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족함을 감사하라(고후12:7-10)
  • 조회 수: 206, 2013.07.12 07:27:32
  •  우리는 매일 하루 3끼 식사를 합니다.  식사를 하다 보면 어떤 때에는 과식을 하고 후회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당히 먹어야 하는데 먹다가 보면 먹는 욕심이 앞서서  그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정도 이상의 음식을 먹게 됩니다.  그렇게 먹고나면 결국은 속이 불편하여 손해를 봅니다.  적당히 먹으려면 배가 조금 부른 듯한 상태에서 과감하게 유혹을 뿌리치고 수저를 놓으면 됩니다.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을 때 절제를 해야 사실은 우리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게 되면 결국은 비만증에 걸리게 됩니다.  건강을 지키려면 절제하고 좀 부족한 듯한 상태에서 멈추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기쁨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100% 완벽한 삶은 오히려 우리의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뭔가 부족한 것이 한 두 가지 정도는 있어야 사람은 그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게 됩니다.  거지는 자살하는 법이 없습니다.  목적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얻어서라도 먹고살아야겠다는 뚜렷한 삶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거지는 열심히 구걸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모든 면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갖추어진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다 갖추어진 것 같은데  매일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면 상대적으로 만족함도 없어집니다.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니까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상태에서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불안하게 됩니다.   할 일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정신적인 공허감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의 뚜렷한 목적이 사라집니다.  다 가지고 있으니 좋아보이는게 없습니다.  세상이 신기하게 느껴지지를 않습니다.  부러운 것이 없으니 삶에 대한 의욕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한 두 가지 정도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어야 영적으로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은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주 부유한 집에서 성장했고, 또 신앙이 좋은 가정에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빈곤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예쁘게 생기셨는지 젊을 때에는 저 처녀가 어느 남자와 결혼을 하느냐?  하는 것이 그 지역의 관심사가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피아노와 오르간을 다 다룰 줄 알고 그 연주솜씨 또한 아주 뛰어나신 분입니다.  교회반주를 30년 동안 지켜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노래는 얼마나 잘 부르는지 모릅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3시간 정도를 찬양과 노래를 해도 지치지 않을 만큼 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거기다가 남편도 의사입니다.  이 권사님은 부족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뜻한 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교만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권사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녀들입니다.  아들만 2명이 있는데 이 아들이 몹시 방황을 합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 아들은 부모의 뜻을 거역합니다.  그리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합니다.  서울대, 외대, 한신대, 미국유학을 가서 거기서도 인류학, 신학, 한의학,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공부를 하기보다는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이 권사님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도 이 아들만큼은 권사님의 뜻대로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또 하나는 자신의 건강이었습니다.  그렇게도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던 그 몸의 아름다움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60이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병이 찾아든 것입니다.  류마치스, 류마치스가 사실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밤마다 찾아오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하는 병입니다.  걷지를 못합니다.  앉기는 앉는데 혼자서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남들이 부축을 해주어야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권사님에게 모든 면에 있어서 두루 다 축복을 주셨는데 아들과 자신의 건강의 축복은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영적 축복이라는 또 다른 선물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권사님은 젊었을 때는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웬만한 사람은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교회에서도 어떤 의견이 나오면 매사 부정적으로 말을 하면서 반대의 입장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깨우치시고, 또 그 권사님의 건강을 통해서 깨우치셨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 그 기도제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과 자신의 병을 통해서 모난 성격이 다듬어 지게 되었습니다.   교만한 태도가 고개를 숙이는 겸손으로 바뀌어 가게 됩니다.   자신이 우습게 보았던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앉았다가 일어나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갖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에게 영적인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신이 좋아해서 불렀던 찬양이 이제는 가사 한절 한절이 마치 자신의 영적인 상황을 표현해 주는 것 같아 찬양을 드리면서 남다른 은혜를 받으십니다.  어느 해, 수련회에 참석하신 이분은 자신의 뜻대로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교만을 깨우치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라]라는 찬양을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류마치스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그 병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영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리 간구하고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재물의 축복은 해주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남편 복과 아내 복은 주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자식복 만은 주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사업의 복이 없어서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는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축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분명 하나님께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기도의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누구보다도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통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가문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 열심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만큼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학문은 당대의 최고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어에 능통하여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나 자랑거리가 많습니까?  
