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요1: 1∼8)
  • 조회 수: 805, 2013.06.10 12:24:14
  • 지난 주일부터『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여러분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렸다.  그것은 먼저『요한복음』을 한번 정독을 하시고, 또 그 주일에 해당하는 말씀을 미리 읽고 묵상하시라는 부탁이었다.  여러분, 그렇게 하셨는가? 『요한복음』을 정독했는가? 『요한복음』은 모두 21장까지 있는데, 한 번 정독해서 부족하신 분들은 두 번, 세 번 정독을 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주일마다 교회에 오실 때는 그 주일에 해당하는 본문 말씀을 다시 읽고 묵상하시며, '오늘은 무슨 말씀을 주실까?' 이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시면 감사하겠다.   

      제가 이렇게 부탁을 드리면, 그대로 순종해서 실천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 분들은 아예 안들은 척하거나 듣고도 잊어버리는 분들도 있다.  겉으로는 잘 듣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듣지 않는 교인들이 있다.  그래서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켐벨 모건(Campbell Morgan)이라는 목사님은 은퇴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는 자신의 평생의 목회를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설교하기 가장 힘든 회중은 잘 듣는 것 같지만 신앙생활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회중이다" 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것은 바로 형식화된 교인과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는 교인, 또는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변화하려는 의지도 없고, 귀로만 설교를 들었지, 어떤 삶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 교인들이 설교하기 가장 힘든 교인이라는 말이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교인들이 얼마나 자기 설교를 잘 듣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다음주일에는 시편 151편을 모두 읽고 오라"고 숙제를 내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주일이 돌아와서 교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여러분, 시편 151편을 읽고 오셨습니까?" 하니까 모두 "예, 읽었습니다" 라고 대답을 한다.  "내용이 어떻더냐?"고 물어보니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참 좋더라"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다.  여러분!  시편 151편이 있나?  없다.  시편은 모두 150편 밖에 없는데, 시편 151편을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사람들이다.  목사님이 읽으라고 하니까 읽을 시간은 없고, 안 읽었다고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고… 그래서 그들은 "예, 읽었습니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말씀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과 조명하심 가운데 읽혀지고 들려질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또 성경으로만 해석되어지고, 성경 속에서 해답이 주어지는 것이다.  구약 이사야 34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하나님의 말씀, 성경책은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짝을 이루고 복음서와 복음서가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풀 때만이 가장 정확하며, 또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본문으로 가보겠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요한복음』을 기록한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에 나타나있다.  특별히 20장 31절에 보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고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이『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첫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리고 둘째는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다. 
       그러므로『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하는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의 용법 가운데 특별히 "나는 … 이다"(        )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말이『요한복음』에 많이 나온다.  이 말이 헬라 원어로『에고 에이미(        )』라고 하는데, 『        』라는 말은 영어로 말하면 「I am …」이라는 뜻이다.  즉「나는 누구누구다」, 혹은「나는 무엇 무엇이다」라는 말이『에고 에이미(        )』이다. 『요한복음』에 『에고 에이미(        )』라는 표현이 모두 몇 번이나 나오느냐 하면, 일곱 번 나온다.  ① 6장 35절에 보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② 8장 12절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고, ③ 세 번째로 10장 7절에 보면 "나는 양 우리의 문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④ 네 번째 역시 10장 11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하셨고, ⑤ 다섯 번째로 11장 25절 이하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고, ⑥ 14장 6절에서는 유명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고, ⑦ 마지막 일곱 번째로 15장 1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에고 에이미(        )』━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낼 때『에고 에이미(        )』라는 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요한은 예수님이야 말로 육신을 입고 오신 역사적인 인물이신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고 하고, 헬라 사람들은 로고스(     )라고 하고, 이방 사람들은 주(主)라고 하고,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 모두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요한복음』의 서두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언하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 5)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어떤 단어인지 아는가?  그것은「생명」이라는 말과「사랑」이라는 말, 그리고「빛」이라는 낱말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요한복음』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사랑」이라는 단어인데,   이「사랑」은 사도 요한의 애용어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말은『요한복음』에 모두 60번이나 쓰여져 있다.  그 다음에 많이 쓰여진 말이「생명」이라는 낱말인데, 54회나 쓰여졌다.  그리고「빛」이라는 단어도 스물 세 번(23회) 정도 쓰여지고 있다. 「사랑」「생명」「빛」━ 이 세 단어가『요한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이 세 단어가 모두 '엘(L)'로 시작하는 단어입니다. 「생명」은 영어로 'Life'라고 하고,「사랑」은 'Love'라고 한다.  또「빛」은 무엇인가?  예,「빛」을 'Light' 라고 한다.  이렇게 모두 '엘(L)'자로 시작한다고 해서「생명」과「사랑」과「빛」을 가리켜 '요한복음의 주제  3Ls(three Ls)'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다.   
