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는 축복의 기초(성경: 사38:9-20)
  • 조회 수: 479, 2013.10.26 18:44:04
  • 고난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기독교 신앙에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이 사실은 모든 세대마다 그러했습니다. 많은 인생들이 고난을 만나면 때로 하나님께 "왜 내게?"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우리들은 기쁜 일을 맞을 때뿐만 아니라 슬픈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슬픈 일을 통해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들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우리들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사야 38장에 나오는 유다 왕 히스기야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왕의 체면도 버리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매달렸던 때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사 38장 3절). 그는 그의 기도를 듣고 오직 그를 위해 하늘의 해를 붙잡으셨던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사 38장 8절). 그래서 그는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히스기야의 감사하는 장면을 통해서 감사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38장 1절에서 히스기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인생은 죽음을 망각하고 있으나 죽음은 인간을 잊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최대의 비극과 슬픔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어서 10년 동안 히스기야는 열심히 활약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는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처음에 히스기야는 자기의 처지를 처절히 한탄합니다. 이사야 38장 11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내가 다시는, 다시는'하고 세 번이나 반복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절과 13절에도 "나의 명이 조석 간에 마치리로다"하고 두 번이나 강조하며 인생의 한창 때에 죽게 된 것을 서러워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히스기야의 탄식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한 가닥의 희망에 자기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사야 38장 14절에서 그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기도는 우리의 망가져 버린 상태를 수선할 가장 좋은 도구입니다. 기도는 우주를 움직이는 무진장한 힘에 우리들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살아날 마지막 방법으로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사 38장 2절). 그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눈이 희미해지고 지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이사야 38장 15절에 보면 그는 서원기도까지 했습니다.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겸손히 행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듭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반응하셨습니다. 이사야 38장 6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반응하여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덤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약속의 신실함을 나타내시기 위해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는 증거까지 주셨습니다. 덤까지 주시는 하나님! 증거까지 주시는 하나님! 참으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참으로 하나님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감사가 불타올랐습니다. 이사야 38장 17절에서 20절까지는 병이 낫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표현한 글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몇 가지 감사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17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이 고백은 참으로 큰 깨달음입니다. 즉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병을 통해서 인간의 혈액이 강해지듯이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심령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강하게 만드시려 때로 고통을 지나게 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불행하게만 생각합니다. 불행은 행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자꾸만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피할수록 더 빨리 다가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차라리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어서 오라"고 담담히 맞이하는 편이 훨씬 덜 상처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결국 고통의 뚜껑이 열리면 고통 안엔 진실도 숨어 있고, 자유도 숨어 있고, 삶의 지혜도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자유라는, 진실이라는, 삶의 지혜라는 열매를 함께 준비해 두십니다. 어떤 분의 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의 꽃나무가 있다. 잎은 애벌레에게 뜯긴다. ' 꿀은 벌에게 뺏긴다.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한다. 얼핏 보기에 이 꽃나무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러나 사실상 이 꽃나무는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선한 열매를 주고자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어려운 과정도 허락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에게 닥친 크나 큰 고통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으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히스기야의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영어의 '감사한다'는 'thank'라는 말은 원래 '생각한다'는 'think'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사실상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지낼 거처가 있다는 것, 또한 우리들이 정상적인 두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특별히 우리들은 자기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선의 모습임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겁쟁이로 소문난 토끼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그 중의 한 토끼가 말했습니다. "바람에 굴러가는 갈잎이나 떨어지는 도토리에도 놀라는 우리 같은 짐승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죽자." 어느 날 산에 있는 모든 토끼들이 호수에서 집단자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막 호수로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호숫가에 있었던 모든 개구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놀라 토끼들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하고 토끼들은 자기들이 전혀 자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자기의 부족한 모습에서도 그 모습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허락된 최선의 것임을 깨닫고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감사는 오직 산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절과 19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죽은 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살았으나 감사를 모르는 자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인생살이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들의 이마에는 땀이 넘쳐야 합니다. 게다가 급격히 변화하는 현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기도도, 감사도, 사랑도, 심지어는 하늘도 잊어버릴 때가 가끔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어려움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바쁜 현실마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며 가끔 공동묘지를 지나치게 됩니다. 그때 그들은 마음 속 깊은데서 감사를 하게 됩니다. 그래도 "아직 나는 살아있구나"하는 것을 가장 절실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살아 있다. 이 사실에 감격을 느끼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자는 감사를 알고 죽은 자는 감사를 모른다는 사실을 인생들은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할 것 입니다.

