아메리카 주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그 옆에는 얼음물과 같은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릅니다. 그 동네 아낙네들은 빨래 광주리를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구어 가지고 깨끗한 옷을 집으로 가져갈 수가 있답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부러워하면서 안내하던 멕시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곳 부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대답이“천만에요. 이곳 아낙네들은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땅에서 나는 것은 괜찮은데 빨래하기에 꼭 필요한 것이 나오지 않아서 불평이 많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필요한 그것이 무엇입니까”했더니“비누가 나오지 않아서 불평입니다.”하더랍니다. 부패한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은 끝없이 요구하고 만족을 모르며 감사를 모르는 삶인 듯싶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보다 불평이 더 있습니까? 죄가 가리어서 그렇습니다. 욕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의 자비를 기억하고 주신 복을 세어보면 감사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자]는 자신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몇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자이며, 둘째, 윗사람을 헐뜯는 자 곧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뒤에서는 욕하는 자, 셋째,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는 자, 넷째,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가장 싫어하는 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만사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믿는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하나님께 대한 인식이 결여된 사람에겐 매사에 불평과 비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왜?”라고 그 뜻을 묻는 부류와 “그 사람이 왜?”라는 감정적인 생각을 하는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이 말은 곧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사람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하박국 선지자]는 거듭되는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자세로 돌아서서 기도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가장 큰 불만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불만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불의를 그냥 두시느냐>하는 것과 두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사용하시느냐>하는 문제였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부릅니다. 아무튼 하박국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께 불평했고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지 믿음만이 최후승리를 보장한다는 대답을 주심으로 하박국을 이해시킵니다. 하나님의 결론적인 대답에 우리가 잘 아는 하박국 선지자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2장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이제 하박국은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는 감사로 기도를 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는 그 마음이 불만으로 가득 찼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얻을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당하는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변치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구체적인 감사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본문에 나오는<무화과나무>,<포도나무>,<감람나무>이 세 종류의 나무는 팔레스틴 지방에서 가장 쓸모 있고 가치 있는 과실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에 소출이 없다는 것은 황폐하고 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는 말은 더 절망적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농작물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 무엇보다 먼저 가축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양식도 부족한 마당에 짐승들을 돌 볼 수 있는 여력이 없습니다. 또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는 가축들을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로 하박국의 고백 속에 있는 과실이나 밭의 식물, 그리고 양과 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없다하더라도 여호와를 향한 구원의 소망만은 버리지 않겠다는 것과 그 구원으로 인해 감사한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놀라운 감사의 기도입니다.
    하박국의 감사를 결론지어봅시다. 한 마디로 <지금 내 생명이 끝난다할지라도 내가 구언 받은 것과 또한 구원 받을 것으로 인하여 나는 감사하노라> 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감사의 차원은 어디까지입니까? 과연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런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내 삶에 가장 귀하고 생명과도 같은 조건들이 내게서 사라진다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하박국의 감사가 있느냐 말입니다. 있으면 감사하고, 받아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나에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니 있는 것이 끝난다할지라도 감사하는 이<조건 없는 감사>를 드릴 수 있다면 귀한 마음이요, 귀한 신앙일 것입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다니시는<감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어떤 잘 믿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한번은 거리에 나가서 고기 한 근을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때마침 개 한 마리가 곁을 지나다가 고기를 물고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물끄러미 보기만 하면서“감사합니다.”하고 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이상해서 무엇이 감사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하시는 말씀이 “아 이 사람아, 고기는 잃어버렸으나 내 입맛까지 잃은 것은 아니잖아. 내 입맛은 그대로 있네.”하더랍니다. 맞는 얘기죠. 사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입맛이 없으면 별로 감사한 일이 못됩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이야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며,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고,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며,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그렇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할 수 있을 때 감사가 감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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