       예수님을「생명」이라고 할 때는 그가 창조자요, 생명의 부여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을「사랑」이라고 할 때는 그가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뜻이요, 예수님을「빛」이라고 할 때는 그가 계시자요, 또한 심판자이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세 단어「생명」과「사랑」과「빛」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구주 되심을 증거하는 말들이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자(요 1:4∼8).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요 1:4∼8)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요한복음』은 신령한 의미에서「영적인 창세기」요「제2의 창세기」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되, 맨 먼저 빛을 지으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빛을 먼저 창조하시고, 이어 모든 식물, 동물 등 생물들이 창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은 빛이 있은 다음, 즉 빛에 의존하게끔 만들어졌다는 말씀이다.  빛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옛날에는 빛 하면 '태양 빛'이나 '달 빛', '별 빛' 등 하나의 빛밖에 생각하지 못했지마는 요즈음은 과학의 발달로 이런 자연의 빛 외에 '제 2의 빛'이라고 하는 전깃불이 있고, 또 '제 3의 빛'이라고 하는 원자력의 불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다 한 가지 불을 더 생각한다.  그것은 '제 4의 빛'이라고 하는 성령의 불입니다.  이 불은 '영적인 불'이요 '하나님의 불'이다.  이 성령의 불에 의해 교회가 탄생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성도들의 공동체 속에 보혜사가 오셔서 비로소 교회가 생겨났고, 능력을 얻게 되었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령강림절을 맞아 우리가 다시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은 '제 4의 불'이라고 하는 성령의 불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송의 가사처럼『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오늘 다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절의 의의는 이와 같은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마음의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가 누구신지 바로 알 수 있는 판단력과 영적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단순히 랍비로, 그들의 선생님 정도로 알았는데, 오순절 성령의 불이 임하고 나서 그들의 눈이 열리니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준이 변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요 구주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것이 성령강림절의 가치요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성령의 빛이 비치었다. 
       이제 다시『요한복음』으로 돌아가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빛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빛을 의미할 뿐 아니라, 좀더 나아가 생명력보다 한층 높은 차원인 말씀의 빛을 말하고 있다.  이 빛으로 영적인 생명(生命)이 싹트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 빛을 사람들의 생명이라, 말씀이라, 참 빛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빛이시다.  지난 주일에 저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이 말씀을 설명하면서 이「태초」라는 말은 헬라어로「만물의 본질」이라는 뜻도 있다고 말씀드렸다.  예수님이야 말로「만물의 본질」이 되시는 분, 생명의 근원, 아니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싹트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분은 빛이시다.  영원한 빛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빛이라는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주님을 영접했다"고 할 때, 그것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  그 말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인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 안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이야기요, 하늘나라를 보장받고 산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없으니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빛이 없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가 없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방황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었어도 왜 사는지 모르고, 공부를 많이 했어도 삶의 가치를 모르고 산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간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왜 세상에 악이 있고 죽음이 있고 저주가 있는지, 우리는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고 있다.  그냥 방황한다.  이리 가다가 부딪치면 저리로 가고, 저리 가다가 막히면 다시 돌아가고 … 인생의 목적이 없다.  방향이 없다.  빛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빛이시다.  예수님이 길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이시다.  예수님이야 말로 인생이 모든 의문과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다.  Jesus Christ is the Answer!  혹시 이 가운데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걱정하며 답답해하시는 분이 있는가?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의 실타래를 껴안고 몸부림치고 있는 분이 있나?  예수님께로 나아오라.  예수님이 해답이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고 영접하라.  에수님이 빛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방황하지 않는다.  길을 잃지 않는다.  