     

    셋째, 우리들은 감사하는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20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선생은 학생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는 성도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들은 서로 서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 하면 천성적으로 인간은 감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익스피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바람이 눈보라 섞어 치니 사정도 없지만 인생의 불감사보다 모질지는 않구나." 우리들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인생의 모습은 마치 들꽃과 같아 가만히 놔두면 그들의 마음속에 배은망덕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것은 장미와 같아서 물도 주고, 정성스럽게 기르고, 사랑하고,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감사하는 습성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키워야 할 것입니다.


    넷째, 인생들은 순간적인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원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20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는 감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감사하며 일생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인생들에게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보다는 원망을 더 많이 드린 지나간 부끄러운 세월을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겨야 하겠습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서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말했는데 이제 인생들은 "내 사전에서는 원망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순간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추수 감사절에만 하나님께 그들의 감사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감사절에만 감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때로 고통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고통은 인생들의 깨달음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깨뜨리는 도구입니다. 고통이란 인생들의 병든 자아를 고치는 의사의 쓴잔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의사,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그 잔을 마시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이것을 나에게 주십니까? 감사합니다. 주님! 이 쓴잔을 나에게 허락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가 없는 심령은 채울 길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심령은 돈이 있어도 불평이고 돈이 없어도 불평입니다. 그 심령은 관심을 기울여 주어도 불평이고 관심이 없어도 불평입니다. 우리들은 감사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물이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됩니다. 똑같은 사건 속에서 감사가 없는 심령은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나 감사가 있는 심령은 기쁨을 발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감사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환경이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를 드림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지나간 삶을 회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은혜를 깨닫고 첫 열매를 드림으로, 물질과 시간을 드림으로, 그리고 온 몸 전체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산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빌4:18-9 그것은 아름다운 향기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입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 가운데서, 그 분의 풍성하심을 따라 여러분에게 필요하신 것을 모두 채워주실 것입니다.

     

    감사는 선물이요, 축복입니다(고후9:5). 감사는 신앙생활의 최상의 향기입니다. 감사는 윤택함을 넘치게 합니다. 감사는 나눔이며, 감사는 하나님께 향기요, 복된 삶을 가져옵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생각은 꽃밭과 같고, 불평하는 마음과 생각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에 따라 감사의 샘이 될 수도 있고. 원망의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사흘만이라도 보기를 원했는데, 우리는 사흘이 아니라 평생을 눈뜨고 사는데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가 없는 행복은 위선입니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인데, 그 행복은 감사의 표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부요는 인간을 부패시키고, 감사가 없는 평안은 인간을 천박하게 만듭니다. 감사가 없는 고난은 인생을 삭막하게 하고, 감사가 없는 행복은 위선입니다.

     

    감사한 만큼 여유 있고 따뜻합니다. 감사는 계절도 시간도 없습니다. 감사는 어느 곳에서든 캐낼 수 있는 마음 따뜻한 선물입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에서든 감사를 캐어내면 감사가 되고 불평을 캐어내면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해석입니다. 부족하여도 감사를 잉태한 자는 감사를 낳고 풍족하여도 불평을 잉태한 자는 불평을 낳습니다.

     

    감사는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고 믿음의 크기입니다. 소유에 비례하는 감사는 소유에 비례한 불평을 낳고 믿음의 감사는 조건에 매이지 않아 세상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풍요롭게 합니다. 감사는 은혜를 아는 자의 마음의 열매이며 섭리를 수용하는 자의 사유의 방식입니다. 감사한 만큼 삶이 여유 있고 따뜻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만 하며 사는 삶 되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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