     그런데 그렇게도 자랑거리가 많은 이 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강의 문제였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건강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그 시원치 않는 몸을 가지고도 지구를 2바퀴 정도 돌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셨다면 아마도 바울은 더욱 더 많은 일을 했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정말 바울에게 건강이 주어졌더라면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 앞에 나가서 눈물로써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생명을 15년 연장한다]하고 선언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15년을 더 살았기 때문에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기록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에게 병이 생기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아주 헌신적으로 일하던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해 주신 후에 더욱 교만해 졌다고 했습니다. 역대하 32장 25절에는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연장을 받은 후에 오히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더 교만해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히스기야에게는 므낫세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므낫세는 12살 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15년의 생명의 연장을 받았으니까 만약에 히스기야가 생명의 연장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다면 므낫세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라고 하는 히스기야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 중에서도 아주 악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는 자기 아버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다 무너뜨리고 또 다시 이스라엘에 바알의 신당을 세우고 이방신을 섬기도록 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히스기야가 생명의 연장을 받은 결과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는 축복을 받지만 완벽한 하나님의 축복이 오히려 히스기야를 병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은 한 두 가지 정도는 늘 부족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기도제목을 갖고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정한 축복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할 제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더 넓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늘 깨어있는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나의 은혜의 잔을 아구까지 꽉 채워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기보다는 나의 은혜의 잔을 적당하게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한 기도를 드리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바울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7절에는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사단의 가시가 있어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늘 괴롭다는 말입니다.  늘 자신의 생활을 힘들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늘 괴로워한다는 말입니다.  가시는 찌른다는 것이니, 가시는 괴로움을 주는 것이니, 바울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가시]라는 표현을 써서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겠습니까?  
     이 사단의 가시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주석학자들은 이 사단의 가시는 [안질]이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질]이라는 눈병 때문에 바울이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냐?  하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눈병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15절에 보면 바울은 눈병 때문에 편지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쓸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부탁했습니다.  글씨를 잘 볼 수가 없으니까 글씨를 아주 크게 써서 편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안질 때문에 너무도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나에게 빼어주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안질 때문에 너무도 고생을 하고 있는 바울을 보면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눈이라도 빼어 주고 싶을 만큼 바울은 안타까운 상황에서 고생을 한 것입니다.  

     또 사단의 가시라고 하는 것을 어떤 학자는 [간질병]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 14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시험을 받을 만한 병을 바울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큰 질병이 있어서 교인들이 시험을 들 정도라고 한다면 그 병이 무엇이겠습니까?  학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바울은 간질병 환자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도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죄와 벌]이라는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지은 작품인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글만 쓰면 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글을 써야 할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설교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만약에 설교를 하다가 강단에 쓰러지는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병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시험이 될 만한 병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눈병이 되었든 혹은 간질병이 되었든 심각한 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너무도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8절에는 [나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기를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작정을 하고 금식하면서 생명을 건 기도를 세 번씩이나 드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를 해도 바울의 질병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삼층천에도 올라가는 하나님의 신비한 신앙경험을 한 바울이었지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  왜 그랬을까요?  왜 바울과 같이 그렇게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자신의 질병이 물러가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었을까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에게 있는 질병이 없어졌다면 아마도 바울은 더 많은 휼륭한 일들을 하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9절에 보니까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말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어째서 지금 현재의 은혜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더 많은 은혜를 구하는가?  그런 말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께 더 기도하지 않느냐!  네게 부족함을 남겨 둔 것은 바로 네가 교만해 지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네가 어떻게 알지 못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실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응답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을 느끼도록 축복하십니다.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늘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내가 평소에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것만큼은 꼭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렇게도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에 응답하지 않는 경우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교만해질까 영적인 교만이 싹틀까봐 하나님께서 부족함을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동안에는 우리 하나님께로 받은 것만을 가지고 감사를 드렸습니다만은 2000년의 맥추감사주일에 우리는 부족함을 남겨두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이 시간 나에게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000년 맞이하는 맥추감사주일에 /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의 마음을 광주리에 담아 / 이 시간 제단에 드립니다 / 예수님을 세상에 주셔서 / 모든 만민들이 기쁨으로 기뻐 뛰게 하시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작은 제자가 되어 / 살아가게 하심을 주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 내 옆에 가족을 주시고 / 내 옆에 함께 사는 교인을 주시고/ 내 옆에 민족을 주시고 / 내 옆에 인류를 주셨음을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 오늘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  주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드리게 하옵소서. / 또 아직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부족함까지도 / 감사드릴 수 있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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