죄의식과 저주의식에 매이지 않고 마음에 혼돈이 없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빛을 받게 되고 참된 복을 받게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이유요 목적이다.  이 생명과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매사에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란다.  이 생명력과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화(禍)가 복이 되고, 절망이 희망이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며, 저주가 축복이 되며, 지옥이 천국으로 변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은 빛 되신 주님,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으므로 약속된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원문(原文)대로 보면 이 말씀은 빛이 외부에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빛이 어두움 안에서 비추고 있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생명이 되시고 빛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죄악된 어두움의 세상 안에 들어오셨다는 말씀이다.  생명을 전해 주는 말씀의 빛이 구약시대에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추었고,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세상 속에서 계속 비추고 계신다. 그런데 사람들 중엔 아직도 이 생명의 빛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셔서 마음의 어두움, 영혼의 어두움, 육신의 그 어두움을 비추고 계신다.   
      이 생명의 빛을 거절하는 자는 계속적으로 죄악과 절망과 실패와 원망과 한숨과 지옥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면서 살 것이지만,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약속된 축복이 함께 하실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면「아멘」하시기 바란다.  이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의 약속을 바라본다.  이렇게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태산 준령이나 험한 산골짜기를 걸어간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걱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주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므로 길 잃어버릴 염려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가?  빛이 없으니 보이지 않는다.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낭떠러지인지, 언덕인지, 이 길이 잘못 가고 있는 길인지 바른 길인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초조하다. '혹시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길을 간다.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완행열차를 많이 타고 다녔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군용열차나 완행열차를 타려고 대합실에 기다리고 있을 때, 개찰을 하자마자 먼저 들어가려고 야단들이다.  줄을 바로 섰느니 안 섰느니 하면서 대합실에서부터 고함소리가 들리고, 개찰을 하면 다른 사람들을 밀치고 뛰어서 기차에 오른다.  왜 그런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용케 자리를 잡으면 다행이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면 서울까지 서서 가야 한다.  모두들 자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우등열차나 새마을호 열차를 타게 되면 한껏 여유가 생긴다.  천천히 여유 있게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조용한 시간에 차례대로 열차에 오른다.   
       여러분!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완행열차를 타는 사람들은 무식하고 가난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야단들이고, 특급열차나 새마을호를 타는 사람들은 교양 있고 신사들이기 때문에 질서를 지키며 여유 있게 행동하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새마을호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자기 표에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만, 완행열차에는 좌석이 지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서둘지 않으면 먼 거리를 서서 가야 하기 때문에 밀치고 뛰고 허둥대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말하자면 모두 좌석이 예약되어 있는 새마을호 승객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 볼 수 있고, 하늘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 즉 빛이 없고 캄캄한 어둠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다.  어디에 가면 좌석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갈 수 있는지, 아니 어느 차를 타야 하는지, 아예 목적지가 없기 때문에 방황할 수밖에 없다.  캄캄한 밤길을 걷는 사람 마냥 내일에 대한 불안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다툼이 있다.  미래가 확실하면 여유가 있고, 여행에 재미가 있지만, 미래가 불확실하고 목적지를 알지 못하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다툼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이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이다.  빛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이 말은 또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었느냐, 얻지 못하였느냐 이다.  이 생명의 빛을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사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주님 안에 사랑이 있고, 주님 안에 빛이 있음을 여러분의 삶으로서 증거하기 바란다.  항상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사람답게 여유 있게, 그리고 기쁘게, 찬송하면서 인생 길을 걸어가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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